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화 나는 동생에게 시련을 내린다.
김진현, 카니지.
그는 과거에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다.
나약했던 과거의 나는 죽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하나를 보자 그 생각은 부정당했다.
그녀에게 다가가 지금까지 많이 힘들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동안 잘 자고 있었냐며, 꿈 속에서는 어땠냐며 농담도 해주고 싶었다.
오랫동안 나는 동생을 기다렸으니까.
그 누구보다 그녀를 다시 보고 싶어했으니까.
하지만 계속되는 전투에 나는 잠시동안 잊고 있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마주한 진실에 나는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이제는 내가 그녀에게 해주고 싶었던 것들을 해줄 수 없는 몸으로 만났으니까.
나는 그녀를 그녀를 조용히 바라봤다.
가면 너머로 보이는 하얗게 불타버린 눈. 극심한 고통으로 하얗게 색을 잃어버린 머리카락.
'많이...힘들었구나.'
지금이라도 지금까지 있었던 사실을 다 말해야 할까?
나는 사실 김진현이고, 너의 오빠라고? 그러니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자고?
'하하....'
이미 너무 늦었어.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어.
다시 동생 곁으로 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솨아아아아아
차가운 빗물이 달궈진 내 머리를 적셔 진정시킨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는 김진현인가 카니지인가.'
타다다다다다
발걸음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온다.
'나는 약자인가 강자인가.'
마음을 다 잡은 나는 붉은 안광을 피어내며 다시 눈을 떴다.
나의 동생이자 가장 소중했던 사람, 김하나를 바라봤다..
{김하나}
다시 만나서 너무 반가워.
"네 녀석 어떻게 나를 알고 있지? 게다가 우리 오빠도 어떻게 알고 있는.."
{김진현은 내가 죽였다.}
하지만 난 너를 반겨줄 수 없어.
"....뭐...?"
{김진현은 차가운 동굴바닥에서 죽었다. 남은 것은 카니지뿐이다.}
이곳에 있는 괴물은 더이상 너의 오빠가 아니니까
"...너...너!!! 카니지!!!"
백묘는 검을 뽑아들며 카니지를 향해 도약했다.
카니지도 그에 응하듯 입에 산성 브레스를 머금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와라...!}
와라.
콰아아아아아아아
막강한 산성 브레스를 그녀를 향해 뿜어냈다.
나는 공격을 하면서도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정도로 죽지 않을거야...A등급 헌터니까...'
촤아악!
그리고 보란듯이 김하나는 산성액을 갈라내며 내게 다가왔다.
"용서하지 않겠어!!"
나는 그녀를 향해 왼 손을 뻗어 공격했지만 내 손가락을 잘라내며 내 팔위로 올라섰다.
크르르르으윽!
나는 고통을 호소하며 오른 팔 톱낫을 그녀에게 휘둘렀다.
파밧
그녀가 하얀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
콰직
크르르윽!
그녀는 내 오른 쪽 눈에다 칼을 박아넣고는 몸을 고정시키며 나를 노려봤다.
"말해."
{크크킄 무엇을?}
나는 오른 팔에서 촉수를 뻗어내며 그녀를 붙잡으려 했다.
촤아아아악
내 수많은 촉수들이 그대로 잘려나가며 땅에 힘없이 떨어졌다.
"말해. 왜 죽였어."
그녀가 내 목에다 칼을 박아넣었다.
푸욱!
막강한 충격에 나는 그대로 몸이 뒤로 쏠렸다.
{크킄 지금 몬스터에게 왜 헌터를 죽였나고 물었나? 멍청한 질문이군.}
나는 양 손에서 수많은 촉수들을 뽑아내 그녀를 공격했다.
촤아악
하지만 그녀의 하얀 검기는 모든 것을 잘라내고 내 오른 쪽 어깨마저 베어내 오른 팔이 떨어졌다.
서걱!
"분명 오빠를 죽인 이터는 토벌당했다고 들었어. 근데 넌 뭐야."
{.....}
나는 왼 팔을 휘두르며 그녀를 떨쳐내려 했다.
서걱
내 왼 팔이 통째로 잘려나간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얼굴을 들이밀며 나와 눈을 마주했다.
"뭐냐고 넌!!!"
'김진현'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삼키며 나는 억지로 이죽거렸다.
원래라면 이렇게까지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접근했을 때 가시 촉수로 벽을 세우고 그것을 베어낸다면 산성을 내뿜고, 그것마저 안통한다면 푸른 화염을 내뿜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마저도 안통했다면, 용신각성을 사용해 그녀를 산채로 집어삼켰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김하나가 아니었다면.
{나? 나는 네 오빠를 죽인 이터의 자식이다.}
"오빠를 죽인 이터의..?"
{그래. 내 어미는 네 오빠를 죽였지.}
"...."
{그리고 네 오빠의 시체는 내가 잘 먹었다.}
"!!!"
{맛은 영...별로더군. 크하하하!}
그 순간 칼이 내 입 천장을 뚫고 들어왔다.
"닥쳐..."
{나는 네 오빠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거짓말이다. 사냥감의 기억따위 흡수 할리가 없었다.
"....뭐?"
{나는 네 오빠의 과거, 생각, 감정. 모든 것을 흡수했지.}
나도 내가 왜 이런 거짓말을 하는건지 모르겠다. 그녀와 조금이라도 더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내가 겪었던 감정을 알려주고 싶어서일까. 내가 겪었던 일을 알려주고 싶어서일까. 나도 더 이상 나를 모르겠다.
"....말해."
그녀가 부들부들 떨며 나를 노려봤다.
{....어떤 것을.}
"우리 오빠. 죽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말해."
푸욱
김하나는 카니지를 찔렀던 검을 더욱 깊게 쑤셔넣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
당장이라도 말하고 싶다. 힘들었다고.
나약해질 것 같았다. 이제와서 무슨 말을 한다고.
이래서는 안돼.
나는 세로로 찢어진 동공 속에서 고통을 머금은 안광을 피어내며 눈을 떴다.
{....내가 왜?}
나는 독해져야 한다.
나는 그 즉시 입에 열기를 머금으며 불을 뿜어낼 준비를 하였다.
{날 이기면 그때 가르쳐주마.}
나약한 마음은 버려라. 카니지.
"카니지....너!!!"
나는 그렇게 맹렬한 화염을 뿜어내고 김하나와 거리를 벌렸다.
나는 더 뚜렷한 의지를 보내기 위해 사념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김하나.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뭐?!"
{난 너를 먹어치우고 싶고, 너는 내게 복수를 하고싶다. 그뿐이다.}
"....."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 안 그런가?}
"그래....그렇지."
그녀는 검을 다잡고는 하얀 검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네 놈과 나 사이에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없겠지."
{좋은 마음가짐이다.}
나는 가시꼬리를 지면에 내리쳤다.
그러자 수많은 파편들이 튀어올랐고 나는 그곳에 화염을 내뿜어 유성과도 같은 모습으로 만들었다.
콰과광
그녀는 내가 던져낸 불타는 돌무더기들을 베어내며 내게 빠른 속도로 접근했다.
나는 분사형 기관을 통해 맹독과 질병이 섞인 침을 내뱉었다.
침은 어느새 가스 형태로 바뀌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고, 그녀는 그 가스마저도 검기로 걷어냈다.
쐐애애애애액
내 가시꼬리가 그녀를 향해 빠른 속도로 휘둘러졌다.
'시련이다. 동생아.'
가시꼬리가 땅을 후려치며 흙먼지를 일으킨다.
'헌터로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면, 강해져라. 나약해서 비참하게 죽었던 나와 달리 넌 강자가 되어라. 강자가 되어서 살아남아라.'
그녀는 높이 뛰어올라 내 머리 위로 올랐다.
그리고 그녀가 내 머리에다 검을 내려치려는 순간.
어디선가 검은 브레스가 내뿜어졌다.
사아아아아아
죽음의 기운이 그녀를 향해 갑작스레 덮치려했고, 나는 급히 촉수 벽을 세워 그 공격을 막아냈다.
가까스로 막아낸 브레스는 내 촉수들을 허물어뜨렸고, 다행히도 나는 김하나를 보호하는데 성공했다.
김하나도 갑작스런 내 행동에 당황했는지 눈을 크게뜨고 검은 브레스에 썩어가는 내 촉수를 바라봤다.
이 공격은 분명....
{카니지. 이 몸이 왔으니 이제 걱정마라.}
나는 사념이 전달되는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죽음을 다루는 블랙드래곤, 멜류시오가 있었다.
{멜류시오...}
{카니지. 꼴이 말이 아니네.}
내 양팔은 잘려 붉은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그 상처를 메꾸기 위해 촉수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아이들은? 그들을 봐달라고 했는데 어째서 여기 있는거냐.}
{이미 공작끼리의 결투는 끝났어. 그 레이븐이라는 마족의 승리로. 네 두 아이들은 지금 그 여인이 지키고 있어. 난 너를 데리러 온 거야.}
{...알겠다 지금 바로 가도록하지.}
{카니지 저 하얀 미물녀석만 처리하고 가면 되는거냐?}
멜류시오가 다시 한번 죽음을 두르기 시작했다.
{잠깐! 멜류시오! 저 여자는 죽이면 안된다!}
순간 내 사념을 들은 멜류시오는 멈칫하며 죽음의 기운을 거둬들였다.
{무슨 말이야?}
{사정이 있다. 나중에 말해주지.}
{...알겠어.}
.
.
.
처음엔 의문이었다.
블랙드래곤이 뿜은 데스 브레스를 자신의 촉수를 통해 날 보호해준 것.
'왜...날?'
그리고 전투가 계속되자 확신이 되었다.
'카니지란 저 괴물과 블랙드래곤은...날 죽일 생각이 없다.'
일반인이 봤다면 그냥 괴물들과 김하나의 실력이 동등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높은 감을 지닌 고등급 헌터인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자신을 향해 전력을 다해 상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더군다나 그녀는 직접 전투를 치루고 있기에 확신했다.
'하지만....어째서?'
카니지,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라면 사냥감을 무참히 짓밟는 이터.
그 옆에 있는 것은 모든 생명을 죽음으로 이끄는, 드래곤 중에서도 가장 흉포한 블랙드래곤.
이론 잔혹한 몬스터들이 굳이 자신을 봐주면서 상대할 이유는 없었다.
"카니지! 무슨 속셈이냐!"
하지만 카니지는 김하나의 말을 무시한 채 그저 묵묵히 그녀를 적당한 수준으로 상대했다.
블랙드래곤 또한 적당히 피할 수 있을 수준의 브레스를 뿜어낼 뿐 그 이상은 하지 않았다.
이들은 혹시 자신이 궁지에 몰리는 이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일까.
"날 농락하는거냐!!"
그녀는 검기를 두르고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결코 그들에게 큰 상처를 입힐 수 없었다.
일단 두마리이기 때문에 전처럼 함부로 진입하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아까 카니지를 몰아붙이면서 거의 모든 힘을 썼기 때문에 더는 아까와 같이 카니지를 맹렬히 몰아붙일 수 없었다.
퍼억!
카니지의 가시 꼬리중 가시가 없는 부분에 타격을 받아 김하나는 그대로 지면으로 날아가 파뭍혔다.
콰앙!
"크윽!"
검은 흙먼지 속에서 밝은 빛을 내뿜던 하얀 가면이 반으로 갈라졌다.
이미 한계까지 끌어올려 힘을 사용한 터라 팔은 덜덜 떨려오고 다리는 더 이상 통제권을 잃은 듯 힘이 들어갔다 빠졌다를 반복했다.
시야가 흐릿해진다.
그리고 흐릿한 시야 너머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거대한 두 괴수.
'...끝인건가? 이렇게 허무하게? 복수도 하지 못한 채?'
{일어나라.}
"....."
{복수 해야하지 않나?}
"....닥쳐..."
{난 네 오빠를 죽였다. 그런데 그렇게 누워만 있을건가? 오빠가 죽어갈 때 편히 침대에 누워있던 것처럼?}
"......"
{나약하군. 변한게 없어. 무기력하게 숨만 쉬던 그때와 똑같아.}
그 말을 듣자 그녀의 눈은 다시 하얗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너는 뭘 하기 위해 내 앞에 섰지? 복수? 아니면.. 그저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한 하찮은 몸부림이었나?}
"하아..하아..네가...뭘 알아!!!"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몸은 더 이상은 무리라는 듯 삐걱거리며 비명을 내질렀고, 그럴 때마다 극심한 고통이 몰려왔다.
그렇다고해서 쓰러질 수는 없었다.
"카니지...."
정말 저 괴물의 말처럼 자신은 그 때와 같이 변한게 없는 꼴이었으니까.
대항해야만 했다.
이길 수 없는 상대라 하더라도, 넘을 수 없는 산이라 할지라도, 닿을 수 없는 하늘일지라도.
그것이 세상을 집어삼키는 악신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양 손으로 검을 부여잡아 카니지를 겨눴다.
복수를 머금은 하얀 검기와 탐욕을 집어삼킨 검은 기운이 맹렬하게 서로를 노렸다.
하야 빛이 검은 숲에서 터져나오고, 검은 기운이 그런 하얀 불빛을 꺼트려나간다.
콰아아앙!
강렬한 두 기운이 서로 충돌하며 일대를 초토화시킨다.
쩌적
백묘의 가면에 금이가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쩌적
금이 간 가면은 반으로 갈라지며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카니지는 반쪽뿐이지만 맨 얼굴에 드러난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힘이 다한 김하나의 화염은 이내 불꽃이 되고 촛불이 되어 점점 그 빛을 잃어갔다.
"하아...하아..."
그 순간
김하나 앞에 익숙한 그리자가 일렁거렸다.
"...!"
"백묘, 늦지 않아 다행이군."
"...흑..신.."
"...돌아가지."
김하나는 흑신의 품에 힘없이 쓰러졌고, 카니지는 김하나를 안은 그를 바라봤다.
{...넌 누구냐}
'....누구지? 누군데 내 동생을..'
"알 필요없다. 이터."
나는 조용히 그가 쓴 가면을 바라보았다.
'....저 녀석은 십이신장인가?'
{십이신장}
"!!"
카니지는 십이신장들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이런 동물가면을 쓴 채 헌터활동을 하는 자들은 그들밖에 없었다.
'그럼...김하나도 십이신장 길드에 들어간 것인가?'
{나약한 녀석들. 상대할 가치도 못 느끼겠군. 꺼져라.}
흑신이 내 말을 듣자마자 김하나를 등에 업은 채 곧바로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어째서 그녀가 십이신장에 들어간 것인지는 몰라도 무사히 그녀가 돌아갔다는 생각에 카니지는 안심했다.
원래였다면 기절시키고 헌터 일행에 던져둔 채 자리를 뜨려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멜류시오, 우리도 돌아가자.}
멜류시오는 눈살을 찌푸리며 카니지를 바라봤다.
{지금 이 상황은 나한테 설명을 해줘야겠어.}
{돌아가서 레이븐과 이야기를 나눈 후 말하도록 하지.}
'대충 얼버무리면 되겠군.'
카니지와 멜류시오는 레이븐과 파슈다가 결투를 한 곳으로 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