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돌아가는 길, 바구니 가득 담긴 풀을 볼 때마다 시에나의 가슴 속에 뿌듯함이 차올랐다. 보리지도 있었지만 센텔라가 더 많았다. 마지막에 시에나가 큰 센텔라 군락을 찾아 바구니를 하나 더 만들어 거기에도 가득 담아 왔다. 시에나가 욕심을 부릴 만큼 센텔라라는 이 풀은 거의 만병통치에 가까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해열, 해독, 오한, 이뇨, 기침, 인후염, 심지어 여드름까지!
맛도 나쁘지 않아 샐러드로도 먹지만, 잎을 말린 다음 뜨거운 물을 부어 차로 마시면 열을 내리는 데 좋은 해열차가 된다.
보리지와 함께 끓인 후 도련님께 내어야겠다고 생각하자 시에나의 걸음걸이가 조급해졌다. 시에나의 뒤에는 로하엘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걷고 있었다.
“공작님의 성은 어때요? 여기처럼 황량하지는 않겠죠?”
“마르바스 성도 아주 멋지던걸요. 공작성은 매일같이 드나들다 보니 이제는 그렇게 매력적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조금만 설명해 주세요. 저는 여기서 평생 살아서 다른 성은 어떨지 늘 궁금했어요.”
칸나가 로하엘에게 적극적으로 나섰다. 칸나의 눈이 반짝거리고 볼이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사랑에 빠진 것 같았다. 로하엘이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제 키의 두 배 정도 되는 성문을 열고 들어가면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복도가 나와요. 끝없는 복도를 따라 걸어가면 홀의 중앙에는 공작님의 가장 친한 친우였던 헤임달이라는 분의 초상화가 걸려 있죠. 거기서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연회장 같은 식당 홀이 나와요. 항상 음식을 채워 놓는 편이라 훈련이 끝나면 몇 시든 거기에 가서 배를 채울 수 있죠.”
“어머, 그거 좋네요.”
로하엘은 기사라서 그런지 묘사가 썩 훌륭한 편은 아니었다. 훈련소와 식당 정도만 겨우 설명하는데도 진땀을 뺐다. 그러나 배곯던 이들이라 그런지 로하엘의 형편 없는 묘사에도 침을 흘렸다.
“기사단원이 정말 백 명도 넘습니까?”
“전쟁에 나갔던 이야기 좀 해주세요!”
한 명당 하나씩 질문한다고 해도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용인들만 자그마치 열 명이었다.
사람들의 호기심에 둘러싸인 로하엘은 그들이 던진 질문들을 대충 넘기지 않고 상냥하게 대답해주었다. 좋은 의미로 귀족 같지 않은 로하엘이 인기를 얻는 건 순식간이었다.
칸나는 이미 로하엘에게 홀딱 빠져 있었다. 숲에서 성으로 돌아오는 한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에나는 칸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
로하엘은 정말이지 동화 속에서 나온 왕자님처럼 근사하고 상냥했으니까. 로하엘을 중심으로 하나의 공처럼 몰려 있는 사람들 때문에 걸음이 느려지자 일찌감치 무리에서 떨어져 앞장선 시에나가 제일 먼저 성문 앞에 당도했다.
“이거 놔! 나갈 거야!”
“도련님! 지금 나가시면 큰일 납니다!”
“열이 아직 높아요! 금방 오신다고 하셨으니 조금만….”
문을 열린 뒤 시에나가 처음으로 본 것은 서너 명의 인원들이 문 앞에 모여 한 명의 남자아이를 막기 위해 쩔쩔매는 장면이었다.
“도련님!”
“시에나!”
데이몬은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악을 쓰고 있다가 시에나를 발견하자마자 사람들을 모두 뿌리치고 시에나에게 달려가 답삭 안겼다. 데이몬을 말리고 있던 사람들이 그새 10년은 늙은 표정으로 시에나를 원망스레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이몬은 추운 날 어미의 품에 파고드는 어린 짐승처럼 시에나의 품에 안겨 몸을 부비적거렸다.
시에나는 고열로 인해 여전히 뜨거운 데이몬의 몸을 토닥이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도련님, 무슨 일 있으셨어요?”
데이몬의 상태가 걱정스러웠던 시에나가 그를 떼어 놓고 상태를 확인하려고 했지만 데이몬은 아스팔트에 딱 붙은 껌딱지처럼 들러붙어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네가 위험해지는 악몽을 꿨어. 그런데 깨어나니 네가 없어서….”
정말 끔찍한 악몽이었는지 데이몬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열에 달떠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던 데이몬이 일어나자마자 시에나를 찾았는데 없어서 놀란 거겠지. 평소 같으면 곁에 찰싹 붙어 있을 시간이었으니 그가 얼마나 놀랐을지 알 수 있었다. 시에나 대신 데이몬을 봐주고 있던 제인이 지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에나가 제인에게 미안하다는 눈길을 보내며 땀으로 푹 젖은 데이몬의 등을 연신 토닥였다.
“저 괜찮아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 진짜 아무 일도 없었던 거지?”
데이몬이 자그마한 손이 시에나의 얼굴을 감쌌다. 뜨끈한 온기가 볼을 통해 전해져 왔다. 눈물까지 흘렸는지 푹 젖어 별빛처럼 반짝이는 눈동자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시에나를 응시했다.
처음의 어른스러운 분위기가 다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열병을 앓는 데이몬은 어린아이로 회귀한 것처럼 굴었다. 칭얼대고, 짜증 내고, 집착했다.
시에나는 난감해하면서도 그런 데이몬이 안쓰러웠다. 아무도 자신을 받아 주는 사람이 없어 너무 빨리 철들었을 뿐이었지, 데이몬은 아직 어린애였다. 동생 때문에 빨리 철이 들었던 시에나로서는 데이몬이 조금 더 천천히 어른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열이 오른 상태에서 혼자 옷을 입었는지 셔츠 단추는 엉망으로 꿰어져 있었고 바지 리본은 이미 풀어 헤쳐져 앙상하게 마른 골반이 드러나 있었다. 재빨리 바지를 추켜올려 리본을 묶어주는 시에나를 데이몬이 다시 꽉 껴안았다. 시에나의 귓가에 콩콩, 데이몬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밖은 위험하니까 어디 가지 말고 나랑만 있어.”
‘귀여워….’
열 때문에 물기 어린 눈동자로 애처롭게 호소하는데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아찔한 귀여움에 시에나는 어지러워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도련님 낫게 해 드리려고 약초를 캐러 다녀왔던 거예요. 저 어디 안 가요. 아시잖아요.”
데이몬이 아팠기에 리메리오의 떨거지들이 돈을 갖고 도망갔다든가, 식료품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일부러 하지 않았다. 아프지 않은 자신도 혈압이 올라 쓰러질 지경인데, 하물며 상대는 고열에 시달리는 어린아이였다.
먹을 걸 구하러 갔다는 것보다는 약초를 캐러 다녀왔다는 편이 안심시키기엔 좋을 것 같아 시에나는 일부러 모든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나를 낫게 하려고?”
“네. 도련님 계속 열 올라서 아프시니까, 낫게 해 드리고 싶어서요.”
“그랬구나. 날 위해서….”
시에나의 대답이 퍽 감미로웠는지 데이몬은 수줍어하면서도 그 말을 읊조리며 작게 미소지었다. 데이몬에게 심각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한 시에나의 등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 많은 곳에서 이산가족 상봉 비슷한 것을 했구나.
오늘은 왜 이렇게 부끄러운 일이 많은지. 뒤늦게 찾아온 수치심에 얼굴이 홧홧해진 시에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떨결에 시에나와 떨어지게 된 데이몬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시에나가 어색하게 로하엘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련님. 오늘 반가운 손님이 오셨어요.”
“…반가운 손님?”
반가운 손님이라고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데이몬은 별로 달가운 눈치가 아니었다. 아니, 그냥 시에나 외의 인간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제인과 돌아가면서 도련님의 간병을 맡았건만, 데이몬은 어미에게 각인한 새끼 오리처럼 유독 시에나만을 따랐다.
데이몬의 반응은 그저 시에나의 말을 받아 주기 위해 시큰둥하게 받아쳐 주는 정도였다.
“네. 리카르도 공작님의 소개로 오셨어요. 마르바스성의 새로운 관리인이 되실 거예요.”
자신을 소개하는 분위기에 로하엘이 시에나와 데이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회색 머리네.”
아까의 시큰둥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데이몬은 로하엘에게 강한 적개심을 보였다. 회색 머리가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걸까. 당황하는 시에나와는 달리 로하엘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데이몬 황자 전하. 시에나 양이 앞서 소개해 주신 것처럼 앞으로 잠시 여기에 머물게 될 로하엘 카넬로프 자작입니다.”
“네 입에서 시에나의 이름이 또 나온다면 그 입을 찢어 버리겠어.”
데이몬은 시에나의 품에서 떨어져 나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흉흉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로하엘의 가슴 정도밖에 안 오는 키인데도 데이몬에게 풍기는 기백은 웬만한 어른들보다 위협적이었다.
“이런, 죄송합니다. 시에나 양. 시에나 양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안 되는 줄 정말 몰랐습니다. 그럼 앞으로 시에나 양의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시에나 양이 알려 주시겠어요?”
로하엘은 일부러 시에나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르며 데이몬을 도발했다.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두려운 마음에 데이몬을 바라보니 검은 머리털이 바짝 선 데다 금안은 분노로 샛노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힉.
금방이라도 한 대 때릴 듯한 기세와는 달리 데이몬은 아끼는 장난감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아이처럼 시에나를 확 끌어안고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너 허튼수작 부리면….”
“아얏…!”
붙잡힌 손에서 알싸한 고통이 전해진 시에나의 입에서 저절로 비명이 터졌다. 데이몬이 시에나의 비명에 화들짝 놀라 바로 손을 놓았다.
“미안, 세게 잡았구나. 많이 아파?”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상처가 나서 그런 것 같아요.”
손 한 번 세게 잡았다고 주눅 들어 버린 데이몬을 달래며 시에나가 자신의 손을 살폈다.
“상처?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잖아?”
데이몬이 시에나보다 더 당황하며 그녀의 손을 관찰했다. 자세히 보니 풀에 베인 듯한 실금이 손등에 주욱 그어져 있었다. 가만히 있을 때에는 몰랐는데, 힘을 가하자 상처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풀을 뽑다가 베었나 봐요.”
“의원을 부를까?”
네? 손 베인 걸 가지고요?
데이몬의 중간 없음에 시에나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런 건 하룻밤만 지나면 낫는걸요. 별로 심하지도 않고요. 아깐 조금 놀라서 그랬을 뿐이에요.”
그러나 시에나의 위로에도 데이몬은 더 없이 시무룩해 보였다. 자기 때문에 시에나가 아파한다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 게 아닌데. 데이몬의 머리 위로 축 늘어진 귀가 보이는 듯한 환각에 시에나는 고개를 홰홰 돌리며 그를 토닥였다.
“나 때문에….”
“도련님 때문이 아니에요. 저 진짜 괜찮아요. 그리고 진짜 큰일 날 뻔하긴 했는데 로하엘 님이 구해주셨어요.”
둘의 사이를 좀 완화시켜 보려 시에나가 로하엘을 은근슬쩍 옹호했다. 그러나 데이몬이 집중한 건 그 방향이 아니었다.
“무슨 소리야, 시에나? 아무 일도 없었다며.”
데이몬은 깜짝 놀라 다시 한번 자세히 시에나의 몸을 살폈다. 주위에는 사람도 제법 있었는데 데이몬의 눈에는 오직 시에나만 있는 듯 그녀의 몸을 샅샅이 탐색했다. 검은색 하녀복이라 많이 가려졌었는데 자세히 보니 옷이 온통 흙투성이였다. 데이몬이 와락 인상을 구겼다.
“넘어질 뻔했는데 로하엘 님이 구해 주셨어요. 전 멀쩡해요.”
시에나는 몇 번이나 데이몬을 안심시켰지만 그래도 불안한지 그는 몇 번이고 그녀의 주위를 돌면서 상태를 살폈다. 정말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걸 알아채자 이번에는 입술을 깨물며 로하엘을 노려보았다.
시에나가 위험했을 때 함께 있어 주지 못한 게 상당히 분한 모양이었다. 로하엘은 그런 데이몬을 여유롭게 내려다보았다. 데이몬은 시에나가 보지 못하는 각도에서 그를 한참 노려보다 이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시에나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디를 구하는 건 기사 된 본분으로 당연한 거지요.”
로하엘은 당연한 일을 했다는 듯 말했다. 그 대답에 더욱 울컥한 듯한 데이몬이 겨우 화를 꾹꾹 누르고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에 걸맞은 방으로 안내해야겠지요. 케넨. 이분을 2층 왼쪽 끝방으로 안내해 드려.”
임시로 집사를 맡고 있던 케넨이 깜짝 놀라 물었다.
“2층… 왼쪽 끝방 말씀이십니까?”
“그래. 거기.”
시에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데이몬을 바라보았다. 이제 데이몬은 제법 성의 주인 같은 티를 내었다. 사람을 좋은 방으로 안내할 줄도 알고. 원래 아이는 아픈 뒤 키가 큰다고 하던가.
그새 부쩍 성장한 것 같은 느낌에 시에나가 기특하게 보고 있는데 명령을 들은 케넨의 안색은 그리 좋지 못했다.
“뭐 해? 케넨. 어서 안내해.”
“예에. 안내하겠습니다. 로하엘 님. 이쪽으로….”
“네. 가죠. 시에나 양, 그럼 나중에 봐요. 시에나 양.”
“네, 로하엘 님. 푹 쉬세요.”
로하엘은 케넨의 뒤를 따르며 시에나에게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로하엘이 시에나의 이름을 강조하며 두 번이나 부르자 데이몬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시에나. 나 피곤해. 우리 들어가자.”
아까의 딱딱한 태도는 어디 가고 데이몬이 봄바람이 살랑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저 그런데 할 일이 있어서… 먼저 올라가 계실래요? 금방 갈게요.”
“무슨 일인데?”
“아까 해열에 좋은 약초를 채집했다고 했잖아요. 그걸로 도련님께 차를 끓이려고요.”
“나 열 없어. 아까 다 내렸어.”
“거짓말하지 마세요.”
마차 타고 가면서 봐도 머리 위에 아지랑이가 필 정도로 열이 올라 있는데! 시에나가 한 푼어치도 믿지 않자 데이몬이 다른 변명들을 궁리하는 게 눈에 빤히 보였다. 어지간히 시에나와 함께 있고 싶은 모양이었다.
“시에나. 그건 내가 할게.”
제인이 시에나의 바구니를 들고 말했다.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 넌 가서 도련님을 돌봐 드려. 오전엔 내가 봤으니 오후에는 네가 봐야지.”
“아, 그래도….”
생잎을 바로 차로 달이는 게 아니라 볶아야 해서 시간이 꽤 걸릴 텐데. 다 같이 일을 하고 와서 피곤한데 자기만 특혜를 보는 것 같은 기분에 가기를 망설이던 시에나에게 데이몬이 살랑거렸다.
“나 아파, 시에나. 빨리 들어가자.”
“아까 안 아프시다면서요.”
“다시 아파졌어.”
시에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데이몬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뻔뻔하게 나가기로 작정했는지 콜록콜록 거짓 기침을 하며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아직까지 열이 떨어지지 않은 건 사실이라 시에나는 결국 데이몬과 함께하게 되었다.
“그럼 제인, 부탁할게.”
“그래. 나한테 맡겨.”
시원시원하게 대답하는 제인에게 미안한 미소를 띤 채 시에나는 데이몬에게 이끌려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은 듯 데이몬의 발걸음이 조금 경쾌했다. 조그마한 머릿속에 대체 뭐가 들어 있는지. 얄밉지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도련님이었다.
“도련님, 그런데 아까 무슨 악몽을 꾸셨던 거예요?”
시에나가 계단을 오르면서도 제게 폭 안겨 있는 데이몬에게 물었다. 데이몬은 시에나의 말에 인상을 확 찌푸렸다.
“네가 어떤 절벽에서 뚝 떨어지고 있는데 나는 아무리 달려도 너한테 다가갈 수가 없는 거야. 이대로 떨어지면 분명히 엄청 다칠 텐데도. 너무 분해서 엉엉 울고 있는데 갑자기 웬 날개 달린 회색 말 대가리 같은 게 갑자기 날아와서는 널 낚아채서 안고 떠나갔어. 나는 다시는 갈 수 없는 엄청나게 멀고 높은 곳으로 말이야.”
시에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무섭다기보다는 귀여운 꿈이었지만 꿈 이야기를 하는 데이몬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져 있어 도저히 웃을 수 없었다.
“그러셨군요….”
웃음을 참기 위해 고개를 돌린 시에나의 시선에 무언가가 와 닿았다.
“어머?”
자신의 발자국이 계단에 그대로 찍혀 있었다. 산의 진흙이 바닥에 묻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도련님, 잠시만요.”
당황한 시에나가 데이몬을 불러세웠다. 바닥에 묻은 진흙을 신발 끝으로 건드리자 그대로 부드럽게 뭉개졌다. 마르고 나서 털어서 청소해야 할 것 같았다.
다른 건 없나 싶어 차림새를 훑어보니 신발이 진흙투성이인 것 외에 옷도 성치 못하고, 땀 냄새까지 나는 것 같았다.
이대로는 데이몬에게 나쁜 균을 옮길 수도 있을 것 같아 시에나는 2층에서 멈추어 섰다.
데이몬이 그런 시에나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도련님, 저 지금 옷이랑 신발이 영 더러워서 좀 씻고 올게요.”
“나 더러운 거 좋아해.”
데이몬이 다급하게 말했다. 시에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안 돼요. 여기저기 쏘다니느라 나쁜 병이 묻어 있을 수도 있어요. 씻고 금방 갈게요.”
“…알았어.”
데이몬은 부루퉁하긴 하지만 더 이상 시에나를 막지는 않았다.
시에나 또한 한 번 고집을 부리면 절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지난번 몸을 닦은 날 처절하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빨리 와야 해.”
“네, 도련님.”
“꼭이야.”
“네, 그럴게요. 방까지 가시기 어려우시면 부축해 드릴까요?”
“됐어. 내가 무슨 어린애인 줄 알아?”
“네.”
시에나의 단호박에 데이몬은 조금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괜찮으니까 얼른 씻고 돌아와. 사실 안 씻어도 돼.”
“얼른 씻고 올게요.”
데이몬의 마음이 바뀔세라 시에나는 몸을 빙글 돌려 부지런히 자신의 방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데이몬은 계단을 올라가는 척하다 다시 내려와 시에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시에나가 멀어져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데이몬은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그녀의 발자취를 눈으로 좇았다.
시에나가 사라진 지 한참 지나서야 데이몬은 썰렁해진 복도에서 아쉬운 듯 시선을 옮기고 다시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 * *
“후우. 상쾌해라.”
공용 욕실에서 간단히 목욕한 시에나가 수건으로 대충 머리를 털어 내고 방으로 향했다. 자신의 방 앞에 다다라 문을 열려던 시에나는 방 옆의 문이 열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뭐야, 문이 왜 열려 있지?”
다들 나가서 일할 시간에 대낮에 환히 열린 문, 혹 숨어든 도둑은 아닐까. 심지어 저 방은 시에나가 들어왔을 때부터 계속 주인 없이 닫혀 있던 방이었다. 최근 도둑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시에나로서는 그냥 넘어가려야 넘어갈 수 없었다. 시에나는 자신의 방문을 여는 척하면서 문 안쪽을 은근슬쩍 훑어보았다.
“시에나.”
“엄마야!”
문 안쪽에는 로하엘이 시에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에나는 방을 훑어본 걸 대번에 걸려 약간 부끄러운 기색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있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엄청 조용했다고 생각했는데….”
“하하. 저는 기사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예민해야 밥 벌어먹고 살 수 있죠.”
“아… 그렇군요.”
시에나는 부끄러운 듯 괜히 귀밑머리를 돌돌 말았다.
“시에나, 미안한데 나 좀 도와줄 수 있나요?”
“네? 무슨 일이세요?”
“창문이 잘 안 열려서… 힘을 주어 열면 부서질 것 같고. 혹시 요령이 있나 해서요.”
로하엘은 곤란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뒤의 창문을 가리켰다. 먼지가 켜켜이 쌓인 창문을 열어 보려 열심히 노력했는지 창문이 있는 자리에만 먼지가 없었다. 아마 몸으로 닦은 거겠지. 거구의 남자가 작은 창문 하나를 열지 못해 끙끙대는 장면을 상상하자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시에나가 안으로 들어섰다.
“어라?”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로하엘의 방이 필요 이상으로 낡아 있었다.
방 자체는 크지만 거의 창고로 쓰인 건지 바닥에는 오랫동안 물건이 놓여져 있던 듯 얼룩덜룩한 자국이 남아 있고, 바닥과 벽지도 배색이 맞지 않는 데다 너무 촌스러워 손님을 맞을 방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천장 모서리에는 거미줄까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처음 온 시종에게도 주지 않을 법한 방이었다. 시에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로하엘 님. 방을 잘못 받으신 것 같은데요. 이 방이 아닌 것 같아요.”
“흐음. 아마 이 방이 맞을 텐데요.”
“예?”
유구한 전통이 있어 보이는 먼지 가득한 커튼을 살피던 시에나가 로하엘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제가 도련님께 여쭈어서 방을 바꿔 드릴게요. 도련님은 이 방이 엄청 좋은 줄 알고 주셨을 거예요.”
“하하. 아닙니다. 저는 이 방이 마음에 들어요.”
“그래도 이 방은 너무 낡았는걸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시에나가 말끝을 흐리자, 로하엘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여긴 시에나의 옆방이죠?”
“네. 맞아요.”
“그렇다면 여기가 좋습니다.”
“네?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모르는 게 있으면 시에나한테 빨리 물어볼 수 있잖아요. 그리고 햇살도 잘 들고요. 저는 채광이 좋은 방을 선호하거든요.”
“으음, 여기가 햇빛이 잘 들기는 하죠. 그러시다면 저는 지금 일이 있어서 다른 사람을 불러 방을 청소해 드릴게요.”
“그래 주면 고맙죠. 아, 침대 시트와 베갯잇도 새 걸로 바꿔 주실 수 있을까요?”“그럼요. 맡겨 두세요.”
“그럼 이것도 그분들에게 부탁드리면 될까요?”
로하엘이 열리지 않는 창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아. 아니요. 이건 제가 해 드릴게요. 제 방과 같은 형태의 창문이라서 쉽게 열 수 있어요. 이건 창문을 미는 게 아니라 이렇게 당겨서 이쪽에 걸쇠를 걸고 열면 고정시킬 수 있어요.”
시에나가 시범을 보이자 그가 가까이 다가와 다시 창문을 닫고 여는 것을 연습했다.
끼이익.
기름칠을 하지 않은 창문 틈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기름도 발라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시에나가 이내 문을 활짝 열었다. 눈부신 정오의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햇살이 밝게 비추자 방 안의 먼지가 더 잘 보여 시에나는 괜히 민망해졌다. 로하엘은 개의치 않고 문제를 해결한 사람처럼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렇게 하면 되는군요. 계속해서 밀고만 있었네요. 정말 박살 낼 뻔했어요.”
“그러게요. 그치만 이렇게 낡아서야, 부서져도 할 말은 없겠는걸요.”
로하엘의 팔에 있는 근육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정말 손쉽게 부서졌을 것 같았다. 그가 창문을 박살 내고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장면을 상상하며 시에나가 큭큭 거렸다.
탕, 탕, 데구르르….
그때, 어디선가 복도 위에 철제 그릇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에나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지만, 활짝 열린 문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 시에나가 고개를 원상태로 홱 돌렸다.
철썩!
방을 울리는 타격음에 시에나는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로하엘을 쳐다봤다. 로하엘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에나를 바라보기는 매한가지였다.
철썩이라니.
막장 드라마에서 뺨을 때리는 소리도 이것만큼 진부하진 않을 것이다. 화기애애하던 방에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고개를 세게 돌린 시에나가 젖은 머리칼을 로하엘의 뺨에 제대로 강타한 소리였다. 머리카락에 제대로 맞은 로하엘의 왼쪽 뺨은 미스트를 과도하게 뿌린 듯 촉촉했다. 그걸 바라본 시에나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죄, 죄송합니다! 어떡해. 이런 큰 무례를….”
“시에나의 머리카락은 아프네요….”
로하엘이 큭큭 웃으며 농담처럼 건네는 말에 시에나는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죄송해요….”
“농담이에요. 하나도 안 아팠어요.”
아, 쪽팔려…
시에나는 로하엘의 얼굴에 묻은 물기를 주머니 안에 든 손수건으로 손수 닦아 주고 나서야 푹, 한숨을 쉬었다. 로하엘은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평민과 거리를 두지 않다 보니 긴장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여기서 빠르게 빠져나가야 더 실례를 안 끼칠 것 같다는 생각에 시에나는 그에게 급히 인사를 건넸다.
“제가 도련님께 이제 가 봐야 해서, 실례지만 이만 올라가 볼게요.”
“그래요. 내가 바쁜 사람을 너무 오래 붙잡아 뒀네요. 참, 시에나. 혹시 오늘 시간 된다면 저녁 같이 들겠어요?”
시에나가 흔들리는 동공을 감추지 못하고 로하엘을 응시했다. 왜 이렇게 나한테 집착하지, 이 사람. 혹시 나한테 관심 있나…?
“죄송하지만, 기본적으로 사용인과 손님은 같은 자리에서 식사를 하지 않아서요.”
“아, 오해하진 말아요. 오늘 인사도 할 겸 사용인들 전부와 같이 식사를 하기로 했거든요.”
그럼 그렇지.
오해라는 게 밝혀졌지만, 여전히 시에나의 대답은 같았다.
“저는 보통 도련님 방에서 식사를 함께해서요. 아쉽지만 다음에 꼭 함께할게요.”
귀족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기에 시에나는 최대한 정중한 태도를 고수했다. 혹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한 건 아닐까 싶어 흘긋 위를 바라보는데 그는 조금 아쉬워하긴 했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다행이다.
“일단 다른 사람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있을 테니 나중에라도 와요.”
“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시에나는 마지막까지 정중한 태도를 유지하며 문을 닫았다.
“너무 늦었는걸.”
데이몬의 입이 댓발은 나와 있을 것 같았다. 빨리 움직여야지. 시에나가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 * *
“도련님. 저 왔어요.”
나름 빠르게 준비한다고 했는데 로하엘의 방에 있었던 시간이 길었다 보니 한참 늦어 버렸다. 오늘따라 침대에 누워 있는 데이몬의 뒷모습이 칙칙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도련님… 주무시나? 어머.”
시에나가 가까이 가서 데이몬을 살피자 눈을 꼭 감은 채 입을 쭉 내민 그가 보였다.
이거, 아무리 봐도 안 자는 거 맞지?
시에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데이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도련님, 안 주무시는 거 다 알아요.”
움찔.
시에나의 돌직구에 데이몬의 몸이 어색하게 흔들렸다. 그러더니 이내 자는 듯한 숨소리를 낸다.
“피유우….”
그래도 여전히 입은 삐죽 나와 있어 시에나는 키득거리며 그 입술을 손가락으로 톡, 집어넣었다. 데이몬이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시에나를 바라봤다.
“무… 무하는 거야!”
“안 주무시면서 자는 척 저 놀리시니까 그렇죠.”
“그렇다고 내…이, 이, 이, 입술을….”
“저 손 깨끗해요. 방금 씻고 왔는걸요. 그리고 도련님한테 수프 먹여 드리면서 많이 만졌잖아요.”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수프가 묻은 입가를 닦아 준 거지만. 역시나 데이몬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더 뭐라고 하진 못했다.
“너무 늦었어!”
대신 다른 걸로 타박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었어요. 로하엘 님의 방이 너무 낡고 더러워서 정리해 줄 분들을 구해야 했는걸요.”
데이몬이 세모눈을 하고 물었다.
“그걸 왜 시에나가 해?”
“아, 씻고 오면서 마주쳤거든요. 알고 보니 로하엘 님과 제 방이 가깝더라고요.”
별거 아니라는 듯 내뱉은 시에나의 말에 데이몬의 기분이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시에나 방이 어딘데?”
“로하엘 님 옆방이요.”
뚝.
데이몬의 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걔가 왜 네 옆방에 있어…?”
왜 형이 거기서 나와…? 같은 톤의 말투였다. 시에나는 그런 데이몬이 기특하다는 듯 뿌듯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쵸? 아무래도 도련님이 잘못 안내하신 것 같다는 생각은 했어요.”
“…어?”
“그렇지 않고서야 손님께 어떻게 그런 낡고 허름한 방을 주실 수 있었겠어요. 뭔가 착각하신 게 분명하다 싶었죠.”
내가 아는 도련님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듯 시에나는 방긋 웃었다. 데이몬은 기침이 도졌는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시에나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크흠, 그럼… 당연하지.”
이런 힘없는 대답과 함께. 그 모습이 못내 귀여웠던 시에나는 데이몬을 와락 끌어안았다.
“역시 그러실 줄 알았어요! 우리 착한 도련님이 그러실 리 없죠. 저는 한 번도 오해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도련님.”
쿨럭, 쿨럭.
데이몬의 기침 소리가 더욱 거세진 것 같은 건 기분 탓인가.
“도련님, 괜찮으세요? 그러다 토하시겠어요.”
“으응. 괜찮아… 그런데 방을 잘못 줬으니 다른 방을 줘야 하겠는걸.”
“아, 그래서 저도 말씀드렸었는데 햇빛이 잘 드신다고 그냥 거기에 머무시겠대요. 아마 지금쯤이면 청소도 마쳤을 거예요.”
“…젠장.”
피를 토할 듯이 기침하는 데이몬이 걱정된 시에나가 데이몬의 위에 이불을 덮어 주었다.
이마에 손을 짚는 시에나의 행동을 데이몬은 이제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열은 제법 내렸네요. 그래도 여전히 기침을 하시니 꾸준히 차를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시에나가 말한 약초는 어디서 구한 거야?”
“저기 뒷산에서요. 정말 좋은 약초인데 쓰임새를 몰라서 그런지 아무도 안 따가서 무성하게 자라 있더라고요. 아, 누가 좀 따간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 그 효능을 아는지 따간 것 같기도 하지만 센텔라 군락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정도라 원하는 만큼 얻기에는 충분했다. 연둣빛으로 물든 센텔라 군락을 떠올리며 시에나가 다시 황홀한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을 본 데이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 사람도 거기서 만난 거고?”
“누구, 아. 로하엘 님이요? 맞아요. 토끼를 쫓다가 넘어질 뻔했는데 저를 잡아 주셨어요. 안 잡아 주셨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그랬구나.”
로하엘의 무용담에 대해 늘어놓는 시에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데이몬은 점점 조용해졌다. 목이 아프신가 싶어 이야기를 적당히 마무리하고 조용히 곁에 있자 쭈뼛대던 데이몬이 먼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시에나.”
“네, 도련님.”
“시에나는… 사귀는 상대로는 연상이 좋아?”
“네에?”
어린 도련님에게 이런 질문을 받을 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에나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만약에 사귀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이 좋은지 궁금해서.”
“글쎄요.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이 책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제대로 찾아보지도 않았는데, 책 속에서 누군가를 사귀는 건 어불성설이지 않을까. 그러나 데이몬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다시 뚱한 얼굴이었다.
“왜 물으시는 거예요? 도련님, 혹시 좋아하는 분이라도 생기셨어요?”
방 안에서 내리 앓은 데이몬에게 그런 사람이 생겼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시에나는 짓궂게 물었다. 데이몬은 화들짝 놀라 거세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얘기하다 보니 이런 이야기가 나온 거지 절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말할 건 아니야. 그냥 사람마다 이상형은 있는 법이니까 그게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야.”
강력하게 부정하는 도련님이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시에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자신의 이상형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사람이 많던 도시에 살았던 때는 너무 어렸고, 산골로 이사 오고 나서는 또래가 적어 친구를 사귈 기회도 많지 않았던지라 연인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니까 굳이 이상형을 꼽아 보자면…
<붉은 장미에 얽힌 비밀>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이자 데이몬의 형인 라르크 오웬 마르바스 정도일까.
그러나 그건 절대 데이몬의 앞에서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기에 시에나는 슬쩍 말을 돌렸다.
“자세히는 말할 수 없지만… 키는 185 정도에 검은 머리에 노란 눈, 영 앤 리치, 빅 앤 핸섬한 사람이 좋아요.”
“…엄청 자세한데? 영앤 리치, 빅 앤 핸섬은 뭐야.”
“젊고 돈 많고, 크고 잘생긴 사람이요.”
“…….”
데이몬은 그 말을 듣고 한참을 고민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리 가문은 다 키가 커. 내가 180을 넘는 건 금방일 거야.”
마르바스 황가의 우수함은 책에서 익히 본 바 있었다. 수도 없이 외모에 대한 묘사가 나왔으니까.
“그럼요. 도련님 키는 분명히 커지실 거예요. 밥만 잘 드신다면서요.”
아직 또래보다도 작은 키지만, 시에나는 알고 있었다. 열여덟이 된 그의 키가 190에 육박한다는 사실을. 그의 성장을 옆에서 계속 볼 수 있을까. 성인이 된 데이몬을 상상하는 시에나의 눈길이 아련해졌다.
단 한 번 자신의 편을 들어 준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고 밤길을 달린 데이몬이다. 간호하면서도 느꼈지만 데이몬은 그저 그 나이대보다 조금 더 일찍 철이 들 수밖에 없는 남자아이였다. 어리광 피우는 게 허락되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기에 조금 무뚝뚝해 보일 뿐, 속이 깊고 정이 많은 아이였다. 함께 있는 동안 열심히 데이몬을 교육 시켜 절대 그 책의 결말과도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겠다고 시에나는 굳게 결심했다.
똑똑.
문밖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에 시에나와 데이몬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차를 가져왔습니다.”
제인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시에나는 총총 달려 나가 문을 열고 제인으로부터 찻주전자와 찻잔을 건네받았다.
“와, 금방 만들었네. 정말 고마워, 제인.”
“아니야. 이 정도 가지고 뭘. 도련님은 좀 괜찮으셔?”
“응. 많이 나아지셨어. 차도 있으니 꾸준히 마시다 보면 괜찮아지겠지. 제인. 그런데 손이 왜 그래? 다쳤어?”
시에나의 시선에 제인의 상처가 들어왔다. 검지에 어설프게 천을 감아 놓았는데 그 사이로 비죽이 피가 배어들고 있었다.
“아아, 별거 아니야. 다듬다가 좀 베였는데, 금방 나을 거야.”
“아프겠다. 약이라도 바르지.”
“하하. 약이라니. 우리가 어떻게 약을 사. 도련님 정도 되어야 약도 살 수 있는 거지.”
아. 여기 책 속이지.
시에나는 자신이 있는 곳이 책 속 세계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이런 아주 작은 상처를 치료하는 데에도 큰돈이 들어간다. 한국이라면 약국에서 연고 하나만 사서 바르고 밴드를 붙이고 끝날 일을. 그래도 저 상처를 그대로 두었다가 덧나기라도 한다면 더 심각해질 텐데. 시에나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상처를 바라보자 제인이 그 손을 숨기며 배시시 웃었다.
“난 괜찮아. 이제 도련님한테 가 봐. 도련님이 너 오기만을 목 빼고 기다리신다. 좀 더 있으면 나한테 화내실걸.”
“에이, 아니야. 우리 도련님은 착해서 절대 안 그러셔.”
“아닐걸….”
“응? 뭐라구?”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제인이 어색하게 말끝을 흐렸지만 그녀의 상처에 집중하고 있던 시에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치료 방안에 대해 생각했다.
“제인. 이 상처 부분 깨끗이 물로 씻은 다음에 아까 내 바구니 안에 있던 톱니 모양 약초 있지? 그 약초를 으깨서 낸 생즙을 상처에 얹어 봐.”
“생즙을 상처에 얹으라고…?”
제인은 시에나의 제안이 당황스럽다는 듯 재차 물었다.
“응. 그 약초는 재생 효과가 뛰어나거든. 속는 셈 치고 한 번 발라 봐. 도련님도 차로 드시는 건데 바른다고 무슨 일 있겠어?”
시에나의 설득에 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볼게. 고마워 시에나.”
그러나 시에나의 말에 딱히 신빙성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뒤에서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도련님 때문이라는 게 더 가까웠다.
‘나가. 나가. 나가아아아아!’
저 눈빛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도련님은 시에나 앞에서만 양의 탈을 쓴 늑대가 되었다. 시에나와 번갈아 도련님을 간호하면서 제인은 데이몬이 시에나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몹시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일어나서 제인이 있으면 적나라하게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고 종일 시에나에 대해서만 물었다.
그런 데이몬의 태도에선 묘하게 비틀린 집착이 느껴져, 시에나의 앞에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무구한 눈빛을 하고 있는 데이몬을 보는 제인은 기분이 조금 착잡했다.
도련님이 착하고 순한 아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시에나 때문에 그런 연기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언제쯤 시에나는 깨닫게 될까.
데이몬이 사실 그렇게 착하고 순진하기만 한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어. 시에나. 이제 들어가 봐. 차 다 식겠다.”
“아. 정말이네. 알았어. 조금 이따 봐.”
이내 문이 닫히고 시에나는 데이몬이 있는 쪽을 향해 몸을 빙글 돌렸다. 뒤통수에 느껴지던 따가운 시선은 어느새 사라지고 데이몬이 순진무구한 눈동자로 시에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련님. 잠시 일어나셔서 차 좀 드셔 보세요. 제가 오늘 딴 약초로 끓인 거예요.”
시에나는 한 김 식은 차를 찻잔에 쪼르르 따랐다. 연두색 물이 예쁘게 든 찻물이 데이몬의 앞에 놓였다. 데이몬은 잠시 망설이다가 시에나의 얼굴을 바라본 후 이내 쭈욱 들이켰다.
“엑.”
맛이 제법 쓴지 인상을 찌푸리는 데이몬의 모습이 어린아이다워 시에나가 살풋 미소 지었다.
“맛없어.”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잖아요. 얼른 나으셔야 맛있는 것도 드시고 하죠.”
제인이 같이 준비해 준 달콤한 당밀 과자를 입 안에 쏙 넣어 주자 그제야 데이몬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이럴 때 보면 천상 어린아이 같았다.
다음에는 꿀이라도 한 스푼 넣어 줘야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시에나가 데이몬의 새카만 머리칼을 옆으로 넘겨 주었다. 하얗고 동그란 이마가 새맑은 추석 보름달을 꼭 닮아 있었다.
“시에나. 다음에 산에 갈 때는 나도 데려가.”
“네? 도련님을 산에요? 다치시기라고 하면 어쩌시려구요.”
“다들 가는 데를 난 왜 못 가? 한밤중에 말 타고 산을 몇 개나 넘었는데.”
그렇긴 하지만…
시에나가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대자 데이몬이 아련한 눈동자로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가면 방해가 되니까 그러는 거야? 그렇다면 방해되지 않게 멀리 떨어져 있을게.”
“방해라니요! 절대 아니에요. 그냥 저는 도련님은 산길이 익숙지 않으시니까 걱정돼서 그런 거죠.”
왜 또 맘 아프게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그러시나.
차라리 떼를 쓰고 바닥을 구르면서 조르면 단칼에 거절하겠는데, 누가 봐도 꽉 껴안아 주고 싶어질 듯한 안타까운 얼굴로 눈을 촉촉이 적시면서 부탁하면 아무리 시에나라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그렇다면 익숙해지면 되지. 누구나 처음은 있는 법이라고 시에나가 전에 그랬잖아.”
데이몬은 가끔 이렇게 쓸데없이 머리가 좋아서 문제였다. 어떨 때 보면 시에나와의 모든 대화를 거의 전부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시에나는 두 손 두 발 들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요. 대신 건강해지시면요.”
“응! 그럴게.”
해맑게 웃는 데이몬의 모습을 보며 시에나도 함께 미소 지었다. 이후 제법 좋은 분위기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문득 창문 밖에서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지?”
“제가 보고 올게요.”
시에나가 창문 가까이 다가가 까치발을 든 채 바깥 상황을 살폈다. 이내 시에나의 입에서도 탄성이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야?”
“로하엘 님이 사슴을 잡으셨나 봐요!”
창문 너머로 로하엘이 말을 끌고 돌아오고 있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갈색 말의 등 위에는 살이 통통하게 오른 사슴 한 마리가 얹혀 있었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그새 잡아 온 건지 의문이었다. 어지간한 실력자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단시간 안에 잡을 수 있을까. 허여멀건 한 스튜만 계속 먹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선물이었기에 로하엘은 첫 만남 때보다 더 격한 환영을 받고 있었다.
시에나의 옆에 다가온 데이몬이 함께 까치발을 든 채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로하엘이 고개를 들어 둘과 눈을 마주했다. 로하엘은 환하게 웃으며 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시에나도 반갑다는 듯이 마주 보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조금 이따 사슴 바비큐 드시러 내려오세요-!”
로하엘은 큰 소리로 외쳤다. 데이몬은 그 모습을 그저 싸늘하게 바라보다 대답 없이 창문을 툭 닫았다.
“도련님?”
들뜬 시에나와는 달리 데이몬의 기분은 저조해 보였다. 데이몬은 말없이 침대로 가서 몸을 퍽 소리 나게 누였다.
“도련님, 몸이 아프세요?”
“으므긋드 으느으….”
다시 열이 올랐나 싶어 얼굴에 손을 살짝 대 보았지만 미열만 살짝 남아 있을 뿐,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그러나 안심하긴 일렀다.
저번에도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방 안을 돌아다니다 픽 쓰러졌으니까. 이건 뭐 흑막 꿈나무가 아니라 거의 개복치 도련님이었다.
“도련님, 똑바로 누우셔야죠. 이렇게 엎어져 계시면 또 열 올라요.”
“시에나.”
데이몬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진지한 얼굴을 하고 시에나를 불렀다.
“네, 도련님.”
“시에나는 건강한 사람이 좋지?”
아까부터 왜 자꾸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실까?
“건강한 사람이요?”
“시에나도 구할 수 있고, 사슴도 사냥할 수 있고… 그런 사람 말이야.”
“글쎄요. 건강한 사람이 좋긴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프잖아요. 저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 사람이 건강하든 아프든 곁에 함께 있어 줄 것 같은데요?”
그렇게 말하며 시에나는 데이몬을 다시 천천히 눕혀 주었다. 순순히 침대 위에 누운 데이몬이 몽롱하게 시에나를 응시했다. 이불을 다시 끌어 올려 준 시에나가 데이몬을 토닥이며 말했다.
“도련님 또한 좋아하는 사람이 아프든 건강하든 곁에 함께 있고 싶지 않을까요?”
“그럼. 당연하지. 평생 내 곁에만 두고 아무 데도 못 가게 할 거야.”
아뇨, 그거 아닌데요.
미래가 몹시 위험해 보이는 데이몬에게 시에나는 할 말을 골랐다.
“감금은 범죄예요, 도련님.”
“감금이라니? 사랑하는 사람한테 왜 그런 짓을 해?”
“평생 곁에만 두신다면서요?”
“그 사람이 내 곁에 있을 때 어떤 부족함도 없게 만들어 주면 되잖아?”
“음… 그렇긴 하지만… 그 사람이 그걸 원하는지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시에나. 먹고 놀기만 하는 삶 어때?”
“엄청 좋죠?”
시에나가 냉큼 대답하자 데이몬이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럼 그 사람도 괜찮을 거야.”
“에이, 그 사람 생각은 다를지도 모르잖아요.”
“아닐걸. 그리고 그 사람이 내 곁에만 있기 싫어한다면, 내가 그 사람 곁에 있으면 되잖아?”
스토킹도 범죄예요, 도련님….
데이몬의 해맑은 대답에 시에나는 할 말을 잃었다. 도덕과 윤리 교육이 시급해 보였다. 어디서부터 교육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열이 내려가기만 하면 바로 가정교사를 들여야겠어.
시에나는 굳게 결심했다.
“시에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음… 도덕. 아니, 도련님의 열이 빨리 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요.”
시에나의 말에 데이몬의 표정이 대번에 시무룩해졌다. 축 처진 데이몬을 보며 실언을 했다 싶었는데, 데이몬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이번엔 이상하게도 그림자가 너무 끈질겨서.”
“그림자요…? 그게 무슨 소리세요?”
시에나는 도련님의 중2스러운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데이몬은 망설이다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톡 치며 말했다.
“어떤 검은 그림자 같은 게 내 심장을 갉아 먹는 느낌이야. 내가 조금만 정신을 놓치면 자꾸 내 몸을 빼앗으려 해. 그게 내 몸을 빼앗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어서 밀어내려고 하면 열이 나.”
허투루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열이 올라 헛소리를 하는구나 생각하고 말겠지만, 책 속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시에나로서는 간과할 수 없는 말이었다. 만약 데이몬을 바르게 키워 놓는다고 해도 정신을 그 그림자에게 빼앗겨 버리면 책과 같은 결말이 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믿기지 않지? 후. 그래서 남작은 나보고 악마라 하더라고. 악마의 새끼라서 악마를 안에 키우고 있는 거라고.”
“도련님….”
“난 그의 말대로 정말 악마일지도 몰라.”
데이몬의 씁쓸해 보이는 표정에 시에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털어놓을 사람이라고는 자신을 학대하는 남작밖에 없던 성에서 데이몬은 혼자 정말로 자신이 악마라 생각하며 자라 왔었겠지.
그의 사무치는 외로움을 어떻게 감히 공감한다 할 수 있을까.
시에나는 그저 데이몬을 꽉 끌어안았다. 헉,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은 절대 악마 같은 게 아니에요. 어떤 악마가 이렇게 자기가 악마인 거에 대해서 고민을 해요. 절대, 절대 아니에요.”
“시에나…?”
시에나의 눈에는 어느새 맑은 눈물이 고여 있었다. 가끔 데이몬은 이렇게 자신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그가 만약 진짜로 악마가 된다 한들 어찌 열두 살의 데이몬을 탓할 수 있을까.
데이몬은 그저 지켜 주는 이 하나 없는 곳에서 지속적인 폭력에 시달린 작은 아이였는데.
왜 맞는지도 모르고.
그저 자신이 잘못한 줄로만 알고.
“도련님은 그냥 조금 아픈 거예요. 비록 그게 정말 악마라고 해도 절대 도련님이 악마인 건 아니에요.”
“응….”
시에나의 품에 안겨 데이몬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 품이 정말로 따스해 데이몬은 어미의 품에 안긴 새끼 고양이가 된 것 같았다.
나른한 몸을 누인 데이몬이 시에나의 관자놀이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가만히 넘겨 보았다.
밝은 금발이 걷히고 푸른 눈이 그를 응시했다. 시에나의 눈은 신기했다. 푸른색인데도 따뜻했다. 그렇다고 푸른 불길 같은 느낌은 아니고, 따뜻한 물을 채운 욕조에 둥실둥실 떠 있는 기분이었다. 사람의 체온 같은 따스함.
데이몬은 그래서 시에나의 눈이 좋았다. 그 눈길을 오래도록 느끼고 싶다 생각하며 그는 다시 다가오는 잠에 스르륵, 빠졌다.
“도련님?”
시에나가 불렀건만 데이몬은 답이 없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와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이 그가 까무룩 잠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혹 다시 고열에 시달리는 건가 싶어 시에나는 급히 데이몬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다행히 미열만 조금 있어 시에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오늘 열이 오른 상태로 산에 가겠다며 성인 몇에게 붙잡혀 악을 썼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대화하다가 이렇게 바로 잠들어 버릴 줄은 몰랐지만. 정말이지 데이몬은 사람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데이몬의 잠든 옆얼굴을 보며 시에나는 깊은 상념에 잠겼다. 그의 말이 거짓말일 가능성은 적었다.
자신이 개입해 데이몬의 삶을 바꿨으므로 그 악마가 데이몬의 몸을 열여덟에 차지하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정말로 악마가 그의 육체를 차지한다면, 가장 먼저 날아가는 건 이 저택이겠지.
저택이 날아가는 묘사를 떠올리던 시에나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으….”
“도련님?”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데이몬에게서 또렷한 신음이 들려왔다. 시에나는 혹시나 싶어 다시 한번 데이몬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앗, 뜨거!”
시에나는 불에 달군 쇠주전자를 만진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데이몬의 이마에서 손을 떼었다. 잠깐 상념에 잠겨 있던 사이 데이몬의 몸은 놀랄 정도로 뜨거워져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열이 오르고도 살 수 있을까 걱정될 정도로 온몸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흔들의자에 앉은 사람처럼 데이몬의 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삐걱, 삐걱. 침대 프레임이 비명을 질렀다.
이따금 데이몬은 눈을 뜨는 것처럼 보였지만 대부분 흰자였고, 가끔씩 보이는 노란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시에나가 급히 데이몬을 깨우기 위해 몸을 흔들었으나 전혀 반응이 없었다.
“도련님! 정신 좀 차려 보세요.”
더럭 겁이 난 시에나가 엉겁결에 데이몬의 뺨을 내리쳤다.
철썩!
그러나 그 힘이 너무 강했을까. 데이몬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떨림도 그대로 멎었다. 방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너, 너무 세게 쳤나.
시에나가 당황하며 다시 고개를 원래대로 해 놓았다. 조금 전만 해도 미열이었는데, 어떻게 사람의 몸이 이렇게 갑자기 뜨거워질 수 있는 거지? 의원을 부르기 위해 시에나가 벌떡 일어선 순간 데이몬이 시에나의 손목을 강하게 잡아챘다.
“엄마야!”
귀신에게 손목이라도 잡힌 듯 기겁한 시에나를 데이몬이 멍한 눈으로 응시했다.
“도, 도련님! 일어나셨군요. 열이 갑자기 너무 심해져서 사람을 불러오려고요.”
시에나의 말에도 데이몬은 손목을 쥔 손아귀 힘을 전혀 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거세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묵직하게 전해져 오는 고통에 시에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도련님…?”
“아프잖아.”
“네?”
“네가 때린 여기, 아프다고.”
데이몬은 자신의 볼에 시에나의 손을 가져다 대며 칭얼대듯 말했다.
아까 시에나가 때린 뺨이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죄송해요. 갑자기 도련님이 열이 너무 나서….”
“날 때린 건 네가 처음이야.”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진부한 대사 같다는 생각을 하며 시에나가 데이몬의 안색을 살폈다.
제정신이신가?
열이 이렇게 나니 정상일 리가 없지만 데이몬은 의외로 멀쩡해 보였다. 데이몬을 훑어보던 시에나가 평소의 데이몬과 다르게 느껴지는 부분을 찾았다. 고양이의 눈처럼 세로로 쭉 찢어진 눈동자.
평소의 맑은 눈동자가 아닌 묘하게 위험해 보이는 노란 눈동자를 보며 시에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죄송해요, 도련님.”
“괜찮아. 탓하려고 한 거 아니야. 마음에 들어.”
그 순간 시에나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자신의 앞에 있는 도련님이 제가 지금까지 알던 데이몬이 아닌 것 같았다.
눈앞에 있는 건 틀림없이 아까부터 자신이 지켜본 데이몬인데도.
“도련님 열이 지금 너무 많이 나요. 아무래도 의원을 한 번 더 불러와야….”
“그럴 필요 없어. 이 열은 곧 내리니까. 그것보다 날 한 번 더 봐 주는 게 어때? 네가 날 보는 게 보고 싶거든.”
“…네?”
데이몬은 마치 의사라도 된 듯이 자신의 몸을 냉정하게 평가했다. 열이 펄펄 끓는 자신의 몸뚱이를 살피기보다 시에나의 시선을 한 번 더 받고 싶어 하는 듯한 욕구가 눈동자에 절절 끓어올랐다.
오싹-.
소름이 돋을 만큼 강렬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노란 눈동자에 시에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호랑이 앞에 선 개가 꼬리를 말고 도망치듯 희생양의 몸에 각인된 포식자에 대한 공포가 시에나를 사로잡았다. 시에나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끼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시에나가 달달 떠는 걸 바라보던 데이몬이 온몸이 녹아내릴 듯이 녹작지근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꺾일 듯 가는 손을 들어 시에나의 뺨을 슥 쓸었다. 분명 자신보다 작은 데이몬이 갑자기 거인처럼 크게 느껴졌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싶을 만큼 두려운데도 몸이 딱딱하게 굳어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었다.
“아아, 시끄러워. 네가 남작 말고 다른 애한테 내 얘기를 하니까 궁금해진 거잖아. 다 너 때문이니까 좀 조용히 좀 해.”
데이몬은 갑자기 시에나의 눈앞에서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헉.
시에나는 데이몬이 잠시 자신에게 시선을 거둔 후에야 참았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데이몬도 그 사실을 알아챘는지 재미있다는 듯 눈을 휘었다. 그 모습은 아직 어린아이에게 이런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지만… 무언가… 그래, 요사스러웠다.
“좋네, 그 눈빛. 다음에 눈을 뜨면 또 네가 이렇게 눈앞에 있으면 좋겠어.”
데이몬은 그 말을 끝으로 시에나에게 확 다가왔다. 그의 숨결이 시에나의 살갗에 닿을 정도로 둘의 사이가 가까워졌다. 시에나는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촉-.
감은 눈두덩이 위에 무언가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속박에라도 걸린 듯 움직일 수 없는 몸과 달리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솜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더 녹진한 감촉.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시에나는 그가 자신의 눈 위에 입을 맞추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눈꺼풀 위로 와 닿던 그 감촉이 사라지고 시에나가 멍하니 눈을 떴을 때 데이몬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꺅! 도련님-!”
침대 헤드에 머리를 박을까 싶어 시에나는 놀란 마음에 달려가 데이몬의 뒤통수를 잡았다. 덕분에 데이몬의 머리는 푹신한 베개 위에 안착할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도 잠시, 시에나는 그의 몸을 둘러싸듯이 끓었던 고열이 감쪽같이 사라진 걸 알게 되었다. 데이몬은 다시 평소의 아이와 같은 표정으로 돌아가 쌕쌕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천사 같이 잠든 데이몬을 바라보며 시에나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본인이 겪은 게 모두 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믿기 힘든 일들의 연속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시에나는 오른쪽 눈꺼풀 위를 가만히 매만졌다. 아직도 자신의 눈 위로 닿던 그의 감촉이 선명하다.
데이몬이 고열에 시달리다가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행동을 한 걸까? 하지만 그렇다면 평소와 다르게 찢어져 있던 그의 눈동자는 뭐지?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서늘한 그 분위기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아까의 상황을 떠올리던 시에나가 오한이 돋는지 제 몸을 안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무나 많은 의문이 들었지만 한 가지는 명확했다.
이 일은, 누구에게도 알려져서는 안 된다.
* * *
“시에나 양, 괜찮습니까? 힘이 없네요.”
오랜만에 먹는 사슴 스튜인데도 시에나는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계속 무언가에 골몰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져나간 식당은 한산했고, 늦게 온 시에나와 오늘의 주인공이었던 로하엘 그리고 뒷정리를 하는 사람들 몇몇이 식당에 남아 있었다.
데이몬은 그 이후로 완전히 정상 체온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아주 편안한 상태인지 깨지도 않고 아주 푹 잠들어 있었다. 도련님의 상태가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밥도 안 먹고 그 곁을 지키는 시에나가 답답했는지 식사를 하고 온 제인이 억지로 시에나를 식당으로 밀어 넣었다.
이대로는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아 시에나는 못 이기는 척 식당으로 내려왔다. 식당에 오고 나서도 아까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던 시에나가 로하엘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죄송해요. 생각할 게 있어서 좀….”
“괜찮습니다. 숙성이 덜 돼서 고기가 좀 질기죠?”
“아니요! 고기는 정말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시에나가 그렇게 말하며 스튜를 입 안으로 호록 집어넣었다. 감칠맛 나는 스튜의 맛이 혀끝에서 진하게 느껴졌다. 사용인이 적어진 탓에 사슴 한 마리로도 모두가 양껏 먹을 수 있었다. 늦게 온 시에나에게도 큰 고깃덩어리가 들어가 있는 스튜가 주어질 만큼.
“로하엘 님은 피곤하지 않으세요? 계속 여기 계셨다면서요.”
“사람들이 인사를 하기에는 방 안보다는 식당이 나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로하엘이 빙긋 웃었다. 시에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하엘은 지금 이 저택의 봄바람 같은 존재였다. 남작이 일으킨 매서운 겨울바람이 지나가고, 딱딱한 땅을 뚫고 갓 나온 새싹만큼이나 힘 있고 따사로운 봄바람.
지금보다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주는 사람.
사람들은 로하엘로 인해 사기를 얻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사람이 적은 식당 안은 지금까지 시에나가 봐 왔던 어느 때보다 활기찼다.
사용인들은 웃으며 식탁을 치웠고, 작게 노래하며 복도를 걸었다. 시에나가 정말 원했던 풍경이었다. 만들고 싶어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유지하게 만드는 것에 그친 걸 로하엘은 너무나 간단하게 해냈다. 대단하다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입이 조금 썼다.
“로하엘 님은 정말 대단하세요.”
“네? 갑자기 제 칭찬인가요?”
“반나절 만에 이 성을 이렇게 바꾸셨잖아요.”
어떤 뜻인지 대충 알아들은 로하엘이 눈을 가늘게 뜨며 시에나를 응시했다.
“정말 대단한 건 시에나 양이죠.”
“제가요? 저는 아무것도 못 했는걸요.”
“아무것도요?”
“네. 저는 사람들이 가는 걸 잠시 유예했을 뿐이지, 그 마음까지 붙잡진 못했으니까요. 로하엘 님이 오시기 전에 계속 사람들은 한숨 쉬고 불안해했어요. 그런데 로하엘 님이 오시자마자 다 저렇게 불안함이 싹 가신 얼굴로 웃고 있잖아요. 다 로하엘 님 덕분이에요.”
“시에나 양. 저는 성인이고 공작님께 받은 돈도 있고, 지킬 만한 힘도 있어요. 누구라도 안심시킬 수 있는 사람이죠. 그렇지만 시에나 양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사람들을 붙잡아 일상으로 돌아가게 하고, 아픈 도련님을 위해 이 성을 지켜 줬어요. 저는 시에나 양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로하엘은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에서는 그 진심이 묻어났다.
아. 이 사람은 어쩜 말을 이렇게 예쁘게 할까.
조금 전까지 로하엘을 질투하던 자신이 한심해지는 것 같았다. 시에나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삼키기 위해 옆에 있는 빵을 빠른 속도로 넘겼다.
“컥… 켁….”
그러다 저도 모르게 목이 메어 가슴을 치자 로하엘이 물을 시에나에게 건네주었다. 시에나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물맛은 달았다. 그러나 기분은 영 쓰기만 했다. 물 한 잔을 다 비운 시에나가 감정을 가라앉힌 채 그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과창이세요.”
세상에, 코 먹은 소리가 제대로 났다.
로하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앞에 놓인 차를 홀짝였다.
배려까지 훌륭하네, 젠장.
“제가 지금 마시고 있는 이 차, 시에나 양이 직접 딴 약초로 만든 차입니다. 향긋하고 맛이 좋아요.”
고개를 들고 보니 찻잔 안에 별 모양의 푸른 꽃이 송송 떠 있었다. 그걸 보는 시에나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아, 보리지 꽃이군요.”
“네. 살짝 오이 향이 나서 독특하면서도 맛있네요.”
오이 향은 보리지 꽃의 특징이었다. 시에나는 멍하니 보리지 꽃을 보다 무언가 생각난 듯 로하엘을 올려다보았다.
“혹시 이 차를 다른 분들도 드셨나요?”
“네. 다들 꽃에서 오이 맛이 나는 게 신기하다면서 홀짝홀짝 잘 드시던걸요.”
“아하하. 그렇군요.”
시에나는 여전히 신이 나 있는 사용인들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시에나가 웃음을 터뜨린 이유가 궁금한지 로하엘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에나는 비밀이라는 듯 방글방글 웃을 뿐, 답해 주지는 않았다.
보리지는 쾌활초라고도 해서 꽃과 잎으로 차나 술을 만들어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는 효과가 있다.
즉, 사람들이 저렇게 유난히 기분 좋은 이유에는 오직 로하엘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덕도 조금은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다 싶어 기분이 나아졌다.
그러나 로하엘의 앞에서 꺼내기에 적절한 화제는 아니었기에 시에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참, 로하엘 님. 혹시 공작님의 성에는 가정교사가 있나요?”
“가정교사요? 제가 오늘 들었던 공작성에 뭐 있냐는 물음 중에 가장 재밌는 질문이네요.”
공작성에는 뭐가 있냐는 질문을 사람들에게 수십 번은 들었을 로하엘에게 슬쩍 동정을 표하며 시에나가 본론을 꺼내 들었다.
“지금까지 도련님은 남작님께 교육… 을 받았었거든요. 그런데 이젠 안 계시니 다른 분을 구해야 하는데, 혹시 공작성에 계시지 않을까 싶어 여쭈었어요.”
로하엘도 공작가에서 차출했으니 가정교사도 공작가에서 차출하면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 시에나의 말뜻을 알아들은 로하엘이 산뜻하게 말했다.
“제가 하면 되겠네요.”
“네? 로하엘 님이 가정교사를요?”
“네. 저 이래 보여도 해밀턴 아카데미 수석 졸업생이거든요.”
“네에?”
시에나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해밀턴 아카데미는 시에나도 알고 있는 아카데미였다. 황족과 고위 귀족들만 갈 수 있는 아카데미로,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해 내는 곳으로 유명했다. 특히나 그 아카데미의 수석 졸업생은 제국의 고위 관직에 오르기 마련이었다. 시에나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이유는 책 속에서 여주와 남주가 처음으로 만나는 곳이 바로 해밀턴 아카데미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태생부터 기사로 보이는 로하엘이 수석 졸업생이라니. 실례지만 정말로 믿기지 않았다. 로하엘은 짐짓 상처받은 척하며 말했다.
“믿지 않으시는군요. 저같이 근육으로 가득한 사람은 낙제만 면하고 겨우 졸업할 거라고 생각하신 거죠?”
“아아아아니, 절대 아니에요. 그냥 좀 놀랐을 뿐이에요. 제 앞에 그렇게 엄청난 분이 계신 줄은 몰랐으니까….”
“제가 좀 엄청나긴 하죠. 수많은 낙제생 친구들을 모아 놓고 가르쳐서 졸업까지 시킨 사람이거든요. 가르치는 것도 자신 있어요.”
자신 있게 말하는 걸로 봐서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닌 듯했다. 시에나는 얼떨결에 구해진 최고의 가정교사가 믿기지 않는지 로하엘을 빤히 응시했다. 그것이 시에나가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으로 보였는지 로하엘이 물었다.
“뭣하면 제가 가정교사 자격이 있는지 시험이라도 보시겠어요?”
“아니요! 제가 뭐라고 시험을 치르겠어요. 그런데 업무도 많으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이날을 위해 체력을 길러 왔구나 생각해야죠. 전쟁터에서 사흘 내리 밤을 새운 적도 있는데요, 뭐.”
“아…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그래도 로하엘 님이 맡아 주신다니 안심이 돼요. 감사합니다.”
교육이란 명목하에 폭력을 저질러 왔던 남작이었다. 시에나의 말이 어떤 뜻인지 알아챈 로하엘이 보리지 차를 홀짝 들이켜고는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저는 정말 상냥하답니다.”
* * *
“허리가 내려왔습니다! 허리는 굽히는 게 아니라 세우는 겁니다, 도련님.”
그렇게 말하며 로하엘이 데이몬의 허리를 목검으로 강타했다. 물론 속이 비어 있는 목검이라 소리만 요란할 뿐, 별로 아프지는 않았지만 맞는 입장에서는 충분히 기분 나쁠 수 있었다. 데이몬이 이를 악물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로하엘은 악에 받친 아이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유려하게 피하며 다시 데이몬의 어깨로 목검을 내려쳤다.
따악!
경쾌한 소리가 공터를 울렸다. 로하엘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이런, 한 번 더 죽으셨습니다.”
데이몬은 가쁜 숨을 들이쉬며 잠시 멈춰 서 독기 품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로하엘이 그려 놓은 원 밖에서 시에나는 그 모습을 안절부절못하고 지켜보고 있었다. 벌써 저런 대련이 세 시간째였다. 체력도 기력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 데이몬은 지금 악과 깡으로만 버티고 있었다.
큰 열병을 앓고 난 지 사흘 만에 움직여도 괜찮다는 의원의 허락이 떨어진 후 데이몬은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로하엘은 그가 보였던 자신감만큼이나 좋은 선생이 되어 주었다.
역사, 수학, 고대어, 검술 등 모든 분야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화술도 제법 뛰어난 것 같았다. 로하엘의 수업을 듣기 싫다고 악을 쓰는 데이몬을 잠시 방으로 데려가 면담을 했는데, 면담 한 번 했다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수업에 참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해했지만 로하엘은 둘만의 비밀이라고 하며 시에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수업이 진행되자 시에나는 데이몬이 정말 영리한 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언뜻 들어본 수업은 열두 살짜리가 배울 만한 수준이 아니었는데도 데이몬은 제법 잘 따라가고 있는 듯 보였다. 그래도 혹 힘든 점이 있을까 봐 로하엘에게 물었을 때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데이몬 도련님은 천재입니다. 한 번 들은 건 절대 잊어버리지 않아요. 그리고 그걸 어떻게 응용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꿰뚫고 계시죠. 천재라고 불렸던 제가 부끄러워질 정도네요.”
“그 정도인가요? 기억력이 좋으신 건 알고 있었지만… 로하엘 님도 수석 졸업생이셨잖아요.”
남작의 앞에서 성서를 달달 외우고 있던 데이몬을 떠올리면 그가 머리가 나쁘지 않다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외우는 걸 뛰어넘어 응용까지 곧잘 할 정도라니.
그런 시에나의 물음에 로하엘은 씁쓸한 듯,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더군요. 아마 곧 저로는 부족해질 거예요. 지금이야 기초 체력이 한참 부족해 검술이 별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녀석은 엄청난 검사가 될 겁니다.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는다면 어떻게 성장할지 정말 기대가 됩니다.”
아카데미.
자신이 알기로 데이몬은 해밀턴 아카데미에 다니지 않았다.
집안에서 기초 교육을 마친 귀족 집안의 자식들은 12~13살 때부터 모두 아카데미에 다녀야 하는데, 남작은 공작이 보낸 입학금과 기부금을 꿀꺽하고 데이몬을 성 안에 가둬 놓았다.
정말이지 간도 큰 인간이었다.
후우.
한숨을 내쉬는 시에나의 눈앞에 데이몬이 털썩 쓰러지는 장면이 보였다.
“도련님!”
깜짝 놀란 시에나가 벌떡 일어났다. 탈진해서 쓰러진 건가 싶어 로하엘이 상태를 살피려 가까이 다가간 순간, 데이몬이 어느새 손에 쥐고 있던 모래를 그의 눈앞에 확 뿌렸다.
“윽…!”
모래바람으로 인해 시야가 차단된 로하엘이 잠시 멈칫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데이몬의 목검이 그의 머리를 향해 쇄도했다.
“어딜.”
데이몬의 혼신을 담은 공격을 옆으로 살짝 비켜서며 피한 로하엘이 이내 그의 머리 위에 목검을 내리쳤다.
당황한 것인지 계속해서 갈무리해 두고 있었던 푸른 검기가 로하엘의 목검에 잠시 실렸다.
따아악!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타격음에 시에나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윽….”
데이몬은 몸을 비틀거리면서도 로하엘을 표독스럽게 노려보다 스르륵,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이번엔 진짜 쓰러진 듯했다. 시에나가 급히 달려가 데이몬의 상태를 살폈다.
로하엘이 그녀의 뒤에서 작게 헉헉 숨소리를 내었다. 언제나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던 로하엘의 얼굴에는 어느새 그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데이몬은 시체처럼 흙바닥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시에나가 흔들어 보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대로 기절한 듯했다. 어찌나 열심히 뛰었는지 이미 기절했는데도 온몸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가 사방팔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정신력이었다.
“땅에서 몸 좀 식히라고 두세요. 나 참. 스승을 속이려고 들다니.”
그렇게 말하면서도 로하엘은 데이몬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 귀엽다는 듯 그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데이몬이 깨어나 있다면 난리를 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실신 중이었다. 시에나는 발갛게 달아오른 그의 뺨에 시원한 물주머니를 대 주었다. 로하엘과 수업을 시작했을 때부터 자리 잡은 미간의 주름이 시원한 물주머니에 의해 조금 펴졌다. 그런 데이몬의 모습을 바라보며 로하엘이 허탈하게 말했다.
“정말 이젠 곧 저로서는 부족해질지도 모르겠군요.”
“네? 데이몬은 아예 로하엘 님께는 손도 대지 못했잖아요?”
“하하. 벌써 손을 댈 정도라면 저는 아마 기사를 포기했어야 했을 겁니다. 키가 제 가슴께밖에 안 오는 녀석이지 않습니까. 어떤 무술이든 체격 차이는 무시할 수 없거든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도련님은 오히려 자신의 체격을 장점으로 이용해 재빠르게 피하면서 저한테 다가왔죠. 제가 기사라면 도련님은 암살자에 가깝다 할까요. 거참. 모래 사이로 다가오는 목검을 본 순간, 등에서 식은땀이 쭈욱 나서 저도 모르게 진지하게 받아쳤습니다. 옅은 검기를 머리에 정통으로 맞았으니 아마 30분 정도는 기절해 있을 겁니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도련님에게 당할 뻔한 이야기를 술술 내뱉으며 로하엘은 그가 기특해 마지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에나는 검술 수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여기까지 올라온 데이몬도 그렇지만, 순수하게 제자의 능력을 칭찬하는 로하엘도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는 천생 선생이었다. 로하엘이 이마에 흘러내린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후, 숨을 내쉬었다. 그런 로하엘에게 시에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배고프시지 않으세요?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어요.”
“사실 엄청 고팠는데 도련님이 끝내질 않는 탓에 빠르게 기절시키고 밥 먹으러 갈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어요.”
실천한 것 같은데.
시에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수상하다는 듯 로하엘을 바라보자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이실직고했다.
“하하. 반쯤은 고의였을지도 모르겠네요. 배가 너무 고팠거든요. 도련님은 제가 업을 테니 밥 먹으러 가시죠.”
로하엘은 여전히 추욱 늘어진 데이몬을 가볍게 안아 올리며 식당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데이몬을 안고 걷던 로하엘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세요?”
“도련님, 꽤 무거워졌네요.”
“아, 키가 커지셔서 그럴 거예요. 요즘 자고 일어나면 키가 커 있는 탓에 밤마다 무릎이 삐걱거리신대요.”
“다 시에나가 잘 먹인 덕분입니다. 대련 때마다 너무 팔팔해서 늙은 제가 힘들어요.”
로하엘이 죽는소리를 했지만 데이몬과 대련하며 가장 기쁜 건 오히려 그라는 걸 알고 있기에 시에나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데이몬이 아플 때에는 좀이 쑤시는지 산을 헤집고 다니며 매일 동물을 한 마리씩 잡아 오더니, 기초 훈련을 마치고 검술 대련에 들어가자 호적수를 만난 사람처럼 대련에 매달렸다.
천재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천재라는 걸까. 그 때문에 아쉬워진 건 사슴과 멧돼지를 먹지 못하게 된 사용인들이었다.
식당에 들어서자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냄새를 맡았는지 데이몬이 기가 막힌 타이밍에 눈을 떴다.
“뭐야, 네가 날 왜 안고 있어.”
“일어나셨습니까, 꼬마 도련님?”
마치 연인을 대하는 듯한 부드러운 말씨로 말하는 로하엘을 보며 데이몬이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려는 데이몬을 로하엘이 더 꽉 안았다.
“이거 안 놔!?”
“대련하다 기절한 꼬마 도련님으로 대우해 드릴 테니 가만히 계세요.”
“악! 누구보고 자꾸 꼬마라는 거야!”
“그럼… 아가?”
“자다 칼침 맞고 싶지 않으면 당장 놔.”
“거참, 까칠하시긴. 예. 놨습니다.”
데이몬의 협박이 먹혀들었는지 로하엘이 결국 데이몬을 툭 놔주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 다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데이몬은 고양이처럼 조용하고 가볍게 착지하고는 로하엘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물론 그런 데이몬의 눈빛에도 로하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박수를 쳐 줄 만큼 우아한 자세에 시에나가 감탄했다.
“도련님 굉장해요…!”
“…뭐, 이 정도 가지고.”
시에나의 말에 금방 헤실 풀어진 데이몬이 식탁 앞에서 시에나에게 의자를 빼 주었다. 부담스러운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제는 익숙해진 배려에 시에나가 감사를 표하며 자리에 앉았다.
“감사해요.”
귀족을 비롯한 레이디를 대하는 예법을 배운 날부터 데이몬은 시에나가 앉기 편하도록 항상 의자를 빼 주었다. 처음이야 당황해서 몇 번 거절했지만, 몇 주가 지나다 보니 거절하기에도 지쳐 이젠 당연하게 의자에 앉아 감사를 표하며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원래 이 시간에는 빨래와 청소를 해야 했지만, 도련님의 전속 하녀가 되며 모든 업무에서 대부분 해방되었다.
전속 하녀라고 해 봤자 옷 갈아입는 건 혼자 할 수 있다고 강력하게 거부하고, 밥 먹는 건 다 컸으니 알아서 잘 먹고, 가르치는 건 로하엘이 해 주기 때문에 시에나는 거의 할 일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할 일이라 봤자 데이몬의 방과 욕실을 쓸고 닦는 정도일까.
데이몬이 워낙 깔끔을 떠는 성격이라 뭘 더럽히지 않아서 일과는 항상 한 시간 내로 끝났다. 나머지는 함께 식사를 하고, 공부할 때 옆에 있고, 대련할 때 물과 수건을 건네주고, 자기 전 잠시 대화를 나누는 정도였다. 이렇게 되니 놀고먹는 걸로 보일 수도 있어 고까워하는 사용인들도 있을 법했지만, 사람들은 시에나가 데이몬의 전속 하녀가 된 것에 정말 고마워했다.
특히 제인은 반쯤 눈물까지 흘리며 미안하고 고맙다 말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도 양은 넉넉히 준비했습니다-.”
오늘의 식사 당번인 사라가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들을 가져와 내려놓았다.
“사라. 맛있게 잘 먹을게.”
“별말씀을. 참, 그때 준 약초 요긴하게 잘 썼어.”
시에나가 인사하자 사라가 소곤대며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로하엘이 온 지 약 사흘 후 운영비를 훔쳐 간 범인들이 잡히고, 성안의 생활은 눈에 띄게 편안해졌다. 그들이 훔쳐 간 돈은 생각보다 큰돈이었다.
남작은 지금까지 황실에서 나온 돈을 야금야금 횡령해 왔던 모양이었다. 이쯤 되면 남작의 배 안에 있었던 건 전부 간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운영비의 몇 년 치 예산이 한꺼번에 생기자 로하엘은 데이몬과 상의 끝에 과감하게 영지 보수와 성의 리모델링을 시작했다.
대공사가 시작되자 돈이 많이 생겼다고 해서 너무 과하게 쓰는 건 아닌가 걱정도 들었지만, 공작님께서 빌리는 형태의 돈 외에도 힘들 테니 도와주라며 사비를 털어 보내 주신 금전이 상당했기에 가능했다.
공작님의 화끈함에 감동받은 시에나는 적극적으로 성의 리모델링을 도왔고, 덕분에 성은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확 바뀌게 되었다. 낡은 나무에서 가루가 떨어져 매일 청소를 해야 했던 삶도, 깨져서 휑하니 비어 있던 창문도, 촌스러운 붉은 벽지도 이젠 모두 안녕이었다.
은은한 베이지 톤의 벽지가 성안을 감싸고, 튼튼하고 깨끗한 유리가 창문에 걸렸다.
밖에서 볼 때 음침함의 끝을 달렸던 성도 보수 후 예쁘게 칠해 놓아 시에나는 이젠 가끔 자신이 잠시 디즈니랜드에 놀러 온 건 아닐까 하는 착각까지 들었다.
사용인들에 대한 월급과 휴식 시간이 늘어나자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성의 사용인으로 자원해 일과 외의 여가 시간이 많아졌다.
중세판 워라밸이랄까.
여유 시간이 생긴 시에나는 종종 산에 올라 약초를 따와 아픈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산에는 쓸 만한 약초들이 잔뜩 있었다.
몰라서 병을 낫게 할 약초들을 앞에 두고 생으로 병을 앓았던 것이다. 시에나는 그게 안타까워 사람들에게 약초에 대한 몇 가지 사용법을 알려 주었다.
약초를 찧어 붙이거나, 차로 끓여 마시는 정도의 간단한 정보인데도 신전에서 나온 비싼 약값을 감당하지 못해 아파도 약을 사지 못했던 사람들은 깊게 감사를 표했다.
덕분에 성내에서 시에나표 약초상은 꽤 유명세를 떨쳤다. 아버지에게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이 이 판타지 세계에서 유용하게 쓰이다니, 사람 인생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또 필요하면 말해. 많이 있으니까.”
“그래, 다음에도 신세 좀 질게.”
시에나는 생긋 웃으며 사라에게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사라는 이내 다른 음식을 가져오기 위해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사라와 이야기하는 새 로하엘과 데이몬의 접시가 반쯤 비어 있었다.
미디움 레어로 구운 소고기 스테이크가 나이프질 한 번에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세 시간 넘게 대련을 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시에나 역시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쿡 찍고 칼질을 시작했다.
막 스테이크 한 조각을 꿀떡 입 안에 넣은 데이몬이 물었다.
“시에나. 끝나고 나랑 영지 시찰 가지 않을래?”
“음… 좋아요.”
일주일에 두세 번씩 으레 하는 일인데도 데이몬은 시에나의 대답에 함빡 웃었다. 땀과 모래를 얼굴에 잔뜩 묻혀 놓고 웃는 모습이 영락없는 개구쟁이였다.
“그럼 로하엘 님도 같이 가시나요?”
저번 시찰에 함께 했었기에 시에나는 의례적으로 로하엘에게 물었다. 그는 그새 표정이 바뀌어 자신을 노려보는 데이몬을 입꼬리를 올린 채 응시했다.
“흐음. 글쎄요. 어떻게 할까요.”
“오늘 저한테 당하실 정도로 실력도 떨어지셨던데, 스승님께서는 검술 연습을 더 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생전 안 하던 존대까지 하며 데이몬이 그렇게 말하자 로하엘은 피식 웃었다.
“진검이었다면 오늘 저한테 열두 번은 넘게 죽었을 분께 들으니 설득력은 조금 떨어지는군요.”
“검을 배운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저한테 이겨서 좋으시겠습니다.”
“너무 좋습니다. 도련님 실력을 보니 앞으로 향후 20년간은 제가 이길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성장이 너무 느리십니다, 도련님.”
데이몬이 세모눈이 되어 로하엘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썰 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식당이 데이몬의 살기로 인해 단박에 흉흉해졌다.
음식을 가져오던 사라까지 움찔하며 굳을 정도였다. 보다 못한 시에나가 데이몬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도련님.”
“…잘못했어요.”
시에나의 말 한마디에 식당 전체를 감싸고 있던 살기가 스르륵 사라졌다. 데이몬은 시에나의 말 한마디에 그 즉시 꼬리를 말더니 억울하다는 듯 포오, 한숨을 쉬었다. 한숨을 쉬고 싶은 건 시에나였다. 발끈하는 데이몬도 그렇지만 어린애를 자꾸 놀리는 로하엘도 문제였다.
시에나는 이 사이에 껴서 말리다 말리다 못해 결국에는 화를 내며 또 이렇게 싸우면 일을 확 그만둬 버리겠다 엄포를 놓았다. 둘은 꼼짝도 못 하고 시에나에게 연신 사과하며 하루 종일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그 후로 둘은 아옹다옹하긴 했지만 절대 선을 넘지는 않았다. 어느새 앞에 놓인 접시를 깨끗이 비우고 두 번째 접시를 시작한 로하엘이 말했다.
“저는 역시 오늘 안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바쁜 일이 있으세요?”
“그런 건 아니고, 할 일을 좀 끝내 놓고 공작님께 서신이 와서 답장을 쓰려고요.”
“그렇군요.”
“공작령 주변 몬스터 토벌이 끝나 조만간 마르바스 성에 한 번 방문하신다고 합니다. 아마 일주일 내로 오실 것 같아요.”
“다행이에요. 다친 곳은 없으시겠죠?”
“그분을 누가 다치게 하겠습니까. 온몸이 오리하르콘처럼 단단한 분이신걸요. 트롤이랑 박치기를 해도 이기실 수 있을 겁니다.”
로하엘의 말에 시에나가 키득거렸다.
“그렇군요.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겠네요. 오시는 날이 확정되면 말씀해 주세요.”
“평소처럼 하면 돼. 시에나는 충분히 잘해 주고 있으니까.”
“데이몬 도련님이 하신 말이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데이몬이 먼저 선수를 친 게 약이 올랐는지 로하엘이 그를 슬쩍 흘겨보았지만 데이몬은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미운 정이 제법 든 둘이었다.
* * *
“후우. 오늘도 제법 많이 돌았네요.”
시에나가 어느새 이마 위로 흘러내린 땀을 소매로 훔치며 말했다. 영지 시찰을 할 때에는 보통 마차를 타거나 걸어 다니며 유지 보수할 곳은 없는지 찾아다녔다.
성벽이 오래된 만큼 무척 낡아 있어 오늘도 보수할 곳을 적은 장소가 종이 안에 한가득이었다. 종이를 돌돌 말아 가방에 쏙 집어넣은 데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이제 슬슬 돌아갈까요?”
“응… 좋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데이몬은 뒤에 있는 곳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뭐가 있나 싶어 뒤를 돌아보자 좌판대에 놓고 파는 꼬치집이 보였다.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다들 소스를 입에 잔뜩 묻히고 까르르 웃고 있었다. 앗, 저것은 모든 판타지 소설에 한 번쯤 나온다는 평민들의 꼬치집이 아닌가.
무슨 고기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지만 평생 고급스러운 음식만 먹고 살아온 귀족들조차 반하게 만드는 소스가 발려 있다는 바로 그 꼬치?
예전 책에서 본 꼬치집에 대한 묘사를 떠올린 시에나의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우리 하나씩 사 먹을까요?”
시에나가 주머니 속에서 동전을 짤랑였다.
“어? 그래도 돼?”
“당연하죠. 다들 먹는 건데 우리라고 못 먹겠어요. 한스. 한스도 꼬치 먹을래요?”
시에나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둘을 호위하고 있던 한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한스는 꼬치집을 빤히 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는 생각 없습니다. 먼저 마차로 돌아가 있을 테니 두 분이서 천천히 드시고 오십쇼.”
“그럴게요. 도련님, 갈까요?”
그렇게 말하며 시에나는 데이몬의 손을 이끌었다. 데이몬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시에나의 손을 빤히 바라보다 이내 그게 부끄러운지 시선을 슬쩍 돌렸다. 그러나 입꼬리는 한없이 올라가 있었다. 보기만 해도 간질간질한 장면이었다. 한스는 입에서 설탕물이 주르륵 흐르는 기분을 느끼며 마차로 향했다.
“어서 옵쇼-.”
“안녕하세요, 여기 꼬치 두 개만 주세요.”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며 시에나가 말했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는 주인이 시에나에게 꼬치 두 개를 건네주었다. 데이몬에게 주기 전에 살짝 맛을 보자 달착지근한 소스를 쓴 닭꼬치였다. 어린아이들이 왜 이렇게 많나 했더니 애들도 먹기 부담 없을 만큼 달달하면서도 순한 맛이었다.
“드셔 보세요, 도련님. 맛있어요.”
“응….”
데이몬은 경계심 강한 고양이 같은 눈빛으로 꼬치를 요리조리 살피다 한입 넣었다. 맛이 있었는지 화아앗, 데이몬의 얼굴이 피었다. 그 후에는 냠냠, 꼬치를 열심히 오물거리는 데이몬의 모습이 귀여워 시에나가 방긋 웃었다. 아이들이 로브를 뒤집어쓴 데이몬과 시에나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얘, 너는 어디서 왔니?”
“…어?”
데이몬이 부지런히 꼬치를 먹다 뚝, 멈추었다.
“난… 저기 위에서.”
또래 아이들을 거의 만나 보지 못한 탓일까, 데이몬은 혼란스러워하며 말까지 더듬었다. 그 후에도 아이들이 몇 번 더 말을 걸었지만 데이몬은 당황해서인지 입을 꾹 다물었다.
“너 수상하다. 다른 영지에서 온 첩자 아니야?”
남자아이 하나가 경계심 강한 눈으로 데이몬을 쳐다봤다.
“우리 영지가 뭐 볼 게 있다고 첩자까지 오겠니? 얘는 그냥 내 동생이야.”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시에나가 나섰지만 흥미로운 대상이 생긴 아이들은 데이몬에게 집요하게 시선을 맞추었다. 당황한 데이몬이 로브를 더 깊게 눌러썼다.
“야, 너 로브 벗어 봐.”
“…싫어.”
“당당하면 벗으면 되잖아? 아닌 걸 보니까 너 정말 첩자인가 본데?”
“아니… 앗!”
데이몬이 아니라고 하는 새에 한 남자아이가 잽싸게 뒤로 돌아가 그의 후드를 벗겨 내었다. 검은색 머리칼에 황금빛 눈동자가 그들에게 그대로 노출되었다. 잠시 데이몬의 얼굴에 넋을 놓고 있던 아이들 사이에서 악의에 가득 찬 목소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이, 악마.”
그건 꼬치를 즐기고 있었던 어른들까지 싸늘하게 굳게 만들기 충분했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사위에 데이몬이 당황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수많은 눈동자가 데이몬에게 쏟아졌다. 당황하긴 시에나 역시 마찬가지라 그녀는 급히 데이몬의 후드를 다시 씌운 뒤 그를 감싸 안았다.
“저희 이만 들어가요.”
“…응.”
시에나는 거스름돈조차 받지 않고 황급히 꼬치집을 빠져나왔다. 악마라고 말한 애를 샅샅이 찾아내 죽도록 패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데이몬의 보호가 우선이었다. 데이몬은 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얼이 빠져 있었다. 시에나가 데이몬을 이끌자 그는 힘없이 끌려갔다. 한순간에 생기를 빨린 사람처럼 데이몬의 얼굴이 창백했다.
“당신은 악마야-!”
꼬치집 안에서 악에 받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는 안에 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뛰쳐나와 마차에 오르는 데이몬을 쫓아왔다.
갈색 눈에서 선명한 적의가 들끓었다. 열셋이나 먹었을까 싶은 아이의 분노한 얼굴을 마주한 데이몬이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마차에 앉아 있던 한스조차 깜짝 놀라 그 아이를 쳐다봤다. 시에나는 당황하며 이내 데이몬을 자리에 앉히고 마부에게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빨리 출발해 주세요!”
“예에. 이랴!”
이내 마차가 스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이기 시작한 마차를 보며 아이는 다시 한번 악에 받친 소리로 소리쳤다.
“당신 때문에 우리 엄마가 죽었어! 당신은 악마야! 악마라고! 난 당신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선득할 정도로 감정이 담긴 그 목소리에 시에나는 재빠르게 데이몬의 귀를 막았지만 그는 전부 들은 뒤였다.
데이몬의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시에나가 그런 데이몬을 꽉 안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 저런 소리는 무시하세요. 저건 다 헛소리예요.”
“…….”
그러나 데이몬은 말이 없었다.
그저 입을 꾹 다물고 몸을 굳힌 채 시에나의 품에 안겨 있을 뿐이었다.
* * *
데이몬은 돌아오자마자 방 안에 틀어박혀 저녁도 먹지 않았다. 시에나는 빵과 우유를 들고 데이몬의 방문 앞을 서성였다.
“도련님, 저 시에나예요. 들어가도 될까요?”
데이몬이 분명히 있을 방 안에는 침묵만이 자리했다. 시에나는 3초간 기다리다 문을 벌컥 열었다. 시에나가 문을 열 줄은 몰랐는지 깜짝 놀란 표정의 데이몬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가 이내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시에나가 성큼성큼 걸어가 작은 베드 테이블에 빵과 우유가 담긴 쟁반을 올려 두었다.
“도련님, 저 좀 봐요.”
도리도리.
데이몬은 시선을 돌린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런 약한 반항에 질 시에나가 아니었다. 시에나는 침대 위로 올라가 데이몬과 시선을 맞추었다. 네가 안 보면 내가 가서 보면 되지. 그러나 데이몬은 움찔하더니 다시 고개를 홱 돌렸다.
아, 그러시겠다.
데이몬과 눈을 마주치기 위해 몇 번이고 자리를 움직인 시에나가 이내 발끈해 데이몬의 양 뺨을 찰싹 소리 나게 잡았다. 양쪽 손에 꽉 잡힌 얼굴이 시선을 돌리지 못하자 이번에는 고개를 푹 숙여 버린다.
“도련님, 고개 좀 들어 보세요.”
도리도리.
“강제로 들기 전에.”
도리도리.
결국 시에나는 힘을 써서 데이몬의 얼굴을 들었다. 강한 힘에 데이몬의 얼굴이 홱 딸려 올라왔다.
“흐, 흐지 므…!”
퉁퉁 부어 발긋한 눈가.
빨개진 코. 어찌나 꽉 깨물었는지 잇자국이 난 입술. 누가 봐도 나 울었소, 하는 얼굴이었다. 엉망이 된 작은 얼굴을 보고 시에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우시면 눈가가 짓물러요. 자, 이걸로 닦으세요.”
시에나가 손수건을 꺼내어 데이몬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빳빳하던 손수건이 순식간에 젖어 들었다.
“코도 푸시고요.”
“그것까진 됐어.”
“어서요.”
흥.
실랑이 끝에 데이몬은 결국 코를 풀고 퀭한 얼굴로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데이몬은 우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 사실 그 애가 누군지 알아.”
손수건을 든 시에나의 손이 멈칫했다.
“…어떻게 아시는데요?”
“그 애 어머니가 나 때문에 죽고 나서 성문 앞에서 걔가 삼 일 밤낮 소리를 질렀거든. 난 그 소리를 삼 일째 아침에서야 들을 수 있었지만.”
“…네?”
“악쓰는 그 애를 보고 남작은 마을 사람들도 다 너를 저렇게 악마라 생각한다 말하며 웃었어.”
역시나.
시에나가 생각하던 짐작이 맞아떨어졌다. 성안에서만 계속 살던 데이몬이 어떻게 누군가의 엄마를 죽였다는 걸까, 생각했는데 문득 데이몬과의 첫 만남 전 친구들이 해 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몇 년 전에 어떤 하녀가 남작님께 너무 과하신 거 아니냐고 한 번 말했다가 엄청나게 두들겨 맞고 쫓겨나서 시름시름 앓다 죽었대.'
데이몬의 편을 들다가 죽었다는 사람이 그 아이의 엄마였던 거겠지.
“메어리는 내 유모였어.”
데이몬이 개미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들이 나랑 비슷한 나이라 항상 내가 맞는 걸 보고 많이 안타까워했지. 밤이면 상처 난 곳에 약을 발라 주며 울었어.”
시에나가 데이몬의 이야기를 들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가엾은 사람들. 그것이 한평생 계급 사회에 순종하고 살아왔을 여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겠지.
“아홉 살 때, 그날도 약을 발라 주면서 울길래 이상해서 한 번 물어봤어. 메어리, 내가 맞는 게 혹시 잘못된 거야? 라고 말이야. 그때 메어리가 날 보던 눈빛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해.”
시에나가 숨을 들이켰다. 처음으로 가진 아이의 의문이 그녀에게는 얼마나 아프게 다가왔을까.
“그리고 일주일도 안 되어서 남작에게 맞고 있는 나를 감싸며 너무하다고 말한 죄로 메어리는 엄청나게 맞고 실신한 상태로 성 밖에 버려졌어. 나 역시 그날 많이 맞아 기절한 지 이틀 만에 깨어났고.”
데이몬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그의 손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깨어난 날 아침에 그 애가 와서 소리를 질렀을 때서야 메어리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
똑.
시에나의 손등으로 데이몬의 굵은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가슴이 아파서 더 이상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던 시에나는 그대로 데이몬을 꽉 끌어안았다. 그녀에게 한참 안겨 있던 데이몬이 텅 빈 눈으로 말했다.
“…메어리는 내가 죽인 거야.”
“절대 도련님 잘못이 아니에요. 도련님은 너무 어렸어요. 자기 몸 하나 지킬 수 없는 그저 힘없는 어린아이였는걸요.”
“내가 앓고 있는 동안 메어리 역시 살아 있었어. 그 애는 약값을 달라 요청하러 왔던 거였어. 남작은 당연히 주지 않았지. 명목상으로는 메어리가 내 물건을 훔친 걸 들켜 쫓겨난 걸로 되어 있었거든.”
“어떻게 그럴 수가…”
남작은 정말이지 천인공노할 인간이었다. 시에나는 처음으로 사람에 대해 강한 살의를 느꼈다.
“가족이 아파서 죽어 가고 있는데 남작은 손해 배상 청구나 안 하면 감사한 줄 알라고 했다는 걸 나중에 하인들에게 들었어. 내가 조금만 더 일찍 깨어났다면, 메어리는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는 데이몬의 가슴은 얼마나 찢어졌을까.
유일하게 자신의 편을 들어 주었던 유모의 죽음이 데이몬에게 얼마나 충격이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시에나는 메어 오는 목을 가다듬으며 데이몬에게 물었다.
“그런 사실에 대해 그 애한테 이야기하신 적 있으신가요, 도련님?”
“아니… 남작은 내가 깨어나면 그 애가 날 악마라고 부르는 걸 보여 주려고 남겨 둔 거일 뿐, 그날 이후론 더 이상 성에 오지 않았어. 지금 생각하면 쫓겨난 거지. 아마 걔도 자세한 내용은 듣지 못했을 거야.”
화가 들끓었다. 엄마를 잃은 아이를 그렇게 이용해 먹고, 데이몬에게는 상처만 주고. 어떻게 인간이 그렇게까지 악랄할 수 있을까.
“리메리오 남작은 대체 왜 그런 악독한 행동을 했을까요?”
“나 때문에 출셋길이 막힌 것도 있었고, 아마 결정적이었던 건 내가 이 영지로 온 지 1년이 안 되어 그 사람의 아내와 아이가 죽은 것 때문일 거야.”
“그게 어째서 도련님의 탓이겠어요. 그 인간은 그저 남을 탓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인간이었던 거겠죠.”
“그렇지만… 네가 오기 전까지 난 정말 나와 가까이했던 사람들은 전부 불행해질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었는걸.”
“그럼 지금은요?”
“…이젠 그렇게 생각 안 해. 내 사람이 불행해지지 않도록 나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네가 알려주었잖아.”
데이몬은 시에나의 손을 아주 소중한 거라도 된다는 듯이 꼭 잡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데이몬의 얼굴은 여전히 착잡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시에나는 결심했다.
“우리 내일 그 애한테 이야기하러 가요, 도련님.”
그를 꽉 껴안은 채 시에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기… 를 하러 가자고?”
“네. 그 당시 도련님의 사정을 얘기하고, 메어리 씨가 도련님께 어떤 존재였는지 말하러 가요.”
“…그런다고 오해가 풀릴까? 내 이야기도 들어 주지 않는다면… 어떡해?”
“글쎄요. 하루로는 어려울 수도 있겠죠. 다만 가지 않는다면, 계속 그 아이는 오해하고 있게 될 거예요.”
데이몬은 상념에 잠긴 얼굴로 문밖의 달을 바라보았다. 고민할 시간이 필요할 듯해 시에나도 더 이상 묻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9시 방향이었던 분침이 12시를 가리킬 무렵, 데이몬은 이내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갈래. 가서 제대로 이야기하겠어.”
* * *
오전 시간 내내 대련을 하는 데이몬은 다른 세상에 가 있는 듯 힘이 없었다.
시에나는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침에 웬일로 늦잠을 잔 데이몬을 깨우러 가 보니 할 말을 연습해 놓은 종이 위에 곤히 잠든 그를 발견했으니까. 눈밑이 퀭한 게 아마 잠을 거의 못 이룬 듯했다.
이렇게 애쓰는데, 통하면 좋으련만.
절대 쉽지 않을 것을 알기에 시에나는 마음을 더욱 굳게 먹었다.
“아…!”
데이몬이 한순간 둔하게 목검을 피했다. 핏, 목검이 지나간 자리에 상처가 벌어졌다.
“도련님!”
대련이 멈추고 시에나가 데이몬을 향해 달려갓다. 데이몬의 상처 쪽으로 시에나가 들고 있던 수통을 기울였다. 물을 붓는 것조차 제법 아픈지 데이몬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데이몬을 바라보며 로하엘이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군요. 대련은 여기까지 하죠. 다음에는 좀 더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로하엘은 그렇게 말하며 검을 갈무리했다. 시에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련님, 상처는 빨리 치료해 두는 게 좋겠어요. 잠시 집에 들어가서….”
“아니, 난 괜찮아.”
데이몬은 손으로 상처를 쓱쓱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쪼그려 앉은 시에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빨리 가자.”
시에나는 그런 데이몬을 지켜보다 말없이 손을 잡았다. 데이몬의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 * *
시에나와 데이몬은 로브를 뒤집어쓴 채 시내를 걸었다. 그 뒤에는 로하엘도 함께였다. 긴장이 되는지 마주 잡은 데이몬의 손바닥이 축축했다. 그러나 시에나는 개의치 않고 그런 데이몬의 손을 더욱 꽉 잡고 걸었다.
긴장하긴 시에나도 매한가지였다.
몰매를 맞고 쫓겨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뒤에 로하엘이 호위로 붙었으니 여차하면 도망칠 수는 있을 것이다. 사과하러 가는 데 무슨 호위냐 싶겠지만, 어제 로브를 벗었을 때 아이들의 적의와 두려움 그리고 호기심을 생각하면 방지해 두어서 나쁠 것이 없어 보였다.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통 하나는 큰 키라 다른 의미로 관심을 받고 있긴 했지만.
“성에서 온 거 아니야? 왜 저렇게 키가 크담.”
“몸에 근육 봐. 어제 시비 걸어서 싸우러 온 거 아니야?”
다 들린다, 이 인간들아.
시에나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뒤로하고 걸음을 빠르게 했다. 시간이 지나자 자신들에게 수군대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인적이 드문 숲길 가에 덩그러니 서 있는 허름한 집 한 채가 보였다.
조금만 밀어도 금방 부서질 것 같은 낡은 문을 두드리는 대신 시에나가 높은 목소리로 안의 사람을 불렀다.
“계세요-?”
그러나 그녀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안쪽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없었다. 시에나가 더 큰 목소리로 말하기 전 데이몬이 먼저 크게 소리쳤다.
“계세요-!”
그때 안에서 무언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탁, 타박. 탁, 타박. 탁, 타박.
누군가의 지팡이 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동시에 들리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허리가 구부정하고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가 지팡이를 들고 문 앞에서 그들을 바라봤다. 노파는 회색 눈으로 시에나를 바라보다 다시 데이몬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당신은….”
노파의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가가 크게 뜨였다. 그 바람에 잔뜩 긴장한 데이몬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노파는 그런 데이몬을 한참이나 응시하다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노파의 목소리에는 적의가 없었다. 시에나는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안으로 들어갔다.
삐걱, 삐걱.
다 썩어 가는 마룻바닥이 불청객의 등장에 비명을 질렀다. 뒤따라온 로하엘이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섰다가 힘겹게 자신의 체중을 받아들이는 마룻바닥을 보고 불안한 눈을 했다. 호빗의 집처럼 작은 집이었기에 로하엘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로하엘 님, 우린 괜찮으니 밖에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로하엘은 다시 그대로 뒷걸음질 쳐서 집 밖으로 빠져나왔다. 문 안쪽에서는 로하엘의 턱까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가 들어왔으면 이 집이 정말 무너졌을지도 모르겠다. 하긴. 나름대로 이 영지의 제일 부자가 사는 성도 낡아 빠졌는데, 평민들이 사는 곳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벽과 바닥에 군데군데 팬 홈과 흠집이 이 집이 살아온 세월을 가늠하게 했다. 시에나는 복도를 지나쳐 거실로 들어섰다. 온갖 잡동사니가 쌓여 있는 거실의 중앙에는 흔들의자 하나와 낮은 테이블, 그리고 작은 스툴(등받이와 팔걸이가 없는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여기 잠시 앉아 계십시오. 차를 내오겠습니다.”
노파의 목소리는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분명 데이몬을 봤을 때 무언가 눈치를 챈 것 같은데, 노파는 어떤 감정도 밖으로 내보이지 않고 있었다.
데이몬이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스툴에 엉덩이를 붙였다. 시에나가 그런 데이몬의 등을 쓸어 주었다.
“괜찮아요, 도련님.”
부엌 안쪽에서는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엌이라고 해 봤자 거실과 연결이 되어 있어 훤히 그 모습이 보였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항아리 옆에 노파가 물 주전자를 올려놓았다.
삐이익-.
물 주전자는 이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끓었다. 노파는 불을 끄고 준비된 찻잔에 찻물을 따랐다. 분홍색 찻물이 이 빠진 찻잔 안에 담겼다. 노파의 구부정한 걸음은 차가 든 쟁반을 가져오기도 힘들어 보였다. 찻물이 흔들거리자 시에나가 급히 달려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제가 할게요.”
“…고맙습니다. 나이가 드니 몸이 성치 않습디다.”
시에나가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자 테이블이 덜컥거렸다. 한쪽 다리가 닳아서 기울어져 있는 것 같았다. 데이몬은 눈앞의 차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까 시에나가 속삭인 말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웬만하면 거기서 대접하는 음식은 드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혹시나 하는 불안감 때문에 말해 놓은 거지만, 아무도 차를 마시지 않는 곳에 있는 것도 어색했다. 그때 데이몬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도련님?!”
“아, 뜨거.”
데이몬은 차를 후루룩 들이켜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혀를 데인 모양인지 데이몬이 분홍색 혓바닥을 살짝 빼물어 식혔다. 그 모습을 본 노파의 입꼬리가 처음으로 올라갔다. 노파는 시에나의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고는 말했다.
“독은 타지 않았습니다. 그저 평범한 차일 뿐이에요.”
“…죄송합니다.”
시에나가 의심하던 상황임을 알기에 노파는 시에나 몫의 차를 한 모금 넘기고 시에나에게 다시 건네주었다. 그 사실을 알아챈 시에나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노파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잃고 나서 후회하는 것보다는 조심성이 많은 편이 좋지요.”
호록.
차를 마신 시에나가 퍼지는 단맛에 놀란 듯 차를 바라보았다.
“산딸기 차입니다. 단맛이 나 제 손자 녀석도 잘 마신답니다.”
노파는 어린 데이몬과 시에나를 위해 일부러 쓴 차 대신 산딸기 차를 내놓은 것이었다. 딱딱한 얼굴과는 달리 배려심이 상당히 깊었다. 산딸기 차 안에는 꿀까지 들어가 있어 입 안에 새콤달콤한 향이 가득 퍼졌다.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시에나의 순수한 인사에 노파의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 데이몬은 어느새 차를 전부 비우고 안절부절못하고 문 앞을 기다리고 있었다.
“찾으시는 분이 계신 거지요? 아이작은 금방 올 겁니다.”
“할머니-! 어딨어!”
“바로 오는군요.”
아이작이 무서운 기세로 집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어제 데이몬에게 악마라고 말한 아이가 다급히 할머니를 부르더니 이내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셋을 발견하고 그대로 굳었다.
“할머니! 괜찮은 거야? 아무렇지도 않아?”
아이작은 그렇게 말하며 데이몬을 노려보았다. 데이몬은 무언가 말하려 아이작을 올려보았다가 일순 입을 다물었다. 아이작의 얼굴에는 데이몬을 향한 선명한 적의와 함께 자기 때문에 할머니가 위험에 빠진 거라고 생각한 데에서 온 죄책감이 혼재되어 있었다. 이내 노파의 입이 달싹였다.
“아이작. 난 괜찮다.”
“정말? 정말 괜찮은 거야?”
아이작은 그럴 리가 없다는 의심의 눈초리로 노파의 상태를 살폈다. 그동안 둘은 거의 투명 인간 취급이었다. 결국 노파가 나서서 아이작을 제지했다.
“난 정말 괜찮다. 그런데 아이작, 손님께 무슨 짓이냐. 인사도 않고 무시를 하다니.”
듣기 싫은 말에 정곡으로 찔린 아이처럼 아이작은 할머니의 말에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노파의 태도는 단호했다.
“아이작.”
“…귀하신 분들께서 누추한 저희 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비꼬는 것이 역력한 말에도 데이몬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만나서 반가워. 잠깐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데이몬이 가까이 다가서자 아이작은 벌레를 본 것처럼 흠칫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저 같은 천것은 도련님처럼 높으신 분과 말을 섞을 것 만한 자가 못 됩니다.”
역시나 쉽지 않아 보였다. 시에나는 곤란한 얼굴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아이작 역시 시에나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이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뭐야, 왜 얼굴이 빨개지는데.
시에나가 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 아이작에게 살짝 손을 흔들자, 아이작은 깜짝 놀라 고개를 홱 돌렸다. 아무래도 이 적대감은 데이몬 한정인 듯했다. 그때, 말을 고르고 있던 데이몬이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천것이라니… 어떻게 그런 말을. 날 키워 준 메어리가 네 엄만데 네가 천것이라면 나도 똑같겠네.”
아, 잠깐만. 도련님 그거 아니에요.
시에나는 식겁한 표정으로 데이몬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아이작은 모든 걸 들은 뒤였다. 데이몬은 진심으로 한 말이었지만 비꼬는 것에 '어머니'가 들어가면 말의 어감은 완전히 달라진다.
데이몬은 넌 천하지 않아, 라는 뜻으로 말했지만 아이작으로서는 네가 천하면 네 엄마도 천하냐? 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엄마 욕이란 채 열 살이 되지 않은 아이부터 노인까지 분노하게 만드는 법인데, 하물며 엄마를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아이작이 어떻게 나올지는 뻔할 뻔 자였다.
희망을 가지고 아이작을 바라보았지만 아이작은 아까와는 달리 분노가 들들 끓는 눈을 하고 데이몬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아. 시에나는 머리를 짚었다.
“지금, 그 말… 취소해 주시죠.”
“나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어.”
시에나는 데이몬에게 어떤 상황인지 설명하고 싶었지만, 여기 오기 전 데이몬과 약속한 바가 있어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했다.
'시에나, 만약 내가 그 아이와 이야기를 시작하면 내 편을 들지 말고 가만히 있어 줘.'
그것은 데이몬 나름대로의 배려였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시에나로서도 난감했다. 아이작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도련님을 지키다 죽은 제 어미가 천것이었다는 말을 그렇게 하고 싶으십니까?”
데이몬은 몹시 당황하여 말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그저 아무도 천것이 아니라는 소리였어. 그런데… 그보다… 너, 알고 있었구나.”
자신이 메어리를 죽인 게 아니라는 것을. 그는 전부 알고 있으면서 데이몬을 악마라고 말했다. 아이작은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있었으면요? 제 어미의 개죽음이 달라집니까?”
데이몬은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어젯밤을 꼬박 새워 상황을 시뮬레이션했던 종이가 전부 쓸모없게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개죽음이라니. 그런 게 아니야. 메어리는 남작의 폭력으로부터 나를 지켜 주려다….”
“저는!”
아이작이 데이몬의 말을 끊고 큰 소리로 말했다. 모두가 동시에 아이작을 바라보자 그가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 그가 말하려던 소리는 입 안에서 맴돌다 이내 사그라들었다.
“말을 끊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일을 하다가 온 것이라, 빨리 가지 않으면 매를 맞을 겁니다. 고귀하신 도련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실 수 있을까요?”
회피의 기색이 역력한 말에 데이몬도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데이몬이 귀족이니 양해를 부탁한다는 식으로 말은 하지만, 꺼지라는 뜻과 다름이 없었다. 그의 말에 먼저 반응한 건 노파였다.
“그래, 너는 이만 가 보렴. 나는 두 분과 더 할 말이 있으니.”
“할머니!”
“나 아직 귀 안 먹었다. 네 입으로 바쁘다 말했으니 어서 가 봐.”
아이작은 어이없다는 듯 노파와 실랑이를 하다 결국 자리를 떴다. 바쁘다는 말은 사실인 듯했다. 열린 문 사이로 아이작이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지만, 노파는 강경했다. 결국 아이작은 터덜터덜 자리를 떠나갔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기분이 들어 시에나는 마음이 영 편치 못했다. 그것은 데이몬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이작이 떠난 후, 노파는 잠시 데이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쯧쯧. 어쩌다 얼굴이 이렇게 되셨습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야.”
“꽤 쓰라렸을 텐데요. 밖에 계신 분이 한 일이죠? 이런 건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덧납니다.”
신기에 가까운 찍기 능력에 데이몬이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을 지었다.
“홀홀. 나이가 들면 이 정도는 안 보고도 맞추게 되는 법입니다. 잠시 여기 앉아 계세요.”
노파는 몸을 일으키더니 테이블 밑 서랍에서 유리병과 자그마한 통 하나를 꺼냈다. 동그란 포션 모양의 유리병 안에는 희뿌연 액체가 들어 있었는데, 마개를 딴 노파가 데이몬의 볼 위에 액체를 똑똑 떨어뜨렸다.
“신전의 약인가요?”
시에나가 조심스레 묻자 노파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걸 우리가 어떻게 사겠습니까. 그냥 제가 대강 만든 약입니다만, 효과는 제법 좋습니다.”
그렇게 노파는 소독 후 통 안에서 연고를 꺼내 발라 주었다. 익숙한 향에 놀란 시에나가 노파에게 물었다.
“이거… 센텔라로 만든 연고군요?”
“아가씨가 센텔라를 아십니까?”
“예전에 약초에 대해서 좀 배웠어요. 그래도 이렇게 연고로 만들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대단하군요. 지금은 사멸된 지식인데. 아가씨의 부모는 그래도 제법 깨어 있는 사람이었나 봅니다.”
노파는 무심한 듯 말했지만 시에나는 그녀의 행동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고 있었다. 신전에서 나온 약물 외에는 전부 이단으로 받아들여 따로 약을 만들면 마녀로 취급해 잡아갔다. 믿는 구석이 있는 시에나조차 그냥 약초에 생즙을 내거나 차로 만드는 정도에 그쳤다.
그런데 귀족인 데이몬을 이렇게 치료해 준다니.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는 건지, 무모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자아, 다 되었습니다. 조금 이따 이 연고를 소분해 드릴 테니 가져가 하루 세 번 바르시면 금방 나으실 겁니다.”
심지어 노파는 연고를 주려는 당당함마저 보였다. 상당히 힙한 할머니라는 생각을 하며 시에나가 불안하다는 듯 물었다.
“저희가 이런 걸 받아서 신고하면 어떻게 하시려구요…?”
“나이가 드니 눈은 어두워지지만, 사람 보는 눈은 오히려 밝아지더군요. 두 분께서는 저를 신고하지 않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절대 신고하지 않아! 치료해 주어 고맙네.”
데이몬은 결백하다는 듯 황금빛 두 눈을 반짝였다. 노파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꼬리를 짧게 올리며 홀홀 웃었다.
“그런데… 그 애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더군. 언제 알게 된 건가…?”
“예, 제가 말해 주었습니다.”
노파가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이…?”
“예. 제가 그랬습니다. 뭐라고 얘기했는지 궁금하신가요?”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그저 예전에 다 끝난 이야기일 뿐입니다.”
노파는 그때 당시를 회상하듯 눈가를 지그시 감았다.
“제 자식, 메어리는 유모로 취직했을 때 기뻐했던 모습과는 다르게 점점 마르고 어두워졌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지 한참을 캐묻자 겨우 사실을 고백하더군요. 자신이 키우던 도련님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맞고 있다고. 도련님이 아이작 또래였기 때문에 더욱 괴로웠다고 했었습니다.”
그들은 어느새 자리를 잡고 앉아 노파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도련님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 당시 절대 귀족 싸움에 나서지 말고, 차라리 일을 그만두라고 말했습니다. 귀족 사이에 평민이 끼면 결국 사라지는 건 평민의 목숨이니까요. 저는… 제 자식이 귀했습니다.”
노파의 말에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해. 이해한다.”
“그렇지만 제 자식은 자기 아니면 그 성에 도련님의 편이 하나도 없다며 싫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메어리가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길래 저는 그 애가 괜찮아진 줄 알았습니다.”
“…….”
“그런데 어느 날, 아이작이 막 여덟 살이 되었을 무렵, 메어리가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와 한참을 울더군요.”
아이작이 여덟 살이라면 데이몬도 비슷한 또래였을 것이다.
“사라진 줄 알았던 폭력은 사실 계속되고 있었으며, 도련님은 그 탓에 자신이 맞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계셨다고요. 혹 내가 맞는 게 잘못된 거냐고 제 딸에게 물었다고요.”
데이몬은 남의 입에서 들려오는 자신의 이야기에 뚫어져라 노파를 바라보았다.
“그 말을 듣고서는 저도 말문이 막히더군요. 그날 메어리는 밤새 울다가, 아이작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멍하니 아이작을 바라보며 그렇게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그다음 날 아침, 무언가 결심한 표정의 메어리를 봤습니다. 그 얼굴에서는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습니다. 팔불출인가 싶으시겠지만, 봐 왔던 딸의 얼굴 중 가장 생기 있고 예뻤어요.”
데이몬은 노파의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서 저는 그 애를 보내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데이몬은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 고개를 푹 숙였다.
“아이작이 조금 크고 나서 그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원망할 거라면 저를 원망하라고요. 하지만 그 아이는, 그러지 않더군요. 할머니의 잘못은 없다고 오히려 저를 안아 주었습니다.”
“…….”
“착한 아이입니다. 부디 아이의 무례한 부분은 제가 사과할 테니 마음을 풀어 주세요.”
“…화나지 않았어. 그냥 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야. 언제 또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으음… 아이작은 8시부터 9시까지 저기 방앗간에서 일을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노파는 손가락으로 멀리 떨어진 방앗간을 가리켰다.
“휴일은 없나?”
“휴일은 따로 없습니다. 아프면 쉬게는 해 주지요. 그 정도면 제법 좋은 일터랍니다.”
노파의 말에는 자랑스러움까지 엿보여 데이몬과 시에나는 당황해 입을 다물었다. 시에나가 오기 전 성에도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 휴일은 주고 있던지라 사람이 어떻게 주 7일을 일하고 살 수가 있지?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가을이 다 되어 가니 바쁜 건 당연한 거지요. 겨울엔 쉬는 날도 많습니다.”
노파가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지었다. 데이몬은 그런 노파를 빤히 바라보다 물었다.
“당신은… 내가 밉지 않나?”
데이몬의 말에 노파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미울 때도 있었지만… 제가 메어리라도 결국은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 생각하니 더 이상 밉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 도련님은 제가 상상했던 대로 충분히 사랑스러우셨거든요.”
노파의 솔직한 직구에 데이몬의 얼굴이 발그스레하게 달아올랐다.
“그, 그렇군.”
방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훈훈해졌다. 데이몬은 품속을 뒤적거리다 안의 주머니를 꺼내었다.
“이거 받아. 생활에 보탬이 되면 좋겠네.”
쭈뼛거리며 데이몬이 딱 봐도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를 노파에게 건네주려 했다. 그러나 노파는 그 주머니를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저는 받지 못합니다.”
“이건 뇌물 같은 게 아니야. 그저 작은 감사 표시일 뿐이지. 충분한 보상도 받지 못했지 않나. 이것조차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네.”
이 주머니 안에는 데이몬이 어제 창고에 들어가 쓸 만한 것을 싹싹 긁어모은 보석들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노파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 받았다는 걸 제 손자에게 들키면 혼쭐이 날 것 같아서요. 정 주고 싶으시다면 번거로우시겠지만 두 분께서 충분한 이야기를 거친 뒤 아이작에게 직접 전달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이작으로서는 어머니의 목숨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인상이 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없이 힘들게 살아왔으니 그 보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데이몬도 그 뜻을 알아들었는지 다시 주머니를 품 안에 갈무리했다.
“알겠네. 조만간 시일을 정해 또 오도록 하지.”
쿵!
그 순간, 온 집 안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시에나와 데이몬이 깜짝 놀라 두 눈을 마주했다.
“제가 보고 올게요.”
문밖으로 달리듯이 빠져나가자 로하엘이 웃옷을 벗은 채 장작을 패고 있었다. 햇빛 아래 로하엘의 몸이 눈부셔 시에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슬쩍 돌리며 물었다.
“로하엘 님… 뭐 하시는 거예요?”
“하도 할 일이 없길래 심심해서 장작을 패고 있었어요. 아, 시끄러웠나요?”
“아니요. 괜찮아요.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아서 알아보러 온 것뿐이에요.”
텅! 쩌적.
로하엘이 다시 도끼를 휘둘러 나무를 정확한 솜씨로 쪼개었다. 어느새 로하엘의 옆에 상당한 양의 장작들이 쌓여 갔다. 어쩐지 아까 들린 소리와 조금 다른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시에나는 안쪽으로 다시 들어왔다. 둘은 시에나와 로하엘의 대화로 그 소리가 어떤 소리였는지 대략 짐작하는 듯했다.
“밖에 저희 호위분이 장작을 패고 계시더라고요. 하하. 밖에서 기다리시기 조금 지루하셨나 봐요.”
“이런 고마울 데가…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노파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시에나가 말했다.
“아뇨! 일어나지 마세요. 그리고 저희도 슬슬 가 보려고요. 다음에 시간에 맞춰서 찾아뵐게요.”
“예, 알겠습니다. 참. 여분의 약을 드릴 테니 잠시만 와 주시겠어요?”
“네. 그럴게요. 도련님, 잠시만 여기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응.”
시에나는 꼬부라진 허리로 걷는 노파의 뒤를 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에는 여전히 단지 안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한참 부엌 안을 구경하던 시에나에게 노파는 약을 소분한 작은 통을 건네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저한테는 말씀 편안히 하세요. 저도 평민이거든요.”
노인 공경이 일상이었던 시에나에게 노인의 존대는 너무나 낯간지러웠다. 시에나의 간절한 표정에 노파는 주름진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그렇게 하지.”
크림 형태의 연고에서는 알싸한 약초 향이 풍겼다.
“약을 만드는 일을 생업으로 하시나요?”
“그래. 이제는 내 대에서 끝나겠지만.”
“아이작은 이 일을 물려받기 싫어하나요?”
“…아가씨는 마녀사냥을 겪어 본 적이 없지?”
있을 리가요.
저는 얼마 전에 여기 왔는데요.
말을 삼키며 시에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 것 같았지. 지금이야 마녀들의 씨가 말라 박해가 그리 강하진 않지만 신전이 있으니 여전히 그 박해는 남아 있어. 약을 만드는 일은 언제 신전에 잡혀가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야. 나야 다 늙었으니 죽어도 상관이 없지만, 저 애는 살날이 너무 많이 남았어. 평범한 삶을 살길 바랄 뿐이지.”
그렇게 말하는 노파는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시에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쥐어진 작은 약통을 바라보았다. 주방 안에서는 말린 약초 냄새가 났다. 보리지나 센텔라부터, 시에나가 모르는 이름 모를 약초들까지 정갈하게 묶여 모여 있었다.
이 정도 양이라면 마을 사람들은 물론 다른 마을에서 온 사람들도 필요한 만큼 받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마을에서 온 사람들도 치료해 주시나요?”
“그래. 약이 필요해서 온 사람들을 어떻게 내칠 수 있겠어.”
“혹 누군가 고발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 한들 내가 그 사람들의 간절한 눈빛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나. 평소에는 나를 싫어하고 마녀라 껄끄러워하던 사람들도 그때만은 눈물을 흘리며 부탁하지. 신전에서 나온 약값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사실 아플 일조차 그리 많지 않아. 날 싫어하지만 적어도 고발하지는 못해.”
노파의 말이 맞았다.
신전에서 나온 약값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은 부자일 거고,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청결 면에서 더 낫기 마련이다. 그러니 노파에게 오는 사람들은 결국 돈이 없고 힘이 없는 사람들. 노파는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선생님이 하신 일은 존경받아 마땅해요.”
시에나는 맑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존경받고자 한 게 아니네. 그저 아픈 사람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뿐이지.”
그러면서도 노파는 시에나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