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도련님, 그런데 왜 저랑 연애도 생각 안 해보신 거예요?”
그렇지만 위로 대신 궁금하게 생각했던 질문이 먼저 나왔다. 데이몬은 시에나의 기습 질문에 크게 당황하는 듯 보였다.
“연애나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거잖아.”
“도련님 저 좋아하신다면서요?”
“응, 좋아해.”
“그러니까 제가 도련님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냥 호위 무사? 맞나? 그런 거로라도 제 곁에 있고 싶은 거고요.”
“맞아!”
맞긴 뭘 맞아, 이 화상아!
시에나가 정답을 말했다는 듯 해맑게 웃는 데이몬을 보자 강한 두통이 몰려왔다.
그러니까 지금 데이몬은 시에나가 그를 좋아할 거라고는 단 한 푼어치도 생각하고 있지 않은 거다. 시에나가 조금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그럼 제가 도련님을 좋아하게 되면요?”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어.”
데이몬은 시에나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도 한 것처럼 딱 잘라 이야기했다. 데이몬을 좋아하는 당사자로서는 몹시 당황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왜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시에나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도 날 사랑할 수는 없어.”
너무나 단호한 그의 대답에 시에나는 할 말을 잃었다. 딱딱하게 굳은 시에나를 보며 데이몬이 아릿하게 미소 지었다.
“나, 저주받았다고 했잖아.”
데이몬의 말에 다시금 신탁의 내용이 떠올랐다.
‘저 여자의 자식은 제국을 죽이고, 제국을 살릴 것이다.’
그 신탁에 가장 얽매여 있는 건 데이몬 본인이었다.
그러나 시에나는 고개를 저었다. 시에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어 화가 난 것처럼 보이자 데이몬이 조금 움츠러들었다.
“도련님, 전쟁터에 가 보셨잖아요.”
“응. 가 봤지.”
“그곳에 신이 있는 것 같았나요?”
“…….”
“아픈 어머니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전쟁터에 나간 사람이 다쳤는데도 성수는 신의 권능이라며 비싸게 팔아야 한다는 이유로 제대로 치료도 받을 수 없었죠.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 갔어요.”
전쟁터를 처음 봤을 때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속이 한계치에 다다랐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갑갑했다.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저는 그 신도, 신을 따르는 인간도 틀렸다고 생각해요.”
“시에나.”
“그리고 저는 애초에 그런 신, 믿지 않았어요. 갓 태어난 애한테 저주니 뭐니… 설령 그게 진짜라 해도 자기만 알든가, 아니면 태어나게 하질 말든가! 대체 왜 도련님이 그런 저주에 얽매여야 하는데요!”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맑은 물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당황한 데이몬이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려 손을 뻗었다.
“시에나, 너무 흥분했어. 조금만 가라앉히고….”
“저 도련님 좋아해요.”
잔뜩 쉰 목소리에 풀어 헤쳐진 머리칼, 발갛게 젖은 눈망울로 시에나는 고백했다. 이런 식으로 고백하고 싶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데이몬은 시에나의 고백에 뻗은 손을 그대로 멈추었다. 숨까지 멈춘 데이몬은, 꼭 정지 화면을 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한 푼어치도 믿지 않는 듯한 말투에 감사함만이 가득 느껴졌다. 울컥 열이 받은 시에나가 양손으로 그의 볼을 찰싹 소리 나게 감싸 쥐었다.
“단순한 위로가 아니에요.”
시에나가 데이몬의 얼굴을 끌어당긴 탓에 둘의 사이는 몹시 가까워져 있었다. 둘은 방 안에 스민 약간의 달빛에 의지해 서로를 응시했다. 데이몬은 둘 사이의 거리가 심장에 해로운지 몸을 빼려 버둥대었지만 시에나가 놔 주지 않았다. 그 모습이 귀여워 시에나가 눈물을 가득 담은 눈을 휘었다. 동산처럼 휜 눈 밑으로 눈물이 한 줄기 흘렀다.
“그 신탁은 거짓이에요. 제가 이렇게 도련님을 좋아하는걸요.”
시에나는 데이몬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빗장뼈와 가슴 사이에 얹었다. 데이몬이 빼지 못하도록 얹은 자신의 손에도 느껴질 정도로 심장은 빠르고 크게 뛰었다. 작은 북을 치는 듯한 고동에 데이몬이 넋을 잃고 그 소리를 느꼈다. 시에나의 심장 소리가 느껴질 때마다 그가 몸을 조금씩 둥글게 말았다.
“말도 안 돼….”
“정말이라니까요. 그리고 꼭 연인끼리의 사랑만이 사랑은 아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공작 각하도, 로하엘 님도 도련님을 좋아해요.”
데이몬은 어지러운지 비틀거렸다. 시에나는 그를 끌어당겨 침대에 앉혔다. 데이몬은 얼떨떨한지 이마에 손을 댄 채 부동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이마의 열을 재고, 볼을 꼬집었다. 그 행동이 어찌나 목각 인형같이 딱딱한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그래서 시에나는 장난을 조금 쳐 보기로 했다.
“이거 꿈 맞아요.”
데이몬의 얼굴에 그제야 납득의 빛이 스쳤다.
“그럼 그렇지.”
장난치려고 한 건데 좀 울컥하네.
“이게 실제일 리가 없어… 그렇지만 꿈이기엔 좀 생생한데….”
데이몬은 충격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말을 번복하기엔 데이몬이 너무 진지하게 믿고 있었다. 시에나는 데이몬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느긋하게 10분 정도를 기다렸다. 그러나 데이몬은 여전히 같은 자리를 꿀벌의 8자 비행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그 모습이 답답하게 느껴졌던 시에나가 충동적으로 데이몬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열기로 달아오른 볼에 말랑한 입술이 닿았다.
“그래요. 그러니까 이것도 꿈이에요.”
시에나가 데이몬의 볼에 입을 맞춘 뒤 뒤로 서서히 물러났다. 그리고 수 초 뒤에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백에 이어 입맞춤을 받은 데이몬의 영혼은 이미 성층권을 이탈한 듯 보였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저녁 식사로 먹은 사과주스가 사실은 사과주였던 게 아닐까. 그것도 도수가 아주 높은. 시에나는 자신의 충동적인 행위가 믿기지 않았다. 그가 이게 무슨 의미냐고 묻는다면 무어라 말해야 할까.
아직 어떤 결론도 나지 않아 더럭 겁을 먹은 시에나가 얼빠진 데이몬을 버리고 빠르게 방을 탈출했다. 복도를 내달리는 시에나에겐 여기가 제 방이라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한참이 지나 드디어 정신이 돌아온 데이몬이 텅 빈 방 안에서 손을 멀리 뻗었다.
철썩!
경쾌한 소리가 방을 울리고 데이몬의 뺨이 금세 부풀어 올랐다. 데이몬은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는 얼얼한 뺨을 매만지며 말했다.
“꿈이… 아니야?”
말랑한 입술이 볼에 닿았던 것도, 얼얼한 뺨의 감촉도 전부 진짜였다. 그걸 깨달은 데이몬은 번개같이 일어나 시에나를 뒤따랐다.
“시에나!”
* * *
“아악,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시에나는 정원을 빠르게 가로지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미쳐도 정말이지 단단히 미친 짓이었다.
“진짜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시에나는 말을 뱉어 놓고 잠시 멈칫했다. 정말로 시간을 돌린다면 시에나는 데이몬에게 고백하지 않았을까?
그 빌어먹을 신탁과 오랜 학대로 인해 누군가 자길 사랑한다는 상상조차 꿈꾸지 않았던 데이몬에게?
정답은 ‘아니요’였다.
“젠장.”
시에나는 상상에서조차 솔직한 자신을 원망했다. 걸음을 옮기려는데 신발에 진흙이 묻어 찐득거렸다. 슬리퍼를 신고 흙길을 달렸던지라 밑창은 진흙으로 가득했다. 그래도 귀족 가문의 손님용 슬리퍼라 질이 좋은 편이어서 다행이지, 집에서 신는 거였으면 이미 밑창이 분리돼 너덜거렸을 것이다.
“에취! 으… 추워.”
전력으로 달려 잠시 달구어진 몸도 겨울바람에 금방 식어 버렸다. 그렇다고 방 안에 다시 들어가기엔 체면이 서지 않았다.
“아니, 대체 뽀뽀는 왜 한 거야. 미쳤니, 시에나?”
그거 하나는 분명했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절대 뽀뽀는 안 할 거다.
뽀뽀라도 안 했으면 염치 불고하고 데이몬을 빠르게 쫓아낸 채 따뜻한 이불에서 이불 킥이라도 했을 텐데, 질러 버린 지금은 다시 돌아가지도 못하고 정원만 빙빙 돌고 있었다.
“아니, 그런데 여기가 대체 어디야. 정원은 왜 또 이렇게 넓어?”
파블로 백작의 정원은 넓어도 너무 넓었다. 정원 산책을 좋아하는 시에나로서는 낮이라면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밤인 지금은 도저히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단단히 숄을 여몄다 해도 안에는 고작 얇은 슬립 한 장이었다. 고급스러운 실크로 만들어진 슬립은 보기에는 아름다웠지만 보온성 기능은 최악이었다.
“아으, 추워.”
휘잉, 바람이 불자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상체가 덜덜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혔다.
지금쯤 도련님은 가셨으려나.
혼이 성층권을 빠져나갔다가 못 돌아와서 계속 침대 위에 계신 건 아니겠지.
시에나는 넋이 나간 듯 보였던 데이몬의 마지막 표정을 상상했다.
“큭.”
콧물만 딱 그려 주면 완전 맹구가 따로 없을 표정이었다. 다시 생각하자마자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아하하, 아 배 아파….”
너무 웃어서 배가 아플 지경까지 웃고 나서야 시에나는 저 멀리서 데이몬이 등불을 들고 그녀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데이몬은 신사답게 재빨리 시에나에게서 고개를 돌려 주었다. 안타깝게도 그 모습이 어색해 대놓고 비웃는 것보다 더 타격이 컸지만.
“어… 으, 으음. 크흠.”
시에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정색하고 뒤돌아 슬리퍼를 질질 끌며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데이몬이 그런 시에나의 뒤를 조용히 따라왔다.
이번엔 내가 수치스러울 차례였나.
한밤중에 뛰쳐나가는 바람에 찾으러 나왔는데 정원에서 미친 사람처럼 웃고 있으니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은 끝까지 신사적이었다.
“시에나, 망토 둘러. 춥잖아.”
“괜찮아요. 에취!”
민망함에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는데 무슨 소리냐는 듯 몸이 반응했다. 경보로 걷는 시에나의 어깨 위로 데이몬이 망토를 둘러 주었다. 민망함에 딱딱하게 굳은 어깨 위로 부드러운 캐시미어 망토가 닿자 떨림이 멈추었다. 망토와 호의가 따뜻해 민망함이 배로 밀려왔다. 시에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이 차가울 거야. 방에 가서 이불 덮고 있어. 금방 따뜻한 차를 가져올게.”
“그렇게 안 하셔도 괜찮아요. 저 그렇게 안 추워요.”
데이몬이 시에나의 볼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의 손이 뜨거울 정도로 따뜻하게 느껴지니 시에나의 볼이 얼마나 차가운지 알 수 있었다. 데이몬이 말 안 듣는 아이를 바라보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거짓말, 몸이 이렇게 차가운데. 내 말 들어.”
“…네.”
시에나는 말 잘 듣는 아이가 되기로 했다. 데이몬의 말에 따라 침대에 얌전히 올라가 이불을 덮었다. 동물 가죽으로 만들어진 이불은 보드랍고 따뜻했다. 그렇지만 추운 곳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몸이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체온이 떨어지고 더 으슬으슬해지는 것도 같았다.
“으… 추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몸을 옹송그리자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데이몬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다시 밖으로 나와야 했지만.
“시에나, 이거 마셔. 몸이 따뜻해질 거야.”
“네에.”
“따뜻한 홍차야. 잘 우러났는지 모르겠다.”
데이몬은 볼을 긁적이며 시에나에게 찻잔을 건네주었다. 달그락, 시에나가 심플한 문양이 그려진 찻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찻잔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나고 있었다.
“좋다….”
마시지 않고 들고 있기만 해도 따뜻함이 전해졌다. 다시 만나면 엄청 민망할 줄 알았는데 둘 다 아까의 일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어서인지 그렇게 어색하지는 않았다. 일단 시에나의 체온을 올리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 듯했다. 데이몬의 배려에 다시 한번 감사했다.
“감사해요, 도련님.”
“아냐. 시에나도 나한테 많이 타 줬잖아.”
그렇게 말하는 데이몬의 모습은 썩 어른 같아 보였다. 시에나는 살며시 미소 지으며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고 보니 도련님, 차를 타 본 적이 있으셨던가.
“…으음.”
없으시구나.
찻잎을 넣고 그대로 뜨거운 물을 부은 모양이었다. 시에나는 떫은 물과 함께 입 안을 유영하는 찻잎을 어떻게 처리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런 시에나를 데이몬이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때, 괜찮아? 차는 처음 타 봐서….”
쑥스러움과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는 표정이었다. 시에나는 눈물을 머금고 홍차(정확히는 홍차 잎과 뜨거운 물을)를 단숨에 삼켰다.
“맛… 맛있어요.”
“정말? 다행이다. 많이 타 왔으니 더 마셔.”
신이시여….
데이몬은 신이 나서 차를 또 한가득 따라 주었다. 무겁게 출렁이는 찻주전자를 보며 시에나는 주전자 안에 담긴 물이 1리터는 족히 되지 않을까 하는 의심에 사로잡혔다. 데이몬은 자신이 처음 타 본 차를 시에나가 맛있게 먹어 준 게 신이 나는지 배시시 웃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며 시에나는 절망스러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사람 열 명은 넉넉히 들어갈 정도로 넓은 방 안에 데이몬이 가져온 등불 하나에 의지하다 보니 데이몬은 찻잔에 둥둥 떠 있는 찻잎을 보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차는 분명히 더 떫어져 있겠지. 시에나는 망연자실하게 어둠 속의 차를 바라보다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런데 밤에 차를 너무 많이 마시면 화장실에 가고 싶을 것 같아요. 여기까지만 마실게요.”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알았어.”
데이몬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에나는 내심 그가 약간 시무룩해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를 달래려 시에나가 입에 발린 말을 조금 하기로 했다.
“차는 정말 맛있었는데 아쉬워요. 다음에 낮에 또 타 주세요.”
“그래? 그렇게 맛있다니 나도 한번 마셔 봐야겠다.”
시에나의 손에 있는 찻잔을 가져가려 데이몬이 손을 뻗었다.
안 돼!
시에나는 저도 모르게 찻잔을 홱 뺐다. 데이몬이 그런 시에나의 행동에 당황하며 허공에 손을 띄웠다.
“아, 하하. 생각해 보니 두 잔까지는 괜찮을 것 같아서요. 이게 은근히 자꾸 중독성 있고 생각나는 맛이네요.”
데이몬의 동심(?)을 지켜 주고픈 마음에 시에나는 착한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데이몬이 칭찬에 쑥스럽다는 듯 양 볼에 홍조를 띠었다. 시에나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두 번째 차까지 한 번에 들이켰다.
으윽.
찻잎이 계속 우러나 입 안에 떫은맛이 가득했다. 데이몬은 시에나가 두 번째 차를 한 번에 마신 것에 몹시 감동한 눈치였다. 먹은 보람이 있는 표정에 시에나가 눈물을 머금고 입가를 닦았다.
“저어, 시에나.”
두근.
아까의 이야기를 이어서 하려는 걸까.
시에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안절부절못하고 품 안의 베개를 꽉 쥐었다. 아직 마음 정리도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둘 다 좋아하는데 그럼 사귀자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시에나는 복잡한 생각에 머리가 핑글핑글 돌 것 같았다.
그렇지만 데이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내가…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네, 네. 뭐, 뭔데요?”
데이몬은 대답은 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 무슨 어려운 부탁을 하시려고 그러나 싶어 긴장이 되었다. 설마 결혼해 달라는 건 아니겠지. 시에나의 망상이 끝을 달릴 때 즈음, 데이몬이 입을 열었다.
“내가 아카데미에 가 있는 동안, 네가 영주 대리를 맡아 줄 수 있을까?”
시에나는 차를 이미 마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세 번째 차를 마시고 있었다면 이번에는 그의 얼굴에 뿜어냈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영주 대리라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하시는 말씀일까.
“제, 제가 마르바스 영지의 영주 대리를요?”
“응. 로하엘에게도 맡길 수는 있지만 난 시에나 네가 맡아 줬으면 해.”
“아니, 제가 영지 말아먹으면 어쩌려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시에나가 도리질을 했지만 데이몬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아먹을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영지는 아니잖아….”
그건… 그렇죠….
말마따나 영지는 뭔가를 말아먹을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리메리오 남작이 싼 똥을 황궁에서 나온 돈과 공작이 준 돈으로 막고 있을 뿐, 영지 자체가 흑자를 내고 있지는 못했다. 감자 사업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안정권에 들어갈 때까지는 결국 그 사업도 적자였다. 둘을 감싼 공기가 잠시 우울해졌다.
“영지가 그렇게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리메리오 남작도 거기에서 돈을 챙겼으니 대리인 자리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을 거야. 물론 월급은 충분히 챙겨 줄게.”
어설픈 위로를 하며 데이몬이 시에나를 살살 설득했다. 그러나 시에나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였다.
일단 자신이 영주 대리를 하는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데이몬이 아플 때야 잠시 비슷하게 맡은 적은 있지만 로하엘이 올 때까지 단 며칠이었고, 그가 원하는 기간일 6년은 시에나에게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6년은 너무 길어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 못 들어 보셨어요? 제가 도련님 배신하고 횡령하다가 날라 버리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다 가져가도 괜찮아. 어차피 다 네 것인걸.”
시에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까의 고백이 다시 생각난 탓이었다.
아니, 무슨 말을 못 하게 하네.
시에나는 입술을 안으로 오므리며 할 말을 찾았지만, 결국 다른 변명거리를 찾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대신 시에나는 질문을 하기로 했다.
“왜 저예요?”“응?”
“왜 로하엘 님이 아니고 제가 그 일을 맡아 주길 원하시나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시에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어떻게 해야 할까. 시에나는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고 망설였다.
“그리고 아예 이유가 없는 건 아니야. 시에나가 그… 감자를 가져오던 날에 생각했던 거였어.”
“가, 감자요?”
갑자기 왠 뜬금없는 감자?
점순이가 된 심정으로 시에나는 데이몬의 말을 경청했다.
“응. 그 당시의 나는 영지 내에서 굶주리는 사람이 있다면 돈을 풀어 그 사람을 구제하려 했을 거야. 그렇지만 시에나는 그들이 그들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지.”
“그건 제가 감자를 먹을 수 있는 작물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렇지만 그걸 형벌로 적용시켜 개발하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생각은 아니라고 생각해.”
데이몬의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에 시에나의 기분이 오묘해졌다.
“그리고 할머니와 아이작을 구하던 날 의원의 옷차림과 태도를 보고 갇혀 있는 곳을 알아낸 추리력과 판단력, 전부 지금의 나에게는 없는 것들이야.”
“말씀은 감사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사실 저에게는 6년간 영지를 맡을 자신도 능력도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귀족도 아니잖아요.”
“귀족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어. 그렇다고 치면 귀족인 내가 네게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 것인걸.”
데이몬의 말은 청산유수였다. 시에나는 데이몬에게 점점 말려들고 있다는 느낌에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당장 결정하긴 힘들 거라고 생각해. 나도 바로 결정하라고 할 생각은 없어. 그렇지만 나는 정말로 시에나가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진 않아.”
“어휴, 그건 저를 과대평가하고 계시는 거예요. 저는 정말 평범한 사람인걸요.”
“정말 그럴까? 우리 계단에서 밤새 이야기하던 날 기억해?”
“납치범들에게 어떤 형벌을 줄지 이야기하던 날이요?”
“응. 그날 우리 얘기 엄청 많이 했잖아.”
그날을 회상하며 시에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벌뿐만 아니라 영지의 경제와 사회, 법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그러다 깜빡 잠드는 바람에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러고 보니 그날 어떻게 방에 들어왔더라? 시에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질문을 던지면 시에나는 가끔 로하엘은 물론 숙부님까지 하지 못할 대답을 내놓았어.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지만 계속 생각하게 되는 것들에 대해서 말이야.”
어린 데이몬이 영지 관리에 애를 먹고 있는 것 같아 한국의 법규나 생활에 대해 넌지시 이야기해 준 것이 그에게는 엄청나게 대단하게 여겨졌던 모양이다. 사회나 행정에 관심이 있기는 하지만 결국 고등학생 수준의 지식이었는데.
하긴 지금 이 시대가 중세 시대인 것을 감안하면 제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몇 세대나 앞서 나간 것이니까. 갈릴레오가 계란을 세우는 방법은 계란을 깨 세우기만 하면 되지만, 그가 하기 전에는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데이몬은 시에나의 식견을 굉장히 높게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국 그것도 나 혼자 생각한 게 아닌걸.’
학교에서 배워서 알고 있었던 것뿐, 한국에 살았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지식이다.
“그건 다 배워서 알고 있었던 것뿐이에요.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에요….”
시에나가 말끝을 흐렸다. 혹 어디서 배웠냐고 물어보면 대답하기 난감해질까 말하기를 망설였지만 왠지 솔직하게 대답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배워서 알고 있었던 건지 스스로 안 건지는 별로 상관없어. 중요한 건 시에나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야.”
데이몬의 말에 시에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데이몬은 가끔 이렇게 핵심을 잘 꿰뚫었다.
“네가 알고 있는 것들을 영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거야. 어쩌면 네 교육을 받은 아이가 나중에 커서 정말 그런 사회를 만들게 될 수도 있겠지.”
두근, 두근. 데이몬이 한 말에 가슴이 설레었다. 이성적으로 끌리는 설렘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자신이 한 세계를 변화시킬 수도 있겠다는 데서 오는 설레임. 시에나의 가슴에서 기분 좋은 고동이 느껴졌다.
“제가 정말 그런 걸 할 수 있을까요?”
“그럼. 더한 것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나 참, 콩깍지가 씌어도 아주 제대로 씌이셨다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시에나는 데이몬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한 가지 궁금한 점도 있었다.
“그런데 도련님, 보통 아카데미는 시종을 데려가지 않나요?”
“응. 데려가는 경우가 있긴 하지.”
“그런데 왜 같이 가자는 말씀은 안 하세요?”
시에나의 직구에 데이몬은 잠시 난처한 얼굴을 했다. 잘못 질문한 건가 싶어 시에나가 괜스레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음… 말하기 어려우면 안 하셔도 괜찮아요.”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나는 시에나가 누군가의 시중을 드는 걸 원하지 않아.”
“그렇지만 그게 제 일인걸요.”
“만약 영주 대리를 맡게 된다면 하지 않게 되겠지.”
“그것 때문에 맡기려고 하신 거 아니죠?”
데이몬의 침묵에 시에나가 둥근 눈을 뾰족하게 세웠다. 결국 데이몬이 솔직하게 고백했다.
“…으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조금은 그런 생각도 섞여 있어.”
“일전에 모두가 제 할 일을 열심히 하고 있으니 세상이 돌아가는 거라고 말씀드렸었잖아요. 직업 비하는 좋지 않아요. 시종도 훌륭한 직업이라고요.”
시에나가 데이몬에게 훈계하듯 말하자 그는 끙끙대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도 사용인들이 없으면 성이 돌아가지 않는 것도 알고 다 알아. 그렇지만 나는 너를 귀하게 대하고 싶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데리고 살면서 좋은 것만 보고 맛있는 것만 먹게 해 주고 싶단 말이야.”
얼굴이 빨개지는 소리가 난다면 분명 방 안에는 펑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시에나와 데이몬은 둘 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어색하게 서로의 시선을 피했다.
“그래서 데려가기 싫었던 거야. 난 귀족을 많이 겪어 보진 않았지만 그들 중에는 분명히 리메리오 남작 같은 사람도 있겠지. 리메리오 남작은 하인들을 전혀 사람으로 보지 않아. 그저 쓸모 있는 말인지 아닌지만 판단하지.”
시에나는 데이몬이 하는 말이 어떤 것인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랬기에 데이몬에게 차마 더 훈계할 수 없었다.
“시에나가 날 구해 준 그날부터 시에나는 나의 세상이었어. 나는 나의 세상이 조금이라도 무시당하거나 하대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네게 이렇게… 말 붙이는 것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말을 잘하시는 것 같은데요….
시에나가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데이몬은 고백 이후 거침없이 말하고 있었다. 아니, 원래 거침없이 말해 왔는데 의식하기 시작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어, 어떤 말씀이신 줄 알겠어요.”
“응. 이해해 줘서 고마워.”
데이몬은 담백하게 웃으며 말을 맺었다. 그런 데이몬을 보며 시에나가 포옥,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도련님이 보고 싶을 거예요.”
“응?”
시에나의 한숨처럼 내뱉은 말에 데이몬의 얼굴이 다시금 달아올랐다.
“자주 놀러 갈게. 주말이면 갈게.”
“아, 아니. 그냥 방학 때 놀러 오셔도 돼요. 다른 친구들이랑 추억도 쌓으시고 해야죠.”
“괜찮아. 절대 외롭게 두지 않을게.”
데이몬은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데이몬의 직설적인 화법에 시에나는 입 안에서 각설탕이 궁글려지는 느낌이었다. 달콤한 설탕물이 입 안에 주르륵 흐르는 기분. 입 안에 머물던 홍차의 떫은맛은 단맛에 묻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새 데이몬은 시에나의 손을 잡고 애 닳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서 뜨거운 열정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알… 알겠어요. 그런데 도련님… 손을 너무 꽉 잡으셨는데….”
“미, 미안. 언제 잡고 있었지.”
데이몬은 화들짝 놀라 손을 떼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멀어지는 데이몬을 보며 시에나는 내심 아쉬움을 느꼈다. 한 걸음 멀어지는 것도 이렇게 아쉬운데, 정말 그가 떠나는 날은 어떨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 왔다.
그렇지만 데이몬은 스스로 성장하고 단련하기 위해 아카데미에 가는 것이다. 자신을 지키던 작은 용사가 정말로 큰 용사가 되기 위한 모험을 떠나는 날. 전날이면 몰라도 떠나는 날은 꼭 웃는 얼굴을 보여 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참, 저도 할 말이 있어요, 도련님.”
“뭔데?”
“저 약을 만들어서 평민들에게 판매해 보려고 해요.”
약을 판다는 말에 데이몬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래. 시에나는 잘 해낼 거야.”
“더… 안 물어보세요?”
약을 판매하는 게 불법이란 걸 모르고 있을 리도 없는데. 데이몬의 대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시에나가 하겠다고 한 거잖아. 분명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낸 결론이겠지. 거기에 대해 토를 달 생각은 없어. 아, 혹시 내가 도와줄 게 있으면 꼭 말해 주고.”
경쾌하기까지 한 대답에 시에나는 조금 허탈하면서도 가슴이 찡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며 판단했던 공작이나 시에나가 위험에 빠지길 원하지 않았던 노파와 달리 데이몬은 시에나를 완전히 믿고 있었다. 약을 판매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는 데이몬도 모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시에나에 대한 믿음이 더 우선시된 것이다.
데이몬이 그렇게 말해 주니 자신감이 솟는 기분이었다.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믿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엄청난 힘이 되었다.
시에나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 사람을 얼마나 더 좋아할 수 있을까. 시에나는 문득 이 밤 이후로 데이몬을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밖에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겨울이다 보니 밖은 어두웠지만 시간은 이미 새벽에 가까운 것 같았다. 시에나는 급작스레 몰려오는 졸음에 작게 하품했다. 그 모습을 본 데이몬이 일어날 채비를 했다.
“아, 가시게요? 괜찮은데….”
그렇게 말하는 시에나의 말에는 아쉬움과 함께 졸음이 묻어났다. 데이몬은 미소 지으며 시에나의 몸을 덮은 이불을 가슴께로 올려주었다.
“내일 아침에 출발이잖아. 벌써 많이 늦었어.”
“아…그렇긴 하죠.”
평소라면 데이몬에게 어서 자러 가라 종용할 텐데, 그가 아카데미에 간다고 생각하니까 그를 보내기가 평소보다 배는 아쉽게 느껴졌다. 그걸 알아챘는지 데이몬이 다시 침대에 살며시 앉았다.
“잘 때까지 옆에 있을게.”
“도련님도 피곤할 텐데….”
“난 괜찮아.”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잠겨 있어서일까. 나른한 목소리에 시에나는 잠이 솔솔 오는 걸 느꼈다. 그래도 괜히 아쉬워 시에나가 데이몬의 소매를 붙잡으며 말했다.
“자장가 불러 주세요.”
“…응?”
데이몬의 당황하는 모습에 시에나가 배시시 웃었다.
“자장가요. 저 좋은 꿈 꾸라고 불러 주세요.”
“난 자장가 잘 모르는데….”
난감해하는 데이몬에게 시에나가 짓궂게 말했다.
“제가 매일 불러 드렸잖아요. 아카데미에 가면 성악 시험 이런 것도 볼 텐데 미리 연습해 두셔야 하지 않을까요?”
말은 참 잘해. 데이몬이 졸음에 겨워하는 시에나를 밉지 않게 흘기다가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새벽이라 목이 잠겨서 잘 안 나올지도 몰라.”
“괜찮아요. 저 한 소절만 듣고도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한 소절을 엄청 잘 불러야겠네.”
“기대할게요.”
시에나가 살며시 눈을 감고 양손에 깍지를 꼈다. 저 손과 깍지를 낀 게 자신의 손이었으면 좋겠다는 음흉한 생각을 하던 데이몬이 다시 한번 목을 가다듬고 노래를 시작했다.
* * *
“잘 자요, 내 사람. 이제는 잠들 시간이에요. 별도 달도 지금은 고요한 밤의 바다에 몸을 맡기고 잠들었어요. 아기 토끼도 엄마 품에서 스르륵 눈을 감아요. 자 이제 눈을 감고 깊게 숨을 쉬어요. 우리는 내일 다시 만나요….”
긴장하며 노래를 마친 보람이 없이 시에나는 아까 그녀가 했던 말처럼 이미 꿈나라에 가 있었다. 그런 시에나를 보며 데이몬이 허탈하게 웃었다.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우웅….”
머리칼이 볼을 간지럽히는지 시에나가 잠결에 머리칼을 떼려 허우적댔다. 데이몬이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시에나가 뒤척이는 바람에 그녀의 말랑한 볼에 손이 닿은 데이몬은 불에 덴 듯 재빠르게 손을 떼 내었다. 손등으로 입가를 훑는 데이몬의 눈에 진득한 갈증이 담겼다.
꿈에서 맛있는 거라도 먹는지 입을 오물대는 모습이 퍽 사랑스러웠다. 아까 저 말랑한 입술이 볼에 닿았던 감촉이 생생했다. 굿나잇 키스로 볼이나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을 때는 종종 있었지만, 아까는 무언가 달랐다. 고백 후의 입맞춤이라 그랬을까. 깃털이 볼을 매만져도 그것보다는 부드럽지 않았겠지. 데이몬은 조금 전의 감촉을 상기하고 또 상기했다.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 걸까.”
이런 사람이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 걸까. 솔직히 잘 믿기지 않는다. 그저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제가 불쌍해 그런 말을 해 준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동정이라도 좋다. 그로 인해 그녀가 자신의 곁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어 줄 수 있다면, 제 팔이라도 스스럼없이 부러뜨릴 것이다.
어린아이치고는 잔혹한 생각을 하며 시에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데이몬은 날이 밝아 온다는 것을 깨닫고 아쉽게 방을 나섰다.
“아, 저걸 치워야지.”
데이몬이 이야기하며 잠시 다른 곳에 두었던 티 세트를 쟁반에 올렸다. 일어나면 하녀들 일 시키기 그렇다며 시에나 본인이 옮기겠지.
사실 데이몬은 그런 시에나의 생각이 잘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돈을 주고 고용한 것이고, 그들이 할 일인데 시중을 받는 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했다. 특히나 그 시종이 시에나보다 나이가 많다면 더더욱. 장유유서나 뭐라나. 가끔씩 시에나는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했다.
시에나가 자신의 시중을 들어 주는 걸 원하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오히려 자신이 시에나의 시중을 들면 모를까.
내가 먹여 주는 것만 먹고, 입혀 주는 것만 입으며, 내 손이 닿은 공간에서 생활하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아무도 보지 못하게 꽁꽁 가둬 놓고 싶다가도 외출한 시에나의 모습을 보면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햇빛과 꿀을 섞어 놓은 듯한 금발이 바람에 나풀나풀 나부끼고, 창공을 닮은 새파란 눈동자가 하늘을 담아 더욱 푸르게 빛날 때 숨이 막힐 것 같은 감각에 사로잡힌다.
그 예쁜 눈을 휘어 웃어 주기만 한다면, 불구덩이에 들어가라 해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그 미소를 볼 수만 있다면.
집착이 뚝뚝 묻어나는 생각을 하며 데이몬 다기가 담긴 쟁반을 들고 복도를 걸었다. 시에나가 차를 맛있게 마셨던 모습이 다시 생각해도 흐뭇했다. 왜 진작 차를 타 줄 생각을 하지 않았지. 자신은 사실 차를 타는 것에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조금 마셔 볼까.”
처음 끓인 차 맛이 초심자의 행운일 수도 있으니 맛을 좀 보고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미 식어서 차가워지긴 했지만 맛있는 차가 어디 가겠어.
주방에 다다른 데이몬이 주전자에서 차를 그득 따라 단번에 들이켰다.
“푸우우!”
그리고 단박에 내뱉었다.
따뜻하게 마셔야 할 차가 차가우니 맛은 좀 덜하겠지만 차가운 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대체 왜 이렇게 떫고… 이건 또 뭐야.”
혓바닥에 붙은 찻잎을 떼며 데이몬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데이몬은 그제야 시에나가 두 번째 잔을 제가 마시려고 할 때 자기가 마시겠다며 말리던 이유에 대해 깨달았다.
“젠장….”
데이몬은 주방에 쪼그려 앉아 마른세수를 했다. 쪽팔림에 얼굴이 화끈화끈했다. 우쭐했던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졌다. 시에나의 배려에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이런 엉망인 차를 맛보이다니….
데이몬이 한참을 주방에 앉아 있다가 음울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비척비척 수돗가를 향해 걸어갔다.
* * *
이른 새벽, 요리 당번인 다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리에서 일찍 일어났다. 오늘은 공작가 사람들이 떠나는 날이었기에 다른 날보다 아침은 화려하게, 그러나 소화시키기는 쉽게 만들어야 했다. 요 며칠 내내 연회였던지라 혹사시킨 몸이 말이 아니었지만 오늘이 끝이라고 생각하자 마음은 편했다.
기지개를 켠 다나가 주방에 들어서자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주방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엄마야!”
다나의 비명에 남자가 느릿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본 적은 없지만 검은 머리에 금색 눈만 봐도 그가 대충 누구인지 감이 잡혔다. 다나가 급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마르바스의 영주님을 뵈옵니다.”
마르바스의 어린 영주는 인사를 받고도 말이 없었다. 다나가 슬쩍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남자는 밤을 새웠는지 눈 밑이 퀭했다. 그렇지만 눈동자에는 묘하게 이채가 돌았다. 그의 금안이 느릿하게 그녀를 훑었다.
히익.
숲속에서 맹수를 만나면 이런 느낌일까. 다나의 등줄기에 순간 소름이 돋았다. 포식자를 앞에 둔 토끼처럼 그녀는 꼼짝 못 하고 제자리에 서서 덜덜 떨었다.
“할 일 해.”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막혔던 숨통이 겨우 트였다. 그러나 남자가 주방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느껴지는 압박감은 대단했다. 최대한 그와 멀리 떨어지려고 하는데 그가 다시 다나를 불렀다.
“너.”
“예.”
“맛 잘 보나?”
“예? 맛이요?”
남자의 뜬금없는 질문에 다나는 무례도 잊고 그를 올려다보았다가 감탄했다. 그는 신성하게 느껴질 만한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단단하게 올라온 눈썹 뼈 안에 반항적인 빛을 띠는 눈매, 차가운 이미지를 주는 높은 콧날과 턱선. 역삼각형 몸 아래 위치한 날씬한 허리까지.
이렇게 아름다운 피조물이 또 있을까.
넋을 잃고 그의 얼굴을 훑어보던 다나는 그가 생각보다 어리다는 걸 깨달았다. 키는 성인 남자만 한데, 얼굴은 또 생각보다 앳되다. 열 서넛 정도 되었을까. 그의 나이를 가늠하고 있는데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봐.”
주의를 주듯 차갑게 뱉은 그의 말에 화들짝 놀란 다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예, 예. 죄송합니다!”
귀족을 이렇게 쳐다보다니, 미쳤군, 미쳤어. 다나는 어쩔 줄 모르고 주방 구석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남자가 찻잔을 톡톡 치며 말했다.
“잘 본다니 다행이네. 이거 마셔 봐.”
“예…?”
다나는 그제야 제가 한 말이 남자에게는 맛을 잘 본다는 것의 긍정으로 들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차마 부정할 용기는 나지 않아 그가 가리킨 찻잔 쪽으로 다가갔다.
남자는 밤새 차를 끓였는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수많은 찻잔 안에 차가 가득히 담겨 있었다.
아니, 세상에. 주방의 찻잔을 죄 꺼내 놓은 건가.
찻잎도 다 다른 걸 썼는지 차마다 색깔이 또 조금씩 달랐다. 차 맛에 엄청 까다로운 사람인 모양이다 생각하며 다나가 차를 조금 머금었다.
“…웁.”
삼켜야겠지.
분명 남자의 뒤에 있는 찻잎은 제 월급으로는 꿈도 못 꿀 정도로 비싼 찻잎인데, 어째서 차에서는 왜 걸레 빤 맛이 나는지 의문이었다.
다나의 표정을 본 남자의 미간에 더욱 깊은 주름이 잡혔다.
“맛이 없나 보군.”
“아, 아닙니다! 맛있습니다! 걸레 빤 물도 가끔 먹으면 맛있죠! 아, 아니… 이게 아니라….”
입이 방정이지! 다나는 자신의 입을 때리고 싶은 강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는 걸레 빤 물이라는 말에 잠시 흐릿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두 번째 잔을 가리켰다.
“그럼 이것도 마셔 봐.”
이른 아침부터 희생양이 된 다나는 주방의 가장 긴 테이블에 놓인 서른 개도 넘어 보이는 찻잔들을 바라보며 절망적인 표정으로 두 번째 잔을 들었다.
* * *
“시에나. 일어나야지.”
데이몬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시에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마치 카나리아가 우는 듯 달콤한 음색이었다.
“우응….”
조곤조곤하고 나른한 목소리에 더 잠이 오는 것 기분에 시에나는 무의식중에 칭얼거렸다. 따뜻한 햇살이 눈꺼풀을 찌르는데도 새벽에 잠든 여파로 인해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조금만 더….”
“그럼 5분만 더 자고 일어나서 차 마셔.”
차요?
시에나는 데이몬의 말에 너무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데이몬이 들고 있는 찻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시에나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다시 푹신한 오리털 베개로 슬며시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잠은 이미 깨 버린 뒤였다.
아침부터 저 차를 또 마셔야 한다니!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 줄 걸 그랬나.
그러나 데이몬은 참을성 있게 시에나를 기다렸다. 결국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시에나는 울상을 지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침 햇살에 비친 데이몬의 모습은 너무나 근사했지만, 시에나의 눈에는 요리 고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도련님 차 타는 거에 재미 붙이셨나 봐요….”
차마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시에나가 데이몬이 주는 찻잔을 건네받았다.
“응. 해 보니까 재미있더라고.”
“그러셨구나….”
말끝을 흐리며 시에나가 차의 상태를 빠르게 스캔했다. 다행히 어제와 달리 물 반 찻잎 반이 아니었다. 그러나 안도하기는 일렀다. 어제의 그 떫은맛을 상상하자 다시 입이 썼다.
그렇지만 얼마 자지도 못하고 일어나 주방에서 열심히 차를 탔을 정성을 생각하니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시에나는 복잡한 생각이 담긴 눈으로 김이 나는 차를 보다가 이내 호로록, 차를 들이켰다.
“응?”
시에나의 눈이 반짝 떠졌다. 고급스러우면서도 깊은 차의 맛이 그대로 느껴졌다. 시에나가 깜짝 놀라 입을 가리며 데이몬에게 말했다.
“이거 맛있어요, 도련님!”
“그래? 다행이다. 두 번째 타 보는 거라 조금 나아졌나 봐.”
‘조금’ 나아진 정도가 아닌데요?
티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 탔다고 해도 믿을 법한 맛이었다. 전체적인 바디감이 부드러우면서도 마지막에 느껴지는 화한 박하 향이 아침을 상쾌하게 깨워 주었다.
“정말 맛있어요. 진짜, 어떻게 이렇게 맛있지?”
시에나의 호들갑에 데이몬의 얼굴이 점점 흐물흐물하게 풀어졌다. 이런 모습을 보니 정말 자기가 탄 게 맞는 모양이었다. 어제의 차 맛은 꿈이었나 싶기도 했다.
“다 마셨으면 내려가서 아침 먹자.”
“네. 그럴게요. 저 씻고 내려갈 테니 먼저 드시고 계세요.”
“그래, 알았어. 조금 이따 봐.”
“네-.”
데이몬이 문을 닫고 나가자 시에나는 빠르게 찻주전자를 향해 다가가 다시 한번 차를 따라서 마셔 보았다.
“으음… 맛있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정말이지 요상한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더 이상 그 맛없는 차를 마시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어쨌든 다행이야.”
헤헷.
시에나는 수많은 희생 위에 만들어진 차를 호로록 넘기고 욕실로 향했다.
* * *
식당에 내려온 시에나는 사람들을 훑으며 무의식적으로 데이몬을 찾았다.
“어라?”
안 계시네.
시에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로하엘과 눈이 마주쳤다.
“시에나, 여기로 와요.”
“네, 로하엘 님.”
자리에 와서 앉자마자 시종 하나가 시에나에게 수프를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푹 끓인 치킨 육수로 만들어진 수프에서는 단맛이 났다. 시에나는 수프를 뜨며 로하엘에게 물었다.
“로하엘 님, 혹시 도련님 어디 가셨는지 아세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같이 먹자고 했으면서 어딜 가신 거지?
시에나는 앞에 그득히 놓인 흰 빵을 뜯어 수프에 찍어 먹으면서도 데이몬을 찾았다. 그때 아이작이 나서서 말했다.
“도련님이라면 주방에 계십니다.”
“주방? 주방엔 왜 가신 거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신세를 진 게 있다며 고기를 썰고 계시더라고요.”
무슨 신세를 졌다는 거지. 야식이라도 먹었던 걸까. 시에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할 수 없긴 하지만 일단 밥을 먹고 보자는 생각으로 잘 익은 훈제 닭 다리를 집었다.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훈제 닭 다리에는 향신료가 가득 배어 향긋한 냄새가 났다.
“으음. 맛있어. 도련님 것도 좀 남겨 둬야겠다.”
시에나는 감탄하며 닭 다리 하나를 접시에 올려 두었다. 닭장에서 키운 게 아닌 방목시킨 닭을 요리에 쓰는 거다 보니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육질이 좋았다.
그렇지만 역시 가끔은 치킨이 먹고 싶지.
도련님께 요리에 대한 취미가 생긴다면 나중에 한국 요리라도 함께 만들어 볼까.
시에나는 낙천적인 생각을 하며 다른 음식들에 손을 뻗었다.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아침인데도 음식들이 푸짐했다. 마차를 타야 하는데 너무 거하게 먹었나 싶어서 부른 배를 통통 두들기는데 아까보다 더 지친 표정의 데이몬이 나타났다.
“도련님. 이쪽으로 오세요.”
“시에나. 먼저 먹고 있었구나. 잘했어.”
“이 음식들이 맛있어서 좀 골라 놨어요. 식었으니 좀 데워 달라고 할까요?”
“아니, 괜찮아. 지금도 충분히 따뜻한 것 같은데 뭐.”
데이몬은 흰 빵에 수프를 푹 찍은 뒤 게 눈 감추듯 먹었다. 눈이 어째 퀭한데도 기분만은 몹시 좋아 보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주방 일은 도우시게 된 거예요?”
“아아, 주방 사람한테 신세 진 게 있어서. 신경 쓰지 마.”
“네에… 으음. 이 디저트도 맛있어요. 꼭 드셔 보세요.”
“그래. 고마워.”
대답은 꼬박꼬박하고 있었지만 데이몬에게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시에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도련님 그런데 잠 거의 못 주무신 거 아니에요? 엄청 피곤해 보여요.”
“아니, 나도 시에나 깨우기 전까지 푹 잤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뭐, 도련님이 괜찮다는데.
시에나는 더 캐묻지 않고 앞의 콩포트 타르트에 다시 열중했다. 겨울, 온실에서 키운 과일들로 만들어진 콩포트는 그 질감이 연하고 당도가 높았다. 앞에 앉은 아이작이 데이몬에게 말을 걸었다.
“주인님.”
“…도련님이라고 해.”
어쩔 줄 모르는 데이몬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아이작은 이따금 그를 주인님이라고 불렀다. 씩 웃으며 그가 데이몬에게 말했다.
“식사 끝나고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거주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거주?”
“예. 공작성으로 자리를 옮기려고 합니다.”
“뭐?”
“네?”
아이작의 말에 둘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공작성이라니, 거긴 왜?”
“이제 제 거 하기로 했습니다.”
아이작의 옆에 있는 줄도 몰랐던 사이가 갑자기 아이작을 껴안으며 말했다. 아이작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필요 이상의 스킨십은 하지 않기로 했잖습니까.”
“그렇지만 네 마나가 시원하단 말이야.”
“피부에서 무슨 마나가 느껴집니까.”
“나쯤 되는 천재 마법사는 느낄 수 있어.”
아이작이 너무 싫어하자 사이는 입술을 삐죽이며 시종에게 다섯 번째 콩포트 타르트를 시켰다. 사이의 말에 힌트를 얻은 데이몬이 물었다.
“저자에게 마법을 배울 생각이야?”
“예. 성격은 저래도 실력은 뛰어나니까요.”
사이가 바로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작은 독설을 내뱉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이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여러모로 참 독특한 캐릭터였다.
“얼마나 가 있을 생각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최소 3년 정도로 잡고 있습니다.”
“그렇군. 알았어.”
“예,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성격에 못 이겨 삼일 만에 돌아온다 해도 이해할게.”
둘 다 사이에게는 아주 학을 떼었는지 입에 칼을 물고 앞 담화를 했다. 여섯 번째 콩포트 타르트를 시킬까 말까 고민하던 사이가 데이몬을 슬쩍 째려보며 말했다.
“자꾸 그러시면 아카데미에는 여자로 입학하게 해 드릴 겁니다.”
움찔.
그날의 일이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데이몬이 사이를 표독스레 노려보았다.
“마법은 보통 시전자가 죽으면 풀리게 되어있지.”
“죽음으로서 완성하는 저주 역시 있습니다.”
파지직.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었다.
“도련님. 아카데미에 가십니까?”
그때, 흥미롭게 둘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로하엘이 물었다.
“그래, 어제 결정하게 되었어. 그나저나 내가 아카데미에 가기로 한 사실은 시에나와 숙부님께만 알린 건데 네가 어떻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거지?”
“저는 공작 각하와 가까운 사이이니까요. 각하의 몸에 점이 몇 개가 있는지도 다 압니다.”
“그런 건 별로 궁금하지 않네.”
사이가 우쭐해하며 공작과 자신의 사이를 과시했지만 데이몬이 딱 잘라 내었다.
“제가 가라고 권유 드릴 때는 코웃음을 치시더니, 무슨 바람이 부셨습니까?”
로하엘이 데이몬을 놀리듯 물었다. 데이몬은 잠시 미세하게 얼굴이 굳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털어 내며 말했다.
“그저 실력이 부족하다고 느꼈을 뿐이야.”
데이몬은 그 이후 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로하엘은 그날의 일 때문이라는 걸 삭제 짐작했는지 더 캐묻지 않았다.
데이몬은 시종이 건네주는 콩포트 타르트를 받았다. 블루베리와 복숭아, 무화과, 사과 등의 각종 과일이 들어 있는 콩포트 타르트를 먹으며 데이몬의 굳어 있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이 맛이 그리울 것 같아.”
“저도요. 과일이 많이 나는 곳이라 그런지 여기 콩포트는 정말 맛있어요.”
“여름에 다시 한번 놀러 오자.”
“네, 좋아요.”
둘은 그렇게 오랜만에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했다. 함께할 수 있는 남은 날들이 얼마 없다고 생각되어 그런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 * *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고, 시에나들은 돌아갈 채비를 했다. 짐이 얼마 없는 상태로 왔기에 시에나는 짐을 싸는 데 별다른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밖에 나오자 시종들이 끙끙대며 마차에 짐을 싸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흑요석 광산의 일부를 잠시나마 얻게 된 파블로 백작이 어지간히 잘 챙겨 준 모양이었다. 파블로 백작은 공작 앞에서 간사하게 손을 비비며 무언가 아부를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파리를 닮은 것 같다고 시에나가 속으로 생각했다. 며칠 동안 보았는데도 참 정이 안 가는 사람이었다.
“시에나. 큰 짐들이 많아 위험해. 마차로 가자.”
“네, 도련님.”
그런 시에나에게 데이몬이 가까이 다가왔다. 데이몬은 시에나를 보호하며 마차로 데려갔다. 겨우 10m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데이몬은 심각할 정도로 시에나를 보호하려 들었다. 전쟁터에서의 일 이후로 데이몬은 시에나를 조금 과보호했다. 그런 데이몬 때문에 이 성의 사용인들은 모두 시에나가 데이몬의 연인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연인이라니, 참….
서로 마음은 고백했지만, 사귄다거나 거기에 대해 더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기에 둘의 관계는 불분명했다. 둘은 해야 할 일이 있었고, 아무리 방학 때 돌아온다고 해도 6년간은 분명히 떨어져 있어야 하는 기간이 분명히 한다. 데이몬은 시에나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고, 시에나 역시 데이몬에게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올라가, 시에나.”
“감사해요.”
시에나를 마차 위까지 에스코트한 데이몬이 자신도 마차에 올라탔다. 셋까지 탈 수 있는 마차였기에 전에는 로하엘과 같이 왔지만, 이번에는 아이작이 타기로 했다. 마차에 오르기 전, 아이작이 둘이 먼저 타 있는 것을 보고 슬며시 눈치를 보았다.
“제가 방해꾼이 되는 건 아닐까요?”
“아니니까 빨리 타.”
“괜찮아요.”
아이작은 급히 다른 마차를 물색하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다른 마차에는 사람이 다 타 있는 데다 출발 준비를 마친 상태라 남는 자리가 없었다. 결국 아이작은 울며 겨자 먹기로 마차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고, 이윽고 마차가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바로 사이를 따라가는 게 아니었군요?”
“네. 누나, 저보다 나이 많으신데 그냥 편하게 말씀하세요.”
“어, 그래도 될까?”“네, 그럼요.”
누나라는 말에 데이몬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돋았다. 그렇지만 딱히 무어라 할 수는 없기에 가만히 있는 듯했다. 데이몬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한 둘이 그를 가운데 두고 재잘재잘 이야기했다.
“일단 집에 가서 할머니께 얼굴 비쳐 드리고 곧 떠날 생각이에요. 아마 제가 이대로 공작 저에 가 버린다면 할머니가 쫓아와서 제 머리를 다 뽑아 버릴걸요.”
오싹하다는 듯 아이작이 몸을 떨었다. 아이작을 워낙 아끼는 할머니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시에나가 속으로 생각했다. 전서구로 아이작을 무사히 구했다는 사실은 알렸지만, 실제로 보기 전까지 얼마나 속으로 동동 구르고 계실까.
“정말 많이 걱정하셨어. 아마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계실 거야. 할머니를 생각하면 조금 더 빨리 갔어야 했는데 너무 늦어졌네. 미안.”
“아니에요. 저 때문에 누나가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은 겪으셨는데요. 오히려 제가 너무 죄송해요.”
“난 고생한 것도 별로 없는데 뭐. 도련님이랑 다른 분들이 정말 고생 많이 하셨어.”
“알고 있어요. 제가 평생 갚아 나가야 할 빚이라고 생각해요. 마법에 재능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죠.”
“그래, 너에게 대마법사가 될 자질이 보인다고 했어. 마법사라니, 정말 멋지다.”
시에나가 흰 로브를 쓰고 마법을 부리는 아이작을 떠올렸다. 아직은 귀엽지만 아이작도 곧 데이몬처럼 한 계절 만에 쑥 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이러니하게 마법사들을 보며 시에나는 자신이 판타지 세계에 떨어졌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사실 알고 보면 시에나가 책 속의 인물에 빙의한 것부터가 제일 말도 안 되는 일인데도.
“열심히 해 봐야죠. 방앗간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던 제가 마법을 배울 수 있게 된 게 다 도련님의 은혜 덕분이니까요.”
아이작은 그러면서 은근슬쩍 데이몬을 대화에 끼워 넣었다. 데이몬은 헛기침을 하며 조금 근엄하게 말했다.
“나 역시 너에게는 큰 빚을 졌어. 갚을 수 있다니 기쁠 뿐이야.”
“그런데 마법에 그렇게 큰 재능이 있으면 마탑에 들어갈 수도 있지 않아?”
시에나로서는 사실 아이작이 마탑 같은 큰 곳에서 배웠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사이가 보여 주는 놀라운 능력은 보고 들어서 알지만 영 믿음직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특히 그 괴팍한 성격에 못 이겨 다른 마법사들도 도망치기도 했다지 않은가. 그렇지만 아이작은 괜찮다는 듯 시에나에게 씨익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여기서 더 이상 폐를 끼칠 수는 없죠.”
“폐라고…?”
“마탑에 들어가는 데에는 막대한 기부금이 필요해. 그 돈은 하급 귀족들조차 감당하기 어렵거든.”
“아… 그것도 모르고 내가 무신경하게 물었네. 미안.”
아이작 대신 데이몬이 답해 주었다. 시에나가 미안해하자 아이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시작하는 것보다는 사실 조금이라도 안면을 튼 사람들과 시작하는 게 좋죠.”
아이작은 요령 좋게 시에나를 위로했다. 시에나는 데이몬뿐 아니라 아이작도 그새 많이 성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다들 쑥쑥 앞서 나가는구나. 시에나는 돌아가면 약초를 공부하는 데에 더욱 열을 올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어, 그런데 아이작 네가 떠나면 할머니도 함께 공작가로 가시겠구나.”
“글쎄요. 제 생각에는 그렇게 하시지는 않을 것 같아요.”
“에이, 할머니가 너를 얼마나 아끼시는데. 당연히 같이 가시겠지.”
“요즘은 저보다 누나를 더 아끼는 것 같던데요. 밤마다 얼마나 열심히 누나 자랑을 하시는지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에요.”
아이작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에이, 그래도 어떻게 친손주보다 아끼시겠어.”
“아니에요. 첫 제자라고 할머니가 누나 엄청 아끼고 있어요. 만약에 누나가 사라졌어도 똑같이 밥도 못 먹고 기다리고 계셨을걸요?”
할머니가 그렇게 나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고?
시에나는 의외의 말에 가슴 한편이 뜨끈해졌다. 여기 와서 소중한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 데이몬, 로하엘, 할머니, 공작 각하, 아이작, 제인. 감사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좀 겁이 나기도 했다. 원래 세계로 떠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 정말 이들을 두고 갈 수 있을까. 즐겁게 대화를 주고받다가 대화가 끊기고 시에나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데이몬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시에나, 왜 그래. 괜찮아?”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멀미가 좀 나나 봐요….”
“여기가 언덕이라 그런가 봐. 눈 좀 붙이고 있어.”
“네, 누나. 피곤하셨을 텐데 좀 쉬고 계세요.”
데이몬에 이어 아이작까지 쉬기를 종용하자 시에나는 결국 눈을 감았다. 별로 졸립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도 잠깐, 마차의 기분 좋은 진동에 시에나는 금방 잠들어 버렸다. 잠결에 둘이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사랑스러우십니까?”
병든 닭처럼 조는 시에나를 은근슬쩍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는 데이몬을 보며 아이작이 놀리듯 물었다. 데이몬이 볼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엄청 예뻐.”
“그런데 아카데미는 어떻게 가시려고요. 괜찮으시겠어요?”
“이미 의논해서 결정한 문제야. 번복하고 싶지는 않아.”
그렇게 말하는 데이몬의 얼굴에는 약간의 씁쓸함이 감돌았다. 시에나가 어쩌면 말려 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시에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밝은 미소로 무장한 채 용감하고 씩씩하게 나아가는 봄의 폭풍 같은 사람. 그랬기에 그때도 자신을 지키려 날카로운 메이스 앞으로 뛰쳐나갈 수 있었겠지.
시에나는 강한 사람이기에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더 강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카데미에 가기로 결정했다.
아카데미에는 분명 자신을 적대하는 세력과 시선들이 가득하겠지. 친구를 만들 수 있을지부터 의문이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더 강해질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녀를 언제나 안전하게 지킬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이겨 낼 수 있었다.
“만약 네가 마탑에 들어가고 싶다면 돈은 내가 마련할 테니 그렇게 해도 괜찮아.”
데이몬이 한 말에 아이작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저도 결정했어요. 그리고 마탑은 한 번 들어가면 잘 나오지 못하잖아요. 저는 도련님을 지키기로 맹세한 몸인걸요.”
그렇게 말하는 아이작 역시 단단히 결심한 듯 보여 데이몬도 더 이상 말리지는 않았다.
“그래. 네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렇지만 혹시 그 마법사가 너무 괴롭힌다 싶으면 내가 책임질 테니 때려도 괜찮아.”
“저는 괜찮은데 도련님께서 오히려 스승님께 쌓인 게 많으신가 봅니다.”
벌써 스승님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아이작에게 데이몬이 마뜩잖은 눈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작은 본격적으로 자리를 깔고 잠들 준비를 했다.
“도련님도 한숨 주무세요. 잠자리가 낯설어서 그런지 좀 피곤하네요.”
“그럴까….”
잠들기로 마음먹자마자 데이몬의 눈꺼풀이 무겁게 덮여 왔다.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데다 밤을 새우기까지 했으니 몸이 피로한 것도 당연했다. 데이몬은 몰려드는 잠의 수마를 거부하지 않고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단잠이었다.
* * *
“시에나. 아침이야. 일어나야지.”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꿈같은 말에 시에나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시야가 흐릿했지만 말을 건 상대가 누구인지는 눈을 뜨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도련님….”
“어제도 늦게 잤지? 피곤하면 조금 더 잘래?”
“아니요… 일어나야죠. 일어날게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에나는 다시 베개에 머리를 푹 박았다. 몸이 너무 무거웠다. 아침에 일어나는 건 너무 고역이었다. 정신을 차리려 다시 고개를 들자 데이몬이 가져온 차의 향긋한 냄새가 시에나의 코끝을 자극했다.
“오늘은 차 몇 가지를 블랜딩해 봤어. 네 입맛에 맞으면 좋겠네.”
“요즘 도련님이 타 주시는 차는 전부 다 맛있어요.”
파블로 백작의 영지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두 달이 지났는데도 데이몬은 시에나에게 아침마다 꼬박꼬박 차를 가져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 부담스러워서 그만두시라 얘기했지만,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얼굴로 나의 즐거움을 빼앗을 생각이냐며 울먹이는 바람에 결국 포기해야 했다.
이쯤 되면 정말 누가 상전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사이 데이몬의 차 맛은 더더욱 좋아져서 이제는 성에서는 그의 차 맛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사실 이제는 데이몬의 차가 아니면 아침을 시작할 자신이 없었다. 차향을 음미하던 시에나가 한 김 식은 차를 홀짝였다.
“맛있어요. 약간 쌉쌀하면서도… 달콤한… 초콜릿 향?”
“응. 맞아. 시에나 코코아 좋아하잖아. 그렇지만 아침부터 코코아는 좀 부담스러울 것 같고 해서 만들어 봤어.”
“항상 생각하지만 도련님은 정말 대단하세요.”
시에나가 아낌없는 칭찬을 내놓자 데이몬이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참, 시에나. 그거 알아?”
“네? 뭐요?”
데이몬은 대답 대신 시에나의 손을 이끌고 창가로 향했다.
촤아악. 방한을 하느라 두껍게 쳐져 있던 벨벳 커튼이 사라지고, 이내 창밖에는 눈이 쌓여 온통 하얗게 변한 마을이 드러났다. 하루 만에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든 눈에 시에나가 탄성을 질렀다.
“와, 눈이 엄청 많이 쌓였네요!”
“좋아할 줄 알았어. 간밤에 쌓였나 봐. 아침 먹고 눈사람 만들러 가자.”
“좋아요. 저 바로 준비할게요.”
“그래. 조금 이따 봐.”
데이몬이 나가자 시에나는 빠르게 준비를 시작했다. 얼굴을 씻고 화장수로 얼굴을 닦아 낸 뒤 크림까지 잊지 않고 발라 주었다. 최근 겨울이라 건조해진 탓에 크림을 바르지 않으면 볼이 금방 새빨개졌다.
이 세계에는 아직까지 기초 화장품이 그렇게 발전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여자들을 위한 아이섀도나 아이라이너, 립스틱 같은 색조 화장품도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일부 귀족 영애들을 위해서만 쓰였다. 평민들은 스킨로션은커녕 세수도 안 하고 물수건으로 쓱쓱 닦는 정도였지만 시에나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세수하던 습관이 있어 하루 두 번은 꼭 물과 비누를 이용해 세안했다.
시에나가 바르는 화장수와 크림, 비누는 아이작의 할머니가 아이작을 구해 줘서 고맙다며 허브와 약재를 이용해 직접 만들어 준 화장품이었다. 유통 기한이 길지는 않지만 전부 천연 성분이라 한국에서 쓰던 화장품보다 오히려 효과가 더 좋았다. 매끈매끈해진 피부를 괜히 한 번 쓰다듬으며 시에나가 옷장으로 향했다.
“뛰어놀려면 역시 바지가 편하겠지?”
데이몬과 놀기 위해 웃옷과 바지를 제대로 갖춰 입은 시에나가 두툼한 양모로 만들어진 겉옷까지 걸치고 방을 나섰다.
* * *
“시에나, 이쪽이야.”
식당 안에는 데이몬이 자리에 앉아 손을 흔들고 있었다. 로하엘 역시 시에나를 반갑게 맞이해주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제가 늦었네요.”
“저도 방금 온 참이에요. 겨울이 되니 해가 늦게 떠 일어나기가 쉽지 않네요.”
로하엘이 시에나의 인사를 다정하게 받아 주었다. 오늘 암탉이 갓 낳은 따끈따끈한 달걀로 만든 계란프라이와 빵, 소시지가 시에나의 앞에 놓였다. 레네톤을 떠나기 전 선물받은 잼은 이제 블루베리만 남아 있었다. 시에나가 아쉬워하며 갓 구운 흰 빵에 블루베리 잼을 아껴 발랐다.
바삭.
흰 빵의 바삭한 겉과 보드라운 속 그리고 새콤달콤한 블루베리 맛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별로 달지 않으면서도 진하게 느껴지는 과일의 풍미가 고급 잼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
“역시 너무 맛있어요… 이 잼이 이제는 끝이라니 믿기지 않아요.”
“맞아요. 참 맛있었죠, 이 잼.”
“다녀온 지 두 달이 지났으니 어쩔 수 없죠.”
파블로 백작에게 선물받은 잼은 왕실에 납품하는 잼이었기에 그 질이 몹시 뛰어났지만 쉽게 가질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이 잼이 다 떨어지면 다시 일반 잼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침울했다. 그때, 아이작의 할머니가 밝은 표정으로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할머니. 어서 오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어이쿠, 다들 모여 계셨군요.”
“저도 방금 왔어요.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
다행히 시에나가 마지막 지각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노파가 주름 많은 얼굴을 활짝 펴고 자리에 앉았다. 노파의 손에는 흰 편지 봉투 두 통이 들려 있었다.
“아이작이 편지를 보냈더군요. 읽어 보느라 좀 늦었습니다.”
“6주 만이군. 별일은 없는 건가?”
마르바스성을 떠난 지 6주가 다 되어 가는 아이작이 처음으로 편지를 보내온 것이었다. 아이작의 예언대로 시에나를 가르쳐야 한다며 마르바스성에 남은 노파였다. 겉으로는 다 컸으니 잘 지내고 있겠지요, 라고 하지만 무심코 수업 중에도 아이작을 위한 차와 과자를 만들던 노파였기에 그녀가 얼마나 이 편지를 기다려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직접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이작이 도련님과 시에나에게도 편지를 썼더군요.”“와, 정말요?”
“그래. 시에나, 여기 있단다. 도련님, 여기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네.”
“뭘요, 별거 아닌걸요.”
시에나가 노파에게서 편지를 건네받고 환한 얼굴을 했다. 데이몬 역시 아이작이 제게도 편지를 썼다는 게 기쁜 기색이었다. 노파에게서 받아 든 편지는 조금 전에 왔는지 차가운 아침 공기를 머금고 있었다. 식사 자리에서 뜯어 보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그렇지만 내용이 궁금해 자꾸만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빨리 뜯어 보고 싶다.”
그때 데이몬이 시에나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데이몬 역시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저도요. 너무 궁금해요.”
말을 맞춘 것도 아닌데 데이몬과 시에나의 식사 속도가 조금씩 빨라졌다. 데이몬은 써니 사이드 업으로 만들어진 노른자를 터뜨리지도 않고 한입에 넣었다. 시에나는 한입 베어 문 자국이 남은 큰 빵을 그대로 입 안에 집어넣었다.
양이 많다 보니 부드럽게 넘어가지 못하고 목이 조금 까끌거려 캑캑대자 데이몬이 재빨리 시에나의 컵에 사과주스를 가득 부어 주었다. 시에나는 감사의 인사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목 안으로 사과주스를 흘려 넣었다. 상큼한 사과주스가 먹먹한 흰 빵을 흐물흐물하게 만들었다. 겨우 빵을 목구멍 속으로 넘긴 후 빠른 식사를 마친 시에나와 데이몬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먼저 일어나 보겠네.”
식당을 일어난 둘의 걸음걸이가 날아갈 듯 가벼웠다. 로하엘과 노파가 떠나가는 둘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뒤도 안 돌아보고 가네요. 차 한 잔 더 드시겠습니까?”
“아이구, 감사합니다. 요즘은 차 맛이 참 좋더라고요.”
“도련님의 차 타는 솜씨가 하루가 멀다 하고 느시더라고요. 사실 차 맛 때문에 떠나지 말아 달라고 말하고 싶을 지경이라니까요.”
“불경하지만 저도 사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답니다. 그런데 저희 아이작이 글쎄….”
노파와 로하엘은 데이몬이 우린 차 이야기로 시작해 아이작의 이야기까지 넘어갔다. 요즘 데이몬과 시에나가 착 달라붙어 있어 그 반대급부로 로하엘과 노파도 제법 친해지게 되었다. 노파는 아이작을 자랑하고, 로하엘은 데이몬을 자랑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딱 극성 팔불출 부모를 보는 것 같았다.
“…래서, 아이작이 벌써 1클래스 마법을 배우고 있다지 뭡니까!”
“우와, 그거 정말 대단한데요. 데이몬 도련님은 또 저번에….”
덕분에 나이와 신분을 막론하고 둘은 마르바스성의 막역한 지우가 되었다. 식기를 치우던 제인이 두 분이 또 한참이나 수다를 떠시겠구나 싶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창가에는 어느새 함박눈이 펑펑 나리고 있었다.
* * *
“시에나, 그럼 조금 이따 봐.”
“네, 도련님.”
시에나는 방문을 열자마자 달려 침대로 다이빙했다. 따뜻한 거위 털을 가득 넣은 이불이 충격을 모두 흡수해 주었다. 베개에 기대어 시에나가 본격적으로 편지를 뜯기 시작했다. 편지를 열자마자 말끔한 아이작의 글씨가 눈에 띄었다.
[ 친애하는 시에나 누나에게.
누나, 잘 지내셨나요?
아이작이에요.
공작성에는 눈이 잔뜩 내렸어요. 마르바스성은 어떤가요?
그땐 정말 싫었던 마르바스성인데, 여기 오니 자꾸 궁금해지고 그리워지는 게 신기해요.
어느새 정이 들었던 걸까요.
저는 지금 1클래스 마법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봄이 오기 전에 1클래스를 마스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스승님께서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며 투덜대시지만, 저로서는 이 작은 성취가 마냥 기쁘기만 합니다.
추운 겨울에 힘들이지 않고 손에서 불을 피워 몸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건, 장작이 없어 춥게 살아야 했던 지난 시절에 비하면 정말 매력적으로 느껴지니까요.
추위가 끔찍하게 싫었던 옛날 기억 때문일까요? 저는 화염 계열에 유독 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빙결 마법은 사실 이론을 공부하는 것도 너무 지겨워 책을 책장 뒤쪽에 몰래 숨겨놨어요(스승님껜 비밀이에요).
스승님은 진짜 웃겨요. 제가 쓰는 것보다 수십 배는 어려운 수식은 척척 풀어내시면서 청소는 어떻게 하는지, 음식은 어떻게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세요. 좋게 말하면 연구밖에 모르고, 나쁘게 말하면 생존 능력이 전무하달까요. 그래서 죽지 않도록 제가 곁에서 잘 챙기고 있어요.
저희 할머니는 잘 지내고 계신가요? 따로 편지하기는 했지만 괜찮다고 답할 게 뻔하다 보니 오히려 걱정이 되네요. 할머니가 겨울이 되면 종종 허리와 무릎이 아파서 고생을 하세요. 제가 없으면 식사도 잘 안 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염치 불고하고 잘 좀 챙겨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항상 누나에게는 감사하고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다음에 편지할 때에는 누나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 스승님이 부르시네요. 실험하다가 뭘 또 부순 것 같은데… 큰일은 아닐 거예요. 하루에도 다섯 번씩은 꼭 뭔가를 부수시거든요. 그렇지만 가 봐야 할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누나도 항상 건강하세요!
아이작이. ]
편지를 읽는 내내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이작이 제법 잘 적응하고 있는 듯해 한결 마음이 놓였다.
“지금 바로 답장을 써야겠다.”
시에나는 밍기적거릴 새 없이 침대에서 바로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아이작에게….”
깃펜에 잉크를 발라 새하얀 종이 위에 아이작에게, 라는 글자를 쓰자 쓰고 싶은 말들이 물밀 듯이 몰려들었다.
편지에 대한 감사 인사, 할머니의 건강에 대해, 데이몬의 키가 또 얼마나 컸는지, 그의 차 타는 실력은 또 얼마나 좋은지, 입학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 우리 데이몬이 공부를 또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지….
쓰다 보니 데이몬에 대한 자랑 일기가 되어 버린 것 같아 다음 페이지엔 제 이야기도 써 넣었다. 얼마 전 겨울에만 나는 귀한 약초를 발견한 것, 다루기 까다롭다던 만드라고라 약초 포션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것까지.
“너무 많이 썼나.”
쓰고 보니 너무나 투 머치 토커가 된 기분에 휩싸였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며 두툼해진 편지지를 반으로 접었다. 편지 봉투를 봉하기 위해 왁스를 촛불 위에 놓자 단단한 왁스가 열에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똑, 똑. 붉게 녹은 왁스 위에 인장을 찍은 뒤 굳길 기다리는데,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시에나, 다 했어? 밖에 나가지 않을래?”
데이몬이 수줍은 목소리로 물어 왔다. 참, 눈사람을 만들기로 했었지. 시에나는 의자 위에 걸어 놓은 겉옷을 대충 걸치고 밖을 나섰다.
“네, 지금 나갈게요.”
덜컹, 문을 닫고 복도를 걷는 내내 데이몬의 기분은 무척 좋아 보였다.
“도련님, 뭐 기분 좋은 내용이라도 있었나요?”
별 뜻 없이 물은 질문에 데이몬이 얼굴을 살그레하게 붉혔다.
“아아니, 별 내용은 없었는데 그냥 또래한테 편지를 받았던 게 처음이라 좋아서.”
실상 또래 친구가 전무했던 데이몬이었기에 아이작에게 편지가 왔다는 사실이 무척 의미 있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시에나는 살짝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부러 말했다.
“아카데미에 가시면 제가 편지 많이 쓸게요.”
“응, 나도 많이 쓸게.”
둘은 기분 좋게 약속하며 정문을 나섰다. 밖은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황량한 정원이 눈이 내리자 제법 운치 있게 변했다. 시에나가 장갑 낀 손으로 눈을 뭉쳐 데이몬에게 퍽, 던졌다. 얼굴에 정통으로 눈덩이를 맞은 데이몬의 표정이 볼만했다.
“시에나 너….”
까르르 웃으며 도망치는 시에나를 데이몬이 쫓았다. 둘은 한참이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정원을 달음박질쳤다. 시에나가 잡힐 듯 말 듯 데이몬을 약 올렸다.
“도련님 느려요!”
“네가 빠른 거야!”
놀림받으면서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데이몬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시에나가 정원에서 가장 오래된 고목을 터치하며 눈밭으로 그대로 쓰러졌다. 시린 겨울임에도 몸에서는 후끈후끈 열이 났다.
“제가 이겼어요!”
“맞아. 시에나, 정말 빠르다.”
데이몬도 나무를 터치한 뒤 시에나 옆에 그대로 누워 버렸다. 눈 이불이 푹신했다. 누가 보면 채신머리없는 행동이라며 욕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큰 대 자로 누운 그들의 위로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눈 좀 보세요. 온 세상을 다 덮을 기세예요.”
“그러게, 시종들이 죽어나겠는걸.”
“오늘 장작을 넉넉히 배급하는 게 좋겠어요.”
“그래, 시종장에게 말해 둘게.”
대리인 일을 맡기로 결심한 뒤, 시에나는 이렇게 놀다가도 가끔씩 관리자 모드에 들어갔다. 어린 여자아이에 불과한 시에나가 마르바스 영지를 관리하게 되었다는 소리에 사용인들 중 소수가 불만을 토했지만, 실력 발휘에 들어가자 그 말은 쏙 들어가게 되었다.
초반이라 아직 굵직한 일들은 기획 단계였지만 제도를 몇 개 바꾼 것만으로도 사용인들은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시에나가 한 일 중 가장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은 마르바스성 안에 유아원을 만든 일이었다.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낳더라도 일을 하고 싶은 여성들을 위해 시에나가 만든 제도였다.
사용인들은 일을 하다가도 언제든지 아이를 보러 올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았고, 시에나로서는 마르바스성이 아이들 웃음소리로 넘치게 되어 좋았다. 성 아랫사람들은 마르바스성을 귀신 들린 집처럼 취급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성의 이미지 쇄신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봄이 되면 정원에 꽃나무를 심고 허브들을 키울 것이다. 그것도 전부 먹을 수 있는 것들로. 꽃이 핀 정원 사이의 오솔길을 종종걸음으로 걷고 뛸 아이들을 상상하자 시에나의 입꼬리가 저절로 말려들었다.
“시에나, 무슨 생각 해?”
“봄이면 성이 어떻게 변할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봄이면… 아이들이 우리가 누워 있는 이 정원을 뛰어다니겠지? 꽃향기를 맡으면서 산책도 하고 말이야.”
데이몬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시에나가 이내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왜, 왜 웃어? 내가 뭐 잘못 말했나?”
“아니요. 쿡쿡… 도련님이 한 말씀이 제가 했던 생각이랑 정확히 일치하는 게 웃겨서요.”
“아, 시에나도 그런 생각을 했어?”
“네, 어쩜. 사람 생각이 다 비슷한가 봐요.”
사람 생각이 다 비슷하다고 말하긴 했지만 개중에서도 데이몬과 시에나는 비슷한 점이 제법 많았다. 근 2개월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한 거였다. 둘은 성향, 성격,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들이 대부분 비슷했다. 가끔은 이렇게까지 생각이 같을 수도 있나 싶어 놀랄 정도였다.
“사실 시에나가 아이들을 데려오겠다고 했을 때에는 반신반의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하길 잘한 것 같아.”
“음… 왜요?”
“시에나는 시끌벅적하고 사람이 많은 걸 좋아하잖아.”
그랬나?
데이몬의 말에 문득 자신을 되돌아보니 그랬던 것도 같다. 혼자 있는 걸 별로 즐기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긴 하지만….”
시에나가 말끝을 흐렸다. 데이몬이 의아해하며 그런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도련님이 안 계시면 아무리 시끌벅적해도 조금은 외로울 거예요.”
갑작스러운 애정표현에 데이몬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런 시에나의 말이 못내 기쁜 듯 발그레하게 얼굴을 붉혔다.
“자주 올게. 꼭.”
은근슬쩍 데이몬 자신의 손을 시에나의 손 위에 포개었다. 장갑을 두껍게 껴 사실 별다른 감촉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손이 포개어져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냥 수줍었다. 데이몬이 살며시 시에나의 작은 손을 끌어 쥐었다. 두꺼운 장갑 사이로 데이몬의 온도가 느껴지는 듯했다. 둘은 눈사람을 만들겠다는 약속도 잊고 한참을 그렇게 누워 있었다.
“시에나-! 이제 그만 들어오렴-.”
“도련님, 공부하셔야죠-!”
정문 쪽에서 노파와 로하엘이 둘을 불렀다. 불청객의 등장에 둘은 눈을 마주쳤다.
“이제 가야겠죠?”
“가기 싫다.”
“사실 저도 그래요.”
“그래도 가야겠지?”
“네… 읏차, 저희 일어나요.”
시에나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시에나의 손을 잡고 데이몬이 날쌘 고양이처럼 몸을 일으켰다. 자리에서 일어난 둘은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눈을 털기 시작했다. 미처 털지 못한 등 부분의 눈가루는 사이좋게 서로 털어 주었다. 시에나의 등을 털어 주며 데이몬이 조금 우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등, 이제는 괜찮은 거지?”
데이몬은 가끔 이렇게 한없이 어두운 얼굴로 시에나의 등에 난 상처에 대해 물어 오곤 했다. 실금으로 된 가느다란 흉터 정도로밖에 안 남아 전혀 아프지도 않은 그 상처가 데이몬의 가슴에는 더욱 아프게 박혔던 모양이었다. 시에나는 씩씩하게 답했다.
“그럼요, 사이 님이 성격은 좀 그래도 실력은 좋잖아요. 그리고 사실 전 아팠는지 잘 기억도 안 나요. 자고 일어나니까 다 나아 있었는걸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혹시라도 아프면 언제든지 말해. 신관을 부를 테니.”
“다 나았는데요, 뭘. 정말 괜찮아요.”
시에나가 데이몬을 부드럽게 위로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시에나. 그날 어떻게 된 일인지 기억해?”
“네? 무, 무슨 일이요?”
괜히 뜨끔해진 시에나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사실 난 그날 일이 잘 기억이 안 나거든. 그 산적들 사이에 둘러싸인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뭐가 뭔지 전혀….”
“으음… 사실 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그게 원래 강한 충격을 받으면 다 잊어버릴 수도 있대요. 그러다가 몇 년 후에 갑자기 다시 생각나기도 하고요.”
“그렇구나. 그렇지만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기억을 잃다니, 좀 이상하지 않아? 꼭 누군가 고의로 숨겨 놓은 것처럼….”
시에나는 데이몬의 지적에 가슴이 뜨끔해지는 걸 느꼈다. 그러나 또 다른 데이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옳은지에 대한 확신이 아직 없었다. 시에나도 정확히 그의 정체에 대해서 모르는데 괜한 이야기를 해서 걱정을 심어 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몸 안에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있다니, 이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인가. 데이몬도 눈치는 조금 채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림자라고 생각할 뿐 그가 지성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모를 터였다. 조만간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고 시에나가 결심했다. 그를 깨울 키워드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 그러게요. 둘 다 워낙 큰일을 겪은 거다 보니 그랬지 않나 싶어요. 굳이 그 기억을 찾고 싶은 마음도 없구요.”
“그래. 사실 나도 시에나가 그 기억들을 찾기 원치 않아.”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으면 기절했다가 3일 만에 깨어났을까, 데이몬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시에나는 3일이나 기절해 있었던 과거의 나에 감사하며 신발을 털고 정문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훈훈한 공기가 둘을 훅 뒤덮었다. 따스한 온도에 어깨와 머리에 묻어 있던 눈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어휴, 밖이 얼마나 추웠으면 두 분 다 코가 아주 빨개지셨어요.”
난로 앞에 두어 바싹 마른 타올을 둘에게 건네주며 노파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시에나는 뽀송뽀송한 햇빛 냄새가 나는 타올로 젖은 머리칼을 말렸다.
“고마워요, 할머니.”
“고맙네.”
“아닙니다. 별거 아닌걸요.”
“도련님, 오늘 야외 활동은 힘들 것 같으니 안에서 수업할까요?”
“그래. 시에나, 그럼 고생해. 조금 이따 보자.”
“네, 도련님도 힘내세요.”
“아니, 저한테는 그렇게 단답형으로 말씀하시면서 시에나 양한테는 꿀이 뚝뚝 떨어지게 말씀하시는 법 있으십니까? 말이라도 두 번에 걸쳐서 하시면 덜 서운하겠어요.”
“그게 싫으면 시에나로 태어나지 그랬어. 얼른 공부하러 가자.”
로하엘이 기가 차서 째려보는 눈빛을 싹 무시하며 데이몬이 계단 위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로하엘도 그 뒤를 따랐다.
* * *
“도련님이 너를 몹시 아끼시는구나.”
주름진 눈을 휘며 노파가 말했다. 시에나는 대답 대신 수줍게 미소 지었다. 최근 데이몬은 공부하는 시간과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시에나의 곁에 머무르며 그녀를 살뜰하게 챙겼다. 그러면서도 공부는 절대 허투루 하지 않았다. 입학시험이 어렵기로 소문이 나 있어 걱정했었는데(떨어지면 엄청난 양의 기부금을 내고 입학해야 했다), 로하엘은 무난히 합격하는 건 당연하고 수석이나 차석이냐 정도의 차이라며 시에나를 안심시켰다. 그런 걸 보면 데이몬은 어지간히 똑똑한 모양이었다.
“감사할 따름이죠. 참, 할머니. 혹시 집중에 도움이 되는 차는 없을까요?”
“도련님께 드리려고 그러니?”
“네에. 곧 시험이시니까 도움이 되는 걸 좀 만들어 드리고 싶어서요.”
한국이라면 찹쌀떡이나 합격 기원 엿이라도 살 텐데, 여기는 그런 게 따로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이 시험장에 보낸다는 건 누가 어디에 가든 뭐라도 먹여야 하는 배달의 민족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흐음, 어디 보자… 로즈마리 티나 페퍼민트 티가 정신을 맑게 해주는 데는 좋지. 그걸 만들어 보련?”
“네, 좋아요. 엇, 그런데 그럼 오늘 수업은….”
“지금까지 열심히 했으니 하루 정도는 빠지면 어떠니.”
스승의 땡땡이 권유에 시에나의 입이 귀에 걸렸다.
“과연 옳으신 선택입니다.”
신이 난 시에나가 끊임없이 노파와 재잘대며 미니 온실로 향했다.
미니 온실은 노파와 시에나가 만든 둘만의 정원으로, 마르바스성 1층의 빈방을 개조해 만든 수경 재배실이었다. 다른 가문의 온실만큼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포션을 제조할 때 꼭 필요한 식물들을 놓고 키웠기 때문에 실용성 하나만큼은 어떤 온실들보다 뛰어나다 자부할 수 있었다.
지금은 겨울이라 야외에 있는 정원을 가꿀 수 없지만, 봄이 오기만 하면 허브와 식용 작물들로 정원을 가득 채우리라는 야망을 꿈꾸는 시에나가 미니 온실의 문고리에 손을 대었다. 문을 열자마자 시원하면서도 상쾌한 허브의 향기가 둘을 덮쳤다. 순식간에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음, 여긴 언제 와도 참 기분이 좋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나는 페퍼민트를 자를 테니 로즈메리 줄기를 좀 잘라 주련?”
“예. 그럴게요. 할머니, 여기 가위요.”
시에나가 신이 나 바구니와 가위를 들고 무성하게 자란 로즈메리를 향해 다가갔다. 빽빽하게 자란 로즈메리에서는 허브 특유의 강한 향이 났다. 시에나가 로즈메리를 손가락으로 흐트러트리자 손가락 사이로 진한 허브 향이 퍼졌다. 어디서부터 어떤 식으로 잘라야 할지 망설이자 노파가 시기적절하게 조언해 주었다.
“로즈메리 위의 색깔이 변하지 않은 여린 부분을 위주로 조금씩 잘라 가져오면 된단다.”
“네, 그럴게요. 한 바구니 정도면 되려나요?”
“페퍼민트도 있으니 한 바구니는 좀 많고, 반 바구니 정도가 좋겠구나.”
“네에.”
썩둑. 가위질을 할 때마다 로즈메리 줄기가 한 움큼씩 잘려 나갔다. 자른 단면에서 로즈메리 향이 더 진하게 났다. 한 줄기, 한 줄기 주의 깊게 살피며 자르다 보니 찰칵, 마지막으로 잘린 로즈메리 줄기가 바구니 위로 풍성하게 쌓인 다른 줄기들 위로 톡 떨어졌다.
“이 정도면 될까요?”
“그래. 이만하면 되었구나. 이제 물로 두어 번 헹구어 주면 된단다.”
“네에. 밖은 추우니까 미니 주방에서 쉬고 계세요. 제가 물을 떠 올게요.”
“그래도 괜찮겠니?”
“그럼요. 불가에서 불이라도 좀 쬐고 계세요. 요즘은 날이 너무 추워요.”
“그래, 부탁하마.”
“네, 금방 올게요!”
미니 온실에 이어 미니 주방 역시 시에나와 노파를 위해 얼마 전 만들어진 주방이었다. 원래는 큰 주방을 빌려 썼었는데, 저녁 준비로 바쁜 곳에서 방해만 되는 것 같아 성 뒤편에 쪼그려 앉아 불을 피워 놓고 손을 호호 불며 약을 만들던 걸 데이몬에게 딱 걸렸었다.
그 이후로 아예 시에나를 위한 별관을 만들어 주겠다고 난리 치는 걸 겨우 말려 큰 주방 옆에 미니 주방을 만드는 걸로 해결을 보았다. 데이몬은 그것조차 너무 작다며 마뜩잖아 했지만 시에나로서는 눈치 안 보고 약재를 씻고 만드는 공간이 생긴 것만 해도 만족스러웠다.
양은 물통 두 개를 달랑달랑 들고 도착한 수돗가에는 시에나뿐 아니라 서너 명 정도의 사용인들이 줄을 서서 각자의 업무에 필요한 물을 받아 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시에나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어서 와요.”
“안녕하세요-.”
“바쁘시면 먼저 쓰실래요?”
“아아뇨. 괜찮아요. 차례 기다릴게요.”
시에나는 줄 맨 뒤에 서서 무심히 불어오는 겨울바람을 맞을 때마다 수돗가를 성안으로 옮기는 일에 대해서 고민했다. 수돗가라고는 성의 뒤쪽에 딱 두 개 있는 주제에 둘 다 너무 먼 곳에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
수돗가가 가까이 있다면 손님이 왔을 때 외관상 보기 좋지 않아 보인다는 이유로 멀리 떨어진 곳에 설치되었다고는 하지만, 여름엔 더위 먹으며 겨울엔 바람 맞으며 기다리는 사용인들을 생각하면 너무 이기적으로 느껴지는 위치였다.
‘관을 연결해 수도꼭지로 물을 틀고 잠글 수 있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손님방에 샤워실이 있으니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사용인들이 조금 더 편하게 일할 수 있는 방법을 골똘히 생각하며 시에나가 순서를 기다렸다. 시에나가 사용인들에게 금방 신뢰를 얻게 된 것은 이런 점이었다. 하녀 일을 해 봤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편하게 일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 데 도가 터 있었다. 조만간 사람들과 이야기해 봐야겠다는 결심을 하는데 반가운 사람이 시에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시에나, 괜찮아? 피곤해 보이는걸.”
“제인. 오랜만이야.”
시에나가 밝게 미소를 지으며 물을 뜨러 온 제인을 반겼다. 그녀는 청소에 필요한 물을 뜨러 온 건지 텅 빈 낡은 양동이 위에 대걸레를 담아 놓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겨울에 찬물을 만져서 그런지 제인의 하얀 손이 빨갛게 부르터 있었다. 시에나가 그런 제인의 손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난 괜찮아. 제인이야말로 손이 많이 텄는데 아프진 않아?”
제인은 시에나에게 걱정을 끼친 게 미안했는지 슬그머니 손을 뒤로 숨기며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니야. 겨울엔 다 그러는 걸, 뭐. 참, 시에나. 오늘 마을에 축제 열리는 거 알아?”
“응? 아니, 몰랐어. 오늘 축제가 열려?”
“응. 내일이 신년이잖아. 신년을 맞이해서 이스테라 여신을 찬양하는 축제가 열린다 하더라고.”
아, 그러고 보니 벌써 신년이구나. 시에나는 빛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의 속도에 혀를 내둘렀다.
“재밌겠다. 너도 갈 거야?”
“응. 야시장도 열린다니까 오늘 퇴근하고 가면 될 것 같아. 다 네가 빠르게 퇴근시켜 준 덕분이야.”
제인의 대놓고 하는 칭찬에 시에나는 어설프게 미소 지었다. 시에나가 대리인을 맡은 이후 스케줄에 따라 그날그날 꼭 필요한 인원들만 남겨 두고 일정 시간이 되면 사용인들을 퇴근시켰다. 물론 늦게 퇴근하는 인원들은 늦게 출근하게 했고, 일찍 출근해 늦게까지 일하게 된 경우에는 추가 수당을 반드시 챙겨 주었다. 드물게 밤을 새워서 일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그다음 날 필히 휴식을 하게 해 주었기에 늦게 퇴근하거나 밤을 새우는 경우에도 사람들은 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악습으로 인해 늦은 밤까지 퇴근도 못 하고 저택을 돌아다녀야 했던 사용인들은 그런 시에나의 결단을 몹시 환영했다. 가족과 함께하는 삶과 여유가 생기자 사람들의 얼굴에도 생기가 돌았다. 기력이 생겨서 그런지 일하는 시간의 절대량은 줄었지만 하는 일까지 줄어들었던 건 아니었는데도 주어진 일들은 항상 시간 안에 끝났다.
“당연한 건데 뭐. 야시장이라니 재미있겠다. 나 그런 데 한 번도 안 가 봤는데.”
“도련님이랑 같이 다녀와. 야시장 꽤 늦게까지 한대.”
“도련님이랑? 그럴까….”
시에나는 제인의 권유에 살짝 흔들렸다. 아이작과 노파를 강제로 납치 및 감금했던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킨 뒤,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는 좀 데면데면했다. 물론 시에나 혼자 서먹하게 느끼는 거일 수도 있지만 그랬다. 망설이는 시에나에게 제인이 재차 권유했다.
“요즘 계속 일만 했잖아. 기분 전환이 될 거야.”
“그래, 알았어. 도련님께 한번 여쭤볼게.”
“좋은 생각이야. 안 된다고 하면 나랑 같이 가자.”
“알았어, 고마워.”
제안의 말에 시에나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앞사람의 물통이 꽉 차고, 시에나의 차례가 되었다. 양은 물통 두 개에 물을 가득 담고 떠나가는 시에나에게 제인이 손을 흔들었다.
“흐르겠다. 조심해서 들어가.”
“응, 너두.”
반가운 제인과의 만남에 금세 마음이 훈훈해졌다. 제인은 마음 씀씀이가 좋은 편이었고, 나이도 어느 정도 있어 익숙하게 사람들을 잘 챙겼다. 심지어 하녀들 중에는 드물게 글을 읽고 쓸 수 있어 사용인들의 부탁을 받고 편지를 대신 써 주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제인의 근속 연수가 꽤 되었지? 3년이었나….”
1년 경력만 채운 뒤 다들 학을 떼고 떠나가는 마르바스성이었기에 3년의 근속 연수는 대단한 걸 넘어서 위대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모두에게 상냥하고 친절한 제인이라면 어디에서도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왜 여기에 계속 있었을지 새삼 궁금했다.
“마르바스 영지에 가족들이라도 있는 건가?”
다음에 물어봐야겠다 생각하며 시에나가 끙차, 물통을 이고 걸음을 옮겼다.
“어휴, 많이도 가져왔구나. 힘들었겠어.”
노파는 시에나가 들고 있는 물통을 빼앗듯이 들었다. 물이 가득 든 물통이 찰랑거리며 몇 방울이 바닥에 튀었다. 물통을 이고 조금 걸었다고 그새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 시에나를 향해 노파가 단호하게 말했다.
“허브를 씻는 건 내가 할 테니 너는 옆에서 좀 쉬고 있으렴.”
“아니에요. 그렇게 힘들지도 않았는걸요. 젊은 제가 해야죠.”
만류하던 노파도 시에나가 팔을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허브를 씻기 시작하자 말리지 못했다. 수경재배라 흙이나 먼지가 거의 묻어 있지 않았기에 세척은 금방 끝났다. 깨끗하고 반짝반짝해진 로즈메리와 페퍼민트를 보며 시에나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이걸 펼쳐서 잘 말려 둔 뒤 통에 담으면 끝이란다.”
“어? 그렇게 쉬워요?”
“그래. 기름을 짜는 것도 아니고 차를 만드는 건데 어려울 게 뭐가 있겠니.”“헉. 기름을 짤 수도 있나요?”
시에나가 바구니 위에 펼쳐 놓은 싱그러운 로즈메리 줄기 하나를 집어 팔랑팔랑 돌리다 놀라 물었다. 에센셜 오일을 만드는 건 지금 이 시대에는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자신의 생각이 틀린 모양이었다. 노파가 잎을 넓게 펼친 바구니를 창가 앞에 가져다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허브 양도 많아야 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긴 하지만 못 할 건 없지. 관심 있니?”
“네. 알려 주세요!”
시에나는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물건을 생각하며 노파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간절해 보이는 표정에 노파는 슬며시 웃으며 물었다.
“그것도 도련님께 드리려고?”
“어… 꼭 그것 때문에 만들어 보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드릴 거긴 해요….”
시에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조그맣게 대답했다. 노파는 그 표정에 제가 더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마악 사랑을 시작해 모든 걸 서로에게 퍼 주고 싶어 하는 둘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그럼 만들어 보면 되지. 지금 만들어 볼까?”
“지금요?”
“아, 지금은 안 되겠구나.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예전 집 창고에 있단다. 그걸 가져와야 만들 수가 있는데….”
“무거운가요?”
“글쎄다, 아마 혼자서는 못 들 것 같은데.”
“흐음. 그럼 어떡하지. 시간 여쭈어보고 저랑 할머니랑 도련님이랑 로하엘 님 이렇게 넷이 다녀올까요?”
“아서렴. 두 분은 바쁘신데 폐를 끼칠 수는 없지.”
“흐음, 그런가. 오늘 마을에서 축제와 야시장이 열린대서 겸사겸사 다녀오면 좋을 것 같아서요. 물어보기만 하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으응? 축제가 열린다고 듣긴 했는데 그게 오늘이었구나.”
“네, 저도 조금 전에 알았어요. 그럼 물어볼게요.”
“그래, 어련히 잘 물어보겠지. 알았다.”
노파는 결국 시에나에게 항복 선언을 했다. 시에나는 축제를 구경할 생각에 몹시 들떠 있었다.
“어차피 야시장이 열릴 때까지 시간이 걸릴 테니 지금은 좀 쉬도록 하렴.”
“어… 그래도 될까요?”
“그래. 얼굴이 너무 피곤해 보여. 요즘 무리하고 있는 것 아니니?”
내 안색이 그렇게 안 좋은가.
제인도 그렇고 할머니도 그렇고 다들 피곤해 보인다고 그러네.
시에나는 슬며시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쭈욱, 여전히 탱글탱글하지만 예전에 비해서는 약간 퍼석해진 피부가 느껴졌다.
최근 일을 하느라 수면 시간이 좀 짧아져서 그런 모양이었다. 하루 8시간 이상 자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시에나였건만, 요즘 수면 시간은 하루 네 시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신경 쓸 게 많아서일까. 잘 먹는데도 살이 쭉쭉 빠졌다. 도톰한 옷 사이로 삐져나온 앙상한 손목을 보며 노파가 걱정스레 말했다.
“가서 낮잠이라도 좀 자두는 게 어떠니?”
“음… 그럴까 봐요. 참, 할머니. 혹시 남는 크림을 좀 얻을 수 있을까요?”
“크림? 어디에 쓰려고 그러니?”
“아까 수돗가에서 보니까 제인 손이 텄더라고요. 여분이 있으면 좀 나누어 줄까 해서요.”“흐음. 줄 수야 있지만 제인에게만 줘도 되겠니?”
“네? 어떤 것 때문에 그러세요?”
허튼소리를 잘 하지 않는 노파였기에 시에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나 싶어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는 제인의 친구긴 하지만 성의 관리인이기도 하잖니. 다른 사람들 역시 손이 터 있을 텐데 제인에게만 주면 그들이 별로 좋게 보지는 않을 것 같아서 노파심에 한 말이란다.”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생각도 못 했어요.”
생각해 보지 않은 이야기에 시에나가 순간 멍해졌다.
그랬지. 시에나는 제인의 친구임과 동시에 현재 이 영지를 다스리는 대리인이었다. 예전과는 달리 자신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사람들에게는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갑자기 긴장으로 목이 뻣뻣해지는 기분이었다.
“제 생각이 짧았네요. 조금 더 조심해야겠어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에나의 기운 없는 말투에 노파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내가 괜한 소리를 한 것 같구나.”
“아니에요. 알려 주지 않으셨으면 감정의 골이 생길 수도 있는 문제였는걸요.”
노파를 위로하듯 살며시 미소 짓는 시에나의 안색이 영 어두워 보여 그녀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
“네가 혼자 너무 많은 일을 하려고 하는 것 같아 보인단다. 도와줄 사람을 뽑을 생각은 없니?”
“도와줄 사람이요? 시종장님이 대부분 도와주시고 계시긴 하지만….”
최근 사람이 늘어 시종들을 이끄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쳐 보이는 시종장이었다. 그에게 더 많은 짐을 지우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사람을 추가로 뽑아야 하는데… 고민하던 시에나가 문득 데인 집사를 떠올렸다.
“아, 집사!”
리메리오 남작의 수하였던 데인 집사가 사라진 후 마르바스성에는 아직 집사가 없었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는데, 눈앞의 일을 해결하는 것으로도 벅차 떠올리지 못했다.
“할머니, 정말 감사해요.”
머리가 맑게 갠 기분이었다. 시에나는 조만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집사를 뽑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으응? 뭘 했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구나.”
노파가 주름진 손으로 시에나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였다.
“그럼 남는 크림이라도 가져가련? 여분은 세 개 정도 있을 것 같구나.”
“저어, 크림을 혹시 제가 추가로 만들어 볼 수도 있나요?”
“그럼, 당연하지. 추가로 얼마나 만들려고 생각하고 있니?”
“50개… 아니, 약 100개 정도요.”
노파는 시에나가 지금 성에 있는 모든 사용인들이 쓰고도 남을 양의 크림을 만들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체 얘는 왜 이렇게 통이 큰 건지.
“그렇게나 많이? 그 정도 재료는 없는데….”
“그럼 그것도 야시장에 가서 살게요. 어떤 재료가 들어가는지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 만드는 방법도 한 번만 알려 주시면 나머지는 제가 할게요.”
기어코 일을 사서 하는 시에나를 보며 노파는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시에나는 졸려 죽겠는 얼굴을 하고서도 즐거운 일을 맡은 사람처럼 눈이 반짝거렸다. 졌다, 졌어. 노파가 한숨을 쉬며 보습 크림을 만들 재료들을 읊기 시작했다.
“…와, 그걸 담을 통이 있으면 된단다. 요 정도 되는 크기면 되겠구나.”
“그렇게 작은 통을 시장에서 팔까요?”
시에나가 걱정스레 물었다. 이 세계의 시장은 실용성을 중시해서 그런지 주머니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은 크기의 물건을 잘 팔지 않았다.
“찾아보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양이 꽤 되니 공방에 의뢰를 해 보는 건 어떻겠니?”
“아, 그게 좋을 수도 있겠네요.”
“그래. 내가 아는 공방이 있는데 소개시켜 줄까?”
“네, 감사해요. 음… 그럼 혹시 간단한 통뿐만 아니라 좀 어려운 것도 하나 만들 수 있을까요?”
“내가 50년째 꾸준히 의뢰하고 있는 분께 부탁하면 될 거야. 만드는 데에는 도가 튼 분이시거든. 어떤 걸 만들려고 그러니?”
“헤헤, 아직은 비밀이에요….”
얼굴을 붉히는 시에나를 보며 노파는 대략 그 선물이 누구에게 갈지 알 수 있었다. 나 참, 그렇게 좋을까.
“그럼 설계도를 만들어 가져가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아, 그러면 되겠네요! 감사해요.”
“야시장이 열리면 그 공방도 저녁까지 쭉 열어 놓을 테니 한숨 자고 일어나 같이 다녀오면 되겠구나.”
“함께 가면 저야 좋죠. 그런데 할머니가 자꾸 쉬라고 하시니까 저 좀 졸린 것 같아요.”
눈에 졸음이 가득 담겨서는 하품하는 시에나에게 노파가 엄하게 말했다.
“몸이 피곤할 때 휴식만큼 좋은 건 없다. 일을 너무 하다가 픽 쓰러지거나 재수 없으면 죽는 경우도 있으니 쉴 수 있을 때 항상 잘 쉬어 둬야 해.”
“네에. 그럴게요. 그럼 뒷정리 좀 돕고….”
“아서라. 내가 할 테니 방으로 가서 한숨 자고 오렴.”
실랑이 끝에 시에나는 결국 미니 주방에서 쫓겨나듯이 나왔다.
“참, 할머니는 나를 거의 아이작만큼 어리게 취급하신다니까.”
혼잣말로 불만을 토하면서도 시에나의 기분은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아 보였다. 친손자와 함께 있는 것도 포기하고 시에나와 함께 있을 만큼의 애정을 받고 있는데 그게 좋지 않을 리가 없었다.
“후후, 눈이 그쳐서 그런지 햇살이 세네.”
창문을 통과한 눈부신 햇살이 시에나에게 그대로 쏟아졌다. 새하얀 흰 눈에 반사된 햇살까지 눈을 아프도록 찔러와 시에나는 손으로 눈앞에 차광막을 만들었다. 선글라스라도 만들어 볼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시에나가 계단을 올랐다.
철컥, 방으로 돌아온 시에나가 문을 닫고 책상과 침대를 번갈아 보았다. 책상 위에는 아이작에게 쓴 편지 봉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시에나는 노파가 한 말을 떠올렸다.
‘그럼 설계도를 만들어 가져가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생각난 김에 지금 만들어 두는 게 좋겠지?”
시에나는 쏟아지는 잠 대신 책상 앞에 앉기를 택했다. 어차피 생각해 둔 게 있으니 그대로 그리는 게 어렵진 않을 터였다. 종이에 첫 번째 선을 그은 이후로 물 흐르듯이 유려한 스케치가 나왔다. 그러나 시에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내 그 종이를 와락 구겨 버렸다.
“내가 생각한 건 이게 아닌데….”
간단한 설계도인데도 도무지 마음에 들게 그려지지 않는다. 결국 구겨진 종이가 휴지통을 꽉 채울 때까지 시에나는 쭉 책상 앞에 붙어 있어야 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었을 무렵, 시에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다. 완벽해.”
퀭한 얼굴로 으스스하게 웃는 시에나의 모습은 미친 과학자를 닮아 있었다. 습작을 여러 번 거친 종이에는 무엇인지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설계도가 그려져 있었지만 시에나는 그 그림을 보며 몹시도 뿌듯해했다.
이내 그녀는 그 종이를 돌돌 말아 데이몬의 공부방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오는 공부방이었다. 리메리오 남작이 복도를 청소하던 시에나를 불렀고, 데이몬이 맞는 모습을 지켜보게 했지. 잉크병이 날아가는 그 장면은 앞으로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1년도 되지 않은 일인데 벌써 오래전 일처럼 느껴지는 게 신기했다. 시에나는 가볍게 문을 노크했다.
“시에나예요. 들어가도 될까요?”
“시에나, 어서 와. 무슨 일이야?”
“어서 와요.”
데이몬은 반가운 목소리로 시에나를 반기며 직접 달려와 문을 열어 주었다. 리메리오 남작이 앉아 있었던 의자에는 로하엘이 편안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확연하게 달라진 미래에 조금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제가 공부를 방해한 건가요?”
“아니. 조금 전에 끝나서 놀고 있던 참이야.”
그 말이 거짓은 아닌 듯 어지러이 책이 늘어진 책상 위에는 체스판이 놓여 있었다. 체스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흘긋 본 체스판은 데이몬에게 조금 불리해 보였다.
“오늘 마을에서 신년 맞이 축제가 열린대요. 알고 계셨어요?”
“아니, 몰랐어. 그래서 떠들썩했던 거구나.”
“네. 야시장도 열린대서 살 것도 있구 구경도 할 겸 다녀오려고요. 할머니 집에서 가져올 것도 있고요. 혹시 같이 가시겠어요?”
“당연히 좋지. 그럼 거기서 저녁도 먹을까?”
시에나의 권유에 데이몬의 표정은 한없이 밝아졌다. 마을로 내려가는 게 그에게 마냥 부담스러운 일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로하엘 님도 같이 가요. 할머니도 같이 가시기로 했거든요.”
“그럴게요. 마르바스 영지의 축제 구경은 처음인데 기대되네요.”
로하엘이 싱긋 웃으며 흔쾌히 답했다.
“거기서 저녁을 먹으려면 일찍 출발하는 게 좋겠지? 어서 가자.”
“어, 체스 두시다 도망치시는 건가요?”
데이몬의 재촉에 로하엘이 놀리듯 물었다. 데이몬이 그런 일은 없다는 듯 책상으로 다시 다가갔다.
“도망치긴 누가 도망쳤다 그래. 자, 체크메이트.”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시에나에게 다가가 살랑거렸다.
“어서 가자, 시에나. 나 배고파.”
“으아아. 이게 어떻게 이렇게 되지? 도련님, 한 번 더 하시죠.”
“다음에. 지금은 방에 가서 그대의 막역한 지우를 데려오는 것이 어떨까?”
“조금 전에 알려 드렸는데 이렇게 이겨 버리시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전 아카데미 체스 챔피언이었다고요. 내일 한 번 더 해요.”
“좋아. 그러니 어서 모셔 오기나 해. 시에나랑은 일 층으로 내려가 마차를 부르고 있을게.”
“알겠습니다….”
로하엘은 울상을 지으며 풀이 팍 죽어서 노파를 찾으러 나갔다. 그런 로하엘을 시에나가 조금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가자, 시에나.”
“아, 네.”
시에나가 데이몬의 뒤를 따랐다. 창가에 비치는 바위산 너머로 어느새 붉은 석양이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바위산에 자란 초목들의 잎이 모두 떨어져 앙상해진 나무를 볼 때마다 마음이 싱숭생숭한 기분이었는데, 하얀 눈으로 전부 뒤덮이자 좀 예뻐 보이는 것도 같았다. 마지막 빛을 뿜어내는 여명에 앞서가는 데이몬의 검은 머리칼이 조금 붉어 보였다. 그 모습이 어쩐지 외로워 보여 시에나가 가까이 다가갔다.
“도련님 체스 처음 배우셨는데 이기신 거예요?”
“응. 아카데미에서는 쉬는 시간에 체스를 둔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배워 봤지.”
“와. 로하엘 님도 이기셨으면 거기서도 계속 이기시겠어요. 대단해요. 체스 좀 어려워 보이던데….”
“실제로 접하니까 그렇게 어렵진 않더라고. 나중에 시에나도 내가 알려 줄까?”
“네, 좋아요. 꼭 알려 주세요.”
“그래. 알았어.”
시에나에게 뭘 알려 줄 수 있다는 마음에 데이몬은 기쁜 기색이었다. 데이몬은 시종에게 마차를 내오라 말하고 기다리는 동안 계속해서 콧노래를 불렀다. 이내 로하엘이 노파를 데리고 내려왔다.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고맙네.”
데이몬은 먼저 앞서가 시에나가 타기 편하도록 에스코트해 주었다. 시에나가 그 손을 잡고 가볍게 마차 위로 올라섰다.
“감사해요.”
“레이디에게 도움을 드리는 것이 저의 기쁨… 입니다.”
최근 로하엘에게 예법을 배우면서 말투가 더욱 세련되어진 데이몬이었다. 사실 말만 들으면 좀 느끼하긴 했지만 그런 말을 내뱉으며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짓는 게 포인트였다. 데이몬, 할머니에 이어 로하엘까지 착석한 뒤 마차가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어디부터 갈까요? 저녁부터 먹을까요?”
“저녁을 먹기는 아직 이르고… 시에나, 볼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 네. 할머니랑 저랑 공방에 다녀올 일이 있어요.”
“공방? 공방은 왜?”
“크림을 만들 통을 주문하려고요. 양이 많아서 차라리 주문 제작을 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아요.”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어제도 새벽까지 꼬박 일하다 잤잖아.”
“아까 한숨 자서 괜찮아요. 많이 나아졌어요.”
사실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자기 일처럼 걱정하는 셋을 보니 진실을 밝히기가 어려웠다. 데이몬이 작게 한숨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마.”
“걱정 마세요. 저 튼튼하잖아요. 밥도 잘 먹고 있고요.”
비쩍 마른 팔에 힘을 주며 말했지만 셋 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시에나를 바라보는 통에 그녀는 시무룩해져서 팔을 내려놓았다. 창문 밖으로 어느새 마을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와!”
“시에나, 위험해. 너무 바깥으로 몸 내밀지 마.”
“너무 예뻐요!”
나무와 나무 사이에 촛불로 장식한 알록달록한 연등이 밤이 되니 더욱 밝게 빛났다. 그 밑으로 화려한 옷과 장신구로 꾸민 사람들이 나와 광장에서 춤을 추며 먹고 마시고 있었다. 광장에서는 발랄한 왈츠가 흐르고 있었는데, 음유 시인 몇몇이 그 운율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시끌벅적하고도 흥겨운 분위기에 잔뜩 들뜬 시에나가 마차 밖으로 고개를 조금 뺐다가 데이몬이 기겁을 하며 말렸다.
“다 왔습니다.”
마차는 광장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다 광장으로 몰려가서 그런지 공방 거리는 상대적으로 한산했다. 사람의 목소리보다는 망치와 땀의 소리가 나는 곳이었다. 따앙, 땅. 쇠와 쇠가 맞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시에나가 노파를 따라 공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렌델, 있나?”
공방은 어둡고 조용했다. 노파는 익숙하다는 듯 벽을 더듬어 하나하나 초를 밝혔다. 밝아진 실내는 상상 이상으로 더러워 넷이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으이그. 이렇게 또 더럽혀 놨을 줄 알았지.”
노파는 밑에 떨어진 책이며 병 따위의 물건들을 대충 치우며 시에나 일행들을 안내했다.
“저기 자리에 좀 앉아 있게나. 내 금방 데려올 테니.”
“네에.”
노파는 쓰레기 더미들을 헤치고 앞으로 쓱쓱 나아갔다. 중간부터는 청소하는 걸 포기하고 그저 빠른 걸음으로 안쪽을 향해 들어갔다. 시에나는 기다리는 동안 공방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자신이 상상한 공방과는 좀 거리가 멀었다.
“우와….”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물빛의 펜던트에는 인어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크기는 겨우 은화 한 닢 정도의 크기였는데 꼬리의 비늘 하나하나까지 얼마나 섬세한지 금방이라도 인어가 팔딱이며 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보석과 장신구들이 정교하게 세공되어 방구석에 대충 널려 있었다. 보석에 문외한인 시에나조차 감탄할 정도로 공방을 운영하는 사람의 실력은 대단해 보였다.
“예쁘다….”
“대단하군. 실력이 좋은 모양이야.”
“그렇지만 이런 물건들을 이렇게 아무렇게나 놓다니, 감정사가 울고 가겠어요.”
이런 물건을 만드는 사람에게 통을 만들어 달라고 해도 되는 건가, 시에나가 자신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며 조금 불안해했다. 크림은 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기에 성의 예산이 아닌 자신의 돈으로 해결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걱정하고 있을 때 안에서 노파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또또또, 이러고 있을 줄 알았어. 초저녁부터 이렇게 술에 취해서는!”
“뭐, 뭐야. 꼬마. 언제 왔어? 어떻게 들어온 거야?”
“문을 열어 놨으니까 들어왔지! 이렇게 술만 좋아하다가는 골로 간다고 했지!”
“아니이. 축제를 하니 흥겨워서 한잔한 거지. 그런데 꼬마는 더 늙었구만? 이젠 주름이 나보다 많아졌어. 낄낄.”
깡!
금속이 누군가의 머리를 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아, 아야야야. 내가 잘못했어. 귀 좀 놔 달라고!”
“손님이 왔는데 맞이하지도 못할 만큼 취해서 잠들어 놓고는 어디서 품평질이야! 썩 일어나!”
노파는 아이작에게 하는 것만큼이나 파워풀하게 공방장을 대했다. 이내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리더니 노파에게 귀를 잡혀 끌려온 공방장의 모습이 드러났다. 깜짝 놀란 시에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드… 드워프?”
노파가 데려온 남자는 시에나와 키가 비슷하면서도 머리는 두 배 정도 컸다. 땅딸막한 키에 비해 갈색 머리와 수염은 길게 길러 허리까지 내려와 있었고, 입가의 수염은 맥주일 확률이 유력해 보이는 노란 액체에 푹 젖어 있었다.
드워프라니. 이종족을 보는 건 처음이라 저절로 큰 소리가 났다. 너무 신기해서 말했지만 혹 불쾌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사과해야 하나 눈치를 보는데 드워프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신선한 반응이로구만. 꼬마 네가 예전에 나한테 한 말이랑 아주 똑같아.”
“어휴, 몇십 년 전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네. 술 좀 작작 마시라는 내 말은 대체 왜 까먹는지.”
노파의 잔소리에도 드워프는 낄낄 웃으며 손에 쥔 맥주잔을 마저 들이켜고는 어지러이 물건이 쌓인 책상 위에 대충 올려 두었다.
“다들 반갑네. 꼬마가 사람을 소개한 건 오랜만인데. 하프 드워프인 렌데니얼이라고 하네. 렌델이라고 편하게 부르게.”
“아… 조금 전엔 실례했습니다. 시에나입니다.”
시에나가 깜짝 놀라 드워프라고 소리를 질렀던 것에 대해 사과했다. 렌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시에나와 악수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데이몬이네. 만나서 반갑군.”
“나도 반갑네.”
“로하엘입니다. 멋진 공방이에요.”
“거의 쓰레기장이지. 공방으로 봐 준다니 고맙군.”
“으이그, 그걸 아는 분이 그러시오? 좀 치우고 사시게나!”
“어휴, 잔소리는… 축제 날이니 좀 봐주시게. 이번엔 또 무슨 물건을 의뢰하려고 왔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렌델은 노파의 잔소리가 싫지 않은지 히쭉 웃었다. 그 잔소리가 애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아는 듯했다.
“나는 중간 크기 포션 통 스무 개, 저 애는 요만한 크기의 크림을 담을 통 백 개, 또 하나 다른 것도 있는데 그건 설계도를 보면 알 거요.”
“오오, 설계도까지 있나? 어떤 물건이길래 그러지?”
렌델은 설계도가 있다는 말에 눈을 반짝였다. 시에나는 당당하게 종이를 펼쳐 렌델에게 보여주었다.
“이런 물건이에요.”
그런데 시에나의 설계도를 슬쩍 본 사람들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림이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설계도랍시고 가져온 도면은 거의 추상화에 가까워 어떤 물건인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시에나는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든 설계도인지라 이 도면에 몹시 자신이 있었다. 기묘한 침묵 속에 누군가 나서기 전, 렌델이 그녀의 설계도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호오, 이거 새로운 디자인이군. 어디에 쓸 거지?”
“이 안에… 기름을 담을 거예요.”
데이몬에게 깜짝 선물로 주고 싶었기에 시에나가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시에나의 상황을 짐작한 노파가 렌델에게 말했다.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군. 거기 두 분은 잠시 밖에서 구경하며 기다리시겠어요?”
“그래그래, 내 컬렉션이라도 보고 있게나.”
렌델은 그렇게 말하며 책상에 빼곡히 쌓인 책들 사이에서 낡은 책 한 권을 꺼내었다. 책 하나를 꺼냈을 뿐인데 책들이 우르르 무너지며 먼지가 한가득 날렸다.
“콜록….”
“이런. 미안.”
“아, 환기 좀 하고 살아요! 여기서 하루만 살아도 수명이 일주일씩은 깎일 것 같아.”
노파의 볼멘소리에 렌델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시에나는 푸훗,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렌델이란 사람, 아니 하프 드워프가 노파에게 혼나는 아이작의 모습과 무척 닮아 있었다.
“잠깐이면 되니까 금방 다녀올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천천히 해도 돼.”
“천천히 해도 됩니다, 시에나.”
로하엘과 데이몬의 말에 안심한 시에나가 고개를 끄덕이곤 렌델의 손에 이끌려 공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공방 안쪽은 꼭 굴을 파 놓은 것처럼 생겼었는데, 안쪽 중앙의 테이블 근처에는 공구보다 맥주 통이 더 많아 보였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맥주들을 보며 노파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다음 잔소리를 시작하기 전 렌델이 재빨리 시에나를 향해 물었다.
“자, 자. 꼬마야. 이 설계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련?”
“아, 네. 그러니까… 이 정도 되는 통에….”
* * *
“의뢰도 많이 맡겼으니까 이제 술 그만 마시고 일해욧!”
“아, 내가 언제 의뢰한 거 미룬 적 있나. 내일까지 만들어서 배송해 줄 테니 걱정 마쇼.”
렌델이 가슴을 두드리며 큰소리를 쳤지만 노파는 영 마뜩찮은 눈빛이었다. 시에나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반쯤 취해 혀가 꼬인 상태였으니 불안해하는 노파도 이해가 갔다. 아까 물빛 펜던트같이 굉장한 물건을 만드는 주제에 렌델이 책정한 가격은 턱없이 저렴했다. 원재룟값을 빼면 뭐가 남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정 힘드시면 시간을 좀 늦추셔도 괜찮아요. 가격도 저렴하게 해 주셨는데….”“응? 아니야. 나도 저 물건은 꼭 빠르게 만들어 보고 싶어서 말이야. 아주 재미있는 물건이라.”
렌델은 씩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 자 저녁들 드시러 가시라고. 난 이제 물건을 만들어야겠으니 말이야.”
렌델은 시에나 일행에게 인사할 틈도 주지 않고 거의 쫓아내다시피 내보낸 후 문을 쿵 닫았다. 닫힌 공방 문을 보며 노파가 겸연쩍은지 머리를 긁적였다.
“원래 저렇게까지 마이 페이스는 아닌데 시에나의 설계도가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입니다. 대신 사과하지요.”
“뭐… 예술가들은 어딘가 괴팍한 면이 있기 마련이니까.”
데이몬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런데 렌델이란 분은 어떻게 아시게 된 거예요?”
시에나가 내내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노파는 시에나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50년도 지난 기억이라…. 아마 상처를 치료해주다 만난 것 같구나. 대장장이들은 불과 금속을 다루다 보니 상처와 화상이 나기가 십상이거든.”
아하. 시에나는 그제야 노파와 렌델의 인연에 대해 납득 할 수 있었다. 사람들 속에 섞여 사는 하프 드워프도 신전의 약은 비싸게 느껴졌겠지. 드워프가 공병을 제공해 주면 노파는 약을 제공해 주는 식으로 거래를 해온 모양이었다.
“50년도 넘은 인연이라니, 대단하네요.”
“그렇게 대단할 것도 없어. 렌델 그 친구가 항상 사고를 쳐서 수습하기 바빴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노파의 말투에는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 시에나가 살며시 미소지었다.
“그런데 아까 그건 뭐였습니까?”
로하엘이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던 듯 시에나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어떤 거 말씀이세요?”
“시에나가 가지고 있었던 종이 말입니다.”
“아, 그거 설계도잖아요. 로하엘 님 아까 보지 않으셨어요?”
시에나가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의아하게 말했다.
“그게, 설계도였다고요?”
“네, 삼면도가 다 그려져 있었잖아요.”
그 삼면도가 전부 추상적이라 문제였지만. 로하엘은 아무리 봐도 사실주의보다는 야수파에 가까웠던 설계도면을 떠올리며 알쏭달쏭한 얼굴을 했다. 데이몬이 기분이 좋은 시에나의 상태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는지 로하엘에게 쉿, 검지로 입술을 눌러 침묵시켰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저희 저녁은 어디로 먹으러 갈까요?”
“글쎄, 시에나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저요? 딱히 없는데… 도련님은요?”
“음… 나도.”
“로하엘 님이랑 할머니는요?”
“저도 딱히….”
“세 분이 좋으실 곳으로 고르시면 됩니다.”
“흠, 그럼 일단 광장 쪽으로 가서 결정할까?”
“네, 좋아요.”
시에나가 축제를 구경할 생각에 신이 나 앞장섰다. 데이몬이 그런 시에나를 빠른 걸음으로 뒤따랐다. 그런 둘의 모습을 로하엘과 노파가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시에나, 걸음이 빨라.”
“도련님이 빨리 오세요!”
데이몬의 만류에도 신이 난 시에나가 해맑게 웃으며 걸음을 더 빨리했다. 어느새 둘은 축제 거리의 초입에 도착해 있었다. 거리에는 색색의 천막을 친 노점상들이 즐비했는데, 먹거리와 간식거리를 파는 곳부터, 옷과 신발, 모자, 귀걸이 등의 장신구를 파는 노점들까지 다양했다.
“와아.”
아무래도 평민들을 위한 축제다 보니 그 규모가 크고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각종 노점들이 전부 모여 있어 제법 볼만했다. 노점들을 구경하느라 멈춘 시에나와 데이몬 곁으로 로하엘과 노파가 다가왔다. 신년 축제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람들이 모두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축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금색으로 물들인 형형색색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왜 가면을 쓰고 있을까요?”
“설화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가면을 쓰고 있으면 이스테라 여신도 가면을 쓰고 몰래 찾아와 만나는 사람에게 축복을 전해 준다는 이야기가 있거든요.”
로하엘의 설명에 시에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저희도 그럼 하나씩 살까요?”
시에나가 바로 앞에서 가면을 파는 노점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좋아요. 가면은 제가 살 테니 멋진 걸로 하나씩 골라 봅시다.”
로하엘이 두둑한 주머니 안의 은화와 금화를 짤랑이며 씩 웃었다.
“로하엘 님 최고!”
추임새를 넣으며 시에나가 가면들 앞에 섰다. 상인이 반갑게 시에나의 일행을 맞이했다.
“아이쿠, 어서 오십시오! 천천히 둘러보세요.”
시에나는 주의 깊게 가면을 살폈다. 반가면에 까마귀 부리처럼 길게 코가 빠져나와 있는 가면, 고양이 모양 가면,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을 본뜬 듯한 가면, 반만 가려진 가면 등 수많은 가면 중에 시에나가 집어 든 건 고양이 가면이었다.
“도련님, 도련님 이거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검은 바탕에 금색 테두리가 쳐진 가면은 데이몬과 조금 닮아 있었다. 데이몬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그럼 나는 이걸로 할게.”
“신난다. 도련님도 제 가면 골라 주세요.”
시에나의 가벼운 제안에 한없이 진지하게 가면들을 훑어보던 데이몬이 이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가면 하나를 가리켰다.
“시에나는 이게 잘 어울릴 것 같아. 너랑 조금 닮았어.”
“어이쿠, 잘 고르셨습니다. 이 가면이 지금 인기가 제일 좋거든요. 이스테라 여신을 본뜬 가면이랍니다. 정말 아름답지요?”
데이몬이 안목이 있다는 듯 상인이 그를 칭찬했다. 여신과 닮았다는 데이몬의 말에 시에나의 얼굴이 선홍색으로 물들었다.
“네, 정말 예쁘네요.”
“그래도 내 눈엔 시에나가 더 예뻐.”
홀린 듯 가면을 바라보던 시에나에게 데이몬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 들렸지만. 상인이 알 만하다는 듯 모르는 척해 주었다. 팔불출도 아니고 정말, 시에나가 밉지 않게 데이몬을 흘겨보았다.
“네, 그럼 저도 이걸로 할게요.”
뒤를 돌아보니 로하엘과 노파는 이미 가면을 골라 쓴 뒤였다. 로하엘은 푸른색과 은색이 섞인 반가면을, 노파는 붉은색과 검은색이 조화로운 가면을 쓰고 있었다.
“다 해서 얼마죠?”
“4실버만 주쇼.”
로하엘은 10실버짜리 동전을 주인에게 튕겨 주었다. 두 배도 넘는 값을 챙긴 상인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어이쿠, 감사합니다. 이스테라 여신의 축복이 깃들길!”
황금만능주의의 축복을 받은 넷은 가면을 쓴 채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식당을 하는 노점을 향해 걸었다. 길가에는 맛있는 냄새가 끊임없이 풍겼다. 닭꼬치에 소스를 발라 파는 노점, 통 크게 새끼 돼지를 바비큐에 구워서 파는 노점, 이가 아플 정도로 달콤한 설탕과자를 파는 노점, 이스테라 여신의 모양을 본뜬 쿠키를 파는 노점 등 다양한 노점들에 사람들은 홀린 듯 시선을 빼앗겼다. 오랜만에 후드를 벗고 가면을 쓴 데이몬의 모습이 보기 좋아 시에나가 입꼬리를 올렸다.
“어, 저기 맛있나 본데요.”
로하엘의 말에 셋이 동시에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마따나 자그마한 노점상 앞에 스무 명도 넘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저거 먹어 볼까요?”
“좋아.”
“좋아요.”
제법 돌아다녀 배가 고팠던 터라 넷은 반박 없이 줄을 섰다. 자세히 보니 빵 안에 수프 같은 것을 넣어 팔고 있었다. 기다리는 내내 맛있는 냄새가 풍겨와 점점 더 배가 고파왔다. 회전률이 빨라 대기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넷의 차례는 금방 돌아왔다. 데이몬이 네 명의 몫을 계산하고 이윽고 시에나의 손에 수프가 담긴 동그란 빵이 주어졌다.
“저쪽에 테이블이 있던데요. 저기에 가서 먹을까요?”
노파가 약 열 걸음 정도 떨어진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간소하게 만든 테이블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각종 노점상에서 파는 음식들을 먹고 있었다.
“네, 마침 저기 자리도 났네요.”
시에나가 자리가 난 테이블을 향해 걸었다. 시에나가 자리를 잡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가 옆에 짐을 툭 내려놓았다.
“응?”
“어라?”
짐을 내려놓은 사람은 가면만큼이나 화려한 화장을 한 여자였다. 여자는 난처한 표정으로 시에나 일행과 자신의 일행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 그러게 빨리 가라니까! 자리 뺏겼네.”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지. 그냥 서서 먹자.”
여자는 다시 짐을 들더니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실례했어요.”
“아, 아니에요. 그런데 서서 드시지 말고 테이블도 넓은데 같이 먹어도 되지 않을까요?”
“어머. 그래도 될까요?”
시에나가 슬쩍 데이몬과 로하엘, 노파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은 하나였지만 합석한다면 여섯 명까지는 충분히 앉을 수 있는 크기였기에 앉는 데에는 별문제가 없어 보였다.
“네, 괜찮아요. 먹을 땐 편하게 먹어야죠.”
“그 말에는 저도 동의해요. 덕분에 편하게 먹게 되겠네요. 에반! 이리 와! 이분들이 같이 먹어도 된대!”
여자의 말에 에반이라는 남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시에나와 똑같은 음식을 들고 총총 걸어와 자리에 앉았다. 회색 머리에 회색 눈을 가진 남자는 묘하게 우울한 섹시함이 있었다. 그의 왼쪽 눈 아래 있는 눈물점이 그 우울함에 매력을 더했다. 에반이라는 남자는 남자치고는 드물게 시에나의 옆에 앉은 여자만큼이나 화려한 화장을 하고 있었다. 하얀 피부에 붉은 아이섀도, 길게 뺀 아이라이너는 중국의 경극 배우를 떠올리게 했다.
“같은 자리에 앉은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할까요? 저는 주디스예요.”
주디스라는 여자는 그저 옆자리에 앉았을 뿐인 시에나에게 제법 친근하게 굴었다. 또렷한 이목구비만큼이나 성격도 시원시원한 것 같았다.
“저는 시에나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저도 반가워요. 여기 사시는 분인가요?”
“네. 맞아요.”
“그렇군요. 저희는 떠돌이 극단이에요. 축제에 초대받아서 참여했어요.”
“주디. 그분 그만 방해하고 제발 먹기나 해. 우리 지금도 벌써 늦었어.”
“에이, 한참 재밌었는데. 알았어. 아가씨, 아가씨도 식기 전에 먹어 봐요. 저 이거 점심때 먹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또 먹으러 왔어요.”
그렇게 말하며 주디스는 빵을 들더니 후루룩 안에 담긴 수프를 들이켰다.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시에나의 입에 침이 고였다. 시에나도 가면을 벗은 뒤 주디스를 따라 수프를 들이켰다.
하얀 크림소스에서는 제법 깊은 맛이 났다. 시에나가 그 맛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와, 맛있다.”
지금 보니 예전 세계에 있던 빠네파스타와 제법 비슷한 모양이었다. 그릇도 빵이고, 스푼 대용도 빵이었다. 크림수프 밖으로 삐죽 나와 있는 빵조각은 길쭉하고 딱딱해 수프 안의 음식들을 먹기 좋아 보였다.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니 역시나 그 빵 스푼을 이용해 내용물을 먹고 있었다.
한 숟갈 떠서 먹어 보자 크림소스와 함께 푹 끓여 보드랍고 몰랑몰랑한 양배추와 짭짤한 소시지가 씹혔다. 성의 연회에 나오는 음식과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찬 바람 부는 야외에서 다 같이 모여 먹으니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적당히 식은 크림수프를 쭈욱 들이켜자 몸도 마음도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접시 대용을 하고 있는 빵도 그새 크림수프에 적셔져 부드럽고 눅진한 맛을 냈다. 시에나가 빵 접시를 거의 다 뜯어 먹었을 때 즈음, 이미 식사를 마친 주디스가 시에나의 얼굴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눈빛이 너무 뜨거워 혹 입가에 수프라도 묻었나 싶어 황급히 닦으려는데 그럴 새도 없이 주디스가 시에나의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어머, 너무 귀엽다-!”
“당장 손 떼.”
시에나가 뭘 할 새도 없이 데이몬이 그녀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주디스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강력한 경고에 주디스가 토끼 눈이 되어 겁먹은 얼굴로 데이몬을 바라보았다. 데이몬은 반가면을 썼기에 식사 중에도 가면을 벗진 않았지만, 가면 사이로 보이는 흉흉한 기세는 주디스를 주눅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죄, 죄송합니다. 그러려던 게 아니라….”
“사과는 나한테 할 게 아니지 않나?”
“아… 미안해요, 시에나. 너무 귀엽고 예뻐서 그랬어요. 민폐를 끼칠 생각은 없었어요.”
“도련님, 저 괜찮아요.”
데이몬은 시에나의 만류에도 주디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더욱 그녀를 압박해 왔다. 주디스를 향한 데이몬의 살기에 공기가 따끔따끔해지는 느낌이었다. 기분 좋게 음식을 먹고 있던 주변 사람들조차 막연한 공포감이 들었는지 하나둘 자리를 떴다. 엉망진창이 된 분위기에 난감해진 시에나가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도련님, 저 진짜 괜찮다고 했잖아요.”
시에나의 엄한 목소리에 주디스를 둘러싼 압박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주디스와 에반은 그제야 푸하, 숨을 내쉬었다. 데이몬은 시에나의 눈치를 보며 말없이 눈동자만 데록 굴렸다. 그 모습이 꼭 주인에게 발로 차인 강아지를 보는 느낌이라 괜히 죄책감이 들었다. 시에나는 뾰족한 눈을 부드럽게 풀며 말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그치만 제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은 맡겨 주셨으면 좋겠어요.”
“네, 응… 그럴게.”
그러면서도 데이몬은 계속 시에나의 눈치를 보았다. 그 모습이 왜 이렇게 혼난 대형견 같고 짠한지. 시에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푸… 하하하!”
데이몬이 압박을 풀었다고 주디스는 또 기세 좋게 웃어왔다. 볼 좀 잡혔다고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내는 데이몬도 데이몬이었지만, 그걸 다 받고도 저렇게 호탕하게 웃는 주디스도 대단했다.
“도련님이라고 하는 걸 보면 저 남자분 신분이 더 높은 것 같은데 시에나한테 꼼짝을 못 하네요? 진짜 많이 아끼시나 보다. 부러워요.”
주디스의 말은 어떻게 보면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말 속에는 비꼬려는 기색이나 비웃는 게 전혀 없었다. 그저 말이 의식의 흐름으로 튀어나오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그렇게 기분이 나쁘진 않지만 한마디는 해야 할 것 같아 시에나가 톡 쏘아붙이듯 말했다.
“꼼짝 못 하는 게 아니에요. 배려해 주시는 거죠.”
“오… 이런 모습도 너무 귀엽다. 시에나, 혹시 오늘 같이 무대에 서 줄 생각 있어요?”
“네…? 춤이요?”
볼을 붙잡더니, 그러고는 무대에 서자고? 갑작스러운 제안에 시에나는 물론 데이몬과 로하엘까지 황당하다는 듯 주디스를 쳐다봤다.
“네. 저희가 유랑 극단이긴 해도 개중엔 제법 유명한 편이라 사실 여기에 초대받아 왔거든요. 저녁 먹고 이따가 불꽃놀이를 하기 전에 공연을 할 거예요. 그 공연의 피날레를 시에나가 장식해 주면 좋을 것 같아요.”
“제, 제가요? 저는 춤도 못 추는데….”
“아아. 춤은 못 춰도 상관없어요. 이스테라 여신의 의지를 받은 소녀가 검을 하늘로 향해 던지면 그 검이 꽃처럼 퍼지는 것과 함께 불꽃놀이가 시작되는데, 시에나가 그 소녀 역할을 맡아 주면 좋을 것 같거든요.”
주디스의 급작스러운 제안에 시에나의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데이몬은 시에나가 난감해하는 기색을 보고 끼어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며 끙끙대고 있고, 로하엘과 노파는 재미있다는 듯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저예요?”
“음… 그건 바로 시에나가 무지 귀엽고 예쁘기 때문이죠.”
시에나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주디스가 웃음을 터뜨리며 이실직고했다.
“농담이에요. 저희 유랑 극단엔 여자가 저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이스테라 여신의 역할은 제가 해야 하니까 소녀가 구해지지 않으면 여기에 있는 이 에반이 예쁜 술이 달린 원피스를 입고 꽃을 던져야 한답니다.”
에반의 근육으로 단단하게 짜인 몸매를 가리키며 주디스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키가 로하엘만큼이나 큰 남자가 소녀 역할이라니, 상상하기 힘들었다.
“원래는 어쩔 수 없으니 에반이 했는데, 도저히 못 하겠는지 갑자기 축제 직전에 어떤 여자아이를 데려와서 그 역할을 시키더라고요. 그런데 에반이 했을 때보다 호응이 훨씬 좋아서 항상 꽃을 던지는 역할은 마을 소녀들에게 맡기게 되었죠.”
“그건 당연한 거잖아. 젠장. 처음부터 난 하기 싫어했다고.”
“네가 제일 어린데 어떻게 하겠니. 막내였던 게 죄지. 아유, 그런데 여기 와서 구하려고 보니 다 가면을 쓰고 있지 뭐에요. 너무 난감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던 차에 시에나가 가면을 벗었는데 제가 생각하고 있는 소녀의 이미지랑 너무 비슷해서 실례를 한 것 같아요. 정말 미안해요.”
주디스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며 시에나에게 확실히 사과했다. 시에나는 웃으며 그녀의 사과를 받아 주었다.
“괜찮아요. 이유를 말해 주니까 이해가 가요. 확실히 곤란하긴 하겠네요.”
“네. 그리고 시에나 얼굴을 보니까 다른 사람들 얼굴은 눈에 안 찰 것 같아요. 그 이스테라 여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소녀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지고 있다는 설정이거든요. 거기 귀하신 도련님, 도련님도 시에나가 예쁘게 입고 꽃 날리는 장면 보고 싶지 않아요? 응? 무지 예쁠 텐데?”
“시에나는 뭘 입어도 예뻐.”
“아이, 그래도 옷이 날개라는 말도 있잖아요. 저 화장도 엄청 잘해요. 시에나 얼굴 보니까 이목구비가 또렷해서 조금만 살려 줘도 엄청 화려하고 예뻐질 것 같은데. 해 볼 생각 없어요? 나랑 에반 살려 주는 셈 치고요.”
계속되는 주디스의 꼬임에 시에나는 난감한 기색으로 일행을 바라보았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 괜찮지 않을까?”
“축제는 즐기라고 있는 거잖아요. 위험한 것도 아니니까, 뭐 저는 시에나의 선택에 맡길게요.”
다들 긍정적인 입장이라 시에나는 마지막으로 데이몬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조금 풀이 죽어 있던 데이몬이 시에나의 물음에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뭐… 나도 비슷해. 시에나가 원하는 대로 해.”
마지막으로 주디스와 에반을 보자 그들은 이내 시에나에게 엄청나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결국 그 눈망울에 어설프게 웃음이 터져 버린 시에나가 한참을 웃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해 볼게요.”
“와-! 신난다!”
주디스는 벌떡 일어나 아이처럼 깡총거리며 테이블 주변을 뛰었다. 에반은 그런 주디스를 한심하게 바라보면서도 한결 안심한 기색이었다. 주디스가 테이블을 한 바퀴 뛰는데 8시를 알리는 시계 종소리가 들렸다. 주디스가 깜짝 놀라 시에나의 손을 붙잡았다.
“시에나, 우리 9시부터 공연 시작이거든요. 지금 화장해 주려고 하는데 시간 괜찮아요?”
“네. 괜찮…!”
대답과 동시에 시에나는 주디스의 옆구리에 거의 끼다시피 달랑달랑 들려서 이동했다. 데이몬이 벌떡 일어나 충실한 강아지처럼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