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화 소꿉친구가 내게 집착한다(3)
“소후작님 말씀이십니까?”
“네. 리안이요.”
제게 쏠린 시선을 느낀 엘레노어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실수라도 한 걸까? 혹시 주소가 바뀐 건가? 그도 아니면…….
엘레노어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분위기가 변한 이유를 고민했다. 남자가 엘레노어를 보며 물었다.
“약속을 잡고 방문하신 겁니까?”
“앗, 그건 아닌데. 엘레노어라고 말하면 알 텐데요. 살짝 말씀만 전해 주시겠어요?”
“아, 예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엘레노어는 되도록 눈에 띄지 않도록 벽에 바짝 붙어섰다. 하지만 사무실과 어울리지 않는 꽃다발은 지나치게 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1분은 지났을까. 다급한 발소리에 엘레노어가 고개를 들었다.
“엘렌!”
고개를 들자마자 아드리안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밝게 웃으며 엘레노어를 향해 다가왔다. 거의 뛰는 듯한 걸음이었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나 만나러 온 거야?”
“그럼. 당연히 너 만나러 온 거지.”
내가 너 아니면 여길 왜 와.
엘레노어의 말에 아드리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엘레노어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이렇게 기분 좋아 보이는 건 또 처음이네.’
아드리안은 제 감정을 표정에 잘 드러내지 않았다. 무표정하다는 게 아니라, 날것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은 잘 없었다는 뜻이다.
아드리안이 상기된 얼굴로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아니, 이유가 필요하다는 건 절대 아니고. 넌 그냥 아무 때나 막 찾아와도 괜찮아. 알지? 그냥 평소랑 다르니까 궁금해서…….”
“알아. 이거 전해주려고.”
엘레노어가 꽃다발을 살짝 들어 보였다.
“너 바쁘지 않아? 시간 많이 뺏을 생각은 없어.”
아드리안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냐, 시간 낼 수 있어. 점심 먹었어?”
“아직.”
“그럼 점심 같이 해. 헬라드, 오후 회의는 조금 미루도록 해.”
아드리안이 몸을 돌려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던 남자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가 엘레노어와 아드리안을 번갈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 그건 문제없습니다만. 혹시 두 분은 어떤 관계이신지…….”
아드리안이 씩 웃으며 물었다.
“무슨 관계처럼 보이는데?”
“연인 같아 보이십니다. 잘 어울리는.”
그 대답은 아드리안을 더없이 만족스럽게 했다.
“헬라드.”
“예?”
“퇴근해.”
엘레노어가 오해를 정정하려 입을 열었다.
“저희는 그냥…….”
“가자, 엘렌. 데이트하러.”
엘레노어의 말이 끝까지 이어지기도 전에 아드리안이 말을 가로챘다. 등 떠밀려 사무실 밖으로 나온 엘레노어가 도끼눈을 떴다.
“데이트는 무슨. 너 혼날래? 오해하시잖아.”
“꽃다발 들고 사무실까지 찾아온 건 너면서.”
“너 진짜……!”
“사랑 고백이라도 하러 온 줄 알고 설렜는데. 너부터가 오해하게 했네.”
아드리안의 대답에 엘레노어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까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민망해진 엘레노어가 꽃다발로 아드리안의 가슴팍을 내리쳤다.
“까불지! 말라고!”
“아야. 아파, 엘렌.”
“선물도! 집으로! 보내지! 말라고!”
선명한 분홍색 꽃잎들이 휘날려 시야를 가득 채웠다. 꽃잎 사이로 싱글벙글 웃고 있는 아드리안의 얼굴이 보였다. 기분이 좋아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알았어. 앞으론 조심할게. 약속.”
아드리안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과 너른 어깨 위에 장미 꽃잎이 떨어져 있었다. 아드리안이 후, 하고 바람을 불어 앞머리에 붙은 꽃잎을 떼어냈다.
엘레노어는 어쩐지 그런 아드리안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느끼기는 했지만, 정말이지 반듯하게 잘생긴 놈이다.
‘왜 혼자 청춘 영화 찍는 것 같지.’
반짝거리는 외모에 장미 꽃잎까지 더해지자, 아드리안은 영화 속 주인공처럼 근사해 보였다. 엘레노어는 시선을 돌릴 적당한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아드리안이 그런 엘레노어를 보며 씩 웃었다.
“근데 엄청 좋은 향기 난다. 꽃으로 맞아서 그런지, 너한테 맞아서 그런지 기분이 나쁘지가 않네.”
아드리안이 능글거리는 표정으로 장난을 걸자 엘레노어가 미간을 구겼다.
“변태 같아…….”
“표현이 그게 뭐냐. 서운하게.”
“우리 좀 떨어져서 걷자. 너 진짜 이상해.”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에게서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그때였다. 골목에서 튀어나온 마차가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엘레노어의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엘렌!”
깜짝 놀란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어깨를 확 끌어안았다. 엘레노어는 졸지에 아드리안의 품에 꽉 안기고 말았다.
“괜찮아?”
“어? 어.”
아드리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엘레노어가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많이 놀랐지.”
“조금. 그래도 괜찮아.”
맞닿은 몸에서 쿵쿵, 강하게 뛰는 심장의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엘레노어는 그 진동이 제 안에서 시작된 것인지, 아드리안에게서 건너온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미친놈 아냐, 저거. 이런 거리를 저 속도로…….”
아드리안이 목구멍까지 치솟은 험한 말을 억지로 삼켰다. 엘레노어의 눈앞에서 아드리안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게 선명히 보였다.
아드리안이 엘레노어를 꽉 안고 있던 팔의 힘을 풀었다. 엘레노어는 튕기듯 그에게서 물러섰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멍해 보이는데.”
아드리안이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엘레노어는 어쩐지 조금 묘한 기분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심장이 너무 뛰는데, 이건 괜찮은 건가? 괜찮지 않은 건가?
“……모르겠어. 좀 놀란 것 같은데 금방 가라앉겠지.”
엘레노어는 바쁘게 손부채질을 하며 앞서 걸었다. 이상하게 좀 더운 날이었다.
***
괜찮지 않다. 이건 괜찮지 않은 거다.
엘레노어는 며칠째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심장이 빨리 뛰는 건, 확실히 마차 때문에 놀라서만은 아닐 것이다.
‘안 돼. 이런 건 좋은 신호가 아닌데.’
엘레노어가 싱숭생숭한 마음을 떨쳐내 보려 뺨을 툭툭 두드렸다. 차가운 밤공기가 엘레노어의 달아오른 귓바퀴를 약간 식혀 주었다.
아드리안은 나흘째 출장 중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귀찮게 하던 그가 없으니 시원할 법도 한데, 이상하게 조금 허전했다.
원래도 일주일에 한 번쯤 보는 것이 보통이었으니, 나흘쯤 못 본다는 게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하루에 한 번, 꼬박꼬박 얼굴을 비추는 최근의 아드리안이 이상했던 거지.
‘짜증 나. 결국 걔한테 완전 말려 버린 것 같잖아.’
엘레노어는 제가 아드리안의 수작에 흔들렸다는 걸 반쯤 인정했다. 유치하고 부끄럽고 닭살이 돋지만, 솔직히 설렜던 순간이 많았다는 것도.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엘레노어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처럼 선을 박박 긋고, 확실한 태도를 보인다면 아드리안은 물러설 것이다. 한동안은 좀 어색하겠지만, 결국은 한때의 해프닝이라 생각하고 넘길 수 있으리라.
‘그래, 그러면 되는데…….’
다 알면서도 이상하게 조금 망설여졌다. 그냥 친구로 남아 줬으면 하면서도, 연인이 된 모습을 자꾸 상상하게 되기도 했다.
엘레노어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
다음 날 아침, 엘레노어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환호성에 눈을 번쩍 떴다.
“무슨 소리지?”
침대에서 꾸물꾸물 벗어난 엘레노어가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저택 분위기가 이상하게 밝았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반쯤 내려갔을 때 엘레노어는 올라오던 드와이트를 맞닥뜨렸다.
“드와이트.”
엘레노어가 드와이트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오늘 저택 분위기가 좀 평소랑 다르지 않아? 좀 들뜬 것 같…….”
“엘렌, 나 합격이래!”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무난히 합격할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지만, 드와이트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이날을 위해 얼마나 애써왔던가. 당연히 드와이트가 열심히 해 주었기 때문이지만, 엘레노어의 노력도 결코 적지 않았다.
“진짜 잘됐다! 아버지께도 말씀드렸어?”
“응, 방금. 그런데, 엘렌. 더 신기한 게 뭔지 알아?”
드와이트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크게 외쳤다.
“내가 수석이래, 이번에.”
“와, 미쳤다. 축하해, 드와이트!”
“고마워. 다 네 덕이야.”
드와이트가 엘레노어를 향해 팔을 뻗었다. 드와이트를 한 번 꽉 안아 준 엘레노어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 덕은 무슨. 네가 열심히 해서지.”
“솔직히 난 거저먹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시험에 나올 만한 부분을 그렇게 다 짚어 줬는데.”
“하긴 누가 가르쳤는데.”
엘레노어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떠먹여 줘도 못 받아먹는 사람이 한둘이게? 합격까지는 내 덕이라 쳐도, 수석은 순전히 네가 노력해서 얻은 거야. 자부심 느껴도 돼.”
엘레노어가 발꿈치를 들고 드와이트의 머리를 가볍게 흩트려 놓았다.
“근데 이제 너 진짜 바빠지겠다. 인터뷰 같은 것도 들어오고 그러겠네?”
“응. 안 그래도 다음 주말부터 정신없이 바빠.”
“고생길이 훤하다. 너 그런 거 엄청 어색해하잖아.”
인터뷰 연습을 철저히 시켜야겠군. 예상 문제도 뽑고, 모의 인터뷰도 해 보고…….
엘레노어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획을 세워 나갔다.
“아까 아버지가 그러시던데. 별장 내려가서 좀 쉬다 오라고. 너도 같이 내려가자. 안 간 지 오래됐잖아.”
“별장?”
그러고 보니 수도에만 머문 지도 꽤 오래된 것 같았다. 엘레노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오랜만에 공기 좋은 곳 가서 머리 비우고 오자.”
한적한 곳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이제 곧 아드리안이 돌아올 텐데, 지금 같은 마음으로 만났다간 무슨 사고를 칠지 몰랐다.
하지만 하늘은 엘레노어의 편이 아니었다.
별장으로 내려간 엘레노어는 절대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이의 얼굴을 발견했다.
“안녕. 놀란 얼굴이다?”
“네가 왜 여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