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움찔.
푹신한 침대에 누워 단잠을 자던 시에나의 손가락 끝에 단단하면서도 매끈한 원목 프레임의 감촉이 느껴졌다. 굳이 눈을 뜨지 않아도 그 프레임이 고급품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웃기게도 원목의 감촉을 느끼자마자 안심이 되었다.
무사히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빠져나왔구나. 시에나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부신 햇살이 그녀를 따사롭게 비추고 있었다. 부스스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자 처음 보는 하녀가 테이블을 닦다가 그녀가 일어난 모습에 인사도 않고 밖으로 뛰쳐나가 외쳤다.
“아가씨가 깨어나셨습니다-!”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잠옷 차림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 데이몬이 그녀를 반겼다.
“시에나!”
“도련님!”
시에나는 슬리퍼도 신지 않고 차가운 맨바닥을 달려 데이몬을 와락 껴안았다. 생생한 체온과 감촉이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다. 데이몬은 시에나의 포옹에 넋이 나간 듯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뒤로 로하엘과 공작이 따라 들어왔다.
“로하엘 님! 공작 각하!”
“시에나! 몸은 좀 괜찮습니까?”
시에나가 로하엘의 말을 듣고 포옹을 푼 채 몸을 움직여 보았지만, 기절하기 전과 같은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등을 매만지자 일자로 살짝 팬 흉터가 느껴지긴 했지만, 역시나 아프지는 않았다.
“사이가 치료해 줬습니다.”
“데이몬에게 대강 이야기는 들었다. 또 신세를 졌다지. 고맙다, 시에나.”
“아니요. 데이몬 도련님이 저를 구해 주셨어요. 그리고 제가 길을 잃지 않았다면 도련님은 위험에 빠지지도 않으셨을 거예요.”
아이작과 닮은 소년의 투구를 벗겨 보기 위해 일행과 떨어져 나왔던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가. 시에나는 쏟아지는 칭찬에 낯이 뜨거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잘한 게 전혀 없는데도 고생했다고 말하는 그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떨군 시에나를 공작이 부드럽게 달랬다.
“전쟁터에서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지. 그대는 용감하게 잘해 주었어.”
“맞아요. 그렇게 치면 지키지 못한 제 죄가 더 큽니다.”
“그래, 시에나. 다 잘 끝났어. 아이작도 찾았고, 치료도 끝냈어.”
“저, 정말요?”
데이몬의 말에 시에나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응. 스툼의 마법사가 데리고 있었더라. 정식으로 인수받아서 치료까지 끝마치고 지금 깨어나 있어.”
“아… 정말 다행이에요. 제가 제일 늦잠을 잤군요.”
미안해하는 시에나에게 데이몬이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놀라지 마, 네가 쓰러진 이후로 3일이 지났어. 3일 만에 겨우 깨어난 거야.”
“네!?”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깜짝 놀란 시에나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데이몬을 쳐다봤다. 3일이라니. 그 숲 앞에서 잠깐 쓰러졌다 일어난 것 같았는데 시간이 그렇게나 지났단 말이야? 당황하는 시에나에게 로하엘이 부가 설명을 해 주었다.
“사이가 그러길 외부 상처는 전부 치료했지만, 정신적 충격이 커서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빨리 떨치고 일어나 줘서 고마워요, 시에나.”
로하엘의 말에도 시에나는 좀처럼 대답하지 못했다. 며칠이나 잠들어 있을 만큼 큰 충격을 받았던 건가. 너무 많은 일이 있었기에 어떤 것이라고 콕 집을 수도 없었다. 아마 복합적인 일들이 겹쳐서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의 욕심으로 인해 허무하게 죽어 갔다. 시에나가 조악하게 만든 약이라도 있었다면 살 수 있는 사람이 그 전쟁터에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때 시에나는 문득 라이노의 마지막 부탁이 떠올랐다.
‘혹 안전히 빠져나가시게 된다면 스툼 영지의 칼버란 마을에 살고 계신 베티를 찾아 주세요. 저희 어머니십니다. 마지막 부탁이니 꼭 어머니를 만나 주세요.’
라이노의 마지막을 생각하자 눈물이 비죽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여기에서 울 수는 없었다.
“저, 도련님. 부탁이 있는데요.”
“뭔데?”
“그 라이노라는 사람… 기억하세요?”
“응. 그 사람 어머니 때문에 그래?”
“네….”
시에나는 말끝을 흐렸지만 데이몬은 모두 눈치챈 기색이었다. 데이몬은 잠시 망설이다 공작에게 말했다.
“전쟁터에서 목숨을 바쳐 저희를 구해 준 사람이 있습니다. 한 명은 노모의 약값을 대기 위해 전쟁에 출전했다고 하더군요. 시에나가 노모를 만나 치료해 주기로 약속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시에나의 몸이 나아지는 대로 출발하도록 하지.”
“스툼 영지에 있는 곳인데 갈 수 있을까요?”
지금 시에나가 머물고 있는 곳이 레네톤의 성이었기에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지만 공작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세상천지에 내가 가고자 했을 때 가지 못하는 곳은 없네.”
허세가 아닌 진실이 담긴 이야기에 시에나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모습이 묘하게 또 다른 데이몬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저는 지금 아무렇지도 않아요. 오래 자서 그런지 상쾌한걸요.”
시에나는 괜히 힘 있는 척 일어나 팔을 붕붕대었다. 그러나 오래 잠들어 있어 그런지 다리 근육이 풀려 허벅지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공작이 말했다.
“점심까지 챙겨 먹은 뒤 상태를 보고 출발하도록 하지.”
“아… 네. 그럴게요.”
시에나는 조금 낙담했지만 공작이 자신을 걱정해서 한 소리라는 것을 알기에 시간에 대해서 가타부타 더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밥 먹으러 가자, 시에나. 아니면 방으로 가져다줄까?”
데이몬이 상냥한 목소리로 아이를 어르듯 시에나에게 말했다. 굳이 환자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았던 시에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저 이제 괜찮으니 내려가서 같이 먹어요.”
“그래, 좋아.”
데이몬은 시에나의 말이 기쁜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팔짱을 꼈다. 좀처럼 하지 않는 행동에 시에나가 의아해하자 그가 귀 끝을 붉히며 말했다.
“시에나도 전에 나 아플 때 이렇게 부축해 주었잖아.”
아하. 다른 사람도 보고 있었기에 데이몬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시에나는 슬쩍 다리에서 힘을 빼며 그에게 체중을 조금 실었다.
“아, 역시 오랜만이라 그런지 좀 어지럽네요. 저 부축 좀 해 주시겠어요?”
“응. 나한테 맡겨.”
시에나의 부탁에 신이 난 데이몬이 그녀를 단단히 에스코트했다. 식당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더욱 진해졌다.
고기를 굽고 생선을 튀기고, 달콤한 디저트를 만들고… 오십 명이 넘게 앉을 수 있는 식탁 위에 음식이 가득 차려졌는데도 불구하고 음식들은 사용인들의 손 위에 들려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데이몬은 시에나를 가까운 상석으로 안내했다. 시에나가 손사래를 쳤지만 소용없었다. 파블로 백작은 시에나와 조금 떨어진 맞은편에 앉아 공작에게 아부를 떨며 굽실대고 있었다.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했지만, 소음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시에나의 의자를 빼 주며 에스코트를 마친 데이몬은 그녀의 충실한 하인이 되기로 작정했는지 음식을 시에나의 앞에 끌어다 놓고 뭐든 먹이려고 하고 있었다.
“시에나, 이거 먹어. 묽게 만든 닭수프야. 제법 맛있어.”
데이몬이 시에나의 앞에 내놓은 건 닭죽과 비슷한 음식이었다. 물론 서양식이라 쌀이 들어가 있진 않았지만, 투명한 수프 속에 잘게 찢은 부드러운 살코기 사이로 노오란 옥수수알이 들어가 있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수프의 냄새를 맡자 달콤하고 고소한 향이 났다. 꼬르륵. 별로 배고프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냄새를 맡으니 갑자기 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시에나가 스푼을 들어 수프를 후후 불더니 입 안에 쏙 집어넣었다.
살짝 점성이 있는 맑고 투명한 수프는 오랫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시에나의 식도를 부드럽게 감싸 주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푹 끓인 닭은 몇 번 씹기도 전에 녹아내렸다. 파블로 백작은 상당한 수준의 주방장을 데리고 있는 듯했다.
“맛있어요.”
시에나가 탄성을 지르자 데이몬은 기쁜 듯 자신의 몫까지 덜어 주었다.
“많이 먹어.”
“그래도 이건 도련님 건데….”
시에나가 미안한 표정을 짓자, 데이몬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괜찮아. 난 다른 거 먹을 수 있지만, 시에나는 그것 밖에 못 먹잖아.”
데이몬은 보란 듯이 시종이 접시 위로 올려 준 커다란 칠면조 다리를 뜯기 시작했다. 살짝 탔다 싶은 겉껍질을 뜯어내자 잘 익은 속살이 드러났다. 은근슬쩍 칠면조 다리를 보며 시에나가 군침을 삼켰다. 데이몬은 우아하게 칠면조를 잘라 입 안에 넣었다.
데이몬이 다른 음식을 맛있게 먹는 걸 보고 시에나 역시 수프를 먹어 치우는 데에 열을 다했다. 시에나의 앞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와 알록달록한 색깔을 지닌 과일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데이몬의 영지에서 했던 공작과 기사단의 환영 파티보다 두 배는 더 화려한 것 같았다.
먼저 영지전을 연 것은 레네톤이라고 했다. 식탁만 보았을 때에는 마르바스성보다 몇십 배는 풍요로워 보이는데, 이들은 무엇이 부족해서 전쟁을 일으킨 걸까. 풀을 먹여 빳빳한 셔츠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온 파블로 백작의 배를 보며 시에나가 생각에 잠겼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시종들이 디저트를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치킨수프로만 식사를 해야 했지만 나무딸기셔벗의 달콤한 유혹이 너무 강렬해 시에나도 냉큼 한 그릇 받아 두었다. 식사가 끝나 가며 식당을 오가는 시종들이 적어지자 시에나는 공작과 백작의 대화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자네는 수많은 과수원이 있지 않나. 황실에 납품하는 과일의 50%는 자네의 영지에서 나올 텐데?”
“아이고, 공작님.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과일은 썩습니다. 사람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서 갈망하게 되죠. 시간이 지나면 썩는 과일 대신, 수만 년이 지나도 변치 않을 물건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파블로 백작의 눈은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스툼은 척박해. 그들이 먹고살 수 있는 건 오직 페리도트 광산뿐인데, 한 번쯤 자비를 베풀 생각은 없나?”
공작의 직구에 백작은 조금 망설이다 이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비열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뭐, 공작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고려해 볼 수는 있습니다만…”
“무엇이 걸리지?”
“아무래도 배상금이 문제라서요. 용병들도 이번에 제법 많이 데려왔기도 하고….”
그는 말끝을 흐리면서 전하고 싶은 말을 모두 전달했다. 공작은 그쯤은 예상했다는 듯 말했다.
“어차피 영지전을 완벽하게 이겨 자네가 스툼을 가진다 해도 페리도트 광산을 제외하고는 빚투성이라는 사실쯤은 알고 있지 않나. 그게 그들의 목숨 줄이기에 그들도 악을 쓰고 버텼던 거고. 이제 겨울이 시작되고 전쟁 때문에 살 곳을 잃은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 사람들의 원망을 선한 백작이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선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백작이 공작의 말에 똥 씹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나무딸기로 만든 셔벗을 입 안에 쏙 집어넣으며 시에나가 그들의 말을 경청했다.
“여기서 끝내면 저도 빚투성이인 건 마찬가지입니다. 페리도트 광산이라도 얻는 것이 병력으로 차출당한 불쌍한 저희 영지의 영주민들에게 보상해 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작의 말에는 주어와 영혼이 없었다. 병력으로 차출당했다니? 병력으로 차출한 건 바로 백작이 아닌가. 시에나는 황당해서 백작을 바라보았다. 공작은 그의 뻔뻔한 말에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물었다.
“혹 백작은 우리 공작가의 흑요석 광산을 알고 있나?”
“예에. 그러믄요. 아주 유명하지 않습니까. 황실의 상징이기도 하고요.”
이 제국에서 검은 머리칼과 금색 눈은 흔치 않다. 황족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것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머리색과 눈 색을 닮은 흑요석과 호박은 제국의 좋은 관광 상품이었다.
그러나 황족의 특징을 닮은 보석을 아무나 유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 두 가지의 보석은 황족의 혈통을 타고난 사람들만이 관리하게 되어 있었다. 현 황제의 형인 공작 역시 황족이었기에 거대한 흑요석 광산을 가지고 있었다.
데이몬에게 잔소리를 할 때를 제외하면 과묵한 공작이었기에 이런 이야기를 이런 자리에서 할 이유가 분명히 있어 보였다. 혹 백작에게 광산의 일부를 주려는 건가. 백작 역시 그 생각을 했는지 욕심 많은 백작의 눈이 더더욱 욕심에 뒤덮여 가는 것이 보였다. 공작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여상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만약 영지전을 멈추고 향후 5년간 어떤 곳도 침략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5년간 내가 가진 흑요석 광산에 대한 지분의 1할을 주지.”
헉.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일순 숨을 들이켰다. 공작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이만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막 나와 김이 폴폴 나는 호박 케이크를 푹 찍어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흑요석 광산의 지분으로 생길 미래수익에 눈이 먼 백작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백작이 든 찻잔 안에서 파도가 일렁거렸다.
“하해와 같은 은혜로 그렇게 해 주신다면 영주민들이 이번 겨울을 굶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잘 먹고 있는 것 같고만, 시에나는 시종들의 뽀얀 뺨과 토실토실한 몸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공작의 입에서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 5년 이내 그대가 영지전을 벌였다는 소리가 들려온다면 계약은 파기네.”
“무, 물론입니다. 당연히 계약이란 지키라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나의 영지는 조금 더 넓어지겠지. 이 레네톤을 포함해서 말이야.”
공작의 우아한 협박에 잠시 식당 안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졌다. 약속을 어긴다면 영지전을 벌이겠다는 이야기였다. 황제에 버금가는 군사력이 있는 공작이 백작에게 영지전을 신청한다면 승부는 어떻게 될지 뻔했다. 그 말을 알아들은 파블로 백작은 당황해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래도 그런 말씀은 좀….”
“그 말은 그대가 계약을 무시하고 5년 안에 영지전을 벌일 거라는 이야기인가?”
공작은 재미있다는 듯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백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공작이 그를 바라보는 눈빛은 고양이가 제게 덤비는 쥐새끼를 보는 듯한 눈이었다. 분명히 난색 계열일 금안이 더없이 차갑게 느껴졌다. 싸아악. 백작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 늙은이가 실언을 했습니다. 저는 그저 공작 각하께서 너무 넓은 땅을 갖게 되시면 관리하기 힘드시지 않을까 싶어 드린 말씀일 뿐입니다. 과일이 나는 영지라는 건 사실 굉장히 까다롭습니다. 겨울에는 얼어 죽지 않도록 해야 하고, 나머지 계절에는 병충해 때문에 골머리를 썩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작님이 걱정이 되어 그런 것뿐입니다.”
백작은 정말로 당황했는지 헛소리를 지껄였다. 그 역시 자신이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말을 내뱉을 때마다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그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있던 공작이 느른하게 입을 열었다.
“난 마르바스일세. 작은 영지 하나 다스리지 못해서야 가문의 체면이 서겠나.”
공작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그 속에는 뼈가 들어 있었다.
제국을 다스리는 마르바스 가문이 영지 하나 못 다스린단 말인가?
그 속뜻을 알아들은 백작의 얼굴이 이제는 새파랗게 변했다.
“제, 제가 또다시 실언을 했습니다. 한 번만 자비를….”
“우리 사이에 그런 것이 어찌 필요하겠나. 난 그대와 좋은 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하고 싶다네.”
공작은 그리 말하며 싱긋 웃었다.
“예, 예에. 저도 그렇습니다….”
백작은 어물어물 대답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공작은 백작을 아주 손바닥 위에 두고 놀리고 있었다. 백작의 고개가 숙여지다 못해 거의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을 정도가 되자 공작이 입을 열었다.
“계약 조건에 불만이 있는 게 아니라면 지금 바로 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할까 하는데, 어떤가?”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시에나가 공작을 은근히 두려워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친절했던 공작이었기에 지금 그의 모습은 몹시 다르게 느껴졌다. 리메리오 남작에게도 싸늘했었지만 그때에는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자세히 상황을 파악하지는 못했는데, 지금 보니 아주 가차 없었다. 상대가 호기심을 가져 미끼를 물면, 뼈 하나 남기지 않고 발라 먹는다. 괜히 강철의 대공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백작이 땀을 삐질 흘리며 망설이다 겨우겨우 억지웃음을 지으며 내뱉었다.
“하하. 예. 그러겠습니다. 제가 바로 응접실로 안내하도록 하죠.”
“그러도록 하지.”
공작은 우아하게 반쯤 비운 찻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시에나와 데이몬을 향해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에나, 데이몬. 잠시 다녀올 테니 디저트라도 먹으며 기다리렴.”
“예에. 그러겠습니다.”
“예.”
꿀을 발라 놓은 듯 달콤한 목소리에 시에나는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시에나가 귀엽다는 듯 공작이 입꼬리를 올렸다.
백작은 응접실로 공작을 안내하기 위해 앞서 나갔다. 축 늘어진 백작의 등이 평소보다 더 작아 보였다. 그 뒤를 공작이 등을 쭉 펴고 유려하게 걸었다. 마치 그 모습이 맹수와 사냥감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달칵. 둘이 빠져나가고 식당 안에는 조용한 정적만이 남았다. 후우. 시에나가 내내 긴장되어 있던 숨을 내리쉬었다. 데이몬이 걱정스러운 듯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시에나, 어디 아파?”
“네? 아니에요. 저도 모르게 좀 긴장했나 봐요.”
“숙부님의 저런 모습은 나도 오랜만에 봐.”
데이몬은 자기 역시 긴장했었던 것처럼 시에나를 위로했다. 그에 화답해 시에나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긴장이 풀린 식당 안에서는 다시 식기 소리가 달각거렸다. 며칠 동안 식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얼마 먹지 않았는데도 배가 불러 왔다. 부른 배를 쓰다듬고 있자 시종에게서 막 생크림을 올린 팬케이크를 받아 든 데이몬이 시에나에게 물었다.
“시에나, 디저트 먹을래?”
“아니요. 저는 배불러서요. 도련님 드세요.”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숙련된 솜씨로 팬케이크를 잘라 입 안에 집어넣었다. 고소한 팬케이크 위에 달콤한 시럽을 뿌리고, 신선한 생크림과 과일로 장식한 디저트는 맛이 없으려야 없을 수 없었다. 펜케이크를 맛본 데이몬은 빠른 속도로 그것을 비워 가기 시작했다.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배가 부른 와중에도 시에나가 군침을 삼키며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시에나의 시선을 느낀 데이몬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먹을래?”
“음… 어… 네.”
시에나의 솔직한 말에 데이몬이 키득 웃었다. 그러나 시에나가 먹지 않겠다고 했기에 그녀의 앞에는 디저트용 포크가 없는 상태였다. 식사가 끝난지라 식기와 접시들은 모두 거두어 간 상태였고 말이다. 나무딸기셔벗을 먹었던 스푼으로 팬케이크를 먹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데이몬이 시종을 부르려고 하자 굳이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던 시에나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냥 그 포크로 먹을게요.”
풉.
옆자리에 앉아 있던 로하엘이 포도주를 조금 뿜었다. 그 장면을 본 사이가 혐오스러운 눈길로 로하엘을 째려보았다. 시에나의 말을 들은 데이몬의 얼굴이 시간차를 두며 붉어졌다.
“이 포크를…?”
“네, 안 될까요?”
“안 될 건 없… 없지.”
그렇게 말하는 데이몬의 표정은 정말이지 미묘했다. 그러나 시에나는 개의치 않고 데이몬의 포크를 암, 물었다. 화르륵. 데이몬의 얼굴에서 무언가 타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팬케이크는 여전히 따뜻하고 달콤했다. 데이몬이 정신없이 디저트를 먹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맛있어요, 엄청.”
팬케이크의 황홀한 맛을 음미하고 돌아오자, 데이몬은 포크를 꽉 쥔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농익은 자두처럼 새빨갛게 타오른 왼쪽 뺨에 생크림이 묻어 있었다. 이런 걸 보면 아직도 영락없는 어린애 같다. 시에나는 미소를 지으며 검지를 들어 데이몬의 입가에 뻗었다. 데이몬은 여전히 석상처럼 굳어 있다가 갑자기 다가온 시에나의 손에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뭐, 뭐 하는 거야.”
“도련님 입가에 생크림이 묻어서… 떼어 드리려고요.”
명백한 거절에 당황한 시에나보다 데이몬은 더 당황한 듯 보였다. 데이몬은 냅킨으로 입가를 거칠게 닦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의 끼이익, 하는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잠시 집중되었다.
“도련님… 입이 찢어지겠어요….”
“괜찮아. 나, 나 볼일이 생겨서 이만 가 볼게.”
그리고는 후다닥 자리를 빠져나갔다. 시에나는 덩그러니 남아 데이몬이 허둥지둥 식당을 나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옆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로하엘은 거의 숨도 못 쉬고 웃고 있었다. 그런 로하엘을 보며 시에나가 가볍게 눈을 흘겼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으세요, 로하엘 님.”
“그… 큭… 그게, 시에나.”
“네?”
“너무 모르는 것도 죕니다.”
로하엘은 대답 대신 생뚱맞은 말을 하며 포도주를 잔뜩 들이켰다. 그는 뭐가 재미있는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벌게진 로하엘의 볼에 시에나는 그저 취했구나 생각할 뿐이었다. 데이몬이 사라지자 주변은 온통 모르는 사람들투성이였다.
사이가 있긴 했지만, 그는 나무딸기셔벗에 이어 팬케이크 도장 깨기를 하고 있었다. 로하엘은 대답도 안 해 주고 계속 샐샐 웃기만 해서 지금은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시에나는 자리를 뜨기로 결심했다.
의자도 끌지 않고 조심히 일어나자 술기운이 오른 사람들은 흥겹고 떠들썩한 연회를 즐기느라 아무도 그녀에게 집중하지 않았다. 시에나는 자리를 빠져나와 복도를 총총 걷기 시작했다.
* * *
“어라? 여기가 어디람.”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방이 어디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안내에 따라서 식당으로 왔던 거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게 패착이었다.
“나, 길을 잃은 건가.”
시에나는 난감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일단 부지런히 발을 놀리며 기억을 더듬어 보는 수밖에. 그러다 하인을 만나면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창문틀에 끼워진 투명한 글라스에서는 눈 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며칠 전의 안개가 거짓말인 것처럼 날씨는 한없이 밝고 맑았다.
뜨거운 햇빛이 더울 만도 하건만 시에나는 자리에 멈춰서 그 햇살이 신기하다는 듯 손바닥에 쥐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햇빛이 전쟁터 한 번 다녀왔다고 처음 보는 것처럼 신기하게 느껴졌다. 만약 자신이 그때 죽었다면, 책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날카로운 칼날에 몸이 꿰이는 상상을 하자 햇살 속에 있으면서도 얼음 안에 갇힌 것처럼 몸이 오싹 떨렸다. 역시 죽는 건 아직 무섭다. 최소한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고 도전해야 할 문제로 여겨졌다.
“…저는… 니다.”
“…래. 는… 어?”
그런 시에나의 귓가에 어린 소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에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목소리는 복도의 꺾인 모서리 너머에서 들리고 있었다.
“네가 나를 용서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이해해.”
“저는…!”
시에나는 그제야 그 둘이 누군지 알아채게 되었다. 데이몬과 아이작이었다. 반갑다고 끼어들기엔 둘의 대화가 너무 심각했기에 시에나는 조용히 멈춰 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시에나는 방이 어디인지 드디어 알아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방은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곳 뒤에 위치해 있었다. 시에나는 저 사이를 뚫고 지나가기보다는 둘의 대화가 끝나기를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엿듣는 것 같은 기분에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 게… 저는….”
아이작은 반쯤 울먹이고 있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이작은 데이몬 앞에서 작게 흐느꼈다. 데이몬은 그런 아이작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당신이… 나쁜 사람이길 바랐습니다.”
예고 없이 울컥 터져 나오는 날것의 감정에 시에나는 그대로 숨을 멈추었다. 데이몬 역시 시에나와 비슷한 심정인 듯했다. 데이몬은 어이없는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길 바란 거지?”
“…그래야 제가 나빠서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게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으니까요.”
처음 듣는 아이작의 진심에 데이몬이 인상을 찌푸렸다.
“메어리는 널 버린 게 아니야.”
“과연 그럴까요? 도련님께서도 들으셨겠죠. 제 어머니가 죽기 전날, 잠 한숨 못 이루고 저를 보며 고민하고 울었던 걸요.”
데이몬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작은 그것에 더 울컥했는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지 띄엄띄엄 말했지만, 아이작의 속내를 어느 정도 눈치채게 된 시에나로서는 그 말을 알아듣기가 어렵진 않았다.
“그날 어머니는 저와 도련님을 잰 겁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착하고 가엾은 도련님을 택한 저의 어머니는 당신을 위해 목숨을 버리러 갔죠. 친아들을 버리고요!”
그의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시에나는 가슴에 푹 꽂히는 고통에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까지 켜켜이 묵혀 온 아이작의 감정이 하나하나 터지 듯 한 마디, 한 마디가 묵직하게 전해져 왔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며 찾아오지 않는 도련님을 보고 원망도 했지만, 솔직히 안심했습니다. 도련님을 택한 제 어머니의 눈이 잘못되었었다고 생각할 수 있었으니까요. 제가 나쁜 아이라 어머니가 절 버리고 간 게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으니까요!”
헐떡이는 아이작의 숨소리를 들으며 데이몬은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무례도 잊고 데이몬을 똑바로 노려보던 아이작은 이내 흥분을 멈추고 급격히 가라앉았다.
“그런데 성안에서 머물며 도련님에 대해서 알게 되면 될수록 제가 못된 인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머니가 도련님을 택한 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져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어요.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도련님이 정말은 착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지금까지 원망하며 버텨 온 제가… 저의 인생이… 무너질 것 같았습니다.”
노파가 왜 이렇게 못되었냐고 대수롭지 않게 했던 말이 아이작에는 생각보다 큰 상처가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있고 싶지 않다는 괴로움에 마나가 폭발할 만큼. 시에나는 그제야 그가 이 전쟁터에 떨어진 이유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저를 구하러 오셨네요. 사람이 죽어 가는 전쟁터로요. 그 사실을 들었을 때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선택이… 옳았다는 걸요.”
그렇게 말하며 아이작은 씁쓸하게 웃었다. 갈색 눈동자 안쪽에는 비참함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데이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난 착해서 널 구하러 온 게 아니야.”
“제가 메어리의 아들이기 때문이어서요?”“글쎄. 그런 이유가 없진 않지. 메어리는 나의 은인이고, 나에게는 메어리의 가족인 너와 할머니에게 그 은혜를 갚을 의무가 있으니까.”
“저를 구하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셨는지도 들었습니다. 제가 평생을 일해 갚는다 해도 갚지 못할 것들을요.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신 겁니까?”
데이몬은 대답을 망설였다. 말을 꺼내도 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아이작은 참을성 있게 그를 기다려 주었다. 이윽고 데이몬이 입을 열었다.
“이런 말을 해도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네가 나와 비슷하다 생각했어.”
“제가요? 저 같은 건 도련님 발끝에도 못 미칩니다. 이번에 아주 확실하게 깨우쳤다고요.”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내가 느낀 동질감은, 가족 같은 거 말이야.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싫어하겠지만 난 메어리를… 엄마처럼 느꼈거든.”
데이몬의 솔직한 말에 시에나도 아이작도 어리벙벙해졌다.
“메어리는 매일 밤 내가 자기 전에 너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줬어. 네가 언제 걷기 시작했는지, 엄마라는 말을 언제 했는지, 몇 살까지 이불에 지도를 그렸는지… 그런 것들 말이야.”
“윽.”
아이작은 데이몬의 마지막 말에 당황하더니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데이몬은 짧게 헛기침을 하며 미소를 숨겼다.
“으흠. 메어리가 해 주는 네 이야기를 들으며 난 어느새 너를 형제처럼 생각하게 되었어. 웃기지? 우린 메어리가 죽을 때까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데 말이야. 믿기 힘들겠지만… 그랬어. 그래서 네가 성안에 있을 때에는 가족이 생긴 것처럼 느껴져서 내심 기뻤어. 날 좀… 싫어하는 형제였지만 말이야.”
아이작은 데이몬의 말이 전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가족이라니. 형제? 당황스럽기는 시에나도 마찬가지였다. 귀족이라 대놓고 싫어하지는 못하지만 데이몬을 싫어한다는 게 은연중에 확실히 느껴졌던 아이작이 가족처럼 느껴졌다니.
“무슨… 말도 안 됩니다. 제가 어떻게 귀족인 도련님과 가족… 가족을….”
아이작은 데이몬의 말이 황당했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그냥 나 혼자 느낀 거야. 너에게 그걸 강요할 생각은 없어. 널 구하려 했던 내 모든 행동들도 나의 독단적인 생각과 선택이었으니 여기에 대해서 어떤 부담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 음… 나를 조금 더 동생처럼 생각해 주면 좋긴 하겠다.”
데이몬은 생각보다 굉장히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시에나조차 모르고 있던 진실이 아이작의 앞에 나타나자 그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우두커니 서서 중얼거렸다.
“도련님은 정말… 어떻게….”
아이작의 입 안에서 수많은 말이 웅성거렸지만, 감정이 복잡한지 정확한 말이 되어 나오진 않았다. 데이몬은 그런 아이작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이내 아이작의 입에서 가장 먼저 터져 나온 것은….
“하… 하하하.”
다름 아닌 실소였다. 그 웃음에는 허탈함도, 비웃는 기색도 없었다. 그저 정말로 유쾌한 듯 복도가 떠나가라 웃어 대었다. 아이작의 웃음이 멎어갈 때 즈음 그가 한결 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졌습니다, 도련님. 완전히 항복이에요.”
“…어?”
“정말 대단한 분이군요. 남들 위에 서는 사람은 태생부터가 다른가 봅니다.”
아이작은 진심으로 감탄한 사람처럼 말했다. 데이몬은 그의 말에 눈썹을 살풋 찡그렸다.
“남들 위에 서는 사람이라니. 난 널 정말로 가족처럼….”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되겠습니다.”
아이작은 딱 잘라 말했다. 멀리 있어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데이몬이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이작은 데이몬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바람에 아이작의 옷자락이 하늘하늘 나부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선 것만으로도 아이작의 몸이 언뜻 보였다. 아이작은 천천히 데이몬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데이몬이 당황해 몸을 바짝 굳히며 아이작을 말렸다.
“뭐 하는 거야. 일어나.”
“지금까지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데이몬 도련님. 그리고 앞으로 제가 도련님께 목숨을 다해 충성하는 것을 허락해 주세요.”
“충성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어차피 도련님이 구해 주시지 않았다면 꺼졌을 목숨입니다. 저를 위해 어떤 값을 치르셨는지 아는 이상, 평생 동안 도련님의 곁에서 빚을 갚는 게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러지 마. 나는 널 정말 가족처럼 생각해서 구했던 거야. 거기에 대해 어떤 보상도 원하지 않아.”
“죄송하지만 저는 도련님을 가족처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제 가족은 오로지 어머니와 할머니, 그 둘뿐이라고 정했으니까요.”
딱 잘라 말하는 아이작의 말에 데이몬은 쓴 소태를 씹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감히 네가 날 가족처럼 생각해 주길 바라지 않아.”
“대신 저는 도련님을 제 목숨보다 더욱 소중히 여기고자 합니다. 당신을 주인으로 모시도록 부디 허락해 주세요.”
“빚 때문이라면 정말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나 역시 메어리에게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졌으니까. 넌 너의 인생을 살아.”
“도련님이 저를 구한 것이 당신의 선택이었듯, 이 맹세는 오롯이 저의 선택입니다.”
데이몬의 계속된 만류에도 아이작은 시종일관 흔들림 없는 태도를 유지했다. 데이몬은 아이작에게 회유도 하고, 협박도 하고, 설득도 했지만 그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백기를 든 건 데이몬이었다.
“그 말 후회하지 않겠어?”
“후회는 하게 될 수 있겠죠.”
“그렇다면 역시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이 있습니다. 기로에 섰을 때 후회를 하지 않을 선택을 찾기보다 가장 덜 후회할 쪽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고요.”
그 말에 데이몬은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데이몬에게서 촉촉하게 젖어 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역시 메어리에게 항상 듣던 말이야.”
그 말에 아이작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아이작의 웃음을 처음 본 데이몬이 그 모습이 메어리와 몹시도 닮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데 어떻게 이길 수 있겠어.
난 결국 메어리에게 단 한 번도 이겨 본 적이 없는데.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그래.”
“이름을 여쭈어도 될까요.”
“데이몬 오웬… 마르바스.”
데이몬은 마르바스라는 성을 꺼내기 전 잠시 망설였다. 데이몬 오웬 마르바스. 그 이름을 따르는 사람이 생긴다는 게 어떤 의미일지 그들은 아직 알 수 없었다.
이름을 들은 아이작은 무릎을 꿇은 상태로 천천히 허리를 굽히기 시작했다. 전쟁터를 구르느라 흙투성이가 된 신발의 발등 위에 아이작의 입술이 닿았다.
데이몬은 아이작의 입술이 자신의 신발 위에 닿자 잠시 움찔하긴 했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오후의 햇살이 그들의 엄숙한 의식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시에나는 둘의 인연이 서로에게 진득하게 얽히는 기분에 휩싸였다. 끊어져 있던 실타래가 생겨나 그들의 영혼을 단단하게 묶는 것 같았다.
아이작 역시 책에는 없던 인물이었다.
어쩌면 나는 데이몬의 성격을, 주변 인물을, 그의 인생을 바꿔 버리는 게 아닐까.
책과는 너무도 달라지는 내용에 문득 두려움도 들었다. 누군가의 운명을 바꾸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러나 시에나는 데이몬이 형제의 칼끝에 스러지게 둘 수는 없었다.
어느덧 무척이나 소중한 존재가 된 데이몬이 다른 결말을 맞고 행복해질 수 있다면, 기꺼이 그 대가를 치르리라.
그런 마음으로 시에나는 소년들의 엄숙한 맹세를 진지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나 아이작 히들러는 데이몬 오웬 마르바스에게 몸과 영혼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이스테라 여신 앞에 굳게 맹세합니다. 저의 마지막 심장이 뛸 때까지 제 몸과 영혼은 주인께 향해 있을 것을 다짐합니다. 이 맹세는 저의 피로써 증명하며, 어떠한 순간에도 깨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작은 무릎을 꿇은 채 품속의 단검을 꺼내 들었다. 핏, 베어 낸 검지에서 피가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데이몬은 그런 아이작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나 데이몬 오웬 마르바스는 아이작 히들러를 내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그의 삶에 부족한 것이 없도록 노력할 것이며 기쁨과 슬픔을 나누며 함께 평생을 살아갈 것을 맹세한다. 이 맹세는 나의 피로 증명하며, 어떠한 순간에도 깨지지 않을 것이다.”
데이몬 역시 자신의 장검을 들어 검지에 상처를 냈다. 둘은 피가 흘러내리는 손가락을 마주했다. 원래는 붉은 포도주에 타서 나누어 마시는 거지만 장소가 장소다 보니 약식으로 처리하는 듯했다. 시에나는 어쩐지 가슴 한편이 뭉클해지는 기분이었다. 둘의 나이는 어렸지만 서로를 향한 맹세는 누구보다도 어른스러웠다. 둘의 피가 섞이고, 피가 멎을 때까지 그들은 서로를 진지하게 응시했다. 피가 멎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들의 손가락이 떨어졌다. 둘을 감싸 안은 공기가 아까보다 훨씬 부드럽고 안정감 있게 느껴졌다.
“주인님.”
“이름으로 부르는 건 포기할 테니 그냥 계속 도련님이라고 불러 주면 안 될까.”
그 말이 어지간히 부담스러웠는지 데이몬이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럼 도련님. 도련님의 충실한 종이 된 기념으로 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이작은 자신을 낮추며 장난스레 물어왔다. 데이몬은 아이작이 무슨 질문을 던질지 긴장되는지 경계심 강한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뭔데?”
“시에나 님께는 언제 고백하실 예정입니까? 너무 티 납니다.”
“콜록.”
시에나는 너무 놀라 크게 기침했다. 둘이 번개같이 고개를 들고 시에나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둘의 감동적인 장면을 지켜보느라 삐져나와 있던 시에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미안, 들으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정말 미안. 그, 그럼 이만….”
당황한 시에나가 어물어물 말을 주워 담다 뒷걸음질을 쳤다. 그렇지만 옷자락이 너무 길었던 탓에 몇 걸음 가지 못해 옷자락을 밟고 휘청거렸다. 세상이 순식간에 돌았다.
“엄마야!”
“시에나!”
쿠당탕! 시에나가 아주 거세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나 분명 제대로 넘어졌는데 전혀 아프진 않았다. 복도에 깔려 있는 것은 고급스럽고 단단하기 그지없는 흰 대리석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무슨 일인가 싶어 살며시 실눈을 뜨자 데이몬이 자신의 엉덩이 밑에 깔려 있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
“도, 도련님. 죄송해요!”
화들짝 놀란 시에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데이몬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귀 끝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분명 얼굴도 수박의 속처럼 붉어져 있겠지. 그 모습을 바라보는 시에나도 덩달아 벌겋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그 장면을 차마 바라볼 수 없었는지 시선을 돌리고 있던 아이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저 짤리나요?”
* * *
응접실의 푹신한 소파에 앉아 안정을 취하고 있던 시에나는 자신의 앞에 놓인 식어 빠진 차를 계속 들이켰다. 도저히 심장이 벌렁거려서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 그건 앞에 있는 데이몬도 마찬가지였다. 데이몬의 얼굴은 아까부터 토마토냐 사과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계속 새빨간 채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뭐 됐다는 얼굴로 시에나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 이마를 짚고 있었다. 데이몬은 아까 시에나와 고개를 한 번 마주친 이후로 잘 익은 벼마냥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시에나는 이 어색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해 찻주전자를 들어 찻잔을 향해 기울였다. 몇 잔을 연거푸 마셔 대었더니 찻물은 조로록 나온 몇 방울을 끝으로 더 나오지 않았다. 기회라고 생각한 시에나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아-여기 지, 금 찻물이 떨어, 졌네요. 제가 가서 도로 가지고- 올게요.”
누가 봐도 어색한 말투에 방 안은 더욱 어색해졌다. 그 말에 반응한 데이몬이 시에나에게서 찻주전자를 빼앗듯이 들며 말했다.
“내, 내가 다녀올게. 시에나 여기 지리 잘 모르잖아.”
아, 세상에. 길을 잃는 바람에 우연히 이야기를 들었다고 변명했던 걸 데이몬은 놓치지 않고 있었다. 이래서 머리 좋은 애들이란. 아이작과 둘만 남게 되는 상황도 싫었던 시에나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찻주전자를 도로 빼앗으려 했지만 데이몬도 지지 않으려는 듯 찻주전자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땐 비몽사몽이라 그랬고요. 여기 온 건 기억하니까 괜찮아요.”
“내가 아까 봐서 아는데 여기 성이 엄청 복잡해. 또 길을 잃으면 어떡해. 내가 다녀올게.”
둘은 한참을 아웅다웅하며 찻주전자를 갖기 위해 투쟁을 벌였다.
“아, 도련님 제발 제가 다녀오게 좀 놓으세요!”
그 말에 반응한 데이몬이 손에서 힘을 확 뺐다. 그러나 힘을 빼자 오히려 그 반동으로 인해 시에나는 찻주전자를 놓치게 되었다. 고급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사기로 된 주전자가 공중에 날아가는 장면이 슬로 모션처럼 펼쳐졌다. 둘이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턱.
그리고 그 주전자는 한결 정신을 차린 아이작의 품 안으로 착지했다. 둘의 시선을 동시에 받게 된 아이작이 한참 눈치를 보다 문을 향해 뒷걸음질 쳤다.
“주인님의 충실한 종인 제가 다녀오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두 분이서 편안하게 얘기 나누세요.”
“아이작, 거기 서…!”
“아이작…!”
그 말과 동시에 아이작은 재빠르게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데이몬과 시에나가 불렀지만 이미 쌩하니 방을 빠져나간 뒤였다. 소파의 끝과 끝에 앉은 둘이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적막한 방 안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둘을 짓눌렀다. 시에나는 어색함에 속으로 몸부림쳤다. 괜히 엉덩이가 자꾸 움찔거렸다.
“시, 시에나.”
타이밍 좋게 데이몬이 어색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시에나에게 물었다.
“네! 도련님!”
시에나는 저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물론 그 뒤에 속으로 또 날뛰었음은 물론이었다. 데이몬은 잠긴 목을 큼큼 다듬으며 말했다.
“아까 아이작이 한 말은 전부 거짓말이야. 그러니까 믿지 마.”
“그, 그럼요. 전혀 안 믿어요. 절대로요.”
‘그럼요’까지만 해도 나쁘지 않았던 데이몬의 표정이 전혀 ‘안 믿어요’와 ‘절대로요’를 거치며 심해로 가라앉았다. 왜 또 강한 부정을 하고 난리야, 시에나! 시에나는 속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1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오해를 푼답시고 응접실에 가자는 데이몬의 말에 응한 것부터가 실수였다. 시에나는 머리를 짚었다. 아이작은 돌아올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았다. 그대로 내뺀 건 아닐까. 시에나의 푸른 눈동자에 의심이 일렁거렸다.
“참… 아이작과 오해 풀린 것, 축하드려요.”
“아. 으응. 고마워. 시에나 다 네 덕분이야.”
“제가 뭘요. 다 도련님이 하신 거죠.”
“아니, 네가 아이작이랑 얘기하자고 말해 주지 않았다면 난 그대로였을 거야. 나는 네가 나를 바꿔 준 덕분에 우리의 관계도 바뀔 수 있었다고 생각해.”
“네….”
데이몬이 진지하게 말해 주자 어쩐지 부끄러워진 시에나가 고개를 슬쩍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을 보던 데이몬이 결심한 듯 시에나의 이름을 불렀다.
“시에나.”
“네, 도련님.”
“이건 믿어 줘. 시에나에 대한 내 감정이 어떻든… 나는 네가 정말 소중해.”
안쪽 꽉 찬 직구에 시에나는 멍하니 데이몬을 응시했다. 환한 햇살 아래서 데이몬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가까이서 본 데이몬은 이제 소년보다는 청년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했던 얼굴이 볼살이 빠지며 날카로워졌고 이목구비는 더욱 또렷해졌다. 움푹 들어가 깊어진 눈은 정확한 아몬드형이었으며, 길게 빠진 눈꼬리가 시원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푸른 기가 돌 만큼 맑고 깨끗한 흰자의 정중앙에 위치한 금빛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시에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데이몬의 금안이 고요하게 빛났다. 시에나는 마치 그의 눈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모든 시공간이 이지러져 어느새 시에나는 금색 바다에 흠뻑 몸을 적시고 있었다.
따뜻한 황금비로 변한 제우스를 받아들이는 다나에의 기분이 이러했을까.
그의 바다는 잔잔하고 따스하면서도 때때로 시에나를 휘몰아쳤다. 금빛 물보라가 시에나의 주위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이따금 파도가 칠 때마다 시에나의 몸이 기분 좋게 흔들거렸다. 영원히 이 안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안은 아늑하고 평온했다.
“…에나. 시에나?”
“네, 네?”
그러나 시에나는 데이몬의 물음에 퍼뜩 놀라 현실로 돌아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시에나는 당황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는 시에나는 정신을 반쯤 놓고 있었다. 아까 있었던 일은 전부 환상이었던 건가? 내가 설마 앉아서 꿈을 꾼 건가? 다시 보면 또 겪을 수 있으려나. 시에나는 다시 데이몬의 눈을 응시하는 데 집중했다. 미간을 찌푸린 시에나를 본 데이몬이 흠칫했다.
데이몬의 눈을 한참이나 바라보았지만 다시 그 금빛 바다에 빠지는 듯한 환상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시에나는 점점 데이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데이몬과 시에나의 사이는 30cm도 채 되지 않았다. 데이몬은 그런 시에나의 이상 행동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 시에나의 숨결이 그의 볼을 간지럽혔다. 긴장에 온몸의 솜털이 빳빳해졌다.
“안 되네….”
“시, 시에나. 좀 가까운 것 같은데….”
데이몬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눈동자가 완전히 차단되자 시에나는 그제야 둘이 몹시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데이몬은 시에나의 멍한 시선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다. 그 어쩔 줄 모르는 데이몬의 태도에 시에나의 몸에서 이상 반응이 일었다.
두근.
심장이 팔딱이는 소리가 귀에 울릴 듯이 크게 뛰었다. 분명 지금 가슴에 손을 얹는다면 엄청난 속도로 뛰는 심장을 느낄 수 있겠지. 시에나는 지금 자신이 데이몬을 엄청나게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 도련님을 좋아하는 건가.
의식하자마자 온몸에 봄바람이 들이닥치는 느낌이었다. 봄의 전령 제피로스가 가슴 가득히 봄바람을 불어 놓고 훌쩍 다른 곳으로 떠나 버린 걸까. 정신이 어질어질하고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시에나는 제자리에 앉아 양 뺨을 감쌌다. 달아오른 뺨이 화끈화끈했다.
“시에나, 나 뭐 하나 물어도 돼?”
“네? 어떤 거요?”
“그… 다 끝나면, 네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알려 준다고 했잖아. D로 시작한다는 사람 말이야.”
아, 머리도 좋지.
시에나는 데이몬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았다. 데이몬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근데 그거 지금 말하면 안 될 것 같은데.
데이몬을 의식하기 시작한 지금 꺼낼 이야기는 아니었다. 목소리가 너무 떨려서 고백하는 것처럼 될 것 같았다.
잠깐의 착각일지도 모르는데 이 느낌에 취해 고백처럼 돼 버린다면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잖아.
시에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 번뜩 생각이 났다.
“도련님 그런데… 제가 좋아하는 사람 몰라도 괜찮으시다면서요?”
“뭐? 내가 언제!”
“위험한 일 생기면 저 버리라고 했는데 안 그러셨잖아요. 응, 상관없어. 널 버리고는 안 가. 그러셨잖아요!”
“그건…!”
데이몬은 어이가 없는지 말문이 막힌 눈치였다. 시에나 역시 제가 생각하기에 좀 치사하게 나온 것 같긴 하지만 딴에는 이 난감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거였다.
“그러니까 안 알려 드릴 거예요.”
“…치사해.”
“예, 저는 치사해요.”
“엄청 치사해.”
“예, 저는 엄청 치사합니다.”
데이몬은 어지간히 궁금한지 안달이 나 있었지만 시에나는 단호하게 작은 힌트조차 주지 않았다. 둘이 아옹다옹하고 있을 때 배신자가 문을 두들기더니 들어왔다.
“차 더 가지고 왔습니다.”
둘은 동시에 아이작을 째려보았다. 아이작은 헛기침을 하더니 찻주전자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차를 더 드실 시간이 없으실 것 같은데요.”
“왜?”
“라이노라는 사람의 어머니가 계신 곳을 찾았답니다. 지금 가시겠습니까?”
둘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시에나가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 출발하자.”
* * *
밀을 수확한 밭은 황량했다. 이삭조차도 모두 주워 갔는지 텅 빈 밭을 마차 안에서 바라보며 시에나는 상념에 잠겼다. 데이몬이 사정을 말하자 파블로 백작은 자신 전용 의원까지 빌려주었다. 귀족 출신 의원은 평민을 치료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출발할 때부터 내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의원뿐만 아니라 마차 안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침울했다.
시에나 일행이 탄 마차 뒤를 따르는 다른 마차에는 호위 몇몇과 함께 라이노의 시신이 들어 있었다. 보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권유를 모두 무시하고 열었던 관 속의 라이노는 뭐가 그리 좋은지 미소 짓고 있었다. 얼굴 밑은 참혹하고 끔찍했지만. 그 모습이 떠오른 시에나의 가슴이 쓰려 왔다.
덜컹.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의원은 비명을 질렀다.
“어억. 아이고, 아파라. 갈 때쯤엔 내가 저 관 안에 있겠네.”
“바로 넣어 주기 전에 입 좀 다물게.”
데이몬이 으르렁거리며 의원에게 쏘아붙였다. 의원은 찔끔했는지 고개를 돌리면서도 연신 툴툴대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들이 타고 있는 마차는 몹시 허름하고 낡은 마차였다. 최고급 마차를 빌려주겠다는 파블로 백작을 만류하고 병사들의 시체를 집으로 보내는 운반용 마차를 탔다.
이유는 간단했다. 저번에 고급 마차를 타고 갔다가 아이작과 노파가 화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진 마을이었기에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었다. 마차의 외관은 가축 먹이 정도를 운반하기에 적절해 보였기에 아무도 그 안에 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타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마차는 10분여 정도 가다가 허름한 집 앞에 섰다. 갑자기 찾아온 낯선 방문객들에게 놀랐는지 허름한 집에서 중년의 여성이 몸을 절뚝거리며 뛰쳐나왔다. 여자는 방문객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라이노!”
그녀는 두리번거리다 의원과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의원의 차림새를 보고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시에나는 의원도 허름한 옷을 입을 것을 권유했지만 평민 옷을 입으라 할 거면 차라리 죽이라는 강경한 입장에 차마 막지 못했다. 의원은 간사하게 난 수염을 쓰다듬으며 거만하게 여자를 훑어보았다.
“귀하신 분들께서 여기는 어쩐 일로….”
여자는 무릎을 꿇고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시에나는 이 여인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깨물었다. 당황하고 있는 새에 데이몬이 시에나의 옆에 붙었다.
“호, 혹시 제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시에나와 데이몬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여인은 애가 탄다는 듯 재차 물어 왔다. 결국 시에나 대신 데이몬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라이노의 가족인가?”
“예, 제가 라이노의 어미 됩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대의 아들은 나를 지키다 적의 칼에 맞아 사망했네.”
데이몬의 말에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제 아들은 다른 마을의 벼 베기를 다녀온다고 했는데요. 제 아들은 아직 전쟁터에 나갈 수 있는 나이가 못 됩니다.”
라이노가 자신을 걱정할 어머니를 위해 거짓말을 하고 전쟁터에 몰래 나온 모양이었다. 여자는 라이노의 죽음이 청천벽력처럼 느껴졌는지 넋을 잃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 말씀 좀 해 주세요. 나리. 제 아들이 왜 무엇 때문에 죽었다는 건가요?”
“말한 그대로네. 자네의 아들은 스툼과 레네톤 사이의 영지전에 참여했고, 3일 전 밤에 나를 지키다 사망했네.”
“말도 안 돼….”
절망 가득한 말에 여자는 망연자실하게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에나가 그런 여자를 일으키려 애썼다.
“바닥이 차갑습니다. 몸도 성치 않은데 안으로 들어가 얘기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 아가씨. 제 아들이 왜 전쟁터에 나갔던 건가요? 제 아들은 피 보는 것도 무서워하던 아인데….”
여자가 시에나의 옷자락을 잡으며 흔들리는 눈동자로 물었다. 시에나가 당황하며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하자 의원이 여자의 손을 거칠게 떼어 내며 말했다.
“당신 약값 벌려고 나갔다 뒤진 거지! 쯧쯧, 어미가 되어서는 자식 잡아먹고 잘하는 짓이요. 빨리 진료하게 안으로 들어가쇼!”
의원은 시간을 빼앗기는 게 짜증이 나는지 신경질을 내며 여자를 안으로 이끌려고 했다. 시에나의 눈에 불이 붙었다. 혹시나 싶어 의원에게 조심스레 이야기했던 사정을 그는 약점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여자는 한순간에 희망이 사라진 사람처럼 안색이 새파래졌다. 여자의 회색 눈에 순식간에 맑은 액체가 고였다.
“말도 안 됩니다. 제 아들이 왜 제 약값을… 신경 쓸 문제가 아니라고 했는데…! 그랬는데…!”
여자는 정신이 나가 버린 듯 혼자 중얼거렸다. 시에나는 의원을 노려보았다. 데이몬 역시 화가 나는지 딱딱한 목소리로 의원을 향해 쏘아붙였다.
“입조심하게. 잘못 놀렸다간 내 칼끝이 그대의 입술을 날릴 수도 있으니 말이야.”
의원은 데이몬의 경고에 찔끔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 강약약강의 모습에 시에나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에나가 여자를 흙바닥에서 일으키려고 손을 잡았다. 평생 밭일을 해 온 듯 거칠고 두터운 손이었다. 자세히 보니 지문조차 닳아 없어져 있었다.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데 어째서 이렇게 가난해야 하는 걸까. 시에나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바닥이 차요. 일어나세요.”
“저, 저어. 아가씨. 제 아들은 그럼 어디에 있나요?”
여자는 혼절할 것처럼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시에나에게 물었다. 시에나는 차마 답은 해주지 못하고 뒤의 마차를 힐긋 보았다. 위태위태해 보이는데 말해 줘도 되는 걸까.
“저기 있습니까? 저기 있는 거지요?”
여자는 시에나가 잠깐 눈길을 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시에나가 한참을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 옆에 서 있던 마부 둘이 관을 꺼내라는 소리인 줄 알고 마차를 열어 여자의 앞으로 관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자의 몸이 격렬하게 덜덜 떨렸다.
“관을 열까요?”
“아니요. 지금은… 조금만 진정하고….”
“여, 열어 주세요.”
마부들이 상반된 둘의 대답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여자가 무릎으로 기어가 관 앞에 서서 혼자 힘으로 기어코 관을 열기 시작했다. 못질이 되지 않은 관은 힘을 가하자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여자의 두 눈에서 쉼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이윽고 관이 활짝 열렸다. 3일이 지났지만 온도가 낮고 건조한 데다 방부처리가 되어 있어 시체는 조금도 썩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참혹함이 가려진 건 아닌지라 시에나는 걱정스럽게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이제는 어떤 미동도 없는 자신의 아들을 응시했다.
“아… 아아아… 아아…!”
관을 잡은 여자의 손이 달달 떨렸다. 여자는 높고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치다 그대로 눈동자를 까뒤집으며 혼절했다. 시에나와 데이몬이 다가가 여자가 차디찬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기 전 붙잡았다.
“내가 안을 테니 안으로 들어가자.”
데이몬이 여자를 업으며 말했다. 시에나가 참혹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 * *
여자의 집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벽에는 군데군데 금 간 구석도 있고 천장에는 쥐가 사는지 쿵쿵거릴 때마다 이따금 모래가 떨어졌지만, 열심히 쓸고 닦는지 바닥은 왁스 칠을 한 것처럼 반짝였다. 데이몬이 여자를 침대에 눕히자 침대 프레임이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의원이 치료하기 위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별 이상은 없군요. 큰 충격을 받아 기절한 듯합니다. 깨울까요?”
“아뇨. 지금 치료를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럼 촉진하겠습니다.”
성의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던 의원은 데이몬이 입술을 잘라 버린다는 말에 좀 겁을 먹었는지 여자를 제대로 촉진했다. 미동 없이 누워 있던 여자의 몸이 정강이를 만지자 아프다는 듯 움찔거렸다. 의원이 혀를 끌끌 찼다.
“심각한 건가요?”
“심각해질 게 아닌데 제때 치료받지 못해 심각해진 겁니다. 쯧쯧. 미련하게 얼마나 이러고 산 건지….”
시에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여자의 정강이에는 전체적으로 농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푸르스름했을 농은 가득 들어차 거의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의원이 왕진 가방을 달칵 열고 안에서 리넨 천과 소독약을 꺼냈다.
“치료 도중 깨어날지도 모르니 꽉 붙잡아 주십쇼.”
“네.”
시에나가 여자의 팔을 붙잡았다. 여자의 팔은 나뭇잎이 다 떨어진 겨울날의 나뭇가지처럼 앙상했다. 그 사실이 시에나를 더 슬프게 했다. 의원이 여자의 정강이에 난 상처 밑에 천을 대고 소독약을 뿌리려던 차였다. 여자의 눈이 번쩍 뜨이더니 소독약이 닿기 전 무릎을 확 세웠다.
“어이쿠!”
여자의 무릎에 턱을 제대로 맞은 의원의 몸이 기우뚱하다 이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데이몬이 뒤늦게 여자의 발목을 잡았지만 의원의 턱은 이미 빨갛게 부풀어 오른 뒤였다. 소독약은 여자가 아들을 기다리며 반짝반짝하게 닦아 놓은 바닥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의원은 대로한 얼굴로 여자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인가!”
“저, 저는 치료 못 받습니다. 아니, 안 받습니다!”
여자는 의원의 호통에 몸을 움찔하면서도 지지 않고 대답했다.
“지금 자네가 흘린 소독약이 얼만지나 알고 그러는 건가? 알량한 자존심 세우지 말고 기회가 왔을 때 받아!”
의원은 오기가 생겼는지 억지로 여자의 다리를 붙잡고 소독약을 부으려고 했지만 뼈만 남은 여자는 의외로 피지컬이 좋았다.
“하, 하지 마십시오!”
퍽.
여자의 발이 이번엔 의원의 뺨을 강타했다. 소독약이 한차례 허공을 난 뒤 바닥으로 낙하해 콜콜콜 쏟아졌다. 의원의 얼굴이 시뻘건 도깨비처럼 변했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감히 평민 주제에…!”
의원은 여자의 뺨을 내리치려 손을 들었다가 데이몬에게 저지당했다. 의원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이, 이 미친 여자가 한 짓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환자지 않나. 이해하게.”
“제가 방금 이렇게 맞는 걸 보고도 어떻게 그러십니까!”
“자네를 때린 게 파블로 백작이라도 지금과 똑같이 했겠나?”
“아니, 귀족과 평민이 같습니까?”
“저 여인은 나를 구한 은인의 가족이네. 나와 같다고 생각하고 치료하게.”
의원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는지 오만상을 썼다.
“저는 치료받을 마음이 없는 사람을 치료하지는 못합니다. 설득해주시지 않는다면 치료는 못 합니다!”
의원은 쿵쿵 발소리를 내며 밖으로 향하다 문을 쾅 닫았다. 어찌나 세게 닫았는지 집 전체가 흔들리며 먼지가 우수수 쏟아졌다. 분위기는 급속도로 싸해졌다. 여자는 어쩔 줄 모르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신경 써 주셨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왜 치료를 받지 않으려는 건지 물어도 될까요?”
시에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여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리 말씀이 전부 맞습니다. 아들 잡아먹은 제가 무슨 염치로 치료를 받습니까. 몸이 멀쩡해지더라도 마음이 문드러질 텐데요.”
낡고 헤진 이불 위에 눈물이 동그랗게 맺혔다. 시에나는 그런 여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가만히 얹었다. 여자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자세히… 자세히 이야기해 주세요. 제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라이노가 왜 죽어야 했는지….”
시에나와 데이몬이 눈을 마주했다. 이 진실을 알려 줘도 괜찮은 걸까. 어떤 게 옳은 일인지 가늠하지 못하고 있을 때 데이몬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맨 처음 라이노를 만난 건….”
여인은 데이몬의 말을 경청했다. 때때로 흠칫거리거나, 눈물을 보이기도 했지만 아까처럼 혼절할 것처럼 위태위태해 보이지는 않았다. 데이몬이 이야기를 마치고 나자 여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라이노는 어리지만 정말 용감한 사람이었어요. 그가 없었다면 우리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라이노를… 용감하게 키워 주셔서 감사해요.”
시에나는 여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했다. 여자는 깊은 슬픔에 잠긴 눈으로 시에나를 응시했다. 시에나의 눈에도 어느새 맑은 눈물이 고였다. 시에나와 여자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감정적 동질감을 느꼈다.
“그러니 어머니께서도 라이노가 원하는 걸 해 주세요. 편히 눈감을 수 있도록요.”
여자는 시에나의 말에 다시금 눈물을 터뜨렸다. 힘없이 무너지는 여자를 시에나가 꽉 끌어안아 주었다. 가늘게 떨리는 여자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시에나가 조용히 볼을 적셨다.
* * *
“아이참, 나오지 마시라니까요.”
“그래도 이렇게 치료까지 다 해 주시고 돈까지 주셨는데….”
“쉿. 돈 드린 건 비밀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시고 혼자 가지고 계시다 꼭 필요할 때 조금씩 꺼내 쓰세요.”
시에나는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여자는 푹 젖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에나보다 열 살은 많아 보이는데도 여자는 말을 잘 들었다. 그 순종적인 태도에 시에나가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예, 예에. 알겠습니다.”
“저 의원분이 지속적으로 찾아와 주시겠지만 너무 아프시면 신전에 가시거나 제가 알려 드린 주소로 편지하세요.”
“지금도 벌써 다 나은 것처럼 편안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네, 그럼 저흰 가 볼게요. 다시 찾아뵐 때까지 건강하셔야 해요.”
여인의 붉어진 눈시울을 바라보는 시에나의 코끝이 또 시큰해졌다. 마차에 올라탄 시에나가 여인에게 손을 흔들었다. 여인도 지팡이를 짚은 채 절뚝거리며 연신 고개를 굽신거렸다.
“이랴!”
마차가 고개를 넘어갈 때까지 여인은 여전히 마차를 바라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시에나가 코끝을 문지르며 낡은 의자에 기대었다. 데이몬이 시에나가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몸을 앞으로 빼 주었다. 의원은 투덜대는 것도 지쳤는지 침묵을 택하고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다.
시에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몸은 피곤했지만 정신은 맑았다. 여자의 상처는 멍에서부터 시작했다고 했다. 낫에 베인 상처가 낫지 않고 오래 간다 싶었더니, 손쓸 도리 없이 농이 차올랐다.
그 후로 며칠 동안 고열에 시달리고 목숨은 건졌지만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중심에 박힌 까만 농은 마치 살처럼 굳어 버렸고, 짜려고 해도 좀처럼 짜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내 더 넓게 퍼지며 거기에서 새로운 농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몇 년을 살아온 모양이었다.
여자가 치료를 결심한 후 의원은 툴툴대면서도 착실하게 그녀를 치료했다. 데이몬이 뒤에서 지켜본 게 어지간히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주변을 소독 후 농이 있던 부분을 도로 째 전부 짜낸 후 그 안을 약으로 채웠다.
비싼 포션을 평민에게 쓴다며 투덜거리더니 말마따나 효과는 굉장했다. 10분도 되지 않아 새살이 차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그 약은 전쟁 시 장군급 이상이 쓸 수 있는 전투용 포션이라고 했다.
성수를 듬뿍 썼기 때문에 중견 신관의 신성력 이상의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했다. 가격 역시 대단해서 들었을 때에는 데이몬조차 조금 흠칫했을 정도였다.
신전의 약 효과는 대단했지만 평민들은 평생 꿈조차 꿀 수 없는 금액이었다. 포션 하나가 평민들의 집 다섯 채를 호가했으니 말 다 했다. 그런데 살 돈이 없어 직접 만들면 마녀로 잡혀가 종교 재판에 회부된다니 이 얼마나 부조리한 일인가.
만약 라이노의 어머니가 다쳤을 때 시에나나 아이작의 할머니가 주변에 있었다면 약초로 치료를 했을 거고 라이노가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 나갈 일도, 죽게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불법이기는 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 위에 있는 법이라는 게 정말 옳은 일인가?
시에나는 마차 창문에 턱을 괴었다. 산 너머로 석양이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여명은 더욱 밝은 빛을 내며 단풍이 든 산을 비추었다. 저 산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을 고칠 약초와 열매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약을 쓰지 못하고 죽어 간다.
그러나 시에나는 이 약초들을 쓸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만약 시에나가 그 지식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혹은 약을 저렴하게 판매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게 될까. 잠시 상상하던 시에나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한편으로는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자신이 알기로 책의 마지막까지 평민들을 위한 포션은 발명되지 않았다. 이렇게 끼어들어도 괜찮은 걸까 무섭기도 했다. 그러나 책 속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치부하기에는 이미 데이몬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시에나를 포함해서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 그들의 삶에 끼어들자.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결심한 시에나의 눈이 아침 햇살을 받은 나뭇잎 위의 이슬처럼 투명하게 반짝였다. 그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 생각하자 무거운 압박감에 가슴은 무거웠지만 줄어든 죄책감에 머리는 가벼웠다. 시에나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느새 마차는 성벽을 통과해 성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빛이 잦아든 하늘은 캄캄했다. 데이몬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시에나, 다 왔어. 밖은 추우니까 옷 단단히 여며.”
“네. 그런데 도련님, 지금 시간이 많이 늦었을까요?”
데이몬이 태양의 기울기를 가늠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늦진 않았어. 저녁 시간 전이니까. 왜?”
“저녁 식사가 끝나고 잠시 공작님을 뵙게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숙부님과 단둘이?”
“네.”
“알았어. 말씀드려 볼게. 아마 가능하실 거야.”
“네, 감사해요.”
시에나는 살풋 웃으며 감사를 전했다. 데이몬이 어설픈 미소로 화답했다. 마차는 어느덧 성 앞에 도착했다.
* * *
쪼르륵.
작게 봉오리 져 있던 국화가 따뜻한 물을 만나 활짝 피어났다. 화사하게 피어나는 분홍색 꽃을 한참이나 응시하던 시에나가 침을 꿀꺽 삼키고 반대편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 있는 공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시에나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만남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딱딱하게 나올 필요도, 긴장할 것도 없네. 그냥 데이몬의 가족이라 생각하고 편하게 대하게나.”
“그러기에는… 제가 오늘 드릴 부탁이 너무 염치가 없습니다.”
공작은 어떤 부탁인지 궁금하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나 역시 그대에게 부탁이 있으니 편히 말해도 괜찮네.”
“아, 그럼 공작님께서 먼저 말씀해 주세요.”
시에나는 한결 안심한 기색으로 말했다.
“흐음, 그래도 괜찮겠나?”
“네, 그럼요.”
시에나는 꽃차를 호록 들이켜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에나, 데이몬을 어떻게 생각하지?”
차마 삼키지 못한 꽃차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시에나는 몹시 당황해서 찻잔을 든 손을 달달 떨었다.
“네? 네? 데이몬 도련님을요?”
의식하기 시작한 지 겨우 하루가 되었을 뿐인데, 관심법이라도 있으신 건가. 시에나의 눈이 핑글핑글 돌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시에나를 보며 공작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에 데이몬은 그대에게 강한 애정을 품고 있는 듯해.”
“네…? 데이몬 도련님이요?”
도련님은 아니라는데 다 왜 주변에서 난리인 걸까.
“그리고 내가 알기로 그대 역시 데이몬을 좋아하지.”
입 안에 차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하는 말마다 폭탄이니 잠시 입 안을 비워 둬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시에나가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 좋아한다는 게 어떤 뜻인가요?”“좋아하는 건 그냥 좋아하는 거지. 가족애든, 사랑이든, 아니면 다른 것이든 말일세.”
아아, 그런 뜻인가. 시에나는 공작이 모든 걸 알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공작이 이내 낮게 목소리를 깔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데이몬이 지금까지 그대에게 강한 집착을 보인 적이 있지 않았나?”
“강한 집착… 이요?”
“그래. 주변 사람들도 신경 쓰지 않고 체면도 차리지 않고 오로지 그대만을 찾았을 때 말이야.”
시에나는 공작의 말에 과거를 빠르게 회상했다. 생각해 보니 있었다. 로하엘을 만난 첫날, 사람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품에 안겨 함께 있자고 칭얼댔지.
“표정을 보아하니 있었던 것 같군.”
“예, 있었어요. 그렇지만 도련님이 아프셨을 때고… 아직 어리신 분이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어요.”
데이몬을 변호하며 시에나는 혹 공작이 데이몬을 나쁘게 보진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공작의 입에서 나온 말은 시에나의 생각과는 다른 말이었다.
“시에나,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비밀로 해 줄 수 있겠나?”
“어… 어떤 말씀인데요?”
“마르바스 가문의 비밀에 대한 일이네.”
황가의 비밀에 대한 일이라는 말에 시에나는 잔뜩 긴장해 있다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럴게요.”
“그래, 고맙군. 흐음, 어디서부터 이야기 해야 할까.”
공작은 고민하다가 이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슬쩍 미소 지었다.
“시에나, 마르바스 가문은 대부분 단 한 명의 사람만을 반려로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후궁을 들이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래,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음… 결혼한 상대를 정말 사랑해서요?”
“정답이네. 마르바스 가문은 자신의 사람에 대한 집착이 무척 강해. 특히나 감정이 강한 사춘기 때 그 정도가 심해서 이성과 동성을 가리지 않고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모든 마음을 주지. 이 사실은 엄청난 약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
“그런데 그 사실을 저에게 알려 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내 생각에 데이몬이 지금 그대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거나, 혹은 곧 그런 감정을 느낄 것 같거든.”
“네에?”
시에나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데이몬이 자신에게 집착하게 된다고? 오히려 최근까지만 해도 로하엘과 사귀고 있다는 오해 때문에 자신을 멀리하던 데이몬이었다. 물론 지금은 오해가 풀려 괜찮아지기는 했어도 데이몬이 시에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았을 때 집착이라는 단어가 썩 어울리지는 않았다.
“그대가 혹 데이몬에게 감정이 있다고 해도 지금과 같은 상태로 쭉 같이 있다면 결코 좋은 결과가 나진 않을 걸세. 혹 리엔 황녀의 이야기를 알고 있나?”
“아니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쉬쉬하던 이야기니까. 지금으로부터 90년쯤 전에 일어난 사건일세. 리엔 황녀의 말동무였던 영애가 혼기가 차 약혼을 했는데, 사춘기를 오로지 그 영애와만 보내 리엔 황녀는 그 영애에게 집착이 대단해 약혼을 파기할 것을 종용했지.”
“그래서 그 영애는 약혼을 파기했나요?”
시에나가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공작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영애는 자신에게 집착했던 황녀에게 질렸기 때문에 결혼하는 게 황녀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했던 모양이야. 그대로 결혼식까지 진행했고, 결국 결혼식 3일 전 리엔 황녀는 그 약혼자를 살해했네.”
“세상에….”
당황한 시에나가 너무 놀라 딸꾹질까지 했다. 공작이 그런 시에나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약혼자를 잃은 영애는 미쳐 버리고, 황녀는 탑에 유폐된 지 2년 만에 지병으로 사망했네.”
너무나 잔혹한 결말에 시에나가 할 말을 잃었다.
“그 이후로 마르바스 가문 사람들은 집착력에 대해 조금 진지하게 연구하기 시작했지.”
“…그래서 해결 방안을 찾았나요?”
“완전한 해결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춘기 전후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폭을 넓혀 애정을 분산시키는 방법을 쓰는 게 가장 효과가 좋은 것으로 알려졌네.”
“다행이네요….”
아주 방법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아 시에나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안심하고 있던 시에나에게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그렇다면 데이몬 도련님도 그래야 하지 않나요?”
“그게 바로 내가 그대에게 부탁하고 싶은 점이네.”
“네? 제가 어떤 걸 해 드리면 되는 건가요?”
시에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작은 힘든 이야기를 꺼내려는 듯 조금 망설이다 이내 힘 있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데이몬을 아카데미에 보낼 수 있게 설득해 주게.”
“도련님을… 아카데미에요?”
“그래. 이건 데이몬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대를 위해서 이기도 해. 데이몬의 집착이 더 강해진다면 훗날 생길지도 모르는 그대의 소중한 사람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니.”
리엔 황녀의 이야기를 떠올린 시에나가 잘게 몸을 떨었다. 공작은 자기 가문의 약점을 시에나에게 밝히면서까지 시에나를 설득하려고 했다. 시에나도 여기에 대해서는 피드백을 주어야 했다.
“내 생각에 데이몬은 그대에게 떨어지려고 하지 않을 것 같네. 그대가 마음을 독하게 먹고 끊어 내야 할 거야. 그 과정이 쉽지 않으리라는 건 알고 있네. 그렇지만 데이몬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많은 교류를 해야 해. 이런 부탁을 하는 게 염치없다는 생각도 들지만, 숙부로서 부탁하네.”
너무나 저자세로 나오는 공작을 보며 시에나는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데이몬에게 그렇게까지 소중한 존재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 알기로 해밀턴 아카데미의 교육 과정은 6년이었다. 6년 후 데이몬은 열여덟, 시에나는 스물하나였다.
보내는 게 당연하지만 어쩐지 보낸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텅 빈 것 같아지는 이 기분은 뭘까. 시에나는 그가 자신에게 꽤 큰 존재가 되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가지 않고 그가 자신의 곁에 오래 있어 주었으면.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욕심이었다. 데이몬을 위해서는 그를 보내야 하는 게 맞았다. 시에나는 긴 망설임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걱정 마세요. 제가 잘 이야기해 볼게요.”
“고맙네. 정말 그대에게 은혜를 몇 번이나 입었는지.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네.”
“아직 성공한 것도 아닌걸요. 그리고 지금까지 해 주신 걸로도 충분해요.”
진심이었다. 아이작을 구하는 건 데이몬의 부탁이기도 했지만 시에나의 바람이기도 했다. 결국 부탁을 들어준 건 공작이었고 책임을 진 것도 공작이었다. 그러면서 그 공치사를 시에나에게 옮기는 그의 그릇은 얼마나 넓은 건지. 시에나는 자신의 앞에 선 공작의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듯한 착각이 들어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크흑. 데이몬 도련님이 이런 사람으로 성장하셔야 할 텐데.
“충분하지 않네. 아직 뭘 갚았다고 할 정도도 아닌 것을.”
“정말 충분해요.”
충분하다며 사양하고 싶은데, 이 사람은 왜 자꾸 견물생심이 생기게 하는 걸까. 시에나는 입이 계속 간질거리는 걸 느꼈다.
“저어, 공작 각하.”
“그래. 말해 보게.”
“제가 지금 감이 잡히지 않아서 그런데, 공작님께서 생각하고 계신 보상의 정도가 어느 정도의 규모일지 감히 물어도 될까요?”
시에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내었다. 공작은 손으로 턱을 괴고 살며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정도라니, 범위가 좀 광범위한데.”
“으음. 그러니까, 아. 흑요석 광산으로 치면 1푼 정도라든지요.”
“흑요석 광산이라니, 말도 안 되지 않나.”
공작이 당황스럽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아이고, 흑요석 광산도 그 날도둑놈한테 빼앗기시는 바람에 심기가 불편하실 텐데. 괜히 말했다.
시에나가 급히 후회하며 말을 돌렸다.
“아, 그냥 예를 든 거라서요. 저는 정말 사과 한 쪽만 주셔도 감사하죠.”
“흑요석 광산은 제외하고 사파이어와 다이아 광산은 주어야… 가만있어 보자, 북부 쪽에 남아 있는 광산이….”
공작이 본격적으로 광산을 줄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아 기겁한 시에나가 황급하게 그를 막았다.
“아니요. 공작님 그냥 예만 든 거였어요! 진짜요!”
“정말인가?”
“예, 그럼요. 저 그리고 그렇게까지 욕심이 많진 않아요. 어린 여자애 혼자 그렇게 많은 돈 쌓아서 뭐 하겠어요. 위험하기만 하지.”
“그건 일리 있군. 그럼 그대의 앞으로 기사단을 하나 창설해서….”
“왁, 진짜 괜찮다니까요! 전 정말 광산을 받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두 번 은혜 입었다가는 집안 살림을 다 거덜 낼 것 같은 공작의 폭주를 시에나는 한참이나 말려야 했다. 아아, 공작님. 공작님은 까치가 아닌데 왜 자꾸 머리로 종을 치려고 하세요….
시에나는 자신의 본론을 급히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산은 있어서 나쁠 건 없는데… 하나쯤 가지고 있어도….”
“어휴, 하나도 너무 과해요. 공작님은 통이 너무 크세요. 파블로 백작님의 표정을 보셨잖아요. 1할인데도 불구하고 하늘로 날아갈 것 같던걸요.”
“그렇지만 속을 까보면 그렇게 좋을 것도 없을 텐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파블로 백작에게 준 흑요석 광산에서 나오는 흑요석은 황궁 이외의 곳에서는 판매 할 수 없게 되어있네.”
의아한 말에 시에나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자 공작이 웃으며 찬찬히 설명해주었다.
“흑요석이 황실의 상징이라는 건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어요.”
“그래, 그래서 황실은 황실을 제외한 흑요석에 대한 거래를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있네. 다른 영지에서 흑요석 광산이 발견 되더라도 조용히 황궁에 넘기게 되어 있어. 물론 적당한 가격을 치르긴 하지만.”
그거, 폭거 아닌가요.
“혹 원석을 발견한다 해도 판매는 가능하지만 오직 황궁에만 판매할 수 있고, 금액도 정해져 있네. 그렇다보니 흑요석 광산을 발견했을 때 그냥 황궁에 넘겨버리는 거고.”
“그렇다면, 파블로 백작님이 1할을 받는다 한들 떼돈을 벌지는 못하신다는 거네요?”
“그래. 관리에 드는 비용 때문에 오히려 손해를 볼 수도 있겠지.”
“파블로 백작님은 그걸 전혀 모르시고요.”
“그렇지. 계약서는 이미 내 손에 있고 말일세.”
공작이 책상 위의 계약서를 톡톡 가리켰다. 빙긋 웃는 공작의 뒤에 악마가 보이는 듯했다.
“뭐, 황실이 흑요석과 호박 광산에만 유독 유난을 떠는 걸 아니 귀족들도 이해하는 게지. 못하면 어쩌겠나. 귀족 작위를 반납할 것도 아니고.”
공작의 거침없는 언사에 시에나는 입을 딱 벌렸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백작은 속은 거다. 파블로 백작을 몰아치며 거래를 진행했던 공작이 은근히 시에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남부나 중부면 모를까, 함께 타국으로부터 국경을 지켜야 할 북부끼리 그렇게 싸우니 북부의 관리인으로서 좋게 보이지가 않아서 그랬네.”
“그렇지만 파블로 백작님이 이 사실을 알고 공작님께 나쁜 감정을 품으면 어떡해요?”
“내 감정이 더 나쁘니 괜찮네. 그리고 그대의 생각보다 난 그렇게 약하지 않아. 계약서에 적힌 5년은 그저 유예 기간일 뿐이야. 달라지지 않는다면, 제거해야겠지.”
그렇게 말하는 공작의 얼굴은 고고하면서도 한없이 잔혹했다. 그러나 시에나가 두려움에 떨자 바로 표정을 풀면서 그녀를 부드럽게 달랬다.
“그러니 내가 흑요석 광산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너무 서운해 하지 말게. 다 자네를 생각해서 그랬던 것이니.”
“괜찮아요. 저 정말 광산 원한 적 없어요.”
“그렇다면 그대는 뭘 원하지? 원하는 게 아예 없지는 않을 게 아닌가.”
“아, 원하는 게 있긴 하지만….”
시에나가 부담스러워하며 말끝을 흐리자 공작은 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섬인가?”
“아니요!”
“나라?”
“아니요!”
“그렇다면 작위?”
“아니, 아니요….”
“황위까지는 조금 힘든데….”
시에나는 그제야 그가 반쯤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샌가 공작의 유려한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에나는 도끼눈을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큭큭, 다문 입술 사이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미안하네. 자네가 너무 귀여워 장난을 좀 쳐 봤어.”
시에나는 입을 삐죽였다. 아까 파블로 백작을 들었다 놓았다 했던 사람이 자신에게는 이렇게 스스럼없이 장난을 치다니…. 공작은 참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 장난 다 끝나시면 말씀드릴게요.”
“이런, 기분이 상했군. 사과하지.”
시에나가 침울하게 가라앉자 그는 당황하며 시에나를 달래려고 했다. 그렇게 심각한 일까지는 아니었기에 시에나는 금세 표정을 풀었다.
이제 시에나의 부탁을 말할 때였다. 시에나는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자신이 없었다.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을 공작이 과연 이해해 줄까. 데이몬과 닮은 공작의 얼굴과 그의 뒤에 있는 진녹색 태피스트리 사이로 초점이 흔들거렸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공작은 참을성 있게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이윽고 시에나의 입이 조심스레 열렸다.
“사실 공작님께서 이 의견을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어요.”
“어려운 부탁인가 보군.”
“예. 쉽지 않을 것 같아요.”
“괜찮으니 말해보게.”
“저는… 약을 팔고 싶어요.”
공작은 뜬금없는 이야기를 들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정말 어려운 부탁이긴 하군.”
시에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어려운 거겠지.
“역시 어렵겠지요…?”
시에나의 맑은 눈망울을 보며 공작은 끄응, 한숨을 쉬었다. 그가 한참이나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계 초침이 40여 번 정도 째깍댔을 때 공작이 입을 열었다.
“약을 하는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하는 입장으로서는 썩 쉽지만은 않지만, 까짓거 못 해 줄 것도 없지.”
“저, 정말이세요?”
시에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런 시에나를 보며 공작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어떤 약을 유통하고 싶은가? 양귀비? 대마? 아니면 코카?”
할 말을 잃은 시에나가 입을 딱 벌렸다. 공작은 몹시 당황한 시에나를 보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하게 말했다.
“마약성 식물을 얘기한 게 아닌가?”
“당연히 아니에요….”
“이거 미안하군. 약을 팔고 싶다기에… 그럼 그대는 어떤 약을 만들고 싶은가?”
시에나는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평민들을 위한 의약품을 공급하고 싶어요. 평민들이 살 수 있을 만한 저렴한 금액으로요.”
“성수가 들어가면 저렴하게 공급하기는 힘들 텐데?”
“제가 만드는 약은 성수가 들어가지 않아요.”
시에나는 주머니 속에서 약통 몇 개를 꺼내었다. 혹시나 하고 마차에 여분을 두고 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약이었다. 탁자 위에 약통을 꺼내 놓은 시에나는 품 안에서 작은 주머니칼을 꺼내었다. 칼집에서 꺼낸 날붙이가 시리도록 파랬다.
슥, 말릴 새도 없이 시에나의 손가락이 베였다. 벌어진 상처 사이로 핏방울이 배어 나오는데도 시에나는 표정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공작은 조용히 시에나의 행동을 관망했다.
시에나는 능숙한 솜씨로 얇은 리넨 천에 소독약을 부은 후 상처 위에 덮었다. 지혈을 한 게 아니었기에 소독 후에도 핏방울은 조금씩 나고 있었다. 붉은 피 위에 흰 지혈제를 뿌리자 피는 금세 멎어 들었다. 공작이 신기하다는 듯 시에나의 행동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시에나는 그 위에 연한 초록빛을 띤 연고를 발랐다. 센텔라 추출물을 이용해 만든 연고였다. 상처 위에 연고를 듬뿍 발라 준 시에나가 공작을 향해 상처를 보여 주었다.
“상처가 낫는 건 성수보다는 훨씬 느리지만, 가격 역시 훨씬 저렴합니다. 이 약들의 재료는 전부 산에서 구할 수 있는 거거든요.”
“굉장하군.”
공작은 한숨처럼 말했다.
“어디서 이런 걸 배웠나?”
“그건….”
시에나가 머뭇대자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벌하고자 하는 건 아니네.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니. 산에서 재료를 전부 구할 수 있다면 가격은 정말 저렴해지겠군.”
“네. 또 사용 기한을 길게 만들어서 상비약처럼 가지고 있게 하고 싶어요.”
한국의 웬만한 가정집에는 전부 구비되어 있던 작은 구급상자. 그 구급상자 안에 든 소독약과 연고가 없어 이 세계에서는 너무 많은 목숨들이 꺼졌다.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오래 쓰기까지 하는 약이라… 확실히 치유는 오래 걸린다고 해도 신전의 약에 비해 지지 않는 메리트가 있군.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판매한다면 그대는 뭘 먹고 살려고 그러나.”
“으음… 자세히 생각해 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입에 풀칠하고 살 수 있지는 않을까요.”
시에나의 순수한 대답에 공작은 영 마뜩잖다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이렇게 불안해서야, 애도 없는데 물가에 애를 내놓은 기분이군.”
“하하.”
“잠시 생각해 볼 시간을 줄 수 있겠나?”
“아, 그럼요. 굳이 오늘 안에 대답해 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렇게 오래 걸릴 일은 아닌 것 같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게나.”
“네에.”
공작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톡, 토톡. 검지로 원목 테이블을 튕기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났다.
“그럼 그대가 나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
“신전의 약을 제외한 약을 만드는 것은 불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합법적으로 약을 만들고 싶어요. 만들어도 잡혀가거나 종교 재판에 회부되지 않게요.”
“자본은 있나?”
“공작님께서 주신 돈으로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시행착오가 있을 테니 처음부터 크게 벌릴 생각은 없고, 작게 시작하기에는 충분해요.”
시에나는 막힘없이 대답하면서도 그녀는 그렇게 대답할 수 있는 자신에게 놀랐다. 오래 고민해 왔던 문제이긴 하지만 어쩐지 두루뭉술하게 느껴졌었는데, 공작 앞에서 이야기하다 보니 오히려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 이 일을 정말 해 보고 싶었구나.’
콩콩,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는 확신에 가슴이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공작은 깊이 생각하는지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팼다. 시계 초침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신전이 마녀 사냥을 시작한 지 수십 년이 지났지. 그대는 겪어 보지 못했겠지만 그건 정말로 끔찍한 일이었네.”
마침내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썩 긍정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혹 거절일까. 시에나는 불안한 기색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배가 아픈 옆집 아이를 치료해 주었다는 이유로 잡혀가고, 자기 자식을 치료했다는 이유로 잡혀가고,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없었던 끔찍한 나날이었지.”
공작은 침통한 표정으로 그때를 회상했다.
“당장 집 앞에 있는 언덕에 배앓이로 죽어 가는 자식을 살릴 약초가 천지인데도, 그렇게 자식을 보냈어야 했어. 만약 약초를 써서 아이를 살린다고 해도 재판에 회부되면 가족들이 전부 죽을 수도 있었으니.”
“끔찍하네요….”
“그래. 그렇지만 지금의 상황이 더 낫다고 볼 수는 없지. 이제는 부모가 아파 죽어 가도 쓸 수 있는 약초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니.”
공작이 머리를 짚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지금 신전의 힘은 너무나 막강해. 신전을 경계해야 할 황실조차도 신탁 하나에 자기 자식을 버리는 마당이니. 내가 막아 준다고 해도 결코 쉬운 길은 아닐 걸세. 그래도 그대는 이 일이 하고 싶은가?”
시에나는 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왜인지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이유. 무엇이 있을까. 시에나가 생각하기 위해 눈을 감자마자 전쟁터에서 본 풍경들이 떠올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전쟁터에서 수많은 시체들을 보았습니다. 아직 죽지 않은 부상병들도 있었어요. 상처가 심한 이들도 있었지만, 꾸준히 치료한다면 분명 나을 수 있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신전의 약이 아닌, 제가 만든 약과 붕대만으로도 나을 수 있는 사람들이요.”
그때를 떠올리자 시에나의 코끝이 시큰해졌다. 자신은 착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다.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없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다.
“제가 오늘 다녀온 곳은 전쟁터에서 저를 구하고 죽은 아이의 모친이 있는 집이었습니다. 그는 모친의 약값을 벌기 위해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 나가 다치자 버림받았습니다.”
시에나의 눈에 맑은 물이 고였다. 오늘 겪은 일이라 그런지 감정이 평소보다 더 격하게 느껴졌다.
“모친의 상처는 초반이었다면 제 약으로도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덧나고 번져 손쓸 수 없게 되자 약값을 벌기 위해 성인도 되지 않은 아이가 전쟁터에 나가 죽었습니다.”
시에나의 말에 공작 역시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이런 상황이 수두룩하겠지요. 신전의 약을 싸게 해 달라는 게 아닙니다. 직접 만들어 쓰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그들에게 살 구멍을 만들어 주고, 다시 나아서 일어날 수 있게요. 그 편이 제국으로서도 이득인 일이 아닌가요?”
“그렇지만 그 일은 결코 쉽지 않네.”
“저는 살릴 수 있는 목숨을 불법이라는 이유만으로 놔 버릴 수는 없습니다. 쉽지 않다는 이유로 시도조차 않고 포기한다면, 평생 후회할 것 같습니다.”
시에나의 목소리에 힘이 붙었다. 진실에서 비롯된 말은 어떤 대단한 연기력으로 만들어진 거짓보다 훨씬 강력했다.
만약 원래 세계로 돌아오게 되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평생을 시달리며 살게 될 것 같았다. 시에나는, 수한의 때처럼 그렇게 허망하게 살릴 수 있는 사람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만약 할 수 없겠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몰래 전쟁터에 와서 사람들을 치료하겠습니다.”
허.
공작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전쟁터에 가서 그 위험한 일을 당했으면서도 또 가겠다는 말인가? 그대는 목숨이 혹 열 개인가?”
“자고로 예부터 사신과 의사는 죽이지 않는 법이라 했습니다. 그들이 그런 도리를 알길 바랄 뿐이지요.”
사실 이 말은 반쯤은 거짓말, 반쯤은 허세였다. 전쟁터가 어떤 곳인지 몸소 겪은 시에나로서는 아직은 도저히 그곳을 다시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마 공작이 안 된다 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지만, 그만큼 간절하다는 것을 공작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러니 허락해 주세요.
시에나가 속으로 간절하게 외쳤다.
끄으응. 이번엔 신음이 새어 나왔다. 공작을 올려다보는 시에나의 푸른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시에나의 눈동자에 담긴 것이 치기만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칭찬해 주어야 할 일이었다. 다만 그녀가 가고자 하는 길이 너무 위험했다. 뾰족뾰족한 가시밭길임을 알면서도 아끼는 이를 보내고 싶겠는가. 그것도 자신의 조카와 같은 길을 걸을 수도 있는 아이를. 조카의 길 역시나 엉기고 설긴 가시밭길인 것을.
그러나 공작 역시 이 아이처럼 꿈꾸던 때가 있었다. 신전이 약을 독점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선황께 이의를 제기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대신관은 그가 황위를 계승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신탁을 내렸다. 그렇게 황위 계승권을 박탈당한 후 쫓겨나듯 북부로 와 보낸 세월이 벌써 수십여 년이었다.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데이몬과 같은 취급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적대적인 시선들 속에 홀로 걷는 그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다시금 그의 전철을 밟으려는 이가 나타난 것은 과연 우연일까. 공작은 또랑또랑한 시에나의 눈동자에 감정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사실은, 그녀의 첫 마디부터 설레고 있었다. 자신이 하지 못한 것을 이루어 줄 것 같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때문에 시에나가 말을 꺼냈을 때부터 그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네 부탁을 들어주겠다.”
“저, 정말이세요?”
“그래. 약을 유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시에나는 뛸 듯이 기뻐 발을 동동 굴렀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시에나에게 공작이 단호하게 말했다.
“단, 조건이 있네.”
“예? 조건이요?”
“그래. 조건.”
“어떤… 조건이신데요?”
시에나가 침을 꿀꺽 삼키고 조심스레 물었다.
“이 일을 진행하며 안정화가 될 때까지 나의 보호를 받을 것.”
시에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 말씀은 제가 공작가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그게 좋겠지만, 그대가 마르바스성에 머물길 원한다면 기사단을 파견할 걸세.”
그게 왜 조건이죠.
시에나의 눈이 동그래진 걸 보고 공작은 으흠, 헛기침을 했다. 공작이 말한 조건은 시에나가 꺼냈다고 해도 믿을 만한 조건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공작 쪽에서 그런 이야기를 꺼내다니.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시에나가 공작을 자꾸 바라보자 그는 아예 고개를 돌린 채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설마… 부끄러워하시는 건가?
시에나는 공작의 새로운 모습에 비식,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겨우 막아냈다. 남에게는 차갑지만 자신의 사람에겐 따뜻한 북부 남자… 리카르도 공작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 시에나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그렇게 할게요.”
* * *
목욕을 하고 나온 시에나는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밖은 벌써 한밤중이었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 내며 창가에 기댄 시에나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흐드러지게 많은 별이 은하수를 이루고 있었다.
“아, 별똥별이다.”
시에나가 낙하하는 별똥별을 가리키며 혼잣말했다. 이렇게 편안하게 하늘을 바라본 게 얼마 만인지.
도련님이 잠이 안 온다고 하면 가끔 이렇게 창문을 열어 두고 쏟아지는 별빛을 받으며 이야기했었다. 헤라클레스자리, 사냥개자리, 물고기자리 등 별자리 이야기를 해 주다 그대로 아침까지 도련님의 침대에서 잠들었던 적도 몇 번 있었지. 즐거웠던 과거를 떠올리자 시에나의 입술 끝이 살며시 말려 올라갔다.
“아, 도련님 보고 싶다.”
뭐 하고 계시려나. 자고 계시겠지. 이미 늦은 시간이니까.
“저어, 시에나….”
“보고 싶다고 이젠 환청도 들리네.”
중증이군. 시에나는 혀를 차며 잠이나 자자 싶어 몸을 홱 돌렸다.
“아야!”
무언가에 코를 부딪친 시에나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눈물이 찔끔 날 지경이었다.
“미안, 시에나. 괜찮아?”
잠긴 목소리가 시에나의 귓가에 울렸다.
“진짜… 도련님? 도련님이에요?”
“그래, 나야. 미안해. 많이 아파?”
데이몬은 어쩔 줄 모르고 아파하는 시에나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뺨에 와 닿는 그의 손이 시원하다고 생각하기도 잠깐, 5분 전의 흑역사에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데이몬이 조금 당황하며 손을 거두어들였다.
“언제부터 계셨던 거예요?”
시에나가 눈을 빼족하게 하고 묻자 데이몬이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난 아까부터 계속 저기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그걸 시에나가 못 봤다는 거다. 어쩐지 오늘 별빛이 밝더라니….
“아니, 왜 오신 거예요? 원래 항상 연락하고 오셨었잖아요.”
“그게 널 만나려고 하녀들한테 물었더니 여기 있으면 될 거라 그러고 나가길래 어디 간 줄 알았지 목욕하고 있었을 줄은 전혀 몰랐어. 미안해.”
데이몬은 정말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시에나는 골이 띵해 왔다. 목욕 시중을 거부했기에 시에나가 욕실에 들어가면 하녀들은 방을 나가 아침에나 돌아왔다. 그러다가 데이몬이 왔던 거였고, 둘 사이를 연인이라 착각하고 있던 하녀들이 그를 들인 모양이었다.
시에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문지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앉으세요.”
“화 많이 났어?”
안절부절못하는 데이몬을 보고 시에나는 푹 한숨 쉬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어차피 옷도 다 입고 있었는데요 뭐. 도련님은 모르셨잖아요.”
물론 그게 얇은 슬립이었던 게 문제지만. 시에나는 두툼한 숄로 얇게 입은 몸을 감쌌다.
“주인 없는 방에 들어오는 게 실례인 줄은 알았지만, 예전에도 들어와 본 적이 있어서… 네가 이렇게 놀랄 줄 몰랐어. 정말 미안해, 시에나.”
초반에 시에나의 방에 숨어들어 숨바꼭질을 하거나 무서운 꿈을 꾸면 꾸물꾸물 침대로 숨어든 데이몬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별생각 없이 들어왔겠지.
그렇지만 도련님, 지금은 제가 도련님께 과도한 관심이 있거든요. 그래서 심장이 너무 떨려서 안 돼요.
시에나는 속마음을 삼키며 데이몬의 사과를 받아 주었다.
“정말 괜찮아요. 다음에 이러지 않으시면 되죠. 그런데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그러면서 시에나는 작게 하품을 했다.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지라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나자 저도 모르게 피로가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데이몬이 한 말은 그런 시에나의 졸음을 한 번에 날아가게 만들었다.
“나 아카데미에 가려고 해.”
툭. 어깨에 걸친 숄이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시에나는 황망하게 데이몬을 바라보았다. 그런 시에나의 모습에 데이몬의 금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물론 지금 이런 말을 꺼내서 당황스럽겠지만… 전부터 생각한 거였고, 이번에 확실하게 결정하게 되었어.”
공작님. 무슨 집착인가 때문에 저랑 찰싹 달라붙어서 안 떨어진다고 할 거라 하시지 않으셨어요? 너무 잘 떨어지려고 하는데요? 거의 베트남 쌀인데요?
시에나는 지금쯤 잠자리에 들었을 공작을 향해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공작이 들려준 리엔 황녀의 이야기에 겁을 잔뜩 집어먹고 목욕하면서도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까 골똘히 생각했던 시에나였기에 지금 이런 이야기는 안심이 되면서도 조금은 허무하게 느껴졌다.
여러 가지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진 시에나의 표정이 좋지 않자 기분이 나쁜 줄로 착각한 데이몬이 더욱 안절부절못하고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시에나, 내가 너랑 의논 없이 결정해서 화났어?”
“네? 아뇨… 어차피 도련님 아카데미는 가야 하는 게 맞는 거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궁금하긴… 해요.”
그렇게 치면 공작한테 약 만들겠다고 지른 시에나도 별다른 할 말은 없었다.
“사실 처음에는 로하엘의 교육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었어. 인정하긴 싫지만 로하엘은 좋은 선생이었으니까.”
그러면서도 대련 도중 자신을 몇 번이나 흙바닥에 처박은 기억을 잊진 않고 있는지 그를 떠올린 데이몬의 표정이 살벌해졌다.
“늘어난 실력에 자만해서 널 데리고 전쟁터까지 갔지. 그러다가 널 잃을 뻔했고 말이야.”
자신을 자책하는 듯한 어조에 시에나는 그를 달래야겠다 생각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요. 전 지금 이렇게 살아 있고요.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약한 줄 알았다면 널 데리고 절대 그 위험한 곳에 데리고 가지 않았을 거야. 오만으로, 내 이기심으로 널 잃을 뻔했어. 만약 네가 정말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렸다면, 나는 평생을 후회하면 살았을 거야.”
데이몬의 회한에 찬 말에 시에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시에나가 정신을 잃은 시간 동안 그의 속이 얼마나 새카맣게 타 버렸을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정말로, 정말로 나는 괜찮은데.
그렇지만 시에나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이몬의 얼굴이 너무나 선득하여, 그래서 그녀는 입을 여는 것 대신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어렸을 때에는 마르바스성을 감옥이라 생각했어. 그렇지만 지금은 어쩌면 거긴 감옥인 동시에 나를 보호하는 요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처음으로 밖에 나와 본 세상은 생각보다 무섭고, 두렵고, 처참했어. 그렇지만 다들 그런 곳에서 살아가는 거겠지. 그렇다면 나는 성 밖으로 나와 너를 지키면서 살아가고 싶어.”
그렇게 말하며 시에나를 보는 데이몬의 눈은 올곧았다. 어떤 이물질도 감히 침범하지 못할 호박색 눈을 보며 시에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 빠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도련님….”
“그러려면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흡수하고, 나아가야 해. 그게 내가 아카데미에 가기로 결심한 이유야.”
그렇게 말하는 데이몬은 거인처럼 커 보였다. 시에나는 이 낯설어진 소년을 참 많이 좋아하게 되었다는 걸 새삼 느꼈다.
말해야 했다.
자신도 데이몬이 아카데미에 가기를 원했노라고.
먼저 이야기를 꺼내 주어 감사하다고.
그런데, 그런데 왜.
“어…?”
시에나의 볼 위에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손으로 만져 본 그것은 척척하고 뜨거웠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에 시에나는 저도 모르게 천장을 바라보았다.
“도련님, 천장에서 물이 새나 봐요….”
“그, 시에나. 네 눈에서 나는 것 같은데….”
“예? 그럴 리가. 진짜네. 그런데 저 왜 울죠?”
시에나는 당황하며 웃으려고 했지만 입꼬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입술 끝을 올리려고 몇 번이나 노력했지만 결국 성과 없이 입가에는 경련만이 일었다. 볼 위에 가느다란 눈물 길이 생기는 것을 본 데이몬의 안색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시에나는… 내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니요! 절대 그런 건 아니에요.”
저도 제가 왜 우는지 모르겠어요….
그 잠깐 새에 육아를 너무 열심히 해서 빈 둥지 증후군이라도 생긴 건가.
“울지 마, 시에나.”
네가 울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데이몬은 그렇게 말하며 검지로 시에나의 눈물을 닦아 내었다. 시에나의 얼굴을 다 덮고도 남을 정도로 큰 손이 병아리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그녀의 볼을 매만졌다.
“손이….”
“응?”
“정말 많이 커졌어요. 예전엔 저보다 작았었는데.”
시에나는 손을 들어 데이몬의 손에 자신의 손을 맞댔다. 데이몬과는 이제 거의 한 마디 차이가 나고 있었다. 검을 잡아서 그런지 길이뿐만 아니라 굵기도 훨씬 굵어져 있었다.
손바닥에는 검을 잡아 생긴 딱딱한 굳은살이 느껴졌다. 예전엔 정말 단풍잎처럼 작고 하얗고 귀여웠는데. 신기하다. 사람은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는구나.
“그랬었나.”
“뭐야, 겨우 몇 개월 전이잖아요.”
“너와 처음 만났을 때가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져. 아주 어릴 때부터 너와 함께해 온 기분이야.”
“지금도 어리시거든요?”
눈을 감으면 데이몬의 어린 시절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지금의 데이몬 역시 어리지만 소년과 청년의 차이로, 예전의 데이몬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이 느껴졌다. 벌써 손부터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걸.
아아.
나는 이제 그 작고 어린 소년을 다시는 보지 못하겠구나.
그 소년은 이제 커서 알을 깨부수고 나아가려 하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자 시에나는 방금 자신이 운 이유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다.
다시는 소년 시절의 데이몬을 볼 수 없다는 기묘한 상실감.
그러나 지금은 상실감에 대한 서운함을 표현하는 것보다는,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가려는 데이몬의 앞날을 축복하는 것이 먼저였다.
“맞아. 난 아직도 어려.”
데이몬이 시에나의 볼멘소리에 키득거리며 답했다. 데이몬이 웃는 모습을 보며 시에나도 키득거리다 보니 어느새 눈물은 멎어 있었다. 아예 한 번 울고 나니 더 감정도 정리되고, 더 상쾌해진 것 같았다. 시에나는 후련해진 마음으로 말했다.
“다녀오세요, 도련님.”
“응?”
“아카데미요. 당연히 다녀오셔야 하는 곳이잖아요.”
시에나의 변화에 데이몬은 조금 의아해하면서도 그녀의 표정이 나아진 것에 대해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가서 공부도 열심히 하시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시고 하셔야죠. 도련님은 잘하실 거예요. 또… 그래. 소중한 사람이 생길 수도 있겠네요.”
“소중한 사람?”
“네. 보통 아카데미에서 연인이 되어 결혼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책에서 읽은 지식이지만. 시에나는 남주와 여주를 떠올리며 말했다. 청춘 남녀들을 한 반에 몰아넣고 공부시키는데 정분이 안 나는 게 어려웠다. 그래서 비싼 입학료와 수업료에도 불구하고 낮은 신분의 귀족들은 자식들을 꾸역꾸역 해밀턴 아카데미로 보냈다.
황족들까지 다니는 아카데미다 보니 고위 귀족 자제들도 제법 다녔기에, 남작 영애가 졸업 후 후작 부인이 되는 경우도 적잖아 있었다. 또, 하위 귀족 가문의 차남이나 삼남이 고위 귀족 가문의 영애와 결혼해 떵떵거리며 살기도 했다.
게다가 꼭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사교계에 진출하려면 인맥은 꼭 필요했기에, 아카데미는 귀족 영애와 영식들의 필수 코스였다.
데이몬은 신탁 때문에 초반에는 사람들이 피할지도 모르지만, 지내다 보면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금방 깨닫게 될 것이다. 사교계에 나올 때 즈음에는 분명 근사한 남자가 되어 있겠지. 그에게 은근히 감정을 표현하는 귀족 영애들도 나올 것이다. 귀족 영애가 잘 큰 데이몬에게 러브 레터를 주는 장면을 생각하자 자랑스러우면서도 마음 한쪽이 어쩐지 싸르르 아려 왔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네?”
데이몬이 그 영애에게서 러브 레터를 받아 들고, 둘이 사교 파티에서 춤을 추고,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장면까지 상상하며 김칫국을 마셨던 시에나가 데이몬의 말 한마디에 현실로 돌아왔다.
“내가 아카데미에서 반려를 만들 일은 없어.”
“왜, 왜요?”
“이미 정했거든.”
“네-?”
너무 놀라 시에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어깨로 흘러내렸던 숄이 그대로 바닥에 툭 떨어졌다. 얇은 슬립 차림의 시에나를 본 데이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데이몬은 고개를 팩 돌리며 기계같이 딱딱한 움직임으로 숄을 주워 시에나에게 건네었다. 주섬주섬 숄을 다시 두른 시에나가 심호흡을 하며 두 방망이 치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반려, 정했다고.”“누군데요?”
시에나는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데이몬은 그런 시에나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에나, 너.”
“네?!”
이번엔 방 전체가 울릴 정도로 시에나가 소리를 질렀다.
아니, 나 아니라며!
아이작이 한 말은 다 거짓말이라며!
그러나 그런 시에나를 바라보는 데이몬의 눈빛에는 진심이 뚝뚝 묻어났다.
“왜… 저예요?”
“모르겠어. 그냥 깨닫고 보니까 너였어.”
그 마르바스 사람들이 반려를 정하는 기준이 무슨 각인 같은 건가? 아기 오리가 알에서 깨어나 처음 본 사람을 엄마로 인식하는 그런?
시에나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데이몬을 좋아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평생 함께 살아가는 건 다른 문제였다. 데이몬은 책 속의 사람, 시에나는 책 밖의 사람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데이몬에게 넌 책 속 사람이구, 난 책 밖 사람이야! 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답해야 하지.
처음 받아 본 고백에 머리도 잘 돌아가지 않았다. 결국 시에나는 과열한 주전자처럼 푸쉬쉬 한숨을 쉬며 침대에 주저앉았다. 사방이 빙글빙글 돌고, 온몸에 열이 올랐다. 심장이 폭주 기관차처럼 내달렸다.
“너무 부담스러워하지는 마. 그렇다고 해서 시에나에게 뭘 요구하고 싶은 건 아니니까. 그냥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
그런 시에나의 혼란스러움을 알아챈 듯 데이몬이 슬쩍 눈치를 보며 말했다. 데이몬의 불안해하는 모습이 언뜻 보였지만 시에나는 여전히 과열된 생각으로 정신이 없었다. 데이몬은 결국 안절부절 못하다 설명을 덧붙였다.
“어차피 결혼할 생각도 없고.”
네?
뭐요?
시에나는 어이없다는 듯 데이몬을 쳐다봤다.
“뭐, 연애만 하자 그런 뜻인가요?”
도련님 그런 사람이었어요?
연애할 사람, 결혼할 사람 이렇게 나눠놓고 편 가르는?
시에나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를 보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데이몬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연애도 바라지 않아. 정말이야.”
“그럼 제 몸이요? 몸을 원하셨던 거예요?”
시에나가 그런 데이몬이 징그럽다는 듯 숄로 단단히 몸을 무장하고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그를 노려보았다. 말뜻을 깨달은 데이몬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데이몬은 뜨거워진 얼굴에 마른세수를 했다. 언뜻 본 그의 입술이 바짝 말라 있었다.
“아니야. 시에나. 조금만 진정하고 내 얘기를 들어 줘.”
“…네.”
그래, 좀 흥분한 것 같긴 했다. 원래 있던 세계와 이 세계를 통틀어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받는 건 최초였으니까.
시에나는 데이몬의 시범에 따라 심호흡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이내 조금 평온한 상태가 되자 데이몬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시에나가 굳이 나에게 무언가 해 줄 필요는 없다는 뜻이야.”
“저는 잘… 이해가 안 돼요.”
“시에나가 다른 사람과 연애해도, 결혼해도 괜찮아. 그냥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만약 네가 누군가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면, 가장 성대한 결혼식을 해 줄게. 일국의 공주가 하는 결혼처럼 화려하고 아름답게.”
“제가 비혼 한다고 하면요?”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어.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던 내 모든 걸 줄게. 성도, 영지도, 보석도. 앞으로 내가 가질 모든 것들까지.”
데이몬은 시에나가 별을 따다 달라 하면 정말 별을 낙하시켜서라도 선물할 기세였다. 그렇게 말한 데이몬은 어려운 요구를 하려는 사람처럼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러니 내 곁을 떠나지 말아줘.”
“…네?”
“아니, 그냥… 내가 네 곁에 조금이라도 오래 머무는 걸 허락해줘.”
시에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많은 걸 다 준다고 해 놓고 바라는 게 고작 자신의 곁에 조금이라도 오래 있어 달라는 거라니.
“지금 실력은 형편없지만,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에는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 되어 있을게. 어떤 상황에서도 널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역시 그 산적들의 일이 데이몬에게는 큰 충격으로 남아 있었나 보다. 목욕할 때 슬쩍 보니 등에 남은 흉터가 그렇게 눈에 띄지도 않던데.
도련님, 17:1에서 이길 수 있는 건 오직 17명 안에 들었을 때뿐이라고요….
시에나는 그런 상황에서 이기지 못했다고 자신의 실력이 형편없다 말하는 데이몬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도련님, 그런데 제가 언제 떠난다고 한 적 있나요?”
“어? 아, 아니. 없지.”
“그런데 왜 제가 떠날 거라 생각하고 계셨던 거예요?”
시에나의 날카로운 질문에 데이몬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데이몬은 얼마 전 하녀들의 대화를 엿들었던 걸 떠올렸다.
* * *
“시에나랑 로하엘 님이 만나는 걸까?”
하늘에 맹세코 결코 들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공부에 지쳐 주방에서 간식을 좀 얻을 요량이었다. 그러나 하녀들의 수다는 데이몬의 발걸음을 굳게 만들었다.
“그럴 수도 있지. 둘이 잘 어울리기도 하고.”
“맞아. 시에나가 어려서 그렇지 걔가 사실 이 시골에 그렇게 어울리는 얼굴은 아니잖아. 인상이 순하면서도 세련되게 생겨서, 꾸미면 웬만한 귀부인보다 근사해질걸.”
“그렇지. 영특하기도 하고, 우리랑은 달리 뭔가 특별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
“아무리 특별하다 한들, 도련님 때문에 연애나 제대로 해보겠어?”
“도련님이 왜?”
데이몬은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흠칫했다. 없는 자리에서는 나랏님 흉도 본다는 게 사람이었다. 자리를 피해주는 게 맞았지만, 도저히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도련님 시에나한테 엄청 집착하시잖아.”
“맞아, 맞아. 나는 좀 무서울 지경이더라.”
물어본 하녀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에나에 대한 집착이 좀 심하시긴 하지. 그래도 특혜 받고 있잖아. 도련님 전용 하녀라 일도 수월할 테고.”
“얘는, 제인이 도련님 담당하면서 한 달 새 살이 쭉 빠진 거 몰라? 도련님 돌보는 거 생각보다 진짜 힘들어. 그거 특혜 아니야.”
아니, 내가 뭘 했다고.
데이몬은 조금 억울해지는 기분이었다.
그저 시에나와 둘이 있는 시간이 좋아서 나가라고 눈치 좀 주고, 시에나 없을 때에는 시에나 얘기 좀 묻고, 시에나의 신경이 분산되는 게 싫어서 약 받는 것 좀 노려봤을 뿐인데!
그러나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 건 데이몬이었기에 그는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맞아, 나도 말씀드릴 게 있어서 갔다가 그 눈빛 받은 적 있는데, 정말 섬뜩하더라.”“어린 분이 무슨 집착이 그렇게 강한지. 도련님 때문에라도 시에나가 로하엘 님이랑 뭘 좀 해보려면 여길 나가야 할 걸?”
“경력 적당히 쌓으면 나가겠지. 시에나 1년만 채우고 나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잖아.”
데이몬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시에나는 정말 떠날 생각이었던 걸까.
“그런데 로하엘 님 높은 신분 아니야?”
“그렇지. 카넬로프 후작가 유명하잖아. 그리고 내가 어쩌다 들었는데, 심지어 작위도 물려 받을 수 있는 장남이래.”
“세상에! 시에나가 그럼 후작 부인이 되는 거야?”
하녀 하나가 설레어하며 물었다.
“글세. 후작 부인까지는 신분 때문에 힘들어도 후실 정도는 되지 않을까.”
“그래도 그게 어디야. 로하엘 님 보니까 시에나 대할 때 꿀이 뚝뚝 떨어지시던데. 평생 자상하게만 대해주면 되는 거지.”
“으, 난 아무리 그래도 누구 첩이 되긴 싫어.”
“난 로하엘 님이라면 첩이라도 괜찮을 것 같아. 일단 근사하시잖아. 남자는 잘생기고 봐야 하는 거랬어.”
하녀의 확고한 의지가 여기까지 전해졌다. 데이몬은 오늘따라 더 못생겨 보이는 얼굴이 창문에 비치자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도련님이 시에나한테 그렇게 집착하는 걸로 봐서는 나중에 진짜 결혼하지 않을까?”
“얘는, 도련님이 아무리 천덕꾸러기였다고 한들 황족이야. 방계들도 황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위 귀족들 척척 낚아 결혼하는데 지금이야 도련님이 어려서 그렇지 다 크고 나면 시에나를 쳐다나 보겠어?”
“맞아, 심지어 시에나가 연상이잖아? 도련님이 성인이 되면 시에나는 벌써 스무 살이 넘는다고. 어떤 귀족이 스무 살 넘는 평민 여자애를 데려가겠어. 시에나도 불쌍하다고 도련님만 싸고돌지 말고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할 텐데.”
“똑똑한 애니까 금방 정신 차릴 거야. 도련님 좀 크고 나면 적당히 때 봐서 도망치겠지, 뭐.”
“그래! 시에나의 탈 마르바스 프로젝트, 응원합니다.”
“얘는, 좀 조용히 해. 누가 듣겠다. 청소 끝났으면 이제 가자.”
하녀들이 짐을 챙기는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리고, 이내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은 그곳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생각이었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던 생각이었다. 시에나가 자신을 떠난다는 것. 상상만으로도 한없이 깊은 밑바닥에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눈앞이 새카매지면서 가슴이 꽉 죄어들어 숨쉬기가 힘들었다. 데이몬이 비틀거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윽….”
하녀들에게 화를 낼 기운조차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대체 자신이 무어라 화를 낼 수 있단 말인가.
데이몬에게 시에나는 신이었으며 빛이었고, 구원이었다. 자신을 어둠에서 빛의 세계로 이끌어 준 사람. 차마 닿는 것조차 두려워 시에나가 열 번 다가와야 겨우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사람이었다.
좀처럼 닿을 수 없기 때문일까. 데이몬은 어느샌가 시에나에 대해 몹시 갈망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생각하면 언제나 목이 탔다. 연거푸 물을 마시다가도 그녀만 생각하면 사막의 대지처럼 바짝 말라갔다. 시에나를 보고 있을 때에도 그랬다. 아니, 볼수록 갈증은 더욱 심해졌다.
그녀를 껴안고 입 맞추길 욕망했다. 그런 자신을 깨달았을 때에는 짙은 혐오감이 올라왔다. 신에게 욕정 하는 인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벼락을 맞아도 쌌다.
그러나 시에나는 그런 그에게도 곁을 내주었다. 그녀의 따뜻한 온기에 닿으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시에나는 자신도 모르는 새 그를 중독 시켰으며, 보이지 않는 투명한 사슬로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들었다.
저를 묶은 것은 시에나라는 착각 속에 데이몬은 점점 그녀를 탐냈다.
그녀의 시간을, 그녀의 애정을.
감히 사랑은 구할 수 없었다. 그건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만약 여기서 더 원하게 된다면, 분명 천벌을 받으리라.
그리하여 데이몬은 사랑을 제외한 모든 것을 탐냈다.
지독한 갈증은 시에나를 보는 순간 순식간에 차올랐다. 따스한 금색의 물이 그의 마음을 채웠다. 데이몬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처럼 게걸스레 시간을 빨아들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녀를 욕망하는 정도는 더욱 깊어졌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시냇물이 강물이 되고, 강물이 바다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말라붙은 바다는 절대 채워지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넓어지고, 또 넓어졌다. 그 깊고 넓은 바다에 한 줄기 물이 떨어진다 한들, 그저 스미고 말 뿐이었다. 도저히 그 갈증을 참을 수 없어 더 다가가려 했고, 감히 그녀를 독차지하려 했다.
그렇게 욕심을 부렸던 까닭일까. 결국 경고를 받고 말았다.
데이몬은 아까의 대화가 그저 하녀들의 수다로 느껴지지 않았다. 하녀들의 입을 빌린 누군가의 경고로 느껴졌다.
더 바란다면 시에나를 다시 가져가버릴 수도 있다는 명백한 경고.
데이몬은 더럭 겁이 났다. 시에나가 신이었다면 데이몬은 악마의 자식이었다. 제국을 망칠 흉물. 그런 자신이 시에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넘어서 누구의 사랑도 받을 수 없었다. 악마의 자식이 헛된 꿈을 꾸었으니 벌을 받는 게 당연했다.
데이몬은 금방이라도 시에나를 빼앗길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걸 막기 위해서라면 누군가가 무릎을 꿇고 빌라면 빌 수 있었다. 진흙이 묻은 구두에도 입 맞출 수 있었다. 데이몬은 진심으로 참회하며 속으로 빌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더 욕심 부리지 않을게요.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데이몬은 그렇게 몸을 옹송그린 채 복도에서 한참을 쪼그려 앉아 있었다.
“도련님 뭐 하고 계세요?”
허억, 데이몬은 물에서 겨우 빠져나온 사람처럼 숨을 들이켰다. 시에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왜 이렇게 식은땀을 흘리세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시에나를 바라보며 데이몬은 이상하게도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간절한 기도에 누군가가 응답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무슨 일이야?”
“네? 무슨 일이라니요. 간식 가져오신다고 해놓고 안 오셔서 내려와 본 거예요.”
“아아, 간식. 그래. 간식.”
“악몽이라도 꾸신 거예요?”
시에나가 손수건을 꺼내어 데이몬의 땀을 닦아주려 다가갔다.
찰싹.
데이몬은 저도 모르게 그런 시에나의 손을 쳤다. 지금 닿으면 안 될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 바람에 시에나의 손에서 손수건이 팔랑팔랑 떨어져 내렸다. 시에나는 손수건을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데이몬을 바라보았다.
“도련님…?”
“미, 미안. 시에나. 여기 손수건. 내가 간식 금방 가지고 올게.”
“괜찮아요. 이왕 내려왔으니까 같이 갈까요?”
“아니. 먼저 올라가 있어.”
데이몬의 딱딱한 말투에 시에나는 조금 놀란 듯 보였지만 무어라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 사이 데이몬이 재빨리 주방으로 들어갔다. 데이몬의 새하얗게 질린 안색에 주방장이 놀라 무슨 일이냐 물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주방장은 데이몬의 무시에도 별 말 않고 그의 손에 간단한 다과를 담은 바구니를 들려주었다. 데이몬이 비척비척 걸어 다시 밖으로 나왔다. 시에나는 여전히 그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독한 갈증이 데이몬을 또다시 덮쳤다. 시에나를 만지고 싶은 욕망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그러나 참아낼 수 있었다. 시에나를 보지 못해 생기는 고통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악마의 자식이 신을 사랑하려 했으니 이 정도 고통은 당연했다. 데이몬은 타는 듯한 갈증에 차를 꿀꺽 꿀꺽 들이켰다. 시에나가 토끼눈을 뜨고 데이몬을 쳐다봤다.
“도련님, 그 차 뜨거워 보이는데….”
그러고 보니 입천장이 벗겨진 듯 화끈화끈하고 쓰라렸다. 그렇지만 크게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는 지금 시에나가 눈앞에서 사라지지는 않을까 겁에 질려 있었다.
“괜찮아.”
그 순간, 시에나가 데이몬을 잡으며 그를 돌아 세웠다. 데이몬의 눈앞에 별이 튀었다. 화들짝 놀란 데이몬에게 시에나가 불안한 듯 말했다.
“도련님 오늘 좀 이상해요.”
“왜, 왜?”
“뜨겁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간식 먹자면서 신나게 달려가신 분이 갑자기 복도에 계신 것도 그렇고, 혹시 어디 아프신 건 아니에요?”
“아무렇지도 않아.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시에나가 데이몬의 이마에 손을 얹은 건 순식간이었다. 검술을 배운 이후 민첩해졌으니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사슬이 그를 단단히 옭아맸다. 그의 신이 그것을 원하고 있었으므로.
“흐음, 열은 없으신데….”
“정말 괘, 괜찮다고 했잖아.”
“제가 착각했나 봐요. 죄송해요.”
시에나가 혀를 작게 빼물며 사과했다. 그걸 보는 데이몬은 돌아버릴 것 같았다. 햇빛을 머금은 얼굴로 웃고 있는 시에나는 정말이지 치명적이었다. 데이몬은 아까의 결심이 사라지려는 걸 느꼈다. 어느새 풀어진 얼굴로 힘없이 고개를 젓자 이번에는 팔짱을 꼈다. 혹시 악마가 저를 시험하는 걸까. 데이몬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앞의 계단이요. 저도 전에 너무 정신 빼놓고 걷다가 고꾸라질 뻔했거든요. 그런데 오늘 도련님도 상태가 좋지 않아 보여서 좀 조심하셔야 할 것 같아요.”
시에나의 조언에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신경은 온통 그녀가 낀 팔짱에 쏠려 있었다. 시에나와 닿은 부분부터 순식간에 메마른 바다가 차올랐다. 어느새 제법 차오른 금색 바다에서 솨아아, 철썩. 파도가 일었다.
결국 데이몬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데이몬은 시에나를 뿌리치지 못했다. 그러기엔 눈앞의 선물이 너무나 달콤했다. 데이몬은 속으로 생각했다.
혹 시에나가 누군가에게 관심이 있는 것을 본다면, 그때는 꼭 뿌리치겠다고.
누군가가 준 경고와 기회를, 결코 헛되이 쓰지 않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