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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 외전-10화 (161/168)

외전 10화 소꿉친구가 내게 집착한다(6)

‘수도로 돌아가는 건가?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건지…….’

마차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엘레노어의 머릿속이 온갖 감정들로 복잡해졌다.

다시 침대 위에 누운 엘레노어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놀라던 아드리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난 투정이 부리고 싶었던 걸까, 선을 긋고 싶었던 걸까.’

유난히 잠들기 힘든 밤이었다.

***

아침 식사 자리에도, 점심 식사 자리에도 아드리안은 보이지 않았다. 집사에게 잠시 자리를 비운다는 언질을 줬다니, 돌아오기는 할 모양이었다.

드와이트가 승마하러 간 사이, 엘레노어는 책을 읽으며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제일 좋아하던 책이었지만, 오늘따라 지루하게 느껴졌다.

책을 탁 덮은 엘레노어가 저녁놀에 붉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슬슬 해가 완전히 저물 것 같은데. 산책이나 나갔다 올까?’

별장은 걷기 좋은 곳이었다. 수도의 백작저처럼 잘 정돈된 느낌은 아니었지만, 그 자체로 자연 경관이 워낙 아름다운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엘레노어는 천천히 별장 주변을 빙빙 돌듯이 걸었다. 여기저기 피어난 들꽃들이 보기 좋았다. 시원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자, 답답하던 속이 좀 트이는 것만 같았다.

“어?”

문득 고개를 든 엘레노어가 리안이 사용하는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벌써 돌아온 거야? 생각보다 빨리 왔네.”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방이 있는 2층 복도로 향했다. 그의 방문이 아주 조금 열려 있었다. 엘레노어가 열린 문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아드리안은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분주히 쓰고 있었다. 뒤통수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가 느껴졌다.

‘일하나?’

엘레노어가 똑똑, 문을 두드렸다. 아드리안이 놀란 듯 고개를 들고 몸을 돌렸다. 엘레노어를 본 그의 눈이 슬쩍 커졌다.

“엘렌?”

“뭐해? 들어가도 돼?”

“어…… 되는데 잠깐만. 아, 네가 올 줄은 몰랐는데.”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아드리안의 방에 들어섰다.

아드리안은 이상할 만큼 당황한 눈치였다. 허둥지둥하던 아드리안이 책상에 쌓아 둔 종이뭉치를 툭 건드렸다. 책상 아래로 종이 몇 장이 후드득 떨어졌다.

엘레노어가 제 앞에 미끄러지듯 날아온 종이 한 장을 주워 들었다. 아드리안이 손을 뻗었지만 엘레노어가 한발 빨랐다.

종이를 슬쩍 들여다본 엘레노어의 미간에 실금이 갔다.

“……이거 내가 쓴 편지잖아?”

아드리안의 얼굴이 서서히 벌겋게 달아올랐다. 엘레노어가 책상으로 다가가 아드리안이 쓰고 있던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기숙사 침대에 누워서 네 편지를 읽던 생각이 나. 룸메이트였던 녀석이 매번 어깨너머에서 편지를 훔쳐보곤 했는데, 네가 나를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고 했어.

괜히 부끄러워져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돌아보니 내가 진짜 멍청했어. 지금 보면 모든 게 명확했는데 말이야. 왜 네 맘이 나랑 같을 수 있다는 생각은 못 했을까. 바보 같아.

뒤늦은 대답이지만, 다른 여자애가 신경 쓰인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너 하나 신경 쓰는 것도 난 늘 벅찼으니까.

내 눈에 제일 예쁜 건 언제나 너였고, 손을 잡고 싶은 사람도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도 늘 너였어. 이 말이 뭐라고 그렇게 어려웠는지 모르겠다.」

또박또박 써 내려간 답장들을 가만히 읽어 보던 엘레노어가 피식 웃었다.

“이게 뭐야. 답장을 7년 뒤에 몰아서 하는 게 어디 있냐고.”

“미안.”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은 엘레노어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제 했던 말, 많이 신경 쓰였어?”

“당연하지.”

“그냥 말하지 말 걸 그랬다. 다 지난 일인데 네 마음만 불편하게 한 것 같아서 좀 후회했어.”

엘레노어의 말에 아드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 엘렌. 난 네가 솔직하게 말해 줘서 정말 고마웠어. 영영 몰랐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끔찍해.”

의자를 끌어와 앉은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와 눈을 맞췄다.

“어제 네가 했던 말 고민 많이 해 봤어. 네가 썼던 편지도 밤새 읽었고.”

엘레노어가 편지를 만지작거리며 덧붙였다. 아드리안의 손가락이 잔뜩 붉어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답장도 온종일 썼고. 미련하게.”

“응. 아직도 좀 남았어.”

“그만 써도 돼, 바보야. 무슨 반성문도 아니고.”

아드리안이 얼른 물었다.

“반성문도 쓸까?”

“됐거든.”

엘레노어가 질색하며 고개를 젓자, 아드리안이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엘렌.”

“응.”

“사랑은 타이밍이라던 네 말, 동의해.”

편지를 들여다보던 엘레노어가 고개를 들어 아드리안과 눈을 맞췄다. 부드러운 금빛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우리의 타이밍은 이미 지나갔을지 모른다는 말도, 가슴 아프지만 이해해.”

“…….”

“하지만 타이밍이라는 게, 인생에 딱 한 번만 찾아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엘레노어는 아무런 말 없이 아드리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드리안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떠올랐다.

“이런 말 뻔뻔한 거 알아. 내게 줄 마음이 더는 없다고 해도, 나는 정말 할 수 있는 말이 없지만…….”

“리안.”

“한 번만 더, 지켜봐 주면 안 될까?”

아드리안의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네가 정말 아니라고 하면 멈출게. 네 마음 그대로 받아들일 거야. 약속해.”

아드리안을 보는 엘레노어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가셨다. 아드리안이 진심을 다해 뱉어내는 한 마디 한 마디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정말 조금이라도 네 맘에 내가 스며들 자리가 있다면, 나 포기하고 싶지 않아.”

“왜 그렇게 간절한데?”

“내가 너를 너무 많이 좋아해서.”

쿵.

순간 엘레노어의 심장이 거세게 내려앉았다. 얼굴에 열기가 훅 끼쳤다.

날것 그대로 묵직하게 던져진 감정은 엘레노어의 안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조금은 투박해서 더 진심이 느껴지는 고백이었다. 조금의 의심도 들지 않았다.

아드리안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생각해 보고 대답해 줘. 기다릴게.”

***

방으로 돌아온 엘레노어는 아드리안이 쓴 뒤늦은 답장을 하나하나 읽었다. 꾹꾹 정성 들여 눌러 쓴 글씨를 보고 있으니 혼란스럽던 감정이 조금씩 정리되어 갔다.

아드리안의 두서없는 말에 조금 웃다가, 멍하니 창밖을 보며 고민에 잠기기를 몇 번. 부옇게 먼동이 터오는 것이 보였다.

“응……?”

어둠이 약간 남은 창밖을 내다보던 엘레노어는 아드리안이 혼자 숲 쪽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했다.

“얜 어딜 가는 거야, 이 시간에.”

잠시 고민하던 엘레노어가 얇은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이른 아침 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아드리안이 걷던 방향으로 걷던 엘레노어는 제 주변 풍경이 꽤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호수 쪽으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엘레노어는 작은 호수에서 혼자 수영 중인 아드리안을 발견했다.

“춥지도 않나?”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이 대충 던져둔 셔츠를 주워 들며 중얼거렸다. 너른 바위 위에 셔츠를 깐 엘레노어가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렇게 앉아 아드리안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열일곱, 그해 여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드리안도 자신도 많이 변한 데다 계절조차 같지 않지만 그랬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아드리안이 젖은 머리를 털어 내며 뭍으로 올라왔다. 아무렇게나 놓아두었던 신발을 구겨 신은 그가 제 셔츠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을 향해 말을 걸었다.

“뭐 찾아?”

“엘렌.”

아드리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와 엘레노어의 앞에 섰다.

“네가 어떻게 여기 있어?”

“감기 걸리고 싶어서 작정했지, 너. 날이 이렇게 쌀쌀한데 수영이라니.”

엘레노어가 셔츠를 툭툭 털어 건넸다.

“빨리 돌아서서 입어.”

“굳이 돌아서야 해?”

아드리안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순순히 등을 보였다. 엘레노어가 바위 위에 다시 앉으며 말했다.

“입으면서 들어 줘. 그냥 아무 말 하지 말고.”

엘레노어는 밤새 고민했던 것들을 천천히 풀어놓기 시작했다.

“정말 솔직히, 나는 아직도 겁나.”

엘레노어의 말에 아드리안의 등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셔츠에 젖은 팔을 끼워 넣던 그가 그대로 멈춰 섰다.

“만났다가 헤어져서 괜히 어색한 사이가 되어 버릴까 봐. 연인으로서의 내 모습에 네가 실망할까 봐.”

“그럴 일은…….”

“쉿.”

아드리안이 다시 셔츠를 입기 시작하자 엘레노어가 말을 이었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도 있고, 우리 사이에 엮여 있는 수많은 사람도 그렇고……. 솔직히 좀 어려웠어, 네가.”

“…….”

“거기다 난 한 번 감정을 정리한 적도 있잖아. 말은 안 했지만, 나름대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아드리안의 어깨가 슬쩍 내려앉았다. 엘레노어는 보지 않아도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넌 참 끈질기게 신경이 쓰이더라. 좀 얄미울 정도로.”

“엘렌.”

“아직 대답해도 된다고 말 안 했는데.”

엘레노어의 말에 아드리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엘레노어는 그가 숨을 크게 들이쉬는 것을 듣고 소리 없이 웃었다.

“뻔뻔한 네 장난이 좋아. 그리고, 너답지 않게 어수룩해지는 순간은 더 좋아. 좀 귀엽다고 생각했어.”

단추를 하나씩 채워 올리던 아드리안이 멈칫했다. 엘레노어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리안, 다 입었으면 돌아봐도 돼. 대답도 해 줬으면 좋겠고.”

아드리안이 천천히 돌아섰다. 무언가를 꾹 참고 있는 사람처럼, 얼굴부터 목덜미까지 온통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엘레노어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드리안과 눈을 맞췄다. 선명한 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다.

엘레노어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네가 좋아.”

아드리안이 작게 숨을 삼켰다. 그는 제가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눈으로 엘레노어를 마주 보았다.

“지금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이것 하나뿐인데, 넌 어떻게 생각해?”

“충분해.”

아드리안이 엘레노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길고 예쁜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픽 웃은 엘레노어가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차게 식은 두 손이 맞닿자 순식간에 온기가 피어올랐다.

“다른 확신은 내가 심어 줄게. 앞으로 계속.”

“그래. 한 번만 더 믿어 본다. 두 번은 없어.”

“알아.”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을 담아서.

따뜻한 아침 햇살이 두 사람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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