소설리스트

흑막꿈나무에게 집착 받고 있습니다-7화 (7/14)

<07>

신이 난 주디스가 연극을 하는 천막 앞에 다다라서야 시에나를 놓아 주었다. 잠시 높은 곳의 공기를 마셨던 시에나가 어이가 없어 주디스를 바라보았다.

“주디스, 혹시 술 마셨어요?”

“어떻게 알았어요?!”

주디스가 뜨끔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너무 하이 텐션이라 혹시나 해서 물어봤죠.”

“주디스는 술을 마시나 안 마시나 항상 저 상태예요.”

에반이 옆에서 툭 내뱉자 주디스가 입을 삐죽였다.

“꼭 그런 건 아니거든? 오해하지 말아요, 시에나. 저 나름 프로 정신이 있는 사람이니까. 맥주 한 잔 가지고 취하지도 않는데 시에나를 봐서 너무 기뻐서 신이 나서 좀 흥분한 것뿐이에요.”

“한 잔 아니잖아.”

“어휴, 시에나. 저 꽉 막힌 남자 말 듣지 말고 이리 와요. 참, 안에 사람들 있으니까 놀라지 말구요.”

그러나 주디스의 경고가 무색하게 시에나는 안에 들어가자마자 꺅, 비명을 질렀다. 근육이 우락부락한 데다 키가 2m는 넘어 보이는 남자 서넛이 반쯤 옷을 벗은 채로 벌크 업을 하고 있다가 동시에 시에나를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 아저씨들 이 한겨울에 왜 주책맞게 벗고 있어! 우리 시에나 놀랐잖아요!”

“아 이번에 에반 대신 데려온 애야? 어디 보자, 진짜 예쁘게 생겼는데?”

“그렇지? 내가 지금까지 생각해 온 소녀 이미지에 딱이야. 이번엔 정말 최고의 이스테라 여신을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아.”

자신감에 찬 주디스의 얼굴에는 자신의 일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이 가득해 보였다. 시에나는 주디스가 처음으로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하하, 진짜 마음에 들었나 본데. 좋아. 그럼 지금부터 푸쉬 업 500개다!”

“무슨 500개야, 화장해 주고 바로 나갈 거니까 나가서 마지막 점검이나 해!”

“관객들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나의 몸을 보여 주려는 의도였는데….”

주디스의 말에 큰 덩치의 남자 한 명이 시무룩해져서 옷을 걸치고 천막 밖으로 나갔다.

“미안해요, 시에나. 놀랐죠? 덩치는 커도 다들 착한 사람들이에요. 여기 의자에 앉아 봐요.”

“네, 전 괜찮아요.”

저 남자들을 보니 왜 180이 넘어 보이는 에반이 소녀로 변장해야 했는지에 대해서 알 것 같았다. 저 남자들은 전부 2m에 가까워 보이는 키에 덩치도 크고 거칠게 생겼는데, 에반은 그래도 제법 늘씬한 데다 곱상한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불쌍한 에반이 다음 공연에서도 대타를 잘 구하길 바라며 시에나가 의자 위에 앉았다.

시에나를 낡고 작은 의자에 앉힌 주디스가 무릎을 꿇고 직접 그녀를 화장하기 시작했다. 천막을 쳤을 뿐, 차가운 맨바닥이라 무릎이 아프고 시릴 만한데도 주디스는 시에나를 화장하는 데에만 열중했다.

“어머, 피부가 좋네. 어려서 그런가, 어쩜 이렇게 쫀쫀하고 탱탱하담. 피부 화장은 기본만 하면 되겠어요. 어머, 어머, 눈꼬리 긴 것 좀 봐. 코는 또 이렇게 오똑하고! 입술은 아주 라인이 이렇게 싹- 빠져서 어휴, 도련님이 꼼짝 못 하실 만해. 어머, 시에나 눈 뜨면 안 돼요.”

주디스의 민망한 칭찬에 시에나의 뺨이 볼 터치도 하기 전 슬그머니 붉어졌다. 너무 대놓고 칭찬을 하니 감사하다고 하기도 좀 부끄러웠다. 시에나의 눈두덩이에 주디스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닿았다가 이내 떨어졌다. 섀도를 바른 모양이었다.

“흠, 눈썹도 따로 정리를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릴 때만 끝부분에 산을 세우면 인상이 더 또렷해 보이겠어.”

혼자 끊임없이 조잘조잘 떠들면서도 손은 또 엄청나게 빠르게 움직였다. 화장은 순식간에 끝났다. 마지막으로 입술을 바른 시에나가 이내 살며시 눈을 떴다.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했지만 주디스가 머리를 땋아 주고 있던 탓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양쪽의 머리칼을 작게 땋아 꼰 뒤 반묶음을 만든 주디스가 만면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자아, 이제는 옷을 갈아입어야죠. 어쩌다 보니 순서가 좀 바뀌긴 했는데, 괜찮아요. 이쪽으로 들어가요.”

주디스가 시에나의 바로 앞에 있는 천막 안의 더 작은 천막으로 들여보냈다. 안에는 무릎 정도까지 오는 분홍빛의 원피스가 걸려 있었다. 여신의 계시를 받는 소녀 역할이라 해서 은연중에 흰옷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였다.

“다 벗고 입을 필요는 없어요. 긴팔에 긴 원피스라 겉옷만 벗고 입어도 괜찮아요. 그런데 옷이 좀 클 거예요. 에반도 입게 하려면 크게 만들어야 했거든요. 다 입으면 핀으로 정리해 줄 테니 말해요.”

“다 입었어요.”

촤아악, 시에나의 말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주디스가 천막을 열고 들어오며 탄성을 질렀다.

“어쩜, 내가 사람을 잘 골랐어. 피부색이랑 옷 색이 정말 잘 어울려요.”

“음… 그런데 옷 색깔이 왜 분홍색이에요?”

“왜요? 분홍색이면 안 되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주디스 옷은 흰색이잖아요. 그래서 저도 흰색일 줄 알았어요.”

“아아, 사실 제 옷도 새빨간 붉은색으로 물들이고 싶었어요. 전통 있는 옷이라 안 된다고 다들 말려서 지금 시에나가 입은 옷만 그 색이지만, 조만간 이것도 확 빨간색으로 물들여 버릴 거예요.”

주디스의 확고한 의지에 시에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신이라고 하면 보통 깨끗한 흰옷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왜 주디스는 붉은 옷을 만들지 못해 안달인 걸까?

“왜 붉은 옷을 만들지 못해 안달인 거냐고 생각했죠, 방금?”

“헉, 아니요.”

시에나는 족집게처럼 생각을 읽은 주디스에게 살짝 공포감을 느꼈다. 그런 시에나가 귀엽다는 듯 옷핀을 달아 주던 주디스가 코를 찡그리며 미소 지었다.

“귀여워라. 별거 아니에요. 고정관념을 좀 깨뜨리고 싶었달까요.”

“고정관념이요?”“네. 여신, 성녀 하면 떠오르는 게 하얀 피부, 긴 생머리, 흰옷, 순결, 깨끗한 것 이런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의 주신 이스테라 여신은 그렇지 않죠. 태양의 신이자 전쟁의 신으로, 태어나자마자 전쟁터를 뛰어다녔다는 전설이 뻔히 있는데요. 전쟁도 태양도 붉은데 어째서 하얗게 입어야 하는지 저는 어렸을 때부터 그게 의문이었어요. 그렇지 않나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 여신의 뜻을 받은 소녀가 저는 절대 순종적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주어진 운명은 깨부수고, 신의 뜻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미래를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 소녀를 감당하기에 흰색은 너무 순하고 약해 보이잖아요? 그래서 그랬어요.”

가벼운 이유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그 이유가 묵직했다. 시에나는 주디스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연극과 캐릭터에 대해 훨씬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을 봤을 때 흥분하고 반겼던 이유도 그저 대타를 찾았기 때문이 아닌 제가 상상했던 소녀와 이미지가 일치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았다. 새삼 그녀를 가볍게 보고 의심했던 시간이 조금 미안해졌다.

“다 됐다! 와, 이게 이렇게도 줄어들 수 있는 옷이군요.”

“하하, 그런가요?”

“네, 정말 멋져요. 이거, 바로 보여 주긴 아까운데….”

“네? 뭐가 아까워요?”

“아까 그 도련님이요. 두 분 아직 사귀는 사이는 아니신 거죠?”

“어, 어떻게 아셨어요?”

“딱 봐도 뽀뽀도 제대로 안 해 본 것 같아서 티가 나는걸요.”

했는데.

볼이지만.

시에나는 자신의 지난 흑역사를 떠올리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면 제가 오늘 남자분 마음에 또 불을 질러 보겠습니다. 시에나, 내가 저 도련님 내보낼 테니까 이 모습 꽁꽁 숨겨 놨다가 나중에 등장하고 쨘! 보여 주는 거 어때요?”

“지금 안 보여 주고 나중에 제가 무대에 등장할 때 관객석에서 보여 주라는 거죠?”

“그렇죠! 지금 시에나 너무너무 멋지고 예쁘고 잘생기고 다 하고 있단 말이에요. 이 허름한 천막 안에서 보여 주기에는 아까울 만큼.”

주디스의 제안은 엉뚱하긴 했지만 조금 끌리는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 데이몬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시에나가 잔뜩 설레는 표정의 주디스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부탁할게요.”

“잘 생각했어요! 제가 바로 도련님을 쫓아내고 올게요!”

주디스는 후다닥 나가며 말했다. 주책맞으면서도 어쩐지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데이몬한테 그 말을 하면 또 아까처럼 살기등등해서 쳐다볼지도 모르는데 겁도 없나.

그러나 시에나의 생각과는 반대로 주디스는 밝은 표정 그대로 돌아왔다.

“내보냈어요.”

“엄청 쉽게 나가셨네요?”

“시에나 명령이라고 하니까 바로 축 처져서 나가시던데요? 아, 대신 두 분은 여기 남아 계세요. 두 분도 관객석으로 가시라고 할까요?”

“아아뇨, 괜찮아요. 저 그럼 이제 나가도 되는 거죠?”

“네, 나오세요!”

천막을 걷자 로하엘과 노파가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술에 달린 자그마한 방울들이 움직이며 차르르, 소리를 내었다. 거울 앞에 선 시에나의 모습은 과연 주디스가 극찬할 만했다.

평소의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무대 화장이라 그런지 깊게 그린 눈꼬리는 하늘로 솟아 새침한 인상을 주고 있었고, 셰이딩 역시 세게 주었는지 이목구비가 더욱 뚜렷해 보였다. 강렬한 색으로 칠한 입술은 마지막으로 오일을 덧발라 매트 하지 않고 윤기가 흘렀다. 머메이드 스타일의 분홍색 원피스는 시에나의 흰 피부색에 완벽하게 어울렸으며 옷 밑에 달린 술이 움직일 때마다 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사실 이건 신의 계시를 받은 소녀라기보다는, 아주 강력한 신을 받아들인 인디언 추장의 딸 같은 느낌인걸.

시에나가 거울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노파와 로하엘이 그런 시에나의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시에나, 정말 예쁘구나!”

“멋져요, 시에나.”

다들 고슴도치들이라 시에나의 모습을 칭찬하기 여념이 없었다. 계속되는 칭찬에 표정이 풀어진 시에나가 눈꼬리를 순하게 내리며 헤헤 웃었다.

“감사해요.”

“참, 시에나. 이거 봐요.”

시에나가 얼떨결에 주디스가 주는 검을 받아 들었다. 그러나 가죽 검집 안에 든 것은 모양만 검처럼 생겼을 뿐, 푹신푹신했다.

“푹신하네요?”

“안에는 전부 다 세이지 꽃잎이거든요. 그냥 검 모양 가죽 케이스에 꽃만 채워 넣은 것뿐이에요.”

“아하, 이걸 제가 나중에 받아서 던지면 되나요?”

“네네, 맞아요. 그런데 그냥 던지면 안 되고 이 부분을 누르면서 던져야 해요. 그래야 공중에서 꽃이 확 터지거든요.”

주디스가 갈색 단추처럼 생긴 버튼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그럴게요.”

“언제 나와야 하냐면, 제가 마지막에 강림하고 ‘나를 대신해 내 뜻을 이어받을 소녀를 여기 부르겠다’라고 할 때 3초를 세고 나오면 돼요. 제가 뭐라 뭐라 대사를 치면서 이 검을 줄 거예요. 그럼 검을 받아 든 뒤 번쩍 일어나서 한 손으로 검을 들고 이 버튼을 누르면 끝이에요!”

“으…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정말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주디스의 배려에도 어쩐지 의기소침해졌다. 주디스가 주눅 든 시에나를 달래려고 할 때 무대 쪽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주디스! 준비해, 이제 시작이야!”

“금방 갈게! 시에나, 힘내요. 알았죠? 무대 옆에서 우리 하는 거 구경하다 보면 긴장이 좀 풀릴 거예요.”

“네…! 알겠어요.”

마지막까지 밝게 웃으며 그녀의 긴장을 풀어 주던 주디스의 얼굴이 무대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순간 순식간에 배우의 얼굴로 돌변했다. 그 변화에 시에나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

이스테라 여신의 역할에 맹렬히 몰입하는 주디스의 옆모습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배우란 저런 거구나. 저런 사람들 사이에서 연기할 생각을 하니 뭔가 자신감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시에나가 심란한 얼굴로 무대를 구경하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갔다.

주디스는 시에나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그냥 그 자리에 시에나가 있는 줄도 모르고 역할에 몰입하고 있었다. 시에나 역시 그런 주디스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짝짝짝, 입장을 환영하는 박수 소리가 들리고 주디스가 무대로 향했다. 단단히 굳은 입꼬리에 터질 듯한 긴장감을 안은 채로 그녀는 당당하게 무대 위를 거닐었다. 여신의 등장에도 격렬하게 칼싸움을 해대는 남자들을 향해 그녀는 슬픈 어조로 물었다.

“어찌하여 너희는 한 몸에서 태어나 싸우느냐. 나는 이를 원하지 않음이라.”

장엄하게 울리는 듯한 목소리에 시에나는 숨을 들이켰다. 목소리는 슬픈데도 위엄이 담겨 있었고, 가냘픈 듯했지만 온 무대를 울렸다. 주디스의 연기에 남자들의 싸움으로 흥분해 있던 관객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녀의 이야기에 사람들이 빨려 들어갈 듯 집중하기 시작했다.

제법 유명하다고 자랑했던 게 거짓말이 아니었는지 극은 연출력도 연기력도 뛰어났다. 연극은 어린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서사였지만 그 이야기로도 모두를 집중시키는 그들의 실력은 정말 대단했다.

이야기는 이러했다.

제국을 이끄는 황제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황제는 죽기 전 두 아들에게 똑같이 땅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 그들은 서로의 땅을 탐내며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승리의 깃발이 꽂힌 땅에는 핏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 하늘은 붉게 변하고, 땅에는 통곡이 가득했다. 더 이상 다른 이들을 잃을 수 없다 생각한 이스테라 여신이 전쟁터에 강림했다.

“어찌하여 너희는 한 몸에서 태어나 싸우느냐. 가진 땅이 아무리 좁다 한들 둘이 들어 있던 어머니의 배 속보다 좁았으랴.”

“여신이시여…!”

이스테라의 등장에 싸움을 멈추고 모든 이들이 무릎을 꿇었다. 여신이 손수 싸움을 중재했기에 전쟁은 멈췄고, 그렇게 제국은 평화로워지는 듯했다. 그러나 두 형제는 그 후에도 사사건건 부딪쳤고, 결국 또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기어코 전쟁을 벌이는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스테라는 두 형제에게 악마가 씌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격노한 여신은 즉시 악마를 소멸시키려 했지만, 수많은 전쟁을 거치며 막대한 양의 생명과 피를 먹은 악마는 좀처럼 죽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지막 전쟁. 인간과 인간, 신과 악마가 격돌했다.

쩌엉!

여신의 보검과 악마의 마검이 맞닿았다. 여신의 역할을 맡은 주디스와 악마의 역할을 맡은 남자는 형형한 기세로 싸우고 있었다. 어찌나 기세가 거센지 둘 다 조금만 정신을 흐트러트린다면 아무리 가검이라도 크게 다칠 것 같았다. 덩달아 긴장한 관객들은 숨을 죽이고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시에나 역시 아슬아슬한 둘의 싸움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보고 있었다.

“무엄하구나. 미천한 악마 주제에 감히 내 아이들의 안에 들어와 희롱하고 이 제국을 망쳐 놓다니!”

“어머니시여. 귀하고 천한 것은 대체 누가 정한 것입니까. 어머니께서는 세상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으면서 인간은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밝은 햇살이 드는 곳에 두시고, 저희는 지하 세계에 처박아 두지 않으셨습니까!”

악마가 울분을 담고 소리쳤다.

“닥쳐라! 강하게 태어났다면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거늘 해야 할 일을 무시한 채 인간을 핍박하고 멸종시키려고 했으니 벌을 받은 것이 무에 그리 억울해서!”

“강한 자가 약자를 굴복시키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약한 인간들조차도 모이면 서로 편을 갈라 조금이라도 우위에 서려고 버둥거리지 않습니까!”

“약한 인간을 꼬여 내 싸우게 만들었던 게 너였으면서 억울한 척하는 것이 뻔뻔스럽기 그지없구나. 내 오늘 너를 친히 한 줌의 재로 만들겠다.”

“해 보십시오. 전쟁터에서 어머니의 유일한 자식들을 먹고 자란 저입니다. 절대 녹록한 상대가 아닐 겁니다. 저와 대치하는 지금도 말만 하시고 저를 소멸시키지는 못하지 않습니까?”

우우, 관객석에서 악마를 향해 야유가 일었다. 악마 역할을 맡은 남자는 말을 정말 얄밉게 잘하는 재주가 있었다. 남자의 연기력에 감탄하고 있는데 주디스가 그와 다시금 검을 부딪쳐 왔다. 주디스가 남자를 무대 끝까지 밀어붙이자, 어느새 남자가 주디스의 위를 훌쩍 뛰어넘어 그녀의 목을 노렸다. 주디스는 몸을 아래로 숙이며 남자의 가슴에 보검을 찔러 넣었다. 힉, 시에나가 연기라는 것도 잊고 숨을 들이켰다.

“크아아악-!”

남자가 거세게 울부짖었지만 주디스는 그의 가슴에 검을 더 깊숙이 꽂아 넣는 것에 집중했다. 남자의 가슴 안에는 연막탄 같은 게 들었는지 검은 연기가 하늘을 향해 뭉게뭉게 솟아올랐다. 남자는 고통을 참고 마지막 힘을 짜내어 주디스의 옆구리를 베어 냈다.

“으윽…!”

주디스가 뒷걸음질 쳤지만 이미 그녀는 크게 상처 입은 뒤였다. 주디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악마를 노려보았다. 악마는 가슴에 검이 꽂힌 채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미의 몸에 상처를 냈으니 기어이 속이 시원하겠구나.”

“아들의 가슴에 검을 꽂아 넣은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되겠습니까.”

남자는 숨이 찬 듯 헉헉거리면서도 비열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남자의 말에 주디스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악마가 그런 주디스에게 비꼬듯이 말했다.

“이제 조금 후회되십니까?”

“아니. 전혀 후회되지 않는다. 너는 소멸할 만한 죄를 지었으니까. 너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때 목숨을 거두지 못한 것이 후회될 뿐.”

주디스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우울한 감정이 관객들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연극에 열중하던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큭큭… 제가 소멸한다고 해서 과연 끝일 것 같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제 몸에서 나고 있는 이 어두운 기운이 인간계를 뒤덮을 겁니다. 햇빛 하나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인간들은 끊임없이 싸우고 또 싸우며 고통 속에 살다 죽을 겁니다. 마치 우리가 그랬듯이.”

“이 천하의 배은망덕한 것…! 당장 멈추지 못하겠느냐!”

“이미 늦었습니다. 제 죽음으로서 완성하는 가장 강력한 저주입니다. 어머니가 가장 강할 때에도 풀기 힘들 저주인데, 다치고 약해진 어머니가 어떻게 풀겠습니까? 얌전히 그들의 최후를 지켜보시는 것이 어머니의 몫입니다.”

“아, 안 돼… 안 돼…!”

주디스는 다친 몸으로 엉금엉금 다가가 그의 심장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를 끊임없이 막아 보려 했지만, 연기는 손끝 사이로 빠져나갈 뿐이었다. 주디스의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아이들은 안 돼… 안 된단 말이다…! 제발…!”

울부짖는 주디스를 비웃던 남자는 그녀의 눈물에 웃음기를 거두며 말했다.

“어머니가 그 눈물을 우리에게 흘려 주었다면, 지금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군요….”

남자는 씁쓸한 말을 뱉으며 이내 털썩, 바닥으로 쓰러졌다. 검이 꽂힌 가슴에서는 계속해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한참이나 그 연기를 바라보던 주디스가 이내 무대 옆에 있는 시에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까 화장을 해 주던 명랑한 얼굴과는 너무나 다른 침통한 표정에 시에나는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소녀여, 모든 것을 보고 있었구나.”

갑작스러운 물음에 시에나가 대답을 해야 하나 싶어 망설이는데, 이내 주디스가 다음 대사를 읊었다.

“모든 것은 나에게서 비롯된 죄, 책임지지 않는다면 어찌 편안히 하늘에서 쉴 수 있겠는가. 이리 오라, 소녀여. 우리가 만난 것도 운명, 나를 대신해 내 뜻을 이어받을 소녀를 여기 부르겠다.”

주디스의 말이 시에나에게 선명하게 박혔다.

‘언제 나와야 하냐면, 제가 마지막에 나를 대신해 내 뜻을 이어받을 소녀를 여기 부르겠다. 라고 할 때 3초를 세고 나오면 돼요.’

3초를 세고 나가면 되는 거겠지. 관중들은 이미 주디스가 시선을 준 무대 옆에서 누가 나올지 몹시 기대하는 눈치였다. 긴장감에 손이 땀으로 축축하게 배어들었다. 시에나가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3초를 세고 한 걸음을 떼었다. 순간 모든 조명이 시에나를 향했다.

그녀의 등장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시에나는 목각 인형처럼 딱딱하게 그녀의 맞은편으로 걸어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주디스는 남자의 가슴에 꽂힌 보검을 빼 검집에 집어넣었다. 아까 주디스가 보여 준 가죽 검집이었다. 꽃잎이 튀어나오는 곳 외에 따로 검을 꽂는 공간이 있던 모양이었다.

“소녀여, 나는 다친 몸으로는 이 저주를 풀지 못한다. 그러나 나의 소멸로서 저주를 덮을 수는 있지. 이런, 슬퍼하지 말거라. 나의 일부는 이 검에 깃들어 너의 곁에 함께할 테니.”

전혀 슬픈 표정을 짓지 않고 있던 시에나가 주디스의 말에 최대한 슬픈 얼굴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슬픈 생각, 슬픈 생각….

시에나의 발연기에도 불구하고 주디스는 훌륭하게 대사를 쳐 냈다. 주디스가 검집을 시에나에게 전달하며 말했다.

“나를 대신해 세상을 뒤덮은 검은 연기를 향해 검을 들어라. 내가 꽃으로 화해 저주를 덮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저주를 내가 전부 사라지게 할 수 있을지는 확신하기 어려우니, 혹 어둠의 기운이 또다시 인간계를 뒤덮는다면 네가 이 검을 들어라. 내게 선택받은 너만이 이 검을 다루고, 나아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테니.”

시에나가 검집을 잡자 주디스는 건네주기 전 마지막 말을 뱉었다.

“그러나 소녀여, 넌 나와 같은 실수는 하지 말거라. 사랑한다고 해서 소멸을 늦춘다면, 결국 이렇게 파멸밖에 남지 않는다. 너는 내가 수십만 년간 찾고 기다려 온 운명, 고작 한때의 사랑에 눈이 멀어 세계를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나와 약속해다오.”

주디스의 말이 끝나고, 이내 시에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받아 들었다. 주디스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너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운 것 같아 미안하지만, 너라면 틀림없이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 말과 함께 주디스가 바닥으로 서서히 허물어졌다.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시에나는 심호흡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뒤돌았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시에나의 모습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예쁘다-!”

“어서 구원해 줘-!”

너무 많은 이목이 집중되자 뱃속이 뜨겁고 온몸이 간질거렸다. 어떻게 이 무대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사를 치고 싸울 수가 있지? 주디스와 단원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시에나는 떨리는 다리를 겨우 지탱하며 천천히 검집을 들어 올렸다. 검집에 싸인 보검은 제법 묵직했지만, 한 손으로 못 들 정도는 아니었다. 하늘을 향해 검을 치켜 올린 시에나가 이내 톡 튀어나온 부분을 엄지로 힘 있게 눌렀다.

파아앙-!

검집에서 튀어나온 꽃잎이 순식간에 밤하늘 위로 퍼졌다. 어디에 그렇게 많은 꽃잎이 있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그 양이 방대했다. 하늘로 한참 솟아올랐던 붉은 세이지 꽃잎이 사람들에게 하늘하늘 떨어졌다. 사람들은 꽃비에 신기해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들의 위로 수십 개의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슈우우욱- 펑!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의 불꽃이 한데 올라가 꽃으로 화했다. 검은 하늘을 형형색색으로 아름답게 물들이는 불꽃을 보며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최고다-!”

“이렇게 대단한 연극은 처음이야!”

어느새 사람들은 시에나를 향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시에나는 괜히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내가 한 건 없는데, 그런 시에나의 곁에 주디스가 다가왔다.

“시에나, 이제 칼 내려놓아도 괜찮으니 놓고 가운데에 서요.”

“아, 네.”

여신에서 다시 인간으로 돌아온 주디스가 시에나의 팔짱을 끼며 넉살 좋게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치지 않는 환호가 더욱 짙어졌다.

“언니! 언니 사랑해요-!”

“너무 예뻐요-!”

주디스의 연기가 소녀팬들을 단단히 홀려 놓은 모양이었다. 몇몇 소녀들은 주디스를 보며 거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주디스와 시에나의 곁으로 다가온 단원들이 열을 맞춘 후, 이내 고개를 숙였다. 시에나도 얼떨결에 함께 고개를 숙였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감사합니다-!”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넨 단원들이 이내 무대 밑으로 내려가 관객들에게 모자를 내밀었다. 좋은 구경을 한 사람들은 기분 좋게 모자 속에 자신의 쌈짓돈을 넣어 주었다. 두둑한 팁에 단원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신이 난 단원들이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묘기를 부렸다.

“멋지다-!”

“우와! 공중제비 또 돌아 줘요!”

그 진풍경을 구경하던 시에나가 이내 맨 앞줄에 서 있는 데이몬을 발견했다. 데이몬은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시에나의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데이몬을 발견한 시에나가 기쁨에 손을 흔들어 주었다.

시에나의 반응에 흠칫 놀란 데이몬이 금방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그녀의 모습이 어지간히 인상적인 모양이었다. 시에나는 반가운 마음에 쫑쫑 무대를 내려와 데이몬을 향해 달려갔다. 시에나가 직접 내려올 줄은 몰랐는지 데이몬이 팔을 들어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도련님!”

“시에나.”

“도련님, 저 괜찮았어요?”

시에나의 물음에도 데이몬은 말없이 그저 붉어진 얼굴을 가리기에 급급했다. 데이몬은 팔 사이로 시에나를 슬쩍 훔쳐보다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별로… 였나요?”

시에나의 표정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아무래도 첫 연기다 보니 그렇게 잘하지는 못했겠지만, 연기라고 할 수는 없는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칭찬을 듣고 싶었는데.

“아니! 정말, 정말 멋졌어. 너무 예뻤어….”

데이몬은 시에나의 축 처진 표정에 깜짝 놀라 손사래를 치며 그녀를 칭찬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던가. 시에나의 표정이 전구를 켠 듯 다시 밝아졌다.

“정말요?”

“그래. 나는 그냥 무대에 선 네가 아득히 먼 것처럼 느껴졌는데, 갑자기 다가오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랬던 것뿐이야. 정말 멋졌어, 시에나. 정말로.”

데이몬의 계속되는 칭찬에 이번에는 시에나의 얼굴이 가을날의 사과처럼 무르익었다.

“가, 감사해요.”

“으응. 정말인걸….”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해요? 시에나! 이리 와서 같이 걸어요! 사람들이 시에나를 궁금해하고 있어요.”

주디스가 타이밍 좋게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민망한 분위기가 될 뻔했던지라 끼어들어 준 그녀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그러나 데이몬은 주디스가 못마땅한 듯 와락, 인상을 구겼다. 그 표정을 보지 못한 시에나가 주디스를 향해 말했다.

“네, 갈게요.”

“그래요, 도련님. 이야기 중에 죄송하지만 시에나 좀 잠깐 빌릴게요.”

데이몬이 답할 새도 없이 주디스가 시에나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데이몬이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인상적이라 시에나는 주디스의 손에 질질 끌려가면서도 뒤돌아 그를 응시했다. 시에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곳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데이몬은 시끌벅적한 사람들 사이에 선 낯선 이방인 같아 보였다.

둘의 시선이 마주친 동안 시계가 느리게 흘렀다. 색이 사라지고, 어느새 소리도 사라졌다. 커다란 하얀 방 안에 둘만 갇힌 느낌이었다. 시에나는 저도 모르게 데이몬에게 손을 뻗었다. 어떤 연유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사람들 사이에서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어 있는 그의 모습이 안타까워,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쓸쓸함이 가득 담겨 있던 데이몬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시에나의 손길에 응하듯 그가 걸음을 옮겼다. 이내 시에나의 벌린 손 사이로 데이몬의 차가운 손가락이 들어왔다.

“엇…! 시에나! 어디 가요!”

그 순간, 모든 것이 제 시간을 찾았다. 시에나는 데이몬에게 이끌려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그들의 뒤에 대고 주디스가 돌아오라 외쳤지만 이미 시에나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손을 잡고 뛰는 데이몬의 검은 뒤통수와, 아까부터 쿵쿵 소리를 내며 크게 뛰고 있는 제 심장 소리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쏜살같이 달려 관객석을 빠져나오는 둘의 뒤로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경쾌한 음악 소리가 흘렀다. 뭉개진 축제의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헉… 헉….”

얼마나 뛰었을까. 둘은 어느새 인적 드문 풀숲에 다다랐다. 시에나의 걸음이 느려지자 데이몬도 걸음을 멈추었다. 달리는 내내 찬바람을 맞아 시에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데이몬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가 계속 시에나의 손을 붙잡고 있던 걸 알아챈 데이몬이 화들짝 놀라 손을 떼어 냈다.

“미, 미안.”

“뭐가요?”

“내가 널 방해한 것 같아서.”

방해? 그렇지 않았다. 시에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저도 이렇게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선망의 대상이 되어 사람들의 박수와 갈채를 받는 것보다 데이몬과 조용한 풀숲에 있는 지금 이 시간이 천 배는 의미 있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먼저 손을 뻗은 건 시에나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제가 먼저 손을 뻗었잖아요. 도련님은 그냥 거기에 응해 주신 거고요.”

“그렇지 않아.”

“네?”

“난… 네가 무대에 섰을 때부터 널 데려오고 싶었어.”

“저를 데려오고 싶었다고요? 왜요?”

“…네가 너무 예뻐서 아무한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거든. 나만 보고 싶었어.”

그러니까, 질투를 했다는 건가.

데이몬의 과감한 말에 식어 있던 시에나의 뺨이 다시금 화끈 달아올랐다. 시에나는 뜨거워진 뺨을 손등으로 식히며 슬쩍 데이몬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황금을 주조한 듯한 금안에 홀린 것처럼 데이몬의 곁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시에나의 머리칼이 그의 볼을 간지럽혔다. 데이몬이 시에나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살짝 고개를 비틀자, 그녀가 까치발을 들며 가볍게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데이몬이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슈우욱- 펑!

또다시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각양각색으로 빛나는 불꽃이 더없이 화려하게 밤하늘을 수놓았다. 그러나 둘에게는 어떤 소리도 빛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오롯이 서로의 입술이 닿는 촉감을 느꼈다. 가장 화려한 마지막 불꽃놀이가 끝나고, 둘의 입맞춤도 끝났다. 데이몬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시에나는 아쉽다는 눈빛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깜깜해진 하늘에는 오로지 다 타오른 불꽃의 냄새만이 피어올랐다.

“에취!”

여운을 즐길 새도 없이 시에나의 재채기에 화들짝 놀란 데이몬이 허둥지둥 자신의 겉옷을 벗어 그녀의 옷 위에 둘러 주었다.

“이거 입어, 시에나.”

시에나가 현재 입고 있는 옷은 무대 의상인지라 예쁘긴 하지만 보온성이 많이 떨어졌다. 땀이 식자 금세 한기가 몰려들었다. 시에나는 간지러운 코를 슥슥 비비며 물었다.

“전 괜찮아요. 그런데 도련님, 얼굴 안 가리셔도 괜찮아요?”

“괜찮아. 여긴 사람도 없고, 나갈 때에는 가면을 쓰면 되니까.”

“그래도 추울 것 같은걸요. 이제 다시 돌아가요.”

시에나가 데이몬의 소매를 당기자 그가 아쉬워하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시에나가 먼저 앞서 걷고, 데이몬이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둘은 막 사랑을 시작하는 풋풋한 연인들처럼 손을 꼭 잡은 채였다. 그들의 뒤로 어느새 휘영청 보름달이 밝아 있었다.

* * *

“꺅! 이게 뭐야…!”

시에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거울 앞을 바라보았다. 세면대 앞에 선 시에나가 거울에 비친 자신에게 경악 어린 눈길을 보냈다. 이마부터 시작해 볼까지 오돌토돌하게 빨간 두드러기가 보기 흉하게 올라와 있었다. 여드름과는 거리가 먼 깨끗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 충격이 더 컸다. 시에나는 울상을 지으며 노파의 방을 향해 달려갔다.

“할머니!”

아침잠이 없어 일찍 일어나는 노파는 이미 세안을 마치고 이불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침 햇살에 비친 시에나의 얼굴을 본 노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에나, 얼굴이 왜 그러냐.”

“모르겠어요. 어제 축제에 다녀온 이후로 이래요.”

“쯧쯧, 이리 와 보렴.”

노파가 침침한 눈으로 시에나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폈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노파가 이윽고 한숨을 내쉬었다. 시에나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갑자기 뾰루지가 난 걸까요?”

“아니… 보통 뾰루지라면 하룻밤 새 얼굴이 이렇게 뒤집어질 리가 없지. 이건 꼭 뭘 잘못 먹어서 생긴 것 같은데… 어제 뭘 잘못 먹었니?”

“너무… 많이 먹었죠.”

“그렇긴… 하지.”

불꽃놀이가 끝난 뒤에도 시에나 일행들은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꼬치며 알록달록한 쿠키, 사탕들을 잔뜩 먹고 다녔다. 배가 빵빵하게 차 더 이상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을 때까지 먹었던 어제의 기억이 둘의 머릿속에 훅훅 지나갔다. 새벽 2시까지 먹은 음식만 거의 10종류에 다다랐다. 음식 추적에 실패한 노파는 다른 이유를 생각하며 시에나의 얼굴을 곰곰이 뜯어보았다.

“시에나, 어제 화장을 하지 않았니?”

“네. 무대에 서느라 주디스가 해 주었어요.”

“끝나고 잘 씻어 주었고?”

“네, 잘 안 씻어져서 고생은 좀 했지만 그래도 나름 깨끗이 하고 잤어요.”

깊은 밤, 잔뜩 흥이 나 성에 돌아온 시에나는 자기 전 얼굴을 씻으려고 했지만 매끈매끈하게 달라붙은 화장은 좀처럼 씻겨지지 않았다. 원래 화장이 이런 줄 알고 세 번, 네 번에 걸쳐 씻는 바람에 얼굴이 건조해질 정도였지만, 말끔하게 세안하고 잤다고는 자부했는데. 시에나가 조금 억울한 표정으로 노파를 바라보았다.

“잘 씻고 잤다면… 아무래도 시에나 네 피부와 화장품이 맞지 않았던 것 같구나. 종종 이런 경우가 있지.”

쯧쯧, 노파는 혀를 차며 안타깝게 시에나의 얼굴을 주름진 손으로 쓸었다.

“화장품이 안 맞기도 해요?”“그래. 동네 처녀들 몇몇이 떠돌이 방물장수가 다녀간 다음 날에는 너처럼 이렇게 얼굴이 울긋불긋해져서 우리 집을 방문하곤 했거든. 사람에 따라 피부가 다 다르다 보니 맞는 화장품도 다르단다.”

“그럴 수가….”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얘야. 며칠간 약초 물로 세안하고 연고를 발라 주면 금방 나을 거야.”

시에나의 시무룩한 표정을 본 노파가 시에나를 위로하기 위해 애썼다.

“일단 내가 뾰루지에 좋은 연고를 줄 테니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렴. 그리고 오늘 세수는 약초 물로 하는 게 좋겠어.”

“네. 감사합니다….”

의기소침해진 시에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노파가 방을 나섰다. 평소라면 따라붙어 같이 가겠지만, 어제와 너무 달라진 얼굴에 차마 따라가겠다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노파는 다행히도 금방 돌아와 주었다. 주름진 손에는 말린 약초 묶음과 연고가 들려 있었다.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약초 향기에 시에나는 조금 진정되는 걸 느꼈다.

“이 약초를 요만큼씩만 덜어서 씻을 때마다 미지근한 물에 풀어 쓰렴. 찬물은 약초의 좋은 성분이 잘 안 녹을 수도 있으니.”

“감사합니다.”

“참, 이 연고는 씻은 뒤 크림과 함께 하루 두 번씩 발라 주고.”

“네에… 저 그럼 씻으러 가 볼게요. 할머니, 정말 감사해요.”

“원, 얘도. 빨리 낫길 바라마.”

“네에,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시에나는 노파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방을 빠져나왔다. 시에나의 방문 앞에는 데이몬이 차를 들고 서 있었다. 찻잔을 들지 않은 손으로 노크를 하려던 데이몬이 시에나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시에나, 괜찮아?”

시에나는 자신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데이몬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시에나를 부르는 데이몬의 얼굴 역시 열꽃이 피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러나 데이몬의 시선을 피하기에 급급해 시에나는 그의 상태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어제만 해도 정말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시에나는 울상을 지으며 데이몬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데이몬은 더욱 집요하게 그녀의 얼굴을 훑었다. 데이몬의 시선에 얼굴이 따가워질 지경이자 결국 시에나는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괘, 괜찮아요. 어제 한 화장이 문제가 있었나 봐요. 할머니한테 약초를 얻었으니 금방 나아질 거예요.”

“그 여자가 해 준 화장이 널 그렇게 만든 거야?”

데이몬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시에나는 깜짝 놀라 얼굴을 가리는 것도 잊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주디스도 똑같이 화장했는데 저만 이렇게 됐는걸요. 제 피부가 그 화장품과 맞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픈 건 아니고? 너무 빨간데.”

데이몬이 시에나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다가오는 데이몬에게 얼굴을 보이기 싫었던 시에나가 그를 피해 문 안으로 쏙 들어갔다.

“전혀요. 괜찮아요. 저 이만 씻으러 들어가 볼게요.”

“차는 그럼 조금 이따 가져올까?”

“아니요… 씻고 마실게요. 그리고 오늘 아침은 따로 먹을 테니 데리러 오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시에나의 거절에 데이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시에나는 차만 빼앗은 채 문을 쾅 닫아 버렸다. 무례한 행동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 시선을 받는 것이 괴로웠다.

시에나는 찻잔을 테이블 위에 대충 내려놓고 세면대로 직행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대로였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긴, 그랬다면 도련님이 그렇게 놀랄 이유도 없었겠지.

시에나가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트러블 하나가 이렇게 사람을 의기소침하게 만들 줄이야. 한참이나 씁쓸한 표정으로 제 얼굴을 바라보던 시에나가 세면대에서 나와 타닥타닥 타오르는 벽난로 위에 물을 담은 냄비를 얹었다. 오랜만에 겪는 최악의 아침이었다.

* * *

하루는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의뢰를 맡긴 드워프 렌델은 정말로 오전 중으로 만든 물건을 배송해 주었다. 손에 모터를 단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빠른 속도에 시에나가 혀를 내둘렀다. 노파가 그를 신뢰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렌델은 오랜만에 재미있는 물건을 만들어 즐거웠다며 시에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보답이라 하기엔 민망한 금액을 받았는데도 렌델은 기분 좋게 돌아갔다.

사용인들에게 줄 보습 크림과 데이몬을 위한 선물을 만들기 위해 불 앞에서 내내 씨름하다 보니 어느덧 창문 밖으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건조한 기후 덕인지 어제 잘 씻어 널어 둔 허브 잎들은 이미 바싹 말라 있었다. 소독한 유리병에 넣어 포장을 마치고 나자 마음이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오일을 만드는 과정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시에나 일행이 축제에 나가 노는 새에 마부가 노파의 집에 가서 가져온 오일 만드는 기계는 금방이라도 망가질 듯 낡아 있었지만, 기능은 훌륭했다.

오일 제작에 필요한 네 개의 통 중 첫 번째 통에 물을 넣고 끓이면 수증기가 그 위에 연결된 관을 통해 허브가 담겨 있는 두 번째 칸에 들어갔다. 수증기는 식물에 있는 오일 성분과 접촉해 섞이고, 오일 성분이 섞인 증기를 얼음이 든 세 번째 통에 식힌 뒤 네 번째 통에 담으면 신기하게도 허브 워터와 오일로 분리되어 있었다.

두 개로 나뉜 허브 워터와 오일은 각각 다른 용도로 유용하게 쓸 수 있다고 노파가 말했다. 이 유용한 기계는 원래 판매되는 제품이긴 했지만 너무 비싸서 매번 노파가 오일과 워터를 얻기 위해 다른 집 신세를 지는 게 못마땅했던 아이작이 열 살 때 얻어 온 자재들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시에나는 새삼 아이작의 천재성에 혀를 내둘렀다.

만드는 데에 재미가 붙어 저녁도 대충 먹다 보니 시간은 이미 한밤중이었다. 데이몬 또한 입학시험에 가져갈 짐을 싸느라 시에나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다. 시에나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일주일 뒤가 입학시험인 데다 이틀 뒤에는 바로 떠나야 하는데 간 크게도 저녁 내내 축제를 구경한 데이몬에게는 좀 어이가 없었지만 로하엘이 걱정 말라며 그런 시에나를 손수 안심시켜 주었다. 로하엘은 다정하게도 그녀의 트러블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노파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던 거겠지. 시에나는 그런 로하엘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데이몬이 짐을 다 싸 버리기 전 부랴부랴 데이몬에게 줄 선물을 챙긴 시에나가 그의 방문 앞에 서서 노크를 했다.

“도련님, 계세요?”

아침에 비해 시에나의 피부는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발긋발긋한 게 올라와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이틀 정도는 피해 다니고 싶었지만 데이몬이 내일 떠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내일 아침 데이몬이 일찍 떠나고 나면 며칠 동안은 보지 못할 테니까.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하고 후회하느니 잠시 부끄러운 게 나았다. 그러나 시에나의 노크에도 방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미 잘 준비를 마치고 방에 계셔야 할 시간인데, 시에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련님… 주무세요? 왓…!”

혹 잠드셨나 싶어 문에 가만히 귀를 대었을 뿐인데 덜컹, 문이 열렸다. 예기치 않게 방 안에 들어선 시에나가 허둥지둥 자세를 가다듬었다. 없을 거라 생각했던 데이몬은 침대 위에 죽은 듯 누워 있었다. 깜짝 놀란 시에나가 그에게 다가갔다.

“도련님!”

데이몬은 아침에 봤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시에나가 부르는 목소리에 데이몬이 서서히 무거운 눈꺼풀을 열었다. 고열에 시달리는 사람 특유의 나른한 눈동자가 시에나를 응시했다. 그의 금안이 녹을 것처럼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시에나….”

데이몬의 목소리는 확연히 갈라져 있었다. 혹시나 하고 짚어 본 데이몬의 이마는 대장간의 화로처럼 뜨거웠다.

“도련님, 열이 높아요. 이를 어째. 의원을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냐, 버틸 만해. 부를 필요 없어.”

감자 농사를 짓고 있을 의원 대신 부임한 다른 의원을 부르려고 나갈 채비를 하는데 데이몬이 만류했다. 시에나는 어이없어하면서도 데이몬의 거절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렇게 열이 심한데요? 어제 저한테 옷을 벗어 주셔서 감기에 드신 거예요. 어떡해….”

시에나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데이몬은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것 때문은 아니라고 단언할게. 정말로 의원을 부르거나 약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야.”

“그럼…왜 그러신 거예요?”

데이몬은 설명하기 어렵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시에나의 눈빛이 불안하게 이지러졌다.

“혹시 전에 말씀하신 그 그림자 때문인가요?”

“기억하고 있었구나. 응, 그런 것 같아. 지금 신나게 날뛰고 있거든.”

“세상에. 언제부터 그러셨던 거예요?”

“한 시간쯤 전부터.”

그렇게 말하며 데이몬은 아랫입술을 슥 핥았다. 거짓말을 할 때 아랫입술을 핥는 건 데이몬 특유의 버릇이었다. 시에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짐짓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

“거짓말이죠.”

움찔, 데이몬이 어떻게 알았냐는 듯 찔리는 눈으로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열이 높아 그의 눈이 다시금 초점을 잃고 몽롱해졌다. 시에나가 단호한 태도로 물었다.

“저는 다 아니까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너와 단둘이서 불꽃놀이를 보러 갔을 때부터.”

세상에, 그럼 그렇게 열이 올랐는데도 멀쩡한 척했던 건가? 어쩐지 집에 갈 때까지 가면을 쓰고 있더라니… 시에나가 기가 차다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 데이몬이 시무룩해져서 힘없이 어깨를 떨구었다.

“미안해.”

“뭐가요?”

“아픈 거 말하지 않아서….”

알긴 아시는군요. 시에나는 의기소침해진 데이몬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아침에 저한테 주실 차를 가져오실 때에도 이미 아프셨던 거네요?”

“…응. 그래도 그때는 꽤 견딜 만했어.”

그런데 그렇게 문전 박대를 당했으니, 데이몬도 마음이 어지간히 상했을 듯싶었다. 세안을 끝내고 나자 차갑게 식어 있던 차가 생각나 시에나의 얼굴에 죄책감이 떠올랐다.

“죄송해요, 그런 줄도 모르고….”

“아니야. 그때는 정말 괜찮았다니까.”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사려 깊게 배려하는 태도에 시에나는 더 마음이 아팠다. 그가 다시 나타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필이면 시험을 목전에 둔 지금.

“일단 물수건이라도 가져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땀을 좀 닦는 게 좋겠어요.”

“뭐? 나 진짜 괜찮아, 시에나!”

수치 플레이를 또 겪고 싶지 않았던 데이몬이 격렬하게 거부하며 고개를 저었다. 시에나 역시 성인의 몸에 가깝게 성장한 데이몬을 직접 닦아 줄 생각은 없었기에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말했다.

“저도 그냥 이마랑 목 정도만 닦아 드리려고 했어요!”

“아니 나 진짜 괜찮은데….”

아프면서도 괜히 객기를 부리는 데이몬의 말을 무시하며 시에나는 벽난로 옆에 걸린 빳빳한 수건과 물을 챙겨 침대로 다가갔다. 수건에 물을 적셔 얼굴과 목 주변을 닦아 주자 기분이 좋은지 데이몬의 표정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고마워….”

“아니에요. 별것도 아닌데요. 짐은, 다 싸신 거예요?”

“응. 오히려 열이 오르니까 하나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더라고.”

“허세 부리지 마세요! 이렇게 아프면 원래는 다 놓고 쉬어야 한다구요.”

시에나의 잔소리에도 데이몬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실없이 웃었다. 위기감이라고는 전혀 없이 그저 시에나와 함께 있는 게 좋은 듯 보였다.

“시에나, 그런데 내 방에는 왜 온 거야?”

“그냥… 그냥 와 본 거예요.”

혹 계속 열이 오른다면 시험을 치지 못할 수도 있을 텐데, 시험 합격을 기원하는 선물을 아픈 데이몬에게 주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데이몬은 시에나의 속도 모르고 계속해서 집요하게 물어왔다.

“그렇지만 아까 손에 뭔가 들고 있지 않았어?”

“아…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저기 있네. 내가 가서 보고 올래.”

“으아, 진짜 별거 아니라니까요. 그냥 제가 가서 가져올게요.”

몸 밖으로 열기가 후끈하게 퍼질 정도로 열이 났는데도 데이몬은 일어나려 애를 썼다. 결국 데이몬이 몸을 반쯤 일으켰을 때에서야 시에나가 패배 선언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위로 우루루 쏟아진 내용물을 본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다 뭐야?”“선물이에요. 도련님 시험 보실 때 힘내시라고 만들어 본 건데….”

말끝을 흐리는 시에나 대신 데이몬은 탄성을 지르며 선물을 하나하나 뜯어 보았다. 잘 포장되어 있던 병의 뚜껑이 열리자 상쾌한 페퍼민트 향이 둘 사이로 퍼졌다.

“들고 계신 건 페퍼민트, 여기 있는 건 로즈메리로 만든 차예요. 집중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만들어 봤어요.”

“이것도 차야?”

데이몬이 길쭉하게 포장된 상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시에나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요. 그건… 페퍼민트 오일이 든 롤온이에요.”

“롤온? 신기한 이름이네.”

생소한 단어에 데이몬의 얼굴에 호기심이 어렸다. 롤온이 담긴 상자를 데이몬이 조심스레 흔들자 달각달각 소리가 났다.

“뜯어 보셔도 괜찮아요.”

시에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데이몬은 상자를 열어 안의 내용물을 꺼냈다. 이윽고 시에나가 준비한 마지막 선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에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데이몬은 상자를 열어 안의 내용물을 꺼냈다. 이윽고 시에나가 준비한 마지막 선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지 크기의 얇은 스틱 안에는 노오란 페퍼민트 오일이 찰랑거렸다.

“어제 드워프에게 가서 주문한 물건이 이거야?”

“네, 맞아요.”

데이몬은 렌델이 도대체 어떻게 그 설계도를 보고 이런 걸 만들었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굳이 시에나에게 말을 꺼내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는 않았다.

“신기하게 생겼네. 이건 어떻게 쓰는 거야?”

“뚜껑을 돌려서 여시면 둥근 볼이 나오는데, 몇 번 문지르면 금방 오일이 나올 거예요. 손목 안쪽이나 목 뒤, 귀 뒤에 바르면 돼요.”

데이몬은 시에나의 설명을 듣고 그대로 따라 했다. 이내 데이몬의 몸에서 페퍼민트 향이 피어올랐다. 데이몬의 입술 끝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기분 좋다. 상쾌해.”

“공부할 때 쓰면 집중이 잘된다고 하더라고요. 시험… 아니, 그냥 평소에 쓰시면 좋을 것 같아서 만들어 봤어요.”

“정말 그럴 것 같아. 고마워… 시에나. 나 이런 선물은 처음 받아 봐.”

데이몬은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저 수빈이 예전에 시험공부 할 때 쓰던 롤온 스틱을 직접 만든 것뿐인데, 데이몬은 그 자그마한 스틱이 귀한 다이아몬드라도 되는 양 기뻐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다면 몇 개라도 더 만들어 줄걸. 아이처럼 기뻐하는 모습에 괜스레 죄책감이 들었다.

“다음에 또 만들어 드릴게요.”

“정말? 만들기 어렵지 않아?”

“아뇨, 어렵지 않고 오히려 재미있던 걸요. 사실 이건 처음이라 좀 조악한 편이에요. 다음에는 더 잘 만들어 드릴게요.”

시에나의 말에 데이몬은 정말 기쁘다는 듯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열이 오른 채로 너무 거세게 머리를 끄덕여서 그런지 어지러워 인상을 쓰는 걸 시에나에게 들키고 말았다.

“도련님 이제 그만 누우세요. 밤이 늦었으니 주무셔야죠.”

“그렇지만….”

“잘 때까지 곁에 있어 드릴게요. 걱정 말고 주무세요.”

아이 달래듯 시에나가 데이몬을 토닥였다. 데이몬은 자신을 빠르게 재우려는 시에나의 태도에 약간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순순히 침대에 몸을 누였다.

“자장가 불러 줘.”

“네?”

“전에 불러 줬던 거 있잖아. 들으면 잠이 잘 올 것 같아.”

열이 올라서 그런지 데이몬은 평소와는 달리 제법 아이다운 모습을 보였다. 시에나는 조금 어이없어하면서도 투정을 부리는 데이몬이 귀여워 잠들 때까지 노래를 불러 주었다. 시에나의 부드러운 자장가를 들으며 데이몬이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잘 자요, 모두 내일 즐겁게 다시 만나요… 도련님? 주무세요?”

시에나가 자장가를 부르다 말고 일정한 숨소리를 내기 시작한 데이몬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손을 눈앞에 가져다 대어도 미동도 없는 걸 보니 깊게 잠이 든 모양이었다. 평소 잠들 때까지 30분은 있어야 하는데, 10분 안에 이렇게 푹 잠든 모습을 보니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혹시나 하고 대 본 이마는 여전히 뜨거웠다. 시에나가 깊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 위에는 물리와 고대어 서적이 어지러이 늘어져 있었다. 항상 깔끔하게 책상을 정리하던 데이몬이었기에 그가 오늘 얼마나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시에나가 책상으로 다가가 데이몬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책상을 정리하던 시에나가 맨 위에 놓여 있던 노트를 툭, 떨어뜨렸다. 책상 위로 제법 묵직하게 울린 소리에 시에나가 화들짝 놀라 데이몬을 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펼쳐진 공책을 다시 접어 두려는데 그보다 먼저 빽빽하게 쓰인 데이몬의 글씨가 눈에 띄었다. 그가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적어 둔 공책인 모양이었다. 시에나는 데이몬의 단정한 글씨를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었다.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꾹꾹 눌러 쓴 티가 났다.

팔랑팔랑, 시에나가 저도 모르게 서서히 공책을 뒤로 넘겼다. 공책은 남는 공간 없이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뒤로 넘길수록 서툴렀던 고대어 서체가 유려해지고 깔끔해졌다.

혹 시험을 치러 갈 때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시에나가 책상 위에 늘어진 공책을 전부 모았다. 그렇게 모인 공책이 자그마치 일곱 권으로, 그 두께가 무려 한 뼘 반이나 되었다.

데이몬은 천재였지만, 노력하지 않는 천재는 아니었다. 리메리오 남작은 성서 공부 외에 다른 공부를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가정교사를 둬 기본적인 지식이 있는 다른 귀족들과는 출발선이 달랐다. 데이몬의 땀과 노력이 그대로 묻어난 공책들을 보는 시에나의 가슴이 미어졌다.

이렇게 노력했는데, 가엾게도.

책상 정리를 끝낸 시에나가 다시 침대맡으로 향했다. 닦아 준 것이 무색하게 데이몬의 얼굴은 또다시 땀으로 범벅이었다.

“어떡하나….”

그런 데이몬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시에나가 다시 수건을 적셨다. 시에나가 힘 있게 수건을 짜자 그 밑으로 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꽉 짠 수건으로 데이몬의 얼굴을 닦는 시에나의 표정이 한없이 어두웠다.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정말 열심히 공부했던 데이몬이었다. 공작은 기부금을 내면 되니 편안하게 시험을 치르라고 했지만 데이몬은 기필코 장학금까지 받아 낼 기세였다. 지금껏 신세를 진 공작에게 더 책임을 지우기 싫었겠지. 시에나도 그런 데이몬의 마음을 잘 알기에 지금의 상황이 너무 마음 아팠다.

왜 하필 지금일까. 앞에서 달뜬 숨을 내뱉는 데이몬을 보자니 또 다른 데이몬이 조금, 아니 많이 원망스러웠다. 데이몬은 아프다고 해도 시험을 보러 갈 게 뻔했다. 그러나 그가 과연 이 몸을 하고 시험을 잘 볼 수가 있을까. 계속되는 고열에 몸이 상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시에나는 열꽃이 피어오른 그의 얼굴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살짝 기운 달은 여전히 밝아 창문 너머로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불러… 볼까.”

시에나가 혼잣말을 뱉어 놓고 흠칫했다. 그를 깨울 키워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에나는 또 다른 데이몬을 부르는 게 데이몬에게 득일지 실일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이러다 그가 돌려주기 싫다며 시험을 치를 때까지 정신을 붙잡아 두면 어떡하지. 몸을 완전히 차지해 버리기라도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아니야, 안 돼.”

그러나 그가 데이몬의 정신을 비집고 나오는 것 또한 예견된 일이었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불러내 사정을 설명하면 혹 이해해 주지 않을까. 이 시험이 데이몬에게 어떤 의미고, 얼마나 중요한지 말한다면.

“어떡해야 하지.”

길쭉했던 초가 다 타는 줄도 모르고 오랜 시간 고민하던 시에나가 결국 데이몬의 귓가에 키워드를 속삭였다.

“…붉은 장미에 얽힌 비밀.”

두근, 말 한마디에 심장이 아프도록 뛰었다. 시에나는 긴장하며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도련님?”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데이몬은 여전히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시에나는 자신이 키워드를 잘못 말했나 싶어 목을 가다듬은 뒤 다시 한번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붉은 장미에 얽힌 비밀.”

아까보다 더 힘 있는 목소리였건만 데이몬은 여전히 무반응이었다. 시에나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거짓말을 한 건가? 그래 보이지는 않았는데. 아니면 여전히 도련님이 싸우고 계신 건가? 혼란스러워진 시에나는 이내 그의 귓가에 몇 번 더 속삭이다 침울해진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 * *

툭. 투둑.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몰려오는 피로에 쓰러지듯 침대 위에 엎어져 잠들었던 시에나는 누군가가 내는 소음에 설핏 잠에서 깨어났다.

“으음… 뭐야….”

투욱.

마악 달콤한 잠에 빠졌던 터라 이대로 다시 잠들고 싶었는데, 이번에는 더 큰 소리가 났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시에나가 부스스한 머리칼 사이로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창문에서 나는 소리였다.

뭐지, 귀신인가.

갑자기 잠이 확 깨는 기분에 시에나는 저도 모르게 이불을 움켜쥐었다. 등줄기에 토도독 소름이 돋아났다.

투욱.

“엄마야!”

그때 창문에 하얀 것이 툭 부딪혔다. 놀란 시에나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저게… 뭐야.”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관찰하니 창문을 덮친 하얀 무법자는 다름 아닌 눈이었다. 도대체 누구기에 이 오밤중에 2층 창문을 향해 눈덩이를 던지는 걸까. 결국 호기심에 자리에서 일어난 시에나가 비척비척 창가로 다가가 창문 걸쇠를 열었다.

“으앗.”

휘이잉, 바람에 의해 창문은 약간의 힘에도 활짝 열렸다. 열린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매서운 겨울바람이 시에나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밑에는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의 데이몬이 미소 띤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종아리까지 눈이 쌓인 정원에 서 있으면서도 그는 잠옷 차림이었다.

“내려와, 눈싸움하자.”

데이몬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이 열이 너무 올라 미친 게 아닐까. 깜짝 놀란 시에나가 외투를 집어 들고 다급하게 밖으로 달려 나갔다. 정문 보초를 서는 남자들은 전부 잠들어 있었다. 근무 태만도 이런 근무 태만이 없었다. 시에나가 혀를 차며 정문을 열자, 끼이익 소리와 함께 아까 있던 자리에서 그대로 시에나를 기다리는 데이몬이 눈앞에 보였다.

“도련님! 어쩌려고….”

타박하려던 시에나는 이내 말을 멈추었다. 데이몬의 동공이 고양이처럼 세로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평소보다 더 치켜 올라가 반항적이어 보이는 눈매와 자신만만한 표정.

‘그’였다.

시에나가 놀라 토끼 눈으로 바라보자 그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네가 불러 놓고 왜 그렇게 놀란 표정이야.”

정말 시에나가 그를 불러낸 것이다. 시에나는 잠시 할 말도 잊고 그의 찢어진 동공만 마냥 바라보았다. 굳어 있는 시에나의 눈앞에 그가 손바닥을 휘휘 저었건만, 시에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장난기가 발동한 그가 그런 시에나의 얼굴을 향해 작게 뭉친 눈덩이를 던졌다.

팡!

“악!”

부드럽게 뭉친 탓에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 한기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리기엔 충분했다. 얼굴에 차가운 눈을 정통으로 맞은 시에나가 씩씩대며 그를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에요!”

“하도 멍 때리고 있길래 장난 좀 쳐 봤지.”

사람 얼굴을 맞혀 놓고도 반성이라고는 없는 뻔뻔스러운 태도에 기가 찬 시에나가 이내 닥치는 대로 눈을 잡아 그에게 흩뿌렸다. 그가 낄낄 웃으며 여유롭게 시에나가 던지는 눈덩이를 피했다.

“그렇게 느려서야 평생 내 발끝이나 맞혀 보겠어?”

“거기… 서요!”

그의 도발에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시에나가 본격적으로 뛰며 그에게 눈덩이를 던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숙련된 기사처럼 뒷걸음질 치며 시에나가 던지는 눈덩이를 요리조리 잘도 피했다. 그를 한참 쫓던 시에나가 나무뿌리에 걸렸는지 철퍽 넘어졌다. 대자로 엎어진 시에나에게 깜짝 놀란 데이몬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손잡고 일어서… 읍.”

넘어진 시에나가 눈 속에서 데이몬의 발목을 잡은 건 순식간이었다. 데이몬이 뺄 새도 없이 시에나가 그의 얼굴에 직격탄을 날렸다.

퍽!

시에나가 던진 눈덩이에 데이몬의 얼굴이 순식간에 눈사람이 되었다. 기습에 당황해서 딱딱하게 굳은 데이몬을 보며 시에나가 청량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그러게 왜 놀리셔서는…!”

그러나 상황이 역전된 건 순식간이었다. 시에나가 눈을 한 번 깜빡거리기도 전에 데이몬은 어느새 시에나의 몸 위에 올라타 있었다. 깜짝 놀란 시에나가 벗어나려 몸을 비틀었지만 데이몬은 그녀를 팔 안에 가두어두고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데이몬의 쭉 찢어진 눈동자는 평소와는 다른 기이한 열망을 담고 있어, 시에나는 그가 조금 두려워졌다. 이내 그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순진한 아가씨인 줄만 알았는데 제법 꾀도 쓸 줄 알잖아.”

분명 같이 웃는 모습인데 데이몬의 웃음과 그의 웃음은 완전히 다른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데이몬이 웃는 모습은 수줍은 봄의 햇살 같다면, 그는 한겨울 서리와도 같았다. 시에나는 그런 그의 모습이 어색해 시선을 피했다. 그가 그런 시에나를 한 손으로 안아 단번에 일으켜 주었다.

“으앗…!”

순식간에 번쩍 일어나게 된 시에나가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감기 걸린다.”

“도련님이 이렇게 만들었잖아요.”

“도련님이라?”

시에나의 볼멘소리에 그가 다시 질문으로 답했다.

“도련님이… 왜요?”

“네 사랑하는 도련님은 여기 잠들어 있는데 그 호칭으로 부르는 거 어색하지 않나 싶어서.”

톡톡, 자신의 가슴께를 치며 그가 그렇게 말했다. 데이몬의 얼굴을 뒤집어쓰고 데이몬은 안에 있다고 말하는 그 모습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시에나가 잔뜩 경계의 빛을 띤 채 말했다.

“그럼, 뭐라고 불러요?”

“데이몬이라고 불러.”

“그건 좀…”

“나 참, 우리 사이에 이름 좀 부르면 어때서.”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인데요?”

“글세. 입 맞춘 사이?”

능글거리며 말하는 데이몬의 대답에 엉덩이에 묻은 눈을 털던 시에나의 행동이 뚝 멈추었다.

“제, 제, 제, 제가 언제… 그쪽이랑 이, 입을 맞췄다고 그래요!”

“축제 날 불꽃놀이에 취해서 여기에 뽀뽀했잖아. 이상한 옷 입고.”

제 입술을 톡 건드리며 그가 장난스레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데이몬의 기분은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이상한 옷 아니에요. 무대 의상이었다고요. 그리고… 저는 당신이랑 입 맞춘 거 아니에요.”

“맞아, 빌어먹게도 예뻤지.”

그가 눈썹을 찌푸리며 씹어뱉듯이 말했다. 저게 칭찬이야 욕이야, 시에나는 혼란스러워졌다. 무어라 답을 내놓기도 전 데이몬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너, 얼굴은 왜 그런 거야?”

가장 듣고 싶지 않은 화제를 가장 듣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 들은 시에나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시에나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이리 와 봐.”

데이몬이 손을 뻗어 조심스레 시에나의 얼굴을 잡았다. 그러나 그의 배려가 부족했는지 시에나의 입술이 오목하게 모이며 붕어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시에나는 인상을 쓰며 그의 손을 탁 쳐 냈다.

“하지 마요! 그냥 뭐가 난 것뿐이에요.”

“아픈 건 아니고?”

이런 말 하는 건 데이몬이랑 똑같네. 시에나는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리고… 도련님한테도 이유에 대해서 설명했는데 왜 몰라요?”

“내가 걔 안에서 24시간 깨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주 강한 사건이 아니면 나도 깊게 알려고 들지 않으니까.”

그라고 해서 데이몬이 겪은 모든 일들을 함께 겪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데이몬은 그가 깨어났을 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으니까. 시에나는 새로운 사실을 머릿속에 기억하며 그에게 톡 쏘아붙이듯 물었다.

“그런데 이번엔 왜 그렇게 나오려고 했던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지.”

“무슨… 일인데요?”

“…했잖아.”

“뭐라고요?”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 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자 시에나가 재차 물어 왔다. 그는 목덜미를 긁으며 수줍게 대답했다. 그의 콧잔등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도련님이랑 키스했잖아.”

…?

전쟁터에서 사람들 죽어 갈 때도 나와 보지 않던 사람이, 고작 가벼운 입맞춤 때문에 그 난리를 피우면서 나오고 싶어 했다고? 차라리 시험을 망치려고 나오려 했다는 게 더 신빙성 있어 보였다.

“겨우 그것 때문에 나오려고 했던 거예요?”

“겨우? 그럼 겨우 그깟 키스 나랑도 할 수 있겠네?”

딸꾹. 이번엔 진짜 놀랐다. 시에나는 그의 말에서 장난기를 찾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그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자기 좋을 대로 데이몬이었다가 아니었다가 하는 또 다른 데이몬의 말과 태도를 도저히 종잡을 수 없어, 시에나는 이야기를 하는 내내 더 혼란스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제가 왜 그쪽이랑 키, 키, 키스를 해야 해요?!”

“왜? 어차피 같은 사람이잖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면서도 슬쩍 시에나의 눈치를 보는 그의 모습은 초반, 시에나에게 애정을 갈구하던 데이몬과 몹시 흡사해 소름이 끼쳤다.

“싫어요.”

시에나의 딱 자른 거절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

“전 도련님 외에는 키스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나도 도련님인데?”

“아까 데이몬이라고 부르라면서요.”

제 발에 제가 걸려 넘어진 꼴이 된 데이몬이 시무룩해졌다. 축 처진 눈썹과 어깨가 그렇게 처량 맞아 보일 수 없었다. 시에나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어깨를 두드려 주고 싶은 마음을 꾸욱 내리눌러야 했다.

“내가 키스해 주기 전까지는 이 몸을 돌려주지 않겠다고 해도?”

“…뭐라고요?”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지만 그의 섬뜩한 협박에 소름이 끼쳤다. 시에나의 불안한 상상이 현실이 되는 건 아닌가 싶어 두려웠다. 그와 동시에 화가 났다. 제 불안감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하려는 그 행동은 절대 묵과할 수 없었다. 시에나는 단숨에 달려가 데이몬의 멱살을 잡았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데이몬이 숨을 헉, 들이켰다.

“다시 한번 말해 봐요. 뭐라고 했어요?”

“키스해 주기 전까지는 이 몸을 돌려주지 않겠다고 했어.”

“지금 키스하는 거 가지고 저 협박하는 거예요?”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요.”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지만, 그렇게 느낀다면 어쩔 수 없지.”

그는 뻔뻔스럽게 나오기로 작정했는지 멱살을 잡힌 상태에서도 술술 말을 뱉어 냈다. 시에나의 키가 데이몬보다 훨씬 작았기에 멱살을 잡았다고 해도 공중에 뜨지 않은 상태라 별로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 파렴치한 언사에 따귀라도 날려 주련만, 상대는 데이몬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또 다른 데이몬이었다.

시에나가 어이가 없어 그를 노려보는데도 그는 여유로운 얼굴로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침묵이 둘을 감싸고, 이내 겨울바람이 사이로 휘몰아쳤다.

“잘 생각….”

“콜록…!”

찬 바람이 폐부를 스치자 온몸에 한기가 들며 기침이 터져 나왔다. 기침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수초 동안 시에나를 괴롭혔다.

“콜록, 콜록, 켁….”

시에나의 심상치 않은 기침 소리에 데이몬이 눈썹을 꿈틀댔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할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권유했지만 시에나는 그 목소리에서 묻어 나온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시에나가 재채기 한 번만 해도 온몸을 따뜻한 것으로 둘둘 말아 주는 데이몬이다. 그 역시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생각보다 훨씬 더 시에나를 신경 쓰고 있었다.

이 사람도 혹시 도련님처럼 나를 좋아하는 걸까. 그래서 키스도 하고 싶은 거고. 그렇다면 이걸 잘 이용한다면 제가 원하는 결과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법 신뢰할 만한 가설에 시에나가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며 다시 콜록, 기침 소리를 냈다. 그의 표정이 볼만하게 바뀌었다.

“들어가지. 날도 추운데.”

“안 들어갈래요.”

“…뭐?”

“안 들어간다고 했어요.”

“괜한 반항은 그만두지. 너 지금 입술이 새파래.”

어디 입술만 새파란가. 몸도 덜덜 떨리고 있고 살을 에는 추위에 볼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그러나 시에나는 떼를 쓰는 아이처럼 고집스레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마요.”

“지금 네 몸 가지고 나 협박하는 거야?”

“아뇨, 그런 건 아닌데요.”

“맞는 것 같은데.”

“제 의도는 그게 아니었지만, 그렇게 느낀다면 어쩔 수 없죠.”

바로 몇 분 전에 데이몬이 친 대사를 고스란히 돌려주는 시에나의 언사에 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시에나는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시에나의 빨갛게 얼어붙은 뺨과 새파래진 입술을 번갈아 바라보던 데이몬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마음대로 해. 난 들어갈 거니까.”

차갑게 말하며 데이몬이 휙 뒤돌아 성으로 향했다. 눈이 종아리까지 쌓여 걷기가 쉽지 않을 텐데도 수월하게 걸어 나가는 데이몬의 발걸음은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쿨쩍, 시에나는 손을 모아 빨개진 코를 녹이며 문 앞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는 데이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데이몬은 시에나가 눈밭에서 덜덜 떨면서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탕,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뭐야…?”

텅 빈 정문 앞을 바라보던 시에나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결국 실패인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데 쾅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젠장.”

데이몬이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시에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이내 그녀를 덥석 안아 들었다. 갑자기 허공에 뜬 시에나가 당황하며 발을 동동 굴렀지만 데이몬이 옴짝달싹 못 할 정도로 그녀를 꽉 안고 있어 그 반항에 큰 의미가 있진 않았다.

“놔, 놔 줘요!”

“가만히 있어. 들어가면 놔 줄 테니까.”

“놔, 이 나쁜 놈아!”

퍽, 시에나가 그의 등을 주먹으로 때렸다. 이미 데이몬의 몸이라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는 폭력성에 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갖은 폭행을 당하면서도 데이몬은 시에나를 절대 놓지 않았다. 성에 들어가기도 전 기운을 뺀 시에나가 헉헉대며 데이몬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데이몬이 시에나를 그녀의 방으로 데려가 침대 위에 털썩, 내려놓았다.

“윽.”

이불이 워낙 부드러워 아프지는 않았지만 조금 놀란 터라 시에나의 입에서 작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 작은 소리를 놓치지 않은 데이몬이 움찔했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벽난로에 걸린 냄비 위에 물을 부었다. 시에나가 불편한 자세를 바꾸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부탁이니까 제발 얌전히 있어.”

“싫은데요.”

사실 이불이 너무 따뜻해서 차마 나갈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시에나는 괜스레 툴툴거렸다. 데이몬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금방 따뜻해진 물을 통 안에 부었다. 뜨거운 물이 담긴 통 안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났다. 뜨거운 물을 찬물과 섞어 적당한 온도를 만든 데이몬이 이내 그 물통을 들고 시에나의 발치에 섰다.

“뭐 하는 거예요?”

데이몬은 대답 대신 시에나의 슬리퍼를 벗기더니 이내 물통 속에 그녀의 발을 집어넣었다. 퐁당, 꽁꽁 언 발에 따뜻한 물이 닿자 몸이 저절로 부르르 떨렸다.

“뜨거워요….”

“조금만 참아, 발이 너무 얼어 있어서 그래. 적응하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

그는 딱 잘라 말하면서도 손부채질을 하며 물을 식혔다. 아까부터 말과 행동이 완전히 반대였다. 시에나가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이따금 손으로 발을 조금씩 비비기도 했다. 그 극진한 대접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시에나가 볼을 긁적거렸다. 그의 말대로 시간이 지나자 발의 체온이 올라가며 물이 더 이상 뜨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이 한겨울에 슬리퍼를 신고 나올 수가 있지?”

데이몬이 기가 차다는 듯 물었다. 시에나가 신고 있던 건 실내용 슬리퍼였다. 데이몬이 잠옷 차림으로 밖에 나온 걸 보고 급한 마음에 신발도 갈아 신지 못하고 나온 기억이 났다.

“그쪽도 잠옷 차림이었잖아요.”

“너랑 내가 같아? 넌 평범한 사람이잖아.”

“도련님도 평범한 사람이에요.”

“젠장, 난 달라. 추위는 잘 느끼지도 못하고, 동상에 걸린다 해도 금방 낫는다고.”

시에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몰랐던 사실이었다.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건 ‘그’였을 때의 데이몬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문득 궁금증을 느낀 시에나가 데이몬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도련님은 추위 더위 다 느끼시던데.”

“그건 걔가 멍청해서 그래.”

그의 폭언에 시에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리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암, 그렇고말고. 부탁이니까 다시 앉아서 발 좀 더 녹여.”

시에나는 마뜩잖다는 표정으로 다시 천천히 침대에 앉았다. 그런 시에나의 발등 위로 데이몬이 계속해서 따뜻한 물을 끼얹어 주었다.

“자세히 설명해 줘요.”

“후… 그래. 이 몸 안에 마나가 많은 건 알고 있어?”

“네, 알아요.”

“그런데 그냥 많은 게 아니라 엄청 많아.”

“얼마나 많은데요?”

“글쎄, 제대로 폭발한다면 이 세계를 소멸시킬 수 있을 정도?”

데이몬의 예시가 시에나에게는 너무나 섬뜩하게 들렸다. 그는 농담하는 게 아니었다. 세계 멸망이라니, 한 명이 가진 힘이 정말 그렇게 클 수도 있는 건가. 책에서 본 미래가 정말로 이루어질 수도 있을 거라는 가설에 확신이 들자 두려움이 앞섰다.

“그런데 이걸 아직 다루는 방법을 모르니까 아파도 치료할 줄도 모르고 추위나 더위도 그대로 느끼는 거지. 뭐 평생은 아니고 언젠가는 깨닫게 될 테니까 너무 걱정할 거 없어.”

그의 부가 설명에도 시에나의 표정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그가 마나를 다루게 되는 것도 문제였다. 데이몬이 또래에 비해 어른스럽다고는 해도 고작 열두 살이다.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몸과 정신에 거대한 힘이 주어진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시에나는 데이몬이 몸도 마음도 충분히 성장한 뒤 마나를 다루는 법을 깨닫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데이몬은 꼭 아카데미에 가야 했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으로 컸으면 했다.

“데이몬, 부탁이 있어요.”

시에나가 데이몬의 이름을 이렇게 부른 건 처음이라 그는 잠시 감격과 혼란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뭐, 뭔데?”

“도련님은 내일 입학시험을 치르러 가야 해요. 그리고 그 아카데미에 합격하는 게 현재 도련님의 꿈이고요.”

“그래서?”

“도련님이 꿈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세요. 그걸 위해서 정말 열심히 공부해 오셨는데, 열 때문에 포기하게 되는 건 너무 가엾잖아요.”

“…그것뿐이야? 입학시험을 치르게 해 달라는 거?”

입학시험 정도는 충분히 치르게 해 줄 듯한 말투였다. 그는 순순한 태도에 시에나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전에 듣기로는… 도련님이 한 달에 한 번 이름 모를 열병에 시달린다더군요. 아마 그쪽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겠죠.”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데이몬이 으흠, 헛기침을 했다.

“몸 안에만 있으려니 지루하잖아. 가끔 빠져나오고 싶을 때도 있는 법이지.”

“마르바스성에 있을 때에는 그나마 괜찮아요. 그렇지만 도련님이 아카데미에 들어가면 상황은 달라져요.”

“왜 달라지는데?”

“모르는 곳에서 앓는 것과 아는 곳에서 앓는 건 다르니까요. 그리고 거긴 전교생 기숙사제라고 들었어요. 혹 인격이 바뀐다는 걸 누군가 안다면, 문제가 크게 번질 수도 있어요.”

“그런데?”

“네?”

“그게 뭐?”

데이몬은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시에나는 기가 차서 쏘아붙이듯 말했다.

“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사탄으로 몰려 종교 재판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고요.”

“다 죽이면 되잖아.”

“뭐라고요?”

“아까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인간 중에서는 나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어. 종교 재판을 받게 된다 한들 다 죽이면 그만이지, 누가 감히 나를 심판해?”

너무나 그다운 말에 시에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의 오만함을 목전에 둔 시에나는 데이몬의 입장을 이해시키기 위해 잠시 머리를 굴려야 했다.

“그러니까… 그래. 도련님은 그 아카데미에서 배우시려고 가는 거예요. 친구도 만들고 소중한 사람들도 만들기 위해서 가는 건데 다 죽이면 대체 누구랑 친구를 해요?”

“내가 장담 하건데 걔는 거기서 누구랑 사귀고 싶은 생각은 없을걸.”

“그걸 어떻게 알아요?”

“걔한테는 너만 있으면 되니까. 나 역시도 그렇고.”

그의 직구에 시에나가 입을 꽉 다문 채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점점 수세에 몰리는 기분이었다.

“그, 그래도 좁은 인간관계는 좋지 않아요. 적어도 저는 그쪽이 도련님의 기회를 빼앗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럼 나보고 6년 내내 나오지도 말고 박혀 있으라고?”

“그, 방학 때 나오고 그러면 되잖아요. 마르바스성에 오는 때라든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에나는 자신이 몹시 이기적인 부탁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몬의 안에 있는 그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시에나는 모른다. 출구 하나 없이 사방이 막힌 방 안에서 TV를 보는 느낌이 아닐까 상상해 볼 뿐이었다. 분명 그 기분은 끔찍하겠지. 그는 허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죄책감이 물밀 듯 몰려들었다.

“잠깐만요. 내가 너무 이기적인 부탁을 한 것 같아요. 다른 방법을 생각….”

“만약 내가 그 부탁을 들어준다면, 넌 나한테 뭘 해 줄 거지?”

시에나가 말을 번복하려고 할 때, 그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어왔다.

“뭘… 해 줄 거냐고요?”

“그래. 네가 뭘 해 주느냐에 따라서 까짓거 좀 참아 볼 수도 있을 것 같거든.”

“뭐, 뭘 원하는데요?”

시에나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우아하게 한쪽 다리를 꼬며 여유롭게 말했다.

“내가 이 성에 올 때마다, 매일 밤 나랑 키스해.”

“네…?”

뒤늦게 그의 말을 이해한 시에나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지, 지, 지금 뭐라고….”

“걔랑 한 거 나랑도 하자고.”

하얗게 질린 시에나와는 달리 그는 한 치의 표정 변화 없이 무심하게 답했다. 어떻게 이런 문란한 인간이 다 있을까? 시에나는 도련님께 정말 죄송하지만 그가 정말 악마가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도련님, 도련님 속에 속이 시커먼 악마가 있어요…!

“제, 제가 아까 분명히 거절했잖아요.”

“그래? 그럼 나도 네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없지.”

“치사하게….”

“그래, 나 치사해.”

나이가 조금만 많았다면 조금 더 능수능란하게 거부할 수 있었을 텐데, 아직 어리고 이런 이야기에 대해 면역력이 부족한 시에나는 도대체 어떻게 답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대체 왜 이렇게 키스하는 걸 좋아하는 거야?

영혼이 밖으로 삐죽 빠져나온 듯한 표정의 시에나를 보던 그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바싹 다가갔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시에나가 몸을 뒤로 빼자, 그가 그녀에게 닿을락 말락 한 자세 그대로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해 봐. 이게 정말 나쁘기만 한 거래인지. 나 역시 네가 먼저 입맞춤을 할 만큼 날 좋아하지 않았다면 제안조차 하지 않았을 거야.”

그놈의 입맞춤은 도대체 언제까지 우려 먹을 셈인지! 시에나는 울컥하여 그를 노려보았다.

“이건 우리 둘 다에게 유리한 거래야. 네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굿 나잇 키스를 하듯 입을 맞추면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도련님이 즐거운 아카데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거지.”

“뭐가 유리하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난 결국 데이몬이야. 네가 좋아하는 상대. 얼굴도 몸도 이렇게 똑같다고.”

“당신과 도련님은 달라요.”

시에나가 딱 잘라 말하자 그가 눈을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정말 다르다고 생각해 시에나?”

그의 말투는 잠시 데이몬의 정신이 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착각할 만큼 흡사했다. 오만했던 그는 사라지고 유약한 인상의 데이몬이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의 연기에 시에나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 마요!”

시에나가 기겁하며 그를 확 밀치자 데이몬은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 그를 보며 시에나는 정말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한순간이나마 그를 같은 사람으로 착각할 수가 있지.

더욱 질리는 점은 눈이 거의 사라질 정도로 활짝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이 필요 이상으로 근사해 데이몬을 봤을 때처럼 두근거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면이 다르더라도 외양이 너무 똑같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시에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려 심호흡을 했다.

“그래서 결정했어?”

“자, 잠깐요. 생각하고 있잖아요.”

“아깐 단호하게 거절하더니, 생각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면 내 제안이 매력적이긴 했나 보네.”

그는 흡족하다는 듯 한쪽 다리에 손깍지를 끼고 시에나를 기다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여유가 넘쳐흘러 보여 시에나는 괜히 약이 올랐다.

“결정했어요.”

“벌써?”

“네. 나는 역시 당신과 입 맞추고 싶지 않아요.”

시에나의 대답에 안 그런 척하지만 그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군.”

“대신, 다른 곳에 입 맞추는 건 허락할게요.”

“다른 곳?”

“네. 입은… 싫어요.”

아까 그가 데이몬인 척했을 때 두근거리기 시작한 심장이 아직도 뛰는 걸 보면, 그와 지속적으로 키스했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입술에 키스하는 건 어떻게 보면 데이몬을 배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 다른 곳이라면 어디에다 하든 상관없는 거야?”

그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묻자 시에나가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당연히 이마나 손 같은 부위죠.”

“뭐야 그게, 건전해.”

“이것도 충분히 도련님께 찔리는 일이거든요? 어쨌든 밤마다 도련님 몰래 당신을 깨워야 하는 거잖아요.”

시에나가 반박해 오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기다리는 시간 동안 시에나의 손이 땀으로 축축하게 배어들었다.

“알았어.”

대답은 짧고 간결했다. 시에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이 세계의 스킨십은 꽤 친근해 시에나는 종종 하녀들과도 아침 인사로 비쥬(볼 키스)를 하곤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와도 그저 친근함의 표현일 뿐이라 자위할 수 있었다.

“좋아요. 참 그리고 데이몬.”

“응, 시에나.”

시에나가 데이몬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강아지가 주인의 부름에 응하듯 그녀를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차가운 눈빛 속에 숨겨진 다정함에 시에나의 가슴이 다시 한번 쿵 떨어졌다.

시에나는 문득 훗날 둘에 대한 애정을 구분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자신이 없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그가 이렇게 다정하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질문을 하려고 했는지는 잊어버리고, 감정만이 가득 차 버리는데 나중은 어떨까.

혹, 데이몬보다 그를 더 좋아하게 되어 버린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가설에 시에나는 어떻게든 둘을 철저히 분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데이몬이라고 부르는 건 안 될 것 같아요.”

“왜 갑자기?”

그는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조금 전만 해도 데이몬이라고 불러 놓고 안 되겠다고 하니 의아하게 느껴질 만도 했다. 그러나 시에나는 당연하게도 이유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았다.

“그, 그냥 역시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뭐라고 부르고 싶은데?”

“당신이 가진 다른 이름은 없어요?”

“없지.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게 네가 처음인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시에나는 그 말에 괜스레 가슴이 아파 왔다. 그 긴 시간 동안 그 역시 데이몬만큼이나 외롭지 않았을까. 먹먹해지는 기분에 시에나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네가 지어 주면 되겠네.”

“…네?”

“데이몬으로 부르기 싫다며. 그럼 내 이름, 네가 지어 주면 되잖아.”

그게 그렇게 간단해도 되는 걸까. 시에나는 약간 겁먹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이름을 지어 준다는 작은 행동이 나비 효과를 불러오진 않을까 두려웠다. 그렇다고 제가 꺼내 놓고 없던 걸로 하자는 것도 좀 그랬다. 시에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꺼냈다.

“그럼… 데이나?”

“그건 싫어. 걔가 여장했을 때 지어 준 이름이잖아.”

그의 딱 자른 대답에 시에나가 찔리는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이름을 지으라니, 시에나의 머릿속에 영어로 된 이름들이 마구 돌아다녔다.

“찰스?”

“싫어.”

“한스?”

“한스가 누군지 알거든?”

“윌리엄?”

“계속 그렇게 대충 지을 거야?”

시에나가 떠오르는 대로 내뱉자 그가 결국 핀잔을 주었다. 시에나가 입을 쭉 빼고 생각에 잠겼다. 어느 정도 그와 관련되어 있으면서 데이몬과는 완전히 다른 이름이… 뭐가 있을까.

그는 시에나가 어떤 이름을 지어 줄지 내심 기대하는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아까부터 자꾸 데이몬과 닮은 표정을 짓는 그를 볼 때마다 피어오르는 아련한 감정에 시에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굴러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마르바스.”

“응?”

“마르바스요. 그쪽 이름.”

“데이몬 오웬 마르바스니까, 마르바스? 생각보다 상상력이 부족하군.”

놀리듯 하는 말에도 시에나는 발끈하지 않았다. 그저 물었을 뿐.

“그래서, 싫어요?”

“아니. 아주 좋아. 처음으로 가진 이름인걸.”

마르바스는 흡족한 미소를 만면에 띠며 답했다. 그는 계속 자신의 이름을 읊조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요?”

“그래. 이름도 얻었겠다, 거래도 했겠다 너 재우려면 이젠 가야지.”

창을 타고 온 공기에서는 새벽 냄새가 났다.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난 모양이었다. 만남부터 사사건건 티격태격했던 둘이지만 그가 간다고 말하자 시에나는 안심이 되면서도 묘하게 서운함을 느꼈다.

“얼른 가세요.”

제 감정을 들킬까 시에나가 부러 퉁명스레 말했다.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들에 머리가 아파 왔다. 마르바스는 그런 시에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왜 안 가요?”

그의 뜨거운 시선에 시에나가 당황해 말을 더듬자 그가 얄밉게 웃으며 말했다.

“할 거 해야지. 약속했잖아.”

그의 말에 시에나의 얼굴이 농익은 자두처럼 새빨개졌다.

“네, 네?”

“할 거. 입맞춤.”

그렇게 말하며 그는 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그게…. 오늘부터였어요?”

“그래. 시험 치게 해 달라며? 난 오랜만에 나와서 좀 활동하고 싶은데 얌전히 양보하기엔 좀 억울하거든. 보상이라도 받아야 하지 않겠어?”

묘하게 설득력 있는 말에 시에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에게 손을 내주었다. 마르바스가 시에나의 손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그의 손은 창밖의 바람처럼 서늘했다. 마르바스는 느릿하게 시에나의 손을 제 입술로 가져다 대었다.

“……!”

손등에 하는 가벼운 입맞춤을 예상했으나, 그의 입술이 향한 곳은 검지와 중지 사이였다. 손이 차갑기에 입술도 차가울 줄 알았는데, 그의 입술은 대장간의 화로처럼 뜨거웠다. 한 번도 남의 입술이 닿아 본 적 없는 여린 살에 열기가 닿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뱃속이 간질간질하고 순식간에 몸이 달아올랐다.

그는 마치 전쟁터로 향하는 연인처럼 오랜 시간 시에나의 손가락 사이에 입을 맞추며 집요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끈질긴 시선에는 시에나를 향한 굴절된 탐욕이 숨겨져 있었다. 그의 시선과 행위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시에나가 손을 뿌리치며 거세게 숨을 들이켰다. 혀가 닿은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질척했다.

“뭐 하는 거예요…!”

“뭐 하는 거긴, 보시다시피 약속을 이행했지.”

“내가 말한 건 이런….”

이런 징그럽고 야릇한 게 아니었단 말이야.

시에나는 울상을 지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반박할 거리가 딱히 없었다. 그는 손이나 볼에 입 맞추라는 시에나의 말을 충실히 지켰으며, 그 농밀함이나 시간에 대해서는 이야기한 바가 없었다. 그렇지만 시에나라고 손가락 사이의 여린 살 부위에 입 맞추는 게 이런 기분이 들 줄 알았겠는가. 마르바스는 한없이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에나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잘 자.”

적당히 낮은 그의 목소리에 시에나는 어쩐지 또 이상한 기분이 들 것 같아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탁. 문이 닫히고 시에나는 참아왔던 숨을 모두 몰아쉬었다.

“후우우우우….”

온몸의 진이 다 빠져 버린 기분이었다. 실 끊어진 인형처럼 시에나가 침대에 털썩, 눕자마자 격렬한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잠깐 새 몇 년은 지나 버린 기분이었다. 대체 어쩌자고 그런 계약을 했을까.

“아악.”

제게 향해 있던 집요한 시선이 또다시 떠오른 탓에 시에나는 이불을 팡팡 걷어찼다.

“미쳤지, 미쳤어.”

새로운 흑역사를 쓴 기분에 시에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앞으로 이런 걸 어떻게 견디려나. 역시 너무 섣불렀던 걸까. 시에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과거의 자신을 후회하며 다시 한번 이불을 향해 킥을 날렸다.

그러나 오늘 마르바스가 한 파렴치한 행동이 근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비해서 몹시 솜털같이 가볍고 순진했다는 건 시에나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 * *

“도련님! 축하드려요!”

펑!

시에나가 식당에 막 들어선 데이몬의 위로 폭죽을 날렸다. 떨어지는 분홍색 꽃가루를 맞으며 데이몬은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식당에는 공작과 아이작, 노파, 로하엘 외에도 수많은 사용인들이 데이몬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로하엘과 공작은 데이몬을 더없이 자랑스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노파와 아이작의 손에는 축, 해밀턴 아카데미 수석 합격! 이라는 팻말이 들려 있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데이몬이 얼굴을 상그레 붉히며 뒷목을 긁적거렸다.

“감사합니다. 축하해 줘서 고마워, 시에나.”

“정말 대단하세요. 수석이라니!”

“네가 자랑스럽구나, 데이몬.”

공작은 감격에 젖어 평소보다 조금 더 고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되는 칭찬에 데이몬의 콧잔등이 더 붉어졌다.

“수석 입학자는 입학금이 전액 면제라지?”

“예. 숙부님께 폐를 끼쳐드리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원, 녀석도. 입학금 같은 걸 신경 쓰고 있었나? 그 정도는 나한테 돈도 아닌 걸 알고 있지 않느냐.”

“그래도 제힘으로 해내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답하며 데이몬이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 내 잘못이다. 너도 귀여운 조카가 있어 봐야 그 조카가 널 믿고 의지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았을 텐데.”

공작이 살짝 안타까워했지만 금세 분위기를 전환시키려 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 되었든 공작은 그가 기특해 죽겠다는 눈빛이었다.

“그건 나중으로 접어 두도록 하고, 고생한 만큼 오늘은 먹고 즐기도록.”

“예, 감사합니다.”

“자, 자. 모두들 잔 드세요!”

로하엘이 제 앞에 놓인 포도주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시에나는 사과주스가 담긴 잔을 데이몬에게 건네며 밝게 미소 지었다. 이윽고 은으로 만든 잔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각하, 건배 전 축하사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로하엘의 제안에 공작이 잠시 생각하다 이내 흐뭇한 미소를 띠며 답했다.

“내 사랑하는 조카의 밝은 앞날을 위하여.”

“위하여!”

챙-.

은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이어졌다. 로하엘은 자신이 가르친 데이몬이 수석 합격을 한 게 퍽 기뻤던 듯 평소의 배는 흥분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아이작과 노파는 조잘조잘 서로의 근황을 묻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분위기에 시에나도 기분이 들뜨는 걸 느꼈다.

눈앞에는 수많은 요리가 펼쳐져 있었다. 주방장과 사용인들이 온갖 고민과 노력 끝에 만들어낸 식탁은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정향과 향초를 넣어 구운 꿩고기와 거세한 수탉구이, 사슴고기 스튜, 뿌리채소와 새고기를 번갈아 끼워 노릇노릇하게 구운 꼬치 등 수많은 고기 요리가 있었지만 개중에서도 가장 압권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나타난 송아지 통구이였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송아지 통구이는 시럽을 발라 반짝이고 있었으며, 잔열로 인해 기름이 지글지글 끓어 식당 전체에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

성기사의 방패만큼이나 큼직한 접시에는 화려한 외양에 비해 속의 아주 연한 부분만을 먹어 사치스럽기 그지없는 아티초크가 가득 담겨 있었고, 촙 스테이크와 케이퍼, 허브 등 신선한 푸성귀로 가득한 샐러드가 고기가 담긴 접시 사이에서 군데군데 상큼함을 뽐내고 있었다.

디저트로는 설탕에 조린 배와 레네톤에서 큰마음 먹고 들여온 딸기로 만든 프레지에(딸기의 단면이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있는 케이크), 고소한 냄새가 나는 희고 부드러운 블라망제(우유에 생크림, 설탕, 젤라틴, 향로 등을 섞어 냉각하여 굳힌 젤리 모양의 과자), 몰랑몰랑하고 윤기 흐르는 커스터드 푸딩과 선명한 색의 달콤하고 짭짜름한 사탕 등이 가득했다.

은잔 옆에는 질 좋은 포도주와 향료를 넣고 꿀과 물을 끓여 발효한 벌꿀술 미드가 각자의 독특한 향을 뽐내고 있었으며, 고소하고 몽글몽글한 맛의 호박주스와 사과를 곱게 갈아 만든 사과주스, 포도주만큼이나 새콤달콤한 향을 내뿜는 포도주스와 같이 시에나와 아이작, 데이몬을 위해 준비한 음료도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이 음식들은 시에나와 데이몬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고생한 사용인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데이몬과 기사이자 귀족인 로하엘에 이어서 일국의 공작과 한자리에 앉아 있는 것에 쭈뼛쭈뼛 긴장하던 사용인들은 하나둘씩 술이 들어가자 흥이 올라 풀어지기 시작했다.

“로하엘 님, 좋아해요!”

급기야 술에 취한 하녀 하나가 로하엘에게 고백하며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었다. 로하엘은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며 정중하게 거절했고, 싸늘해질 뻔한 분위기에 기사이자 로하엘의 친구인 기사 하나가 로하엘에게 독한 벌주를 마시게 함으로써 수습했다.

음유 시인 뺨치게 노래를 잘하는 기사가 선창을 시작하며, 그에 맞추어 그 노래를 아는 사람들이 후창을 했다. 둥근 돔 형태의 연회장을 울리는 떼창에 시에나의 귀가 멍멍해질 정도였다.

노래가 멎어 들 무렵 아이작이 사이에게 배운 환상 마법을 쓰자 사람들 사이에서 또다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빛으로 만들어진 꽃과 나비가 눈앞에서 나타났다 사그라들었고, 축제 날 볼 법한 불꽃들이 펑 소리와 함께 터뜨려졌다. 바다에서 뛰노는 고래 등 책에서 본 그림에 아이작의 상상이 더해진 각종 동물들이 사람들 사이를 스치는 광경은 정말이지 꿈결 같았다. 모든 것이 완벽한 순간이었다.

* * *

파티는 저물고 시에나 일행들은 응접실에서 차를 나누며 회포를 풀고 있었다. 특히 아이작과 데이몬은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쉴 새 없이 조잘대고 있었는데, 그 모습에 시에나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래서, 스승님이 사고를 또 치셨는데, 제가 어떻게 해결 했냐면요.”

느긋하고 편안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아이작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청년이 몇 개월 전에는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깡마른 소년이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시험이 끝난 후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시에나와 여가를 즐긴 데이몬은 그새 키와 덩치가 더 자라 있었다.

예전에는 키는 컸어도 말라 있어 어딘지 위태위태하고 가녀린 느낌이었다면, 적당히 살과 근육이 붙은 지금은 적당히 슬림한 미청년의 인상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시에나가 바라볼 때면 여전히 수줍은 미소를 띠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시에나가 흐뭇하게 데이몬을 바라보고 있는데, 공작이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시에나. 약초 관련 사업에 대한 기획이 완성 단계야. 적어도 내년 봄 즈음에는 판매에 들어갈 수 있을 듯해.”

“생각보다 훨씬 빨라요. 감사합니다, 공작 각하. 다 각하께서 애써 주신 덕분이에요.”

“다만 신관 측의 경계가 여전히 강할 테니 거기에 대한 경계를 철저히 해 두어야 할 것 같다. 그쪽만 통과된다면 이번 년 안으로도 판매가 가능할 텐데.”

“음, 사실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생각한 게 있는데요. 공작 각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어요.”

“어떤 거지?”

공작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어왔다. 공작은 시에나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그녀가 꽤나 유능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빠르게 풀리게 된 데에는 시에나의 영향도 제법 있었다. 그 때문에 공작은 시에나의 제안을 듣는 것에 대해 무척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둘의 이야기에 어느새 사람들이 집중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자 사과주를 홀짝인 사람처럼 두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시에나가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제가 얼마 전에 화장품에 대한 부작용으로 피부가 완전히 뒤집어진 적이 있어요. 얼굴 여기저기에 빨간 자국들이 올라와서 난리도 아니었죠.”

“저런. 고생했겠군.”

“네, 그래도 그때 약초 물로 세수를 하고 연고도 꾸준히 발라 주면서 단시간에 좋아졌거든요. 그래서인지 친구들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피부가 가라앉았냐고 물어봐서 친구들한테 재료비만 받고 연고를 만들어 줬어요. 연고라고 직접적으로 말하긴 좀 그러니까 약초 성분이 든 보습제라고 말하면서요. 그런데 그게 입소문이 좀 나면서 저 먼 영지의 귀족 가문 따님께도 요청이 들어올 정도로 인기가 많아졌어요.”

시에나의 말을 흥미롭게 듣던 공작의 얼굴에 이채가 스쳤다. 시에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공작님. 저는 이 약초 사업을 화장품과 접목시켜 보는 건 어떨까 생각하고 있어요.”

“화장품과 약초를… 상상도 해 보지 못할 만큼 파격적인 일이군.”

외적인 모습을 꾸밈으로써 사람의 가치가 달라지는 귀족들 사이에서 화장은 이미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었다. 때문에 색조 화장은 이미 내로라하는 유명한 상단들은 다 뛰어들어 있어 제법 다양한 상품을 갖추고 있었지만, 시에나가 주목한 것은 색조에 비해 관심도가 전무하다시피 한 기능성 기초 화장품이었다.

색색의 보석을 갈거나 화려한 색의 꽃에 즙을 내어 만들어진 색조 화장품과는 다르게 기초 화장품은 대부분 꿀과 우유와 같은 천연 제품들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기초화장에 기대하는 것은 보습과 탄력 정도에 그쳤다. 그나마도 매일 우유로 목욕을 하고 얼굴에 꿀을 바를 수 있었던 사람들은 굳이 기초 화장품을 구매해야 할 이유가 없어 수요는 그럴 수 없는 가난한 귀족들에 그쳤다.

그런데 약초 성분을 넣은 기능성 기초 화장품을 만들어 판매한다면? 두꺼운 화장으로 가리기에 급급했던 흉터를 없애주고 화장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피부가 환해지는 화장품이 생겨난다면? 시에나는 분명 반응이 있을 거라 확신했다.

시에나의 책상 서랍 안에는 이미 트러블로 인해 고생하는 영식과 영애들에게서 온 편지들로 가득했다. 분명 그들은 그런 화장품에 목말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자신감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센텔라라는 약초는 감기와 해열에도 좋지만, 종기나 뾰루지로 인해 생긴 흉터를 치료하는 피부 재생 효과도 가지고 있어요. 지속적으로 바르면 피부 역시 매끄러워지고요. 약초가 가진 다양한 기능에 집중하면 신전 측을 설득하는 것도 조금 더 쉬워질 것 같아서 말씀드렸어요.”

“그래, 정말 중요한 정보군. 그런 식으로 접근한다면 어쩌면 정식 판매까지 드는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겠어.”

“약초 성분이 들어간 보습제는 귀족들에게 판매하고, 약초의 함유량을 높인 연고는 화장품이라는 이름으로 출시해 평민들에게 판매한다면 그때 공작 각하께서 말씀하신 수익 부분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에나는 어차피 연고로 평민들에게 큰돈을 벌어들일 생각은 없었다. 평민들의 고혈을 빠는 건 신전이면 족했다. 그러나 귀족들이라면 화장품의 가치에 대한 금액을 지불할 수 있는 충분한 재력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말하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시에나에게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그런데 흉터 이야기를 하니 생각났는데 성수에는 흉터 치료 효과도 있잖아요. 신전은 성수로 화장품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았나요?”

“신의 권능이나 마찬가지인 성수를 미용을 위해서 쓸 수는 없겠지. 몰래라면 모를까 그들도 당당히 판매하지는 못해. 그리고 성수는 이미 생긴 흉터에 붓는다 한들 낫지는 않거든. 당장 기획서에 대한 방향을 수정해야겠군.”

아아, 그렇다면 납득이 갔다. 시에나는 어쩐지 일이 잘 풀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공작이 기획서를 정리하는 걸 기다리는데 어딘가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불안한 직감에 슬쩍 눈알을 굴리니 바로 옆에서 상황을 파악한 노파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시에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차, 그러고 보니 할머니에게는 아직 설명을 하지 않았지. 말하면 말릴 것 같아서 아예 말을 안 했었다. 시에나가 괜히 샐샐 웃으며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할머니, 제가 말을 안 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정말 어쩌다 보니….”

“말하면 말릴 것 같으니 아예 말을 안 한 게 아니고?”

와, 정말 귀신이네.

노파의 통찰력에 뜨끔한 시에나가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으흠, 아아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절대 아니죠. 그냥 진짜 우연이 겹쳐서 말할 타이밍을 놓쳤을 뿐이에요.”

“너는 대체…!”

노파는 울컥하다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푹 숙였다. 혹 화가 많이 났나 싶어 슬쩍 눈치를 보는데 머리카락에 가려져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더욱 애가 닳아 노파에게 가까이 다가가는데 그녀 주름진 손 위에 투명한 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시에나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하, 할머니?”

노파의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챈 아이작이 데이몬과의 대화를 멈추고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순식간에 이목이 노파를 향해 집중되었다. 노파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할머니 무슨 일이야?”

“아,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서….”

분위기는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노파는 자신 때문에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에 화들짝 놀라 눈물을 그치려고 했지만 한번 터진 눈물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시에나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의 주름진 눈가를 닦아 주었다. 노파가 이따금 숨을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

“분위기를 망쳐서 죄송합니다. 그저 시에나를 보니 저 살기에 급급해서 눈을 가리고 살아왔던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한심해서 그랬습니다.”

“할머니….”

“저는… 시에나에 비해 너무나 비겁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노파의 말에 시에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노파의 헐떡임이 멎어 들 때 즈음 시에나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절대 아니에요.”

“으응…?”

시에나의 화난 말투에 노파가 놀라 그녀를 쳐다봤다. 시에나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할머니는 절대 비겁하지 않아요. 목숨을 걸고 마을 사람들에게 약초를 만들어 주셨고, 저에게 지식을 나누어 주었어요. 10여 년 전 마르바스 영지에서 일어난 전염병을 고친 것도, 마녀사냥이 성행하던 시절에도 목숨 걸고 사람들을 구해 왔던 것도 전부 할머니였잖아요.”

시에나의 말에 노파는 눈을 크게 떴다. 노파가 시에나에게 약초학을 가르칠 때 지나가는 듯했던 이야기들을 그녀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저는 믿는 구석도 있고, 운이 좋았기 때문에 이 일을 추진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목숨보다 소중한 손자인 아이작과 함께 있고 싶어 하시면서도 여기 남아 주신 건 저에게 전부 약초를 가르쳐 주고 싶어서였잖아요. 저는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절대 여기까지 올 수 없었어요. 그러니 저와 비교하며 자기 자신을 낮추지 마세요. 저는 할머니가 정말 자랑스러워요.”

“시에나….”

스승을 위로하는 제자의 말에 노파는 푹 젖은 눈으로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뭉클한 그녀의 감정이 여기까지 전해져 오는 듯했다.

“암흑의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라면 신전을 거치지 않고 치료하는 일에 누구나 겁먹을 수밖에 없어. 시에나의 말대로 그대가 끝까지 용기를 내주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다. 그대는 그대의 능력과 용기에 대해 좀 더 자신을 가지는 게 좋겠군.”

공작까지 거들며 노파를 위로했다. 아이작도 나서서 입을 열었다.

“난 아플 때나 찾아오지 평소에는 우리를 벌레 보듯이 하는 사람들에게 약을 만들어 주는 걸 이해할 수 없었어. 그치만 할머니는 언제나 아는 사람에게는 아는 만큼의 책임이 있다고 하면서 꿋꿋하게 약을 만들었잖아. 멸시받으면서도 멸시받는 사람에게 약을 만들어 주는 거, 그건 절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할머니는 대단한 거 맞아.”

아이작의 말에 노파는 결국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노파를 모두가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시에나가 그녀의 곁에 앉아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이 약초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결정한 후 처음부터 생각해 왔던 게 있어요. 그런데 이건 꼭 할머니의 허락이 있어야 해요.”

“뭔데 그러니…?”

한결 진정된 모습으로 노파가 시에나의 푸른 눈동자를 응시했다. 시에나가 살짝 긴장이 되는지 후,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약초 사업의 이름을… 할머니의 이름인 록사나로 짓고 싶어요.”

“뭐라고…?”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인지 노파의 입이 벌어졌다. 아이작 역시 오랜만에 듣는 할머니의 이름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가 허락하신다면 제가 앞으로 만드는 모든 화장품과 연고, 제품들에는 록사나라는 이름 세 글자가 박혀서 나갈 거예요. 꼭 그렇게 만들고 싶어요.”

“아, 아무리 그래도 네 이름이나 공작 각하의 이름이라면 모를까 내 이름이라니….”

노파는 당황하며 거절하려고 했지만 시에나가 다시 선수를 쳤다.

“할머니의 이름과 뜻을 들었을 때부터 생각한 일이에요. 록사나라는 이름, 새벽이라는 뜻이잖아요. 물론 할머니의 이름인 것만으로도 쓰고 싶은 이유는 충분하지만, 약초를 써서 사람을 살렸다는 이유로 오히려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그 암흑의 시대가 지나고 새로운 새벽이 온다는 의미로도 쓰고 싶어요.”

말을 잠시 멈추었던 시에나가 혀를 살짝 빼물고는 애교 있게 말했다.

“그러니 꼭 허락해 주세요, 네?”

노파는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시에나는 이미 그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을 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시에나가 기어코 허락을 받아 내겠다는 결연한 표정을 짓자 결국 노파가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다. 그렇게 하자꾸나.”

“야호!”

신이 난 시에나가 활짝 미소 지었다. 물오른 장미꽃처럼 싱그러운 웃음에 사람들의 입가에도 미소가 감돌았다.

“이름은 뭘로 할 거냐는 질문에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더니 이런 깜찍한 생각을 하고 있었군.”

공작이 그런 시에나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물었다. 시에나가 볼을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하면 혼날 것 같아서 말해야지 하면서도 계속 미루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혼은 나야지. 내일부터 약초학 수업은 네 시간씩 추가하자꾸나.”

노파의 말에 시에나의 눈이 축 늘어졌다.

“네….”

시에나의 힘없는 대답에 다시 한번 좌중이 폭소했다. 그런 시에나를 데이몬이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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