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1화 황태자가 내게 집착한다(1)
외전 3. 이즈멜 IF
황태자의 생일 기념 연회에 참석한 엘레노어는 지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성년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비교 대상 자체가 적기는 하지만, 지금껏 엘레노어가 참석해 본 연회 중에서는 규모가 제일 컸다.
‘수도 사람들은 전부 다 여기 모였나 봐.’
그도 그럴 것이 황태자는 사교계에서 무척 인기가 높았다. 특히 젊은 영애들 사이에서 말이다.
외모도 훌륭하고 매너도 좋아 연모하는 영애들이 줄을 잇는다고 했다. 가십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엘레노어도 알고 있는 사실이니, 벨리움에서 그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봐도 될 것이다.
엘레노어도 오늘은 그를 볼 수 있으려나 약간의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황태자는커녕, 드와이트와 아드리안조차도 찾기 힘들 만큼 사람이 붐볐다.
“으……. 향수 냄새가 너무 독해.”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아서일까. 엘레노어는 오늘따라 지나치는 사람들에게서 풍기는 향들에 머리가 아팠다. 지나치게 많은 향이 뒤섞여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테라스에서 바람이라도 좀 쐬면 나을 것 같은데, 테라스는 전부 연인들로 만실이었다. 솔로면 바람도 쐬기 힘든 더러운 세상이었다.
비어 있는 테라스를 찾아 헤매던 엘레노어는 바깥에 잠시 나갔다가 오는 쪽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리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밤의 정원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엘레노어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테라스보다도 오히려 그쪽이 더 문제였다.
‘리안이랑 드와이트, 얘네는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누구라도 같이 나가면 좋을 텐데, 두 사람은 오늘따라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공간에 더 머무는 것은 무리였다. 엘레노어는 메슥거리는 속에 입을 가리고 건물 밖으로 뛰쳐나왔다.
‘정원 쪽으로 향하지 않고 건물 쪽에 딱 붙어 있으면 괜찮을 거야. 바깥 공기만 마시게.’
엘레노어는 그렇게 건물 외벽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찬 바람을 잠깐 쐬자 내내 어지럽던 것이 조금씩 나아졌다.
“은근히 걷기 좋다, 여기.”
건물 뒤쪽으로 향하자, 간간이 보이던 사람들조차 사라졌다. 하지만 등이 환하게 밝혀져 있어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때였다.
쿵.
엘레노어의 앞에 누군가 떨어졌다. 갑작스럽게 하늘에서 사람이 떨어지자, 깜짝 놀란 엘레노어는 뒷걸음질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야!”
그러자 하늘에서 떨어진 남자가 벌떡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영애?”
그 모습에 엘레노어는 또 한 번 깜짝 놀라고 말았다.
“꺄아악!”
“쉿!”
재빨리 몸을 숙여 눈높이를 맞춘 남자가 제 입술 위에 손가락을 댔다. 붉은 루비 같은 눈동자가 선명하게 반짝였다.
천사인가?
남자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넋을 놓고 그의 얼굴을 감상하던 엘레노어는 저도 모르게 남자를 따라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쉿…….”
그러자 남자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소리 내 웃던 남자가 엘레노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미안합니다.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여긴 늘 비어 있었거든요.”
“대체 어디서 뛰어내리신 거예요? 놀라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고요.”
뒤늦게 약간 민망해진 엘레노어가 툴툴대며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다친 곳은?”
“없어요. 그쪽은 괜찮으세요?”
“나도 괜찮습니다.”
“잘됐네요. 그럼 전 이만.”
치마에 묻은 흙을 탈탈 털어낸 엘레노어가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가 폈다. 엘레노어가 돌아서자 등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회장 입구는 그쪽이 아닌데.”
“저도 알아요. 그냥 잠깐 걸으러 나왔어요.”
“혼자? 왜?”
어느덧 성큼 다가온 남자가 엘레노어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엘레노어가 남자를 힐끗 보며 되물었다.
“그럼 그쪽은 왜 하늘에서 떨어지셨는데요?”
“그냥 좀 답답해서.”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향수 냄새가 너무 머리 아파서 나왔어요.”
“아, 맞아요. 나도 진한 향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잠시 머뭇대던 남자가 슬쩍 제안했다.
“저와 정원을 산책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붓하게 걷기 좋은 곳을 아는데.”
“정원……이요?”
엘레노어가 남자의 산뜻하고 반듯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밤의 정원이라면, 암묵적으로 그렇고 그런 일이 이루어지는 공간 아닌가. 저런 얼굴로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두 배로 괘씸했다.
엘레노어가 표정을 굳히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거절할게요.”
남자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어차피 걷고 싶어 나온 거라면, 풍경 좋고 아름다운 곳을 걷는 게 더 좋지 않습니까?”
“저희는 방금 막 만나지 않았나요? 알지도 못하는 분과 이 시간에 정원……에 갈 생각은 전혀 없는데요.”
엘레노어가 파렴치한을 보듯 남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자 잠시 멍하니 서 있던 그가 화들짝 놀라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아, 하늘에 맹세코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걷기 좋은 곳을 안다는 것이었는데…….”
“아, 네.”
“영애와 손끝도 스치지 않겠다고 약속드리지요. 원하신다면 열 걸음 떨어져서 걷겠습니다. 정말입니다.”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굳어 있던 엘레노어의 얼굴이 다시금 풀어졌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엘레노어가 픽 웃으며 대답했다.
“열 걸음까진 됐고, 한 다섯 걸음 정도만 떨어져 계세요.”
“좋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엘레노어는 그를 따라 황궁의 동쪽으로 향했다. 남자는 엘레노어가 정해 준 다섯 발자국 거리를 철저하게 지키며 그녀를 따라 걸었다.
‘약간 귀여운 것 같기도.’
엘레노어가 그런 그를 힐끔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제가 말씀드린 곳은 여기입니다.”
“와…….”
남자가 데려다준 정원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일부러 비슷하게 다듬지 않고 다양한 수형이 조화를 이루도록 배치한 것이 눈에 띄었다.
엘레노어는 간간이 켜진 등불을 따라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성이는 이 하나 없이 몹시도 고요했다. 한참이나 떨어진 연회장의 소음이 은은하게 들려올 정도였다.
“정말 이쪽은 사람이 아무도 없네요. 처음 와 보는 곳인데 아름다워요.”
엘레노어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늘 개방되어 있는 곳은 아니라. 뭐 아예 폐쇄적인 공간도 아니지만. 마음에 듭니까?”
“네, 좋네요. 풀냄새도 신선하고, 바람도 선선하고. 감사해요.”
“별말씀을.”
엘레노어의 시선에 새하얀 문 하나가 들어왔다. 엘레노어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문 주변을 살폈다.
“어, 여기는 문이 있네요. 궁금하다. 이 안엔 뭐가 있을까요?”
“그곳도 정원입니다. 바로 옆에 있는 궁으로 들어설 수 있는 안뜰이지요.”
잠시 머뭇대던 남자가 물었다.
“둘러보시겠습니까?”
엘레노어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으음. 이젠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운 게 아닌지 걱정되네요. 주최자이신 황태자 전하께도 실례인 것 같고.”
엘레노어의 말에 즉답이 돌아왔다.
“아, 그건 전혀 실례가 아닐 겁니다.”
“네? 그걸 어떻게 단언하세요?”
당황한 듯 남자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가 어색하게 입술을 뗐다.
“어…… 전하께서 그렇게 속이 좁은 분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가시지요. 앞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연회장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그리 짧지 않은 길이었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으니 순식간에 다다랐다. 약간 아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남자가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영애의 이름을 여쭈어도 괜찮을지요?”
“엘레노어예요. 엘레노어 에버렛.”
엘레노어가 싱긋 웃으며 되물었다.
“저도 성함을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예? 저는 그…….”
남자는 이상하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이내 입을 꾹 다물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지극히 상식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엘레노어는 그냥 사정이 있으려니 하고 넘겼다. 엘레노어가 치맛자락을 잡고 가벼운 인사를 남겼다.
“아, 곤란하시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전 그럼 들어가 볼게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
황태자 집무실. 이즈멜은 집중해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새하얀 종이 위, 유려한 글씨가 새겨졌다.
‘엘레노어 에버렛.’
짧지만 유쾌했던 만남의 여운은 생각보다 길었다. 이즈멜은 벌써 몇 주째, 틈만 나면 그날의 일탈을 복기했다.
혹시나 우연히 마주칠 수 있을까, 행사란 행사에는 죄다 얼굴을 내밀었다. 하지만 황제와 황후의 마음만 흡족하게 했을 뿐, 이즈멜이 원하는 바는 이루지 못했다.
‘아마 영애도 나처럼 그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야.’
이즈멜이 쓰게 웃었다. 수도의 귀족은 한 명도 빠짐없이 연회에 참석하라는 공문을 써 볼까, 하는 실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전하, 결재하실…….”
그때 보좌관 헨리가 이즈멜의 책상으로 다가섰다. 그가 이즈멜이 쓰던 것을 발견하고 눈썹을 슥 치켜올렸다.
“에버렛 영애를 아십니까?”
엘레노어를 아는 것 같은 헨리의 말에 이즈멜이 눈을 반짝였다.
“자네도 아나? 혹시 친한가?”
“친한 사이는 아닙니다만…… 에버렛 백작과는 꽤 안면이 있어 몇 번 저택에 간 적이 있습니다. 또 영애는 나름대로 유명하시기도 하고요.”
“유명하다고? 어떻게?”
“아카데미 입학시험 최초 만점자라, 한동안 떠들썩했습니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정보에 이즈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즈멜은 헨리를 붙잡고 그가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어 댔다. 헨리는 처음 보는 상관의 모습에 당황하면서도 눈치 빠르게 답변을 내어놓았다.
“백작을 만나면 넌지시 말을 건네보겠습니다. 다음 연회에는 꼭 가족들과 함께 참석해 달라고요.”
약간 민망해진 이즈멜이 슬며시 한 발을 뺐다.
“뭐 꼭 그래 달라는 건 아니었는데.”
“그럼 아무 말 않고 있을까요?”
헨리가 짐짓 눈치 없는 척 제안을 물렸다. 당황한 이즈멜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그가 작은 목소리로 항복했다.
“젠장……. 부탁해, 헨리.”
***
그렇게 자존심을 포기한 끝에 이즈멜은 엘레노어가 연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연회 당일, 그는 아주 작은 난관을 맞닥뜨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