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늦은 밤, 성안으로 들어오는 데이몬은 흠뻑 젖어 있었다. 그리고 그 표정은 하늘에 낀 먹구름보다 어두웠다. 덕분에 시에나는 데이몬의 얼굴을 보자마자 오늘의 성과를 알 수 있었다.
실패.
오늘도 아이작에게 문전박대를 당한 거겠지. 첫 만남 이후 아이작은 계속해서 일이 있다며 데이몬과의 만남을 피했다.
일하는 곳까지 찾아가면 민폐라는 생각에 거기까지 찾아가지는 못했지만, 한참 허탕을 치는 바람에 오히려 노파와 사이가 좋아지는 일도 생겼다.
덕분에 데이몬은 가끔 노파에게서 받은 약초 꾸러미를 달랑달랑 들고 오기도 했다. 데이몬의 약초 꾸러미는 다치는 일이 많은 기사단이나 주방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아이작은 자신의 할머니와 데이몬이 친해지는 것이 영 마뜩잖은 눈치였지만, 귀족인 데이몬에게 집에 오지 말라고는 할 수 없는 탓에 그저 자신이 데이몬을 피하는 데에 그쳤다.
왜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걸 피하는 걸까.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지만, 무언가 속내가 있을 것 같아 시에나는 가끔 거기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오늘은 일주일 내내 장맛비가 내려서 바깥 외출을 못 하고 있다가 그치자마자 바로 다녀온 거였는데도 아이작을 만나지 못했었다.
뒤늦게 내린 장대비에 몸만 쫄딱 젖어 돌아온 데이몬을 시에나가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도련님, 흠뻑 젖으셨네요. 저녁 드시기 전에 옷 갈아입고 씻으시는 게 좋겠어요.”
“저녁은… 생각 없어. 벌써 밤인걸. 씻기만 할게.”
비척비척 걸어 들어오며 시에나에게 답하는 데이몬의 모습은 풀이 죽어 있었다. 일단 푹 젖은 도련님의 몸을 씻기는 게 먼저라 생각한 시에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욕실로 가요.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 드릴게요.”
“응….”
“그런데 몇 시간을 밖에 계셨던 거예요? 몸이 너무 차가우신데요.”
“오늘은 사실 할머니도 없었어. 그래서 그냥 밖에서 기다렸거든.”
“아니, 아무도 없으면 그냥 오늘은 돌아오시지… 그런데 할머니가 집을 비우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들었는데, 이상하네요.”
나이가 들어 몸이 성치 않은 할머니는 걷는 게 쉽지 않아 약초의 채집이나 집안일은 아이작이 하고 있다고 전에 데이몬에게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게… 무슨 일이 있으신 건 아니겠지.”
“무슨 일이 있으시겠어요. 일단 씻으러 들어가요. 목욕물은 미리 준비해 두었어요.”“응, 알았어.”
데이몬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시에나의 안내에 따라 욕실로 향했다. 미리 말해 둔 욕조에는 뜨거운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시에나의 시중을 한사코 거절하는 데이몬이었기에 그녀는 데이몬의 시중을 드는 대신 갈아입을 옷을 가지러 밖으로 나섰다.
쏴아아아-.
소나기로 시작해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더니 지금은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자니 시에나는 노파의 집이 우려되었다. 지대가 낮은 곳에 있어 혹시 그 집이 잠기거나 산사태가 일어나는 건 아닐까, 괜히 걱정이 되었다. 집이 비어 있다고 하더니, 다른 집으로 피신을 한 걸까?
시간이 날 때마다 시에나도 데이몬과 함께 노파의 집에 갔었기에, 그녀도 제법 노파에게 정이 들어 있었다. 비가 그치는 대로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1층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어… 이게…! 아…!’
‘뭐야…! 알려야….’
“무슨 소란이지? 누가 온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데이몬의 욕실 안에서도 쿠당탕,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시에나가 깜짝 놀라 벌컥 문을 열었다. 데이몬이 몸을 일으켰다가 급히 욕조 안으로 주저앉았다.
참방.
“악!”
“죄송해요! 죄송해요, 도련님! 저는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실눈을 뜨고 보니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가 그 바람에 찬장에 머리를 부딪치며 욕실용품들이 떨어지는 소리였던 모양이었다. 데이몬의 뽀얀 얼굴 위로 불길이 화끈, 달아올랐다. 데이몬은 무어라 한 소리를 하려다, 이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홱 돌리고는 말했다.
“욕실 창문 밖으로 현관을 보는데, 익숙한 사람이 보여서. 저택에 누가 온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없겠지만, 걔를 닮았어.”
“네? 누구를 닮았다는 말씀이세요?”
“아이작… 말이야.”
시에나는 워낙 그리워하시다 보니 환각이 보이는 건가 싶었다.
“그 상사병인가 싶은 얼굴은 뭐야, 시에나? 진짜라니까?”
“아, 그렇죠. 제가 내려가 볼게요.”
“나도 같이 가.”
“도련님 씻으신 지 얼마 안 되셨는데요?”
“조금 이따 씻으면 돼. 몸 닦고 갈 테니까, 먼저 내려가 있어.”
“네, 그럴게요.”
그렇게 말하며 시에나는 아래로 총총 내려갔다. 시에나가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데이몬이 여전히 얼굴에는 홍조를 띤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남자로도 안 보이는 건가….”
* * *
시에나가 현관으로 내려가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늦은 밤이라 그런지 잠옷을 입은 사람들이 불안한 눈길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스가 검집을 꽉 쥐고는 열리지 않은 성문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쾅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무슨 일이에요?”
“시에나. 갑자기 오밤중에 웬 미친놈이 찾아온 것 같아서, 쫓아낼까 고민 중이었다.”
“도와줘-!”
아이의 처절한 목소리가 문밖을 울렸다. 데이몬의 말대로 익숙한 목소리였다.
“이 애, 내가 알고 있는 앤 것 같아요.”
“어엇…!”
시에나는 사람들의 만류에도 달려 나가 바로 문을 열었다.
“아이작!”
문 밖에 있던 이는 역시나 아이작이 맞았다. 문을 열자마자 아이작은 흐린 눈으로 시에나를 바라보다 이내 그대로 시에나의 품으로 허물어졌다.
“꺅…!”
몸은 비에 잔뜩 젖어 있어 시체처럼 차가웠고, 옷은 흙탕물이 들어 잔뜩 더러워져 있었다.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이작은 미쳐버린 사람처럼 흐느꼈다.
“도와줘, 우리 할머니를 살려 줘. 도와줘. 제발….”
그와 동시에 아이작은 울컥, 토혈했다. 새빨간 피가 시에나의 옷에 튀겼다. 아이작은 시에나의 품으로 허물어졌다. 시에나는 더 생각할 틈도 없이 소리쳤다.
“물을 끓여 주세요! 의원을 당장 불러 주시고요!”
시에나의 말에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에나가 아이작을 안으려고 했지만 키가 커서 그런지 좀처럼 들리지가 않았다. 그새 데이몬이 목욕 가운을 갖춰 입고 1층으로 내려와 있었다.
“도련님…! 아이작이….”
“이리 줘. 내가 안을게.”
데이몬은 시에나에게 다가가 아이작을 가볍게 안아 들었다. 시에나가 아무리 끙끙거려도 안지 못하던 아이작을 안아 드는 데이몬은 무언가 생소했다. 잠시 이 바쁜 상황에도 넋을 놓고 바라볼 만큼.
“얼른 가자. 내 욕실 물이 아직 뜨거울 테니 거기 담그는 게 나을 것 같아.”
“네… 네!”
시에나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몬은 자신의 체격만 한 아이작을 안고 성큼성큼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데이몬의 하얀 목욕가운이 피와 오물로 물들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런 데이몬을 시에나가 뒤에서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어느새 저렇게 크신 걸까. 얼마 전만 해도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큼 작게 느껴졌었는데.
“무슨 일인지 알아?”
“아니요. 갑자기 할머니를 살려 달라고 하면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어요.”
3층으로 올라가려던 둘은 2층에서 막 내려가려던 참인 로하엘과 마주쳤다.
“로하엘 님!”
“시에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 아이는….”
로하엘도 전에 마주친 적이 있어 아이작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조금 이따 설명드릴게요. 일단 아이작의 몸이 너무 차가워서요.”
“네, 알겠습니다.”
로하엘은 멍하니 있는 대신 먼저 빠르게 올라가 데이몬의 방문을 열어 주었다. 그 덕분에 데이몬은 손쉽게 아이작을 방 안으로 옮길 수 있었다.
“시에나는 일단 밖에서 기다려 줘. 금방 씻기고 나올 테니까.”
“네에, 그럴게요.”
“의원이 오면 알려 주고. 부탁해.”
“네!”
* * *
피 묻은 옷을 갈아입은 시에나가 다시 아이작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아이작은 벌써 다 씻고 옷까지 갖춰 입은 채 데이몬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데이몬과 로하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쓰러진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괜찮은 걸까요?”
시에나가 아이작의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다행히 열은 없지만,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아요. 언제 깨어날지는 모르겠네요.”
“얘, 상태 좀 이상해.”
데이몬은 누워서 가쁜 숨을 쉬는 아이작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이상하시다는 건가요?”
“기운이 뒤틀려 있어. 저번에 봤을 때처럼 자연스레 흐르고 있지 않고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어. 그리고 엄청나게 날뛰고 있고.”
시에나는 깜짝 놀라 데이몬을 바라보았다. 데이몬은 쭈뼛대며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으니 처음 그들에게 말한 것일 테다.
“도련님, 마나의 흐름을 느낄 줄 아시는군요?”
“…그래.”
“대단하십니다.”
로하엘에게 칭찬받을 줄은 몰랐는지 데이몬이 조금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의원님이 도착하셨어요!”
누군가 밖에서 말했다. 그와 동시에 문이 열렸다. 의원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는 빠르게 왔음에도 불구하고 저번과는 달리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도련님이 또 아프신 겁….”
의원은 침대에 누운 아이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 왕진 가방을 툭 떨어뜨렸다.
“이, 이 애가 왜 여기에….”
“밤에 정문을 두들기더군. 아는 아이인가?”
“아니요, 그렇게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알고 모르고는 상관없어. 빨리 치료해 주게.”
데이몬은 그렇게 말했지만 의원은 여전히 부들부들 떨다가 고개를 저었다.
“치료할 수 없습니다.”
“뭐?”
데이몬의 인상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시에나와 로하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왜 못 한다는 거지?”
“이, 아이는 그러니까. 마녀의 손자 아닙니까! 저는 이스테라 교리를 믿는 신도로서, 마녀의 가족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네 목이 떨어진다 해도 말인가?”
데이몬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목소리로 미루어 그가 화가 났다는 사실은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끅. 마, 마음대로 해 보십시오. 저 역시 신전 쪽에 연을 두고 있는 몸, 저를 건드리신다면 도련님께서는 신성 재판에 세워지실 겁니다!”
의원은 떨고 있으면서도 배짱을 부렸다. 시에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깟 종교가 다 뭐길래 사람 목숨보다 위에 있다는 말인가. 무신론자인 시에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단 말이지.”
“히, 히익….”
데이몬은 조용히 검집으로 손을 가져갔다. 의원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곧 죽어도 치료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자, 잘 생각해 보십시오. 도련님. 이 시골에 의원이라고는 저밖에 없습니다. 제가 없으면 신전과의 연도 없습니다. 제가 죽는다면 도련님뿐만 아니라 다른 영지 사람들도 아플 때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될 겁니다. 도련님은 정녕 그런 악독한 지배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뚫린 입이라고 의원은 잘도 나불거렸다. 셋이 혐오스러운 눈으로 의원을 노려보자 그는 한결 쪼글라든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정말 투철한 봉사 정신으로 이 산골에 남아 있는 겁니다. 제가 아니었다면 이 영지 사람들의 반은 죽었을 겁니다.”
투철한 봉사 정신은 무슨. 온갖 보석을 단 목걸이를 차고 장신구를 주렁주렁 달고 있으면서 그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이 의원이 영지의 의료를 독점해서 돈을 다발로 벌어들이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잠깐, 목걸이…?
시에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의원을 살펴보았다. 의원은 시에나의 뜨거운 눈빛에 당황하며 몸을 가렸다.
“뭐, 뭘 보십니까?”“아닙니다. 더 이상 치료해 주실 생각이 없으면 이만 나가 주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마차비는 치러 드리죠.”
“시에나?”
데이몬은 기껏 불러 놓은 의원을 보내려는 시에나를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의원이 종교에 갇혀 환자에 대한 의무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내보내고 저희끼리 궁리해 보는 게 나아요.”
시에나의 말에 의원은 발끈한 듯했지만 옆의 로하엘과 데이몬이 그를 죽을 듯이 노려보고 있어서인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로하엘은 은화 하나를 그에게 튕겨 주었다.
“마차비다. 여기서 최대한 빨리 나가주게.”
“아, 안 그래도 나갈 생각이었습니다! 참… 다음번에는 어떻게 절 불러야 할지 후회나 하지 마십시오!”
의원은 씩씩대며 자리를 떠 버렸다. 하나 남은 의원이라고 오냐오냐했더니 예의라고는 눈에 쓸 데도 없었다. 시에나는 밖에 있는 사용인을 불러 조용히 말했다.
“빠르고 날렵한 사람 몇을 추려 저 의원을 추적해 주세요. 은색 머리에 회색 눈을 하신 60대 여자분을 발견하면 바로 저한테 연락 주시고요.”
“예, 알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시에나는 떠나가는 의원의 뒷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다 이내 찰칵, 문을 닫았다.
“시에나는 저 사람이 할머니를 숨기고 있다 생각하는 거야?”
데이몬이 알아챈 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시에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래도 이상해서요. 저번에 도련님이 아프셨을 때는 자다 깨서인지 잠옷 비슷한 옷을 입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왔는데, 오늘은 옷도 평상복에다가 장신구까지 주렁주렁 달고 있었죠. 부른 건 똑같은 밤이었는데 말이에요.”
“그렇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갑자기 시에나가 화가 나서 그러는 줄 알았어.”
데이몬의 눈썹이 축 늘어졌다. 퍽 미안해 보이는 표정에 시에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도 저번에 의원을 만나 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거예요. 그리고 제가 봤을 때 저 사람은 분명 자기 목숨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타입인데, 괜히 교리를 들먹이면서 사람을 치료 하니 안 하니 하는 게 이상했어요. 처음에 아이작을 봤을 때 놀랐던 것도 그렇고요. 뭔가… 아이작이 여기에 있을 리가 없다는 것처럼.”
“그럼 할머니랑 어딘가에 갇혀 있었는데, 아이작만 혼자 도망쳤다는 거야?”
“네. 아마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오늘 가셨을 때 아무도 없었다고 하셨죠? 그런데, 어떻게 이 작은 아이가 이 성까지 들키지 않고 왔는지는 모르겠네요.”
“그건… 아마 마법을 썼을지도 모르겠군요.”
지금까지 생각에 잠겨 있던 로하엘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이요?”
윙가르디움 레비오우사 같은…?
시에나는 잠시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번개 흉터 소년을 떠올리다가 이내 저작권을 생각하며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예. 마나가 뒤틀려 있다는 것과, 이 소년이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이 성까지 온 것, 그리고 피를 토하는 현상. 이 모든 게 마법을 과하게 썼을 때나 잘못 썼을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이작은 그럼 원래 마법을 쓸 수 있었던 걸까요?”
“글쎄요. 적어도 제대로 된 스승이 없었다는 사실은 알 것 같습니다. 스승이 있었다면 절대 내상을 입을 만큼 위험한 짓을 하게 만들진 않았을 테니까요. 마법은 잘못 쓰면 시전자가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거거든요.”
“그렇다면, 간단한 치료로는 소용이 없을지도 모르겠군요.”
“성수가 있다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딱히 구할 수가 없으니….”
로하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을 하던 중, 데이몬이 손을 들고 말했다.
“전에 내가 열이 났을 때 쓰고 남은 약이 있어. 해열용이긴 하지만 쓸모가 있지 않을까?”
저번에 의원에게 구매했던 1골드 50실버짜리 비싼 약이 아직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시에나는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 약이 아직까지 남아 있나요?”“그게 약이 너무 써서….”
“써서요?”
“으흠, 안 먹었거든.”
데이몬은 찔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시에나가 데이몬을 슬쩍 노려보자 데이몬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빨리 가서 약 가져올게.”
쿠당.
문이 닫히고, 데이몬이 떠나간 자리에서 로하엘은 계속 아이작을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에나. 혹시 이 성 내에 마력석이 있나요?”
“마력석이요? 아마 없을 거예요.”
수도의 귀족 저택이나 황궁에는 마력석으로 불을 밝히기도 한다던데, 가난한 마르바스 성에는 마력석 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 마력석은 왜요…?”
“마법의 사용으로 인해 뒤틀린 몸을 치료할 때는, 다른 마나를 불어 넣어 주면 치료될 때도 있거든요.”
“그렇다면… 로하엘 님이 가지고 있는 마나로는 안 되는 건가요?”
검기를 사용할 수 있는 로하엘이었기에 시에나는 별생각 없이 물었다. 그러나 로하엘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검의 마나와 마법의 마나는 완전히 달라서 함부로 넣었다가는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 쉽습니다. 컨트롤 하는 법을 배웠으니 흘려 넣을 수는 있지만, 몸 안의 마나를 정상적으로 만들 정도로 넣었다가 어떤 부작용이 날지 모르거든요.”
시에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얗게 질린 아이작의 얼굴이 그날의 데이몬과 겹쳐 보여 너무나 안쓰러웠다. 그때 데이몬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약, 가져왔어.”
약병 안에는 희뿌연 액체가 1/3 정도 차 있었다. 시에나는 데이몬을 탓하는 대신 그걸 받아 들고 아이작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이작의 코를 잡고 액체를 흘려 보았지만, 아이작은 액체를 흘릴 뿐,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의 데이몬보다 상태가 심각한 듯했다. 입가에 흐르는 희뿌연 액체를 손수건으로 닦아 주며 시에나가 결심한 듯 말했다.
“자꾸 토하네요. 입으로 넣는 게 낫겠어요.”
“뭐!?”
“예?”
데이몬과 로하엔은 놀라서 시에나에게 되물었다. 시에나가 아이작에게 먹이려 병을 잡고 자신의 고개를 뒤로 꺾는데, 데이몬이 시에나의 머리를 뒤에서 받혔다.
“도련님…?”
“내, 내가 할게!”
당황하는 데이몬의 모습에 시에나는 얼떨결에 그에게 약병을 건네주게 되었다.
“아니, 도련님 무시하는 게 아니라 하시는 법 잘 모르시지 않나요?”
“아니! 내가 이런 거 꼭 해 보고 싶었어. 하게 해 줘. 제발. 사람을 구해 보는 게 내 소원이었어!”
데이몬의 간절한 말에 로하엘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깨문 입술 사이로 공기가 비식비식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도련님이 하시게 두시죠. 큭, 잘하실 것 같은데요.”
“그래도….”
시에나가 망설이자 데이몬은 그대로 약을 벌컥 들이켰다. 오만상을 쓴 걸 보니 약이 어지간히 쓴 모양이었다. 그걸 아이작을 위해 마신다니, 데이몬은 참 정이 많은 아이였다. 시에나가 감동한 표정으로 데이몬을 바라봤다. 데이몬은 시에나를 등진 채 너무나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아이작을 향해 걸어갔다. 무릎을 꿇은 채 시에나의 안내에 따라 입에서 입으로 약 세 번에 걸쳐 약을 먹였다.
“후우….”
“고생했어요, 도련님.”
“큽, 고생. 고생하셨습니다.”
데이몬은 나라 잃은 표정으로 의자 위에 축 늘어졌다.
“응….”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힘이 없었다.
“이제는 좀 어때요, 도련님? 마나가 좀 괜찮아졌나요?”
“아까처럼 날뛰지는 않지만 여전히 제멋대로 흐르고 있어.”
“아침까지 기다렸다 마법사를 구해 보는 수밖에 없으려나….”
로하엘이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시에나는 번뜩 생각이 난 얼굴로 데이몬을 바라보았다. 데이몬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래. 시에나?”
책 속의 데이몬은 6년 뒤 각성해 제국의 반을 무너뜨렸다고 했다. 자유자재로 마법을 다루며 생명체를 파괴하는 그 힘은 마치 드래곤의 현신을 보는 것 같았다고. 그렇다면 지금의 데이몬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마나가 있는 건 아닐까.
“도련님께 마나가 있을지도 몰라요.”
“어?”
“네?”
홀린 듯이 말하던 시에나는 자신에게 되묻는 사람들을 보고 뒤늦게 변명거리를 생각했다.
“그러니까, 마나의 흐름도 보이실 만큼 마나에 예민하신 분이잖아요. 그러니 몸 안에 마나도 가지고 계시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겠군요. 아니, 가능성이 꽤 커요. 도련님, 잠시만 이리 와 보시겠어요?”
데이몬은 순순히 로하엘에게 다가갔다. 로하엘은 데이몬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그러더니 눈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잠깐, 이게 진짜 마나인가? 그렇기엔 너무 많은데… 그렇다고 아니진 않은 것 같고… 으음.”
고민 끝에 로하엘은 다시 눈을 떴다.
“어떤가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있습니다.”
로하엘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다급한 상황인지라 결론만을 빠르게 이야기해주었다. 그의 대답에 시에나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로하엘은 아까 데이몬이 약을 가지러 간 사이 했던 대화를 반복해서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데이몬은 영민한 아이답게 한 번에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컨트롤을 배울 수는 없으니 제가 중간에 연결하는 걸로 하는 게 낫겠군요. 마나를 방출하는 방법은 아십니까?”
“배워 본 적은 없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아.”
데이몬의 말투는 자만심이 섞여 있진 않았다. 그저 할 수 있는 걸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럼, 한번 시도해보죠.”
“정말 괜찮을까요?”
시에나가 곁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로하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데이몬 도련님의 마나는 순수한 마나에 가까워요. 이 경우에는 제가 매개체가 될 뿐, 제 마나를 직접 넣는 건 아니니 괜찮을 겁니다.”
“그렇군요. 꼭 잘되었으면 좋겠어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련님, 제 왼손을 잡으세요.”
데이몬이 얌전히 그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로하엘은 오른손으로 아이작의 손을 잡고 이내 눈을 감았다.
“자 이제 마나를 흘려 보세요. 네, 잘하고 계십니다. 아니! 너무 많아요! 그만!”
로하엘은 깜짝 놀라 데이몬의 손을 홱 뿌리쳤다. 데이몬 역시 놀랐는지 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떨어진 둘의 사이에 스파크가 확 튀었다. 푸른색의 마나가 시에나의 육안에도 선명하게 보였다. 로하엘은 큰일이라도 겪은 사람처럼 한숨을 후 내쉬며 말했다.
“도련님, 이 정도로 쏟아부으면 일반인은 죽어요. 저도 방금 엄청 위험했습니다.”
“하지만, 아주 약간만 넣은 건데….”
“더 조절해 보세요. 도련님은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조금씩, 동굴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처럼, 네. 다시 해 봐요.”
몇 번의 시도 끝에 데이몬은 아주 약간의 마나를 흘려보낼 수 있게 되었다. 로하엘은 그제야 다시 아이작의 손을 잡고 데이몬이 주입한 마나를 조금씩 그에게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흐름은 안정되고 있나요?”
“…응. 신기하다.”
마나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데이몬이기에 로하엘은 그에게 물었다.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가 한 바퀴를 완전히 돌고 나서 주입을 멈추면 될 겁니다.”
“…알았어. 주의 깊게 볼게.”
그 과정이 제법 힘든지 데이몬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시에나는 옆에서 그 장면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똑똑.
“추적대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제가 나가 볼게요.”
집중하고 있는 둘 대신 시에나가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시종이 흠뻑 젖은 전서구를 들고 있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또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네, 그럴게요.”
시에나는 그 전서구를 뜯어 촛불에 비춰 보았다. 물에 젖어 흐릿해지긴 했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의원은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향한 곳의 주소는 아래와 같습니다.]
시에나는 주소를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아이작의 집에서 약 1km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시에나가 그 주소를 외우듯이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한 바퀴 돌았어.”
“좋아요, 그만 멈추면 됩니다. 수고하셨어요.”
데이몬이 지친 얼굴로 얼굴에 땀을 닦아 내었다. 로하엘 역시 만만한 일이 아니었는지 목과 어깨가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시에나가 아이작의 상태를 살폈다. 호흡이나 체온,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신기했다.
“정말 대단해….”
이런 식의 치료는 처음이었기에 시에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데이몬은 약간 부끄러운 듯 귀 끝을 빨갛게 물들였다.
“의원이 향한 곳을 알아냈어요. 역시 집이 아니었대요.”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할까요?”
로하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에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두 분 다 많이 지쳐계신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문제없습니다.”
“문제없어.”
둘은 동시에 대답했다. 시에나는 살며시 눈을 접으며 말했다.
“든든하네요.”
* * *
우비를 갖춰 입은 열 명의 사람들이 숲 속에서 집을 둘러보고 있었다. 허름한 빈집은 폐가에 가까웠다.
“아까 의원이 저기로 들어갔습니다.”
먼저 온 추적대의 대장이 시에나에게 속삭였다. 시에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 보죠.”
시에나가 먼저 일어나 앞장섰다. 그 앞을 데이몬이 막아섰다.
“시에나는 내 뒤에 있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데이몬의 제법 멋진 말에 시에나는 약간 감동했다. 어느새 이렇게 커서 이런 말을 할 줄 알게 된 걸까.
“도련님이야말로 중앙에 계셔야죠.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집에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말도 안 되는 소리. 시에나가 여기 온다는데 내가 어떻게 집에 있어?”
데이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끝까지 시에나를 자신의 뒤에 놓았다. 그 바람에 시에나는 결국 사람들의 중앙에 있게 되었다. 맨 앞에 선 사람이 수신호를 보내고 이내 문고리를 당겼다. 당연하게도 문고리는 잠겨 있었다. 한 명이 나서 철사를 가지고 요리조리 애쓰더니, 툭. 거짓말처럼 문이 열렸다. 시에나는 그의 능력에 혀를 내두르며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데요?”
“그럴 리가. 분명 여기로 들어가는 걸 봤다고!”
추격대는 당황하며 소리쳤다. 시에나는 주의 깊게 바닥을 살폈다.
“잠시만요. 그대로 멈춰 주세요.”
시에나는 등불을 밑으로 비추고 집 안을 한 바퀴 돌았다. 열 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크기의 방 안에는 낡은 잡동사니가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유난히 바닥만은 깨끗했다. 그리고 깨끗한 바닥 위로 진흙이 묻은 발자국이 어지러이 찍혀 있었다. 빙고였다.
“여기가 맞을 거예요. 아마 숨겨진 방이 있는 것 같은데, 확인해 주세요.”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바닥을 뒤지기 시작했다. 시에나는 등을 대고 진흙이 묻은 발자국을 끝까지 따라갔다. 그 발자국은 어떤 테이블 위에서 멈추었다.
“이거군요.”
시에나가 테이블을 치우려고 했지만, 테이블은 단단히 굳어 치워지지 않았다.
“끄응… 누가 좀 도와주실래요?”
“제가 할게요. 잠시만 비켜 주세요.”
가까이 있던 로하엘이 다가가 테이블을 잡고 힘을 주기 시작했다.
파사삭.
“어?”
“응?”
가엾은 낡은 테이블은 로하엘의 손에 의해 바로 박살이 났다. 둘은 당황해서 눈을 마주했다.
“부서졌네요.”
“그, 약했나 봐요.”
“하하하, 네 그랬나 봐요.”
과연 약을 한 것이 테이블일지, 로하엘일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테이블은 무생물이었기에 말이 없었다.
시에나가 등을 비추며 주위를 요리조리 살피자, 바닥에 있는 디귿 자 모양의 걸쇠를 볼 수 있었다.
“아, 이게 테이블을 드는 게 아니라 이걸 풀면 되나 봐요.”
“으흠, 그렇군요.”
로하엘은 테이블을 부숴 버려서 그런지 살짝 의기소침해 있었지만 시에나는 가볍게 무시하고 앞의 걸쇠를 푸는 데 열중했다.
“풀었다!”
몇 번의 손놀림 끝에 걸쇠를 푼 시에나가 해맑게 웃었다.
“제가 들어 올릴게요.”
“아니, 그냥 제가 할게요.”
시에나는 로하엘이 뭔가를 또 부숴 먹을까 봐 자신이 나섰다. 데이몬이 달려오기도 전 시에나가 힘을 쓰기 시작했다.
“끄응….”
덜컹.
지하실과 연결된 문은 테이블째로 열렸다. 열린 문에 모두가 탄성을 질렀다. 문은 걸쇠로 인해 아래에 박혀 있는데, 테이블에 힘이 가해지니 부서진 듯 보였다. 문을 열자 어둠 속에 잠긴 계단이 보였다. 등으로 비춰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제가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시에나를 막으며 로하엘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에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에 선 시에나는 데이몬과 합류했다. 저도 모르게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진정시키려고 하는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괜찮아, 시에나.”
그때 데이몬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데이몬이 시에나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아무 일도 없도록 내가 지켜 줄게.”
그렇게 말하는 데이몬의 목소리도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오히려 시에나의 긴장이 풀려 버렸다.
“후후….”
“왜, 왜 웃어? 진짜야. 나도 많이 강해졌다고.”
“아니요. 든든해서 그랬어요.”
“정말이야?”
“네, 그럼요. 데이몬 도련님만 믿고 있어요.”
“그래. 내 옆에 잘 있어. 내가 내 목숨 바쳐 지켜 줄 테니까.”
“무리하진 마세요.”
“무리하는 거 아니야.”
“자아, 그럼 내려갈까요?”
“응. 시에나, 밑에 조심해.”
“네에.”
데이몬은 등을 들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꼭 잡은 두 손이 생각보다 든든했다. 시에나는 첫 만남보다 훨씬 듬직해진 데이몬을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 * *
폐가에 딸려 있는 지하실인 줄 알았는데 안은 제법 넓었다. 마르바스성의 지하 감옥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폐가보다 더 넓은 건 사실이었다.
이거 불법 증축 아닌가. 지하실이 집보다 넓다니.
잠시 한국의 법을 떠올리며 시에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긴장한 기색의 초반 투입원들이 주위를 둘러보는데, 조금 넓은 평범한 지하실일 뿐 무언가 나타날 것 같지는 않았다.
한스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 있던 조쉬가 그런 한스의 모습을 보고 깝죽대었다.
“귀신 나올까 봐 무서웠던 게지?”
“누, 누가 귀신이 나올까 봐 무서웠다는 거야! 난 아무렇지도 않거든!”
한스는 얼굴이 빨개져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에이, 아까만 해도 다리가 덜덜덜덜덜 떨리던데.”
“하. 웃기지 마. 조쉬 너야말로 아까 돌멩이 밟고 놀라서 소리 질렀던 거 알거든?”“뭐! 내가 언제 그랬다는 거야!”
“간이 콩알만 해 가지고! 아주 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만 봐도 놀라면서!”
“아니거든! 네가 봤어? 봤냐고! 넌 그때 뒤에 있었잖아!”
“볼 필요도 없지! 이렇게 등을 비추기만 하면….”
둘은 작은 목소리로 실랑이를 하다 벽에 등을 비추기 위해 등을 높이 들어 올렸다. 환해진 빛 사이로 조쉬와 한스는 수십 개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어둠 속에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던 눈동자에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흐아아악-!”
더불어 깜짝 놀란 사람들까지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시에나는 사람들에게 치여 정신이 없었다.
“잠깐, 다들 멈춰요…! 으…!”
“시에나, 이리와. 다칠 수도 있겠어.”
데이몬은 시에나를 꽉 끌어안으며 혼잡하지 않은 곳으로 자리를 피했다. 시에나는 한숨 돌린 후 다시 그쪽을 향해 등을 비추었다.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얼어붙어 있었다. 개중에는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당신은…!”
의원은 시에나의 말에 흠칫 놀라 덜덜덜 몸을 떨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아까의 당당한 태도와는 달리 갑자기 비굴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그 상반된 태도에 시에나의 표정이 굳었다. 시에나는 사람들이 도망간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손에 들린 등에서 나온 빛이 지하실의 어두운 곳들을 비추었다.
이름 모를 벌레의 사체, 먼지, 거미줄, 그리고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아이작의 할머니.
어딘가를 맞았는지 노파의 관자놀이 옆에는 피가 흘러 갈색으로 굳어 있었다. 시에나는 너무 화가 나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당신들…!”
“히, 히이익…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귀신의 정체가 사람이라는 걸 알자 성안의 사람들은 다시 돌아와 사태를 재확인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다시 다가오자 덜덜덜 떨고 있었다. 이미 거품을 물고 뒤로 쓰러진 사람도 있었다. 모든 사실을 눈치챈 데이몬은 그들을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며 읊조렸다.
“전부 끌고 가.”
* * *
타닥타닥.
깊은 밤, 시에나는 잠긴 눈으로 손님방 벽난로 안에서 타오르는 불씨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앞에는 아이작과 아이작의 할머니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아이작과는 달리 노파는 잠시 깨어나서 자신의 상태를 혼자 점검할 정도로 말짱했다. 그저 비 오는 날 추운 지하실에 갇혀 먹지 못하고 있는 바람에 체력이 좀 떨어졌을 뿐이었다. 노파는 먹성 좋게 식사까지 마치고 씻은 뒤, 마르바스성의 손님방에서 아이작과 함께 잠이 들었다.
노파의 거칠고 주름진 손이 아이작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그 손을 바라보는 시에나의 눈이 흐릿해졌다. 아까의 심문으로 밝혀낸 사실이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에는 너무나 참혹했다.
“후우…”
노파와 아이작을 습격한 건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시에나와 데이몬 때문이었다. 사건 사고 없는 조용한 마을에 수수께끼에 가려져 있던 성안의 귀족이 나타나 몇 번이고 평민의 집에 방문한 건 사람들에게 꽤 큰 이슈였던 모양이었다.
몇 년 전 노파의 자식이 귀족의 일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는 건 암암리에 알려진 사실이라 그 보답을 하러 온 게 아니냐는 식으로 누군가 말을 했고, 소문은 날개 돋친 듯 퍼져 나갔다. 노파의 집에 귀족이 준 보석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다는 소문에 혹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중에는 의원도 있었다. 의원은 평소 신전의 약을 쓰지 않고 자체적으로 약을 제작하는 노파를 몹시 싫어했지만, 고발자가 되어 평생 살아왔던 마을에서 혹 쫓겨날지도 모를 일이라 참아 왔었다. 그러던 중 그런 소문이 들려오고, 의원은 그들의 중심이 되는 것과 동시에 브레인 역할을 자처했다.
데이몬이 방문할 때는 일이 들킬 위험이 있다는 생각에 아무런 손을 쓰지 않았지만, 비가 오는 바람에 데이몬의 방문이 여의치 않게 되자 그걸 흥미가 떨어진 거라 생각하고 그 즉시 납치를 시도했다. 성인 남자 몇몇이 노파와 어린 아이작을 납치하는 것은 어린아이 손목 비틀기보다 쉬웠다. 그렇게 둘은 마을의 폐가에 갇히게 되었다.
처음 그들은 사정을 이야기하며 귀족에게서 받은 돈을 조금만 공유하자고 말했으나 없던 돈이 집을 뒤진다고 생겨날 리가 없고, 몸을 뒤진다고 생겨날 리가 없다. 그들은 초조해져 아이작을 쥐어박으며 협박하려고 했으나 노파가 그것을 막다가 대신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고 한다.
당황한 사람들은 기절한 노파와 울부짖는 아이작을 두고 잠시 자리를 파했고, 몇 시간 후 의원은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할 아이작을 성안에서 보게 된다. 기절할 듯이 놀란 것은 당연지사, 이대로 아이작이 깨어나기라도 한다면 감옥에 갇힐 것은 그들이었으므로 의원은 아이작을 치료하지 않겠다고 완강히 거부했던 것이다.
의원은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성을 나오자마자 폐가로 향했지만, 뒤를 밟혀 나갈 수 없게 되자 울며 겨자 먹기로 지하실 안으로 들어가 숨죽이고 있었다.
만약 시에나가 거기에서 지하실을 발견하지 못했었다면… 생각만 해도 오싹했다.
시에나는 잘못했다며 감옥에 갇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비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나중에 그들이 우리에게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면 어쩌려고 그리 대범하게 일을 벌였나요?’
그들은 대답은 하지 않고 그저 시에나의 말에 잘못했다고, 죄송하다고 빌었다. 짜증이 난 시에나가 바락 소리를 지르자 조용해진 사람들 사이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차분한 얼굴로 그는 말했다.
‘이번 농사는 흉년입니다. 세금을 내고 나면 초겨울까지밖에 버티지 못하죠. 두 사람이 희생해 온 마을 사람들이 살 수 있다면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정도로 심각하다면 어째서 세금 비율을 낮추어 달라 말하러 오지 못했죠?’
‘2년 전 흉년에 그 말을 하러 갔던 저의 친구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기 때문입니다.’
2년 전이라면 리메리오 남작의 짓이었을 것이 뻔했다. 혹 그 남작의 교수형이 이루어진다면 꼭 구경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시에나는 입술을 으득 깨물었다.
몇 번이나 영지를 시찰하면서 그들은 뭘 봤던 걸까. 살기에 나쁘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리는 영지는 그저 지금이 아직 먹을 것이 있을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삶이 팍팍해 보이는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시에나로서는 중세 시대의 생활이 어떤지 모르니 그저 저렇게 사는구나, 싶었을 뿐이고 성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는 데이몬은 평민들은 이렇게 사는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영지를 휙휙 둘러보고 꼬치를 먹는 건 소꿉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그들이 영지민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까. 시에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지했다. 인정한다. 그렇지만 후회는 나중이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먼저 생각해야 했다.
그들은 둘을 살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 화가 나 그들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닌가. 그러나 그 이유라고 들은 것이 너무나 처참했다. 먹을 것이 없어 겨울에 굶어 죽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멀리 있지 않았던 것이다.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던 남자의 말이 피부에 와닿자 시에나는 새삼 데이몬의 하녀의 몸에 빙의한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이와 약자를 납치하고 금품을 빼앗은 뒤 살해할 계획까지 있었던 사람들을 그냥 풀어 줄 수도 없었다. 이건 명백한 납치, 강도 및 살인 미수였다. 그러나 시에나는 그 원초적인 이유에 대해서도 어쩔 수 없이 공감이 갔다.
물론 가장 나쁜 것은 범죄를 저지르려는 사람이지만, 당장 겨울에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의 눈앞에 귀족의 사례를 받았다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것이 힘없는 약자라면. 인간인 이상 혹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럴 여지를 준 것은 시에나였다.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었다면 아이작을 성으로 부르는 게 차라리 둘에게 조금 더 안전했을 것이다. 아이작이 엄마에 이어 조모와 본인의 목숨까지 잃을 뻔한 것을 생각하자 시에나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조금 더 생각했어야 했다. 어린 데이몬 대신 자신이 더 신경을 쓰고 배려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제3자의 입장이라면 나쁜 건 그들이지 네가 아니라고 한사코 부정해 주었겠지만, 그것이 자신의 입장이 되자 몰려오는 죄책감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얹힌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파 왔다. 시에나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시에나.”
“… 도, 도련님. 언제 오셨어요.”
그런 시에나의 등을 누군가 톡 쳤다. 데이몬이 풀죽은 얼굴로 시에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왔는데 생각에 잠긴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어.”
“아… 그러셨군요. 죄송해요.”
시에나는 멋쩍은 듯 볼을 긁적였다.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있었으면 데이몬이 들어오는 것도 몰랐을까.
“아니야. 둘 상태는 좀 어때?”“괜찮아요. 아마 내일 아침이면 둘 다 깨어나실 거예요.”
“그렇구나. 시에나도 이만 자러 가야지.”
“아… 그렇죠.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시계는 새벽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데이몬이 잠들었어도 한참 잠들었어야 할 시간이라 시에나는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워 드릴게요, 도련님. 같이 가요.”
“오늘은 나 혼자 잘 수 있어. 그러니까 시에나도 얼른 들어가서 눈 좀 붙여.”
“괜찮으시겠어요?”“그럼. 아마 눈만 감으면 잠들 것 같아.”“오늘 피곤하셨지요. 그럼 계단까지만 같이 가요.”
“그래.”
시에나와 데이몬은 찬찬히 걸음을 옮겼다. 데이몬은 여전히 침울한 얼굴이었다. 심문을 함께 했던 데이몬이기에 그들의 위험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던 듯했다. 그런 데이몬을 위로하기엔 자신의 마음도 찔리는 구석이 있었기에 시에나는 평소와는 달리 입을 다물고 앞으로 향했다.
“도련님.”
“응, 시에나.”
“도련님은 그들을 어떻게 하시고 싶으… 아니, 죄송해요.”
더럭 솔직한 마음이 튀어나와 시에나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건 시에나가 물을 내용이 아니었다. 시에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데이몬을 바라보았다. 데이몬은 어느새 걸음을 멈추고 깊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할지.”
“처벌하실 건가요?”
“처벌은 당연히 해야지. 그렇지만… 어떤 식으로 하는 게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인지는 잘 모르겠어.”
“사실 저도 그래요.”
둘은 밤이 늦는 것도 모르고 계단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자 어느새 데이몬이 자리를 깔고 앉았다. 시에나가 앉으려고 하자 데이몬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시에나의 자리에 깔아 주었다.
“도련님, 괜찮아요.”
“바닥이 차, 시에나.”
“그래도 이 옷 비싼 거잖아요.”
“나한테는 네가 제일 귀해.”
윽, 사람 설레게 하는 말을 툭툭 내뱉고도 데이몬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시에나에게 아부하기 위해 꺼낸 말이 아닌 그저 데이몬의 진심이었다.
“감사해요… 그래도 도련님 앉기 차가우시니까 펼쳐서 같이 깔고 앉아요.”
“같이 깔고 앉자구…?”“아, 싫으세요?”“아아니. 좋아. 좋아.”
등에 비친 데이몬의 얼굴에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 써 있었다. 시에나는 능숙한 솜씨로 옷을 펼쳐 데이몬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데이몬은 더듬더듬 다가와 슬쩍 시에나의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시에나가 데이몬 쪽으로 팔을 둘렀다. 그 순간, 데이몬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많이 추우시죠? 몸 굳으신 것 좀 봐. 그냥 옷 입으시는 게 낫지 않으시겠어요?”
“아니! 괜찮아. 그냥 좀, 놀랐을 뿐이야.”
“제가 도련님께 뭘 하겠어요. 그냥 좀 따뜻하게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응… 따뜻해.”
시에나의 품에 안긴 자세가 된 데이몬의 귀 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앞에 놓인 등의 초에서 타오르는 불빛과 비슷한 색이었다. 시에나의 품에 안긴 채로 데이몬이 고개를 푹 숙이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민들끼리의 납치, 절도, 가택 침입, 살인 미수는 작게는 무급 노역 2년에서 10년까지 해당돼.”
“10년이요?”
“응. 노역을 받지 않으려면 보석금과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내면 되지만… 아마 그들은 그렇게 하기 힘들겠지.”
돈이 없어 살기 위해 그랬던 사람들이 보석금을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시에나는 가슴이 다시 갑갑해졌다.
“그들은 분명 그만큼의 죗값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때에 따라서는 추방령을 내리는 것도 고려하고 있어.”
“추방령… 이요?”
“응. 피해자와 가해자를 한곳에 둘 수는 없잖아.”
기본 법규가 있다고는 하나 어느 정도의 자율 행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영지 내에서 일어난 범죄에 대한 처벌 강도는 전적으로 영주에게 달려 있었다.
“그렇네요….”
시에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하는 행동이 모두 옳은 행동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후회는 덜 남는 쪽으로 하도록 해야지.”
자신이 감싸고 있는 데이몬은 품 안에 들어올 정도로 아직 작은데, 왜 이렇게 커 보이는지 모르겠다. 오늘은 데이몬이 참 달라 보이는 날이었다. 시에나가 후후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영주님이 이렇게 고민하시니 이 영지는 어떤 결과가 나오든 전보다는 나아질 것 같아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 그럼요. 혹 고민하실 때 제가 필요하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그래도 될까?”
“그럼요.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그럼 세금이랑 식량에 관련한 건데….”
빳빳하게 고개를 세우고 있던 초가 흐무러질 때까지 둘은 계단 난간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덧 밤의 장막은 걷히고 창문 사이로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생각하냐면….”
툭.
“시, 시에나?”
데이몬은 제 어깨에 시에나의 고개가 닿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시에나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 것이다. 데이몬은 한참을 망설이다 천사 같은 모습으로 잠든 시에나의 볼을 꾸욱 눌렀다. 말랑하고 탄력 있는 볼이 눌렸다가 다시 돌아왔다.
오늘 밤의 일로 투 머치 토커의 가능성을 발견한 데이몬이 조심스레 잠들어 있는 시에나의 어깨를 감쌌다. 덕분에 시에나가 데이몬의 어깨에 더욱 편안하게 기댈 수 있게 되었다. 시에나는 깊게 잠들었는지 이따금 입을 쩝쩝대며 잠꼬대를 했다. 그런 시에나를 데이몬이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끼이이익.
그때, 일하기 위해 일찍 잠에서 깨어난 하녀 하나가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려다 데이몬과 눈이 마주쳤다.
“도….”
깜짝 놀란 하녀가 데이몬을 부르려고 하는데, 그가 재빠르게 검지를 입술 위에 눌렀다.
“쉿-.”
하녀는 입을 틀어막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몬의 빠른 대처 덕분에 시에나는 여전히 꿈나라에 있었다. 데이몬은 시에나를 한참이나 더 들여다보다 이내 그녀를 공주님처럼 안아 들었다. 시에나가 불편하지는 않은지 거기에만 온 신경을 기울이며. 멀어지는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하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웬일이야….”
느릿한 걸음걸이로 걸었지만, 어느새 데이몬은 시에나의 문 앞에 와 있었다. 그 앞에서 로하엘이 있는 옆방을 한 번 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언젠가 방을 바꾸게 해야지.”
데이몬은 전에 3층의 방으로 옮기라고 시에나에게 몇 번 권한 적이 있으나 3층 방은 전부 손님, 귀족용인지라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차별하는 걸로 보일 수도 있다며 시에나는 한사코 거절했다.
시에나라면 이 집을 통째로 줘도 아깝지 않은데.
데이몬이 속으로 툴툴대며 시에나를 침대 위에 조심스레 누였다. 차가운 시트 위에 누운 시에나가 추운지 몸을 새우처럼 웅크렸다. 데이몬이 그런 시에나의 몸 위에 담요를 덮고 토닥여 주었다. 그 예전 시에나가 그에게 해 주었듯이.
시에나가 깊은 잠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몬은 한참 동안 방 안을 떠나지 않았다. 해가 떠오르고 햇빛이 어느새 방 안에 가득 들어찼다. 햇빛이 시에나를 비추자 보송보송하게 난 금빛 솜털이 드러났다. 데이몬은 그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으응….”
햇빛이 강했던 걸까, 시에나가 살풋 인상을 쓰자 데이몬이 벌떡 일어나 창문의 커튼을 쳤다. 아까에 비해 한결 어두워진 방 안에 시에나의 미간이 다시 펴졌다. 일어나던 때에도 시에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데이몬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데이몬은 다시 시에나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시에나의 금빛 머리칼 위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시에나, 네가 좋아서 미칠 것 같아.”
* * *
“처벌은 원하지 않습니다.”
“예?”
노파는 입 안으로 빵을 넣으며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에나는 당황스러워 재차 물었다.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 가능하시다면 풀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 할머니?”
아이작도 당황스러워하긴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노파는 단호했다.
“그, 그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모르시는 건 아니잖아요. 납치, 감금, 살인 미수… 이건 중범죄라구요.”
“살인 미수요, 그 사람들은 그렇게 할 사람들이 못 됩니다. 위협하다 제 머리에 피가 나자 덜덜 떨던 사람들입니다. 그저 다 허세였을 겁니다. 오래 봐 왔던 사람들이에요. 다 제가 약초 달이고 연고 발라 주며 키워 왔습니다. 그저 삶이 힘들어 잠시 못된 생각을 품었던 것뿐이에요.”
하. 이번에는 기가 찼다. 완전히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아닌가. 어젯밤 불쌍하게 생각했던 게 잠시나마 싹 가셨다. 그러나 피해자가 이렇게 완강히 말하자 무어라 반응하기도 조금 떨떠름했다. 옆에서 아이작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그녀에게 소리쳤다.
“할머니 미쳤어? 그 사람들이 어떤 짓을 했는데! 우릴 믿어 주지도 않던 사람들이잖아! 약초를 가져가면서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던 사람들이야! 그 사람들은 우리를 외부인으로 생각하는데 왜 우리가 그 사람들 편의를 봐줘야 해? 난 절대 싫어.”
“아이작. 그들은 그저 모르기 때문에 무서워할 뿐이야. 종교에 반하는 약을 받아 가는 것이 그들로서는 두렵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게다. 그러나 이건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고, 그게 내가 되었을 뿐이야.”
“왜 할머니만 희생해야 해? 난 싫어. 만약 할머니가 그 사람들은 용서한다 해도 나는 용서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아이작은 그렇게 말하고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계속해서 씩씩대었다. 아이작이 눈치를 본다고 조용하게 말하긴 했지만 중간부터 흥분하는 바람에 목소리가 커져 들릴 이야기는 다 들려왔었고, 그 덕분에 즐거워야 할 식사 시간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분위기가 되었다. 멀쩡한 건 오로지 노파였다. 노파는 삼 일 내내 굶은 사람처럼 식사를 했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하얀 빵이 마법처럼 스르륵 사라지는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데이몬이 아이작에게 말했다.
“영지 내에서 일어난 사건이기에 처벌을 아예 피할 수는 없을 거다. 적어도 네가 만족할 만한 처벌을 해 줄 거라고 약속하지. 다만 가장 큰 피해자인 너의 할머니가 선처를 바라니 참작할 거야.”
데이몬은 단호하게 말했다. 노파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아이작은 다행이라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내 곧 딱딱한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숙였다.
“예, 감사합니다.”
“인사 할 것 없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니까.”
데이몬의 말에 아이작은 울컥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노파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혹 또… 한 가지 부탁을 더 드려도 괜찮을까요?”
“말해 보게.”
“이번 해에 걷는 세금을 조금 줄여 주실 수 있을까요.”
데이몬과 시에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슬쩍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제 계단에서 밤새 나눈 이야기가 여기에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시에나는 설핏 미소 지었다. 데이몬도 보일락 말락 짧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 농사가 흉년이라는 말은 들었네. 거기에 관련해서는 생각해 둔 바가 있으니 너무 걱정 말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노파는 밝게 웃었다. 그러나 옆에 있는 아이작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아이작, 너도 인사드려야지.”
“감사합니다.”
그는 시선을 돌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별로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그가 지금 이 마르바스성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것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시에나는 살며시 웃으며 노릇노릇하게 구운 버섯을 포크로 쿡 찍었다. 산에서 캐낸 버섯은 요즘 훌륭한 식재료가 되어 주고 있었다. 버섯을 입에 넣지 않고 한참이나 바라보던 시에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도련님, 로하엘 님. 잠시 끝나고 시간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그래. 식사도 다 끝마쳐 가니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게 좋겠어.”
“저도 괜찮습니다.”
시에나는 남은 음식을 입 안에 쏙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잠시 식품 창고에 다녀와야 해서 먼저 일어날게요. 응접실에 가서 기다려 주세요.”
“응, 알았어. 무거운 거야? 같이 갈까?”
데이몬이 물었지만 시에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제가 한 손에 들 수 있을 정도인 걸요.”
“그래도 같이 가. 참, 그대들은 판결이 날 때까지는 성안에 머무르는 게 어떤가. 집으로 돌아간다면 호위를 붙여 주겠지만, 여기만큼 안전하지는 않을 거야.”
노파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편의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쉬도록 해. 필요한 게 있다면 다른 시종들에게 말하도록 하고.”
그렇게 말하며 데이몬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시에나의 뒤를 따라 둘은 식품 창고로 향했다.
“그런데, 시에나. 식품 창고에는 왜 가는 거야?”
“아, 전에 저장해 두었던 식품 하나가 생각이 나서요.”
“그래? 뭔데?”
“글쎄요. 도련님도 보신 적이 있으시려나. 저도 야생에서 자라는 건 처음 봤거든요. 감자라고 혹시 아세요?”
뚝. 데이몬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시에나가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자 데이몬은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거… 악마의 열매 아니야?”
네? 그 말씀 하시는 거 저작권에 걸리지 않을까요?
시에나는 고무고무 열매를 먹은 밀짚모자 소년을 생각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알려져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감자는 그냥 감자예요.”
“그래…? 내가 아는 감자랑 다른 건가?”
“음, 글쎄요. 참. 도련님. 저 주방에도 들러야 하는데 괜찮으세요?”
“그럼. 식품 창고 들렀다가 가자.”
“네에.”
데이몬은 자신이 아는 감자가 맞는지, 혹 다른 감자라는 열매가 있는 건 아닌지 골똘히 고민하다 앞서가는 시에나의 뒤를 따랐다.
* * *
“악마의 음식이네요.”
“내 생각에도 그건 악마의 열매야.”
바구니 속에 든 생감자를 처음 목도한 로하엘이 말했다. 그게 화답하듯 데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았던 시에나의 눈에는 이 감자가 그저 맛있는 먹을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바구니 안에 얌전히 담겨 있는 황토색을 띤 감자는 며칠 전 산에서 캔 야생 감자였다. 감자를 캤다고 자랑스럽게 보여 주자 제인이 기겁하며 감자를 만졌던 시에나의 손을 빡빡 씻겼었다. 이 악마의 열매는 먹으면 사지가 썩어 들어간다고 한다. 겁에 질려 혹시나 하고 냄새를 맡아 보았지만 신선한 흙 내음과 함께 감자 특유의 향이 날 뿐이었다.
시에나는 제인의 거센 만류에 대놓고 먹지는 못하고 밤에 몰래 구워 먹어 보니 그 맛은 영락없는 감자였다. 그 후로 식품 창고 구석에 몰라 숨겨 두고 밤에 먹고 싶을 때마다 종종 구워 먹었다. 물론 먹고 난 후에도 아무 일 없이 말짱했다. 그리고 지금 그 창고에서 방금 감자를 꺼내 온 참이었다. 시에나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이거, 악마의 열매 아니에요. 아주 고마운 열매죠.”
그러면서 시에나는 힐긋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문 사이로 접시를 들고 오는 제인의 불안한 얼굴이 보였다. 시에나는 달려나가 제인을 맞이했다.
“제인! 고마워. 바빴을 텐데.”
“아니야, 점심시간이었는걸. 그런데… 이런 걸 정말 가져와도 되는 거야?”
제인은 머뭇거리면서 시에나에게 소곤거렸다. 시에나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용기 내 줘서 고마워.”
“아니야. 그럼 나는 이만 가 볼게.”
“응, 좀 이따 봐.”
시에나는 제인에게 감자가 든 접시를 건네받았다. 울퉁불퉁한 모양의 감자가 잘 익어 맛있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크기도 제멋대로라 엄지손가락만 한 것부터 주먹만 한 것까지 다양했다. 응접실에 풍기는 때아닌 감자 냄새에 사람들은 홀린 듯이 접시 안으로 시선을 두었다. 시에나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감자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악마의 열매라고 불리는 이 감자가, 어쩌면 영주민들을 구원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이 노란 열매가 말입니까?”
로하엘은 시에나에게 당황스러운 눈길을 주며 물었다. 시에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번 드셔 보시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시에나는 껍질을 까 노오란 속살이 드러난 감자를 내밀었다. 로하엘은 조금 부담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아, 저는… 배가 불러서….”
“아쉽네요.”
그렇게 말하며 시에나는 감자 한쪽을 콱 베어 물었다. 로하엘과 데이몬이 동시에 경악하며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시에나!”
“어서 뱉어!”
그러나 시에나는 뱉지 않았다. 오히려 황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맛있게 감자를 먹었다.
“괜찮아요, 맛있어요. 이거.”
시에나가 감자를 다시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감자의 베인 단면에서는 솔솔 김이 올라왔다.
“제가 며칠 동안 야식으로 계속 먹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이 악마의 열매는 먹으면 사지가 썩어 들어가고, 배가 부풀어 오른다고 했는데….”
데이몬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보이시나요?”
시에나가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분홍색 손톱과 하얗고 매끄러운 손가락이 드러났다. 누가 보아도 정상적인 손이었다.
“…아니.”
“네, 이 감자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 그러니 안심하고 드셔도 괜찮아요.”
그러나 로하엘은 선뜻 감자를 먹어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 데이몬이 시에나의 손안에 쥐인 감자를 덥석 집었다. 데이몬은 망설임 없이 감자를 크게 베어 물었다.
“아뜨, 뜨….”
“헉. 안쪽은 아직 조금 뜨거울 수도 있어요. 물 드세요!”
뜨거워하는 데이몬 앞에 시에나가 한 김 식은 차를 내밀었다. 데이몬은 그 차를 들이켜고 감자를 씹어 삼키더니 말했다.
“맛있어.”
“그렇죠? 여러 가지 방식으로 먹을 수도 있어요. 그냥 쪄 먹어도 맛있고, 구워 먹어도 맛있고, 얇게 채 썰어 전을 만들어도 맛있고….”
데이몬이 감자를 먹어 주자 흥분한 시에나가 여러 가지 조리법을 말하다 이내 분위기를 파악하고 조용해졌다.
“크흠. 그러니까 이 감자를 가지고 농사를 지어 보면 어떨까 싶어요.”
그러나 뒤에서 로하엘이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시에나에게 말했다.
“시에나, 잠깐 나 좀 볼 수 있을까요.”
“네? 지금요?”
“네. 잠깐이면 돼요.”
“아, 알겠어요. 도련님, 잠시만요.”
“으응.”
시에나는 자리를 빠져나와 로하엘과 함께 잠시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온 로하엘이 심호흡을 하더니 진지한 눈길로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왜, 왜 그러세요?”
“시에나. 혹시 그 감자를… 어둠의 묘약으로 판매하려는 건가요?”
“네!?”
시에나는 당황스러워 저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질렀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로하엘은 진땀을 빼며 시에나에게 조심스레 속삭였다.
“저 그 감자가 어떤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지 조금 알고 있습니다.”
“무, 무슨 용도인데요?”
대답 듣기가 무섭다. 로하엘이 심각한 표정을 지은 걸로 봐서는 엄청난 말일 것 같아 시에나는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러니까… 일부 감자는 남녀가 잠자리에 들었을 때 사랑의 음약으로 사용하는 용도로 쓴다고 들었습니다.”
“네에에!?”
마음의 준비는 다 소용없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시에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로하엘은 시에나가 최음제 용도로 재배하자는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모르셨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데이몬 도련님이 듣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화제라 생각이 되어서… 그런데 시에나에게도 적절하지 않았군요.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로하엘은 평소의 유들유들한 모습을 사라지고 거듭 시에나에게 사과했다. 시에나는 터질 듯한 양 뺨을 손등으로 식히며 외쳤다.
“절대 그런 용도로 사용하려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제가 며칠 동안 계속 먹어 보았지만 그런 기능은 요만큼도 없었다고요!”
이쯤 되면 좀 억울해진다. 그저 평범하게 감자 농사를 지으려는데 아무도 이 감자를 평범하게 봐 주지 않는다.
“그, 그렇습니까? 제가 아는 분이 그 감자 열매의 효능을 워낙 맹신하셔서… 물어봤습니다. 희롱하려고 들었던 건 절대 아닙니다. 믿어 주세요.”
그런 생각이 아니었다는 건 로하엘의 붉어진 얼굴만 보고도 파악이 되었다. 희롱하려는 사람의 볼이 더 붉어졌으니까.
“그, 그런 생각 안 해요. 그냥 저는… 이 감자가 빠르게 자라고, 맛있고, 좋은 열매라 그렇게 말했던 것뿐이에요.”
“그, 그렇군요. 이거 정말 실례했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둘은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로 서로의 시선을 피했다. 한동안은 이렇게 어색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어, 그럼 이제 자리로 돌아가도 될까요?”
“무, 물론이요. 먼저 들어가세요.”
“네….”
자리에 돌아오고 나서도 둘의 얼굴은 여전히 뜨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걸 본 데이몬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자아, 그러니까 어디까지 말했죠?”
“감자를 가지고 농사를 지어 보려 한다고까지 말했어.”
“아, 네. 맞아요. 그런데 이 마르바스성 근처는 산이 많고 척박해 농사를 짓는 땅은 좀 부족하잖아요. 그래서 생각한 게….”
시에나가 주머니 안에 갈무리해 두었던 지도를 꺼내 한 부분을 톡 가리켰다.
“이 부분의 땅을 개간해서 농사를 지어 보면 어떨까 싶어요.”
시에나가 가리킨 지역은 마르바스 영토의 끝부분으로, 국경과 맞닿아 있어 개간이 이루어지지 않은 땅이었다. 이전 성의 돈을 가지고 튄 도둑을 잡을 때 알아보았던 각 영토의 특징인데, 이렇게 사용될 줄은 시에나도 몰랐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게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순간이었다.
“돌을 빼고 흙을 고르기까지 분명 많은 힘이 들 테지만, 개간해 놓으면 생산량 부분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 같아요.”
데이몬과 로하엘이 시에나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지도 부분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노파와 아이작에게 화를 끼친 사람들을 여기 투입하자는 말이지?”
거기까지는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는데, 시에나는 놀라운 표정으로 데이몬을 바라보았다.
“네, 맞아요.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너라면 그렇게 말할 거라 생각했어.”
“사실 도련님이 피해자와 가해자를 한곳에 둘 수 없다고 말했을 때 생각한 거예요. 그 사람들로서 이주비를 낼 수는 없을 거고,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쫓아내는 게 옳은 건 아니니까요. 이쪽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이걸 재배하게 한다면 어느 정도는 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좋은 생각이야. 여기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게.”
그렇게 말하며 데이몬은 이제 제법 식은 감자를 한 번 더 베어 물었다.
“나름 중독성 있는 맛이네.”
새로운 맛에 길들여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도 데이몬은 덥석덥석 감자를 잘도 먹었다. 시에나가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다들 무서워서 먹을 생각도 안 하던데, 어떻게 도련님은 그렇게 바로 드실 결심을 하셨어요?”
“네가 나한테 이상한 걸 줄 리가 없잖아.”
확신과 신뢰에 찬 말에 시에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 사람은 나를 얼마만큼 믿고 있는 걸까. 감사하고 또 고마웠다.
“도련님….”
“그럼 이제 슬슬 자리를 파하도록 하지. 내가 오후에는 바쁜 일이 있어서.”
시에나가 감동에 찬 말투로 말했지만 데이몬은 훈훈한 분위기에 찬물을 뒤집어씌우듯 단호하게 말했다. 시에나가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네. 그럴게요.”
“오후 수업은 그럼 생략할까요?”
“그래. 그래 주면 고맙겠군.”
그렇게 말하는 데이몬의 목소리가 영 어두워 보여 시에나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많이 바쁜 일이세요? 제가 뭔가 좀 도와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나 혼자 해야 하는 일이라서.”
평소의 데이몬이라면 혼자 해야 하는 일이라도 시에나를 옆에 두었을 텐데, 자신까지 내보내는 게 조금 이상했지만 더 귀찮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저 먼저 나가 볼게요.”
“저도 나가 보겠습니다.”
“그래.”
시에나와 로하엘은 쫓겨나듯이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둘은 나오자마자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그 분위기 로하엘 님도 느끼셨죠? 왜 그러실까요?”
“글쎄요. 사춘기라도 찾아온 게 아닐까요?”
로하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저한텐 저게 평소 태도랍니다. 잠깐 기분이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던 모양이죠. 금방 나아지실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그렇게 말하며 로하엘이 가볍게 시에나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 그럴게요.”
떨떠름한 얼굴로 시에나가 걸어가며 몇 번이나 고개를 돌아보았지만, 굳게 닫힌 문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내일이면 괜찮아지시겠지.’
저도 가끔 혼자인 시간이 필요했더랬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시에나는 자리를 떠났다.
* * *
“시에나, 끓어 넘친다.”
“으앗!”
시에나는 턱을 괸 채 생각에 빠져 있다 노파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옆을 돌아보니 바로 옆에 올려놓은 물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냄비 밖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심해야지. 그러다 화상을 입을 수도 있어.”
“죄송해요….”
노파에게 사과하면서도 시에나의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다름 아닌 데이몬 때문이었다. 데이몬은 요즘 시에나에게 묘하게 차가운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아니, 아예 차갑다면 자기가 뭔가 잘못한 게 있냐고 물어나 보겠다. 그저 예전 같지 않은 태도일 뿐이었다. 자신에게 따로 달라붙지도 않고, 재워 달라 칭얼거리지도 않고. 시에나는 그게 묘하게 서운했다.
“한번 무슨 일인지 물어보기라도 해야겠어….”
“나도 네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묻고 싶구나. 약을 만들고 싶다고 했던 건 네가 아니었니?”
노파의 엄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 죄송해요. 이젠 진짜 정신 차리고 할게요.”
시에나가 볼을 짝 치고는 한결 정신 차린 표정을 지었다. 노파는 그제야 좀 안심이 되는 듯 시에나가 잡고 있는 국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걸 이대로 졸아들 때까지 죽 저어 주면 된단다.”
“그렇게 오래요?”
“그래. 어디 약 만드는 게 쉬울까.”
팔팔 끓고 있는 이 냄비 안의 약초액을 졸이려면 필시 수십 분에서 몇 시간까지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자그마한 통 안에 들어 있는 약을 만들기 위해 노파는 지금까지 얼마만큼의 수고로움을 겪었을까.
“이 약초는 만드셔서 보통 얼마에 파세요?”“글쎄… 5실버 정도 하지. 상비약으로 오래 둘 수 있으니.”
“고작 5실버요!?”
1골드 50실버짜리 약을 기억하는 시에나로서는 5실버는 너무나도 파격적인 가격이었다. 시에나의 어이없는 표정을 보고 노파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어차피 원재룟값은 거의 들지 않잖니.”
“그래도….”
시에나는 불 앞에 있느라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내며 불만스럽다는 듯 투덜대었다. 노동력을 생각하면 솔직히 10실버는 받아야 하지 않을까.
“할머니는 뭘 만들고 계신 거예요?”
“상처와 활력에 좋은 차를 만들고 있단다.”
“그건 전에도 만드셨잖아요?”
“…그 사람들에게 가져다주고 싶어서.”
노파는 별거 아니라는 듯 이야기를 꺼냈다. 옆에서 약초의 배합에 대해 공부하고 있던 아이작의 눈이 세모나게 변했다.
“할머니! 그걸 왜 그 인간들한테 갖다줘?!”
“너는 먹지도 않잖니. 안 먹는 거 가져다주는 게 뭐가 문제야?”
“내가 먹을 거야! 다 먹을 거야!”
“이놈의 새끼. 어쩜 그렇게 못되게 말을 해?”
“나는 못됐으니까! 절대 주지 마! 주면 나 콱 저 나무에 목 매달아 버릴 테니까!”
“너 그게 이 할미한테 할 말이야? 아이작! 당장 이리 와!”
노파는 화가 나 아이작을 잡으려고 움직였으나, 아이작이 더 재빨랐다. 그는 노파의 손을 쏙 피해 밖으로 다다다 달아나 버렸다. 허공을 잡은 노파가 아이작이 사라진 문밖을 허탈하게 바라보다 휴 한숨을 쉬었다. 옆에서 그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시에나가 키득 웃음을 지었다.
“어쩜 저렇게 못되었을까. 내가 잘못 키운 건 아닌지….”
노파가 씁쓸하게 말했다. 시에나는 국자를 젓는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며 답했다.
“무슨 소리세요. 아이작이 보통이고 할머니가 착한 거죠.”
시에나는 은근히 아이작의 편을 들며 말했다. 노파는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이 성안에 내 편이 아무도 없구만.”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할머니가 천사이신 거라니까요. 어떻게 자길 납치하고 다치게 만든 사람들한테 약을 가져다줘요?”
“다 내가 약 먹여가며 키웠다고 하지 않았니. 자식 같은 사람들이 척박한 곳에서 몸 고생하고 있을 걸 생각하니 영 마음이 좋지 않아. 안 가꿔진 땅을 다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니까.”
시에나는 지금쯤 땡볕 아래서 고생하고 있을 그들을 떠올렸다. 돌을 고르는 데에만 종일이 걸리겠지. 그렇지만 시에나는 그들이 별로 불쌍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전혀.
[ 3년 이주 및 감자 농사 형 및 배상 ]
그것이 노파와 아이작을 납치하고 상해를 입힌 그들이 받은 형이었다.
판결을 받기 전 덜덜 떨고 있던 사람들도 당황했다. 형이 생각보다 약하고 뜬금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봐도 필요에 의해 형벌을 준 것 같은 느낌. 그러나 그들은 불만을 제기할 수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아무 말 없이 이주하게 되었다.
물론 의원의 불만이 매우 거세었으나 로하엘이 잠시 그를 면담한 이후 몹시 얌전해져, 가는 날까지 불만 한마디 말하지 않았다. 어떤 면담을 했는지 조금 궁금하고 오싹했다. 감자 수확량도 정해 주었으니 그들은 아마 3년 내내 농사일에 뼈를 묻어야 할 것이다.
그들 역시 감자를 처음 보고 악마의 열매라고 두려워했지만, 시에나는 슬쩍 거짓말을 섞어 말해 주니 잠잠해졌다. 이 악마의 열매가 사실은 귀족과 황족들 사이에서 맛있기로 엄청나게 유명해진 열매라고. 수도에서는 이미 없어서 못 파는 열매라 직접 농사지으려 한 거라고 말이다.
소문을 들을 수 없는 먼 곳에서 농사를 짓게 하는 것을 이용한 거짓말이라 조금 찔리긴 했지만, 어차피 그들에게 먹이려고 농사를 짓게 시키는 거니 착한 거짓말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들은 떠났지만 그들의 가족들은 떠나지 않았기에 노파와 아이작은 성안에 좀 더 머물기로 했다. 가족과 함께 떠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남은 사람들 중 노파와 아이작에게 억하심정을 품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대신 노파는 시에나에게 약초를 다루는 방법과 약에 대해 알려 주기로 했다. 아이작은 성에 머무르는 것을 내키지 않아 했지만, 할머니를 두고 갈 수도 없었기 때문에 남아 있었다. 시종 노릇을 할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얻어먹으며 살고 싶진 않다며 집안의 잡다한 일을 도맡아서 했다.
나름대로 평온한 나날이었다. 시에나가 거의 다 졸아든 약을 지켜보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걸 깨닫고 노파에게 말했다.
“아이작을 찾으러 가야 하진 않을까요?”
“배고프면 슬슬 돌아오겠지. 괜찮네.”
노파는 그렇게 말하며 주름진 손으로 약초물을 포션 통 안에 집어넣었다. 투명한 통 안에 맑은 연두색 액체가 찰랑거렸다. 시에나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물었다.
“그렇게 효과 좋은 약을 파시면서 본격적으로 상업화해 보실 생각은 하지 않으셨어요?”
“이미 팔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제 말은 조금 더 본격적으로요. 수도에도 지점을 내고 팔 만큼?”
“아서요. 그런 짓을 하다가는 신전에 잡혀간다. 뼈도 못 찾을걸.”
“그렇지만 신전이 파는 약은 가격이 너무 비싸잖아요. 다른 약을 만드는 걸 금지시켜 놓고 약을 그렇게 비싸게 팔면 평민들은 죽으라는 거죠.”
시에나가 툴툴거리며 불을 끄고 부채질하며 약을 식혔다.
“그렇다고 해도 어쩌겠니. 평민인 우리는 힘이 없고 귀족들은 약값을 감당할 수 있으니 괜히 나서서 신전에 밉보이고 싶지 않을 텐데.”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노파의 말에도 심란함이 담겨 있었다.
“그건 그렇지만요….”
“나는 너를 가르침으로써 이 약초학의 맥을 끊지 않게 되어 기쁘지만, 절대 대중화시킬 생각은 하지 말아라.”
속으로 뜨끔했는지 시에나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바라보며 노파가 눈을 가늘게 떴다.
“생각이 있었구나?”
“하하… 이걸로 돈을 벌 생각이라기보다는, 약이 없어 죽어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요. 전쟁터에서도 신전에서 만드는 약만 사용해야 하는 통에 하급 병사들은 상처 나면 그냥 죽은 목숨이라면서요.”
“그건 그렇지만 네 목숨을 항상 소중히 해야 해. 거스르지 않고 무난하게 살다 가면 그걸로 족하다.”
“네… 그럴게요.”
대답하는 시에나의 뒷맛이 조금 찜찜했다. 식은 약을 포션에 담은 시에나가 긴장한 기색으로 노파에게 전해 주었다.
“어엇, 제가 말하긴 좀 그렇지만 제법 잘 만들어진 것 같은데요?”“어디 보자. 색깔도 선명하고, 침전물도 없고….”
노파는 날카로운 회색 눈으로 약을 살피더니, 이내 약을 찍어 맛보기도 하고 피부에 발라 상태를 보기도 했다. 긴장감에 시에나의 목이 뻣뻣하게 굳어질 즈음, 노파가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딴생각을 하면서도 용케 잘 만들었구나. 합격이다.”
“와! 드디어 합격이다!”
시에나가 조금은 과장스럽게 만세를 외쳤다. 요 며칠 내내 불합격하느라 실패한 약초만 산더미였는데, 드디어 그 약초들의 목숨을 헛되이 하지 않게 되었다 생각하니 기쁨의 비명이 절로 나왔다.
“이 약은 어떤 곳에 사용하게 되어 있지?”
“여드름과 종기를 낫게 하고 지속적으로 발라 주면 사마귀까지 없애주는 약입니다.”
“어떻게 사용해야 하지?”
“한 번에 5ml씩 환부에 발라 주고, 하루 세 번 반복하면 됩니다.”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시에나가 귀여운지 노파는 다시 한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었을 텐데 잘 따라와 주었다.”
“헤헤, 다 좋은 스승님이 이끌어 주신 덕분이에요.”
시에나는 그렇게 말하며 뿌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놓인 포션을 바라보았다. 맑은 연둣빛의 포션이 통 안에서 찰랑거리며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그걸 바라보는 시에나의 푸른 눈에 자랑스러움이 깃들었다.
“그럼 오늘 수업은 이쯤으로 하자.”
“네, 점심 먹으러 같이 내려갈까요?”
“아니, 아이작이 오면 같이 먹는 게 좋겠어. 금방 올 테니 시에나는 먼저 내려가서 먹도록 해.”“네, 그럴게요.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그래요, 수고했어요.”
시에나는 가벼운 걸음걸이로 방문을 열고 나갔다. 아침을 간단하게 먹은지라 허기가 졌다.
“배고프네….”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벌써 요란했다. 시에나는 주린 배를 잡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아직 식사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간단한 요깃거리를 하기 위해서였다.
“거기 빵 따뜻하게 데워 놔! 빨리빨리!”
“고기 탄다! 불 조절 잘해!”
“와인은 어떤 걸로 내놓아야 하지? 특별한 날 마시는 와인이 남아 있으려나?”
“내가 창고에 내려가 볼게! 악! 이번엔 생선이 타잖아!”
주방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평소와 다른 모습에 넋이 나간 시에나가 뒷걸음질 치자 와인을 가져오는 제인과 부딪혔다.
“제인!”
“시에나!”
“이게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바빠?”
“오늘 점심에 공작 각하께서 오신대! 그런데 사고 때문에 파발이 오늘 새벽에 도착해서 지금 완전 난리 났어!”
“뭐? 그런 말씀 없으셨….”
시에나는 문득 얼마 전 로하엘이 한 말이 생각났다.
“공작령 주변 몬스터 토벌이 끝나 조만간 마르바스 성에 한 번 방문하신다고 합니다. 아마 일주일 내로 오실 것 같아요.”
“다행이에요. 다친 곳은 없으시겠죠?”
“그 사람을 누가 다치게 하겠습니까. 온몸이 오리하르콘처럼 단단한 분이신걸요. 트롤을 눈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분입니다. 아마 성이 이렇게 바뀐 거에 더 놀라실걸요.”
“헙.”
생각해 보니 있었다. 진즉 귀띔해 주지 못한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봐 시에나는 진실에 대해서는 조용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나도 뭐 도울 거 없어?”
“이미 주방은 포화 상태라… 너는 도련님 씻고 옷 갈아입는 거 도와드려. 정복으로 차려입으셔야 해서 혼자서는 힘드실 거야.”
“아, 그럴게. 고생해, 제인.”
“아니야. 그럼 조금 이따 봐!”
시에나는 다시 계단을 올라 데이몬의 방을 노크했다.
“도련님, 저 시에나예요.”
“…들어와.”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문득 가슴 한구석이 아려 왔다. 시에나가 힘없이 방문을 열었다. 시에나가 도울 것도 없이 데이몬은 이미 정복을 입고 있었다.
단정한 얼굴에 푸른 정복이 멋들어지게 잘 어울렸다. 가장 최근에 맞춘 옷인데도 키가 커지는 바람에 발목이 드러났다. 말쑥하게 큰 소년이 표정 없는 눈길로 시에나를 응시했다. 그 눈빛을 받은 시에나가 움찔하다가 이내 결심한 듯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공작님께서 오신다는 이야기 들으셨어요?”
“응. 오늘 새벽에 알았지만.”
“사고가 있었대요. 그래서 늦었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그것 때문에 주방이 완전 전쟁터예요.”
“바쁠 만도 하지.”
“저는 도련님 씻고 옷 갈아입으시는 거 도와드리려고 왔는데… 이미 벌써 마치셨네요. 혼자서는 어려우셨을 텐데.”
“혼자 씻고 옷 갈아입는 건 익숙한걸. 난 괜찮으니 시에나는 이만 방에 들어가서 쉬는 게 어때?”
다정한 듯하지만 시에나에게는 그 말이 너무나 차갑게 느껴졌다. 원래의 데이몬이라면 함께 발코니에서 차를 마시자는 이야기를 했을 법도 한데, 방에 들어가 쉬라는 축객령이라니. 그러나 그 목소리는 더없이 다정해 흠잡을 곳이 없었다. 시에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치맛자락에 주름이 생길 정도로 꽉 잡은 시에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도련님… 제가 뭔가 잘못한 게 있나요?”
시에나의 우울해하는 표정을 목도한 데이몬이 움찔하더니 더욱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못이라니. 그런 거 없어.”
“그럼 왜 요즘… 저를 피하시는 건가요?”
결국 질렀다. 시에나는 물기 어린 눈으로 데이몬을 바라보았다. 그 눈을 바라보던 데이몬이 더욱 상처받은 눈길로 시에나를 응시했다. 금색 동공이 흐릿하게 흔들렸다.
“피하지 않았어. 아침부터 포션 만드느라 고생했을 거 아니야. 그래서 그런 거야.”
너무나도 완벽한 정답이지만, 그 답이 시에나의 마음을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데이몬은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이건 사춘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에나는 너무나 참혹해 보이는 그의 표정에 더 캐묻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네, 괜한 걸 물어서 죄송해요.”
“그래. 숙부님께서 오시기 전에 성과를 좀 정리해야 하는데, 혼자 있게 해 줄 수 있을까?”
“…그럼요.”
명백한 축객령에 시에나는 완전히 참패하여 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욱신거리고 눈이 시큰거리더니 기어이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시에나는 데이몬이 이상해졌던 그날을 떠올렸다.
감자를 가져왔고, 형벌로 내리는 걸 권했다. 그걸 월권행위라 생각했을까? 그러나 데이몬은 감자를 먹었을 때만 해도 썩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데이몬의 표정이 어두웠던 건 로하엘이 시에나를 불러내 잠시 둘만 나갔다 돌아왔을 때였다. 혹시 그걸 따돌린다고 생각했던 걸까? 이유가 있는데… 그러나 그 이유를 데이몬에게 감히 설명할 자신은 없었다. 최음제 이야기를 어떻게 아직 열넷도 되지 않은 데이몬에게 한단 말인가. 시에나는 대차게 꼬여 버린 듯한 느낌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때 누군가가 덥석 시에나의 팔을 잡았다.
“시에나.”
“로하엘 님… 꺅!”
시에나가 멍한 눈길로 로하엘을 응시하다 이내 자신이 하마터면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발목 한쪽이 꺾인 채로 허공에 떠 있었다. 시에나가 너무 놀라 거세게 숨을 들이켰다. 로하엘은 살며시 웃으며 그런 시에나를 한손으로 가볍게 들어 올려 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떨어질 뻔했잖아요. 조심해야지.”
“아, 죄송해요. 아니, 감사해요. 와, 정말 로하엘 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10년 감수한 느낌이 여즉 생생했다.
“공작님 오시는 것 때문에 그래요? 아니면 내가 갈지도 모르는 것 때문에?”
“네? 로하엘 님이 어디 가세요?”
“아아, 시에나는 몰랐구나. 데이몬 도련님이 한 성과에 따라서 저 떠날 수도 있거든요.”
“왜요? 성과가 나쁘면 떠나시게 되는 거예요? 로하엘 님은 좋은 선생님이셨잖아요!”
시에나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소리쳤다. 로하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부드럽게 휘었다.
“열정적으로 내 편을 들어 줘서 고마워요. 오히려 그 반대예요. 성과가 괜찮아서 홀로서기를 하실 수 있게 되면 임시 대리인은 필요 없어지니까요.”
아아, 그렇구나. 시에나는 더럭 겁을 먹었던 자신이 창피해졌다. 지금까지 얼마나 로하엘에게 무의식적으로 의지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로하엘 님은… 떠나고 싶으세요?”
“글쎄요. 저는 별로 떠나고 싶지 않은데, 도련님이 먼저 제안한 거라서요.”
“데이몬 도련님이요?”
“네. 그래도 공작님의 기준은 꽤 깐깐하시니, 아마 저는 여기 좀 더 있게 될 거예요.”
“다행이다….”
시에나가 안도의 숨을 푸스스 내쉬었다. 로하엘이 그런 시에나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시에나가 이렇게 열정적으로 가지 말라고 할 줄은 몰랐네요. 소문 때문에라도 빨리 보내 버리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네? 소문이요? 무슨 소문이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시에나가 로하엘을 바라보자, 그는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음… 제가 착각을 했나 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중요한 일인 것 같은데요. 제발 말해 주세요.”
시에나는 본능적으로 이게 데이몬이 변한 것과 관련이 있다는 걸 느꼈다. 절박하게 말하며 시에나가 로하엘의 옷깃을 붙잡자 그가 더욱 난처한 얼굴을 했다. 결국 시에나에게 패배한 로하엘은 으흠, 헛기침을 하며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저도 어쩌다 들은 건데, 시에나와 제가 연인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더라고요.”
“네에!?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돌아요?”
팥으로 메주를 쑤는 장면을 본 듯한 표정의 시에나를 보며 로하엘이 조금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그… 래요. 저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우리가 같이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그렇게 느꼈나 봐요.”
“아니, 보통 데이몬 도련님과 셋이서 있었을 때가 더 많았잖아요. 어떻게 오해를 한다는 거죠?”
시에나의 당황스러운 물음에 로하엘의 표정이 더 착잡해졌다.
“저도 그래서 생각해 보니까, 우리가 처음에 둘이 있었던 때가 있더라고요.”
“언제요?”
“시에나가 제 방에 처음 들어와 창문을 열어 주었을 때요.”
“그런 적이 있…었나?”
시에나는 가늘게 눈을 뜨며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그래, 그런 적이 있었던 것도 같다. 방이 너무 더러워서 놀랐던 기억이 있으니까. 로하엘과 가까운 상황이었을 때 무슨 철제 그릇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었는데, 그 사람이 범인인 거겠지. 시에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오해한 게 첫날부터라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진짜 남의 속도 모르고 함부로 소문을 퍼트리네.”
“소문이라는 게 말을 옮기지 않으면 꺼지는 법이라, 기다리면 지나갈 줄 알고 입에 담지 않았었는데 시에나에게는 말해 둘 걸 그랬어요.”
“그 소문을… 데이몬 도련님께서도 들었을까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에나는 데이몬이 그 소문을 들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로하엘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마… 들으셨을 겁니다. 며칠 전에 저한테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어 그저 소문일 뿐이라 일축했었거든요.”
“하아….”
이제야 퍼즐이 좀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도련님이 요즘 저한테 그렇게 싸늘하셨나 봐요.”
“요즘 두 분 사이가 예전 같진 않다고 느꼈는데, 그것 때문이었을까요?”
“그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제가 감자를 처음 보여 드렸을 때 있죠? 잠깐 로하엘 님이 저를 부르셨다가 둘 다 얼굴이 빨개진 채로 들어왔었잖아요. 그때 오해하셨던 것 같아요.”
“으흠, 그렇군요….”
로하엘은 그 순간이 다시 기억이 나는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에나는 이제 당황을 넘어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것 때문에 도련님이 날 피했다고? 그깟 소문 때문에?
머리털이 곤두설 만큼 화가 난 시에나를 처음 본 로하엘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어이없어. 아마 그래서 더 따돌림당하는 기분이셨을 거예요. 빠르게 오해를 푸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저도 그렇지만… 시에나는 데이몬이 왜 그러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 있나요?”
“네?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니까 데이몬이 만약 시에나를 그저 메이드로만 생각하고 있었다면 감정이 상할 일이 없었지 않을까 싶어서요.”
로하엘의 말에 시에나는 조금 멍해졌다. 로하엘은 빙글빙글 웃으며 시에나를 응시했다. 새 한 마리가 다른 나뭇가지로 넘어갈 동안 골똘히 고민하던 시에나는 진중한 표정으로 로하엘에게 말했다.
“좀 실례되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데이몬 도련님은 저를 조금 특별하게 생각하고 계신 것 같아요.”
“어떻게 특별하게요?”
로하엘의 눈이 몹시 흥미롭다는 듯 다채롭게 반짝였다.
“데이몬 도련님은… 저를… 아마….”
시에나는 조금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어물어물 대답이 흐려지는데도 로하엘은 참을성 있게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누나로 생각하고 계신 게 아닐까 싶어요.”
“네?”
“누나요. 귀족 도련님이 평민인 저를 그렇게 생각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느끼기엔 그래요.”
“친… 누나 말씀이십니까?”
“네, 그럼 다른 누나도 있나요?”
또렷하게 반문하는 시에나의 앞에서 로하엘은 지금까지 봤던 것 중 가장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시에나에게 물어왔다.
“그럼 시에나가 누나 같아서 저와 연애하는 소문이 났던 게 싫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렇죠. 모든 남동생들은 원래 조금쯤 누나한테 독점욕이 있는 법이잖아요?”
시에나는 당당하게 말하며 자신의 남동생 수한을 떠올렸다. 바쁜 부모님 사이에서 둘만 있었던 시간이 많았기에 수빈은 수한과 몹시 끈끈한 편이었다. 함께 밥을 먹고, 공놀이를 하며 놀고, 같은 이불에서 잠들고. 또래보다 성숙한 수한이었기에 수빈과 잘 맞았던 것도 있었다. 수빈이 학원에 갈 때면 가지 말라며 자지러졌던 수한이었다. 데이몬도 아마 비슷했던 게 아닐까. 계속 곁에 있어 줄 것만 같았던 제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름대로 정을 떼려고. 그리 생각하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빠르게 오해를 푸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뒤돈 순간 시에나는 저 위에서 내려오고 있는 데이몬을 발견했다. 데이몬이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보자 대번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도련님!”
그런 데이몬에게 시에나가 부러 밝게 다가가 살갑게 물었다.
“어디 가세요?”
“창밖에 숙부님이 오시는 게 보여서, 마중 나가려고.”
그와 동시에 멀리서 정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나중에 봐.”
무어라 말할 수도 없이 데이몬은 슬금 뒷걸음질 치더니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데이몬을 놓친 시에나에게 안타까운 눈빛을 보낸 로하엘이 그녀를 툭툭 토닥였다.
* * *
사용인들의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식탁 위에는 술과 고기가 넘쳐났다. 토벌을 떠났던 사람들의 일부만 왔음에도 불구하고 연회장은 사람들로 빼곡했다. 몬스터들의 체액이 묻은 갑옷을 입은 채로 기사단 사람들은 잘도 떠들었다.
시에나는 그 사이에 껴서 오도카니 식사를 했다. 로하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 함께 식사를 하자고 권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로하엘은 다른 사람들에 치여 이야기를 나누느라 바빴다.
로하엘이 거나하게 술에 취한 남자들에게 붙잡혀 미안한 표정을 짓길래 웃으며 쿨하게 보내 주고 시에나는 앞에 놓인 소스를 바른 립을 전투적으로 먹기 시작했다.
“으음… 맛있어.”
급히 만들었지만 주방장의 실력은 여전히 최고였다. 나름 빠르게 신선한 고기와 채소를 들여왔지만 워낙 공급이 부족했던 탓에 하몽과 다른 야채 절임들도 연회에 끼게 되었는데, 신선한 고기와 절인 고기를 번갈아 먹는 그 맛이 절묘했다. 식사에 한참 열중하고 있을 때, 공작이 와인병을 든 채로 시에나에게 다가왔다.
“시에나, 그간 잘 지냈나?”
공작의 등장에 시에나는 술 냄새와 고기 냄새 가득하던 실내에 거대한 바람이 부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거구인 공작이 맞은편에 앉자, 그 기백이 실로 어마어마했다. 주변 사람들의 소리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시에나가 공작을 향해 공손한 태도로 인사했다.
“공작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나는 잘 지냈네. 자네는 잘 지냈나?”
“걱정해 주신 덕분에 무탈하게 지냈습니다.”
“다행이군. 한 잔 하지.”
형식적인 인사가 지나가고 공작이 시에나의 잔에 사과주스를 따라 주었다. 아직 성년이 아닌 시에나를 배려해 주는 공작의 씀씀이에 그녀의 가슴이 따뜻해졌다. 저도 따라 드리려 와인병을 잡는데, 공작의 잔에는 이미 검붉은 레드와인이 반절이나 채워져 있었다. 공작은 상당히 터프하게 술을 즐기는 듯했다. 시에나가 조용히 병을 잡았던 손을 풀었다.
“평소에는 점잖은데 토벌을 무사히 끝내고 사람들이 좀 흥분한 듯해. 무뢰한들은 아니니 마음 풀고 편안히 즐기게.”
“하하, 괜찮아요. 오히려 저도 흥겨워지는걸요.”
“이야아호! 내가 이제 노래를 한다-!”
술에 절은 듯한 사내가 소리를 지르며 머리에 썼던 투구를 박자에 맞춰 두드리며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에 화답하듯 함께 소리를 질렀다.
“오늘도 시작하는 건가-!”
“푸른 봄 한 번 불러봐라-!”
“제 점수는요-!”
그 난리 법석 사이로 술에 취해 제법 흥이 도는 듯 보이는 로하엘과 여전히 얌전한 얼굴로 연회를 즐기는 데이몬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조금 과한 듯하군.”
공작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시에나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아요. 위험한 곳에서 살아 돌아오신 거잖아요. 신이 나실 만도 하죠. 준비한 것들을 즐겨 주셔서 기뻐요.”
“데이몬에게는 들었다. 우리가 온다는 말이 오늘에야 도착했다면서. 정신없이 바빴을 텐데 이 정도 솜씨와 양이라니. 대단하군.”
“정말 대단하시죠? 사실 제가 한 건 없어요. 전부 주방장이랑 다른 분들이 하신 거예요.”
식탁을 꽉 채운 음식들을 바라보며 동감한다는 듯 시에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힘들었겠군. 연락 없이 이렇게 많은 인원을 데려와서 미안하지만, 근방에서 영지전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에 걱정이 되어서 오지 않을 수가 없었네.”
“영지전이요?”
오늘은 왜 이렇게 처음 듣는 소식이 많은 건지. 시에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런, 괜한 걱정을 끼치게 했군. 여기 사람들은 모를 거야.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이니까. 스툼과 레네톤 사이에서 영지전이 일어났거든.”
스툼과 레네톤은 마르바스 영지와 붙어 있는 곳이었다. 셋이서 삼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면 쉬웠다. 물론 그 사이에는 DMZ처럼 10km 반경에 황무지가 있어 아주 가깝다고 보긴 어렵지만, 그래도 근접한 영지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을 듣자 조금 겁이 났다.
“이쪽에는 아무 일도 없겠지요…?”
“보통 영지전을 하면서 황족의 토지를 건드리는 일은 거의 없으니 너무 걱정 말게. 나도 그저 노파심에 들른 거니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공작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어쩐지 괜히 많은 인원을 끌고 올 분이 아닌데, 그의 행동이 이제야 납득이 갔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하엘 님도 보내주시고… 이렇게 와 주시기까지 하시고, 정말 공작님은 좋으신 분이세요.”
“내 조카님이 곤란하다는데 응당 그리해야지. 난 오히려 자네에게 고마워. 자네가 신경 써 준 덕에 성이 놀랍도록 바뀌었더군.”
“아니에요. 다… 이게 공작님 돈, 아니. 도움 덕분입니다.”
솔직한 시에나의 말에 공작이 실로 유쾌하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해서 좋군.”
“죄송합니다.”
“아니야. 참, 솔직하다고 하니 생각이 났는데 내가 자네에게 한 가지 보답을 더 하기로 했었지. 뭔가 필요한 거라도 있나?”
공작이 진지하게 물어오자 잘 구운 크레이프 케이크를 입 안에 넣고 행복해하고 있었던 시에나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저는 주신 걸로도 충분해요. 괜찮습니다!”
“그럴 수는 없지. 황가의 혈통을 구한 건데. 황가는 은인에게 절대 박하지 않네. 어려워하지 말고 말해 보게.”
꿀꺽. 포크를 입에 문 시에나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사실… 정말 그걸로도 충분하다 생각해서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렇군. 그럼 생각나면 개의치 않고 말해 주게.”
“네, 그럴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보도록 하지. 데이몬이 아까부터 혼자 있어서 신경이 쓰였거든. 멋진 연회를 만들어 주어서 고맙네.”
공작의 감사 인사에 시에나가 어쩔 줄 모르고 고개를 푹 숙였다.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데이몬에게로 향했다. 데이몬도 그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 했다. 전에는 공작의 허리춤에 오던 데이몬의 키가 이제는 가슴께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새 정말 많이 크긴 한 모양이었다. 자기 전에 그 일에 대해 꼭 대화를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시에나가 접시에 남은 마지막 케이크에 쿡, 포크를 찍었다.
* * *
늦은 점심 무렵 시작한 연회는 한밤중이 돼서야 끝났다. 기사단 사람들을 손님방에 안내한 시에나가 피곤한 표정으로 기지개를 켜며 복도를 걸었다.
“으그그…”
공작과 데이몬의 만남이 길어진 탓에 시에나는 결국 그에게 말 한마디 건넬 수 없었다. 내일 이야기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어쩐지 기분은 자꾸자꾸 가라앉아만 갔다.
빨리 얘기하고 싶은데.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 못하자 가슴이 답답했다. 데이몬도 이렇게 속으로 내내 끙끙 앓고 있었겠지. 그런 데이몬을 생각하자 마음이 영 좋지 않았다.
“으… 체했나.”
초조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기름진 음식을 위장에 넣었으니 체할 만도 했다. 명치께에 음식이 얹힌 느낌에 시에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할머니는 주무시려나?”
안 주무신다면 체기에 좋은 약을 얻어 볼까 하는 요량으로 시에나는 노파와 아이작의 방으로 향했다. 이미 잠들었다면 돌아갈 생각이었건만, 시에나는 활짝 열려 있는 문 사이로 깨어 있는 노파를 발견했다. 노파는 불안한 표정으로 꿀벌의 8자 춤을 추듯 빙글빙글 방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할머니? 문 활짝 열어 놓고 뭐하고 계세요?”
“시에나. 혹시 아이작 못 봤니?”
“네? 아직도 안 들어온 거예요?”
시에나가 놀라 되묻자 노파의 안색이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으응. 저녁 먹을 때 즈음에는 돌아올 줄 알았는데, 아직 돌아오질 않았네.”
“그거 큰일이잖아요. 찾아보셨어요?”
“안 그래도 성내를 돌아보고, 혹시 돌아왔나 싶어서 방금 여기 온 참이네.”
“그럼 여기에 쪽지 남겨 두고 같이 찾아봐요. 저도 도울게요.”
“고맙네….”
노파는 간절한 표정을 하며 시에나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새 노파는 어지간히 애가 탔는지 10년은 늙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안쪽을 돌아 주세요. 저는 바깥을 찾아볼게요.”
“밖은 밤이라 추울 텐데… 이거라도 걸치렴.”
그렇게 말하며 노파는 자신이 입고 있던 숄을 벗어 시에나에게 걸쳐 주었다. 노파의 체온이 녹아든 옷에는 훈훈한 온도와 희미한 약초 냄새가 났다. 기분 좋은 향기에 깊은 숨을 들이쉰 시에나가 말했다.
“감사해요. 그럼 한 시간 뒤에 다시 방에서 뵈는 걸로 할까요?”
“그래. 고맙네.”
시에나는 다급하 걸음걸이로 계단을 내려갔다. 정문 앞에 서자 오늘의 보초인 한스가 시에나의 얼굴을 보고 알은체를 했다.
“시에나, 여긴 웬일이야.”
“한스, 아이작이 사라졌대요.”
“아이작?”
“얼마 전에 할머니랑 같이 온 데이몬 도련님 또래의 남자아이요.”
“아아. 그 애. 갑자기 왜 사라진 거래?”
“점심때 잠깐 실랑이가 있었는데, 그때 이후로 나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
“그거 큰일이군. 사람들에게 말해서 같이 찾아볼까?”
“네, 부탁 좀 드릴게요. 아무래도 단순한 일이 아닌 것 같아요.”
“그래, 어떻게 생겼는데?”
“으음, 제가 그림으로 그려서 보여드릴게요.”
시에나는 주머니 속에서 펜과 종이를 꺼내어 벽에 대고 즉석에서 아이작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걸 보는 한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자요, 이 정도면 알아볼 수 있겠죠?”
“아니, 사람인지도 모르겠는데.”
“뭐라고요?”
시에나가 도끼눈을 뜨고 한스를 노려보았다. 한스는 찔끔하긴 했지만 그 눈동자에는 진심이 묻어나 있었다.
“이렇게 잘 그렸는데 무슨 소리예요!”
“아니, 그게… 혹시 왼손잡인데 오른손으로 그린 건가?”
“저 오른손잡이 맞거든요?”
시에나의 눈에는 자신의 그림이 아이작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세밀화처럼 보이는데, 한스는 아무래도 야맹증이 있는 것 같았다.
“도련님은 항상 저한테 잘 그린다고 해 주셨다고요!”
물론 좀 어색한 웃음을 흘리긴 했지만. 시에나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조금 움찔한 한스가 어물어물하고 있던 순간, 문밖에 서 있던 경비병이 끼이익, 문을 열었다.
“뭔데 이렇게 소란스러워?”
“워커! 너 그림 제법 잘 그린다고 했지?”
“우리 사촌이 화가이긴 한데, 왜?”
“그럼 됐네. 꼬맹이 하나가 사라졌대서 같이 찾아보려고 하는데, 그림 좀 그리는 애가 필요해서.”
“저도 한 그림 하거든요? 이거 봐요! 이 정도면 알아볼 수 있지 않아요?”
시에나가 종이를 내밀며 당당하게 말했다. 워커가 시에나의 그림을 바라보다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사라졌다는 꼬맹이가 개야?”
“크흡.”
그 순간 한스가 코 먹는 소리를 내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입술을 깨물고 있는 걸 보아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도끼눈을 뜬 시에나의 시선을 피해 그가 어둠 속에서 큭큭거렸다.
뭐지? 나 진짜 그림 못 그리나?
시에나가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에 혼란을 느끼고 있을 때, 워커가 다가왔다.
“걔 빨리 찾아야 한다면서?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봐.”
시에나는 그에게 펜과 종이를 넘겨주며 아이작의 얼굴을 떠올렸다.
“밤색 머리에 갈색 눈이고요, 앞머리는 눈썹 위로 올라와 있고, 평범하게 짧은 머리예요. 눈은 좀 크고 입술은 얇은 편이에요. 키는 170정도 되는 것 같고요. 오늘은 회색 티에 까만 바지를 입었어요.”
시에나의 설명을 듣고 워커가 착착 그림을 그려 갔다. 얼굴을 크게 그리다 보니 만화 같은 형태가 되긴 했지만, 전신을 그리고 나니 제법 그럴 듯해졌다. 시에나가 자신이 그린 그림과 비교해 보며 무엇이 다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한스와 워커는 잠시 입술을 꽉 깨물어야 했다. 그런 그들이 못마땅한 듯 눈을 흘기던 시에나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사례는 할 테니 시간 되는 분들은 꼭 같이 찾아 주세요.”
“그래, 알았어.”
* * *
열 명이 넘는 사람이 모여 한 시간을 넘게 찾았지만, 결과는 또 허탕이었다. 아이작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시에나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노파의 속은 그것보다 더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으리라.
“할머니랑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되서 저 잠깐 올라가 볼게요.”
“그래. 우린 계속 찾아보고 있을게.”
“네에, 감사해요.”
시에나가 몸을 빙글 돌려 노파가 있는 방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여전히 정복 차림의 데이몬이 시에나와 눈이 마주쳤다.
“도련님, 아직 안 주무셨네요.”
“응. 숙부님과 이야기할 게 남아 있어서. 막 끝난 참이야. 그런데 시에나, 무슨 일 있어?”
“아이작이 사라져서 찾고 있던 참이에요.”
아이작이 사라졌다는 소리에 데이몬은 놀랐는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이작이? 언제부터 사라졌는데?”
“점심 시간 이후로 보이질 않는대요.”
“큰일이잖아. 나도 같이 찾을게.”
“그치만 도련님, 피곤하시지 않으세요?”
“괜찮아, 중요한 일이잖아. 어디로 가면 돼?”
“지금은 할머니 방에 가요. 이 시간에 만나기로 했거든요.”
“그래, 알았어.”
데이몬이 얌전히 시에나의 뒤를 따랐다. 최근 시에나와 함께하는 시간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 데이몬이었지만 아이작이 사라졌다는 게 어지간히 큰일이었나 보다. 오해라는 이야기를 꺼낼까 싶기도 했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은 듯해 다시 한번 마음 한구석에 미뤄 두었다. 언제쯤 꺼낼 수 있을까, 시에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무 걱정 마, 근처에 있을 거야.”
“네?”
“한숨을 크게 쉬길래… 많이 걱정하는 것 같아서.”
“아… 그렇죠.”
사실 아이작 때문이 아니라 도련님 때문이에요!
시에나는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삼키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파는 방 안에서 불안하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 아이작 아직도 안 왔어요?”
“도련님도 오셨군요. 예, 안 왔습니다. 어딜 간 건지 대체…. 내가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었는데….”
시에나를 바라보는 노파의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점심때 한 말을 지독히도 후회하는 듯했다. 시에나가 다가가 노파의 손을 꽉 잡았다.
“괜찮아요. 지금 다 같이 찾고 있으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래, 너무 걱정 말게. 수색 인원은 충원해 달라 말해 놓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노파는 시에나의 손을 잡은 채로 데이몬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일단 밖에 나가서 찾아봐요.”
“그래… 어이쿠!”
노파는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것과 동시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깜짝 놀란 시에나와 데이몬이 그녀를 부축했다.
“죄, 죄송합니다. 갑자기 어지러워서….”
“할머니, 오늘 식사는 하셨어요?”
“그게… 오면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아이작이 아직 오지 않아서….”
세상에. 그럼 점심도 먹지 않았다는 뜻 아닌가. 시에나는 일어나 다시 나가려는 노파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서 식사를 가져와 달라 말할 테니 할머니는 여기서 잠시 쉬면서 아이작을 기다려 주세요.”
“아니, 잠깐 현기증이 나서 그런 거지 나는 괜찮다. 내 손자 찾는 일인데 그 애 할머니인 내가 빠질 수는 없지 않겠니.”
“안 돼요! 식사 제대로 하셔야 해요. 아이작도 그걸 원할 거예요.”
시에나의 설득에 데이몬도 거들었다.
“시에나의 말대로 하는 게 좋겠어. 기다려야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할 테니, 자네는 잠시 여기 있도록 해.”
“저는… 예, 알겠습니다.”
노파는 그들의 설득에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평소의 활기찬 노파가 아니라 괜스레 마음이 쓰였다. 시에나와 데이몬이 지팡이를 짚은 노파를 침대까지 부축했다. 침대에 앉아 있는 모습이 한없이 우울해보였다.
“식사 금방 가져오라고 말할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안 가져다줘도 괜찮네. 늦은 밤까지 폐가 많구만…. 미안하네.”
노파의 말에는 미안함이 가득 담겨있었다. 너무 저자세인지라 보다 못한 데이몬이 위로를 건네었다.
“그대와 아이작은 우리 집에 온 손님일세. 좀 더 당당히 손님의 모습으로 있는 게 좋을 것 같군.”
데이몬의 말투는 건조했지만, 그 안의 따뜻함을 느낀 노파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예… 그러겠습니다.”
“쉬고 있게. 시에나, 가자.”
“아, 네.”
시에나는 먼저 나가는 데이몬의 뒤를 뒤따랐다. 복도를 걷고 있는데 오랫동안 켜 둔 탓인지 등의 심지가 다 타는 바람에 불빛이 흔들리다 이내 꺼져 버렸다. 앞은 온통 어둠이라 시에나가 당황해 데이몬을 불렀다.
“도련님, 잠시만요. 이거 등을 좀 갈고 가야 할 것 같아요.”
“그래. 여긴 너무 깜깜하네. 등을 마나석으로 교체하는 걸 고려해 봐야겠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등을 매번 갈아 줘야 하는 것도 일이거든요.”
원래는 1층 창고에 가서 가져와야 하지만 급한 마음에 시에나가 벽에 붙어 있는 등을 떼어 오려고 했다.
“어라, 잘 안 닿네….”
별로 큰 키가 아닌지라 까치발을 들고 낑낑대고 있는데 데이몬이 다가왔다. 시에나의 뒤로 바싹 달라붙은 데이몬의 숨결이 시에나의 목을 간지럽혔다. 숨결에 기분이 이상해진 시에나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
“자.”
데이몬은 너무나도 손쉽게 등을 들어 시에나에게 건네주었다. 시에나는 어리벙벙한 기분으로 데이몬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시에나의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작은 새의 심장처럼 가슴이 작게 콩콩 뛰었다. 아무리 키가 컸다 해도 그저 어린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뒤에 선 순간 낯선 남자처럼 느껴지는 데이몬이 어색했다. 시에나는 의식적으로 데이몬과 한 걸음 떨어져서 걷게 되었다.
“여긴 정말 어둡네요….”
“그러게, 여기만 왜 등이 꺼져 있지?”
등이 전부 꺼진 어두운 복도에서 손에 든 등 하나에 의지해 걸으며 시에나는 슬쩍 몸을 움츠렸다. 앞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캄캄한 어둠이었다. 무서운 게 그닥 없는 시에나지만 어두운 건 질색이었다.
수한이 죽고 나서 불 꺼진 집에 들어오면 그 집의 한기가 자신에게 옮겨 오는 기분이라 항상 무섭고 두려운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서늘하고, 찝찝한 그 기분은 시에나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시에나는 등을 자신에게 바싹 잡아당기며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꼭 뭐가 나올 것 같은 곳이에요.”
아니, 얘기를 해도 뭐 이런 얘기인가. 더 무서워졌잖아!
시에나는 꺼낸 말을 바로 후회했다.
“시에나, 무서워?”
“네? 아, 아뇨!?”
“그런데 왜 이렇게 몸을 떨어.”
“그, 사실 무서워서요.”
그녀의 솔직한 말에 데이몬은 입꼬리를 올렸다. 싱그러운 그 웃음소리에 무서움이 좀 가시는 것 같았다.
“그럼 좀 가까이 와, 그럼 덜 무섭겠지.”
“그, 그럴까요?”
기분이 이상해 멀어졌던 게 무상하게 시에나는 데이몬과 가까이 다가가 후다닥 팔짱을 꼈다. 일시적으로 데이몬의 어깨가 뻣뻣하게 굳었다. 데이몬의 벌려진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시, 시에나. 좀 가까운 것….”
“복도 진짜 무서웠는데, 도련님이랑 가까이 있으니까 조금 나은 것 같아요.”
해맑게 말하는 시에나의 앞에서 데이몬은 결국 침묵하게 되었다.
“그래….”
“정말 이렇게 등을 비추면 뭐라도 나올….”
시에나가 팔을 쭉 펴고 불을 비추며 말했다가 그대로 굳었다. 정말로 회색 천을 뒤집어쓴 무언가가 그들의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