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 외전-16화 (167/168)

외전 16화 황태자가 내게 집착한다(6)

공작이 떠나고, 이즈멜은 엘레노어가 앉아 있는 테이블 쪽을 돌아보았다. 엘레노어는 턱을 괸 채 정원 풍경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런 엘레노어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 답답하던 마음이 한층 개운해졌다. 이즈멜의 미간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렇게 티가 났던가.’

이즈멜은 공작이 제게 경고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썩 유쾌하지는 않지만, 공작은 그를 제일 잘 파악하고 있는 이였다. 엘레노어를 향한 이즈멜의 감정이 적정선을 넘어섰다는 것을 눈치챘던 것이리라.

‘확실히 좀 이상한 일이긴 하지.’

지금껏 연애라고는 전혀 모르고 살아왔던 것도 아니었다. 가볍게 만나 적당한 설렘을 즐겼고,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이즈멜에겐 늘 일이 더 중요했고, 황태자로서의 제 위치가 늘 우선이었다. 그 사실을 단 한 번도 망각한 적 없이 살아왔다.

그런데 엘레노어의 곁에 있을 때는 자꾸만 그 사실을 잊게 되었다. 제가 꼭 평범한 사람, 그저 사랑에 빠진 한 남자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정말 긴장해야 할지도.’

위험한 일이었다. 엘레노어에게서 한 발짝 물러서라는 이성의 경종이 울렸다.

따지고 보면 엘레노어의 이상형도 저와는 달랐다. 이즈멜은 제 곁에 있는 사람을 끝없이 외롭고 불안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는 그런 자리였다.

죽도록 노력하겠지만, 충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공작이 경고했던 대로 넘어서야 할 난관들은 끊임없이 닥쳐올 것이다.

‘나야 감당할 준비가 되었지만, 엘레노어는?’

그때 엘레노어가 고개를 돌리며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선명한 초록색 눈동자가 이즈멜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자꾸만 욕심이 자라났다.

***

힐끔.

조금 망설이다가 또다시 힐끔.

엘레노어는 옆에서 걷는 이즈멜의 눈치를 살폈다. 그를 둘러싼 공기만 무겁게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늘 싱글벙글 웃던 이의 표정이 굳어 있으니 더 신경이 쓰였다. 쉬지 않고 던져대던 농담도 뚝 그친 지 오래였다.

‘아까 무슨 일이 있으셨나…….’

잠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던 때부터 문제였던 것 같다. 이즈멜의 뒷모습이 무척 경직되어 있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하, 괜찮으세요?”

“응?”

“표정이 좀 어두우셔서…….”

이즈멜이 황급히 표정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신경 쓰였다면 미안해.”

순식간에 이즈멜의 얼굴에서 우울함이 걷히고, 입가에 아름다운 미소가 번졌다.

‘전하께서는 늘 저렇게 웃어오셨겠지. 진짜 마음은 어떻든…….’

엘레노어는 제 감정을 숱하게 억누르며 살아왔을 이즈멜이 좀 짠했다. 동시에 약간의 동질감도 느껴졌다. 어째서인지 전생의 제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서.

잠시 머뭇대던 엘레노어가 이즈멜 쪽으로 두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음?”

그러자 이즈멜의 눈이 살짝 커졌다. 눈썹을 슬쩍 추켜 올린 그가 물었다.

“이건 무슨 뜻이지?”

“글쎄요. 굳이 따지자면, 위로?”

괜히 좀 쑥스러워진 엘레노어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이즈멜의 시선이 복숭아처럼 발긋한 엘레노어의 뺨에 닿았다.

이즈멜은 무언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은 감각에 가슴께를 꾹 짚었다.

마법에라도 걸린 느낌이었다. 직전까지만 해도 무거웠던 마음이 이제는 날아갈 듯 가벼웠다.

“효과는 확실한 것 같군. 고마워, 위로.”

이즈멜이 싱긋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나란히 정원을 걸었다. 평소보다 조용하고 차분했지만 어색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이즈멜이 불쑥 엘레노어를 불렀다.

“엘레노어.”

“네?”

“그대라면…… 본인이 원하는 것과 남들이 원하는 것 중에 뭘 선택할 것 같아?”

두 선택지를 잠시 곱씹던 이즈멜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거두었다. 고민거리조차 되지 못할 만큼 답이 뻔했기 때문이다.

“묻고 보니 말도 안 되는 질문이었네. 그냥 잊어도 돼.”

“글쎄요. 생각보다 고르기 쉽지 않은걸요.”

하지만 엘레노어의 반응은 이즈멜의 예상을 비껴갔다.

“그래?”

“주변의 기대를 저버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책임감 때문이든, 그 사람들에 대한 애정 때문이든.”

엘레노어가 차분히 뱉어내는 말들은 이즈멜이 고민하던 지점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후자에 가깝게 살아왔던 것 같지만, 앞으로는 그냥 제가 원하는 것들을 선택하며 살고 싶어요.”

엘레노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설핏 스쳤다.

“결국은 내 인생이고, 내가 행복한 게 제일 중요한 거니까. 인생이 그렇게 길지 않더라고요.”

이즈멜이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꼭 인생을 두 번쯤 살아 본 것처럼 말하는군.”

“들켰네요. 눈치도 빠르시지.”

엘레노어의 너스레에 이즈멜이 낮게 웃었다.

“그대가 이제 겨우 스무 살이라는 것보다는 그편이 더 믿기 쉬운 것 같아. 괜찮다면 그대의 조언을 구하고 싶은데.”

“조언이요? 얼마든지 들어드릴 수는 있지만…….”

이즈멜은 엘레노어에게 제 고민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붙잡고 솔직한 속내를 그대로 내비친 것은.

어째서인지 엘레노어에게는 저를 솔직히 내보여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아니, 그렇게 하고 싶었다.

엘레노어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은 추임새를 넣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즈멜은 그 차분한 반응이 오히려 고마웠다. 그는 제가 고민하는 일에 대한 엘레노어의 의견을 물었다.

“그냥 그대가 내 스승이라 생각하고 편히 말해 줘. 무슨 말이든 괜찮으니.”

엘레노어는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갑작스럽게 황태자의 고민 상담을 떠맡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한참이나 생각하던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괴롭더라도 옳은 일이 있고, 달콤하지만 그른 일이 있다면 옳은 일을 선택하시라고 할 거예요. 사익과 공익이 명확하게 갈리는 일이 있다면, 그때도 공익을 선택하시라고 말씀드리겠어요.”

어쩌면 조금 더 예의 바르고 정석적인 답변을 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엘레노어는 그냥 가장 솔직한 진심을 전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아니라면 전하께서 행복한 쪽을 선택하셨으면 좋겠어요. 더 솔직하게는 늘…… 전하 먼저 생각하셨으면 좋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좀 무리겠죠.”

이즈멜이 엘레노어를 빤히 쳐다보았다. 엘레노어는 얼굴이 슬며시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사람이 적당히 욕심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전하께선 늘 조금씩 양보하기만 하셨잖아요. 무슨 욕심이냐에 따라 좀 다르긴 하겠지만…….”

“난 그대가 욕심이 나, 엘레노어.”

갑작스럽게 훅 치고 들어온 한 마디에 엘레노어가 걸음을 멈췄다. 이즈멜이 담담한 목소리로 고백했다.

“그대가 기꺼이 내어주는 몇 시간이 내게는 부족하게만 느껴져. 그대의 하루를 전부 내가 갖고 싶고, 약속 없이 볼 수 있는 관계가 되고 싶어.”

엘레노어는 꼭 놀란 다람쥐처럼 얼어 있었다. 그녀를 보는 이즈멜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이런 욕심은 어떻게 생각해?”

응? 이즈멜이 고개를 갸웃하며 장난스럽게 대답을 재촉했다. 엘레노어의 얼굴은 금세 터져 버릴 것처럼 붉게 익어갔다.

“그런…… 욕심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엘레노어가 슬쩍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가 그에게까지 들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즈멜이 불만스럽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그럼 그렇게 다정하지나 말아야지, 엘레노어.”

나무라는 척 간지러운 말들을 내뱉는 이즈멜의 얼굴에는 민망한 기색조차 없었다. 완벽하게 기운을 되찾은 그가 능글거리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게 힘들면 예쁘지나 말든지. 욕심내게 만들어 놓고 인제 와서 한 발 빼는 건 무슨 심보야. 응?”

이즈멜이 엘레노어를 향해 성큼 한 걸음 다가섰다.

“멀어지지 마. 오늘은 그대가 먼저 다가온 거니까.”

***

“하아…….”

책상 앞에 앉은 엘레노어가 화병에 꽂힌 장미꽃 한 송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즈멜이 직접 꺾어 선물한 것이었다.

엘레노어는 며칠이나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이즈멜은 고요한 호수 같던 엘레노어의 마음에 커다란 바위를 하나 던져넣었다.

그 순간을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되감다가, 이즈멜과 주고받은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솔직히…… 설렜어.”

이즈멜의 앞에서는 최대한 담담한 척, 의연한 척했다. 하지만 마차 문이 닫힌 순간 엘레노어는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처럼 무너져 발을 동동 구르고 말았다.

동화나 영화 속에서나 숱하게 보던 일이 그녀에게 일어난 것이다. 신데렐라와 비교하면 제 처지가 훨씬 낫긴 했지만, 얼떨떨한 기분만은 비슷했다.

“신데렐라는 왕자랑 결혼할 때,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을까?”

갑자기 자기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는 건데.

엘레노어가 책상에 뺨을 대고 엎드렸다. 차갑고 딱딱한 책상에 얼굴을 기대자 마음이 조금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엘레노어는 이즈멜에게서 온 편지 봉투를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왜 이렇게 자신이 없을까.”

엘레노어는 이즈멜이 좋았다. 지금까지도 쿵쿵 시끄럽게 뛰어대는 심장이 그 증거였다. 적당한 호감 정도라고 생각했지만, 글쎄.

돌아보면 요란했던 첫 만남부터 그에게 약간의 호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랬으니 그가 제게 솔직하지 않았다는 것에 실망도 했었겠지.

이즈멜과 나누는 대화는 늘 즐거웠다. 그가 던지는 농담에 웃다 보면 어느덧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어 있었다. 그의 곁에 있으면 꼭 세상에서 제일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하께서 황태자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차라리 아무런 작위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더라면 내가…….’

저도 모르게 위험한 생각을 해 버린 엘레노어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실수로 입 밖에 흘리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똑똑.

그때 등 뒤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엘레노어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들어와.”

잠시 뒤 하녀가 빳빳한 편지 봉투 하나를 들고 다가왔다.

“황궁에서 초대장이 왔어요. 곧 건국 기념 연회가 열린대요,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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