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꿈나무에게 집착 받고 있습니다-4화 (4/14)
  • <04>

    시에나가 팔을 쭉 펴고 불을 비추며 말했다가 그대로 굳었다. 정말로 회색 천을 뒤집어쓴 무언가가 그들의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온통 시에나만 의식하고 있던 데이몬이 잠시 앞을 바라보다 석상처럼 자리에 얼어붙었다.

    “유, 유령일까요?”

    시에나는 용케 비명을 지르지 않고 데이몬에게 속삭이듯이 물었다. 데이몬이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내 눈에도 보이는 걸 보면 사람인 것 같은데.”

    “어떡해요…. 왜 안 사라지는 거야….”

    시에나가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하자 데이몬이 결심한 듯 침을 꿀꺽 삼키더니 소리쳤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그 순간, 로브가 스르르 움직이며 둘을 응시했다. 끼기기, 하는 섬뜩한 소리가 난 것도 같았다. 시에나의 손바닥에 고인 땀이 흥건했다. 스릉, 결국 데이몬이 검을 반쯤 빼들었다. 바로 싸움이 일어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사이, 거기서 뭐 하는 건가?”

    유령의 뒤에서 누군가 물었다. 익숙한 목소리에 시에나는 뻣뻣한 목을 돌려 그 너머를 바라보았다. 공작이 어이없다는 듯 유령을 보고 있었다.

    “공작님 위험…!”

    혹 공작이 위험해질까 봐 다급하게 그를 불렀지만, 오히려 유령이 시에나의 말에 반응했다. 유령의 긴 옷자락 끝에서 나타난 귀신처럼 하얗고 긴 손가락이 로브를 벗겼다. 로브 안에 숨겨져 있던 눈부신 은발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유령이 공작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공작 각하.”

    “이 깜깜한 곳에서 그러고 있으니 아이들이 놀라지 않나.”

    맞아요. 정말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구요! 시에나가 반쯤 울먹울먹해서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사이는 고개를 돌려 데이몬과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처럼 하얀 피부에 붉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런가요.”

    …끝?

    사과도 변명도 없이 그는 건조하게 답했다. 둘은 황당하다는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의 태도에 두통이 오는지 공작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대신 나서서 설명했다.

    “오밤중에 이러고 있으니 놀랄 만도 하지. 사이는 기사단의 직속 마법사네. 가끔 엉뚱한 짓을 할 때가 있어.”

    “마, 마법사요…?”

    “그래. 천재는 별나다고 하지 않나. 데이몬, 시에나. 나도 잘 단속할 테니 여기 머무는 동안 사이가 이상한 짓을 하더라도 조금 이해해 주게.”

    “저는 별로 별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탐구심이 강할 뿐이지요.”

    사이가 투덜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이 하,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그럼 이 야밤중에 벽에 머리는 왜 박고 있었던 거야? 벽에 꿀이라도 발라 두었던 건가?”

    “그렇다기보다는… 강렬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져서요. 뭔지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마나의 흐름?”

    “예. 마나는 많지만 교육은 제대로 못 받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실수죠. 엄청난 마나가 빨려 나갔으니 지금쯤 죽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정확한 대답은 아니었으나, 시에나와 데이몬은 무언가 감을 잡은 듯이 서로의 눈을 마주했다.

    “그 얘기, 조금만 더 상세하게 해 줘.”

    데이몬이 앞으로 나서며 사이에게 물었다. 사이는 멍한 눈동자로 데이몬을 훑었다.

    “도련님, 혹시 마법에 관심 있으십니까?”

    그는 대답 대신 엉뚱한 말을 했다. 데이몬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관심 없어.”

    “그거 아쉽군요. 대마법사의 자질이 보이는데….”

    “그건 됐고, 조금 더 자세히 말해 줘. 이 마나의 흔적이 뭘 의미하는 건지.”

    “와, 흔적까지 보이시는 겁니까? 정말 마법에….”

    “관심 없으니까 빨리!”

    데이몬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사이는 입을 삐죽대며 설명을 시작했다.

    “드물긴 하지만 마나를 타고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무언가를 강렬하게 원할 때 배운 사람들은 주문을 외우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소망하죠. ‘저 물건이 가지고 싶다’라고 강하게 소망하면 어느새 물건이 둥둥 떠서 손에 잡히는 식으로요. 그러면 물건이 원래 있던 곳과 오게 된 곳 사이에는 마나의 흔적이 남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마나의 흔적이 있는 건가? 마법을 썼기 때문에?”

    “네. 이렇게 흔적이 강렬한 경우는 보통 사람이 이동하는 경우에 나오는데, 마법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 누군가를 조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고, 아마 자신에게 건 모양입니다. 제 생각에 이 사람은 아마 여기에 있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군요.”

    시에나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전에 아이작이 감옥을 빠져나온 현상과 비슷하지 않은가. 그게 순간 이동으로 빠져나온 거라니, 소설 같은 일이 현실로 일어나자 좀처럼 믿기지가 않았다.

    “그럼 어디로 갔는지도 알 수 있나?”

    “그럼요. 저를 뭘로 보시는 겁니까?”

    “어디로 갔지?”

    “알려 드리고 싶지 않은데요.”

    데이몬의 이마에 푸른 힘줄이 돋았다. 공작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당장 말해, 급한 일이다.”

    “마법 배우기 싫으시다면서요. 저도 싫은 건 싫습니다.”

    “아이가 사라졌다고!”

    “저와 상관있는 아이는 아니죠. 어린애라면 정말 죽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스르릉.

    놀리듯이 말하는 사이에게 결국 데이몬은 검을 뽑았다. 어둠 속에서 금안이 맹수처럼 흉흉하게 빛났다. 사이는 그가 이렇게까지 반응할 줄 몰랐다는 듯 하늘하늘 뛰어 공작의 뒤로 숨었다. 그런 사이를 데이몬이 기가 차다는 듯 노려보았다.

    “공작님 조카가 너무나 무섭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게 도발은 조금만 하지 그랬나. 나도 내 조카가 이렇게 화난 건 처음 보네.”

    “이게 다 공작가의 마법사라고는 저 하나밖에 없어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지는 않으시나요? 얼마나 사람이 없으면 마법의 마 자도 모르는 초짜를 데려다가 키워 보려고 하고 있겠어요.”

    “그게 다 자네의 지랄 같은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나? 스카우트 하는 족족 다 재능 없다고 독설을 내뱉으니 그 사람들이 도망가지.”

    “스카우트해 오는 사람들이 7클래스도 안 되니 그런 것 아닙니까? 기사단은 검기를 쓸 수 있어야 들여보내시면서, 왜 마법은 7클래스를 못 넘는 인간들만 데려오시는 겁니까.”

    “7클래스가 넘는 인간은 자네랑 궁중 마법사 셋밖에 없으니 그렇지! 드래곤이라도 데려와야 속이 시원하시겠군!”

    “한번 보고 싶긴 하네요.”

    “숙부님! 저는 지금 바쁩니다. 빨리 대답하도록 명령을 내려 주세요.”

    데이몬이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으로 사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공작은 두 사람 사이에 낀 것이 곤란한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사이, 좀 말해 주지.”

    “싫습니다. 드디어 쓸 만한 인력이 생겼는데 포기하고 싶지 않거든요.”

    “저 애는…!”

    공작은 무어라 외치려다 시에나를 의식한 듯 조용히 사이의 귀에 속삭였다. 이야기를 듣던 사이의 눈이 침울해졌다.

    “그럼 입단 못 시키잖아요.”

    “그래, 그러니 헛수고하지 말고 말해 주게.”

    사이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나 그 표정이 침울한지 귀가 축 늘어지는 환상까지 보이는 것 같았다. 공작은 아마 데이몬이 황제의 숨겨진 자식이라는 이야기를 한 듯했다. 현 황제의 자식이라는 소리에도 전혀 놀라지 않고 그저 입단을 시키지 못한다는 것에 포인트를 두는 게 확실히 평범한 사람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그럼 만약 이 마법을 쓴 애가 살아 있으면 걔라도 주세요.”

    “그건… 내가 결정할 바가 아니야.”

    데이몬이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사이는 늘어진 눈꼬리로 그를 표독스레 노려보며 말했다.

    “아니, 도련님은 마법을 배우기도 싫다. 이 사람을 주기도 싫다. 두 개나 거절하시면서 왜 저한테는 요구만 하시나요? 조금 치사하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대체 마법사들의 뇌 속은 어떻게 되어 있길래 저런 사고를 할 수 있는 걸까. 시에나는 진심으로 그의 뇌를 꺼내어 보고 싶어졌다. 데이몬도 비슷한 생각인지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기묘한 침묵이 이어지더니 결국 데이몬의 입에서 먼저 항복 선언이 나왔다.

    “만약 무사히 데려온다면, 설득해 보도록 하지.”

    “흠…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알겠습니다.”

    사이는 못 이기는 척 말하며 벽 앞에 서서 손을 휘휘 내저어 방해꾼들을 물러나게 했다.

    “자, 여기서 전부 다섯 걸음씩 물러나 주세요. 방해됩니다.”

    데이몬이 이를 으득 갈며 시에나의 손을 잡고 뒤로 물러섰다. 마법사는 벽 앞에 손을 대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길게 내리깔린 속눈썹이 온통 희었다.

    ‘알비노인가?’

    시에나는 문득 생각했다. 흰색에 가까운 은색 머리칼, 색소가 부족해 보이는 창백한 피부와 반대로 붉은 색소가 몰린 것 같은 붉은 눈. 이 세계에도 알비노가 있구나. 그의 외모를 몰래 뜯어보고 있는데, 그의 은색 머리칼이 하늘하늘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다음은 로브가 바람에 팔락팔락 날렸다. 모은 손안에서는 빛의 몽우리가 얕게 회오리쳐 올라갔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데이몬조차 그 아름다운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사이, 평소에는 그런 연출 안 했지 않나.”

    그 순간,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 머리칼이 내려가고 로브의 팔락임이 멈추더니 빛도 사라졌다. 복도는 다시 순식간에 캄캄해졌다.

    “이런 걸 보여 주면 혹시 조카분께 호기심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애들은 급해 보이니 빨리 좀 찾아 주게.”

    사이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건 아까 찾았습니다.”

    “어디인가?”

    “어디지?”

    데이몬의 다급한 물음에도 사이는 그를 바라보며 아쉽다는 듯 쩝쩝 입맛을 다시다 벽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펜이 쥐어져 있던 건 아니었는데도 손끝에서 빛이 흘러나와 손이 지나갈 때마다 형태를 갖추어 나가고 있었다. 불분명해 보였던 형태가 점점 선명해지더니, 시에나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사이가 그리던 것은 마르바스 영지 주변의 지도였다. 마치 인쇄한 것 같은 정교함에 시에나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여깁니다.”

    사이가 손을 꾹, 짚어 말해 주었다. 사이의 손이 스툼과 레네톤 사이를 완벽하게 짚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공작의 입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여긴, 영지전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 아닌가.”

    “그렇죠. 여기로 갔네요. 전쟁터 한가운데로 떨어졌으면 이미 죽었겠는데요.”

    아무렇지도 않은 말을 냉큼 뱉는 마법사의 뺨을 후려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내리누르며 시에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아이작이 여기 있다는 건가요? 틀렸을 가능성은 없고요?”

    시에나의 말에 사이는 몹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무것도 틀려 본 적이 없어. 이 맹랑한 꼬맹아.”

    “시에나한테 함부로 말하지 마.”

    데이몬이 으르렁대자 그는 흠칫 놀라 다시 공작의 뒤로 숨었다. 공작은 그의 태도에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말했다.

    “그만하게. 시에나, 미안하군. 우리 마법사가 부족한 점이 많네.”

    “아뇨, 괜찮습니다.”

    “아마 틀렸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걸세. 성격은 이 모양이지만 제법 유능하거든.”

    세상에. 시에나는 눈앞이 새카매지는 것 같았다. 고작해야 성 밖이나 집에 갔을 줄 알았던 아이작이 지금 전쟁터 한가운데에 있다니. 저번처럼 생명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오늘은 날이 늦었으니 내일 아침이 되는 대로 전령을 보내 찾아보도록 하지.”

    “아니요, 내일은 너무 늦어요. 지금 마나를 많이 써서 아픈 상태일 거예요. 빨리 찾아야 해요.”

    “그 맹랑한 꼬맹이 말이 맞아요. 내일 아침에 찾으면 아마 시체로 발견될걸요.”

    공작의 말에 시에나가 반박했다. 그러나 공작은 곤란한 기색이었다.

    “지금 영지전을 하고 있는 곳에 우리가 끼어들면, 자칫하면 삼파전으로 번질 수가 있어. 그건 너무 위험해. 여기엔 군사도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잖나. 내가 데려온 기사단은 너무 적고 지쳐 있네.”

    공작은 현실적인 문제를 짚었다. 그러나 이대로 가면 정말 아이작은 죽을지도 모른다. 시에나가 간절한 표정으로 데이몬을 바라보았다. 데이몬의 얼굴 역시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럼 비공식적으로 다녀오면 되지 않습니까. 새벽에 움직여서요. 아이의 어머니가 제 편을 들다 리메리오 남작의 손에 죽었습니다. 이 아이까지 잃을 수는 없어요.”

    데이몬이 호소하듯이 간절한 목소리로 말하자 공작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마르바스 영지 전체의 위험을 생각하고 있는 그로서는 쉽지 않은 일일 터였다. 공작이 망설이고 있을 때, 어둠 속에서 또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게 다 무슨 소리십니까…? 아이작이 왜 그런 위험한 곳에 있다는 건가요…?”

    겁을 잔뜩 집어먹은 노파가 당황하며 물었다. 노파의 등장으로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졌다. 그녀의 질문에 대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에나조차 굳어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나온 노파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시, 시에나. 이게 무슨 소리인지 제발 말 좀 해 주렴. 아이작이 위험한 전쟁터에 있다는 게 사실이니…?”

    시에나는 노파가 자신을 지목하자 입술을 꽉 깨물었다. 풀로 딱 붙이기라도 한 것처럼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에나… 제발… 말 좀 해 주렴… 제발…!”

    노파는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결국 데이몬이 나서서 대답했다.

    “아이작이 영지전을 벌이고 있는 전쟁터에 떨어진 건 맞아. 그렇지만 지금은 안전한 곳에 있을 수도 있네.”

    “아아아, 어떻게 그런 일이….”

    데이몬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노파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털썩 주저앉았다. 시에나가 재빨리 다가가 노파를 부축했다.

    “할머니…! 바닥이 차요. 일어나세요.”

    “마나는 조모 혈통이었나 보군. 이것 참, 이 성은 거의 노다지인걸.”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즐거워 보이는 사이를 시에나가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 사이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공작의 뒤로 쏙 숨었다. 언젠가 꼭 때린다. 시에나가 이를 갈았다. 노파는 저를 침통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공작에게 엎드린 자세로 엉금엉금 기어가 다리를 붙잡았다.

    “공작 각하. 제발, 제발 제 손자를 구해 주세요. 하나뿐인 제 가족입니다… 제발. 뭐든지 하겠습니다.”

    애절한 노파의 말에도 공작의 굳어진 표정은 풀릴 줄을 몰랐다. 노파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었다.

    “제발, 한 번만 자비를…! 제발…! 손자까지 잃으면 저는 정말 죽습니다…!”

    피 끓는 절규에 공작은 결국 눈을 감아 버렸다. 질끈 감은 두 눈 사이로 고뇌가 엿보였다. 그 순간, 데이몬이 노파의 옆으로 가 함께 무릎을 꿇었다.

    “숙부님.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데이몬, 너까지…!”

    공작이 철없는 아이를 혼내키는 것처럼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데이몬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이 사람이 가족을 잃게 된 건 다 저 때문입니다. 마지막 가족까지 잃게 만들면 마르바스의 명예는 땅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금안이 또렷하게 공작을 응시했다. 시에나 역시 데이몬의 옆으로 가 무릎을 꿇었다.

    “아까 말씀하셨던 그 소원을 지금 쓰겠습니다. 아이작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자신을 간절히 바라보는 세 쌍의 눈동자에 결국 공작은 항복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공작은 망설임 끝에 침통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알겠으니 다들 일어나게.”

    셋의 표정이 단숨에 밝아졌다. 노파는 일어나라는 말에도 엎드려 엉엉 울며 연신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인사는 접어 두지. 아직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말이야.”

    시에나가 엎드린 노파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는 노파를 시에나가 달래고 있는데 공작이 데이몬을 향해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

    “데이몬, 철없는 도련님이 될 각오는 하고 있나?”

    철없는 도련님? 데이몬은 공작의 의중을 알기 위해 잠시 그의 눈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물론입니다.”

    “이날의 일은 황궁의 귀에 들어갈 수 있다. 언젠가 네 과오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어. 정말 괜찮겠나?”

    공작의 말투는 겁을 주려 한다기보다는 지극히 기본적인 상식을 말하는 듯 담담했다. 그러나 데이몬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예. 괜찮습니다.”

    데이몬의 대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말없이 한참이나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공작의 입이 열렸다.

    “스툼과 레네톤에 공문을 보내도록 하지. 마르바스의 어린 영주와 그 호위가 치기 어린 마음에 영지전을 구경하러 갔다가 실종되었으니 수색을 허해 달라고.”

    데이몬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힘 있게 외쳤다.

    “예!”

    * * *

    공작은 그 즉시 기사단 사람들을 깨워 소집했다.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흥청망청 놀다가 잠든 사람들이라 깨우기가 어려울 줄 알았는데, 한밤중의 소집 명령에도 즉시 일어나 공터 앞에 대기하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에는 정말 놀라웠다.

    개중에서 공작은 뽑은 정예 멤버는 열 명 정도였다. 더 많아지면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사이는 정말 가고 싶지 않다는 듯 잠시 사라졌다가 분홍색 꽃무늬 잠옷을 입고 나타났지만, 공작은 기어코 정예에 그를 끼워 넣었다. 덕분에 사이는 지금까지 죽상이었다.

    시에나도 그 멤버에 자원했다. 데이몬은 말리고 싶어 했지만 아이작의 얼굴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믿음직한 사용인이 거의 없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함께하는 걸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노파 역시 함께 가고 싶어 했지만 뛰는 것조차 쉽지 않아 보여 데이몬과 시에나의 만류 끝에 포기했다. 아이작의 얼굴을 아는 로하엘도 함께 가게 되었다. 로하엘이 함께 간다고 생각하자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정예 멤버들이 정비를 할 동안 준비를 마친 그들은 응접실에서 대기했다.

    데이몬은 그들에게 보여 주기식으로 등장시켜야 했기에 데려가지만, 안전상의 문제로 그 근처에만 대기하고 있게 했다. 그것이 불만스러운지 데이몬은 지금 공작을 격렬히 설득하고 있었다.

    “시에나도 그 전쟁터 속으로 들어가는데 저라고 왜 못 들어갑니까! 조금 전만 해도 검술이 많이 늘었다고 칭찬해 주셨잖아요!”

    “널 대신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마차 안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도 충분히 위험하다. 나 역시 시에나를 데려가고 싶지 않아. 지금이라도 포기해도 좋네.”

    공작은 데이몬이 아닌 시에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도 함께 가게 해 달라는 말입니다.”

    “영주와 영지민의 목숨은 절대 같지 않다, 데이몬. 영주가 잘못된다면 영지민들 전체가 흔들리게 되어 있어. 게다가 우리는 공문에 너와 아이작을 찾기 위해 들어간다고 말해 놓았어. 대체 데이몬 너는 누구라고 하고 들어갈 거지? 신원 검사를 누구보다 확실히 할 그들 앞에서 가면이라도 쓸 생각은 아니겠지?”

    데이몬은 말문이 막혔는지 잠시 멈칫했다. 대외적으로는 어린 영주인 데이몬이 전쟁을 구경하고 싶다며 철없이 시종을 데리고 가출을 한 걸로 되어 있기 때문에 데이몬은 얼굴이 공개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데이몬은 자신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몹시 분해 보였다. 하지만 공작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데이몬 역시 그 사실을 알았음에도 상대가 아이작인지라, 또 시에나가 전쟁터를 돌아다닌다고 하니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그 근처까지 데이몬을 데리고 들어가는 건 명백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시에나가 공작의 편을 들며 말했다.

    “그래요, 도련님. 이건 어쩔 수가 없잖아요. 이러다 들키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검은 머리에 금색 눈이 흔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으로 변장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힘들 거예요.”

    “시에나, 바로 그거야!”

    데이몬이 소파에 붙인 엉덩이를 떼어 내며 벌떡 일어섰다. 시에나가 깜짝 놀라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네…? 뭐가요?”

    “다른 사람으로 변장하는 거 말이야. 저 사람도 가니까 마법으로 바꾸면 되는 거잖아. 그러다가 아이작을 발견하고 풀면 되는 거고!”

    데이몬은 조금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시에나는 어안이 벙벙해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옷을 갈아입은 사이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안 해 드릴 겁니다.”

    “왜지?”

    “제가 왜 해 드려야 하죠? 저는 지금도 충분히 피곤해요. 그런 소꿉놀이 같은 장난에 맞춰 드리고 싶은 기분이 아닙니다.”

    그리고는 이제는 알아서 공작의 옆으로 가더니 팩 고개를 돌렸다. 공작은 여전히 엄한 눈으로 데이몬을 바라봤다. 데이몬이 인상을 쓰며 뭐라고 말하려 하다, 공작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걸 알았는지 이내 감정을 내리누르고는 그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혹시 돈 좋아하나?”

    “하이고, 돈은 차고 넘칠 만큼 많습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느라 바빠서 쓸 수도 없다고요!”

    “그럼 명예는?”

    “대마법사라는 제 존재 자체가 명예입니다. 이외의 수식어가 뭐가 필요합니까?”

    “그 마법을 걸 자신이 없는 건 아니고?”

    “뭐라고요?!”

    사이가 도끼눈을 뜨고 데이몬을 노려보았다. 데이몬은 짐짓 걱정하는 척하며 그를 신랄하게 깠다.

    “아니, 수색이 워낙 삼엄하다니까 변신을 풀게 할 마법쯤은 걸려 있을 거 아니야. 네가 그 수색에 걸릴 것 같으니까 일부러 발을 빼는 건 아니냐는 말이었다.”

    “제가… 이 새벽에 와서 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절대 아닙니다….”

    사이는 넘어가지 않으려고 부들부들 떨었지만 데이몬이 마지막으로 사이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아, 역시 안 되는구나. 그럴 수도 있지. 이해해. 실력이야 키워 가면 되는 거니까.”

    “누가 안 된다는 겁니까! 그깟 수색 마법 따위 저한테는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그런데 왜 안 하겠다는 거지? 내심 자신 없으니까 그런 거 아닌가?”

    사이의 새하얗던 얼굴은 불에 달군 쇠주전자처럼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콧김이 보이는 듯한 환상까지 느껴졌다.

    “좋습니다! 바꿔 드리죠! 절대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방향으로요!”

    순간 펑 소리와 함께 자욱한 안개가 흘러나와 방을 둘러쌌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에 당황한 시에나가 앞을 더듬거렸다. 시에나의 손에 길고 보드라우면서도 살짝 차가운 손가락이 만져졌다.

    “도, 도련님?”

    “시에나? 시에나야?”

    “네, 저 맞아요.”

    “안개 좀 걷지, 사이.”

    “예.”

    공작의 말에 자욱하던 안개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시에나는 그제야 앞에 있는 데이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가씨?”

    허리까지 구불구불 내려오는 웨이브 진 초록색 머리칼, 시에나만큼이나 흰 피부에 별처럼 박힌 녹안, 립스틱을 바른 듯 붉은 입술은 순간 모두의 눈길을 빼앗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시에나는 낯선 여자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손을 떼었다. 그 여자는 바로 상처받은 눈길로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그 익숙한 눈길에 시에나는 혹시나 하며 물었다.

    “도련님…?”

    “어?”

    세상에. 여자는 너무나 달콤한 목소리로 답해 왔다. 시에나가 경악하며 사이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역시 잘되었군.”

    데이몬은 가슴 아래로 내려온 초록색 머리칼을 보며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장식장의 유리문에 가서 자신을 비춰 보았다.

    “이게 뭐야-!”

    치렁치렁한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데이몬은 비명을 질렀다. 데이몬은 늘씬한 미녀로 변해 있었다. 평평했던 상의의 가슴 부분은 볼록 튀어나와 있었고, 허리는 잘록한 데다 엉덩이 쪽도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만족스러워하는 사람은 오직 사이뿐이었다.

    “도련님께서 제 능력을 의심하시기에, 완벽을 기하지 않았습니까.”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게 무슨 완벽이야!”

    “허허, 우리의 주신이신 이스테라 여신이 괜히 여자의 모습으로 강림하신 게 아니죠. 여자가 완벽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여자가 될 기회가 인생에 또 몇 번이나 있겠습니까. 잠시나마 즐겨 보시죠.”

    “마법사 주제에 신을 따르는 척은! 당장 원래대로 바꿔 놔!”

    “그럼 도련님께서는 안에 들어가지 못하실 텐데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는 더 이상 변신시켜 드리지 않을 겁니다.”

    또라이 마법사에게 당한 데이몬은 씩씩거렸지만, 쉽사리 원래대로 만들라 말하지는 못했다. 넋을 잃고 소파에 앉은 데이몬을 보며 시에나가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쓸어내리며 위로했다.

    “도련님… 그래도 정말 예뻐요… 정말 저보다 예쁘신걸요….”

    “시에나….”

    시에나의 위로를 받은 데이몬의 표정이 더욱 처참하게 변했다. 위로를 받기 전보다 더 어두워진 안색에 시에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좌절하고 있는 데이몬은 몰랐겠지만 공작은 내심 이 상황이 재밌는지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웃음을 참는 것이 분명했다. 참고로 로하엘은 소파 뒤에서 대놓고 웃고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알겠네, 금방 가도록 하지.”

    공작이 자리에 일어나 차마 데이몬을 똑바로 보진 못하고 사선 방향으로 서서 말했다.

    “네 원대로 되었으니 안으로 들어가는 것 역시 허용하지. 다만, 위험한 일이 있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자리를 빠져나올 것. 알았나?”

    데이몬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공작은 데이몬의 대답이 흡족한지 입꼬리를 올리며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자아, 출발하지.”

    * * *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편자를 박은 말발굽이 찐득한 진흙을 차는 소리가 마차 안에서도 선명히 들렸다. 시에나는 노파에게서 받은 숄을 더욱 단단히 둘렀다. 데이몬은 여전히 얼이 빠져 있었지만 그래도 도착해서 해야 할 일을 되뇌는 등 아까보다는 조금 정신을 차린 듯 보였다.

    “도련님, 따뜻한 차예요. 좀 드세요.”

    “그런데 이젠 도련님이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지 않습니까? 어엿한 아가씨인걸요.”

    함께 마차에 탄 로하엘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물었다. 데이몬이 죽을 듯이 그를 노려보았지만 로하엘은 연인의 손수건을 받은 남자처럼 흐뭇한 미소를 유지했다.

    “그 입 좀 다물지.”

    “어이쿠, 조심하겠습니다.”

    전혀 조심성 없는 말투로 로하엘이 대답했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로하엘을 보지 않는 걸 택했는지 데이몬은 차를 쭉 들이켜고 벽에 머리를 기댔다. 이제 막 출발했을 뿐인데 데이몬은 모든 기력을 소모한 듯 보였다.

    “피곤하면 좀 주무세요.”

    시간은 벌써 새벽 두 시, 잠자리에 들었어도 진작 들었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데이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 이 정도는.”

    “그래도… 하암.”

    하품을 한 건 오히려 시에나 쪽이었다. 데이몬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담요를 둘러 주며 말했다.

    “오히려 시에나가 눈을 붙여야겠는걸. 피곤할 텐데, 괜히 데려온 것 같아.”

    “무슨 소리세요. 아이작의 얼굴을 가장 잘 아는 건 저인걸요. 제가 빠질 수는 없죠.”

    워낙 조용히 사는 노파와 아이작이었기에 사용인들조차 아이작의 얼굴을 분명히 기억하지 못했다. 약 제조법을 전수받느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시에나, 그리고 둘과 독대한 적 있는 데이몬, 로하엘 정도가 그들의 얼굴을 선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또다시 하품이 나오자 로하엘이 몸을 들썩이며 자리를 내주었다.

    “이쪽으로 기대요, 시에나.”

    “네? 아뇨, 저 진짜 괜찮아요!”

    손사래를 쳤지만 로하엘은 뭐 어떻냐는 표정이었다.

    “영지와 영지 사이가 멀어서 꽤 가야 합니다. 멀미가 날 수도 있으니 잘 수 있을 때 자는 게 좋아요.”

    “그래도….”

    어정쩡하게 거절하며 고개를 돌리다 설핏 데이몬의 표정이 보였다. 초록색 눈 안에는 혼란스러움과 슬픔, 아쉬움이 뒤섞여 있었다. 퍼뜩 시에나가 정신을 차리고 데이몬을 바라보았다. 그는 시에나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깜짝 놀라 표정을 가다듬었다.

    “난 괜찮으니 기대어도 돼.”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흉내 내려 했지만 떨림은 숨길 수 없었다. 시에나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졌다.

    “도련님, 타이밍이 계속 안 맞아서 얘기를 못 했는데 말씀드릴 게 있어요.”

    “…뭔데?”

    데이몬은 안 그런 척하지만 조금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시에나는 자신의 앞에 선 녹안의 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랑 로하엘 님은 전혀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어?”

    데이몬은 얼빠진 얼굴을 했다. 데이몬의 하얀 찹쌀떡 같은 피부를 손으로 감싸며 시에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로하엘 님과 저는 연인 관계도 아니고, 앞으로 이성적인 관계로 발전할 일이 단 1브론즈어치도 없으니 오해하지 마셨으면 좋겠어요.”

    모습이 바뀌기는 했지만 피부 결은 같았다. 오히려 좀 더 매끈매끈해진 것도 같고… 그런데, 그 피부가 점점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저, 정말?”

    “예. 정말이요. 그러니까 서운해하지 마시고, 분위기를 보신답시고 빠져 주시려고 하지도 마세요. 저는 도련님이 저를 예전처럼 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누, 누가 서운해했다고 그래? 난 아무렇지도 않아.”

    젠체를 하지만 데이몬의 표정은 아까의 긴장감 어린 얼굴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흐물흐물하게 퍼져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시에나가 은근슬쩍 데이몬을 놀려 보기로 했다.

    “어머, 그러면 제가 어떤 사람이랑 연애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으실 건가요?”

    데이몬의 머리 위에는 물음표가 띄워져 있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청천벽력이냐는 표정이었다.

    “누, 누군가 마음에 둔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글쎄요.”

    시에나는 부러 새침하게 답했다. 그 말에 데이몬은 더욱 안달이 난 모양이었다. 로하엘은 이 광경이 몹시 재미있다는 듯 흥미진진하게 둘의 접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승자는 언제나 시에나였다.

    “그, 그럼. 시에나가 누구랑 연애하든 상관은 없지. 나랑 상관은 없는데….”

    데이몬은 말을 더듬으며 불쌍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아아, 청초한 미인의 시무룩한 얼굴이 이다지도 아름다운 것이었나. 시에나는 가슴이 아릿해지면서도 두근두근했다. 울망울망한 데이몬의 눈망울에 시에나는 자신이 그쪽 취향은 아닌지 잠시 고민해보아야 했다.

    “알고 싶으세요?”

    “응?”

    “제가 누굴 좋아하는지 알고 싶으신가요?”

    그렇게 말하며 시에나는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그 모습이 참으로 요망하기 그지없었다. 데이몬은 그런 시에나의 모습에 쩔쩔매면서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시에나의 눈치를 보며 데이몬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 모습을 보면 바로 알려 주고 싶지만, 지금까지 마음고생한 걸 생각하면 솔직히 사흘 밤낮은 더 놀려도 모자랐다. 시에나는 한 번 더 튕기기로 했다.

    “비밀이에요.”

    “뭐… 뭐야! 알려 주는 게 아니야?”

    “바로 알면 재미없잖아요?”

    “난 무지 재밌는데.”

    “저는 재미없어요.”

    데이몬은 그 후로 몇 번 더 알려 달라 졸랐지만 시에나는 완강했다. 결국 데이몬은 고개를 추욱 늘어뜨린 채 말문을 닫았다. 마차가 이따금 달캉달캉 흔들릴 때마다 들리는 얼굴에는 풀죽은 기색이 역력했다. 마음이 약해진 시에나는 한 가지 힌트를 더 주기로 했다.

    “그럼 힌트 드릴까요?”

    “어? 힌트?”

    “싫으시면 말고요.”

    “좋아! 힌트 줘.”

    “그 사람의 이름은, D로 시작해요.”

    밝아진 데이몬의 표정이 다시 싸하게 식었다.

    “그게 끝이야?”

    “네.”

    시에나는 상큼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옆에서 로하엘은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데이몬은 시에나가 더 알려 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아서인지 더 이상 묻지 않고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마르바스성 남자들의 이름 중 D가 들어가는 사람들을 찾고 있겠지. 자신의 이름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뭐,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 제일 애정을 품고 있는 상대가 데이몬이니 완전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꽉 끌어안고 볼에 입을 맞추는 걸 고민하고 있을 때, 마부석과 연결된 작은 문이 열렸다.

    “다 와 갑니다. 준비 부탁드립니다.”

    “예.”

    벽난로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듯한 따스함은 사라지고, 순식간에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열린 창문 밖으로 새큼한 피 냄새가 나는 듯했다. 새삼 전쟁터와 가까워졌다는 실감이 났다. 로하엘은 묵묵히 검집을 다시 재정비했다. 데이몬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에나는 긴장한 듯 심호흡을 했다.

    마차는 어느덧 영지의 문 앞에 멈추어 섰다. 마차 창밖으로 험상궂은 표정의 경비원 몇몇이 마차를 에워쌌다. 시에나와 데이몬은 창문에 달라붙어 그 장면을 구경했다. 앞서간 마차에서 문을 열고 호위 둘과 공작이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공작의 얼굴을 알아보았는지 쩔쩔매며 고개를 숙였다. 검은 머리와 금색 눈은 황궁의 상징이었기에 못 알아보는 게 더 이상했다.

    시에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앞의 장면을 계속 응시했다. 영지전을 할 때 다른 영주가 영지를 방문하는 것은 몹시 위험하고도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도 한밤중에. 그들이 통과를 시켜 줄지조차 의문이었다. 그러나 공작이 몇 번 대화를 나눈 후 끼이익, 성문이 바로 열리기 시작했다. 시에나는 황망한 눈길로 열리는 문을 바라보았다.

    “이게 이렇게 쉽게 되는 거였나요?”

    “그러게 말입니다….”

    로하엘조차 슬쩍 당황한 눈치였다. 거의 1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성문이 바로 열린 것이다. 사람도 짐도 수색하지 않고 바로 프리 패스라니,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눈으로 봐 놓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끼이익, 기름을 먹인 마차의 바퀴가 부드럽게 굴렀다. 마차가 잘 닦인 길을 달리기 시작하자 비포장도로를 달리던 때와 같은 소음은 더 없었다. 끝없이 늘어진 오솔길을 달려 마차는 성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영주는 의외로 그들을 아주 반갑게 맞이했다. 아까 말을 타고 빠른 속도로 지나갔던 파발이 그들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알린 모양이었다. 영주는 배가 두드러지게 나온 50대 남자였다.

    남산만 한 배와는 상반되게 튜닉 밑으로 앙상한 다리가 드러나 있었다. 희끗희끗한 흰머리는 중후했지만, 툭 튀어나온 볼은 욕심이 많아 보였다. 볼 한쪽에는 선이 그어진 듯한 자국이 있었는데, 아마 자고 있다가 공작이 온다는 소식에 헐레벌떡 일어나 준비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 반증으로 옷은 갖추어 입었지만 발에는 털이 달린 실내용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영주를 관찰하고 있을 무렵, 마차 문이 열리고 시원한 바람이 훅 들어왔다. 그 바람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 시에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익숙한 듯 로하엘이 내리고 시에나가 내리려는데, 데이몬이 먼저 선수를 쳐 내려오려다 천장에 머리를 쿵 부딪쳤다.

    “윽.”

    “도련님, 아아니. 아가씨, 괜찮으세요?!”

    시에나가 놀라 물었다. 차례를 지켜서 내려왔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시에나를 피해서 먼저 내리려다 머리를 박은 모양이었다. 당황해서 얼떨결에 데이몬을 먼저 내리게 해 주었는데, 그가 멋쩍은 듯 머리를 매만지며 시에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제야 데이몬의 뜻을 알아챈 데이몬의 손을 자신의 손 위에 얹었다. 이게 하고 싶어서 먼저 내리려 했던 거였구나. 약간 어설픈 에스코트가 그렇게 귀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아까만 해도 너무 긴장하는 바람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었는데, 덕분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도련님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뒤 시에나는 공작의 곁으로 다가갔다. 호위들은 이미 단정히 열을 갖추고 공작의 뒤에 나란히 서 있었다.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기 위해 무장한 갑옷 위에 평상복을 입었지만, 오랫동안 단련해 온 사람들 특유의 강인하고 딱딱한 분위기가 성 앞을 경직되게 만들었다.

    깊은 잠에서 억지로 깨어났을 영주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공작에게 반가운 체를 했다. 짜증이 난 기색을 숨기려고 미소 짓는 입꼬리에 경련이 나는지 두툼한 볼이 푸실푸실 떨렸다.

    “공작 각하. 어찌하여 이 누추한 곳까지 방문하셨습니까.”

    “늦은 밤에 실례가 많소, 백작.”

    “실례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공작 각하께서 이 늙은이를 찾아 주신다면 언제라도 환영입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감사하군. 다름이 아니라 내 조카 녀석이 사고를 쳐서 말일세.”

    “예? 조카분이라 하심은….”

    공작은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백작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그 말을 들은 백작의 얼굴이 시시각각 다른 색으로 변했다. 빨개졌다가, 파래졌다가, 하얘졌다가, 급기야 거무죽죽해지기까지.

    “그래서 조카 녀석과 시종이 둘 다 실종된 상태일세. 마지막으로 발견된 장소가 여기인지라 시기가 좋지 않음을 알면서도 이렇게 무례를 범하게 되었군.”

    “아, 아, 아, 아닙니다!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으셨을지, 이 파블로 백작은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혹 영지전을 벌이고 있는 곳을 조금 수색해도 되겠나? 물론 상대편 쪽에도 서신은 보내 놓았네.”

    백작의 거무죽죽한 안색은 서신 대신 공작이 직접 왔다는 사실로 인해 조금 밝아졌다. 사실 마차와 짐을 둘 곳이 필요했던 거겠지만… 시에나는 조용히 입 다물고 있기로 했다.

    “네, 네, 물론이지요. 얼마든지 묵으셔도 괜찮습니다.”

    “아마 얼마 걸리지 않을 걸세. 발견 후 혹여나 있을 불상사를 위해 며칠 머무를 수는 있네. 물론 사례는 톡톡히 하지.”

    공작의 말에 백작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북부의 넓은 대지를 다스리는 공작은 통이 크기로 유명했다. 시에나에게 그만큼의 보석을 줘 놓고도 어떻게든 보상을 더 해 주려 하는 공작이었으니까.

    “그, 그럼요! 당장 가장 좋은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손님맞이 준비를 하지 않아 누추하지만, 안쪽으로 드시겠습니까?”

    “갑작스럽게 찾아온 객이니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네. 그렇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하다 보니 바로 전쟁터로 가는 게 좋겠군.”

    “사랑하는 조카가 사라지셨으니 마음이 얼마나 타시겠습니까. 그럼 마차와 짐만 안으로 옮겨놓겠습니다. 아, 새 말을 드릴까요?”

    “음, 그게 좋겠군. 말들이 많이 지쳐 있어서.”

    “예,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이봐-!”

    지금 가져온 말은 기사단이 몬스터 토벌을 할 때 계속 곁에 둔 말들이었다. 곡물을 먹고 반나절 푹 쉬기가 무섭게 다시 일하게 하는 인간이 아니꼬웠는지 마부가 치일 뻔도 했다고 했다.

    백작은 공작이 사례하겠다는 말을 듣고는 아낌없이 자신의 것을 내주려 하고 있었다. 금세 그들의 앞에 잘 훈련된 말들이 놓였다.

    “시에나, 혹시 말을 탈 수 있나?”

    “아니요, 저는 마차밖에 타 본 적이 없어요.”

    “그렇다면 마차 한 대는 그대로 타고 갈 테니 말만 바꿔 주게.”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아리따운 숙녀분들도 함께 전쟁터로 가시는 겁니까?”

    파블로 백작은 시에나와 데이몬에게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시에나를 탐욕스럽게 훑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데이몬은 금방이라도 죽일 듯이 파블로 백작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눈치가 없는 건지 오래 살고 싶지 않은 건지 이번에는 데이몬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데이몬의 현재 모습은 아프로디테의 조각상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이 아름답긴 했지만, 이렇게 빤히 바라보는 건 분명 무례한 행동이었다.

    “그래. 이래 보여도 사람을 찾는 데에는 귀재들이라네.”

    “그렇군요. 이렇게나 아름다우신데 대단하십니다. 특히 초록색 머리칼의 여성분은 제가 만난 어떤 레이디들 중에 가장 아름다우시군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미도 저분 앞에는 무용지물일 듯합니다. 혹 손등에 키스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파블로 백작의 말은 청산유수였다. 시에나와 데이몬은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구려!’

    요즘 유혹은 절대 저렇게 안 한다고요. 그러면서 데이몬을 설핏 바라보자 그는 부글부글 끓고 있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최대한 노력 중이었다. 그 모습을 사이가 코를 슥슥 문지르며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파블로 백작이 다가오는 바람에 데이몬이 터지기 직전, 공작이 그를 제지시켰다.

    “사람을 찾는 데에도 귀재지만 사람 죽이는 데에도 선수라네. 가까이 다가가면 다칠 수 있으니 조심하게나, 백작.”

    공작의 경고를 단박에 알아들었는지 백작은 창백하게 질려 한 걸음 물러났다. 백작은 데이몬과 시에나를 공작의 정예 부하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이거,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더니 더 가까이 다가갔다간 자칫 찔릴 뻔했군요. 이제 준비가 다 된 듯합니다. 저희 쪽의 호위를 하나 붙여 드리겠습니다. 호위가 전쟁터로 안내할 겁니다.”

    언변은 몹시 구렸지만 백작은 빠르게 치고 빠질 줄 아는 남자였다. 괜히 백작까지 올라온 게 아니라는 거겠지. 정비를 마친 공작이 가기 전 초상화 두 장을 건네주었다.

    “동봉한 초상화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데리고 있거나 봤다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이야기해 주게. 그 사람에게도 큰 상을 내리겠네.”

    “아, 예. 알겠습니다. 바로 앞에 걸어 놓도록 하겠습니다.”

    백작은 굽신대며 초상화 두 장을 받아 들었다. 공작이 다시 말 위에 올라타자, 시에나도 마차로 향했다. 이내 마차가 출발했다.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데이몬의 얼굴엔 분노를 삭이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차가 덜컹 움직일 때마다 로하엘의 입에서 비식비식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걸 본 데이몬의 눈에 불이 붙었다.

    “뭐가 그리 재미있나?”

    “예? 아닙니다. 그냥 1년 전에 있던 재미있는 일이 생각이 나서요.”

    “1분 전에 재미있었던 일이겠지.”

    이를 으득 갈며 데이몬이 말하자 로하엘은 유들유들하게 답했다.

    “아니랍니다. 도련님께서도 들으시면 분명 재미있으실 거예요. 제 친구 녀석이 해 준 말인데요. 해프로스 앞바다의 반대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관심 없어.”

    “아이, 그러지 마시고 해 보십시오. 시에나, 시에나도 맞춰 볼 수 있겠어요?”

    “그 글쎄요? 해프로스 뒷바다?”

    “정답은-… 해프로스 엄마다랍니다! 해프로스 아빠다의 반대말이니까 해프로스 엄마다인 거죠! 하하하하!”

    마차의 분위기는 겉잡을 수 없게 싸늘해졌다. 시에나는 아직도 웃고 있는 로하엘을 흐린 눈으로 쳐다봤다. 데이몬의 눈빛은 거의 경멸에 가까웠다. 그때 마차 창문 밖으로 공작이 말 위에 서서 말을 걸었다.

    “또 재미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나, 로하엘?”

    “재미없는 이야기라뇨. 한참 웃고 있는 제가 민망해지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로하엘은 짐짓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지만 공작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네의 유머 감각은 10년은 더 산 나도 견디기가 어렵더군. 첫 전쟁을 겪는 애들한테 긴장감을 풀어 주려는 의도는 좋지만, 오히려 살의가 들끓게 만들지 않기를 바라는 바네. 자네의 유머는 기사단의 신입들조차 견디기 어려워.”

    공작의 말에 로하엘은 조금 머쓱한 얼굴을 했다. 시에나는 그런 유머는 거의 하지 않는 로하엘이 갑자기 왜 그랬는지 조금 알게 되었다. 모르는 척 긴장을 풀어 주려 한 거겠지만, 감각이 없어서 대실패를 한 듯했다. 그걸 제대로 들켜 머쓱한 로하엘의 표정에 결국 시에나가 푸훗,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너무 웃겨…! 로하엘 님, 너무 웃겨요!”

    시에나가 마차 바닥에 발을 구르며 눈물이 쏙 빠질 때까지 웃었다. 웃다가 아파진 배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면서까지 웃자 나중에는 로하엘이 더 당황스러워했다.

    “시에나, 일부러 그렇게 웃지 않아도 됩니다. 제 유머 감각과 맞는 사람은 저희 할머니밖에 없었거든요.”

    “아뇨, 진짜 웃겨서 그래요. 하흐흑.”

    시에나는 거의 울 듯이 웃고 있었다. 로하엘의 개그보다 긴장을 풀어 주려다 상사에게 들켜 머쓱해하는 그의 표정이 너무나 웃겼다. 그렇게 한참을 웃고 나자 긴장도 조금 풀린 것 같았다.

    “감사해요, 정말 덕분에 긴장이 좀 풀린 것 같아요.”

    “다행입니다.”

    로하엘은 그렇게 말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시에나가 웃어 준 게 내심 고마운 모양이었다. 공작은 마차의 창 너머에서 데이몬을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데이몬은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운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데이몬.”

    “예.”

    “지금 네 모습이 달라졌다고 해도 천둥벌거숭이처럼 군다면 그 끝에는 칼이 돌아올 것이다. 명심하도록.”

    “알겠습니다.”

    “절대 흥분해서 먼저 나가는 일 없이 시에나를 최우선으로 지키며 아이작을 찾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공작은 첫 등교를 하는 아이를 챙겨 주듯이 꼼꼼하게 데이몬에게 주의를 주고 경고를 하고, 전쟁과 관련된 잡다한 이야기를 했다. 말 위에 올라타 있으면서도 어쩜 그렇게 청산유수인지, 혹시 공작이 말을 하다 혀를 깨물지는 않을까 시에나는 그게 걱정되었다.

    “그리고 시에나, 전쟁을 보는 건 처음이겠지?”

    “예. 처음이에요….”

    “아무리 우리가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보다 안전하다 한들 우리가 가는 곳은 결국 전쟁터다. 결코 긴장을 늦추지 말고 혼자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

    “네, 그러겠습니다.”

    공작은 여전히 둘이 걱정이 되는지 투 머치 토커에 빙의한 듯 이런저런 소리를 늘어놓았다. 데이몬이 누굴 닮았는지 조금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계속되는 설교에 시에나는 물기 없는 나무처럼 말라비틀어져 가고 있었다. 로하엘이 풀어 놓은 긴장이 다시 재생성되는 기분이었다. 시에나의 가슴이 쿵쿵 떨려 왔다.

    전쟁이라니. 자신이 아는 전쟁이라고는 학교에서 배운 6.25 전쟁과 세계 2차 대전밖에 없었다. 그것도 본 적은 없고 교과서로만 들어서 아는 정도였다.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잔뜩 긴장해 움츠러든 시에나를 로하엘이 부드럽게 달랬다.

    “괜찮습니다, 시에나. 이번 일에서 제 임무는 도련님과 시에나를 지키는 거니까 제 옆에만 있으면 상관없어요.”

    “난 지켜 주지 않아도 괜찮으니 시에나만 철저히 지켜 줘.”

    데이몬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데이몬 자신도 첫 전쟁이라 이것저것 긴장되는 게 많을 텐데도 시에나를 살뜰하게 챙겼다. 그런 데이몬을 보며 정말 많이 크긴 컸구나 하고 느꼈다. 뿌듯하면서도 조금은 서운함이 밀려왔다. 소년이 남자가 되는 시간은 어쩜 이렇게 짧을까.

    “다 왔습니다.”

    “지금은 전쟁이 끝난 밤이니 아주 위험하진 않지만 최대한 조심스럽게, 숨죽여 이동하도록 하지.”

    “예.”

    영지전이 이루어지는 곳은 두 영지 사이의 넓은 평야였다. 시에나는 코끝을 찌르는 악취에 얼굴을 찡그렸다. 피 냄새, 썩는 냄새, 날붙이의 냄새가 뒤섞여 내리지도 않았는데 역겨움을 유발했다. 토할 것 같이 속이 울렁울렁해져 시에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내릴 준비를 하고 있던 데이몬이 그런 시에나를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시에나, 괜찮아?”

    “네… 괜찮아요.”

    그러면서도 시에나의 안색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손발이 차고 몸이 덜덜 떨려 왔다. 솔직히, 무서웠다. 어차피 책 속의 사람들이라고 최면을 걸어 보았지만 느껴지는 오감은 모두 선명했기에. 왜 이렇게 겁이 많은 걸까 나는. 시에나가 속으로 한탄하고 있을 때 시에나의 차가운 손 위에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 온기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니 데이몬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시에나를 보고 있었다.

    “시에나, 많이 힘들면 마차 안에서 기다리겠어?”

    그는 진심으로 시에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데이몬에게도 첫 전쟁일 텐데 이렇게 걱정을 사게 하다니. 시에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더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자. 나는 데이몬의 누나고, 보호자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용기가 났다.

    “아니요. 같이 나갈게요. 지금 한시가 바쁘잖아요.”

    “무리하지는 마.”

    그의 계속되는 걱정에 시에나는 데이몬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겹쳐 올려 두었다.

    “괜찮아요, 도련님은 제가 지켜 드릴게요.”

    그 말에 데이몬은 살짝 놀라더니 이내 쑥스러운 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지켜 준다는 말에 자존심이 상한 것일까? 아니, 그것보다는 그냥 시에나가 지켜 준다고 하니 쑥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좀 좋아 보이는 것 같았다. 데이몬이 마차 밖으로 내려 시에나를 에스코트했다. 시에나가 계속 마차 바닥에 내려놓고 있던 가방을 메고 내리자 데이몬이 물었다.

    “시에나, 가방에 든 것들은 뭐야? 무겁지 않아? 내가 들어 줄까?”

    “아, 이거요. 혹시 아이작이 상처 입었을지도 모르잖아요. 우리도 도중에 다칠 수도 있고, 그래서 챙겨 온 약이에요. 대부분 할머니가 주시고, 제가 만들어서 가져온 것도 있어요. 크기는 커도 별로 무겁진 않아요. 괜찮아요.”

    약병은 가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그 양은 노파가 건네준 것에 1/3도 되지 않았다. 시에나는 진땀을 빼며 노파가 건네 주는 약병 중 일부만 챙겼다. 약병 안에는 약뿐만 아니라 노파의 기도가 가득히 담겨 있었다. 아이작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부디 그녀의 바람이 그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며 시에나가 가방끈을 바투 맸다.

    “무거우면 말해. 바로 들어 줄 테니까.”

    “네, 그럴게요.”

    시에나가 생긋 웃었다. 공작의 곁으로 어느새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이작을 찾으면 이 불을 하늘로 들어 세 번 비추게. 그 불빛을 본 사람들은 바로 그쪽으로 모이도록 하지.”

    “폭죽은 쓰지 않습니까? 빛을 못 보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요.”

    “위치가 발각되면 위험하다. 우리에겐 무기를 쓸 줄 모르는 민간인과 아이가 있다는 걸 잊지 말도록. 그게 아니라도 두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풀숲 뒤의 마차 앞에서 모이도록 하자.”

    “예,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킹스톤. 자네는 이들 옆에 붙게. 호위에 부족함이 없도록 해 줘.”

    “네, 그러겠습니다.”

    공작은 로하엘을 붙이고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시에나와 데이몬에게 정예 멤버를 하나 더 붙여 주었다. 킹스톤은 근육이 잔뜩 붙은 팔에 매달려 빙빙 돌 수도 있을 것 같은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였지만, 같은 편이 되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자, 그럼 초상화를 받고 바로 움직이도록.”

    “예.”

    워커라는 사람이 그려 준 초상화가 꽤 유용하게 쓰이고 있었다. 돌아가면 감사 인사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조용히 수풀을 헤치고 전쟁이 잠시 멈춘 전쟁터로 나아갔다.

    “도련님, 우리도 가요.”

    시에나의 결연한 표정에 데이몬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넷은 조용히 손을 잡고 전쟁터의 안개에 스며들었다. 시에나는 코끝을 마비시킬 것 같은 역한 피 내음에 인상을 찌푸렸다. 비는 멎었지만 붉은 안개가 껴 한 치 앞을 보기가 어려웠다.

    “전쟁터는 처음이십니까?”

    킹스톤이 딱딱한 목소리로 시에나에게 물었다. 시에나는 어쩐지 그것이 부끄러워져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안개가 껴서 다행이군요.”

    “네?”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전쟁터와 안개가 무슨 상관이라는 걸까. 오히려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아 아이작을 찾기 힘든데. 발밑조차 보기 힘든 자욱한 안개였다.

    “엇…!”

    수색을 할당받은 구역을 정처 없이 떠돌고 있을 때 시에나의 발에 무언가가 걸렸다. 하마터면 크게 넘어질 뻔했지만, 데이몬과 로하엘이 동시에 그녀를 잡아챘다. 바닥이 너무 울퉁불퉁해 아까부터 넘어질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쩐지 걸림돌이 된 것 같은 느낌에 시에나가 자책하며 말했다.

    “죄송해요.”

    “아니요. 그럴 수도 있죠. 안개 때문에 잘 안 보이니까요.”

    “내가 잡아 줄 테니까 넘어져도 괜찮아.”

    치렁치렁한 머리를 끈으로 묶은 데이몬의 모습은 여전히 가냘프고 아름다웠으나, 그 모습이 묘하게 믿음직스러웠다. 분명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미소년처럼 느껴진달까. 역시 외모는 바뀌어도 사람은 바뀌지 않는 것 같았다.

    “네. 그럴게요.”

    “끄으으윽….”

    끄으으윽?

    시에나는 이상한 신음 소리에 당황스러움에 데이몬을 바라보았다. 데이몬은 자기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번에는 로하엘을 바라보았으나 그도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으로 킹스톤을 봤지만 그는 손가락으로 시에나의 발밑을 가리켰다. 발밑에 뭐가 있다는….

    “꺄… 흡!”

    비명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소리를 지르지 않기 위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의 발에 걸렸던 건 다름 아닌 사람이었다. 그것도 중상을 입고 죽어 가는 사람! 시에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데이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배에 깊은 창상을 입고 죽어 가고 있었다.

    “사, 살려 주시오… 제발….”

    시에나는 당황스러움에 어쩔 줄 모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쿨럭… 쿨럭….”

    그가 가래 섞인 기침을 할 때마다 배에서는 울컥울컥 피가 흘러나왔다. 노파에게서 배운 환자를 대하는 규칙을 기억하기에는 그의 상태가 너무도 심각했다. 피비린내가 역하게 진동하자 토기가 올라왔다.

    “웁…!”

    시에나는 결국 아까부터 울렁거렸던 속을 참지 못하고 몇 걸음 달려가 토악질을 시작했다.

    “욱, 으흡. 윽….”

    “다 게워 내요. 시에나. 괜찮으니까.”

    어느새 달려온 로하엘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데이몬 역시 그녀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위를 쥐어짜는 듯이 고통스러웠다. 반사적으로 고인 눈물이 흙 위로 툭, 떨어져 내렸다.

    ‘내가 너무 싫다.’

    책 속의 사람이라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려고 해도 몸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본 피라고는 채혈과 헌혈이 다였는 데다, 수한의 시체조차 끔찍하다며 보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에 마지막을 보지도 못하고 보냈다. 시에나는 자신이 전쟁터에 오기로 한 결정이 얼마나 안일했는지 새삼 깨달았다. 모든 것을 남김없이 게워 내고 난 후 시에나는 로하엘이 건네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감, 감사해요. 죄송해요….”

    “시에나 정도면 나은 겁니다. 첫 전쟁터에서 그대로 기절하거나 도망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에요.”

    로하엘이 그녀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위로했다.

    “시에나 너무 힘들면 마차에 가서 기다려도 돼.”

    “아니요. 이젠 괜찮아요. 놀라서 그런 것뿐이에요.”

    토할 것도 없이 토하고 나자 오히려 몸이 가뿐해진 느낌이었다. 시에나는 아까 자신의 발에 걸려 넘어진 사람 쪽을 바라보았다. 킹스톤이 그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 사람의 눈을 감겨 주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건가요?”

    “숨이 멎었습니다.”

    킹스톤은 담담하게 말했다.

    “아까만 해도 살아 있었잖아요. 살려 달라고….”

    “이미 늦은 상태였습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말한 겁니다.”

    아까만 해도 살려 달라고 울부짖던 사람이 몇 분 만에 숨이 끊겼다. 사람의 목숨이란 한없이 질긴 듯 보이면서도 너무나 쉽게 끝나는구나. 이제는 산 사람이 아닌 자의 갈색 머리칼이 강한 바람에 날렸다. 그는 한 줄기 눈물을 흘리며 잠들 듯 죽어 있었다. 책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엑스트라들이 이런 마지막을 맞이했겠지.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시에나는 데이몬이 절대 변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시에나가 착잡하게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내 걸음을 옮겼다.

    수색은 난항을 겪고 있었다. 안개가 너무 자욱해 발밑을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발밑에서는 피와 날붙이의 냄새가 났다. 아까처럼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밑을 보지 않고 싶었지만 혹 아이작일까 싶어 꼭 한 번씩 확인해야 했다.

    그때 시에나의 앞에 체구가 작은 어린 소년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투구 사이로 짙은 밤색 머리칼이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자, 잠시만요.”

    시에나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채 조심스레 앉아 그 투구를 벗겨 보았다.

    “후우….”

    소년은 청록색 눈을 그대로 뜬 채로 죽어 있었다. 그의 눈가에 눈물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몸 여기저기에 묻은 갈색 핏자국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마지막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알 수 있었다. 시에나는 그의 눈을 조심스레 감겨 주었다. 아이작이 아닌 거라는 사실을 알자 안심되는 한편 마음이 아릿해져 왔다.

    겨우 데이몬 또래의 아이들이 전쟁터에 끌려 나와 이렇게 덧없이 목숨을 잃게 되는구나. 영지전은 단지 더 큰 땅과 배상금을 얻기 위해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결국 누군가의 욕심으로 목숨을 잃게 되는 건, 가장 힘없고 약한 사람들이었다.

    “어?”

    자리를 털고 일어난 시에나는 이내 사람들이 자신의 곁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작인 줄 알고 잠시 멈추어 밑을 확인할 때 잃어버린 건가. 이 안개 자욱한 전쟁터에 홀로 남겨져 있다 생각하니 더럭 겁이 났다.

    “저기요!”

    시에나는 몹시 당황해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불렀다.

    “시에나-!”

    데이몬의 목소리가 되돌아 돌아왔다. 시에나는 안심되는 한편 그 목소리가 생각보다 먼 곳에서 들려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련님-!”

    이 상황에서도 도련님이라 불러야 할지 아가씨라고 불러야 할지 잠시 머뭇거리던 시에나는 이내 익숙한 호칭으로 그를 불렀다. 데이몬의 다급한 목소리가 화답해왔다.

    “내가 부를 때마다 소리 내면서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 그쪽으로 지금 갈게!”

    “도련님-! 천천히 가세요!”

    뒤에서는 로하엘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시에나는 그렇게 멀리 떨어진 건 아니구나 싶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오도카니 서 있자, 몸이 오들오들 떨리고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도련님… 빨리 오세요.”

    시에나는 양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 안았다. 한겨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쟁터의 바람은 시에나에게 너무나 차가웠다. 앞장서서 찾아볼까도 싶었지만, 혼자 떨어져 나온 지금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게 더 도움이 될 터였다.

    “시에나!”

    “도련님! 저 여기 있어요!”

    데이몬의 목소리가 몹시도 가깝게 들려왔다. 시에나는 반색하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내 안개 속에서 검은 인영이 툭 튀어나왔다.

    “윽…!”

    “꺄악…!”

    다급히 달려온 데이몬은 결국 일어나 있던 시에나와 부딪히고 말았다. 넘어지기 직전 데이몬이 두 팔로 급히 시에나를 감싸 안았다. 덕분에 사이좋게 흙바닥에 뒹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에나는 흙먼지 하나 묻지 않았다. 대신 데이몬의 상태가 두 배는 처참해졌지만.

    “으으, 도련님… 감사해요.”

    “다친 덴 없어, 시에나?”

    “네, 도련님 덕분에 저는 멀쩡해요.”

    “어쩌다가 일행이랑 떨어진 거야. 아까만 해도 손잡고 있었잖아.”

    “아이작이랑 닮은 아이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걸 봐서… 죄송해요.”

    시에나의 밑에 죽어 있는 밤색 머리 소년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데이몬이 이내 한숨을 쉬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데이몬의 옷을 시에나가 탈탈 털어 주었다.

    “그래도 위험하니까 이제부터는 내 손 꼭 붙잡고 있어.”

    “네, 도련님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요?”

    “다른 사람들은 뒤에….”

    데이몬은 뒤를 돌아보고는 그대로 굳었다.

    “…없네. 네 목소리를 듣자마자 뛰어와서… 그새 놓쳤나 봐.”

    시에나는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로하엘 님-!”

    그러나 메아리만 돌아올 뿐, 대답은 없었다. 사이좋게 미아가 된 둘은 당황스러운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 일단 여기서 기다려 볼까요?”

    “그러자. 움직이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것 같아.”

    그러나 30분이 넘도록 둘은 로하엘이나 킹스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데이몬은 한숨을 쉬며 겉옷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시에나, 다리 아플 텐데 여기 앉아.”

    “저는 괜찮아요.”

    데이몬은 공작을 만났을 때 입은 정복을 여태껏 갈아입지 않고 있었기에 그가 바닥에 내려놓은 외투는 가진 옷 중에 가장 비싼 것이었다. 그걸 알기 때문에 말린 것이지만 데이몬은 개의치 않고 피와 진흙이 잔뜩 엉긴 바닥에 겉옷을 내려놓았다.

    “괜찮아, 나도 앉을 거니까. 계속 서 있으면 다리 아프잖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체력을 비축해 둬야지.”

    그러면서 데이몬이 먼저 털썩 앉아 시에나에게 손짓했다. 데이몬의 재촉 끝에 시에나가 마지못해 외투 위에 앉았다. 몸이 편해지자마자 죄책감이 물밀 듯이 올라왔다.

    “죄송해요, 도련님.”

    “어? 뭐가?”

    시에나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데이몬은 당황하며 물었다.

    “제가 도련님을 위험에 빠뜨리게 한 것 같아서요….”

    전쟁터가 그렇게 녹록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했었다. 그렇지만, 자신이 이렇게 심약하고 못난 존재인지 뼈저리게 깨닫게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도움이 없으면 시체가 즐비한 전쟁터에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짐 덩이. 심지어 단독 행동을 하다가 데이몬까지 위험에 빠뜨렸다. 명백한 진상이었다. 시에나는 죄책감에 고개를 떨구었다.

    “뭘 이런 걸 가지고. 시에나도 내가 전쟁터에서 길을 잃으면 날 찾으러 올 거 아냐?”

    “그건 그렇지만….”

    “그러니까 너무 마음 쓸 필요 없어. 난 괜찮아.”

    데이몬은 그런 시에나를 부드럽게 위로했다. 그러나 여전히 시에나의 마음은 무거웠다.

    “도련님,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뭔데?”“저희가 위험에 빠지면, 절 지키지 마시고 꼭 도망쳐 주세요.”

    공작이 잔소리를 한 것들 중에 하나는 산적들의 이야기도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시체들에게서 금붙이나 옷가지 같은 것을 가져가는 경우가 많은데, 부상자가 반항을 하는 경우에는 살해하기도 하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 일렀다. 그때에는 로하엘과 호위가 곁에 있었으니 주의 깊게 새겨듣기만 했지만, 둘만 남은 이 시점에는 생생한 공포로 다가왔다.

    “싫어. 그런 약속은 안 할래.”

    데이몬은 시에나의 예상처럼 고집스레 답해 왔다. 워낙 시에나를 따르는 데이몬이니 그렇게 답할 걸 예상했지만 그는 제법 기분이 나빴는지 인상까지 쓰고 있었다. 시에나가 그런 데이몬을 몇 번이나 어르고 달랬지만 소용없었다.

    “그 약속 안 하시면 저도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도련님께 평생 안 알려 드릴 거예요.”

    결국 시에나가 강수를 두자 데이몬의 표정이 한없이 구겨졌다. 그런 데이몬을 시에나가 부드럽게 달래었다.

    “그러니까 아셨죠? 저도 그냥 잡히겠다는 소리가 아니에요. 위험에 빠졌을 때에는 둘 다 흩어져서 안개 속에 숨어 있다가 나중에 안전해지면 나오자는 소리예요.”

    “…그래도 싫어.”

    “진짜로 평생 제가 안 알려 드린다고 해도요?”

    데이몬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이미 결심한 듯한 표정이었다.

    “응. 상관없어. 널 버리고는 안 가.”

    데이몬의 대답에 가슴이 찡하면서도 머리가 아파 왔다.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감도 잘 잡히지 않았다. 그때였다. 누군가 시에나의 발목을 덥석 잡아 왔다.

    “…!”

    차가운 손이 발목을 잡는 선득한 감각에 비명조차 허공으로 흩어졌다. 정말이지 심장이 그대로 멎어 버리는 기분이었다. 데이몬은 재빠르게 검을 빼 들어 시에나의 발목을 잡은 손을 향해 겨누었다.

    “히이익, 제발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시에나의 발목을 잡은 건 다름 아닌 부상병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었지만, 몹시도 간절하게 들렸다. 남자는 팔과 다리에 검상을 입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남자의 진초록 눈동자가 껌뻑임을 반복할수록 그는 죽어 가고 있었다.

    “제발, 좀 살려 주십시오. 제가 없으면 저희 가족은 다 굶어 죽습니다….”

    그는 눈물을 철철 흘리며 진심을 다해 부탁했다. 시에나는 급히 가방에서 약병들을 꺼내었다. 할머니가 워낙 많이 쥐여 주는 바람에 가방 안에는 열 명도 넘게 치료할 수 있는 약이 들어 있었다. 데이몬은 시에나의 발목을 잡은 그의 손을 팩 떼어 놓으며 그를 형형하게 노려보았다. 남자는 데이몬에게 완전히 주눅이 들어 그들에게서 벗어나려 꿈틀댔다. 공포가 그의 의식을 좀먹고 있는 듯했다.

    “힉… 죄, 죄송합니다. 살려 주세요….”

    “안 죽일 테니까 걱정 말아요.”

    시에나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최대한의 상냥함을 발휘했다.

    “도련님, 이 외투 위로 이분을 옮기는 것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알았어.”

    데이몬은 여전히 아니꼬운 듯 남자를 노려보았지만, 순순히 시에나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다만 같이 옮기지는 않고, 혼자서 그 남자를 질질 끌고 외투 위로 옮겼다.

    “으으윽….”

    남자의 등에 돌멩이가 배기는지 고통스러워했지만, 번쩍 들어 옮기면 자칫 신경이나 내장이 다칠 수도 있기에 시에나는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 시에나가 깨끗한 린넨 천에 소독수를 잔뜩 묻혀 그의 상처 부위를 닦아 내기 시작했다. 상처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제가 팔을 치료할 때까지 도련님은 이분 다리에 있는 상처를 꽉 압박해 주세요. 피가 흘러나오지 않을 정도로요. 네, 그렇게요.”

    “으, 으으윽!”

    데이몬은 감정을 실은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세게 그의 다리를 압박해 주었다. 그 덕분에 다리에 흐르던 피가 잠시 멎었다. 상처 부위를 깨끗이 닦고 지혈제를 뿌리자 이내 피도 서서히 멎어 가기 시작했다.

    “지혈제가 잘 들어서 다행이에요. 진통 효과가 있는 약초니 드세요.”

    남자는 시에나가 건네준 약초를 씹어 삼켰다. 이후 시에나는 피가 멎은 곳 위에 약초로 만든 연고를 발라 주기 시작했다. 그는 정신이 들었는지 시에나가 치료하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어, 혹시 신관님이십니까?”

    “아니요, 아니에요.”

    그냥… 진상인데요.

    시에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남자는 지치지 않고 물어 왔다.

    “그, 그러면 마법사님?”

    “저는 마법사도 아니에요. 그냥 평범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약을 잘 다루시는 건가요?”

    “그냥 조금 배웠어요. 잘 다룬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어설프고요.”

    그렇게 말하며 시에나는 상처 위에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다리 쪽 상처도 치료하자 아까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끝났다. 실전은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는 잘 해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남자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 있었다.

    “저, 정말 감사드립니다. 어떻게 이 은혜를 갚아야 할지….”

    “괜찮아요. 그런데 깊은 상처가 아니었는데 왜 여기 계셨던 건가요?”

    시에나가 수월하게 치료한 이유는 그의 상처가 그다지 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검상이 있긴 하지만 뼈까지 깊게 베었던 것도 아니었고, 힘줄을 건드리지도 않았었다. 약 2주 정도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 나을 수 있는 상처였다. 시에나의 물음에 남자는 난감한 얼굴을 했다.

    “부끄럽지만 방패에 맞아 기절하는 바람에 후퇴할 때를 놓쳤습니다.”

    “동료들이 확인도 하지 않았던 건가요…?”

    “예에… 원래 후퇴할 때 알아서 돌아가지 못하면 버리는 게 원칙이라서요.”

    저런. 시에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아꼈다. 시에나에게 물과 빵까지 얻어먹은 남자는 조금 살 만해졌는지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저는 요한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전쟁터에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들이 어인 일로 오시게 되셨나요?”

    “그런 건 네까짓 게 알 바가 아니지.”

    데이몬이 톡 쏘는 말투로 답했다. 남자는 쩔쩔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그러믄요. 저같이 천한 놈이 윗분들께서 무얼 하시는지 알아서 뭐 하겠습니까. 아무튼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감사받을 일을 한 것도 아닌걸요. 그리고 온 이유는 별거 아니에요. 남동생을 찾고 있거든요.”

    “동생분이… 전쟁터에 나오신 겁니까?”

    요한슨은 시에나의 앳된 얼굴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했다. 아이작을 시에나보다 훨씬 어린 동생으로 본 것 같았다.

    “병사는 아니고, 어쩌다가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어요. 밤색 머리에 갈색 눈을 하고 있는 열셋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예요.”

    “아이고, 어쩌다가 그런 어린애가 전쟁에….”

    “으음… 일종의 마법 수련 중에 부작용이 일어나서 그렇게 되었어요.”

    시에나는 은근슬쩍 참에 거짓을 섞어 말했다. 아이작의 신원이 너무 밝혀지면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어? 혹시 하늘에서 뚝 떨어진 남자애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시에나와 데이몬은 그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하늘에서 떨어진 남자애라면 아이작일 확률이 몹시 높았다. 흥분한 시에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맞아요! 보신 적이 있으신 건가요?”

    요한슨은 시에나의 격렬한 반응에 놀라면서도 옆에서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데이몬 때문에 슬쩍 손을 빼고 대답했다.

    “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전투를 휴식하고 있을 때에 하늘에서 어떤 남자애가 뚝 떨어졌다고요.”

    “어, 어떻게 되었는지도 아시나요?”

    간절한 시에나의 말에 요한슨은 난감해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시에나의 표정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그래도 전투 중에 떨어진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영지전은 기본적으로 계속 싸우지 않는다. 국가 간 전쟁이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지. 시에나의 풀죽은 얼굴을 보며 쩔쩔매던 요한슨이 위로하듯이 횡설수설 답했다.

    “다만, 그분의 출현이 워낙 화려했기 때문에 누군가 인질로 데려갔을 확률이 높습니다.”

    “정말요?”

    “그… 확실하진 않지만 그럴 확률이 높… 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아요.”

    시에나의 표정이 전구를 켠 것처럼 화악 하고 밝아졌다. 시에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단 우리는 우릴 돌봐 주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 있는 게 좋겠어요. 아이작이 인질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니 파발을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은데, 도… 아니. 아가씨 생각은 어떠세요?”

    시에나의 말에 대부분 긍정하고 있던 데이몬은 자신을 아가씨라고 부르는 그녀의 호칭에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는 요한슨을 죽일 듯이 한 번 노려보더니 이내 시에나의 말에 긍정했다.

    “그게 낫겠군. 이자는 내가 부축할 테니, 시에나는 발밑을 조심하며 걸어와.”

    “네, 도… 아가씨.”

    “아이고, 귀한 분께서 어떻게 저를 부축하신단 말입니까? 괜찮습니다. 지팡이 하나만 구할 수 있다면 혼자 걸을 수 있어요.”

    요한슨의 만류에도 데이몬은 그에게 등을 내밀었다.

    “업혀. 예쁜 포즈로 안겨 가고 싶지 않으면.”

    공주님 안기를 말하는 건가. 시에나는 잠시 절세 미녀가 된 데이몬이 우락부락한 요한슨을 안고 가는 걸 상상했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머뭇거리던 요한슨이 귀찮았는지 데이몬은 그의 팔을 어깨 너머로 휙 끌어당겨 가볍게 업었다. 요한슨의 키가 크지 않았기에 다행히 발은 끌리지 않을 수 있었다. 수월하게 성인 남성을 업고 걷는 데이몬의 모습을 본 요한슨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분들이 호위 하나 없이 전쟁터를 다니시는 게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특이한 능력이 있으셨군요. 대단하십니다.”

    몸이 바뀌었다고 해서 근육이나 힘이 달라진 건 아니었기에 요한슨을 업을 수 있는 건 당연한 거지만, 그는 그것을 마법 같은 특이한 힘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시에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만 더 여자 같다느니 아름답다느니 말하면 너를 불시에 내동댕이칠 거니까 웬만하면 닥치고 있도록.”

    “아가씨!”

    시에나는 데이몬의 거친 말에 놀라 저도 모르게 그를 큰 소리로 불렀다. 데이몬은 아차 싶었는지 금세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병실 침대에 내동댕이칠 거라고. 아주 안전하게 말이야.”

    조약한 변명에 시에나는 팥으로 메주를 쑨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데이몬은 시에나의 눈치를 보며 입을 딱 다물었다. 데이몬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특이한 그들의 관계를 말없이 지켜보던 요한슨이 저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렇게 웃기지?”

    여전히 가시가 돋쳐 있는 데이몬의 말에 이번엔 요한슨이 땀을 뻘뻘 흘렸다.

    “그러니까… 어… 병실 침대에 눕혀 주신다는 말이 웃겨서 그랬습니다.”

    “그게 왜 웃긴 말이지?”

    “으음… 아, 저희 같은 것들은 병실 침대에는 눕지 못하거든요.”

    “그럼 바로 신관들이 치료를 해 주는 건가?”

    “신관이나 마법사는 고위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치료해 주지 않습니다. 기부금을 내면 되긴 하지만… 도저히 평민들이 낼 수 있는 금액이 아니라서요.”

    “그럼 전쟁터에 나가서 다친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검과 방패를 들고 싸우는데 상처가 나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나.”

    “민간요법을 이용한다거나… 신께 기도할 수밖에요. 저는 정말 운이 좋은 편입니다. 마음 착한 분들 덕분에 신전의 약으로 치료받았으니 말입니다.”

    요한슨은 아까의 치료에 썼던 약이 신전에서 나온 약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 그로서는 신전의 약을 본 적이 없을 테니 신분이 높아 보이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약이 신전에서 받은 약이라 생각하는 거였겠지. 플라세보 효과라는 것도 있는 법이니, 시에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안개는 여전히 두꺼웠지만 언뜻언뜻 하늘이 보일 정도로 나아져 있었다. 그들은 별의 위치를 가늠하며 걸었다. 이대로 가면 마차를 세워 둔 곳이 나올지도 모를 터였다. 그때 데이몬에게 여전히 업혀 있던 요한슨이 큰 소리를 내었다.

    “라이노!”

    그는 갑자기 데이몬의 위에서 버둥대었다. 데이몬이 워낙 힘 있게 업고 있는 바람에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다.

    “위험해요!”

    요한슨을 진정시키기 위해 시에나가 그의 팔을 꽉 잡았다. 요한슨이 울먹거리며 밑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자, 잠시만 내려 주십시오! 잠깐이면 됩니다…! 아는 사람이에요!”

    데이몬은 한숨을 쉬며 그를 내려 주었다. 한쪽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넘어진 요한슨이 네발로 엉금엉금 기어 라이노라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라이노…! 왜 네가 여기에 있어…! 흐흑….”

    요한슨은 라이노의 조악하고 낡은 갑옷 위에 엎어져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그 모습을 시에나와 데이몬이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요한슨이 가슴이 턱 막혀 오는지,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리다 이내 라이노의 가슴을 때리기 시작했다.

    “어쩌자고 이렇게 어린 나이에 간단 말이야… 어째서….”

    그 마음 아픈 광경을 바라보는 시에나의 마음도 좋지 않았다. 누군가의 욕심을 위해 희생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은 신전의 약조차 쓰지 못하는 약자였다. 목숨을 희생하고 미래를 희생한 사람들에게 돈 몇 푼을 쥐여 주고 그들은 더욱 어마어마한 이익을 취하겠지. 어쩐지 아까 보았던 파블로 백작이 역겹게 느껴졌다.

    “시에나, 괜찮아?”

    “네? 뭐가요?”

    “얼굴이 잔뜩 굳어 있어서. 이런 거 보기 힘든 거 아니야?”

    아아, 얼굴이 굳어 있었나. 시에나는 손가락으로 가만히 볼을 쓸어 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 근육과 내려간 입꼬리가 만져졌다.

    “그냥, 좀 기분이 그렇네요. 왜 희생자는 언제나 약하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의 몫인지….”

    데이몬이 귀족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시에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말을 뱉고 나자 데이몬이 어떻게 반응할까 걱정도 들었다.

    “나도 화가 나. 돈 때문에 왔더라도 목숨을 걸고 출정한 사람들을 제대로 치료도 안 하고 이렇게 외롭고 쓸쓸하게 죽어 가도록 내버려 두다니. 기사의 수치라고 생각해.”

    데이몬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안개 너머를 바라보는 그의 암녹색 눈에서 불길이 들끓었다.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갈무리하고 있었을 뿐, 몹시 화가 난 상태였다. 시에나는 그의 분노를 느끼며 한편으로 안심되는 기분을 느꼈다. 시에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은 좋은 영주님이 될 거예요.”

    더불어 좋은 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시에나는 꺼내지 못할 말을 삼키며 데이몬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그 역시 시에나를 한참이나 응시하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렇게 되고 싶어.”

    최근 무서울 정도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데이몬이었다.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지식을 빨아들이던 데이몬은 응용에도 아직은 작은 그의 어깨 위에 올려진 짐이 많지만, 곁에서 하나하나 해결하다 보면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걸 볼 수 있지 않을까. 시에나는 그의 미래를 곁에서 함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고오…!”

    요한슨은 엉엉 소리를 내며 그의 가슴을 계속 때렸다. 더 이상 쳤다가는 라이노의 신체가 훼손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를 말리려 시에나가 걸음을 옮겼을 때, 라이노의 입에서 울컥 핏덩어리가 튀어나왔다.

    “커헉…!”

    “끄아아악!”

    “엄마야!”

    시에나는 너무 놀라 뒷걸음질 치며 데이몬을 꽉 끌어안았다. 데이몬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놀란 건 요한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눈물이 쏙 들어간 눈으로 연신 잔기침을 해 대는 라이노를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이, 이게 어떻게… 분명 심장이 멈춰 있었는데….”“쿠, 쿨럭… 쿨럭.”

    당황스럽기는 라이노 역시 마찬가지였던 듯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강에서 손짓하셨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쿨럭.”

    다행히 라이노는 좀비 같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한결 안심한 시에나가 그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아까 요한슨이 무식하다 싶을 만큼 가슴을 주먹으로 친 게 어쩌면 심폐소생술과 같은 효과를 낸 걸지도 모르겠다. 모세 혈관이 터져 목에서 핏물이 흘러나와 기도를 막았던 걸까. 요한슨은 숨이 잠시 멎었던 게 무색할 만큼 빠르게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전쟁터에는 이렇게 살릴 수 있는 사람이 많겠지. 시에나가 구한 건 아니지만 아주 작은 도움으로도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은 가슴을 벅차게 했다.

    “더 아픈 곳은 없으세요?”

    “아, 여기가 천국이 맞습니까?”

    시에나와 데이몬을 바라보며 라이노는 뜬금없는 물음을 던졌다.

    “네?”

    “천사님이 찾아오셨나 보네요…그렇지 않고서야 이 전쟁터에 이렇게 예쁜 사람이 둘이나 있을 리가 없지….”

    라이노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시에나는 라이노의 정신을 차리게 해 주기 위해 가볍게 그의 뺨을 꼬집었다.

    “아얏!”

    “아프죠? 여긴 천국이 아닙니다. 현실이에요. 여기 있는 요한슨이 당신을 살렸어요.”

    그렇게 말하며 시에나는 뒤에서 여전히 멍하니 라이노를 바라보는 요한슨을 가리켰다. 그를 알아본 라이노의 눈이 크게 뜨였다.

    “형님!”

    라이노가 가까이 다가가 그를 꽉 껴안았다. 요한슨은 얼떨떨하게 그에게 안겨 있다가 다시 정신이 돌아왔는지 라이노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라이노야! 이스테라 여신이 도왔구나!”

    “형님이 절 살리신 겁니다! 감사합니다!”

    둘은 얼싸안고 기쁨의 해후를 즐겼다. 오두방정을 떠는 모습들이 그리 밉지 않았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서로가 살아서 만났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시에나가 여전히 유난스러운 그들을 말릴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데이몬이 대신 나서 주었다.

    “둘이 알아서 갈 게 아니라면 이만 출발하고 싶은데.”

    “아, 죄송합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드립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갑자기 생기를 되찾은 요한슨이 근처에 놓인 장검을 주워 지팡이 삼아 걷기 시작했다. 걷는 속도가 약간 느려졌지만 라이노가 옆에서 부축해 주자 아주 느려지진 않았다.

    “으윽.”

    그때 라이노가 다시 고통을 호소하며 허물어졌다. 시에나는 앞서가다가 깜짝 놀라 그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괘, 괜찮습니다.”

    그러나 라이노의 안색은 이상하리만치 새하얘져 있었다. 시에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라이노가 안쓰러워 보였다.

    “어디가 아프신 것 같은데, 저 약이 좀 있어요. 아픈 곳 말씀해 주세요.”

    “그래, 라이노! 나도 이분께서 다 치료해 주셨어. 아주 굉장하신 분이라고.”

    라이노는 머뭇거리다 요한슨의 말에 힘을 내어 대답했다.

    “그, 옆구리 쪽이 좀 아픕니다. 갈비뼈가 나간 것 같아요.”

    시에나는 라이노를 다시 앉힌 뒤 그의 갈비뼈 부근을 촉진해 보았다.

    “으윽.”

    시에나의 손이 갈비뼈 부근에 닿자마자 라이노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이를 악물고 참으려고 했지만 아픈 기색이 역력했다. 시에나는 다급히 가방 안에서 진통제를 꺼내었다.

    “뼈까지 치료하지는 못해요. 부러지진 않고 아마 금이 간 것 같은데, 일단 이 진통제를 먹고 막사로 돌아가 치료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시에나는 진초록색의 걸쭉한 약이 든 포션 병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약이 독하니 딱 한 모금만 드세요.”

    “가, 감사합니다.”

    그는 황송하다는 듯 두 손으로 공손하게 포션 병을 받아 들였다. 꼴딱. 약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약이 쓴지 오만상을 쓰는 라이노를 보며 시에나가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다른 약에 비해 독하고 쓴 만큼 진통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좀 어떠세요?”

    “훨씬 좋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라이노는 다시 공손하게 시에나에게 포션 병을 건네주었다. 어느새 서서히 안개가 걷혀 가고 있었다.

    “그런데 두 분은 어느 쪽으로 가고 계신가요?”

    아까보다 안색이 훨씬 나아진 라이노가 물었다. 시에나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망설이자 데이몬이 나서서 말했다.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다. 전쟁터에서 벗어나면 바로 헤어질 테니 너희나 어디로 갈지 생각해.”

    “앗, 그러믄요. 죄송합니다.”

    라이노는 데이몬의 고압적인 태도가 익숙한 듯 납작 엎드리며 요한슨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디로 갈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했다. 안개가 걷히자 별이 더 선명히 보여 길을 찾기가 쉬워졌다.

    “아가씨, 곧 마차에 도착할 것 같아요.”

    “그러게. 그런데 시에나, 아가씨라는 말 좀 안 하면 안 될까?”

    “네? 그럼 어떻게 불러요?”

    “데이몬… 이라고 부르면 되잖아.”

    “그렇지만 그건 너무 남자 이름 같잖아요.”

    둘은 소곤대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데이몬은 자신이 아가씨라고 불리는 게 죽도록 싫었는지 골똘히 생각하다 이내 이름 하나를 내놓았다.

    “그럼… 데이나?”

    인상을 팍 쓰고 한참을 진지하게 생각하다 이름을 내놓는 모습이 제법 사랑스러웠다. 시에나는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알겠어, 데이나.”

    그렇게 부르라 했으면서 시에나가 진짜로 그렇게 불러 줄 줄은 몰랐는지 데이몬은 그녀의 다정한 말씨에 잠시 멈칫하다 이내 입꼬리를 씰룩였다.

    “응. 시에나.”

    어느새 안개는 완전히 걷히고, 아까 빠져나왔던 숲이 육안으로 보였다. 약 2km 정도만 더 가면 될 것 같았다. 둘의 표정이 확연하게 편안해졌다.

    “저어, 천사님.”

    라이노가 주눅 든 표정으로 시에나에게 물었다. 낯간지러운 호칭에 볼을 긁적이며 시에나가 답했다.

    “그냥 시에나라고 부르시면 돼요.”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괜찮으니 편하게 불러 주세요.”

    “그, 그럼 시에나 님. 염치 불고하고 한 가지만 더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부탁… 이요? 뭔데요?”

    시에나의 물음에도 그는 몇 번이고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

    “사실 저희 어머니가 많이 아프십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 전쟁에 약값을 벌려고 나왔는데… 제 몸이 이 모양 이 꼴인지라 다음 전쟁에는 참여도 못 할 것 같아요. 약값도 벌지 못하고 돌아가면 어머니는 계속 아파하시기만 하다가 돌아가실 겁니다.”

    라이노는 그와 동시에 척척한 진흙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오늘 무릎을 꿇는 사람을 왜 이리 많이 보는 건지. 시에나가 당황해 그를 말렸다.

    “뭐 하시는 거예요. 일어나세요.”

    “어머니께서 너무 고통스러워하고 계십니다. 나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오래된 지병이니까요. 그저 잠시 고통이라도 잊게 만드는 약을 조금만 나눠 주실 수 있으실까요?”

    라이노의 간절한 말에 시에나는 가슴이 아팠다. 낡은 남색 바지는 순식간에 흙투성이가 되었다. 시에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세요.”

    “약을 조금, 조금만이라도….”

    “드릴 테니, 일어나시라구요.”

    “저, 정말이십니까?”

    “네. 드릴게요.”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단, 조건이 있어요.”

    시에나의 말 한마디에 화색이 돌았던 남자가 조건이 있다는 말에 당황스러워했다. 그렇게 큰 조건은 아닌데. 그가 너무 놀라자 시에나는 볼을 긁적이며 빠르게 이야기했다.

    “무작정 진통제를 드릴 수는 없어요. 제 일이 끝난 후 어머님을 뵙고 어떤 약을 써야 하는지 직접 판단하겠어요.”

    기가 약해져 있는 사람에게 함부로 센 진통제를 썼다가는 위를 완전히 망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약한 걸 주기에는 고통의 정도를 판단하기가 어려워 지금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시에나의 말에 그는 이제 완전히 엎드려 울먹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선하신 분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라이노의 감사 인사에 시에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건 뒤에 있는 요한슨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일어나라고 말하려던 차에, 시에나의 뒤에서 쇠를 긁는 듯한 걸걸하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이렇게 전쟁터에서 시끄럽게 굴어?”

    깜짝 놀라 시에나가 뒤돌자 데이몬이 이미 그녀를 감싸며 칼을 빼 들고 있었다. 그 앞에는 열 명이 훨씬 넘어 보이는 흉흉한 차림새의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잘 갈린 도끼와 검을 들고 서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에나의 등골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사, 산적이다…!”

    요한슨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다 성치 않은 발에 걸려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산적들이 낄낄거렸다.

    “사, 산적이돠-!”

    “으헤헤헤! 아주 똑같잖아!”

    산적 중 하나가 아까 요한슨이 한 말을 과장해서 따라 하자, 나머지들이 낄낄 웃었다.

    “시에나, 내 뒤에 서.”

    “도… 데이나….”

    “계집애가 안 어울리게 무슨 검을 들고 있냐.”

    “그래. 계집 손목에 어울리는 건 부채랑 바늘밖에 없다구!”

    그들의 과격한 언사에 시에나와 데이몬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호오, 화가 나셨나 본데?”

    “화내는 것도 예쁘네. 와, 이거 꼴리는데….”

    “안 돼. 상품 가치가 떨어진다. 남자들은 죽이고 여자들만 데려가자.”

    “에이….”

    “저년들을 팔고 남은 돈으로 여자를 사면 되잖나. 빨리 끌고 와!”

    “예이, 예이!”

    공작이 여자로 변한 데이몬을 전쟁터에 가는 걸 허락한 게 이런 이유였을까. 적어도 바로 죽지는 않고 노예상에 팔리게 될 테니까. 그들은 아쉬운 소리를 하면서도 대장의 말을 듣고 서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모두가 무술에 노련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살인에 잔뼈가 굵은 사람들로 보였다.

    쩌엉!

    데이몬의 검과 잘 갈린 배틀엑스가 맞부딪히며 엄청난 소리를 내었다. 남자의 힘이 어찌나 센지 배틀엑스를 받아친 데이몬의 신발 발뒤꿈치 부분이 10cm 가까이 움푹 팼다. 자신의 배틀엑스를 막아낸 데이몬을 보며 산적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얘 봐라? 내 도끼를 막았네?”

    “네 배틀엑스는 내 한 손가락으로도 막을 수 있으니까 그렇지!”

    그렇게 말하며 붉은 머리를 덥수룩하게 기른 산적 하나가 데이몬에게 달려들었다. 거대한 배틀엑스를 막은 데이몬에게 산적들은 흥미가 생긴 듯했다.

    “무기를 사용할 줄 아는 이렇게 예쁜 노예라니, 검투사로 보내도 쏠쏠하겠어!”

    “지면 죽이지 말고 팔다리만 잘라서 귀족들한테 보내자고!”

    “넌 천재야, 칼리온! 어떻게 그렇게 알뜰하냐!”

    “으흐흐, 내가 좀 똑똑하긴 하지!”

    사람을 앞에 두고 어떤 노예로 부릴지 이야기하는 그들에게는 전혀 긴장감이라는 게 없어 보였다. 연약해 보이는 여자 둘에 패잔병 둘을 열 명이 넘는 남자들이 둘러싸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데이몬은 붉은 머리 남자의 검을 막아내며 시에나를 제 뒤로 숨겼다. 시에나는 겁에 질린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퇴로를 찾고 있었지만 그들을 둥글게 둘러싼 산적들 때문에 좀처럼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데이몬은 입술을 깨물고는 그들에게 외쳤다.

    “내 이름은 데이몬 오웬 마르바스, 황족이다. 여기에는 나의 숙부님이신 공작 각하도 와 계신다. 지금 우리를 놓아준다면 아무 죄도 묻지 않을 테니, 당장 이 싸움을 멈춰라.”

    데이몬은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자 산적 몇몇이 웃음을 멈추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패잔병이나 죽은 자의 호주머니나 뒤지는 자들에게 그렇게 큰 배짱이 있을 리가 없지.

    그때 순진하게도 시에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데이몬의 말에 부들부들 떨고 있던 산적 하나가 말했다.

    “난 어렸을 때부터 꿈이 있었어.”

    “갑자기 웬 꿈 타령이야? 돌았어?”

    “나한테 이런 썩어 빠진 세상을 준 황족의 모가지를 꼭 한번 베어 보고 싶었지!”

    그는 두려워서 떨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홀경에 젖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시에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의 말에 잠시 겁에 질렸던 산적들은 다시금 기세가 등등해졌다. 데이몬이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산적들은 점점 그들을 포위하듯 좁혀 오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시에나의 어깨를 잡았다.

    “꺄악!”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라이노와 요한슨이 결연한 표정으로 시에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요한슨이 시에나에게 빠르게 속삭였다.

    “저희가 자리를 만들 테니 틈을 보아서 저분을 데리고 빠져나가십시오.”

    “어, 어떻게….”

    “틈이 만들어지면 즉시 빠져나가 안전한 곳까지 달리세요. 저희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당신들은….”

    시에나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황망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천사님이 구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전쟁터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죽어갔을 숨입니다. 두 분을 지키다 죽는다니 영광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라이노가 씨익 웃었다.

    “혹 안전히 빠져나가시게 된다면 스툼 영지의 칼버란 마을에 살고 계신 베티를 찾아 주세요. 저희 어머니십니다. 꼭 저희 어머니를 만나 주세요.”

    “가, 같이 나가요.”

    시에나가 라이노를 붙잡았지만 그의 표정은 단호했다.

    “아니요, 그건 무리입니다. 저희는 이미 결심했어요. 두 분이라도 꼭 사셔야 합니다.”

    요한슨은 여전히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몸도 성치 않은 사람들이다. 강한 진통제로 겨우 걸을 수 있게 만들어 놨을 뿐, 당장 병원에 입원해야 할 환자들이 대체 무얼 할 수 있다고. 시에나가 당황하고 있는데 그들이 먼저 움직였다.

    “지금입니다! 달리세요!”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그들은 시에나와 데이몬을 둘러싼 산적들을 하나씩 잡더니 온 힘을 다해 밀쳤다.

    “어어어…? 이 새끼들 이거 뭐야!”

    그들의 체중에 중력이 가해지자 기우뚱하더니 산적 둘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쿠당탕 소리와 함께 먼지가 자욱해져 잠시 시야가 차단되었다. 시에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데이몬의 손을 잡아챘다.

    “그대로 밟고 가요!”

    “뭐야! 이거 안 놔? 억! 저리… 억!”

    그들의 말에 시에나는 착한 아이처럼 그대로 따랐다. 밑에 있던 산적이 그들의 무게에 신음했지만 직접적으로 밟힌 요한슨과 라이노는 미소 짓고 있었다. 마치 그런 밝은 모습을 마지막까지 시에나에게 보여 주고 싶다는 듯이.

    요한슨과 라이노의 몸이 화가 난 산적들에 의해 짓밟혔다. 이윽고 사람의 숨이 끊어지는 단말마의 비명이 들렸다. 목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었지만, 둘에게는 눈물을 흘릴 시간조차 없었다.

    “시에나!”

    “도련님, 달려요!”

    둘은 손을 꼭 붙잡고 전쟁터를 달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가면 숲이었다. 울퉁불퉁한 바닥에 몇 번이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지만, 달리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요한슨과 라이노가 목숨을 바쳐 만들어 준 기회였다. 절대 헛되이 쓸 수 없었다.

    “잡아-!”

    추격전이 시작되자 시에나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그러면서도 절대 둘은 죽어서도 헤어지지 않을 것처럼 손을 꽉 잡았다. 뒤에서 철컥철컥 들려오는 사슬의 소리가 마치 사형 선고처럼 느껴졌다. 너무 아프고 슬프고 지치지만,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숲까지는 이제 겨우 500m 남짓한 거리만 남겨 두고 있었다. 시에나는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다리를 옮기며 계속해서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고, 입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토기가 치미는 것을 이를 악물어 참았다. 아까 남김없이 토해 낸 게 다행이었다. 평소에 운동을 하지 않은 걸 뼈저리게 후회하던 시에나에게 데이몬이 소리를 질렀다.

    “시에나! 위에 밧줄!”

    “…아윽!”

    산적 중 말을 타고 그들에게 달려오던 남자가 거리가 좁혀지자 말 위에서 밧줄을 던져 시에나를 잡았다. 팔과 몸이 묶여 옴짝달싹 못 하게 된 시에나가 데이몬에게 말했다.

    “도련님! 혼자라도 도망치세요!”

    그러나 데이몬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시에나의 몸을 옥죈 밧줄을 끊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굵고 단단한 밧줄은 칼질에도 쉽게 잘리지 않았고, 결국 그사이 산적들은 다시 둘을 둘러싸게 되었다.

    “으흐흐, 아까부터 하도 싸고돌길래 이 금발 계집을 노리면 도망치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

    “역시 대장이십니다! 혜안이 대단하세요!”

    아첨꾼의 말에 산적은 기분이 좋았는지 간사하게 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음흉하게 데이몬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자꾸 도련님이라 하는 거야? 사실은 남잔데 여장한 건가? 확인을 해 봐야겠는걸?”

    “나 늙어서 힘들다. 어차피 잡힐 거 도망 좀 치지 말아라.”

    그렇게 말하며 대장이라고 불린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가 데이몬의 앞에 섰다. 키가 2m는 넘어 보이는 남자는 어지간히 데이몬을 얕보는지 무기조차 성의 없게 들고 있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데이몬이 검을 휘둘렀다. 그가 체구답지 않게 재빠른 속도로 뒤로 물러났으나 이내 피슷,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이마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아아악! 이런 미친-!”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로 인해 시야가 차단된 남자는 거대한 메이스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그 기세에 산적들이 잠시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 틈을 타 다시 도망치려고 하자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저것들 다 잡아!”

    그의 호령에 주춤거리던 산적들이 전부 시에나와 데이몬에게 달라붙어 사지를 결박했다.

    “이거 놔-!”

    둘은 있는 힘껏 반항했지만 수적 차이로 인해 결국은 몸이 묶이게 되었다. 데이몬에게는 거의 일곱 명 가까운 인원이 달라붙고, 시에나에게는 둘이 달라붙어 속박했다.

    “감히 내 몸에 상처를 내? 이 미친 새끼가!”

    잔뜩 화가 난 듯 산적은 코에서 김을 뿜고 있었다. 데이몬이 아무리 컸다고는 하지만 그와의 체격 차는 거의 두 배였다. 마치 다윗과 골리앗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산적은 메이스를 들고 성큼성큼 데이몬에게 다가갔다. 그의 이마에서 시작한 피가 눈썹을 타고 흘러내리는 장면이 그로테스크했다. 산적이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혀로 슬쩍 핥았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발악을 하니 내 친히 목을 베어 주지. 너 이 새끼들, 얘 잘 잡고 있어. 손 날아가기 싫으면.”

    산적은 씩씩대며 다가가 데이몬의 머리채를 꽉 쥐었다. 데이몬은 신음 하나 내지 않고 그를 그저 노려보았다. 이대로라면 데이몬은 정말로 목숨을 잃게 된다. 시에나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산적의 메이스가 하늘 높이 들렸다.

    “안 돼!”

    시에나는 그 순간 자신을 붙잡는 산적 둘을 뿌리치고 데이몬에게 달려들었다. 데이몬을 안고 나동그라진 시에나의 등 뒤에서 뜨끈한 감각이 느껴졌다. 산적의 거대한 메이스는 와장창 소리를 내며 시에나의 가방 안에 들어 있던 병을 모두 깨고 들어가 그녀의 여린 살을 그대로 베어 내었다.

    “아윽…!”

    데이몬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티끌 하나 없는 맑은 눈이 에메랄드처럼 반짝거렸다. 시에나는 데이몬이 무사해 다행이라 생각했다. 안심되는 한편, 등에서 격렬한 통증이 일었다. 눈앞에 별이 튀었다.

    “시에나아아!”

    데이몬은 붙잡힌 채로 절규했다. 시에나의 몸이 데이몬의 밑으로 스르르 허물어졌다. 숨이 막혀 왔다. 이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등이 불에 덴 것처럼 뜨겁고 따가웠다. 충혈된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정신이 깜빡였지만 절대 잃어서는 안 된다는 일념으로 버텼다. 산적은 자신이 벤 것이 데이몬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당장 안 치워? 상품에 흠집 났잖아!”

    “시에나한테 손대지 마!”

    데이몬은 수 명의 사람들에게 잡혀 있는 와중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악을 썼다. 산적이 귀찮다는 듯 말했다.

    “애 좀 조용히 시켜라.”

    푹.

    대장의 명령에 산적 중 누군가가 데이몬의 목 뒤에 얇은 침을 박아 넣었다.

    “윽…!”

    그 바늘이 발린 곳에서부터 데이몬의 혈관이 새파랗게 변하며 올록볼록하게 올라왔다. 그 후로 몇 번이나 더 반항하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지 움직임이 둔해졌다. 데이몬이 더 이상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자 만족스럽다는 듯 말했다.

    “아까부터 손대지 말라느니 쨍알쨍알 시끄러웠는데, 목소리를 들으니 알겠군.”

    그는 손을 더듬거리더니 시에나의 뒷목을 잡아챘다.

    “너, 이 계집애 좋아하지?”

    목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강도로 그는 시에나의 목을 죄어 왔다. 데이몬의 이가 으득 갈렸다.

    “아으….”

    “당장… 시… 에나를… 놔!”

    “얌전히만 있었으면 노예로 팔렸을 걸, 네가 다 망친 거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시에나를 딱딱한 흙바닥 위로 내던졌다.

    “아악!”

    “시이… 에나…!”

    등이 욱신거리고 아려 와 온몸에 힘이 빠졌다. 불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 한없이 늘어지기만 했다.

    “으흑….”

    격렬한 공포가 엄습했다. 시에나가 필사적으로 엉금엉금 기어갔지만, 산적들은 낄낄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손가락질했다. 데이몬이 몸이 둔한 와중에도 빠져나오려 악을 썼지만 그의 음성만 세상에서 차단된 듯 그들에게는 닿지 않았다.

    산적이 메이스를 내던지고 허리춤의 단검을 뽑은 채 시에나를 향해 다가갔다. 등 뒤의 상처에 따갑고 습한 바람이 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벗어나려 바르작거렸지만, 산적의 걸음에 비하면 너무나 미약한 움직임이었다.

    “씁, 되도 않는 반항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가만히만 있으면 얌전히 죽여 주지.”

    “당장… 지금… 이라… 도….”

    그렇게 말하며 산적은 또 낄낄 웃었다.

    “걱정 마라. 널 죽이고 저것도 곧 네 곁으로 보내 줄 테니.”

    “으으-! 놔아아아…!”

    시에나의 눈이 두려움에 가득 젖어 들었다. 그는 시에나의 머리채를 쥔 채 데이몬을 보고 낄낄 웃었다. 시에나는 가냘픈 숨소리를 내며 데이몬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르는 데이몬의 눈은 이상하게도 텅 비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곧 들어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봐라! 이게 다 네년 때문에 일어나게 되는 일이니까!”

    쿵.

    심장이 멈추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시에나의 등골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앞에 있는 남자 때문에? 아니, 아니었다.

    그것보다도 훨씬 더 거대하고, 음습하고, 잔혹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퍽,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비릿한 혈향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시에나는 두려움에 몸을 덜덜 떨었다. 추위를 타는 사람이 몸을 떠는 것과 당연한 이치였다. 한낱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공포감이 엄습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아악! 이, 이 자식 뭐야!”

    또 다른 데이몬이 깨어난 것이다.

    “뭐, 뭐야! 무슨 일인데!”

    산적은 당황하며 시에나를 놓고 일어나 허둥지둥 뒷걸음질 쳤다. 그제야 옆을 돌아본 시에나는 숨을 들이켰다.

    “힉….”

    데이몬의 몸을 누르고 있던 산적들이 전부 붉은 피 칠갑을 하고 쓰러져 있었다. 그 산적들은 부풀었던 것을 꽉 쥐어 터뜨린 것처럼 옷이고 살이고 너덜너덜하여 멀쩡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할 만큼 그들은 붉은 고깃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데이몬은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혀를 찼다.

    “쯧, 멍청하게 인간이 만든 약 따위에 당하기나 하고….”

    아까의 어눌한 목소리와 동일 인물이라는 걸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또렷하고 힘 있는 목소리가 시에나의 귓가에 들려왔다. 대장은 그가 약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오우거도 삼 일 밤낮을 마비시키는 침을…!”

    “내가 더 괴물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는 방금 전까지 사람이었던 이들을 고깃덩어리로 도륙하는 데 쓴 검을 흥미가 떨어진 얼굴로 대수롭지 않게 휙 던지고 시에나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반가워, 시에나. 오랜만이지?”

    세로로 찢어진 동공을 휘면서 그는 달콤하게 웃었다.

    “금방 오고 싶었는데 절대 안 주려고 해서, 시간이 좀 걸렸네.”

    그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그대로 얼어붙은 시에나의 볼을 데이몬이 살며시 쓸었다. 그의 손가락이 시에나의 볼을 쓸어 올리다 이내 귓바퀴를 조심스레 쓰다듬더니 목을 따라 주욱 내려왔다. 선득한 손길에도 시에나는 그저 마약에 빠져든 듯 그의 찢어진 동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퍼뜩 정신이 들어 신음을 내뱉었던 건, 그가 목을 넘어서 어느샌가 상처 난 등을 매만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읏….”

    “이상하다 했더니 여길 다쳤구나. 내가 대신 찔렸다면 좋았을 텐데.”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의 몸인데도 마치 타인을 대하는 듯한 말투였다.

    “브릭스…! 덴! 이, 일어나라!”

    “조금만 기다려 줘, 시에나. 쟤만 잠깐 친구들 곁으로 보내 주고 올 테니까.”

    그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내팽개쳤던 검을 다시 집어 들었다. 장검이 바닥에 질질 끌리는 소리가 섬뜩하게 다가왔다. 산적 역시 그 소리를 들었는지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단검을 든 산적의 손이 손목째로 날아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시에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철퍽, 소리와 함께 비릿한 혈향이 훅 퍼졌다.

    타박타박, 그는 시에나가 있는 쪽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가 가진 특유의 경쾌한 걸음걸이는 전쟁터에서도 같았다. 시에나는 그가 두려웠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산적들을 눈 하나 깜짝 않고 해치운 저자가 자신은 해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이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는 비무장 상태의 시에나를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아직 여자아이의 모습이었기에 너무 쉽게 시에나의 몸을 드는 것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가자. 데려다줄게.”

    “어…어디로요?”

    “일단 치료가 가능한 곳으로 가야겠지.”

    “공작님께… 공작님께 데려가 주세요. 거기에 마법사가 있어요.”

    그는 마법사가 있다는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윽, 난 그 마법사 싫던데. 오랜만의 오붓한 만남인데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 놨잖아?”

    그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불편한 심기를 아낌없이 표출했다. 어린아이 같은 투정에 시에나가 조금 안심이 되었는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처음 웃네.”

    “네?”

    “나일 때 네가 처음으로 웃는 걸 봤어.”

    그는 그것이 내심 기분이 좋았는지 이름 모를 노래를 휘파람으로 흥얼거렸다. 그의 휘파람 솜씨는 몹시 수준급이었다. 피를 많이 흘려 혼미한 와중에도 시에나는 예전의 도련님이 떠올랐다.

    ‘시에나는 휘파람을 잘 부네?’

    ‘어머, 제가 휘파람을 불었나요?’

    ‘응. 아까부터 듣고 있었는데, 음색이 좋아. 난 한 번도 불어 본 적이 없는데.’

    시에나의 동그랗게 모인 입술에서 나온 휘파람 소리를 데이몬이 부러워하던 장면이 물에 젖은 인화지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시에나가 휘파람을 부는 방법을 알려 준 후 데이몬은 무던히 노력했지만 후- 후- 공기 소리만 날 뿐, 실제로 휘파람을 불 수는 없었다.

    그 데이몬의 이런 능숙한 솜씨라니. 시에나는 혼란스러웠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시에나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그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드디어 나에 대해 궁금한 게 생긴 거야? 기쁘네.”

    “왜 데이몬 도련님의 안에 들어와 계신 거죠?”

    “흐응. 걔가 내 안에 들어와 내 몸을 차지한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의 반격에 시에나는 흠칫 놀랐다. 오히려 데이몬 도련님이 이 사람의 몸을 차지한 거라고? 토끼처럼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는 시에나를 보던 그의 입술이 씰룩이더니 몇 분 전 산적들을 모두 도륙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해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농담이야, 농담. 그러니까 그렇게 심각하게 바라볼 것 없어.”

    그의 솔직한 말에 시에나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난 글쎄. 나도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어.”

    “네?”

    “이번엔 농담 아니고, 어느 날부터 얘 몸속에서 자라고 있었어. 함께 나이를 먹으며, 같은 감정을 공유하며 말이야,”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시에나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물론 나는 얘처럼 찌질할 만큼 착해 빠지진 않았지만. 나 같으면 그 남작이 손을 댄 순간에 없애 버렸을 거거든.”

    리메리오 남작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말투가 몹시 사납고 거칠어, 시에나는 그것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럼 지금 도련님은 어디 계신 건가요?”

    “글쎄. 내가 이 애 안에 있듯이 걔도 지금 이 안에 있겠지.”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시에나는 혼란스러워졌다.

    “그럼 도련님도 지금 이 대화를 듣고 계신 거예요?”

    “그렇긴 하지만 깨어나면 잊어버릴 거야. 원래는 파리가 윙윙대는 것처럼 시끄러운데 기절해서 그런지 조용하네. 좋다.”

    그는 정말로 만족스러운 듯 눈을 휘며 웃었다. 조심스럽고 다정했던 데이몬과는 다르게 그는 무례하고 자신만만했다. 힘을 가진 자 특유의 오만함이 그의 눈동자에 넘쳐흘렀다.

    그는 어느새 시에나를 안고 숲의 시작 부근까지 걸어왔다. 시에나가 그를 바라보며 우물쭈물하고 있자 그가 말했다.

    “사람들 눈에 띄기 전에 돌려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아쉬움과 동시에 묘한 온기가 느껴졌다. 한없이 오만해 보이는 그였지만, 그는 묘하게도 시에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좋아하는 선생님 앞에 선 어린아이처럼. 시에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볼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놀랄 만큼 차가운 피부의 체온이 손으로 전해졌다. 그는 시에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시에나 역시 그런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고마워요.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어요.”

    그는 새파란 창공을 닮은 시에나의 눈동자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이윽고 환하게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그래, 다음에 또 보자.”

    “다, 당신을 또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등에 난 상처 때문에 기절할 것 같았지만, 그가 사라지기 전에 물어야 했다. 그는 시에나의 말이 의외라는 듯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네가 정해. 어떤 말로 날 불러내고 싶은지.”

    내가… 정하라고? 시에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붉은 장미에 얽힌 비밀.”

    ‘붉은 장미에 얽힌 비밀’은 이 책의 제목이었다. 어째서 그를 부르는 데 이 제목을 말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문득 그의 얼굴을 보니 생각났다.

    “그게 뭐야? 고루해.”

    그는 시에나가 처음 책 제목을 봤을 때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신이 들어 있는 책 제목이요, 라고 할 수는 없었기에 시에나는 애매한 웃음을 흘렸다.

    “이젠 진짜 헤어질 시간이네. 참 얘한테 마법 좀 배우라 그래. 너 하나 치료도 못 해 주고 이게 뭐야?”

    “저….”

    그는 시에나를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 주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시에나가 뭐라고 말하려고 하기도 전에 데이몬의 몸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툭, 허물어졌다.

    “도련님…!”

    그녀가 붙잡으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저 둘 다 쓰러지지 않으려 버티고만 있을 때, 누군가가 둘의 몸을 한꺼번에 지탱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얼굴이 새까맣게 죽어 있는 처참한 표정의 로하엘이 보였다.

    “시에나…! 괜찮아요?”

    눈동자에는 놀라움과 좌절감이 가득 차 있었다. 아무래도 잔뜩 걱정을 끼친 모양이었다. 시에나는 그런 로하엘에게 웃어 보이려 했지만 얼굴 근육이 굳은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어…?”

    그를 보자마자 긴장이 풀려 온몸에 힘이 빠진 시에나가 그대로 밑으로 추락했다. 자신을 받아 드는 단단한 손길을 느끼며 시에나의 눈앞이 새카맣게 암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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