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화 레이븐과 파슈다의 결투
검은 숲의 지배자, 환상을 다루는 고귀한 마족.
환마 레이븐 공작은 자신의 눈 앞에 있는 불타는 마족을 바라봤다.
화염의 주인, 화마 파슈다 공작.
그는 지금 레이븐이 만들어낸 환상과 검은 가시들을 불태우며 다가오고 있었다.
"레이븐...! 레이븐!!!"
파슈다의 불타는 날개는 한번 움직일 때마다 화염을 터뜨렸고, 그 맹렬한 겁화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불살랐다.
겉으로 보기엔 레이븐이 상당히 불리한 상황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진짜 힘은 이런 화력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레이븐은 조소를 머금으며 더욱 날개를 펼쳤다.
알 수 없은 검은 가루가 사방에 흩어졌다.
'어리석은 파슈다...점점 자신이 덫에 빠지고 있는 것조차 모르는구나.'
근처에 있던 파슈다 공작의 병사들과 파슈다는 알 수 없는 레이븐의 행동에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았고, 그녜의 부하들은 급히 그녀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파슈다. 내가 왜 환마인 줄 아나?"
"크킄! 그야 하찮은 술수나 써서 그런 것 아닌가? 지금 싸워보니 니가 어떻게 5위에 위치했는지 궁금하군. 뭐 바알과 하룻밤 같이 보내기라도 했나?"
파슈다는 레이븐이 바알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경기장에서 바알과 크게 마찰이 있었다는 것도 안다. 그는 이 사실을 인지하고 바알과 그녀를 엮어 희롱한 것이었다.
"....그런 저질스러운 도발에 본녀가 넘어갈 성 싶으냐?!"
순간 레이븐의 보라색 기운이 한 층 더 강해지며 일대를 휘감았다.
"크킄! 잘 넘어간 것...크헉"
순간 파슈다의 입에서 붉은 피가 한 움큼 쏟아져나왔다.
그리고 파슈다는 계속해서 입에서 무엇인가 쏟아져나왔다.
"우..웨에에엑!"
혓바닥이 녹아내려 바닥에 떨어진다. 위장이 뒤집혀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다.
"우웨에에엑"
내장이 줄줄이 쏟아져 내린다.
순식간에 모든 장기를 토해내버린 파슈다.
"끄어..어어어ㅓ"
"드디어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군."
"끄르으으윽... 꺼..꺼어...?!"
순간 소름끼치는 감각이 파슈다의 몸을 뒤덮었다.
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사
무언가 기어가는 소리가 파슈다의 귓가에 스며든다.
"끄어..어어!"
파슈다가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손으로 몸에 붙은 벌레들을 쳐낸다.
자신의 손에 불을 지펴 벌레들을 태워 죽이려했지만, 어째서인지 벌레들은 그의 몸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사사사사사사
기어코 벌레들은 파슈다의 입과 코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하고, 눈을 파내 갉아먹기 시작한다.
"끄어..."
그는 계속해서 불을 내뿜으며 벗어나고자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아무런 장기도 쏟아지지 않았고, 아무런 벌레들도 붙지 않았으니까.
이 모든 것은 레이븐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파슈다와 같은 고위마족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환상에 허우적거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마계에서 열 손가락에 드는 강자. 어설픈 환영으로는 그의 감각을 속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어느때보다 오랜시간을 집중해서 준비했다.
불타는 화염속에서 정신과 몸의 감각이 뒤틀리도록 고농도의 흑환분(黑幻粉)을 계속해서 뿌렸다.
아무리 강한 정신력을 지니고 있다하더라도, 이 흑환분에 지속적으로 노출된다면 어쩔 수 없었다.
흑환분(黑幻粉), 지금까지 레이븐이 뿌리던 검은가루로 생물의 감각을 일그러뜨린다.
이 검은 가루는 검은 숲 전역에서 얻을 수 있다.
레이븐이 아닌 다른 이가 이 가루를 사용했다면 약간의 불편함밖에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가루를 오랜시간 연구했고, 이윽고 자신의 마법과 접목시킴으로써 그녀는 이 흑환분의 주인이 되었다.
검은 숲 전체가 그녀의 손바닥 안에 있기에 파슈다는 이 숲에 들어온 순간부터 승산이 없었다.
그가 얼마나 많은 군대를 이끌고 오던, 결코 레이븐과는 이 숲에서 싸워서는 안됐다.
"크..크윽..레이븐..무슨 술수를..쓴거냐..."
파슈다는 희미해진 정신을 어떻게든 붙들어매고 그녀에게 물었다.
"멍청한 파슈다....네 놈은 내 땅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승산이 없었느니라."
"커헉...말 도 안..."
"그럼 잘가라고."
서걱
순간 파슈다의 시야가 반전되었다.
툭
땅이 머리 위로 보였다.
"저승에 가서는 그 성질 좀 어떻게 해봐."
머리를 잃은 몸은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축 늘어졌다.
뜨거운 피가 분수처럼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나오고 파슈다의 몸 주변에 있던 불길이 한순간에 힘을 잃으며 사라져간다.
"그래도 나름 공작이랍시고 날 고전케하는구나."
레이븐이 자신의 그을린 왼 팔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쳇..."
그 때
저 멀리 검은 형체가 보이더니 빠른 속도로 레이븐 앞에 나타났다.
{공작, 전투는 끝났나보군.}
"너는...카니지 옆에 붙어있던 그 블랙드래곤이구나. 후방에서 화마놈의 부하를 처리하던 중 아니었나?"
{인간과 조우했다. 카니지는 그들과 맞서는 중이지. 나는 카니지의 두 아이를 지키라는 말을 듣고 왔다.}
"아..그 두 스웜프 드래곤들이라면 저기 내 군대 뒤에 있다. 기척이 느껴지더군. 마침 파슈다놈과 전투도 끝났으니 맡아주도록 하지."
블랙드래곤이 파슈다의 시체를 잠시 흘겨보더니 레이븐에게 물었다.
{그럼 나는 뭘 하면 되지?}
"기껏 도와주러 온건 고맙지만, 이미 여기는 일이 끝나서 말이야. 그냥 카니지를 여기로 불러줬으면 좋겠는데."
{..알겠다.}
"근데...인간 놈들이 왜 여기에..."
그 순간 레이븐의 머리 속에서 카니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은 인간들에게 쫓기는 몸이라고.
'카니지를 쫓던 놈들인가...곱게 보내줘서는 안되겠구나.'
레이븐은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고는 화마의 잔당들을 바라봤다.
.
.
.
"카니지 왔구나."
멜류시오는 카니지를 데리고 레이븐 앞에 섰다.
카니지가 주변을 둘러보자 파슈다와 레이븐의 전투 흔적이 보였다.
검은 땅은 재로 뒤덮이고, 울창했던 검은 숲은 어느새 대부분 타버리고 뽑혀나가 상당히 황폐해졌다.
{레이븐. 파슈다를 이겼다고 들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감히 본녀에게 덤비다니. 자기 분수를 알아야지."
{아...그렇군. 그나저나 스왈로우와 새비지는 어떻게 되었지?}
"내 저택 앞 마당에 잘 있을거다."
{뭐...이제는 자기 몸만큼은 알아서 할 수 있을만큼 컸으니까.}
"그나저나 인간놈들과 싸웠다고 들었는데. 너를 쫓던 추격자들인가?"
{맞다. 그녀석들이다. 근데 두 녀석이 심상치 않게 강하다. 지금은 화마의 군대와 싸우느라 정신없지만, 곧 정리될 것 같다.}
"흐음..그럼 지금쯤은 인간놈들이 전부 처리했겠는데?"
{...벌써? 하지만 화마의 정예병들의 수준은...}
"화마가 죽었다. 놈이 자신의 부하들에게 주고있던 마력의 실도 끊어졌지. 정예병의 수준도 한 단계 내려갔을거다."
{그렇군. 그럼 우리도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곧 도착한다는 말인데.}
"그런 하찮은 인간놈들 때문에 준비? 후... 보여주마. 내가 어떻게 화마놈을 죽였는지. 마침 저기 인간놈들의 기척이 느껴지는구나."
카니지와 멜류시오는 레이븐의 손짓을 따라 시야를 옮겼다.
그러자 저 멀리 인간들이 자신들을 공격하는 파슈다의 군대를 쓸어버리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정말 내가 보기에도 파슈다 군대의 수준이 내려간 것 같군.}
"대충 저 녀석들의 힘을 보아하니 파슈다 놈의 허약한 군대는 발목조차 잡지도 못하겠구나."
레이븐이 날개를 피며 헌터들을 향해 다가갔다.
{...조심해라. 금발의 여자와 중년의 사내가 있는데 그들은 진짜 위험하..}
"쉿"
카니지가 입술에 손을 갖다댔다.
"우리 귀여운 애완동물씨는 걱정이 참으로 많구나."
{.....}
"나약한 인간들을 상대할 땐 이렇게 하는것이니라. 잘 보고 배우도록."
레이븐은 카니지를 올려다 보며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
.
.
헌터 일행은 카니지가 갑작스런 배신과 함께 도주해버리는 바람에 그들은 카니지를 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카니지의 배신을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배신했다.
그저 브레스를 헌터들에게 뿜거나 남은 기력을 모두 쥐어짜서 가시가 박힌 꼬리로 공격할 줄 알았지만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바닥에서 검은 가시를 솟아나게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전혀 대처하지 못했다.
'크윽..실수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놈의 재생력은 상상이상이야.'
분명히 한영길이 큰 피해를 입혔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손을 봤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방어선이 무너진 헌터들은 몬스터들의 맹렬한 공격을 버텨내야만 했다.
"크윽...협회장님 더는 무리..으아악!"
"더! 더 몰려옵니다! 무언가 방법이..끄아아악!"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나온다.
하지만 피해는 비단 헌터일행만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크라라라라악
크르으으윽
"제기랄..인간 놈들..끄으윽"
제인의 얼음가시들이 사방으로 흩뿌려진다.
얼음가시를 맞은 몬스터들은 그대로 몸에 바람구멍이 나며 맥없이 쓰러져나간다.
몸이 불로 이루어진 몬스터들은 수장시켜 처치한다.
그렇게 치열한 교전이 한창인 그 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몬스터들의 힘이 약해졌다.
"협회장님...몬스터들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나도 느끼고 있네. 놈들의 수준이 한 랭크 낮아진 듯 하군."
적을 처리하는데에 있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던 A랭크 헌터들은 어느새 빠르게 적을 처리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몰라도 하늘이 우리를 돕고 있는 것은 분명하군. 놓쳤던 카니지의 추격을 계속 이어나가도록 하세. 제인양. 카니지의 기운을 추적할 수 있겠나?"
"이미 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하는 이터의 기운은 저 곳에서 강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군요."
"...알겠네. 그럼 제군들! 모두 힘내주기를 바라네!"
한영길은 선봉에 서서 몬스터들을 상대했고, 그의 앞에선 적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나갔다.
그렇게 한창 전진하고 있던 한영길의 앞에 검은 원숭이 가면을 쓴 사내가 한 여인을 등에 업은 채 나타났다.
"한영길 협회장님, 십이신장 소속의 흑신입니다. 현재 같은 길드원인 백묘가 심각한 부상을 입어 먼저 복귀할까합니다."
원래라면 동료가 쓰러졌다고 해서 함부로 복귀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십이신장이 마계에 진입하는 조건으로 내걸었던 것은 위험에 처한다면 언제든지 토벌대에서 이탈해 복귀한다는 내용이었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알겠네. 동료가 위급하다는데 십이신장 측에서 제시한 조건을 생각하면 뭐... 조심히 가도록 하게나.
둘은 짧은 대화를 마치고 헤어지려던 찰나
"잠깐만...근데 그 여인은 누구와 싸워서 그렇게 된거지?"
"..제가 갔을 때는 카니지와 블랙드래곤 두마리를 동시에 상대하고 있었습니다."
"!!"
그 말을 들은 헌터들과 한영길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고작 A등급 헌터 혼자서 준성체 이터와 블랙드래곤을 상대했다는 말인가?
"..어서 빨리 가게나."
그 말을 끝으로 흑신은 그림자에 녹아들어 사라졌다.
'십이신장에 대단한 인재가 있었구만 그래.'
한영길은 조용히 탄성을 내뱉으며 전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