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3화 황태자가 내게 집착한다(3)
“전……하?”
이즈멜이 다급하게 엘레노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엘레노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영애, 그게…….”
“…….”
엘레노어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꽃잎처럼 붉던 입술이 희게 물들었다.
놀람. 충격. 당황. 원망. 배신감.
말간 얼굴에 온갖 감정들이 스쳐 가는 것이 투명하게 비쳤다. 이즈멜은 제가 엘레노어의 입장과 감정은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전하. 사과드립니다.”
“에버렛 영애, 그게.”
“제 불경한 말과 행동은 너그러이 잊어주시기를 청합니다. 앞으로 주의해 다시는 같은 실수, 없도록 하겠습니다.”
엘레노어가 깍듯한 사과를 건넸다. 따뜻하던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서늘하게 식었다.
이즈멜은 인사를 건넨 뒤 멀어지는 엘레노어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만 볼 뿐이었다.
***
늦은 밤, 이즈멜은 술을 찾았다. 홀로 침상에 앉아 술잔을 들이켜다니, 그답지 않은 청승이었다.
엘레노어와 그렇게 헤어진 지 며칠이 흘렀다. 이즈멜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그날의 기억을 곱씹으며 시간을 보냈다.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거지?’
그냥 해프닝으로 넘길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겨우 두 번 본 사이가 아닌가.
심지어 데이트하듯 다정하게 걸은 것도 아니다. 손등이 스치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다섯 발자국, 세 발자국을 떨어져 남처럼 내외하며 걸은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애가 타고, 속이 들끓었다. 다시는 그렇게 해사하게 웃어 주지 않으리라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었다.
엘레노어가 했던 말들이 귓가에 맴돌고, 엘레노어가 가면을 벗던 순간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확실히 정상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이즈멜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술잔을 들었다.
‘상사병이라도 걸린 건지.’
그럴 리가. 사랑에 빠진다는 게 이토록 쉽고 허무할 리 없었다.
그런데 보고 싶었다.
미안함이든 호기심이든, 아니면 사랑과 엇비슷한 어떤 감정이든…….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의 이름이 어떻든 간에, 엘레노어를 또 보고 싶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이즈멜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책상 앞에 앉은 그가 펜을 들었다.
‘에버렛 영애.’
그저 이름을 부르는 것뿐인데, 왜 이리도 긴장이 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이즈멜은 한 줄 한 줄 천천히 편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평소의 그다운 유려함은 없었지만, 담백하게 진심을 담은 편지였다. 이즈멜은 사춘기 소년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밤이 깊도록 펜을 놓지 못했다.
***
「에버렛 영애.
어떤 말로 편지를 시작해야 할까, 고민이 돼. 뻔한 안부 인사를 건네야 할 차례인데, 이상하게 오늘은 그렇게 뻔한 말을 늘어놓고 싶지가 않군.
영애, 그날 일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어. 내 생각이 짧았고, 그대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어. 미안해.
그대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시간이 내게는 특별했어. 그렇게 웃고, 함께 걷고, 편안하게 시간을 보낸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괜한 욕심을 냈던 것 같아.
이 편지가 그대의 마음을 조금이나 녹일 수 있었으면 하지만, 솔직히 자신은 없군. 내가 이토록 말주변이 없었는지 의문이야.
부디 내 어리숙함을 용서해.
그대의 너그러움에 기대,
이즈멜 바이든 폰티우스 드 벨리움」
***
「제국의 작은 태양, 황태자 전하께.
그간 무탈히 지내셨을까요?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았습니다.
섬세하게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날 일은 제 안에서 깨끗이 지워 둘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당황했던 나머지, 전하께서 설명하실 시간조차 드리지 않고 돌아섰던 게 내내 마음에 걸렸어요.
그리고 정원 구경하게 해 주셨던 것도 감사했습니다. 답답했는데 아름다운 곳에서 잠깐 숨 돌릴 수 있어 좋았어요.
그곳이 황태자궁이었던 것이지요? 생각해 보니 제법 단서들이 많았던 것 같네요. 전하께서 직업에 대해 하신 말씀도 그렇고…….
추억이라 생각하고 덮겠습니다. 전하께서도 부디,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늘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엘레노어 에버렛 올림」
***
「에버렛 영애에게.
그대의 답장이 날 얼마나 기쁘게 했는지 알까. 내 실수를 너그러이 덮어 주겠노라 말해 준 그대의 관대함에 감사해.
그리고 그대는 내게 사과할 필요 없어. 처음 마주친 순간부터 헤어지던 순간까지, 그대가 내게 실수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실수라니. 오히려 그 반대였지.
책을 좋아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럼 그대도 이해할 거야. 좋은 책을 읽고 나면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지 않아?
그대와의 대화가 내게 그랬어. 좋은 책 한 권을 읽은 느낌.
그대는 그날 일을 깨끗이 지우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 내겐 좋은 기억이고, 그대가 허락한다면 앞으로도 계속 그대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그래 주겠어? 아, 물론 강요는 아니야.
회신을 기다리는 중인,
이즈멜 바이든 폰티우스 드 벨리움」
***
「황태자 전하께.
유독 날이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고 계시는지요?
제가 전하께 즐거움을 드렸다니 기쁘네요. 일상적인 말솜씨가 좋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부족한 의견이라도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제게 지금처럼 편지하셔도 괜찮습니다. 최선을 다해 고민해 전하께 도움이 될 수 있는 답을 드릴게요.
오늘 전하의 기분도 날씨만큼 화창하시기를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엘레노어 에버렛 올림」
***
「너그러운 에버렛 영애에게
언제든 편지해도 된다니. 그대의 흔쾌한 수락 덕에 내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화창해.
하지만 우리 사이에 약간의 오해가 있는 것 같아.
내가 원하는 건 그대가 고민하고 갈고닦아 내어놓는 답변이 아니야. 물론 그것도 좋지만, 그냥 있는 그대로의 그대를 더 알고 싶어.
그대의 평범한 일상 이야기가 궁금해. 그대가 좋아하는 것들과 싫어하는 것들을 알고 싶고, 그대의 취향과 내 취향을 비교해 보고 싶어.
좀 우습지. 유치하기도 하고. 나도 이런 내가 완벽히 이해되지는 않아.
하지만 그대를 다시 한번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건 확실해.
정식으로 그대를 내 손님으로 초대하고자 하니, 부디 편한 날짜와 시간을 전해주었으면 좋겠군.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이즈멜 바이든 폰티우스 드 벨리움」
***
그렇게 얻어낸 또 한 번의 만남.
먼동이 트기도 전에 눈을 뜬 이즈멜은 약속 시간까지 옷을 세 번이나 갈아입었다. 응접실의 화분 하나, 가구 배치 하나까지도 전부 신경이 쓰였다.
‘엘레노어다.’
이즈멜은 창밖으로 엘레노어의 인영이 비치자마자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한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엘레노어가 긴장한 표정으로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즈멜을 발견한 엘레노어가 치맛자락을 잡고 예를 갖췄다.
“전하.”
“와 줘서 고마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즈멜이 앉을 것을 권하자 엘레노어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았다. 자그마한 입술이 꼭 다물려 있는 것이 새침해 보였다.
도착한 편지들이 전부 딱딱해 짐작은 했지만, 엘레노어의 마음은 여전히 녹지 않은 듯했다. 이즈멜은 등줄기에서 땀이 삐질 솟는 기분을 느끼며 엘레노어를 마주 보았다.
“오는 길은 힘들지 않았고?”
“네. 마차 출입을 허가해 주셔서 편안하게 왔어요. 감사합니다.”
이즈멜은 엘레노어가 찻잔을 드는 것을 긴장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까지도 놓치지 않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차는 좀 입맛에 맞나?”
“향이 참 좋네요.”
이즈멜이 슬며시 설탕이 든 그릇을 밀어놓으며 말했다.
“설탕이랑 우유도 준비했는데.”
엘레노어가 예의 바르게 생긋 웃어 보였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즈멜은 엘레노어가 찻잔에 설탕을 녹이고 우유를 붓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티스푼으로 차를 휘젓는 행동조차 어딘지 특별해 보였다.
슬쩍 엘레노어의 눈치를 살핀 그가 입술을 뗐다. 지금껏 한 번도 누군가의 마음을 풀어 보려 애쓴 적이 없었기에, 이즈멜은 이 상황이 무척 어려운 숙제처럼 느껴졌다.
“그날 일은…….”
“저 정말 괜찮아요. 전하의 진심을 오해하지 않으니 더는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엘레노어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묘하게 사무적인 구석이 있었다. 이즈멜의 눈썹 끝이 시무룩하게 처졌다.
“그렇다기엔 아까부터 표정이 좋지 않아서.”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 죄송해요. 조금 긴장했나 봐요.”
엘레노어가 당황한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어색한 미소였다.
“괜히 신경 쓰이게 해드렸네요.”
“미안. 억지로 웃으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아니에요, 전하. 혹시 오늘 사과하기 위해서 부르신 거라면…….”
이즈멜이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냥 꼭 다시 만나고 싶었어. 사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물론 그것도 맞지만 그보다…….”
망했다. 정말 제대로 망했다.
상황을 풀어 보려 할수록 테이블 위의 분위기는 서먹하고 냉랭해져만 갔다. 아무리 차를 들이부어도 입안이 자꾸만 말랐다.
그때였다.
“형님!”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함께 힘차게 등장한 이가 있었으니, 루카스였다.
조금 전까지 정원을 헤집고 다녔는지 옷 여기저기 나뭇잎이 붙어 있었다. 통통한 뺨은 한낮의 햇살에 발갛게 익어 상기된 채였다.
갑작스러운 어린 동생의 등장에, 이즈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루크?”
루카스는 천진하게 웃으며 이즈멜과 엘레노어가 마주 앉은 테이블 쪽으로 걸어왔다. 루카스를 본 엘레노어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호기심 넘치는 자주색 눈동자가 엘레노어에게로 향했다.
“어, 이 누나는 누구야? 못 보던 누나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