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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 외전-12화 (163/168)

외전 12화 황태자가 내게 집착한다(2)

“가면무도회라니…….”

이즈멜은 가지각색의 가면으로 얼굴을 감춘 사람들을 둘러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많은 사람 중에 딱 한 번 본 엘레노어를 찾아야 한다니.

새하얀 가면으로 얼굴을 감춘 이즈멜은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을 찾아 플로어로 내려섰다.

하지만 밝은 금발은 벨리움에서 꽤 흔한 머리 색이었고, 가면무도회라는 콘셉트에 충실하게 머리카락 색까지 감춘 이들도 많았다. 시간이 조금씩 흘러갈수록 이즈멜의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아니야. 생각해 보면 이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어.”

한 사람 한 사람, 가면 너머 보이는 눈을 살피던 이즈멜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가면무도회는 제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엘레노어와 마주할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였다.

쓸데없이 예의 차라지 않고 담백하게 사람 대 사람으로 나누는 대화는 무척이나 즐거웠다. 아주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유쾌한 감정이었다.

“딱 하루만 더, 그날처럼 편하게 대화하고 싶군.”

이즈멜의 입매가 기대감으로 부드럽게 휘어졌다.

***

“가면이 이렇게나 화려할 수 있구나.”

엘레노어는 드와이트의 옆에 꼭 붙어서서 하하호호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평소보다 볼거리가 많아 지루하지 않았다.

“가면무도회야말로 연애의 장이라던데.”

“근데 넌 왜 나랑 이러고 있어?”

“그러는 넌?”

드와이트도 사교 행사에 큰 뜻이 없기는 엘레노어와 마찬가지라, 쌍둥이는 핑거푸드를 집어 먹는 것에 골몰했다.

“엘렌.”

“응?”

“우리도 춤이나 출까?”

드와이트의 뜬금없는 제안에 엘레노어가 웃음을 터뜨렸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또 발등에 멍들고 싶어서?”

드와이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여기까지 와서 가만히 서 있기는 좀 심심하니까.”

“흐음.”

“물론 다른 누가 너한테 춤을 청하면 누구보다 빨리 양보해 줄 의향이 있어.”

그때 드와이트의 어깨너머에서 부드럽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면 양보를 부탁하지.”

드와이트와 엘레노어의 시선이 새하얀 가면을 쓴 남자에게로 향했다. 가면이 얼굴의 반을 넘게 가리고 있었지만, 반듯한 자세부터 깔끔한 옷 태까지 수려한 티가 났다.

“영애, 저와 한 곡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드와이트는 엘레노어를 향해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이고는 자리를 떴다. 엘레노어는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에 긴가민가하며 입을 열었다.

“혹시…….”

“혹시?”

“그때 그……?”

“맞습니다. 그때 그.”

역시. 엘레노어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겨우 한 번 본 사이인데, 이상하게 반갑게 느껴졌다.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자, 가면 아래서 붉은 눈동자가 아름답게 반짝였다.

“저 미리 말씀드리는데, 제가 춤을 정말 못 춰요. 좀 부끄러울 정도로요.”

“미리 말해 두는데, 나는 춤을 정말 잘 춰요. 그러니 그냥 나를 믿어 봐요.”

엘레노어는 수상하기 짝이 없지만 확실히 매력적인 남자의 손에 이끌려 홀의 중심으로 향했다. 너무 자신만만한 태도라,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믿어 보라더니.”

하지만 역시, 두 사람의 춤은 삐걱삐걱 자꾸만 엇나갔다. 속으로 남자의 발을 밟은 횟수를 세던 엘레노어는 어느 순간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아. 작게 신음을 흘린 남자가 허탈하게 웃으며 물었다.

“이거 그때 넘어지게 한 것에 대한 복수인 건가?”

“생각해 보니 그랬었구나. 그런 걸로 해요, 그럼. 서로 한 방씩 먹인 걸로.”

엘레노어가 뻔뻔하게 대답했다.

남자는 별것 아닌 대답에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자주 웃음을 터뜨렸다. 미남이 활짝 웃는데 따라 웃지 않을 재간은 없어, 엘레노어도 배시시 웃고 말았다.

남자가 불쑥 제안했다.

“그때 그 문 너머, 가 보고 싶지 않습니까?”

엘레노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비밀의 정원이요?”

“비밀……까지는 아니지만.”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 보고 싶긴 한데, 마음대로 들어가도 되는 곳이 맞나요?”

“그렇다면?”

잠시 고민하던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정말 잠깐 구경만 할게요.”

***

“이런 곳이었구나.”

이즈멜은 엘레노어를 황태자궁 안뜰로 안내했다. 그와 가까운 소수만이 밟을 수 있도록 허락된 곳이었다.

이곳에 엘레노어를 데려온 것은 반쯤 충동적인 일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안뜰을 거닌 것은 처음이라, 이즈멜은 약간의 어색함을 느꼈다.

“기대보다는 좀 심심하지요.”

“관상 공간보다는 생활 공간 같은 느낌이라 그렇지, 이곳도 무척 아름다운걸요.”

주변을 쭉 둘러본 엘레노어가 짧게 평했다.

“담백하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엘레노어는 정원을 가꾸는 데 관심이 많은 듯했다. 화단에 심긴 꽃들을 살피는 눈이 초롱초롱 맑게 빛났다.

이즈멜은 그런 엘레노어를 빤히 바라보았다. 구불구불 허리까지 흘러내린 머리카락 위에 달빛이 내려앉았다. 언뜻언뜻 보이는 가느다란 목덜미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때였다. 엘레노어가 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암녹색 가면을 벗어냈다.

“아, 좀 답답하다.”

이즈멜의 눈이 살짝 커졌다. 엘레노어가 가면을 벗어낸 순간, 눈부시게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가면 때문인지 뺨은 평소보다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연지를 바른 입술에서는 은은하게 윤이 났다. 이즈멜은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이건, 무슨 기분이지?’

이상한 감정이 이즈멜을 휘감았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딱 한 가지만이 분명하게 다가왔다.

엘레노어 에버렛은 예쁘다. 그것도 무척이나.

“가면, 답답하지 않으세요?”

“아…….”

엘레노어의 말에 이즈멜이 가면을 벗어 들었다. 이즈멜보다 다섯 발자국 앞서 걷던 엘레노어가 빙글 돌며 말했다.

“접근 금지, 이젠 세 걸음으로 줄여드릴게요. 구면이니까.”

“다음번엔 더 줄여 줄 겁니까?”

이즈멜은 재빨리 두 발짝 다가섰다. 겨우 두 발자국 차이가 뭐라고, 괜히 기분이 들떴다.

“글쎄요. 이 정도 거리면 나름 일반적인 것 같은데요.”

“반 발짝 정도는 더 가까워도 괜찮지 않나 싶은데.”

“전 적당한 거리감을 좋아하거든요. 특히 잘 모르는 사이라면.”

새침하게 대꾸한 엘레노어가 이즈멜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뭐 하는 분이세요? 이름도 안 가르쳐 주시고.”

“그냥 이것저것 합니다.”

“어디서 일하시는데요?”

“집에서.”

이즈멜의 대답에 엘레노어가 슬쩍 눈썹을 찡그렸다.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프리랜서 같은 건가…….”

프리랜서?

피식 웃은 이즈멜이 질문을 돌렸다.

“영애는 하는 일이 있습니까?”

“아니요. 지금은 딱히 없네요. 앞으로도 없었으면 하고요.”

“왜?”

“이유가 필요해요?”

“그런 건 아니지만, 어딘지 남달라 보이는 구석이 있어서.”

엘레노어가 엷게 미소 지었다.

“남다르지 않아요. 전 그냥 평범한 사람이고, 그것에 무척이나 만족하고 있답니다.”

이즈멜이 고개를 갸웃했다.

“평범한 일과는 어떤 겁니까?”

잠시 고민하던 엘레노어가 느릿느릿 대답했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식사도 하고 산책도 하고……. 읽고 싶은 책을 잔뜩 쌓아 두고 읽을 때도 있고, 가끔은 새로운 걸 시도해 보기도 해요.”

“새로운 거라면, 어떤?”

“외국어를 배운다거나, 손으로 뭘 만든다거나 하는 거요.”

흥미로운 이야기에 이즈멜의 눈이 반짝였다.

“외국어? 무슨 언어를 할 줄 압니까?”

“음…… 그냥 이것저것. 공부했던 건 여덟 개 정도인데, 제대로 쓸 줄 아는 건 겨우 네 개 정도인 것 같아요.”

이즈멜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겨우 네 개라니. 나는 세 개도 힘들게 익혔는데.”

“그냥 취미로 하는 거예요.”

“천재처럼 들리는데.”

“아니라니까요.”

엘레노어가 민망한지 뺨을 붉혔다. 이즈멜이 재빨리 다른 질문을 던졌다.

“만드는 건 뭘 만듭니까?”

이번에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엘레노어는 미묘한 표정으로 이즈멜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즈멜이 작게 움찔했다.

“왜?”

“질문이 너무 많으셔서요. 아까부터 계속 저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즈멜이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첫 데이트에서도 이보다는 능숙했었던 것 같은데, 혼자 들떠 질문을 퍼부어댔던 것이 조금 민망해졌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말씀드린 것 같은데, 그쪽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바가 없네요.”

“아.”

“본인 이야기도 좀 해 주세요. 뭘 좋아해요?”

“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 가려던 이즈멜이 입술을 꾹 닫았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지? 나는 뭘 좋아하더라? 나는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지……?

황태자라는 사실을 제하고 나니, 이즈멜은 저를 설명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한 번도 그를 먼저 소개할 필요가 없었기에, 처음 느끼는 종류의 당혹감이었다.

그런 이즈멜의 감정을 눈치챈 듯, 엘레노어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해해요. 은근히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는 건 쉽지 않죠. 남보다 알기 힘든 게 자기 자신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미안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알아가면 되겠네요.”

이즈멜이 무슨 소리냐는 듯 엘레노어를 바라보았다.

“실내에서 보내는 시간을 좋아하세요, 바깥에서 활동적으로 보내는 시간을 좋아하세요?”

엘레노어는 이즈멜에게 둘 중에 하나를 고를 수 있는 선택지를 제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기할 만큼 대답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었다.

“실내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운동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굳이 고르자면.”

“저도 그래요! 음…… 차는 어떤 걸 좋아하세요? 홍차? 꽃차?”

“향이 짙은 꽃차를 좋아합니다. 설탕이나 우유는 그리 즐기지 않고.”

“어, 이건 저랑 완전히 반대네요. 전 꽃차는 좀 힘들더라고요. 홍차에 우유랑 설탕을 넣어 마시는 걸 좋아해요.”

엘레노어의 말을 귀담아듣던 이즈멜이 말했다.

“후각이 예민한 편인가 봅니다. 전에 향수 냄새 때문에 힘들다고 했던 것도 그렇고.”

“그런가 봐요.”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즈멜은 엘레노어에게서 따스함을 느꼈다. 햇빛 아래 누워 있을 때 느껴지는 기분 좋은 노곤함 같은 것이 밀려왔다.

그때였다.

때마침 황태자궁에서 나오던 젊은 관료 하나가 이즈멜을 보고 재빨리 예를 표했다.

“제국의 작은 태양,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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