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9화 소꿉친구가 내게 집착한다(5)
졸업식이 끝나고, 세 사람은 델른 시내의 관광 명소를 돌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신나게 웃고 떠들고 나니 금세 날이 저물었다.
숙소로 돌아오자 아드리안의 형이 샴페인 한 병을 슬쩍 가져다주었다. 졸업한 꼬맹이 셋이서 어른 흉내나 내보라는 말과 함께.
세 사람은 야외 테라스에 앉아 샴페인을 터뜨렸다. 반병쯤 비웠을 때, 술이 약한 드와이트가 가장 먼저 고꾸라졌다.
엘레노어가 테이블에 뺨을 대고 잠든 드와이트를 보며 속삭였다.
“드와이트는 완전히 곯아떨어졌네.”
“그러니까. 얘는 절대 술 마시면 안 되겠다. 뭐 얼마나 마셨다고.”
“그러니까 말이야.”
술기운에 약간 풀어진 엘레노어가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오늘 재밌었어, 진짜.”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나도. 최근 들어서 제일 많이 웃었던 것 같아.”
“너희랑 같이 아카데미 다녔으면, 매일 이렇게 즐거웠을까?”
엘레노어가 묻자 아드리안이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마도. 아쉬워?”
엘레노어가 픽 웃으며 샴페인 한 모금을 홀짝였다.
“아쉬우면 뭐. 시간이라도 돌려주게?”
아드리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너 입학하면 나도 재입학하지 뭐. 드와이트도 강제 재입학.”
“드와이트는 무슨 죄야.”
“감히 날 친구로 둔 죄.”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농담에 웃음을 터뜨렸다.
“자꾸 웃기지 마. 머리 울려.”
샴페인 잔을 괜히 흔들어보던 엘레노어가 화제를 돌렸다.
“넌 여행 간댔지?”
“응. 한동안 나가 있으려고. 짧아도 몇 달? 하고 싶은 것도 찾고, 생각도 좀 정리하고.”
몇 달이나 보지 못한다니 아쉬움이 밀려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란 걸 알지만, 가지 말라고 그를 붙잡고 싶었다.
엘레노어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진 것을 눈치챈 아드리안이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그냥, 아쉬워서. 이제 우리 셋이 이렇게 시끄럽게 어울리는 건 한동안 못할 거 아냐. 드와이트도 공채 준비할 테니까.”
“그렇긴 하지. 생각해 보니 아쉽네.”
잠시 생각하던 아드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언제가 됐든, 셋이 꼭 다시 오자. 약속.”
“그래, 약속.”
엘레노어가 피식 웃으며 남은 샴페인을 쭉 들이켰다.
약간 알딸딸하게 오른 취기, 시원한 밤공기, 낯선 풍경, 첫사랑까지. 모든 게 완벽한 순간이 아닌가. 이런 순간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어쩐지 아드리안의 태도도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졸업식 때도 그랬고, 델른 시내를 돌아다닐 때도 그녀를 세심하게 챙겨 주었다.
‘어쩌면…… 아드리안의 마음에도 약간의 변화는 있었는지도?’
엘레노어는 들뜬 기분을 감춰 보려 입술을 꼭 깨물었다.
“오늘따라 달이 밝네.”
의자 깊이 몸을 묻은 아드리안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엘레노어도 같은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거 알아? 보름달에다가 소원 빌면 이루어지는 거.”
“글쎄. 처음 들어 봤는데.”
엘레노어가 눈을 반짝였다.
“소원 빌자. 나는 드와이트 몫까지 두 개 빌게.”
“무슨 자격으로?”
“쌍둥이 자격으로.”
엘레노어의 대답에 아드리안이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은 잠시 눈을 감고 밝은 달님에게 소원을 빌었다. 술김이라 그런지 유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첫 번째 소원은, 셋이서 다시 여기 오자는 약속이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두 번째 소원은…….’
잠시 머뭇대던 엘레노어가 두 손을 꼭 모아 잡았다.
‘다음번에 여기 왔을 땐, 아드리안과 제가 친구 사이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꼭이요. 모아 잡은 손에 힘을 준 엘레노어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엘레노어가 천천히 눈을 뜨자 그녀를 보고 있는 아드리안이 보였다.
엘레노어가 물었다.
“빌었어?”
“응.”
“무슨 소원인지 물어봐도 돼?”
아드리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너랑 평생 친구 하는 거. 어색해지거나 멀어지는 일 없이, 지금처럼.”
쿵.
그 순간 엘레노어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취기가 달아났다.
‘대체 무슨 대답을 바란 거야, 엘레노어 에버렛. 아드리안 입장에선 당연한 소원이지.’
아드리안의 다정한 소원이 엘레노어의 마음을 날카롭게 할퀴었다. 엘레노어는 종일 혼자 뭔가 기대하며 들떠 있던 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멍하니 앉아 있는 엘레노어를 향해 아드리안이 산뜻하게 되물었다.
“너는?”
테이블보 아래 감춰진 엘레노어의 두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가슴 한쪽이 지끈거렸다.
“……우리 셋이 또 이렇게 여행 오게 해달라고.”
“두 개 빈다더니?”
“글쎄. 생각이 잘 안 나더라고.”
엘레노어는 아드리안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
함께 저녁을 먹은 세 사람은 서재에 모여 카드게임을 즐겼다.
“너희 일부러 나 기분 좋아지라고 살살하는 거지? 이럴 줄 알았으면 돈이라도 걸고 할걸.”
“아무것도 안 걸어서 진짜 다행이다.”
엘레노어와 아드리안 모두 마음이 어수선했던 탓인지, 카드게임은 드와이트의 완승으로 끝이 났다. 드와이트가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쭉 켰다.
“낮잠 안 잤더니 좀 피곤하네. 나 먼저 들어가서 쉰다.”
엘레노어가 혀를 끌끌 찼다.
“그럴 만하지. 오자마자 땀을 그렇게 빼고……. 너무 신났다 했다.”
아드리안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넌 좀 잘 필요가 있어. 얼굴부터 피곤에 찌들었다.”
“둘은 더 놀려고?”
드와이트의 질문에 아드리안이 엘레노어를 바라보았다.
“엘렌, 졸려?”
“아니. 난 아까 낮잠 자서.”
“나도 너희 도착하기 전에 좀 잤어.”
아드리안이 드와이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우린 좀 더 있다 갈게.”
“그러든지. 나 자러 간다.”
관심 없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은 드와이트가 서재를 나섰다. 둘만 남은 서재는 유난히 적막하게 느껴졌다.
아드리안이 테이블 위에 펼쳐진 카드를 정리하며 어색한 분위기를 깼다.
“오늘 셋이 오랜만에 어울리니까, 그날 생각나더라. 졸업식 날.”
엘레노어의 손끝이 움찔했다. 잠시 머뭇대던 엘레노어가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그랬나? 난 잘 모르겠는데.”
“그때도 드와이트는 먼저 자고, 너랑 나랑만 남아서 한참 이야기하다 잤잖아. 기억 안 나?”
“아니, 기억나.”
아드리안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빌었던 소원도 기억해. 우리 셋이 같이 여행하게 해달라고. 맞지?”
“응, 기억하네.”
“누가 한 말인데. 당연히 기억하지.”
엘레노어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소원은 기억나?”
“내 소원?”
아드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기억 안 나.”
“난 기억하는데.”
“뭐였는데?”
잠시 망설이던 엘레노어가 입술을 뗐다.
“나랑 평생 친구 하는 거. 어색해지거나 멀어지는 일 없이.”
“내가 그런 말을 했었어?”
“응, 그랬어.”
엘레노어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드리안이 테이블 위에 정리하던 카드 뭉치를 내려놓았다.
“혹시 그건 기억해? 드와이트 몫까지, 난 소원 두 개 빌 거라고 했던 거?”
아드리안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기억해. 그런데 하나만 빌었잖아.”
“사실 그거 거짓말이었어.”
아드리안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왜 그런 거짓말을 했어?”
“내 소원은 너랑 정반대였거든.”
그날, 그 밤을 회상하던 엘레노어의 입매가 슬쩍 휘었다.
“다음번에 여행 올 땐, 너랑 내가 친구 사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빌었어.”
“뭐……?”
놀란 아드리안의 동공이 눈에 띄게 확장되었다. 제가 들은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듯,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드리안의 반응을 본 엘레노어의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져나갔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모양이다.
“널 좋아했었어, 바보야.”
엘레노어는 7년을 꾹꾹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비밀을 담담한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열일곱 살부터였어. 졸업식 날 이후론 조금씩 마음을 접었고.”
“잠깐만.”
“난 네가 알았을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편지로 티를 얼마나 냈는데.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면서.”
작게 웃은 엘레노어가 가볍게 아드리안을 흘겨보았다.
“답장도 없는 편지를 그렇게 꾹꾹 채워 보낼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매사 무심한 친구가 뭐가 예뻐서?”
“…….”
“솔직히 나 좀 서운했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자존심도 상하고.”
아드리안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엘레노어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많이 놀란 듯,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래서 네가 날 좋아한다고 했을 때 좀 심술이 났어. 그래서 너한테 괜히 더 모질게 굴었던 것 같아.”
“이해해. 그리고…… 정말 미안해.”
“눈치 없었던 것에 대한 사과야? 됐네요. 다 지난 일이고, 사실 미안할 일도 아니고.”
엘레노어가 턱을 괴고 가만히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손톱으로 톡톡, 원목 테이블을 건드려 보던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냥, 그런 생각이 좀 들었다고.”
“어떤 생각?”
“사랑은 타이밍이라는데, 어쩜 우리의 타이밍은 이미 한참 전에 흘러가 버린 게 아닐까. 그런 생각.”
그 순간 테이블 위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엘레노어는 제가 너무 솔직했던 건 아닌지, 뒤늦은 후회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쓸데없는 말 너무 많이 했다. 나 자러 갈게.”
“어? 어…….”
“쉬어, 리안.”
***
자겠다고 말은 했지만, 당연히 잠은 오지 않았다. 새우처럼 웅크리고 누운 엘레노어가 머리끝까지 이불을 당겨 덮었다.
‘좀 참을걸. 괜히 아드리안이 졸업식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한 번쯤 솔직하게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토록 충동적일 줄은 몰랐다. 추억이 많은 장소에 와서인지, 요즘 요동치던 마음 때문인지 감정이 제멋대로 날뛰어댔다.
그때 창밖에서 희미하게 다그닥대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마차 소리?’
엘레노어가 빠르게 몸을 일으켜 창을 열어젖혔다. 후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급하게 어딘가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리안……? 이 시간에 말도 없이 어딜 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