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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 외전-8화 (159/168)

외전 8화 소꿉친구가 내게 집착한다(4)

아드리안이 픽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드와이트가 초대해서 왔지. 바빠지기 전에 셋이서 시간 보내자고 해서.”

“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두 사람도 무척 친하고 끈끈한 친구 사이였으니까.

아드리안이 기지개를 쭉 켜며 말했다.

“우리 예전엔 여기서 셋이 자주 놀았잖아.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왔는데. 싫어? 나 다시 올라가?”

엘레노어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드와이트의 성취를 축하하고, 함께 행복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냐, 됐어. 축하해 주는 사람 많아서 좋네. 너 온다는 소리는 못 들어서 좀 놀란 거야.”

“그럼 다행이고.”

아드리안도 같은 생각인지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피곤해서 낮잠 좀 잘게. 드와이트랑 놀아 주는 건 너한테 패스.”

“점심은?”

“먹고 자면 불편할 것 같아.”

“그래. 이따 저녁 먹을 때 보자. 잘 자.”

엘레노어는 방에서 짧게 잠을 청했다. 잠깐의 낮잠은 여독을 깨끗이 풀어 주었다.

엘레노어는 오랜만에 온 제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예전에 즐겨 읽던 소설들이 책장에 잘 정리되어 있었다.

“어디 갔나 했었는데, 이 책들을 내가 별장에 다 뒀구나.”

여기 있는 동안 많이 읽어야겠다.

책 몇 권을 뽑아 든 엘레노어가 창가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먼지 하나 없이 잘 닦인 책상 위에 책을 얹어 둔 엘레노어가 문득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밖에서 노나 보네.”

엘레노어가 이끌리듯 창가에 붙어섰다.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아 밖이 환했다.

아드리안이 드와이트를 향해 공을 넘겨 주며 무어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베스트를 저 멀리 벗어 던진 드와이트가 아드리안의 어깨를 툭 두드리며 웃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엘레노어는 약간의 향수에 젖어 들었다. 한때는 참 당연했던 풍경이었는데, 어른이 되고부터는 통 보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그때도 여기서 보냈었는데. 리안에게 반했던 여름.’

열일곱, 풋풋하던 때를 떠올린 엘레노어의 입꼬리가 살짝 솟았다. 7년 가까이 흘렀지만, 엘레노어는 여전히 그때 호숫가에서 본 아드리안의 모습을 선명히 그려낼 수 있었다.

호수 표면 위에 둥글게 퍼지던 갈색 머리카락, 적당히 보기 좋게 근육이 잡힌 등을 따라 흘러내리던 물방울, 태양처럼 환하던 미소까지.

사람이 살다 보면 절대 잊히지 않는 풍경을 한 번쯤 만난다던데, 엘레노어에게는 그날 호숫가의 풍경이 그랬다. 아드리안에 대한 마음을 접은 다음에도 문득문득 생각이 났다.

“……그런데 리안은 정말 모르는 건가?”

자기가 내 첫사랑이라는 거. 티도 꽤 많이 냈었는데.

엘레노어가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눈치 좀 길러 보라며 매번 그녀를 타박하지만, 이런 걸 보면 아드리안도 눈치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드리안이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까지 엘레노어가 보낸 편지를 세어 보면 백 통도 훌쩍 넘을 것이다. 개중에는 대놓고 짝사랑하는 티가 풀풀 풍기는 것들도 있었다.

“그땐 답장도 제대로 하지 않아 놓고.”

이러니 괘씸할 수밖에.

엘레노어가 팔짱을 단단히 꼈다. 그때 느꼈던 서운함이 괜히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이마에 솟은 땀을 닦아내며 웃는 아드리안은 얄미울 만큼 반짝거렸다. 열일곱 그때 그 여름처럼.

아니, 사실은 그때보다 더 근사했다.

얼굴선이 조금 더 굵어졌고, 키도 더 자랐다. 소년의 풋내가 가신 그는 이제 완연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엘레노어의 마음이 괜히 산란해질 만큼.

‘!’

그때였다. 저를 빤히 보는 시선을 느낀 것인지 아드리안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서로를 정확히 겨냥한 시선이 만났다. 피하거나 준비할 틈도 없을 만큼 순식간이었다. 아드리안의 눈이 살짝 커졌다.

“웃지 마. 뭘 잘했다고.”

엘레노어가 뭐라고 하는 건지 궁금한 듯 아드리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엘레노어는 그런 아드리안에게서 시선을 옮기지 않고 작게 중얼거렸다.

“다 정리하고 겨우 마음 다잡았는데, 인제 와서 흔드는 건 뭐야. 그건 진짜 반칙이지.”

아드리안이 답답한지 발을 굴렀다. 픽 웃은 엘레노어가 커튼을 닫았다.

“평생 친구 하는 게 소원이라더니, 바보.”

***

시끌벅적한 아카데미 졸업식.

엘레노어는 제 몸만 한 꽃다발 두 개를 안고 아카데미 교정을 총총 가로질렀다. 예쁘고 풍성한 꽃다발을 선물해 주고 싶은 마음에 이것저것 고르다 보니 좀 과해졌다.

“아이참. 빨리 만나서 줘 버려야지.”

엘레노어는 자꾸만 시야를 가리는 꽃다발 때문에 자주 멈춰 서야 했다.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고 꽃다발을 잘 지키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때 갑자기 튀어나온 누군가가 엘레노어의 어깨를 툭 쳤다.

“앗!”

“어,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엘레노어가 얼른 꽃을 살폈다. 다행히 꽃다발은 다친 데 없이 무사했다.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잠깐 딴 곳을 보다가…….”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시선이 엘레노어가 들고 있는 꽃다발에 닿았다.

“꽃다발이 진짜 크네요. 죄송한 일도 있는데,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제가 이래 봬도 발이 넓어서 웬만한 애들은 다 알거든요.”

그러잖아도 이리저리 헤매느라 발이 좀 아프던 차였다. 엘레노어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 좀 부탁드릴게요. 드와이트 에버렛이랑 아드리안 블레이크라고…… 혹시 아세요?”

엘레노어의 꽃다발 하나를 자연스레 받아 든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놀란 눈치였다.

“알다마다요. 아카데미에 그 두 사람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싶은데요.”

“그래요? 의외네.”

“의외인가요? 어딜 데려다 놓아도 눈에 띌 것 같은데. 많이 친하신가 보다.”

“아, 드와이트랑은 남매예요. 아드리안은 소꿉친구.”

“그러셨구나. 어쩐지 인상이 좀 익숙하다 했네요.”

남자는 드와이트와 꽤 친한 사이인 것 같았다. 엘레노어는 그에게서 드와이트의 학교생활을 생생하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아까 두 사람 마주쳤는데, 아직도 거기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일단 가시죠.”

엘레노어보다 약간 앞서 걷던 남자가 반가운 얼굴로 앞을 가리켰다.

“어, 아드리안은 저기 보이네요. 아드리안!”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아드리안이 두 사람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엘렌……?”

아드리안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엘레노어의 옆에 바싹 붙어선 그가 물었다. 유순하던 눈초리가 오늘따라 조금 날카로워졌다.

“네가 왜 이 녀석이랑 같이 있어?”

“이 녀석이라니. 나도 그리핀이라는 이름이 있다고.”

“감사했어요, 그리핀.”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손목을 가볍게 붙잡았다.

“너랑 드와이트 찾는 거 도와주셨어. 꽃다발도 무거웠는데 들어 주시고. 덕분에 편하게 왔어.”

꽃다발이라는 말에 아드리안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럼 꽃다발 두 개 중에 하나는 내 거야?”

“자, 받아라.”

뚱한 표정으로 서 있던 그리핀이 아드리안을 향해 꽃다발을 내밀었다. 까칠하게 구는 아드리안에게 심통이 난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그리핀이 내미는 꽃다발을 받아 들지 않았다. 엘레노어를 향해 몸을 튼 아드리안이 손을 내밀었다.

“네가 들고 있는 거 줘.”

“저거랑 똑같은 건데.”

“그게 더 예쁜 것 같아.”

“하여튼 별나.”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하며 아드리안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그는 그제야 만족한 표정으로 슬쩍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무튼, 리안. 졸업 축하해.”

“고맙다.”

옆에서 그리핀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럼 저는 이만…….”

“아직 안 갔냐?”

“이 자식 오늘 왜 이렇게 까칠하지? 이상하네.”

아드리안이 그리핀의 팔을 툭 치곤 꽃다발을 마저 받아 들었다. 그리핀이 멀어지자 아드리안은 원래의 여유로운 모습으로 완벽히 돌아왔다.

“드와이트는?”

“나중에 졸업생 대표 연설 있어서.”

“아, 그럼 꽃다발은 나중에야 줄 수 있겠다. 다시 나 줘.”

“내가 들고 있을게. 꽤 묵직한데.”

아드리안의 말에 엘레노어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너 나랑 있게?”

“부모님은 내일에야 오신다며. 우리 형도 두 시간은 더 있어야 올 텐데.”

“그렇긴 한데……. 친구들 마지막으로 보는 날이잖아. 괜찮으니까 인사 나눠. 난 혼자 여기저기 구경하고 다니면 돼.”

아드리안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친구 없어.”

“억지 부린다, 또.”

“친구긴 한데 진짜 별로 안 친해.”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드리안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너 혼자 두는 거 못 미더워서 그래. 뭔가 기분이 좀…….”

“좀?”

한참이나 적당한 말을 고르던 아드리안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약간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나도 모르겠다. 이게 무슨 기분인지.”

엘레노어가 픽 웃으며 대답했다.

“못 미더울 건 또 뭐야. 길 좀 잃어도 주변에 물어서 찾아오면 되지. 밖으로 나갈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나하고 다니면 주변에 길 물을 필요도 없고 편하겠네. 나랑 다녀, 그냥.”

엘레노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는데 굳이 사양할 이유는 없었다. 아드리안과 둘이서 시간을 보내는 걸 은근히 기대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 뭐 나야 좋지. 난 충분히 배려했다?”

“응.”

“졸업식 시작할 때까지 얼마나 남았지?”

“한 시간 정도? 가 보고 싶은 곳 있어?”

잠시 고민하던 엘레노어가 대답했다.

“나 전부터 도서관 궁금했어.”

“그래, 너답다. 가자.”

아드리안이 웃으며 걸음을 뗐다.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옷소매를 살짝 붙잡고 그를 따라 걸었다.

“소매는 왜 잡아?”

“여기 사람 너무 많아서. 너랑 떨어질까 봐.”

아드리안이 엘레노어가 붙잡은 제 소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엘레노어가 물었다.

“불편해? 놓을까?”

“아니.”

곧바로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잠시 머뭇대던 아드리안이 말을 이었다.

“……잘 잡고 있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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