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으그그극….”
고된 삶에 찌든 신음이 복도를 울렸다. 텅 빈 복도에서 시에나는 무릎을 꿇은 채 다 닳은 솔을 쥐고 있었다. 변변한 세제 없이 복도를 닦느라 하도 힘을 줘 손목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 신세야….”
시에나가 솔을 쥔 채 힘없이 중얼거렸다. 며칠 전만 해도 시에나는 청소는 청소기가, 빨래는 세탁기가 해주는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런 중세풍의 건물에서 낡은 하녀복을 입고 먼지 가득한 복도를 닦게 되었는지, 시에나 자신조차 의문이었다.
복복복복.
두텁게 쌓인 먼지는 수십 번의 솔질로도 제대로 벗겨지지 않았다.
낡은 솔이라 쉽게 깨끗해지지 않는 복도를 보던 시에나가 울컥했는지 솔을 내던졌다.
데굴데굴 굴러간 솔은 벽에 탕 부딪히고 나가떨어졌다.
“에라, 모르겠다.”
시에나는 조금 전까지 청소한 바닥에 털썩 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폈다.
오래 엎드려 있었더니 허리부터 시작해 온몸이 다 저려 왔다.
종아리와 허벅지를 열심히 주무르던 손바닥에서도 통증이 느껴졌다.
찌릿한 고통에 손을 바라보자 살갗이 쭈글쭈글하게 부르터 있었다.
“습진이라니….”
요 며칠 새 걸레질과 설거지 때문에 손에 물을 대고 살았더니 금세 이 모양이다.
고무장갑조차 없는 세계라 전부 맨손으로 집안일을 했었기에 지금까지 습진에 안 걸린 게 오히려 용했다.
으득.
“이게 다 그 망할 놈의 책 때문이야.”
헌책방에서 샀던 그 낡은 책. 자신을 이세계로 끌고 온 원흉!
눈앞에 있다면 당장 복복 찢어 불쏘시개로 쓰고 싶은 그 책은, 아쉽게도 지금 시에나의 손에는 없었다.
그 책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해 보자면, 그건 <붉은 장미에 얽힌 비밀>이라는 고루한 이름의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었다.
여주와 남주가 운명적으로 만나 흑막을 물리치고 제국을 구원한다는 단순한 서사.
그러나 그 책은 꿈 많은 산골 소녀인 수빈에게는 로맨틱함의 결정체였다.
아무리 판에 짜인 듯한 소설이라도 아버지의 서재에 있는 지루한 약초 서적들보다 천 배는 나았으니까.
특히 여주와 남주가 키스하는 장면과 프러포즈 하는 장면은 이불 속에서 얼굴을 붉히면서 열 번도 넘게 보았던 것 같다.
대학에 가서 이런 로맨틱한 사랑을 꼭 해 보고 싶다 생각하며 잠이 들었던 수빈은 다음 날 그 책 속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것도 제국의 반을 무너뜨리는 흑막의 집에서 근무하는 하녀, ‘시에나’라는 하찮기 그지없는 엑스트라로 말이다.
시에나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자마자 꽥 비명을 질렀다.
아니, 내가 소설책 같은 사랑을 해보고 싶다 그랬지 언제 책 속에 넣어 달라 그랬어!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나름대로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던 시에나는 그때부터 가차 없이 신을 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뀌는 건 없었다. 일어나도 일어나도 시에나는 수빈으로 깨어나지 못했다.
결국 시에나는 흑막의 성 생활(?)에 적응해야만 했다.
흑막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해 보자면, 흑막의 이름은 데이몬 오웬 마르바스.
이제 막 열두 살이 된 어린 소년이었다.
그리고 데이몬은 지금으로부터 6년 후 열여덟의 나이에 각성해 제국의 반을 파괴한다.
데이몬이 각성하자마자 제일 먼저 소멸시키는 건 바로 시에나가 몸담고 있는 이 낡디낡은 성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시에나는 하던 빨래를 내팽개치고 방으로 돌아가 짐을 쌌다. 그러나 곧바로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시에나는 지금 돈이 없었다.
…….
한 푼도.
이 몸에 들어온 순간부터 전 주인의 기억도 공유하게 된 덕분에 수빈은 시에나에 대한 정보를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시에나는 현재 열다섯 살로, 한 달 전 홀로 자신을 키워 주던 아버지를 잃고 이 저택에 들어오게 되었다.
마르바스성은 사용인들에게 할 일은 넘치도록 많았지만 주어지는 급료는 짰다.
그런데 왜 시에나가 여기 들어왔냐고?
추천장이 없는 어린아이도 취직시켜 주는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온 거다.
그러나 어린아이에겐 성의 일이 너무 가혹했던 탓일까.
시에나는 고된 강도의 노동을 버티지 못하고 한밤중 심장마비로 꽥, 죽게 되었다.
그 몸에 수빈이 들어오게 되었고 말이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다.
시에나의 몸에 들어온 수빈은 6년 뒤에 일어날 제국의 멸망보다 당장 성을 나간 뒤의 삶이 걱정이었다.
지금 여기를 나간다 한들 경력이 없는 자신을 뽑아 줄 곳도 없는 데다, 설령 있다 해도 이 시골 벽촌에서 빠져나갈 돈조차 없었다.
시에나는 결국 힘들게 취직했는데 까 보니 거지 같은 회사였을 때 대부분의 신입들이 할 법한 생각을 떠올렸다.
딱 1년만 경력 쌓고 나가자!
그러나 시에나는 몰랐다.
그 선택이 시에나의 팔자를 대차게 꼬아 놓을 줄은.
* * *
그날도 시에나는 여느 때와 같이 복도를 청소하는 데 힘썼다.
낡은 목조 건물인지라 청소를 끊임없이 하는데도 다음 날이면 천장에서 떨어진 먼지가 가득했다.
그래도 아침 일찍부터 시작해서 점심 무렵에 복도 청소의 반을 끝낸 시에나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허리를 펴고 잠시 쉬고 있을 무렵 시에나의 바로 옆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이봐, 누구 없나.”
시에나는 깜짝 놀라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문 안에는 이 성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금실로 수를 놓은 푸른 옷 위에 빽빽하게 주름이 잡힌 칼라.
이 낡아 빠진 성에서 이런 차림을 할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리메리오 칼튼.
영주의 대리인이자 데이몬 도련님의 교육 담당자였다.
혹 농땡이를 부리는 줄 알까봐 시에나는 재빨리 옆에 놓인 대걸레를 들고 엄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카펫에 잉크가 떨어졌다.”
그러나 리메리오는 시에나를 혼내지 않았다.
아니, 그냥 시에나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저 지나가는 벌레를 보는 듯한 관심 정도였다.
시에나가 고개를 들고 안쪽을 슬쩍 들여다보자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베이지색 카펫에 까만 잉크가 범벅이었다.
잉크병이 열린 상태로 낙하한 모양이었다.
“바로 청소 도구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빨리 오도록.”
“예.”
달칵.
시에나는 긴장감에 손바닥에 배어 나온 땀을 에이프런에 슥슥 닦고 빠른 걸음으로 청소 도구실로 향했다.
* * *
덜컹.
시에나가 문을 연 청소 도구실에는 하녀 서넛이 옹기종기 모여 쉬고 있었다.
따로 휴식 공간이 없는 그들에게 청소 도구실은 좋은 휴식처였다.
그들은 시에나가 들어오자 반가운 표정으로 시에나를 맞이했다.
“시에나, 쉬러 온 거야?”
“여기 앉아. 칸나가 재밌는 얘기해 주고 있었어.”
“아니, 도련님 집무실 카펫이 잉크로 물들어서, 청소하러 가야 해.”
시에나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그들의 권유를 거절했다.
하녀들은 시에나의 말에 자기들끼리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시에나. 혹시 안에 리메리오 남작님도 계셨어?”
“응. 남작님께서 날 부르셨는걸.”
시에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청소 도구들을 챙겼다.
얼룩을 지우는 세제와 낡은 걸레를 집어 들었는데 그들이 동시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어휴. 또 시작인가 보다.”
“시에나, 여기 온 지 얼마나 되었지?”
“한 달이 좀 안 되었지? 갑자기 그건 왜?”
시에나는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하녀들을 바라보았다.
“그럼 모르겠구나. 이리 와 봐, 시에나. 들려줄 게 있어.”
“나 빨리 청소하러 가 봐야 하는데….”
“잠깐이면 돼. 어서.”
그들의 표정이 심각해 보여 시에나는 그들 사이로 총총 걸어 들어갔다.
그들은 시에나를 가운데 앉히고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참새처럼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에나, 일단 넌 들어가면 돌이 되었다고 생각해.”
“돌? 딱딱한 돌 말이야?”
“그래. 그 돌. 뭐, 물론 청소는 해야겠지만… 네가 들어가면 곧 리메리오 남작님이 데이몬 도련님께 꼬투리를 잡아서 매질을 시작할 거야.”
“그때 아무리 안타깝더라도 절대 아는 척하면 안 돼.”
“훈육을… 한다는 거야?”
귀족들의 교육은 그렇게 과격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건가.
예전에 본 책에서는 대신 매 맞는 아이도 있다고 들었는데.
시에나가 의아해하자 그들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훈육이 아니야. 그냥 화풀이 같은 거지.”
“리메리오 남작이 원래 수도에 있던 사람인데 여기로 오면서 출셋길이 완전히 막혔잖아. 그 화풀이를 데이몬 도련님한테 하더라고.”
“도련님이 불쌍하게 됐지… 그런데 거기서 말리면 너도 똑같은 꼴 된다.”
“3년 전에 어떤 하녀가 너무 과한 거 아니냐고 한 번 말했다가 엄청나게 두들겨 맞고 쫓겨나서 시름시름 앓다 죽었대.”
“넌 온 지 얼마 안 돼서 모를 테니까 우리가 대신 말해 주는 거야. 도련님이 맞는 동안 찍소리도 하지 말고 잉크만 빨리 지우고 나와.”
전혀 몰랐다.
리메리오 남작이 그렇게 잔혹한 사람인 줄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왜 그걸 굳이 우리들 앞에서 하는 거야?”
“누가 보는 앞에서 때리고 싶나 보지.”
“내 생각엔 그래. 즐기는 거야. 자기 권력을 과시하는 거지. 내가 비록 이 촌구석에 있지만, 일국의 황자를 이렇게 팰 수 있는 존재다!”
“그리고 도련님이 반항할 수 없게 만들어 놓는 거지. 저택에 네 편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까불지 말아라.”
하녀들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청소 도구를 쥔 손의 마디가 새하얗게 질렸다.
끔찍해.
아직 열두 살밖에 안 된 그 어린애한테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그렇게 손찌검한다는 걸까.
비열한 인간.
시에나의 일그러진 얼굴을 본 하녀들이 벌떡 일어나 나가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얘 얼굴 좀 봐, 사고 치겠네.”
“시에나. 이건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그래, 그래. 도련님이 아무리 지금 맞고 살지만 우리 인생만 하겠어?”
“남작이 아무리 비리비리해 보여도 귀족이야. 너 하나 해치우는 건 일도 아니라구.”
“약속하고 가. 아무런 사고도 안 치겠다고.”
그들은 진심으로 시에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걸 알기에 시에나는 그들에게 쏘아붙일 수 없었다.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속이 꽉 막혀 왔다.
“…알았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입술에서 한숨 같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들은 조금 안심한 얼굴로 시에나를 놓아주었다.
“다녀와. 시에나. 얼른 해치우고 와서 밥 먹자.”
“…응. 알았어. 다녀올게.”
씁쓸한 소태를 잔뜩 먹은 것처럼 입 안이 썼다.
복도를 걷는 내내 시에나는 축 늘어져 있었다.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하녀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나니 들어가기가 싫어졌다.
단순히 아이가 맞는 걸 보는 게 싫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기억 저편에 꽁꽁 숨겨 두었던 과거가 복도를 지날 때마다 물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집단 따돌림으로 인해 데이몬과 같은 나이에 죽었던 자신의 남동생, 수한이.
멍투성이의 몸으로 영안실에 누워 있던 수한의 모습을 떠올리자 시에나의 등허리에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체한 것처럼 명치께가 꽉 막힌 느낌에 시에나는 잠시 복도 위에 멈추었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숨쉬기가 힘들었다.
“후우….”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나서야 시에나의 새파란 눈이 총기를 찾았다.
걸음을 옮긴 시에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까 남작이 자신을 불렀던 문 앞에 섰다.
똑똑.
“카펫을 청소하러 왔습니다.”
“들어와.”
시에나는 도살장에 들어가는 돼지의 심정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늦었군.”
“죄송합니다. 세제가 떨어져서 채워 오느라 늦었습니다.”
형편없는 변명이었지만 리메리오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의 목표는 이름도 모르는 하녀가 아닌 데이몬이었으니까.
시에나는 잉크가 떨어진 카펫을 향해 걸어갔다.
이미 상당량의 잉크가 스며들어 보기 흉했다.
카펫 위에는 잉크병이 여전히 거꾸로 놓여 있었다.
정말 청소를 위해 부른 건 아닌 모양이었다.
카펫에 잉크가 스며드는 게 싫었다면 잉크병이 아직까지도 이렇게 뒤집혀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자리를 잡고 양동이 안에서 세제를 꺼낸 시에나는 잉크병을 제대로 세운 뒤 세제 통의 뚜껑을 열고 천천히 카펫을 향해 기울였다.
“우리는 성서를 이어서 공부하도록 하지.”
“예.”
귓가를 울리는 어린 목소리에 시에나는 슬쩍 데이몬을 바라보았다.
시에나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지라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열두 살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작고 말라 있었다.
의자에 등을 붙이고 앉은 데이몬의 발은 허공에 동동 떠 있었고, 해진 바지 끝단 사이로 슬쩍 보이는 발목은 겨울날의 나뭇가지처럼 앙상했다.
한참 성장기인데 충분한 영양 섭취를 못 하고 있는 건가.
그 모습이 또 수한의 모습과 겹쳐 보여 시에나는 고개를 푸르륵 저었다.
떠올리지 말자.
저 애는 내 남동생이 아닌걸.
아무리 마르고 못 먹었더라도 저 애는 열여덟까지는 산다.
내 동생과는 다르다.
여기서 끼어들면 나만 개죽음 당하는 거야.
가늘고 길게 살면서 이 빌어먹을 책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기에도 바쁘다.
시에나는 다시 고개를 돌린 채 잉크를 닦는 일에 열중했다.
세제를 적신 헝겊을 톡톡 두드려 스미게 하자 잉크의 가장자리 부분이 서서히 지워지기 시작했다.
“길 잃은 자가 춥고 배고파 울자 안개 속에서 속삭임이 들려왔다.”
“13장 4절입니다.”
“악마에게 시달리던 사람은 신전에 강림한 이스테라 여신에 의해 구원받았다.”
“25장 8절입니다.”
“영원한 안식의….”
‘머리 진짜 좋은가보다.’
성서를 훑으며 아무 구절이나 짚어 말하는 리메리오 남작의 물음에도 데이몬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객관식도 아니고 서술형을 저렇게 잘 답하다니.
어린아이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리메리오의 손끝이 두꺼운 성서를 대부분 훑었건만 데이몬은 아직까지 한 문제도 틀리지 않았다.
시에나는 어느새 속으로 데이몬을 열렬히 응원하게 되었다.
이대로 한 대도 맞지 않고 끝나지 않을까.
잠시 희망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리메리오는 이 상황이 영 마음에 차지 않았는지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성서를 훑다가 한 구절에서 멈추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여신은 사자를 타고 창을 든 채 사람들의 앞에 강림하였다.”
“3장 2절입니다.”
“틀렸다.”
그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건 신약의 경우다. 구약은 3장 1절에서 나오지.”
“…죄송합니다.”
아니 세상에 저렇게 치사할 수가!
완전한 트집이었지만 데이몬은 어떤 반항도 하지 않고 긍정했다.
시에나는 어이가 없어서 무례도 잊고 남작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데이몬에게 정신을 팔려 있던 리메리오는 그녀의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죄송하다면 벌을 받아야겠지. 얼마나 맞겠느냐?”
“남작님께서 주시는 대로 달게 받겠습니다.”
“너는 항상 똑같은 말만 하는군.”
데이몬의 담담한 목소리에 재미없다는 듯 리메리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찰캉.
리메리오 남작이 손목에 차고 있던 금팔찌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팔찌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진 손이 책상 밑 서랍을 열었다.
“책상을 짚고 서라. 열 대를 때리겠다. 한 번의 신음도 있어선 안 될 것이다.”
“예.”
사랑의 매라기보다는 각목에 가까운 회초리는 시에나의 손목보다 굵었다.
체벌이 아닌 폭력을 위해 만든 것 같았다.
걸레를 쥔 시에나의 손이 덜덜 떨려 왔다.
그러나 데이몬은 익숙한 듯 책상에 손을 짚고 섰다.
퍽.
살이 터지는 끔찍한 소리에 시에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데이몬은 작은 신음 하나 내지 않았다.
하녀들의 말대로 그의 체벌은 어린아이에게 할 만한 훈육이 아니었다.
그저 끔찍한 폭력이었다.
시에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자라왔으니 열여덟에 애가 폭발하지.
어린아이의 세계를 이렇게 망가뜨려 놓고 자신들은 평온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자만이었다.
퍼억.
듣기만 해도 온몸이 뻐근해질 정도로 아픈 소리가 시에나의 귓가에 선명하게 울렸다.
시에나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누나.
들릴 리 없는 수한의 목소리가 들리는 환청에 시에나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너도 저렇게 아팠을까. 그렇게 아프고 힘들었을까.
눈앞의 걸레에 시선을 두고 있었지만 온 신경은 데이몬에게 향해 있었다.
누나, 아파.
퍽!
여기에 있다가는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아 시에나는 걸레질에 속도를 붙였다.
너무 거세게 문지르면 카펫이 망가질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리메리오가 각목에 가까운 매를 들어 올려 소년의 몸을 강타할 때마다 시에나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겨우 다섯 걸음 거리에서 소년이 타당하지 않은 이유로 맞고 있었지만, 시에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무력했다.
끼어들면, 망하는 거야.
여기서 참견하면, 인생 종 치는 거야.
나는 여기서 죽은 듯이 일 년만 살다가, 경력 쌓아서 나갈 거야.
몰려오는 무력감에 코끝이 시큰했다.
시에나는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걸레질을 마쳤다.
이내 시에나의 청소도, 예고된 체벌도 마무리되었다.
리메리오는 데이몬을 때리는 게 힘에 부쳤는지 거친 숨소리를 내며 카라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러나 데이몬은 처음 모습 그대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고목처럼 서 있었다.
그게 리메리오의 화를 돋웠는지 그가 데이몬의 뺨을 갈겼다.
네 손가락 가득 반지가 끼워진 손과 어린아이의 뺨이 마찰하자 핏, 데이몬의 얼굴에 생채기가 났다.
“이… 악마의 자식!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군! 너 같은 건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행에 빠졌는지 알고 있나?”
“…죄송합니다.”
시에나는 짐을 챙기고 일어날 타이밍을 보고 있다 얼어붙었다.
뭐가 죄송하다는 걸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그는 데이몬이 자신에게 한 번도 반항도 하지 못하는 것이 만족스러운 듯 히죽 웃었다.
시에나는 그 모습이 더 악마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때리는 것은 전부 무엇이라고 했지?”
“저로 인해 불행해진 사람들의 원한입니다.”
“그래! 너 같은 악마의 새끼는 매로 교화를 시켜야 해! 이렇게!”
그렇게 말한 리메리오는 매로 데이몬의 작은 몸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기 시작했다.
귓속에서 삐- 하는 이명이 들렸다.
데이몬은 신음 하나 내지 않고 그 폭력을 그대로 받아 내었다.
이미 익숙하다는 듯. 아마 신음 소리를 내면 더 맞았던 거겠지.
둥글게 만 몸 사이로 데이몬이 빼꼼 고개를 들고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처음 마주하는 눈동자에 시에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린아이의 눈동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새카맣게 죽어 있는 눈동자.
큰 눈동자 속에 담긴 체념과 우울은 그가 살아온 세월을 설명하는 듯했다.
데이몬은 맞는 와중에도 시에나를 향해 입 모양으로 말했다.
‘얼른 나가.’
뚝.
귓가를 울리던 이명이 끊겼다.
데이몬은 그녀를 배려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이 그렇게 잔인하게 폭행당하는 와중에도.
누나, 나는 괜찮아.
어떻게 이렇게까지 닮았을까.
시에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잉크병을 든 채 일어났다.
어쩌면 데이몬의 나이가 수한과 같았을 때부터 결말은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눈에 내내 고여 있던 물줄기가 툭, 바닥 위에 떨어져 동그랗게 번졌다.
그래, 어쩌면 이건 기회일지도 모른다.
죽기 전에 수한에게 속죄할 기회.
“이 독한 자식…!”
아프다는 말 한 번 하지 않는 데이몬에게 독이 오른 리메리오는 책상 위에 놓인 주먹만 한 유리 세공품을 들었다.
천사 모양의 유리 세공품이 리메리오의 손에 번쩍 들렸다.
결국, 시에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만해, 미친놈아!”
시에나는 자신이 쥔 잉크병을 리메리오를 향해 힘껏 던졌다.
잉크병이 호선을 그리며 리메리오를 향해 순식간에 날아갔다.
깡!
“억!”
산골 야구 소녀 MVP의 실력답게 잉크병은 리메리오의 이마 정중앙에 정확히 명중했다.
데굴데굴데굴….
잉크병이 이마에 부딪힌 후 카펫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기껏 닦은 베이지색 카펫은 다시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자신의 이마에서 분수처럼 솟아 나오는 핏줄기와 시에나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눈을 까뒤집으며 뒤로 넘어갔다.
쿠웅.
성인 남성이 바닥으로 낙하하는 소리를 들으며 시에나는 생각했다.
사고 쳤구나!
* * *
검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지하 감옥 안에서 시에나는 잘게 몸을 떨었다.
스스스.
벽에는 이따금 다리 많은 벌레가 지나다녀 시에나는 맘 편히 벽에 몸을 기대지도 못하고 감옥 중앙에 오도카니 쪼그려 앉았다.
조금 더 참았어야 했을까.
그 순간에 조금만 더 참았다면 지금쯤 고된 하루를 끝내고 침대에서 곯아떨어졌겠지.
“아냐, 잘했어. 그래. 난 잘했어.”
시에나는 고개를 파드득 흔들었다.
시간을 되돌리더라도 자신은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냥 지나쳤다면 평생 마음에 남았겠지.
그렇지만… 자신의 처우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호, 혹시 사형이라거나.”
평민이 귀족을 때리는 건 때에 따라서는 즉결 처형도 가능했다.
게다가 이런 깡 시골에서 평민 하나 죽어 나가는 건 별로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모가지가 댕강 날아가는 장면이 떠오르자 시에나의 정신이 아찔해졌다.
“아아….”
그렇게 리메리오가 쓰러진 후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옆방에서 바로 리메리오의 수하 둘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빠르게 사태를 파악한 뒤 시에나를 포박해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갔다.
시에나는 기가 찼다.
애가 맞고 있을 때에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리메리오가 다치자마자 나타나 자신을 잡아가는 꼴이라니!
“사람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볼멘소리로 투덜거리던 시에나의 귓가에 철문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철문은 기름칠을 하지 않아서 나는 끼기긱, 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서서히 열렸다.
혹시 리메리오가 깨어난 건가.
시에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순식간에 몸이 긴장으로 굳었다.
어차피 사형이라면 가만히 맞고만 있진 않을 거다.
적어도 그 못된 놈이 후사를 볼 수 없게 만들어 주고 이 세상을 뜨리라.
“여기부터는 나 혼자 가겠네.”
“그래도… 그건…. 예, 알겠습니다.”
얇은 미성은 방문객이 리메리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작은 새가 눈길을 걷는 듯한 작은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데이몬이 등을 들고 나타났다.
“…도련님?”
데이몬은 굳은 표정으로 창살 너머의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마주친 두 눈이 서로를 탐색하듯 응시했다.
햇살을 본 적이 없는 듯 창백한 유백색 피부, 반듯한 이마를 덮은 칠흑같이 검은 머리칼, 치켜 올라가 고양이 같은 인상을 주는 눈꼬리와 고집스레 다물린 입.
물론 아직도 남작에게 맞은 상처가 가시지 않아 얼굴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고 볼과 눈은 부어 있었지만, 잘생긴 미소년이라는 사실은 누구라도 인정할 법했다.
그러나 시에나는 데이몬에게 묘한 감각을 느꼈다.
이 열두 살짜리 아이의 표정이나 몸짓이 마치 천 년 묵은 고목 같았다.
아이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라고는 작은 키나 볼살 정도일까.
그는 한참이나 시에나를 응시하다 툭, 내뱉었다.
“바보 같은 짓을 했군.”
뭐시라.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데, 데이몬은 방금 빚은커녕 감정만 상하게 만들었다.
시에나가 기분이 상해 데이몬에게 쏘아붙였다.
“원래 사용인은 주인을 닮는 법이죠.”
내가 바보면 너도 바보다, 임마.
시에나의 속뜻을 알아들었는지 데이몬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시에나도 지지 않고 데이몬을 노려보았다.
잠시간의 눈싸움 후 데이몬이 옅은 한숨을 쉬며 시에나에게 물었다.
“어쩌려고 남작에게 달려들었지? 이렇게 될 걸 몰랐던 건가?”
시에나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얘는 왜 편을 들어 줘도 난리야.
“저를 탓하러 오신 거라면 그만 가 주세요. 피곤해요.”
시에나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무례한 축객령에도 데이몬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 발끈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럴 거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그럼 왜 오신 건데요?”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시에나는 뾰족하게 말했다.
점심도 저녁도 굶은지라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원래 사람이 배고프면 예민해지는 법이다.
창살을 매만지던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순순히 대답했다.
“…네가 궁금해서.”
별로 도움 되는 말은 아니네.
시에나는 다시 축객령을 내리는 대신 푸스스 한숨을 쉬었다.
“네 이름은 뭐지?”
갑작스레 시작된 신상 조사에 시에나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무슨 생각일까 읽어 보려 애썼지만 데이몬의 눈동자는 호수처럼 고요했다.
“시에나예요.”
“성은?”
“평민들은 성 없어요.”
시에나의 말을 들은 데이몬이 침묵했다. 너무 딱 잘라서 말했나 싶어 데이몬을 슬쩍 바라보는데, 그는 난생 처음 첫눈을 본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평민들은 원래 다 성이 없는 건가?”
“…네.”
이 세계에 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았건만 여기서 12년이나 살았던 데이몬에게 이곳의 문화를 알려주고 있자니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건 시에나의 기억이었지만.
“그럼… 자유롭겠군.”
데이몬은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시에나는 그것이 데이몬 자신과 비교해서 하는 말임을 알아차렸다.
마르바스.
황족의 이름은 절대 그 무게가 가볍지 않았다.
이제 갓 열두 살이 된 소년이 매일같이 고통받을 만큼.
그러나 지금 시에나에게는 그 말이 속 편한 소리로 느껴졌다.
“그럼 뭐 해요. 평민 신분이라 제가 지금 여기 감옥에 갇혀 자유롭지 않은데.”
어린아이에게 짜증을 부리는 자신이 싫어지면서도 시에나는 말을 멈출 수 없었다.
마음 한편에 계속되는 불안감.
금방이라도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와 자신을 사형장으로 끌고 갈 것 같다는 상상이 시에나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걸 알면서도 왜 너는 남작에게 잉크병을 던졌지?”
“그러게요! 도련님이 이렇게 얄미운 소리만 할 줄 알았으면 그냥 맞게 뒀을 텐데!”
바락 소리를 지른 시에나는 곧바로 후회했다.
상대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다.
보듬어 준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홀로 자라온 애한테 부드럽게 대하지는 못할망정 어린애처럼 굴다니. 시에나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볼에 닿은 손바닥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죄송해요. 방금은 그냥 한 말이에요. 잊어주세요.”
“여기 온 걸 후회하고 있군.”
“네, 후회하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아마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행동할 거예요.”
“다시 여기 와 있을 걸 알면서도?”
데이몬이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네.”
“…어째서?”
“그게 옳은 일이니까요.”
“남작의 머리에 잉크병을 던지는 게?”
“어린아이를 폭력으로부터 구하는 게요!”
창살만 없었으면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데이몬은 얄밉게 말했다.
데이몬과의 대화는 속을 긁으면서도 답답하게 만들었다.
데이몬은 어딘가 결핍된 아이 같아 보였다.
자신의 안위나, 고통 같은 것에 대해.
누군가 자신을 위해 뭘 할 것이라곤 한 번도 상상해 보지도 않은 사람처럼 그는 시에나에게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닌지 집요하게 캐물었다. 그게 시에나를 조금 지치게 만들었다.
정말 다른 이유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던 시에나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혹시 남작이 철천지원수인가?”
“처음 봤는데요.”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한 거야?”
“도련님, 혹시 저 놀리려고 오신 거 아니죠?”
시에나가 의심 섞인 말투로 물었다. 데이몬이 펄쩍 뛰며 말했다.
“놀리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대체 왜 아까부터 바보 같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거 기분 나쁘거든요?”
어차피 죽을지도 모르는 거 할 말 다 하자는 생각으로 시에나는 데이몬의 말투를 지적했다.
“미, 미안. 나는 그냥 좀, 네가…신기해서. 그렇게 행동 할 수 있었던 게 신기해서 그랬다.”
데이몬은 시에나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지금까지 저에게 그렇게 해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겠지. 시에나는 샐쭉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그렇게 행동했던 이유는 단순해요. 그거 맞으면 도련님 죽을 것 같았거든요.”
“그건…조금 바보 같군. 남작은 날 못 죽여.”
그러면 안 되지만 시에나는 데이몬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시에나가 뭐라고 쏘아붙이기 전 데이몬이 덧붙였다.
“나는 저주받았으니까.”
데이몬은 동화에나 나올 법한 말을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그 모습이 사뭇 나이 든 어른처럼 보여 시에나는 입이 썼다.
데이몬이 말하는 저주는 신탁이었다.
이야기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저주.
13년 전, 황제와 황비의 결혼식 날에 신탁이 내려왔다.
‘저 여자의 자식은 제국을 죽이고, 제국을 살릴 것이다.’
제국이 죽고 살아난다니.
모호하지만 두려운 신탁에 귀족들은 둘의 결혼을 반대했었지만, 둘은 이미 사고를 친 뒤였다.
신탁이 내려왔을 때 황비는 이미 임신 중이었다.
황손을 죽이는 것 자체가 역모인데다, 황비를 지키는 황제의 기세가 워낙 무시무시해 황비는 배 속의 아이를 무사히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틀이 넘는 난산 끝에 황비는 죽고 만다. 죽은 황비의 배에서 꺼낸 건, 불행을 가져다준다는 쌍둥이였다.
황비가 둘째를 낳다가 죽었기 때문에 황제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둘째인 데이몬이 불행의 아이라고 단정짓는다. 핏덩이에 불과한 아이를 없애려 검을 들었을 때 기적과도 같이 두 번째 신탁이 내려온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기 전에 둘 중 하나라도 죽는다면,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황비에 이어 진정한 자식까지 죽일 수 없었던 황제는 데이몬을 한 번 안아 보지도 않고 지방 영지에 처박아 버린다.
그렇지만, 죽이지 않는 게 다가 아니다.
데이몬도 인간인 이상, 베이면 따갑고, 찔리면 아프다.
그 당연한 사실을 데이몬에게 알려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걸까.
“그렇다고 맞는 게 아프지 않은 건 아니잖아요.”
시에나의 말에 데이몬의 호박색 눈이 크게 뜨였다.
어두운 곳에 있어 확장된 동공이 거울처럼 맑고 투명했다.
이제야 좀 사람 같네.
시에나가 보일락 말락 짧게 미소 지었다.
“너는 저주를 믿지 않나?”
글쎄.
저주에 대해 제국에서 가장 확실히 알고 있는 건 아마도 시에나였다.
제국의 반을 멸망시킨 데이몬을 죽이는 그의 형, 카이난.
그 옆에는 성녀인 여주인공 엘리샤.
그렇지만 지금 시에나의 앞에 있는 데이몬은 상처를 너무 받아 이게 상처인 것도 모르는 작은 어린아이였다.
“믿어요.”
데이몬의 눈에 언뜻 실망이 스쳤다.
시에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도련님이라도 이런 운명을 준 더러운 세상 다 부숴 버리고 싶을 것 같거든요.”
데이몬은 시에나의 말에 머리통을 한 대 맞은 표정이었다.
이런 대답을 들을 줄 전혀 몰랐다는 듯 붉은 입술 사이로 짧은 숨이 흘러나왔다.
“너는 이상한 사람이다. 꼭…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아.”
콜록, 시에나는 자기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이 새파랗게 어린아이는 의외로 정곡을 찌르는 재주가 있었다.
몇날 며칠을 함께 일했던 친구들도 몰랐는데.
“다른 세계라뇨. 비약이 심하시네요.”
“그렇지. 그냥, 이런 말을 해 준 건 네가 처음이라.”
데이몬은 꿈꾸는 듯 몽롱한 눈으로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금안에 박힌 별빛이 감옥 안에서도 영롱하게 빛났다.
“참, 네게 줄 게 있다.”
그가 꿈에서 깨어난 듯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품속을 뒤적거렸다.
혹시 감옥 열쇠인가.
탈출시켜 주기 위해 가져온 건가.
사랑을 자각한 사람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래, 괜히 온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 마음 속으로 일생일대의 도주기를 혼자서 제작하고 있는데 데이몬이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아, 찾았다.”
품속을 한참이나 뒤적이던 데이몬은 환한 얼굴로 손에 쥔 물건을 시에나에게 내밀었다. 작고 꼬질꼬질한 손안에 들려 있는 건 다름 아닌….
“…빵?”
“내 저녁 식사다. 몰래 가져왔어. 식사도 못 했을 테니까.”
데이몬이 빨리 받으라는 듯 손을 흔든 탓에 시에나는 무심코 딱딱한 갈색 빵을 받아 들었다. 그의 얼굴에 뿌듯함이 감돌고 있었다.
음, 그래도 귀엽긴 하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안 그래도 하루종일 쫄쫄 굶어 하늘이 노랗게 보이던 참이었다.
시에나는 피식 웃으며 빵을 먹으려 입을 벌렸다.
꾸르르륵.
단언하건데 이건 시에나의 배 속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시에나가 어이 없다는 듯 데이몬을 바라보았다.
데이몬이 홍당무처럼 물든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추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니다!”
“뭐가요?”
“아… 아무튼 아니다!”
“아, 네.”
시에나는 한 번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러나 시에나의 손에 쥐어진 빵을 바라보는 데이몬의 눈빛은 상당히 탐욕스러웠다.
적당히 먹고 남은 걸 가져온 줄 알았더니, 잘못 씹으면 강냉이가 나갈 것 같은 딱딱한 갈색 빵 하나가 정말 그의 저녁 식사였나 보다.
궁에서 돈도 나오고 있을 텐데, 대체 왜 이런 걸 먹는 거야?
그러니까 키가 안 크지.
꾸르르르륵.
데이몬의 배에서 아까보다 더 큰 소리가 들려왔다.
데이몬은 이제는 아예 모른 척을 할 모양인지 허밍으로 자신의 배에서 나는 소리를 막고 있었다.
“으으음… 흐으음….”
꾸르르르르르르르르륵.
그러나 허밍보다 배에서 나는 소리가 더 컸다.
데이몬의 얼굴은 이제 거의 홍당무처럼 익어 있었다.
오밤중에 때아닌 도련님의 수치 플레이를 보게 된 시에나는 공감성 수치를 이기지 못하고 빵을 다시 내밀었다.
“저는 배 안 고프니까 그냥 도련님 드세요.”
도저히 죄책감이 들어서 못 먹겠다.
데이몬이 펄쩍 뛰며 거절했다.
“너 먹으라고 챙겨온 거야! 네가 먹어야지.”
“저 괜찮아요. 그리고 어차피 저 곧 죽을지도 모르잖아요. 죽으면 흙 될 거, 뭐 하러 먹어요. 조금이라도 오래 사시는 도련님 드세요.”
“죽는다니… 말도 안 되는…!”
시에나의 뼈 있는 말에 데이몬이 인상을 찌푸렸다.
떠본 건데. 나 혹시 안 죽나?
시에나의 눈동자에 희망의 빛이 차올랐다.
“그런 일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열 받네, 이 꼬맹이.
시에나가 울컥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하는데, 데이몬이 다시 창살 사이로 손을 넣어 그녀의 손에 기어코 빵을 쥐여 주었다.
“뭐예요? 저 필요 없다니까….”
“괜찮다. 네가 먹는 게 더 배부를 듯해.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내가 최대한 손을 써 보겠다. 너는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니까.”
“…도련님이요?”
시에나의 믿기지 않는다는 말투에 데이몬이 입을 삐죽였다.
그새 정이 들었는지 데이몬이 조금 귀여워 보이는 것도 같았다.
시에나는 창살 사이로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배냇머리처럼 얇은 머리칼이 그녀의 손에 부드럽게 엉겼다.
잘 익은 밀밭을 손끝으로 스치는 감촉에 취해 있다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자, 데이몬의 얼굴이 토마토밭이었다.
“이, 이게 뭐 하는 거지?”
“머리 쓰다듬는 건데요.”
“왜… 머리를 쓰다듬는 거지? 이 행위에 무슨 의미가 있지?”
“무슨 의미까지야… 그냥 귀여…. 고마워서죠.”
고맙다기보단 사실 귀여웠지만 그렇게 말하면 자존심 상할 것 같아 시에나는 적당히 둘러대었다. 열두 살짜리 애가 누군가를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사랑스럽다고 느끼지 않을까.
데이몬은 시에나가 자신을 귀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는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진심이다. 남작이 네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만들겠어.”
“네.”
“믿지 않는군.”
“아뇨, 믿어요.”
정곡을 찔린 시에나가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손을.”
데이몬은 시에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시에나는 의아해하면서도 데이몬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데이몬은 조심스레 시에나의 손등에 키스했다. 손등에 닿는 입술의 감촉은 까끌까끌하고 따뜻했다.
“데이몬 오웬 마르바스의 이름을 걸고 시에나 너를 지키겠다고 맹세하지.”
데이몬은 단단히 결심한 것 같았다.
시에나는 별로 믿음은 가지 않았지만, 딱히 믿을 구석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작은 용사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기대할게요.”
* * *
“나와라.”
감옥에서 쭈그려 있다가 설핏 잠이 들었던 모양인지, 시에나는 남자의 딱딱한 목소리에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시에나의 잠을 깨운 건 데이몬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도 둥근 머리통이 조명에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남자는 시에나를 바라보며 심술궂게 웃었다. 그는 자신을 감옥에 끌고 온 리메리오의 수하 중 하나였다.
시에나는 실망감을 느끼는 자신에게 놀랐다.
그 꼬마가 진짜로 뭘 해낼 거라 은연중에 믿고 있었나 보다.
걔는 고작 열두 살짜리 어린앤데.
시에나는 속으로 조소하며 열린 감옥 문밖으로 조심스레 걸어 나왔다.
그는 시에나의 손을 뒤로 돌려 거친 줄로 단단히 포박했다.
통로를 걷기 시작한 시에나가 남자에게 물었다.
“저어…. 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우스운 질문이군. 너처럼 하잘것없는 계집애가 남작님께 손대고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그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투로 말했다.
답을 들은 시에나는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죽는다니. 영화에서 본 것처럼 교수형이라도 당하는 걸까.
야! 살려 준다며!
시에나는 그때 이후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데이몬을 생각하며 속으로 외쳤다.
“일어나라.”
“아니, 저기. 잠깐만… 타임. 타임이요.”
“타임은 저기 주방장 이름이 타임이고. 너한테 줄 타임은 없다. 크크크.”
그는 자신이 굉장히 재미있는 농담을 했다는 느꼈는지 뒤에 있는 동료를 슬쩍 보았다. 동료는 더없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따위 농담을 해 놓고 무슨 호응을 바라냐?”
"크흠."
동료의 지적이 못내 민망했는지 남자가 사색이 된 시에나를 거칠게 일으켰다. 겨우 서나 했더니 다리에 힘이 풀려 시에나는 도로 털썩 주저앉았다.
허, 한숨을 쉰 남자가 시에나를 옆구리에 달랑 끼웠다.
잘 먹지 못한 시에나의 몸은 너무나 가볍게 들렸다.
"뭐, 뭐 하는 짓이에요!"
"씁! 일어나지도 못하는 게, 도와주면 가만히 받기나 해!"
뭘 도와준다는 거야! 사형장으로 끌고 가는 주제에!
시에나는 남자의 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마냥 몸을 비틀며 바둥거렸지만, 성인 남자의 힘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 시에나는 포박된 채로 사내의 옆구리에 끼어 달랑달랑 바깥으로 향했다.
* * *
남자가 시에나를 끌고 간 곳은 텅 빈 정원이었다.
원래는 나무와 꽃이 곳곳에 심겨 있어야 하지만,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풀 한 포기조차 심지 않아 황량한 공터가 된 지 오래였다.
정원에는 성의 사용인들이 대부분 모여 있었는데,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엊그제만 해도 한솥밥을 먹던 사람이 사형당하는 상황이니 그럴 만도 했다.
공터의 중앙에는 머리에 붕대를 둘둘 감은 남작이 시에나를 찢어발길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는 마차를 타고 가면서 봐도 볼 수 있을 듯한 커다란 혹이 달려 있었다. 적의에 찬 남작의 눈길에 등줄기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이게 어디서 개수작이야?”
남작의 주변에 가고 싶지 않아 발끝을 질질 끌어 보았지만, 남자는 시에나를 타박하며 더욱 높이 들어 올렸다.
결국 시에나는 공터의 중앙이자 남작의 앞에 포박된 채 무릎 꿇어야 했다.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었지만, 장정 둘이 시에나의 바로 옆에 우뚝 서 있어 그녀는 도망조차 칠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인 시에나에게 코웃음을 친 남작은 모두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다들 왜 이 계집이 사형당하는 지 궁금하겠지.”
마술의 비밀을 밝히는 마술사처럼 남작이 사용인들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사용인들 몇몇이 침을 꿀꺽 삼키며 남작의 뒷말을 기다렸다. 잠시간의 침묵 후 남작이 입을 열었다.
“이 미천한 것이 감히 주제도 모르고 어제 나를 살해하려고 했다.”
그 순간, 사람들이 일제히 술렁였다.
어제 시에나와 청소 도구실에서 대화를 하던 하녀들이 사색이 된 얼굴로 시에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련님을 교육하고 있던 내게 갑자기 잉크병을 던지고 짐승처럼 달려들더군.”
“다, 달려들지는 않았어요.”
시에나가 조그맣게 남작에게 말했다.
남작은 기가 찬다는 눈빛으로 시에나를 노려보았다.
“네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냐?”
“아뇨, 거짓말을 하시진 않았으면 해서요. 그리고 제가 잉크병을 던진 건 남작님께 죄 없이 폭행당하는 도련님을 구해 내고 싶어서였어요.”
시에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최대한 또박또박 반박했다.
남작은 싹싹 빌 줄 알았던 시에나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내, 내가 언제 도련님을 때렸단 말이냐.”
“과하게 때리셨어요. 악마의 자식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더 악마같이.”
“그저 훈육이었을 뿐이다. 너처럼 미천한 것이 뭘 안다고!”
“트집을 잡아서 주먹질을 하고, 유리 세공품으로 머리를 때리려던 게 훈육인가요? 그건 엄연한 폭력이에요! 죽을 수도 있었다고요.”
시에나는 믿는 구석이 있어서 말을 막 하는 건 아니었다.
인파 속을 훑어 보았지만 데이몬은 없었다.
죄책감 때문에 오지 않은 걸까.
어차피 죽을 목숨, 말이라도 다 하고 죽자는 마음가짐으로 시에나는 제가 본 것을 죄다 얘기했다.
사람들은 시에나의 말에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진짜 그렇게 가혹하게 때렸단 말이야?”
“너 몰랐어? 유명하잖아… 하녀 하나 불러 놓고 개 패듯이 패는 거….”
눈덩이처럼 커지는 말소리에 남작은 돌아서서 그들을 홱 노려보았다.
“나서지도 못할 것들이 입만 살았군.”
남작의 지적에 사위가 다시 고요해졌다. 남작이 검집으로 시에나의 턱을 들어 올렸다. 햇빛에 시에나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났다.
“하. 역시 그건 악마의 자식이 틀림없군. 하녀까지 홀리다니 말이야.”
비꼬는 게 역력한 말투에 시에나는 입술이 새하얘지도록 깨물었다.
남작은 그런 시에나를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스르릉, 새파랗게 날이 갈린 검날이 드러났다.
“악마에 홀린 불쌍한 영혼을 내가 친히 신의 품으로 보내 주도록 하지.”
저 미친놈.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남작은 들고 있는 검 끝으로 시에나의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잘 벼려진 칼은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피부의 얇은 표피를 찢었다.
시에나의 새하얀 목 아래로 새빨간 선혈이 한줄기 흘러 흙바닥에 스며들었다.
고개를 들자 금빛 머리칼이 밑으로 가라앉으며, 푸른 불꽃 같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제 숨통을 끊을 수 있는 칼이 턱 아래 드리워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에나의 눈동자에 비친 남작은 여전히 왜소하고 비열했다.
남작은 뒤에 서 있는 다 쓰러져가는 성의 주인이 되기에도 한참이나 모자랐다. 석상처럼 굳어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 수많은 사용인들도 그에겐 과분했다.
시에나가 생각하기에 그는 정말, 아무런 자격도 없는 사내였다.
시에나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조소했다.
저를 이렇게 만들었으면서 마지막에나 꺼내는 같잖은 자비가 우스웠다.
뺨이라도 한 대 올려치고 싶었지만, 손과 발이 단단히 결박된 시에나로서는 꿈만 같은 일이었다.
심지어 시에나의 주변에는 남자들이 포진해 있었다.
양손이 자유롭다 한들 뺨을 날리기도 전에 제 목 같은 건 싹둑 잘리리라.
시에나는 마지막에 쓸데없는 반항을 하는 대신 남작을 바라보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무어라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거기에 넘어간 남작이 시에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뭐라는……!”
그때였다. 남작의 볼에 시에나가 침을 뱉은 건.
남작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앙상한 제 뺨을 쓸었다.
제 볼에 묻은 투명하고 끈적한 것을 만지고 나서야 사태를 파악한 남작의 눈에 순식간에 분노가 차올랐다.
“이 건방진 것-!”
유유자적하는 꼴을 보다 이렇게 여유를 잃은 꼴을 보니 고소했다.
시에나는 꿇어앉은 채로 사람들에게 다 들릴 만큼 크게 소리쳤다.
“당신은 힘없는 어린아이를 때리는 걸로 밖에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지 못하는 불쌍하고 한심한 인간이야.”
“천한 입이라고 아무렇게나 놀리는구나! 이런 미천한 것에게 자비를 베푼 내가 멍청했지.”
시에나의 턱을 들고 있던 검이 하늘을 향했다.
무의식적으로 검을 따라 시선을 위로 올리자 내리쬐는 햇살이 눈동자에 아프게 파고들었다.
시에나는 눈썹을 찡그리며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눈꼬리를 타고 얇은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시에나는 기도하듯 뒤로 묶인 손에 깍지를 끼웠다.
세게 쥐어 새하얘진 손 마디가 어쩔 수 없이 바들바들 떨렸다.
혹시라도 두려움에 찬 신음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시에나는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제발 고통이 길지 않기를.
이대로 책에 들어온 악몽도 끝나주기를.
그러나 남작은 배부른 사자처럼 굴며 몇 번이나 시에나를 가지고 놀았다.
검신이 훙, 훙 소리를 내며 그녀의 목에 닿았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서늘한 검의 감촉이 목덜미에 느껴질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피가 차갑게 식었다.
“너 지금 무섭구나. 응? 아주 무서워 죽겠지?”
시에나가 움찔거릴 때마다 남작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낄낄대고 웃었다.
시에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굴욕적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두려움과 수치심에 아프도록 깨문 입술에서는 어느새 핏방울이 맺혔다.
눈을 뜨고 앞의 상황을 바라보고 싶었지만, 그 순간 남작이 제 목을 내리칠 것 같아 차마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극도의 긴장감에 가슴이 누군가 후벼 패는 듯 조여들었다.
무참하게 쏟아지는 뙤약볕에 콧잔등을 타고 땀이 흘러내리는 즈음이었다.
저 멀리서 희미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남작의 목소리가 뭉개지고, 순식간에 소리의 초점이 먼 곳에 맞춰졌다.
말은 한 마리가 아니었다.
수십 개의 말발굽 소리가 전쟁이라도 치르듯 전력을 다해 제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설마.’
칼이 제 앞에서 노니는데 희망을 품는다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알면서도 설레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시에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요동치는 심장이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말발굽 소리는 어느새 이러다 치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후우웅, 말보다 먼저 불어온 모래바람이 시에나를 스쳤다.
“멈춰-!”
명령하기엔 조금 앳된 목소리가 시에나의 귀에 꽂혔다.
절박함이 묻어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시에나는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강렬하게 쏟아지는 햇살 사이로 수십의 인영이 어른거렸다.
눈을 깜빡이며 초점을 조이자 은색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말을 타고 오솔길을 따라 저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개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앞에서 선두로 달리고 있는 데이몬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임이 분명해 보이는 데이몬은 저를 향해 절박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고함을 치듯 벌린 입에선 소년 특유의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멈추라고-!”
시에나는 어느새 아플 정도로 물고 있던 입술을 슬 벌렸다.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건 남작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시에나를 향해 휘두르려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남작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턱을 덜덜 떨며 손에 힘을 풀었다.
탱그랑-.
추락한 검은 흙바닥 위에서 회전하더니 이내 힘없이 늘어졌다.
말에서 내린 병사들이 남작을 순식간에 포박했다.
“시에나-!”
데이몬은 말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채 거의 낙마하듯 말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자신에게 닿지 못하면 시에나가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그녀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시에나가 곧 죽기라도 할 것처럼.
그런 데이몬의 모습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부지불식간에 눈물이 고여 들었다.
“도련님…….”
시에나는 몸을 제대로 운신하기도 힘든 벅찬 전율에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이내 입술을 깨물었다.
헝클어진 머리에 생채기로 가득한 얼굴.
튿어지고 찢겨 엉망이 된 옷을 입고 있는 데이몬은 분명 꼴사나운 모습이었으나, 시에나를 향해 달려오는 그는 분명 그 순간만큼은 누구보다도 위대한 그녀의 작은 영웅이었다.
* * *
“고, 공작 각하. 여기에는 어쩐 일로….”
데이몬의 뒤를 따라온 것은 기사뿐만이 아니었다. 남작은 사색이 되어 칼도 내팽개치고 달려가 윤기가 흐르는 흑색 말을 탄 공작 아래 부복했다.
“내가 내 조카의 영지에 오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공작은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남작에게 나직이 쏘아붙였다. 완전히 마음을 놓은 시에나가 데이몬이 열심히 그녀의 손목을 포박하고 있는 밧줄을 푸는 새 공작을 은근슬쩍 훑었다.
햇살이 강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공작의 분위기는 데이몬과 흡사했다. 다른 건 새하얗다 못해 창백해 보이는 데이몬과는 달리 공작은 햇빛에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말을 타고 오느라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 아래의 이마가 반듯했다.
깊게 파인 아이홀 위에 적당히 산을 그리는 눈썹은 온화한 느낌을 자아냈지만, 전체적으로 선이 굵은 이목구비와 단단한 광대뼈 아래 패인 볼에서는 위협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평생 남 아래 있어본 적 없는 사람 특유의 위압적인 분위기에 자연스레 고개가 숙여지면서도 힐끔힐끔 올려다 보고 싶어지는 외모였다.
철제 갑옷을 입은 기사들에 비해 그는 한 겹의 미늘 갑옷만을 착용하고 있었지만, 덩치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과 거의 비슷했다. 그 기사들의 몸집이 시에나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걸 생각하면 공작은 거의 거인인가 싶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 그런 건 아닙니다만….”
공작의 날카로운 물음에 남작은 대답하지 못하고 쩔쩔매었다. 불쾌하다는 듯 공작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는 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포박하라.”
말에서 내린 기사들이 쿵쿵거리며 달려와 남작을 포박했다. 남작이 새파랗게 질려 공작을 향해 소리쳤다.
“오, 오해십니다!”
“뭐가 오해라는 말이지?”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저 작은 훈육을 했을 뿐입니다! 도련님을 교화시키기 위해…!”
“오만하군.”
공작이 분노에 찬 말투로 싸늘하게 내뱉었다. 변명을 주절거리던 남작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네게 황족을 교화시킬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 데이몬 황자 전하께서는 다른 분들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뭐가 다르다는 거지?”
“데이몬 전하께서는 저, 저주를…!”
남작의 앞에 후웅, 바람이 일었다. 어느새 그의 이마에는 주름 같은 실금이 그어져 있었다. 남자의 머리칼이 아래로 후두둑 떨어졌다. 공작이 언제 꺼냈는지 모를 검을 검집 안에 집어넣었다.
“히, 히이익…!”
눈 깜짝할 새 남작의 이마가 찢어지더니 피가 흘러내렸다. 성성한 눈썹이 막아주지 못할 정도로 흐르는 핏줄기가 남작의 눈꺼풀을 닫았다.
“네까짓 게 함부로 나불거릴 신탁이 아니다.”
“죄, 죄송합니다. 부디 용서를…!”
남작이 흙바닥에 무릎 꿇은 채 공작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처절하게 애원했다. 그런 남작을 바라보며 공작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머리카락 말고 손목도 분리되길 원하나 보지.”
공작의 말에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던 남작이 파드득 놀라 손을 떼었다. 시에나는 완전히 역전된 남작과 저의 관계에 묘한 쾌감을 느꼈다.
“데이몬의 몸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수많은 흉터들이 남아 있더군. 그리고 생긴 지 하루가 지나지 않은 듯한 상처들도 말이야.”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는 듯 공작이 어금니를 으득 갈았다.
사람 서넛은 베어 버릴 듯한 그 흉포한 분위기에 남작이 쩔쩔매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 그것은… 제가 다 설명 드릴 수 있습니다.”
“리메리오 남작. 그대는 조카를 잘 돌봐 달라는 내 말이 그리도 우스웠나?”
“우, 우습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요.”
“내가 영지를 방문했을 때 다정한 보호자 연기를 하며 날 기만하는 것 또한 즐거웠겠군.”
“저, 저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그건 전부 제 수하들이 한 겁니다. 저는 정말 데이몬에게 좋은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시에나는 어이없다는 듯 남작을 바라보았다.
남작을 버러지처럼 바라보던 공작은 고개를 돌려 데이몬을 가만히 응시했다.
데이몬 역시 무표정하게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서로를 응시하는 느른한 분위기가 거울처럼 닮아 있었다.
“데이몬, 네게 묻겠다. 이자가 정말 너에게 좋은 아버지 같은 존재였느냐?”
“데, 데이몬 도련님! 도련님이 어렸을 때부터 제가 업어 키우고 손수 먹여오지 않았습니까! 그, 그걸 모른 체하시면 정말 천벌 받으십니다.”
“더 이상 주둥이를 나불대면 그 입도 마저 날려 주지.”
데이몬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남작의 행동에 공작은 칼날을 남작의 입에 들이댔다.
그 재빠른 행동에 남작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문 채 쪼그라들었다.
데이몬의 입술이 달싹이더니, 이내 또렷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언제나 저를 악마의 자식으로 부르셨으면서, 왜 악마가 되려 하십니까. 리메리오 남작.”
그 이후 데이몬은 입을 다물었지만, 대답은 충분했다.
남작은 사색이 된 얼굴로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공작이 더 빨랐다.
“오늘부로 그대가 가진 마르바스성의 대리인 자격과 데이몬의 보호자 자격을 박탈한다. 또한 황족을 폭행하고 시해하려 한 죄는 재판장에서 낱낱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고, 공작 각하… 오해가… 이, 이거 놓아라!”
남작을 포박하고 있던 기사들이 그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남작은 아까의 시에나처럼 발버둥치며 소리를 질렀지만, 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에나를 포박했던 수하들조차 자신들에게 죄를 떠넘기려 한 리메리오 남작을 벌레 보듯 바라볼 뿐이었다.
아직도 서늘한 느낌이 드는 목을 매만지고 있는데,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공작이 그녀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공작의 얼굴에서 묘한 기시감이 느껴져 시에나는 무례도 잊고 그의 얼굴을 계속 응시했다.
“아.”
이제 기억이 났다.
워낙 짧은 문장으로 묘사되어 있어 기억나지 않았었는데, 공작은 현 황제의 동생이자 데이몬에게 유일하게 애정을 주었던 인물이었다.
다만 데이몬이 열여덟이 되기 직전, 이유 모를 병으로 죽었다고 들었다.
세상에 의지 하는 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던 데이몬에게 공작의 죽음은 흑화를 앞당기는 기폭제가 되었었다.
맞아. 그랬었지.
시에나가 책에 대해 계속 떠올리고 있을 무렵, 데이몬은 천천히 공작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데이몬의 얼굴은 어제 가해진 남작의 폭력으로 여전히 붓고 멍이 들어 있었지만, 비바람이 걷히고 환한 햇살을 맞이한 사람처럼 반짝거렸다. 데이몬은 공작에게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공작 각하.”
수심에 차 데이몬의 얼굴을 살피던 공작은 그의 얼굴을 안쓰럽다는 듯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린 잠시 안에 들어가 이야기를 좀 하도록 하지.”
“예, 알겠습니다.”
“아, 그쪽… 시에나라고 했나. 지금 바쁜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같이 들어가서 함께 얘기하고 싶은데.”
“저… 저요?”
시에나는 갑작스러운 공작의 제안에 눈을 크게 떴다. 공작의 제안을 시에나가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시에나는 하녀복의 치맛단을 잡고 공작과 데이몬을 향해 총총 걸어갔다. 그런 셋의 뒤로 정오의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었다.
* * *
달칵.
공작은 이가 빠진 찻잔을 우아하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모든 동작에 절도와 기품이 넘쳐 시에나는 그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이게 진짜 귀족이라는 걸까.
“데이몬.”
“예, 공작 각하.”
“공작 각하라니. 숙부라고 부르렴.”
“네… 숙부님.”
“언제부터였지?”
“예?”
“그가 너를 때린 게 언제부터였냔 말이다.”
다급히 오느라 공작은 데이몬으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진 못한 모양이었다.
공작은 궁금증 많은 소년처럼 데이몬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네 살 때부터입니다.”
세상에. 시에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핏덩이 같은 어린 애를 때리면서 남작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공작도 시에나와 비슷한 감정이었는지 핏기가 사라질 정도로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왜 지금까지 리메리오 남작에게 폭행 당한 걸 말하지 않았지?”
시에나 역시 궁금하던 찰나였다.
데이몬을 아끼는 든든한 보호자가 있는데 어째서 그에게 리메리오의 행동을 고하지 않았던 걸까.
말하는 걸 들어 보니 공작은 이따금 이 성을 방문하기도 했던 것 같은데.
“숙부님께서도 오늘 아침에 뭘 드셨는지 저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건 굳이 네게 말할 필요 없을 정도로 단순한 일이기 때문이야. 네가 당한 건… 그런 단순한 일이 아니지 않았느냐.”
탓한다기보다는 미안함과 슬픔이 섞인 말투였다.
데이몬은 잠시 침묵하더니 대답했다.
“저는… 그게 단순하지 않은 일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네 몸에 남은 흉터만 수십 개가 넘는다. 어떻게 그게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걸 모를 수가 있어!”
공작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데이몬은 반응하지 않고 그런 공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데이몬의 맑은 눈동자는 어느새 혼란이 뒤섞여 탁해져 있었다.
지금까지 그게 잘못된 거라고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모양이었다.
시에나는 나서도 되나 망설이다 조심스레 공작에게 말을 꺼냈다.
“그게 단순하지 않은 일이라는 걸 도련님께 알려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분노와 슬픔이 가득 차 있던 공작의 시선이 시에나에게 향했다.
시에나가 주눅 들어 쭈뼛쭈뼛 데이몬의 곁으로 한 걸음 옮겼다.
공작은 허탈함에 가득 차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그의 얼굴은 자괴감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이 성의 하녀보다도 보호자 자격이 없었군.”
씁쓸한 표정에 둘은 잠시 침묵했다.
공작 역시 이 일로 많은 상처를 받은 모양이었다.
“…숙부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 공작을 위로하듯 데이몬은 테이블 위에 얹어진 공작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평생을 검을 잡고 살아온 두껍고 거친 손 위에 갓 자란 단풍잎같이 작고 보드라운 아이의 손이 얹혔다.
오히려 데이몬은 공작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 어른스러운 모습이 시에나와 공작의 가슴을 더 아프게 했다.
그러고 보니 데이몬은 제가 남작에게 폭행 당할 때에도 시에나에게 어서 나가보라 말했다.
당황한 그녀를 배려함이었으리라.
대체 너는 어떻게 그렇게 착할 수가 있니.
데이몬의 선량함에 오히려 가슴이 저렸다.
공작은 목이 메어 오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두툼한 입술을 꽉 깨문 공작이 몸을 가늘게 떨었다.
힉.
왠지 더는 보면 안 될 것 같아 시에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차, 차를 좀 더 가져오겠습니다!”
무례하게도 허락도 받지 않고 방을 나섰지만 그런 시에나를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에나가 복도로 나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거 아무래도 엄청난 집안 사정에 끼어버린 것 같은데.
“저어, 시에나.”
그때, 누군가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시에나를 불렀다.
옆을 돌아보자 그때 청소 도구실에 있던 메리와 제인, 칸나가 시에나를 부르고 있었다.
시에나가 미소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얘들아.”
시에나 역시 다정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화답했다.
그들은 우물쭈물하며 시에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시에나에게 달려가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앙. 시에나.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해애.”
“흐윽,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정말 네가 죽는 줄 알았어어… 헝….”
그들은 죄책감이 가득한 말투로 시에나에게 연신 사과를 했다.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데, 많이 미안했었나 보다.
시에나는 자신보다 연장자면서도 어린애처럼 울고 있는 셋을 토닥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괜찮아. 전부 잘 됐잖아. 자, 눈물 그쳐. 뚝.”
“히끅. 시에나가… 언니 같아졌어….”
“그러게… 딸꾹.”
그들은 연신 딸꾹질을 하면서도 할 말을 잊지 않았다.
약간 뜨끔해진 시에나가 어설프게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얘들아. 내가 지금 안에 다시 들어가 봐야 해서. 조금 이따 다시 이야기하자.”
찻주전자를 들어 올린 시에나를 보며 셋이 깜짝 놀라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아, 응. 우리가 도와줄까?”
“그래, 우리가 해 줄게.”
아까 그 오묘한 분위기를 떠올리던 시에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둘이 충분한 대화를 나누기에는 적은 시간이라 바로 돌아가기는 좀 그랬다.
차를 리필해서 돌아가면 시간이 딱 맞겠지.
“아니야. 괜찮아. 내가 다녀올게.”
“알았어. 그럼 저녁 시간 때 봐. 리메리오 남작이 사라져서 우리 오늘 파티 연대.
“응, 알았어.”
애 괴롭히는 그 나쁜 성격이 어디 가지 않듯 리메리오 남작은 성의 사용인들에게도 좋은 인간은 아니었다.
그런 그가 마치 천벌을 받듯 잡혀가자 성이 파티 분위기가 된 모양이었다.
시에나는 손을 흔드는 그들에게 화답해 주며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시에나가 찻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가득 담아 응접실을 다시 방문 했을 때 공작은 이미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시에나가 너무 늦게 온 건가 싶어 당황하고 있는데 공작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시에나에게 다가갔다.
“시에나.”
“예, 예에. 공작님.”
공작이 시에나에게 빠른 속도로 걸어오자 시에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시에나의 앞에 선 공작이 계속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느껴지는 시선에 흘긋 위를 본 시에나가 다시 후다닥 고개를 밑으로 내렸다.
“고맙다.”
공작의 말에 시에나는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처음으로 본 귀족이 리메리오 같은 인간이다 보니 귀족은 다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고맙다는 말을 듣자-심지어 공작에게!- 기분이 어리벙벙했다.
“그대가 있어 준 덕분에 데이몬에게 더 큰 죄를 짓지 않게 되었어. 나서 줘서 정말로 고맙네.”
공작은 모자를 벗고 시에나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중년 남성이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에 익숙지 않았던 시에나는 얼굴을 붉히며 쩔쩔매었다.
“아, 아닙니다. 저는 한 것도 별로 없었는걸요.”
“아니. 그대가 해 준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네. 이름을 기억해 둘 테니 도움이 필요할 때는 꼭 말하게. 내 이름을 걸고 내 힘닿는 데까지 꼭 도와주겠네.”
헉. 시에나는 숨을 들이켰다.
공작이 평민에게 이름까지 걸며 도와주겠다고 하는 경우는 자신이 알기로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공작은 시에나가 고마웠나 보다.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사극톤으로 말하게 된 시에나를 보며 공작이 미소 지었다.
다행히 나쁘지 않았었나 보다. 시에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공작은 그런 시에나에게 악수를 권했다.
“숙부 된 도리로 이런 말을 하긴 민망하지만, 일이 바쁘다 보니 내가 항상 여기에 있을 수는 없네. 지금도 처리 할 일들을 다 제쳐놓고 오는 바람에 바로 돌아가 봐야 해. 앞으로 나 대신 데이몬을 잘 부탁하네.”
“네에. 그럴게요.”
공작이 내민 손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시에나는 공작의 부탁에 긍정하며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공작은 힘 있게 두어 번 시에나의 손을 흔든 뒤 놓아 주었다.
“참, 이건 별거 아니지만 사례일세.”
공작은 다시 모자를 쓰고 나가려다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공작의 두툼한 손에 가득 채워진 그 주머니는 달려가면서 봐도 비싼 보석이 가득 들어 있어 보였다.
그 주머니를 본 시에나의 머리에서 뎅, 뎅 종이 울렸다.
저 주머니 안에 시에나의 인생이 바뀔 것이 들어 있을 거란 강한 확신이 들었다.
“괘, 괜찮습니다. 저는 이런 걸 원하고 한 것이 아닙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몸은 솔직하군.”
“예?”
공작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퍼뜩 정신이 든 시에나의 손에는 어느새 묵직한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아니, 이게 언제 제 손에….”
그러면서도 주머니를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주머니를 쥔 시에나의 손이 야무지게 닫혀 있었다.
“목숨을 걸고 황족을 구했는데 아주 약소한 사례지. 추후 추가적인 사례를 하도록 하겠네.”
“이걸로도 충분해요!”
제법 집안일에 단련이 된 시에나의 손목에도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질 정도의 주머니였다.
정말 입에 발린 말은 아니었지만, 공작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그때도 저절로 손이 나오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지.”
물질 만능주의의 노예가 된 기분에 시에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공작은 생각보다 짓궂었다.
데이몬이 시에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그녀는 차마 시선을 맞출 수 없어 허공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웠다.
그는 자신을 배웅하려 문 앞에 서 있는 데이몬을 향해 허리를 굽혀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나 데이몬은 어쩐지 뚱한 표정이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보마.”
“예,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감사했습니다.”
목소리에 은근히 날이 서 있는 것 같은 건 착각인가.
데이몬이 그렇게나 잔뜩 경계하고 있었지만 공작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참, 리메리오 남작을 대신해 성의 정무를 담당해 줄 이를 조만간 보내지. 마르바스 성에 상주하며 네 진짜 보호자 역할도 맡게 될 거야. 웬만해서는 내가 하고 싶지만 몇 년이나 공작저를 비워 둔 탓에 처리할 게 워낙 많아야지. 현재 다른 공무를 처리하고 있어 오는 데에는 한 일 주일 정도 걸릴 거야.”
“네, 알겠습니다. 들어가세요.”
데이몬은 거의 축객령에 가깝게 공작을 쫓아내었다. 시에나는 당황스러운 눈길로 데이몬을 쳐다봤지만 공작은 알 만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배웅을 마다하고 자리를 떠났다.
달칵, 닫힌 문밖으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시에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폭풍이 왔다 간 것 같은 느낌에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때 누군가가 시에나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여전히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데이몬이 그녀의 시야에 가득 잡혔다.
“시에나.”
“네, 도련님.”
“악수는… 왜 하는 거지?”
악수?
시에나는 그의 수준에 맞추어 대답해 주기 위해 골똘히 생각했다.
“글쎄요. 인사의 의미도 있고… 안부의 의미도 있고… 부탁의 의미도 있겠지요?”
“친한 사람들끼리는 악수할 수 있는 거야?”
“네. 그렇죠. 보통은?”
“그럼… 나랑도 할 수 있는 건가?”
데이몬은 은근슬쩍 시에나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혹시, 아까 내가 공작이랑 악수한 것 때문에 뚱한 표정이었던 건가?
의혹이 살짝 들었지만 이내 시에나는 고개를 저었다.
‘에이, 내가 뭐라고.’
“그럼요. 자요, 이렇게 하면 되죠?”
시에나는 데이몬의 손을 답싹 잡았다.
제가 말해 놓고도 정말로 손을 잡자 어색해하던 데이몬의 얼굴이 햇빛을 받은 나팔꽃처럼 조금씩 펴졌다.
그걸 바라보는 시에나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귀여워라.’
그런 말을 하면 썩 좋아할 것 같진 않지만… 지금 데이몬의 수줍어하는 모습은 꽉 껴안고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어두웠던 지하 감옥과는 달리 얼굴이 보이니 몇 배는 더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외모의 힘이 이렇게 대단하다.
그런데… 마주 잡은 손이 이상하게 뜨끈했다.
“도련님… 그런데 손이 좀 뜨거운 것 같은데요… 열이 있으신 게 아닌가요?”
“아니. 난 멀쩡한데?”
“그렇다면 괜찮지만… 꺅, 도련님!”
멀쩡하다고 말한 게 바로 몇 초 전인데 데이몬은 몸을 휘청이더니 배터리가 다 닳은 인형처럼 온몸에 힘을 뺀 채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기겁한 시에나가 그런 데이몬의 팔을 꽉 잡아 무게 중심을 저로 향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몸이 가벼워 시에나 혼자로도 버틸 수 있었다.
데이몬을 소파에 조심조심 옮긴 뒤 이마에 손을 대 보니 이마가 불덩이였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시에나가 당황해서 허둥지둥 복도 문을 열고 날카롭게 소리쳤다.
“누구 없어요-?!”
“무슨 일이야?”
“도련님이 쓰러지셨어요. 열이 높아요.”
바깥에서 돌아다니던 시종 하나가 시에나에게 응답했다.
시종은 시에나의 말에 깜짝 놀라 후다닥 응접실로 들어섰다.
소파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데이몬을 본 시종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쩌다가 이렇게….”
“열이 심해요! 침대에 눕혀야 할 것 같아요. 도와주세요.”
“그래, 그러지.”
시종은 시에나로부터 데이몬을 받아 안아 들었다.
둘은 다급하게 복도를 달려 침실로 향했다.
* * *
공작저로 돌아가는 길, 말을 탄 공작의 뒤로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공작은 녹음이 우거진 숲길로 시선을 두다 저도 모르게 슬쩍 미소 지었다.
아까 자신의 조카와 했던 대화가 생각났던 까닭이었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내게 그 사실을 밝히게 된 거지?’
시에나가 눈치 있게 자리를 피해 준 덕에 공작은 감정을 추스르고 데이몬에게 물었다.
‘그것도 비 오는 새벽에 말을 타고 와서 말이야.’
자신이 알기로 데이몬은 승마를 그렇게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데이몬의 영지와 자신의 영지를 오가는 데에는 반나절이 넘게 걸렸다.
특히 깜깜한 밤에 진흙탕을 헤치고 오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테였다.
그러나 데이몬은 직접 말을 끌고 온 몸이 푹 젖은 채로 공작의 성 안에 도착했다.
한 번 낙마하기도 했었는지 하도 꼴이 엉망이라 성 앞에서 입장을 제지당할 뻔 하기도 했다.
이틀 전 제가 6년간의 출정을 마치고 돌아오지 않았다면 데이몬은 그대로 쫓겨났을 테였다.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정말이지 하늘이 도왔다고밖엔….”
데이몬은 엉망이 된 꼴로 비틀거리며 공작의 앞에 서서 빌었다.
남작의 폭행을 막다가 죽을 위기에 처한 하녀 아이를 살려달라고.
한참 비를 맞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으면서 바로 가야 한다며 자신의 손을 잡아끄는 데이몬을 억지로 욕실로 데려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 하나가 아까의 데이몬 만큼이나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욕실을 나왔다.
‘도련님의 상태를 한 번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낙마라도 당한 건가 싶어 허겁지겁 들어갔을 때 공작이 본 것은 그동안의 폭행이 샅샅이 기록되어 있는 데이몬의 몸이었다.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는 수많은 흉터와 살갗이 전부 터져 빨갛게 멍들어 있는 둔부. 마구잡이로 찍힌 주먹과 손자국. 분노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그 서늘한 눈빛을 보고 데이몬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치 자신의 상처가 당신에게 그렇게 화날 일이었냐는 듯이.
그게 미치도록 화가 났다.
그리고 이 사달을 만든 리메리오 남작에게,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자신에게, 아이를 버린 자신의 형에게. 또한 그따위 신탁을 내린 빌어먹을 신에게도.
만약 그러다가 데이몬이 죽기라도 했다면, 자신을 평생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략적인 정황을 알게 된 공작은 그 하녀와 데이몬이 어떤 관계인지 물었다.
‘그 하녀만이 저를 위해 나서주었어요. 그 애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이 공작 각하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데이몬은 담담하게 말했다.
데이몬은 제게 향한 폭행에 도움을 요청한 게 아니었다.
그 폭행을 말리다 위험에 처한 하녀를 위해 온 거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공작은 처참한 기분이 되었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혼자 이렇게 앓아 온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너무나 빠르게 철이 든 자신의 조카를 바라보며 공작은 이마를 짚었다.
‘하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군….’
‘숙부님께서 바쁘실 테니 제가 대신 인사하겠습니다.’
데이몬의 적나라한 거부반응에 공작은 기울였던 몸을 폈다.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딴청을 피우고 있지만, 공작은 데이몬의 속이 훤히 내다보였다.
‘너, 그 하녀가 마음에 들었구나?’
데이몬은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홱 돌렸다.
긍정의 침묵이었다.
하하. 이 녀석.
공작이 허탈하게 미소 지으며 데이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황족의 특징인 검은 머리칼과 금색 눈이 데이몬에게도 뚜렷하게 보였다. 공작의 시선이 깊어졌다.
마르바스 가문 사람들은 황족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단 한 명만 반려로 맞이했다.
황제와 황비 사이에 자식이 없으면 차라리 친척의 아이를 입양하여 후계로 세울지언정, 절대 다른 사람을 들이지 않았다.
반려가 죽더라도 다음 반려를 맞이하는 경우는 손에 꼽았다.
단 한 명만을 평생 사랑하는 만큼, 그 사람에 대한 소유욕도 엄청났다.
사랑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사람이라 인정한 사람에게 보이는 집착들도 대단했다.
때때로 동성조차도 사랑이라 착각할 만큼 자신의 사람을 향한 무조건적인 애정과 집착은 그 사람을 질리게 만들 정도였다.
특히나 성인이 되기 이전에는 감정을 조절하기 힘들어서 그 정도가 더욱 과했다.
마르바스 황녀의 시녀로 들어온 영애에게 심하게 집착한 황녀가 영애의 약혼자를 살해한 사건 이후 마르바스 가문은 사춘기 전부터 그들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사춘기 이전에 만난 자신의 사람에게 단순한 애정과 호감을 느낀다면, 사춘기 이후에는 집착과 광기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애정이 한 명에게 집중되는 걸 막기 위해 그들은 대인 관계의 폭을 넓혀 애정을 분산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공작은 데이몬 역시 그러고 있는 줄 알았다. 공작은 기나긴 출정 중에도 데이몬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사람과 마물이 수도 없이 죽어 나가는 전쟁터에서도 데이몬에 대한 보고서를 읽는데 절대 소홀하지 않았다. 지금에서야 그게 날조라는 사실을 깨닫다니, 자신은 얼마나 멍청한가.
홀로 성안에서 고립되어 있는 데이몬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았다.
다행히 아이가 마르바스 혈통 중에서는 감정표현이 없고 무던한 편이라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 하녀가 도와준 그날, 데이몬은 아마 그녀를 자신의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었겠지.
마르바스의 애정은 신분과 성별, 나이를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래서 황제가 평민과 결혼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었다.
마르바스 가문의 기질을 보이기 시작한 자신의 조카를 바라보며 공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걱정도 되는 한편, 그래도 처음으로 이 넓은 성안에서 마음 붙일 사람이 생긴 것 같아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혹여나 강한 감정을 느끼게 되더라도 내년쯤 아카데미에 보내 더 많은 사람들을 사귀게 되면 그 감정도 조금은 중화되겠지.
공작은 안 본 사이에 많이 큰 조카를 대견하게 바라보며 나갈 채비를 했다.
그때 하녀가 찻주전자를 들고 들어왔다. 찻주전자 안에는 찻물이 가득 들어 있는지 움직일 때마다 안이 출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꿀 같은 금발에 창공을 닮은 새파란 눈동자, 하녀는 시골에서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깊은 아이홀을 가득 채운 눈과 콧잔등에 흩뿌려진 주근깨에 소녀 티가 여실했다.
하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바람에 긴 속눈썹 그림자가 볼 위로 드리워졌다.
빼빼 말라 바람에도 쓰러질 것 같으면서 귀족으로부터 누군가를 보호할 만큼 강단이 있는 아이였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어떤 것도 없는데 평민이 귀족에게 대드는 행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잉크병을 던졌다고 했지. 커다란 혹이 날 만큼 아주 강력한 직구로.
“역시 그 애에게 데이몬을 잘 부탁한다고 말한 건 옳은 일이었던 것 같군.”
황제 아래로 가장 높은 작위를 가졌지만, 공작은 그다지 신분에 연연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제국에서 가장 귀한 위치에 올라가 있는 형은 그를 두려워해 내쳤고, 전쟁터에서 자신 대신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온 유모의 아들이었다.
공작은 그 든든한 하녀가 데이몬의 곁에서 오래도록 있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만간 일을 정리하는 대로 데이몬에게 가 함께 있는 시간을 늘려야겠다고도 생각했다. 속으로 이런 저런 결정을 내린 공작이 뒤에 있던 기사에게 손짓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기사 하나가 말을 몰아 공작의 옆에 나란히 섰다.
“로하엘을 불러. 최대한 빨리 오라고 해.”
“아직 전쟁터에서 후처리를 하고 계실 텐데요?”
“알고 있어. 리메리오 남작 대신 성을 관리하고 데이몬을 보호할 믿음직한 사람이 필요해.”
“짧게 두실 생각이십니까?”
“아니,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데이몬이 성인이 될 때까지 머무르게 할 생각이네.”
공작의 결정에 기사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로하엘은 현재 공작가의 기사단장직을 맡고 있었다. 검 실력 외에도 전술과 사무 업무에도 능해 공작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기도 했다. 공작가의 주요 업무를 도맡아하는 로하엘이 사라지면 피곤해지는 건 공작일 텐데. 리메리오의 일로 공작이 얼마나 예민해 졌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기사는 놀란 표정을 감춘 채 고개를 숙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 * *
성의 주인이 쓰는 침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허름한 방에서 늙은 의원이 데이몬을 진찰하고 있었다.
옆에는 시종 하나와 시에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달뜬 숨을 내뱉는 데이몬을 바라보고 있었다.
“괘, 괜찮은가요?”
“열병이지만… 열이 너무 높습니다.”
노의원은 쭈글쭈글한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이 날씨에 이렇게 앓기도 쉽지 않은데… 혹… 어제 비를 맞았습니까?”
“어젯밤에 도련님이 말을 좀 몰았습니다. 그때 비가 왔던 것 같아요.”
“이렇게 어린애를 무슨 생각으로 비 오는 밤에 말을 태웠습니까!”
노의원은 기가 차다는 듯이 혀를 쯧쯧 찼다.
호통을 들은 시에나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자신 때문이다.
공작저로 몰래 가기 위해 마차도 쓰지 않고 말을 탔기 때문에.
공작저에 가는 동안 그의 몸은 비로 인해 푹 젖어 있었겠지.
점점 체온이 떨어지고 몸이 차가워짐에도 불구하고 시에나를 살리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렸을 것이다.
시에나는 열꽃이 핀 데이몬을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나으실 수 있겠죠…?”
“모릅니다. 일단 열을 내리는 약을 써 보겠지만… 나머지는 도련님의 치유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노의원은 왕진 가방 안에서 회색 약병을 꺼내 들었다.
뽕 하는 소리와 함께 약병의 코르크가 뽑혔다.
노의원은 데이몬의 코를 잡고 입을 벌린 뒤 약을 집어넣었다.
약병 안에서 희뿌연 약물이 흘러 데이몬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약이 상당히 쓴지 데이몬은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지만, 노의원은 능숙한 솜씨로 끝까지 데이몬에게 약을 먹였다.
“땀을 많이 내야 합니다. 최대한 따뜻하게 해 주시고 찬 바람은 맞지 않게 해 주시오.”
“네… 알겠습니다.”
“왕진비는 2골드요.”
한숨 돌렸던 시에나와 시종의 눈이 동시에 크게 뜨였다.
“2… 2골드요!?”
“왕진비가 50실버, 약값이 1골드 50실버.”
아까만 해도 살짝 인자한 느낌이었던 노의원이 이제는 깡패에 가깝게 보였다.
시에나의 월급이 5골드가 채 안 되는데 2골드라니.
사기가 아닐까 의심하는 둘을 보며 노의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바가지라도 씌우는 것 같다는 얼굴들이구만? 저 약은 성수를 섞은 신전의 약이요. 비싼 건 당연하지 않은가?”
아, 봤던 것 같다.
시에나는 책에서 본 내용을 떠올렸다.
죽은 자도 치유할 만큼 강력한 성수는 대부분의 병에도 잘 듣다 보니 사람들은 성수에 지나치게 의존했고, 민간요법과 의원은 점점 적어졌다.
사람들이 대부분 성수에 의존하기 시작하자 그사이 신전은 제국의 윗선과 결탁해 민간요법으로 사람을 치료하는 걸 금지시키는 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킨 뒤 성수로 폭리를 취하기 시작했다.
민간요법으로 사람을 치료하다 걸리면 마녀로 몰려 작게는 재산 몰수, 크게는 사형까지 당하게 되자 민간요법을 이용한 의원은 점차 문을 닫고, 사람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성수가 든 포션을 사야 했다고 들었다.
“이, 일단 저희 집사님께 안내하겠습니다.”
“그러지.”
시종이 저자세로 고개를 숙이자 노의원은 거만한 자세로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자리를 나섰다.
둘만 남은 침실에서 시에나는 데이몬이 누워 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데이몬의 이마에 가만히 손을 대 보았지만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뜨거웠다.
체온계로 재 본다면 거의 39도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니, 그러게 비 오는 날에 마차도 없이 위험하게… 후.”
툴툴거리는 시에나의 마음은 영 좋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밤새 빗길을 달린 아이가 이렇게 되었는데 어떻게 마음이 편할 수 있을까.
땀에 젖어 볼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가만히 넘겨 주며 시에나는 불안한 눈빛으로 데이몬을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시에나, 안에 있어? 문 좀 열어 줘.”
제인의 목소리였다. 시에나는 문 앞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돌렸다.
제인은 물이 가득 담긴 통과 수건을 들고 있었다.
“제인.”
“시에나. 도련님은 좀 괜찮으셔?”
“모르겠어… 일단 의원이 와서 약을 먹이긴 했어.”
제인은 물통을 아래에 내려놓고 쪼그려 앉아 도련님의 상태를 살폈다.
이마에 손을 짚어 본 제인이 깜짝 놀라 손을 떼었다.
“헉. 열이 높으시네….”
“응. 걱정이야.”
수심이 깊어 보이는 시에나를 보던 제인이 쭈뼛거리다 말했다.
“저기, 시에나. 너는 잘 모르겠지만… 사실 도련님이 원래 열이 좀 잘 오르는 체질이셔.”
“응?”
“그러니까 원래 어린애들은 열이 잘 오른다고 하잖아. 도련님은 열두 살이긴 하지만 아직 열 살 정도로 보이시고… 그래서 그런 것 같아. 내 동생도 자주 앓거든.”
“그렇구나… 얼마나 자주 이렇게 아프신데?”
“보통 한 달에 한 번꼴?”
“한 달에 한 번? 그렇게나 많이?”
시에나는 당황스러워하며 제인에게 재차 물었다.
그러나 제인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열두 살 난 아이가 이렇게 자주 열이 나는 게 괜찮은 건가…
더 걱정스러워하는 시에나를 보며 제인이 말했다.
“아, 그래도 전보다 많이 줄긴 했대. 예전에는 거의 일주일에 한 번꼴로 열이 올라서 바깥 생활도 거의 못 하셨거든.”
“그 정도면… 무슨 병 같은 거 아니야?”
“글쎄. 진짜 그럴 수도 있어. 열도 그냥 열이 아니라 기절하듯이 확 쓰러져서 고열에 시달리는 거라서.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리메리오 남작님이 도련님을 의원한테 보일 분도 아니라….”
제인은 말끝을 흐렸다.
시에나는 더 묻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학대와도 같은 취급을 받고 있던 데이몬이다.
리메리오 남작이 그를 의원에게 데려다주었을 리가 없었다.
“공작님이 방문하셨을 때 도련님이 아픈 날은 없었어?”
“사실 나는 공작님을 뵙는 게 아까가 처음이었어. 워낙 바쁜 분이시니까.”
시에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이 6년의 전쟁을 끝내고 막 돌아왔다는 건 시에나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무리 데이몬을 아낀다 한들 상대는 넓은 북부를 다스리는 공작. 북부는 특히나 타국의 국경과 밀접해 있는 데다 드래곤의 숲이 있어 마물의 습격이 잦은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애정은 있더라도 워낙 일이 바빠 데이몬에게 큰 신경을 쓰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구나… 바쁘신 분이니까 어쩔 수 없지.”
“그래, 시에나. 밤새 감옥에만 있느라 춥고 힘들었을 텐데 도련님 간호는 내가 할 테니까 너는 씻고 식사하고 한숨 자.”
“어어? 아니, 나는 괜찮은데….”
“눈 밑이 거뭇거뭇해. 얼른 들어가서 푹 쉬어. 오늘은 하녀장님도 너한테 일을 시키진 못할걸.”
제인의 따뜻한 배려에 시에나는 가슴이 조금 따스해졌다.
제인의 애정은 온전히 지금의 시에나를 향한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함께하다 보면 그렇게 될 수 있겠지.
시에나는 제인의 배려에 감사하며 몸을 살짝 일으켰다.
“그럼 그렇게….”
“시에나….”
그때 데이몬이 시에나의 옷깃을 꽉 잡았다.
시에나는 깜짝 놀라 데이몬을 바라보았다.
열에 젖어 촉촉해진 눈으로 데이몬이 시에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련님? 정신이 드세요?”
시에나는 도련님의 볼을 가볍게 매만지며 물었다.
따뜻한 물에 담근 찹쌀떡처럼 볼은 여전히 따끈했다.
“…여긴 어디지?”
“도련님 침실이에요. 아까 갑자기 저랑 악수하다 쓰러진 거 기억나세요?”
시에나의 말을 들은 데이몬의 얼굴이 더 발그레해졌다.
약간 식은땀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데이몬의 바싹 말라붙은 입술을 보며 시에나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땀을 많이 흘려서 목이 마르실 거예요. 제가 마실 만한 걸 좀…?”
그러나 여전히 데이몬의 단풍잎 같이 조그마한 손은 시에나의 하녀복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아픈 사람의 손아귀 힘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만큼 세게 느껴졌다.
데이몬은 시에나를 향해 웅얼거렸다.
“가….”
“네? 도련님?”
잘 들리지 않자 시에나가 데이몬의 얼굴에 귀를 바싹 가져다 대었다.
목 뒤로 흘러내린 금빛 잔머리가 데이몬의 달뜬 볼을 간지럽혔다.
데이몬의 숨이 잠시 멈추었다.
“가… 가지….”
“네? 가지요? 가지가 드시고 싶으세요?”
금방이라도 가지를 구해 올 것 같은 시에나의 투철한 서비스 정신에 감동했는지 데이몬은 그녀를 잡고 있던 자그마한 손을 주르륵 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새파랗게 어린 도련님의 얼굴이 왜 이렇게 세상 다 산 노인처럼 허탈해 보이는 건가 싶어 시에나는 걱정스럽게 데이몬을 바라봤다.
뒤에서 그 새콤달콤한 모습을 모두 목격한 제인이 흐린 눈으로 시에나를 불렀다.
“저, 시에나.”
“응. 제인.”
“도련님은 그냥 네가 간호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응? 갑자기?”
“그냥… 갑자기 바쁜 일이 생각나서. 드실 물은 내가 가져올게.”
“아,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고마워. 제인.”
“아냐…. 우리 사이에 뭘. 그럼 금방 다녀올게.”
문을 닫고 고요해진 방 안에서 시에나는 여전히 자신을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바라보는 데이몬을 보며 방긋 웃었다.
“제인이 많이 바쁜가 봐요. 절대 도련님을 간호하기 귀찮았던 건 아닐 거예요.”
“콜록, 응….”
그렇다기엔 좀 급작스러운 감이 있었지만, 도련님이 상처받지 않길 바라며 시에나는 제인을 열심히 변호했다.
그러나 데이몬은 대답 대신 기침으로 화답하며 여전히 얼굴을 물들인 채 고개를 슥 돌려 버렸다.
“어머, 이젠 기침까지 하시네. 도련님, 어디가 제일 아프세요?”
“아픈 데… 없어.”
그런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허세 부리셔도 소용없어요. 가엾게도 땀에 이렇게 흠뻑 젖으셔서는….”
데이몬은 지금 온몸이 불덩이였다.
얼굴부터 발끝까지 땀에 푹 젖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시에나가 팔을 걷어붙였다.
“안 되겠다, 도련님. 옷 벗으세요.”
“…뭐?”
“아니다. 제가 벗겨 드릴게요. 저희 땀 한번 싹 닦아요.”
시에나는 행동력이 빠른 편이었다.
벌떡 일어난 시에나가 물수건을 들고 데이몬에게 다가갔다.
데이몬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런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저, 저리 가!”
갈라진 목소리가 빽, 터져 나왔다.
시에나는 데이몬의 비명에 잠시 행동을 멈췄다.
시에나가 당황하자 데이몬은 더 당황하는 듯 보였다.
“도련님…?”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나 혼자 할 수 있어. 내가 할게.”
데이몬의 단호한 말에 시에나의 가슴이 저려 왔다.
이 아이는 이렇게 계속 혼자서 앓아 왔던 탓에 남이 해 주는 손길이 익숙하지 않았던 거다.
그렇다면 더더욱 사람의 손길을 느껴 봐야 하는 법.
시에나는 전에 없이 타오르는 간호 욕구를 느꼈다.
“도련님은 아프시잖아요. 저 이런 거 잘해요. 저한테 맡기세요.”
“시… 싫어…!”
데이몬은 질색하며 시트를 부여잡았지만, 열이 높아 힘이 없는지 시트와 함께 그대로 쭈욱 딸려 나왔다.
버둥대는 데이몬을 잡고 시에나는 기어코 데이몬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하, 하지 마!”
“지금 빨리하지 않으면 도련님 감기 걸리세요!”
“나는 원래 잘 아파!”
“잘 아프다고 해서 덜 아픈 건 아니잖아요!”
툭, 툭, 시에나의 손에 의해 셔츠가 풀어 헤쳐지자 열 때문에 분홍빛으로 물든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앙상하게 마른 몸 위로 맞아서 생긴 흉터와 멍들이 적나라하게 보여 시에나는 잠시 물수건을 든 손을 멈칫했다.
데이몬은 포기했는지 새빨갛게 물들인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런 데이몬을 안쓰럽게 바라본 시에나가 수건을 다시 물속에 담갔다가 가볍게 쥐어짰다.
몸을 닦는 손길마다 데이몬은 흠칫거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힉. 차… 차가워….”
“지금 도련님께서 몸의 온도가 높아서 그래요. 사실 열이 나는 건 도련님 몸이랑 병이 싸우고 있다는 증거라 아주 나쁜 건 아니지만, 열이 또 너무 높으면 좋을 건 없거든요. 자아, 엎드려서 등 대 주세요.”
그와 동시에 시에나가 데이몬의 몸을 뒤집개로 계란프라이 뒤집듯 훌떡 뒤집었다.
“너, 너어….”
“왜요, 도련님?”
“아무것도 아냐….”
너무나 간단히 넘어간 자신도, 넘긴 시에나도 기가 찬 듯 시에나를 바라보던 데이몬이 말을 잇지 못하고 포기한 듯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그 뒷모습이 왜 이렇게 의기소침하고 세상을 다 산 것 같아 보이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열 때문인지 귀 끝이 단풍잎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쯧쯧. 얼마나 열이 높으면, 불쌍한 도련님.
고열이 나서 그런지 등은 온통 땀에 푹 젖어 있었다.
데이몬의 등을 꼼꼼하게 닦은 뒤 시에나는 그의 귓가에 바싹 다가가 조곤조곤 속삭였다.
“옷은 편한 걸로 갈아입으시는 게 좋겠어요. 잠옷은 어디 있나요?”
열이 나는 중에 큰 소리를 들으면 머리가 띵하게 울릴 수도 있으니까.
수치 플레이에 지친 데이몬은 거의 반쯤 포기한 채 손가락으로 방 저편을 가리켰다.
“하아…. 저기 옷장 서랍 두 번째 칸.”
“네에.”
시에나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서랍을 열고 안의 상태를 살폈다.
썩 좋은 재질은 아니지만 편안해 보이는 잠옷 몇 벌이 눈에 띄어 시에나는 그중 흰 옷을 꺼내왔다.
그러나 데이몬은 시에나가 잠옷을 가져오자마자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소중한 거라도 되는 양 베개를 꼭 끌어안고 노려보는 것이 마치 앙칼진 아기 고양이같이 하찮게 보여 시에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러세요?”
“내가 갈아입을게. 그거 이리 줘.”
“제가 갈아입혀 드릴….”
“내가 갈아입을 수 있어!”
데이몬은 다 쉬어서 갈라지는 목소리로 고집을 부렸다.
어휴, 누굴 닮아 이렇게 고집이 센 건지.
그래도 이 정도로 팔팔하다면 혼자 옷 정도는 갈아입을 수 있겠다 싶었다.
몸도 닦았겠다, 괜히 데이몬의 힘을 빼고 싶지 않았던 시에나는 그에게 옷을 건네주었다.
“알았어요. 드릴게요.”
“지, 진짜지?”
데이몬은 시에나가 말을 번복할 수 있다 생각했는지 재빠르게 잠옷을 제 품 안에 들였다.
그리고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품에 안은 베개를 어찌나 꽉 쥐었는지 손톱 끝이 창백했다.
시에나가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자 데이몬은 조금 경계를 풀며 순순히 감사 인사를 했다.
“고… 고마워.”
“별말씀을요. 그나저나 제인이 안 오네요. 아마 다른 사람에게 붙잡혔나 봐요. 제가 내려가서 식사랑 마실 거리를 가져올 테니 옷 갈아입고 주무시고 계세요.”
“가는 거야? 나도 같이….”
“안 돼요. 일어섰다가 괜히 열 오르면 어쩌시려고요. 도련님은 여기서 쉬고 계세요.”
데이몬이 입을 삐죽이며 어린아이 취급하지 말라 종알대었지만, 시에나는 환자에 나이가 어디 있냐며 단호한 태도로 거절했다. 아프면 원래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법이지만, 환자의 상태를 봐 가며 들어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데이몬은 입을 좀 삐죽거리긴 했지만 더 떼를 쓰지는 않았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시에나가 데이몬의 잠자리를 정돈해 주며 그의 머리칼을 살짝 쓰다듬었다. 배냇머리처럼 얇은 머리칼이 시에나의 손 사이사이에서 부드럽게 사락거렸다.
“금방 다녀올게요. 알겠죠? 졸리면 주무시구요. 대신 옷은 꼭 갈아입으셔야 해요.”
“알… 았어. 꼭 와야 해.”
“네, 약속.”
시에나가 약속까지 해 주자 데이몬은 긴장감이 풀렸는지 이내 한숨을 휴, 내쉬었다.
아마 식사를 가져올 즈음이면 단잠에 빠져 있을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을 어미로 각인한 새끼 오리를 보는 게 저런 기분일까.
그 모습이 못내 귀여워 시에나는 미소 지으며 방을 나섰다.
* * *
“그러니까…! 했다… 그러네!”
“나는… 내 생각은….”
무슨 소리지?
1층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에 시에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삭막할 정도로 조용했던 마르바스 성이었다.
이렇게 시끄러워질 이유가 없는데.
그러나 시에나가 계단을 한 칸 한 칸 내려갈수록 1층에서 나는 소리는 점점 커져 갔다.
파티를 준비하는 건가 싶기에는 그 소리가 상당히 낮고 침울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소리가 나는 쪽을 따라 걸어간 시에나가 홀에 모인 사람들을 발견했다.
성에 있는 모든 이가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시에나는 바깥쪽에 있던 제인과 눈이 딱 마주쳤다.
“제인?”
“시에나!”
제인은 입술을 짓씹으며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다 시에나를 보고 깜짝 놀라 말했다.
“아, 참. 내가 물을 가져다주기로 했었지. 내 정신 좀 봐. 미안해.”
“아냐. 도련님은 막 잠드셔서 한동안은 괜찮을 것 같아. 그런데 무슨 일이야?”
“저… 너무 놀라지 마. 시에나. 우리 큰일 났어.”
낙천적인 성격의 제인이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상당히 심각한 일인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인데?”
“리메리오 남작님이 체포된 후에 정신없는 틈을 타서 데인 집사님과 로날드가 도망쳤는데, 도망칠 때 성안에서 돈 될 만한 건 싹 다 털어 간 모양이야. 지금 우리 다음 달 월급도 없는 상황이래!”
“…뭐?”
시에나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데인과 로날드는 남작의 수하였다.
자신을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간 인간들.
지금까지 남작의 밑에서 충실한 척하며 입 안의 혀처럼 굴어 권력을 얻었던 그들이었다.
남작이 사라진 마르바스성에 그들이 더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겠지.
“여기 있어 봤자 득 될 게 뭐가 있어. 골골거리는 꼬맹이나 하나 있지, 안 그래? 우리도 그 사람들처럼 퇴직금으로 돈 될 만한 거라도 들고 나가는 게 더 이득이라니까!”
그런 둘의 이야기를 하며 중앙에서 남자 몇몇이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지금 저런 걸 설득이라고 하고 있네.’
그러나 인상을 찌푸린 시에나와는 달리 사람들은 반쯤 넘어가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이따금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그 말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만약 이대로 그들을 그냥 둔다면 정말 더 많은 탈주자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제인, 저 사람들 누구야?”
“한스 씨랑 또… 누군지 잘 모르겠다. 미안.”
“아냐, 직접 이야기 나눠 보면 되겠지. 잠시 지나갈게요.”
시에나는 표정을 굳힌 채 사람들을 헤치고 안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사용인들이 그리 많지 않아 시에나는 금방 맨 안쪽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안쪽에서 보는 광경은 더 가관이었다.
문지기인 한스가 식료품 박스까지 밟고 서 제일 위에서 일장연설을 하고 있었다.
“한스 씨, 방금 한 말이 무슨 소리예요? 탈주를 한다니요? 도련님이 지금 아파서 누워 계신데?”
시에나가 불쾌한 감정을 감추지 않고 거침없이 말하자 한스가 잠시 당황하며 말을 멈추다 이내 그녀를 회유하려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시에나. 넌 지금까지 도련님이랑 있어서 잘 모르겠구나. 남작이 나가고 데인과 로날드가….”
“방금 사정은 대충 들었어요. 그런데 돈 될 만한 걸 들고 나간다니요. 그건 도둑질이잖아요.”
시에나의 말에 분위기는 찬물을 뒤집어씌운 듯 차가워졌다.
한스는 좋게 좋게 말하려던 자신의 말을 끊어 버린 시에나를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도둑질이라니. 응당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했으니 거기에 대해 우리가 자체적으로 보상받는 게 어째서 도둑질이지?”
“월급날은 고작 3일 전이였잖아요! 3일 치 일당으로 뭘 들고 가실 생각이신 건데요?”
“하! 도련님 곁에 며칠 있었다고 보모 노릇이라도 할 셈이라면 집어치워라. 난 여기서 2년을 꼬박 일했어! 퇴직금으로 뭐라도 받아 가려는 게 잘못되었단 말이냐?”
“그걸 훔치려고 하니까 잘못이죠. 남은 사람들이 절도로 신고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그러니까 다 같이 가자고 하는 거 아니야!”
“아하, 그런 생각이셨군요.”
시에나의 도발에 넘어온 한스는 이내 아차 하는 얼굴을 했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시에나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설득되어 가던 사람들은 절도죄와 신고라는 말에 어두운 얼굴로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이 분위기라면 어찌어찌 설득도 가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들을 설득하길 결심한 시에나가 다른 식료품 박스를 밟고 서서 사람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솔직히 여기가 아니면 일을 할 수 없는 분들도 계세요. 게다가 소문이 얼마나 빠른지 아시잖아요. 여기서 일한 게 경력의 전부인 사람이 다른 일을 찾을 때 도둑 든 성에서 일한 경력이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쫓겨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건 그래… 난 여기서만 6개월 일했는데….”
“나도 비슷해… 여기서 일한 것밖에 경력이 없는데 그런 소문이 나면 난 진짜 취직도 못 하는걸….”
“눈앞의 일만 보지 마시고 장기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마르바스성에서 도망치는 일은 절대 이득이 아니에요. 평생 꼬리표로 남아 취직이 힘들어질 거예요.”
꼬리표로 남는다는 소리에 사람들은 더럭 겁을 집어먹고 하나둘 한스에게 불신의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저놈이 지만 살겠다고 우리 인생을 망치려고 들었네.”
“씨부럴 놈. 입만 살아 가지고.”
사람들이 한스를 탓하는 소리가 커지자 그는 자신의 계획이 틀렸다고 생각했는지, 괴팍하게 인상을 쓰며 시에나를 노려보았다. 시에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공작님께서 곧 성의 새로운 관리자님을 보내 주신다고 했어요.”
“뭐, 뭐? 그게 진짜야?”
“네. 도련님을 끔찍이도 아끼시는 공작님이니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된 분을 보내 주시겠죠. 공작님께 보고도 숨김없이 들어갈 테고요. 그 보고에 사용인들이 도망쳤다는 내용이 들어가면 어떻게 수습하려고 그러세요? 데이몬 도련님의 일에 공작님이 얼마나 예민하신지도 아시면서.”
시에나의 협박이 먹혔는지 사람들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채찍이 너무 강했는지 덜덜 떠는 사람들도 보였다. 시에나는 한숨을 쉬며 한스를 노려보았다. 한스가 시에나의 눈치를 보며 움찔거렸다.
“그러니 우리 조금만 더 힘을 내서 버텨봐요. 혹시 알아요? 새로 오신 분이 성을 지킨 사람들에게 포상이라도 내려 주실지. 그리고 조금만 참으면 지금까지 일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환경에서 일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채찍을 가했으니 이젠 당근이 필요할 때였다. 시에나의 말에 사람들은 슬슬 설득되는 기세였다.
“공작님이 말씀하시길 일주일 안으로 관리자님을 보내 주신다고 했어요. 그러니 우리 그때까지만 버텨봐요.”
시에나가 명확한 시간을 설득의 마침표로 내밀었다. 사람들은 시에나의 의견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시에나의 말이 옳아요.”
뒤에서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제인이 나섰다. 사람들의 이목이 제인에게 집중되었다.
“섣불리 도망쳤다가 추적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요? 아픈 도련님과 성을 버린 죄는 가볍지 않아요. 시에나만 해도 오늘 남작을 때린 것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요.”
“그, 그건 쟤가 남작님한테 잉크병을 던져서 그렇게 된 거잖아.”
“도련님은 지금 아프세요. 이러다 혹 도련님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성에 남은 사람과, 성을 버리고 도망친 사람 중 그 분노가 어디로 갈까요?”
제인은 공포를 이용한 정치를 잘 할 줄 알았다. 시에나는 제인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칸나가 그 의견에 힘을 실어주려는 듯 앞으로 나섰다.
“나, 나는 남을래. 남는 게 맞는 것 같아.”
칸나가 나서자 메리도 쭈뼛대며 앞으로 나왔다.
“나도 남을 거야. 지금만 생각하면서 도망쳤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 줄 알고. 고작 일주일인데, 뭐. 봉급도 아직 남아 있고.”
제인은 그렇다 치고 소심한 편인 칸나와 메리가 제 편을 들어주자 시에나는 조금 감격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칸나가 그런 시에나의 귓가에 다가가 속삭였다.
“그때에는 네 편을 들어주지 못했잖아. 지금와서 이러는 게 조금 비겁하다 생각 할 수도 있지만…. 그리고 나도 네 말이 맞다고 생각해.”
시에나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칸나와 메리는 계속 생각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시에나가 그런 그들을 살짝 껴안으며 작게 말했다.
“고마워, 칸나, 메리. 그리고 제인도.”
칸나가 수줍은 듯 배시시 웃었다. 훈훈한 분위기에 격렬했던 담론은 유야무야되었다. 셋이 나서자 여론도 시에나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래, 일주일이랬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으흠, 그래. 뭐. 그 정도야….”
한스는 이야기가 생각대로 되지 않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참나. 그래! 그렇게 하라고!”
한스는 짐짓 화난 말투로 소리쳤다. 그런 한스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기세등등했던 아까와는 달리 한스는 쭈뼛거리며 중얼거렸다.
“…나도 여기 머물 테니 말이야. 흥, 일주일 안 오기만 해봐.”
한스는 작게 성을 내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나 그런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 나는 마저 식사 준비해야겠다.”
“나도 서쪽 별관 청소해야 해.”
“같이 가자.”
사람들이 서서히 본연에 업무로 돌아가자 시에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큰일이 마무리 되었지만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시에나는 작게 심호흡하며 주방으로 총총 걸어갔다.
* * *
“으음. 이건 좀 심한걸….”
시에나는 아침 식사로 나온 거의 물과 같은 스튜를 보며 낮은 한숨을 쉬었다. 스푼으로 뜬 스튜가 걸쭉함 없이 맑은 찻물처럼 똑, 이 빠진 스튜 접시 위로 떨어졌다.
사용인들에게 쓰는 돈을 아까워했던 리메리오 남작 때문에 원래도 썩 좋은 식사가 주어지진 않았지만, 예산이 떨어져 양질의 식료품을 살 수 없게 되자 식사는 더욱 형편없어졌다.
“도련님은 계속 아프셔?”
앞에 앉아 있던 칸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으응. 열이 좀처럼 내리시질 않네.”
“저런….”
환자이자 도련님인 데이몬의 식사를 가장 신경 써서 만들긴 하지만 워낙 예산이 적다 보니 그것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 때문일까.
데이몬은 열이 오르기 시작한 지 꽤 지난 지금까지도 쭉 앓고 있었다. 열뿐만 아니라 기침까지 시작된 탓에 불쌍한 데이몬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내가 오면 안 아픈척 기침을 참다가 얼굴이 새빨개지는데 그게 너무 안쓰러워.”
“에고, 의원이 한 번 더 다녀가지 않았어?”
“응. 그런데 신전의 약이 잘 맞지 않는 것 같더라고.”
“그렇게 비싼 돈 받아놓고. 완전 돌팔이 아니야?”
메리가 씩씩대며 말했다. 시에나도 조금은 동의하는 바라 굳이 그녀의 말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생활이 점차 궁핍해지자 공작에게 받은 보석을 풀어볼까 생각도 했었다. 마르바스 영지는 너무 작아 보석을 팔려면 큰 영지까지 가야 했는데 데이몬이 시에나만을 따르고 있는 상황이라 나갔다 오기도, 누군가에게 부탁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공작 각하가 보내 주신다는 관리인이 오늘내일 안으로 도착한대.”
“어머, 잘됐다. 그러면 식사도 좀 괜찮아지겠지?”
칸나와 메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시에나가 하도 고생하고 있어 불평하지 못했을 뿐이지 둘의 불만도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그러길 바래야지.”
시에나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게 뭐야. 이걸 먹으라고 만든 거야!”
“아, 재료가 부족한데 어떡해요! 그럼 그쪽이 만들어 보던가!”
“아침부터 땡볕에서 몇 시간이고 일했다고! 제대로 된 음식을 좀 내놔!”
“아이고, 우리라고 뭐 좋은 거 먹는 줄 알아요? 우리도 당신들이 먹고 남은 거나 좀 먹는다고!”
“제에길!”
성의 잡일을 도맡아 하는 로토가 신경질을 내다 휙 나가 버렸다. 그런 로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방 담당 베니아가 팔짱을 끼고 코웃음을 쳤다. 배가 고프니 사람들이 예민해지고 싸움이 잦아졌다.
시에나는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스튜를 한 번에 후루룩 들이켜고는 벌떡 일어났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시에나가 큰 소리로 외치자 식당에 남아 수프를 깨작거리고 있던 사람들이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우리, 먹을 거 구하러 나가요.”
* * *
한 시간 뒤, 그들은 햇빛을 가리는 차림을 하고 뒷산을 오르게 되었다. 아직 여름인지라 해는 뜨거웠지만, 하늘 높이 솟은 나무들 덕분에 그렇게 덥지는 않았다. 한의사인 아버지가 틈만 나면 수빈을 데리고 산에 오르는 바람에 시에나는 약초와 나물, 버섯들에 대해 해박한 편이었다. 산은 언제나 시에나에게 자신의 품을 넉넉히 내주었다. 송이버섯부터 도라지, 칡, 드물게는 산삼까지도. 그 덕분에 중학생 때부터 시에나는 혼자 자급자족 해왔다.
갑갑함에 몇 번 산속을 쏘다닌 시에나는 책 속 세계의 숲에도 먹을 게 제법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앗. 버섯이다.”
시에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먹을 수 있는 식용버섯 하나를 찾게 되었다. 사람들은 버섯의 밑동을 캐는 시에나를 옹기종기 모여 구경했다. 조심스러운 손길에 흙이 털리고, 동글동글하고 새하얀 버섯이 자태를 드러냈다.
“이건 먹을 수 있는 버섯이에요. 구워 먹어도 맛있고, 스튜 안에 넣어도 맛있죠.”
“우와… 엄청 금방 찾으시네요.”
사용인들 몇몇이 감탄하며 시에나를 칭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버섯이 정말 먹음직스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시에나는 수줍게 미소 지었다.
“앞으로 발견하는 대로 설명해 줄게요. 점심 즈음엔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을 거예요.”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다는 말에 사람들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식사가 어지간히 형편없긴 했나 보다. 30분이 지나자 시에나의 바구니는 반 정도 차게 되었다. 지금까지 채워 놓은 산나물과 버섯들을 샘플 삼아 다른 사람들의 바구니에 나눠 준 시에나는 손에 묻은 흙을 털며 말했다.
“자아, 이제 설명도 충분히 했으니 두셋씩 모여 채집한 다음에 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 여기에 다시 모이기로 해요.”
“네-!”
그들은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서로 짝을 지어 흩어졌다. 바구니를 가득 채워 돌아가겠다는 희망찬 미래를 꿈꾸며. 시에나는 홀로 남아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여름이라 산은 확실히 풍요로웠다. 물을 머금어 싱싱하고 유연한 나뭇가지가 이따금 바람에 흔들거릴 때마다 연두색 나뭇잎들이 함께 나부꼈다.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땀을 식힌 시에나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매의 눈으로 먹을 만한 것들을 찾았다.
눈썰미가 좋은 시에나가 별 모양의 꽃을 발견한 건 탐색을 시작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서였다.별 모양의 꽃을 발견하자마자 시에나의 얼굴이 확 피었다.
“보리지네, 예쁘다.”
뚜둑.
예쁘다는 감상과 함께 즉시 보리지 꽃이 잔혹하게 잘려 나갔다. 안타깝지만 현재 시에나에겐 감상에 빠질 틈이 없었다. 시에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보리지를 계속해서 꺾었다.
오이 향이 나는 보리지는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꽃이다. 꽃이나 잎을 술로 담가 마시면 슬픔을 씻어 준다 해서 쾌활초로 불리기도 하며, 차로 만들면 해열 작용을 하기도 한다.
데이몬에게 차를 만들어 줄 요량으로 시에나는 주변에 있는 보리지를 후두둑 뽑았다. 바구니에 적당한 양이 차자 시에나는 허리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삭.
시에나가 다른 약초의 채집에 집중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깜짝 놀라 시에나가 긴장한 기색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구 있어요?”
함께 산에 올라온 사람인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파사삭.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약초를 따다 상당히 깊은 숲 안쪽까지 들어왔기에 위험한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예를 들어 산적이라던가.
긴장감에 등골이 쭈뼛 선 시에나는 나무에 등을 기대어 경계심 어린 눈으로 사위를 훑었다.
“누, 누구야!”
그때, 시에나와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풀숲에서 노란 털을 가진 토끼 한 마리가 깡총, 뛰어나왔다.
“아, 뭐야… 너였구나.”
시에나는 후유, 한숨을 내쉬었다. 슬쩍 겁을 먹었던 자신이 민망해질 정도로 작은 생물이었다.
토끼는 시에나를 보고 뀨우?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풀을 잔뜩 먹은 토끼의 넓적다리에 토실토실하게 살이 올라 있었다. 그걸 바라본 시에나의 눈에 고민이 스쳤다.
잡을까.
“토끼야, 이리 오련.”
고민은 짧았다. 시에나는 아까 엮어 놓은 여분의 바구니를 들고 숨을 죽이고 토끼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가기 시작했다.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으로 다가간 시에나가 이내 세 걸음 정도 가까워졌을 무렵, 몸을 던지며 바구니를 토끼가 있는 자리에 씌웠다.
폴짝.
그러나 역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토끼를 잡기란 쉽지 않았다. 토끼는 시에나를 뀨뀨 비웃으며 겨우 몇 걸음 물러나 그녀가 보이는 위치에서 그루밍을 했다. 명백하게 시에나를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울컥한 시에나가 토끼를 잡기 위해 숲을 내달렸다.
“거기 서!”
오기로라도 잡고 만다. 그러나 토끼는 재빠른 속도로 요리조리 시에나의 손길을 피해 도망쳤다. 저도 모르는 새 나뭇가지에 옷자락이 걸리고 발에 진흙이 튀었다.
결국 시에나는 구석으로 토끼를 몰아넣는 데 성공했다. 경사가 심한 절벽 위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토끼를 보며 시에나는 벅찬 숨을 들이쉬었다.
“네가, 헉. 뛰어 봤자….벼룩이지.”
숨을 격하게 쉬며 시에나는 토끼와 간격을 좁혔다. 토끼의 위로 바구니를 씌우는 순간, 토끼는 삶의 위협을 느꼈는지 있는 힘껏 뒷다리의 힘을 이용해 옆으로 빠져나갔다.
“아앗…!”
너무 과한 힘을 준 탓에 허탕을 친 시에나는 그대로 앞으로 넘어갔다. 아래는 바로 절벽, 3m가 넘는 낭떠러지를 구르면 못해도 어디 뼈 하나는 내주어야 할 것이다.
시에나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무엇이라도 잡고 싶어 휘두른 팔에는 공기만이 스쳤다.
‘떨어진다!’
시에나는 다가올 아픔을 기다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어?”
그런데, 1초가 지나고 2초가 지나도 시에나의 몸은 굴러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건가 싶어 눈을 떠 보자 정말 시간이 멈춘 것처럼 발이 허공에 동동 떠 있었다.
“조심해야죠. 하마터면 다칠 뻔했어요.”
당황한 시에나의 위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의를 주고 있지만, 타박하는 것이 아닌 따스하고 웃음기 어린 목소리였다. 시에나가 의아한 시선으로 위를 바라보았다. 은색 갑옷을 입은 남자가 그녀를 한 팔로 안고 있었다.
시에나의 발이 공중에 달랑달랑 들려 있는데도 그는 시에나를 한참이나 내려보고 있었다. 180이 훌쩍 넘는 장신에 운동으로 단련된 단단한 몸. 그러나 시에나가 가장 집중한 건 얼굴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잘생겼지?”
그랬다. 넋을 놓고 있다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낼 만큼 남자는 근사했다.
남자는 짧은 머리를 바싹 올린 스타일을 하고 있었는데, 미끈한 이마 사이로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칼은 그의 장난기 어린 회색 눈과 몹시 잘 어울렸다.
도드라진 눈썹 뼈 아래 우뚝 선 콧날과 단단한 턱은 강한 인상을 주고 있었지만, 살짝 도톰한 입술 끝이 부드럽게 올라가 있어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엄청나게 잘생겼구나 싶을 뿐이었다.
책에서 이렇게 묘사되는 사람이 있었던가? 시에나는 잠시 그의 얼굴을 관찰하며 기억을 더듬었지만, 역시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안겨 생각에 골몰하는 시에나에게 가지런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생명의 은인한테 감사하다는 말보다 잘 생겼다는 말을 먼저 하시는 겁니까?”
남자가 시에나를 가볍게 놀리며 시에나를 땅에 세워 주었다. 그의 말에 정신을 차린 시에나가 허둥지둥 감사의 말을 꺼냈다.
“아, 죄송해요.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겉으로는 감사 인사를 말하면서도 시에나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를 경계하며 은근슬쩍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의 복장이 산에 오르는 사람과는 조금 달랐기 때문이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은색 미늘 갑옷, 보석이 박혀 있지는 않지만 고급스럽다는 느낌이 한눈에 드는 남색 검집. 등에 두른 긴 망토는 시에나의 몸을 세 번을 감싸고도 남을 정도로 넓었다.
척 보기에도 귀한 신분의 기사 같은데, 관찰하면 관찰할수록 정체를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이런 산속에서 쉬이 볼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제 이름은 로하엘 카넬로프입니다. 레이디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그는 굳은살이 배긴 커다란 손을 시에나를 향해 건네며 말했다.
카넬로프 가문.
귀족 가문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기억하기로 이런 사람은 없었다.
스무 번도 넘게 읽은 책이었다. 흐릿하더라도 책 내용의 대부분은 기억할 수 있었다. 이런 외모의 귀족 가문 자제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권외의 인물이라는 소리인가. 단순 엑스트라가 아닌 권외 인물의 등장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뻣뻣하게 굳힌 시에나가 손을 맞잡았다.
굳은살로 뒤덮인 두터운 손이 시에나의 손을 넘어 손목까지 덮었다.
“안녕하세요, 시에나입니다.”
“아, 레이디가 시에나 양이었군요. 공작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아주 용감한 일을 하셨다고요.”
그렇게 말하며 로하엘은 시에나를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에나가 집중한 건 공작이라는 단어였다.
“아, 혹시 공작님이 보내 주신 성의 관리자님이신가요?”
“네, 맞습니다.”
로하엘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시에나는 그제야 마음을 좀 놓았다. 그리고 조금 미안해졌다.
“바로 알아보지 못해서 죄송해요. 오늘내일 중으로 온다는 서신이 어젯밤에 와서 아무리 빨라도 오늘 저녁에나 오실 줄 알았어요.”
게다가 로하엘이 너무 젊어 보인 탓도 있었다. 시에나보다는 나이가 좀 있어 보였지만, 그래 봤자 20대 초반으로 보여 성의 관리직을 하기엔 조금 어려 보였다. 시에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로하엘을 훑었다.
“제 얼굴이 마음에 드셨나 봐요.”
시에나가 너무 적나라하게 로하엘을 쳐다봤는지 그가 부드럽게 지적했다. 로하엘의 말에 시에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무리 의심스러워 보였다 한들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시선이었다.
“제가 너무 빤히 쳐다봤죠. 죄송해요. 그런데 여긴 어쩌다가 올라오신 건가요?”
“도착해서 성에 짐을 풀었는데 먹을 걸 구하러 산에 가셨다고 들어서요. 도와드릴 건 없을까 하고 올라온 참이었습니다.”
“그러시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제대로 맞이했어야 했는데 실례를 했네요.”
대부분의 사용인이 먹을 걸 구하러 산에 올라온 터라 로하엘이 받은 응대는 엉망이었을 테였다. 휑한 마르바스성에 도착해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시에나는 미안한 기색으로 로하엘을 올려다보았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로하엘은 기분 상한 기색 없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성인 남자 특유의 여유로움에 어쩐지 맥이 풀렸다. 시에나의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띄워지려는 순간, 머릿속에 번개같이 아까 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런데… 혹시 어디서부터 보셨나요?”
“네? 뭘 말인가요?”
설마 토끼랑 이야기한 걸 다 본 건가. 부끄러움에 얼굴을 빨갛게 붉힌 채 시에나가 재차 더듬더듬 설명했다.
“제가 토끼 잡는 거… 어디서부터 보셨나요?”
아무도 없는 줄 알고 토끼를 상대로 열연을 펼쳤던 시에나로서는 알고 싶지 않지만, 알아야만 하는 진실이었다.
“거의 못 들었어요.”
“…정말요?”
“네. 거기 서! 하고 토끼한테 말하는 것부터 들었던 것 같네요.”
“다 들으셨네요….”
시에나가 침울한 얼굴을 하자 로하엘은 새하얀 이를 반짝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뭐 어때요. 그럴 수도 있지.”
“으, 그래도 정말 로하엘 님이 올라와 주신 덕분에 살았어요. 아니었음 저 절벽에서 떨어졌을 거예요.”
시에나가 까마득한 절벽을 바라보다 소름 끼친다는 듯 뒷걸음질 쳤다. 로하엘이 아니었으면 어디 하나가 부러지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에 기껏 잘 살아놓고 여기서 죽으면 얼마나 개죽음인가. 시에나가 소름이 돋은 팔뚝을 매만지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도 오전부터 산 공기를 쐬니 기분이 좋았는걸요. 덕분에 시에나와도 만나게 되었고요.”
“저도 로하엘 님을 만나뵙게 되어 좋아요.”
훈훈한 분위기로 적당히 마무리 하고 일어나려던 시에나가 로하엘의 뒤에 있던 것에 시선이 꽂혔다.
톱니 모양의 저 풀은….
부끄러움에 평소보다 어수선하게 말이 많아졌던 시에나가 갑자기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자 로하엘은 의아한 듯 자신의 뒤를 바라보았다.
“로하엘 님, 잠시만요. 잠시만 가만히 있어 주세요.”
갑자기 진지해진 시에나의 목소리에 로하엘은 아주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에나가 그의 곁으로 바싹 달라붙었다. 모자로 미처 가리지 못한 하얀 목덜미가 로하엘의 눈앞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 시에나의 금실을 녹여 만든 듯한 머리칼에서는 연한 새싹과 햇빛 냄새가 났다.
로하엘은 아까의 여유 있던 표정과는 다르게 조금 당황하며 애써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시에나는 로하엘의 발 뒤에 옹기종기 난 잡초같이 생긴 풀을 매만졌다.
시에나가 제지하지 않았다면 로하엘에 의해 짓밟혔을지도 모르는 아주 작은 잡초였다.
그게 아주 소중한 거라도 되는 것처럼 양손으로 풀을 감싼 채 조심스레 줄기를 끊어낸 시에나가 그 풀을 코에 가져다 대었다.
한껏 신선한 풀 내음을 맡은 시에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로하엘 님! 정말 감사해요!”
“뭐가 말인가요?”
“이 풀이요. 제가 계속 찾아왔던 센텔라라는 약초거든요.”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시에나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로하엘은 그녀와 함께 쪼그려 앉아 시선을 같이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꼭 잡초 같은데, 약초였군요.”
“네. 작고 볼품없어서 잡초로 착각할 수도 있지만, 얘가 진짜 좋은 약초예요. 앗, 여기도 있네. 다 따 가야겠어요.”
신이 나서 센텔라에 집중하고 있던 시에나의 볼이 햇볕과 흥분으로 인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시에나를 보는 로하엘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그럼 저도 좀 도울까요?”
“네? 로하엘 님이요?”
시에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럼요. 저 도와드리러 왔다고 했잖아요.”
“어….”
그냥 입에 발린 말인 줄 알았는데. 귀족이 평민의 일을 돕는다니. 시에나가 대답을 하지 않고 어물거리자 로하엘은 그녀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팔을 걷어붙인 채 센텔라를 찾기 시작했다.
“이거 맞나요?”
몇 분 되지 않아 로하엘은 자신의 발밑에 자라난 톱니 모양 풀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에나는 가까이 다가가 그 풀을 살폈다.
“네, 이거 맞아요. 정말 잘 찾으셨네요.”
시에나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센텔라 군락이 곳곳에 있는 것 같았다. 로하엘은 칭찬에 기분이 좋았는지 시에나보다 더 열심히 센텔라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 로하엘을 보던 시에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로하엘 님은 귀족이시지요?”
“네, 귀족입니다.”
시에나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겠다는 듯 로하엘이 콧잔등을 장난스레 찡긋거리며 말했다.
“제가 이렇게 쪼그리고 앉아 있으니 별로 귀족 같아 보이지 않아서 그러시나요?”
“네? 아, 아니요. 아니에요! 그냥 스스럼없이 일을 도와주시는 게 신기해서 여쭤봤어요. 무례하게 보였으면 죄송해요.”
리메리오 남작의 일을 겪고 난 후 시에나는 여기가 계급 사회라는 걸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사용인들은 저들도 평민이면서도 시에나가 남작을 때려 별다른 재판과정 없이 사형을 당하는 것에 대해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책에서 봤을 땐 수도가 배경이어서였는지 차등은 뒀지만 그나마 평등한 편이었는데, 이렇게 고립된 시골에서는 영주가 왕이고 그의 말이 곧 법이었다.
그러나 로하엘은 도착하자마자 사용인들을 돕기 위해 산으로 달려왔으며, 산을 타기에 불편한 옷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팔을 걷어붙인 채 시에나를 도왔다. 시에나는 그게 신기했다.
“저는 귀족으로 태어났지만, 기사이길 택했습니다. 그리고 공작 각하가 계신 기사단은 신분이 아닌 철저한 실력 위주죠.”
로하엘은 시에나가 어느 부분에 궁금증을 느꼈는지 이해한다는 듯 상냥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렇군요. 정말 대단하세요.”
“예, 정말 존경스러우신 분이죠. 그런데 공작 각하께서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요?”
“10여 년 전 공작 각하 대신 전쟁터에서 활을 맞았던 사람의 유언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신분의 고하 없이 평등한 기사단을 만들어 달라고 하셨대요.”
“와, 그런데 이런 얘기를 저한테 해주셔도 되는 건가요?”
“그럼요. 공작 각하께서 기사단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항상 하시는 말씀인걸요. 유명한 일화라 영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군요….”
“비단 기사단 뿐만 아니라 공작 각하께서는 영주민이나 다른 사람들도 평등하게 대합니다. 공작 각하께서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하시는데, 그 밑에 있는 저희가 어떻게 차별을 둘 수 있겠습니까.”
로하엘은 그렇게 말하며 빙그레 웃었다. 로하엘의 말에 시에나는 이 세계가 조금은 좋아지는 것 같았다. 여기에서도 평등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있었다. 높은 위치에 서서 자신을 낮은 자와 평등케 보는 이들이 있었다. 그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 시에나는 쪼그령 앉은 채로 시선을 위로 두었다. 시선 끝에 갑옷에 흙이 묻는 것도 모르고 조그만 약초를 찾는 데 열중하는 로하엘이 보였다. 로하엘이라는 순풍이 마르바스성을 바꿔 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에 시에나는 작게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