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 외전-14화 (165/168)

외전 14화 황태자가 내게 집착한다(4)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이즈멜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을 얼마나 고대했던가. 기필코 망한 첫인상을 회복하고 새로운 관계의 초석을 놓으리라 다짐했었다.

‘하……. 이를 어쩌면 좋지.’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황자 저하. 엘레노어 에버렛이라고 합니다.”

이즈멜은 봄볕처럼 따사로운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안녕. 난 루카스야. 그냥 루크라고 불러도 돼!”

“영광이네요.”

엘레노어가 작게 웃었다. 유리구슬처럼 맑은 웃음소리가 테이블을 도르륵 굴러 이즈멜의 안으로 떨어졌다.

이즈멜은 넋을 놓고 밝게 웃는 엘레노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딱딱하던 낯이 크림처럼 부드럽게 녹아 있었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좀 차린 이즈멜이 루카스를 보며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로 온 거야, 루크. 노크도 없이.”

“아, 맞다. 실수. 형님이랑 놀고 싶어서 왔는데.”

“지금은 약속이 있으니 나중에…….”

그때 엘레노어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저는! 괜찮은데!”

이즈멜이 고개를 갸웃했다.

“응?”

“저는 황자님이 계셔도 어색하거나 하지 않거든요. 혹시 제가 불편할까 봐 그러시는 거면 정말!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횡설수설 대답하는 엘레노어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루카스를 보내는 것이 매우 아쉬운 눈치였다.

어쩔 수 없이 이즈멜은 루카스가 합석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자 루카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엘레노어의 옆자리에 꼭 붙어 앉았다. 엘레노어가 그런 루카스를 보며 슬며시 웃었다.

루카스는 테이블 위에 놓인 디저트를 손으로 가리키며 질문을 퍼부었다.

“어, 이건 뭐야?”

“호박파이인 것 같은데……. 좋아하시나요?”

“응! 나 먹어 봐도 돼?”

“그럼요. 이 포크는 사용하지 않았으니 쓰셔도 괜찮아요.”

엘레노어가 루카스가 먹기 좋은 크기로 파이를 조각내 주었다. 아이를 상대하는 게 무척 익숙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맛있다!”

기분이 좋아진 루카스가 다리를 까딱까딱하자 엘레노어가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이즈멜은 엘레노어가 루카스를 진심으로 귀여워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에 드세요?”

“완전 마음에 들어!”

장난스럽게 웃은 루카스가 엘레노어를 보며 물었다.

“누나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엘레노어 에버렛이라고 해요.”

“엘레노어라고 불러도 돼?”

“그럼요.”

허.

이즈멜은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순식간에 엘레노어를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 루카스가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엘레노어, 오늘은 형님을 만나러 온 거야?”

“네, 전하께서 초대해 주셨어요.”

“그럼 이번엔 내가 초대할게! 다음번엔 나랑 만나.”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는 초대였다. 이즈멜은 감탄과 황당함이 반씩 섞인 눈으로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정말요? 저야 감사하죠.”

심지어 엘레노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되면 약간 억울할 지경이었다. 이즈멜에게는 그토록 어려웠던 일이 루카스에게는 너무 쉬웠다.

“엘레노어는 뭘 좋아해? 맛있는 거 잔뜩 준비해 놓으라고 말해 놓게!”

“저도 황자님과 입맛이 꽤 비슷한 것 같아요. 황자님이 좋아하시는 걸로 준비해 주세요.”

“그래? 알았어.”

엘레노어가 루카스의 옷에 묻은 나뭇잎을 조심조심 떼어 주었다. 바깥에서 놀고 와 꼬질꼬질한데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건가?’

엘레노어의 새로운 면을 발견한 이즈멜의 눈이 반짝였다.

***

이즈멜은 졸지에 루카스에게 데이트 상대를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비단 그날 하루의 일이 아니었다.

“오늘도 만났다고?”

이즈멜의 물음에 루카스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음 주에 또 만나기로 했어. 엘레노어 너무 좋아!”

“만나면 뭘 하는데?”

“같이 점심도 먹고 산책도 하고…….”

부럽다.

이즈멜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엘레노어와 제가 하고 싶었던 것들인데, 어째서인지 루카스가 죄다 하고 있었다.

“혹시 내 이야기는 안 하던가?”

“엘레노어가? 안 하던데.”

이즈멜의 어깨가 축 처졌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비장한 목소리로 루카스를 불렀다.

“루크.”

“왜?”

“부탁 좀 하자.”

이즈멜은 약간의 민망함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내 얘기 좀 꺼내줘. 그러니까…… 이왕이면 좋은 이야기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은 루카스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흐음, 맨입으로?”

“쿠키 한 통.”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루카스가 자그마한 손을 쫙 펴서 내보였다.

“한 통은 부족해. 다섯 통.”

“지금까지 네가 털어간 내 간식을 생각해라, 루크.”

“그럼 말든지.”

루카스는 새침하게 팔짱을 꼈다. 아쉬운 쪽은 이즈멜이었으므로, 그가 슬그머니 굽히고 들어갔다.

“……세 통.”

“다섯 통.”

“그래, 알았다. 다섯 통…….”

한숨을 푹 내쉰 이즈멜이 단단히 당부했다.

“대신 제대로 해야 해. 무슨 말인지 알지?”

루카스가 씩 웃으며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나만 믿어!”

***

“아, 맞다. 우리 형님은 나무도 잘 타.”

“네?”

주변을 둘러보던 루카스가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만한 나무에도 올라갈 수 있다니까.”

엘레노어가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활짝 웃어 보였다.

“대단하시네요.”

“그렇지? 또 뭐가 있더라……. 우리 형님 꽤 잘생기지 않았어? 내가 본 사람 중에 두 번째로 잘생겼어.”

“그럼요. 전하께선 무척이나 미남이시죠. 그런데 첫 번째는 누구인데요?”

“음, 그건 비밀이야.”

오늘따라 루카스는 이상하게 이즈멜에 대한 이야기만 줄줄이 꺼내놓았다. 칭찬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말들을 자꾸 하는데, 어쩐지 낌새가 조금 이상했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으신 것만 같은…….’

엘레노어의 의심은 곧 확신이 되었다.

루카스와의 티타임을 마치고 마차가 있는 곳까지 향하는 길, 엘레노어는 누군가 저를 졸졸 따라오는 것을 눈치챘다. 엘레노어는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엘레노어가 불시에 걸음을 멈추자, 당황한 듯 발소리가 끊겼다. 엘레노어가 빙글 돌아서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전하.”

“안녕.”

머쓱한 표정을 지은 이즈멜이 천천히 엘레노어에게 다가왔다.

“루카스를 만나러 온 건가?”

“네. 오늘따라 황자님이 전하 칭찬을 정말 많이 하시던걸요.”

이즈멜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무슨 칭찬을 했는데?”

“그냥 이런저런…….”

“예를 들면?”

루카스가 한 말을 곰곰이 되짚어보던 엘레노어가 입을 열었다.

“자기가 본 사람 중에, 전하께서 두 번째로 잘생기셨다고요.”

“두 번째로?”

“첫 번째는 누군지 궁금하네요.”

“알 것 같은데, 그대에게 말해 주진 않을래.”

엘레노어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나저나 대체 뭘 거신 거예요? 황자님께서 꽤 필사적이시던데.”

잠시 머뭇대던 이즈멜이 순순히 사실을 실토했다.

“……쿠키 다섯 통.”

“역시나.”

엘레노어가 소리 내 웃었다.

이즈멜은 엘레노어의 태도가 누그러진 틈을 타 두 걸음 더 다가섰다. 그러자 엘레노어가 이즈멜에게서 두 걸음 물러섰다.

“음?”

이즈멜이 눈썹을 슬쩍 찡그리며 물었다.

“우리 사이 거리는 세 발자국으로 합의된 것 아니었나?”

“다시 다섯 발자국이 되었어요.”

“어쩌다가?”

“그러게요. 왜일까요.”

엘레노어의 대답에 이즈멜이 끙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잠시 고민하던 이즈멜이 제안했다.

“네 발자국으로 하지.”

“그래요. 뭐 그 정도는…….”

엘레노어가 허락하자마자 이즈멜이 얼른 한 발짝 다가섰다. 이즈멜의 입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루카스랑 꽤 친해진 것 같던데. 좀 피곤하지 않나? 힘이 워낙 넘쳐야지.”

“같이 있으면 즐거운걸요. 유쾌하시고 또…….”

엘레노어가 잠깐 멈칫했다. 황자에게 귀엽다는 말을 써도 괜찮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즈멜이 눈치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귀엽고.”

“맞아요. 정말 정말 귀여우시죠.”

고개를 주억거리는 엘레노어의 뺨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이즈멜은 루카스를 귀여워하는 엘레노어가 더 귀여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좀 신기하기는 해. 루크가 싹싹하고 밝은 것 같아도, 사람은 꽤 가리거든.”

엘레노어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래요?”

“응. 잘 따르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어른들을 좀 어려워하는 편이야.”

“으음.”

“아무래도 루크를 신경 써 주는 어른들이 그리 많지 않았으니. 미안한 게 많지, 루크에겐.”

약간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낀 이즈멜이 재빨리 목소리 톤을 올렸다.

“아무튼, 사람 보는 눈 하나는 귀신처럼 정확한 아이야. 루크가 그대를 그렇게 따른다는 건, 그대가 그만큼 좋은 사람이라는 거야.”

엘레노어가 빙긋이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황자님은 전하를 제일 잘 따르시던데요.”

“그 말은,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이란 뜻이지. 곁에 두기 좋은 사람.”

이즈멜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진 말에 엘레노어가 풋 하고 웃었다.

“전하께서는 굉장히…… 자신감이 넘치는 분이신 것 같아요.”

“뻔뻔하다고 말해도 되는데.”

“네, 좀 그러시네요.”

엘레노어는 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즈멜이 웃음을 터뜨렸다.

“일단 곁에 두고 확인해 보는 건 어때? 아니다 싶으면 그때 밀어내고.”

엘레노어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제가 황태자 전하를 어떻게 밀어내나요.”

“글쎄. 엄청 잘 밀어내는 것 같은데…….”

이즈멜이 눈을 반짝이며 재차 물었다.

“어때?”

잠시 고민하던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즈멜과 함께하는 시간은 즐거웠고, 그의 어설픈 노력도 퍽 귀엽게 느껴졌다. 불경스러운 생각이겠지만.

“네, 알겠어요.”

“나도 루크처럼 대해 주는 거지? 편하게.”

“노력은 해 볼게요.”

“그래. 부탁해.”

이즈멜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올라탄 엘레노어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쿠키 다섯 통 가치는 있었나요?”

이즈멜의 두 눈이 둥글게 휘었다.

“응. 충분히.”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