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화 소꿉친구가 내게 집착한다(2)
“네가 왜 여기 있어.”
현관문을 열어젖힌 엘레노어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아드리안은 자연스럽게 엘레노어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웃었다.
“응, 나도 보고 싶었어.”
가만히 손 놓고 있지 않겠다더니, 아드리안은 작정하고 엘레노어를 흔들기 시작했다. 엘레노어로서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변화였다.
원래도 다정하기는 했지만, 친구라는 선만큼은 철저하게 사수하던 아드리안이었다. 그런 그가 선이라는 것은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굴기 시작하자, 엘레노어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니, 진짜 네가 왜 여기 있냐고.”
“마중 나왔어.”
“마중?”
엘레노어가 슬쩍 눈썹을 찡그렸다.
“지금 너희 집에 저녁 먹으러 가는 길이잖아. 그런데 마중을 우리 집까지 나오면 어떡해. 여기가 너희 집 앞마당도 아니고.”
“너 일찍 보고 싶어서.”
아드리안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뻔뻔하게 느껴질 정도로 당당한 모습에 엘레노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오글거려, 아드리안 블레이크.”
아드리안이 눈썹을 슥 추켜올렸다.
“겨우 한마디 했는데?”
“그러니까. 이제 말 그만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
“언제까지 조용히 해야 하는데?”
“평생.”
엘레노어의 단호한 대답에 아드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손을 뻗어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흐트러뜨렸다.
“싫은데 어쩌지.”
“진짜 너 몇 대 맞을래?”
“그런 게 네 취향인 거면 뭐…….”
가는 내내 두 사람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럴 때만큼은 예전 그대로라, 엘레노어는 슬쩍 마음을 놓았다.
잘 닦인 길을 따라 달리던 마차가 후작저의 정문을 매끄럽게 통과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엘레노어를 맞았다.
“저 왔어요, 클로드.”
“이게 누구야. 얼굴 잊어버리겠다, 이 녀석아. 자주 좀 오래도.”
“좀 오랜만에 봐야 더 반겨 주실 것 같아서?”
“하여튼 내 너를 말로 이길 수가 있어야지.”
클로드가 엘레노어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가 놓았다. 아드리안이 자연스럽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툭 얹었다.
“안 들어가고 뭐 해?”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손을 슬쩍 떼어내며 경고했다.
“너 저녁 먹을 땐 진짜 가만히 있어.”
“뭐?”
“그…… 티 내지 말라고. 어색하게 굴기 싫으니까.”
아드리안이 엘레노어를 빤히 바라보았다. 고백 이후로 그를 대하는 엘레노어의 태도는 무척 단호해졌다. 조금은 쌀쌀맞게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껏 엘레노어는 아드리안에게 늘 살가웠다. 의견이 달라 부딪치고 싸울 때도 많았지만, 슬며시 다가와 먼저 손을 내밀어 주던 그녀였다.
다정한 천성 탓이기도 했지만, 그가 엘레노어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이유가 더 컸다. 엘레노어는 제 사람에게 한없이 너그러웠다.
‘역시 부담스러웠나.’
예상했던 일이기는 하지만 애가 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애매하게 물러설 수는 없었다. 20년 넘게 이어져 온 관계를 재정립하는 일이니, 약간의 진통은 불가피했다.
아드리안이 애써 담담한 척 웃으며 물었다.
“네 말대로 해 주면, 보상은 있는 거지?”
“보상?”
웬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 엘레노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까지 데려다주게 해 줘.”
엘레노어가 황당하다는 듯 아드리안을 위아래로 살폈다. 과할 만큼 멀끔하고 멀쩡해 보였다.
‘무슨 보상이라는 게…….’
엘레노어는 사실 아드리안의 태도 변화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지금껏 친구라는 이름으로 견고하게 쌓아 올린 성이 뒤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티 낼 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에게 품었던 풋사랑을 접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아드리안 블레이크라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엘레노어에게 연인이란 언제 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얄팍한 유리 같은 관계였다. 전생의 경험을 떠올려 봐도 그랬다. 엘레노어는 헤어진 연인과 다시 친구로 남을 수 있을 만큼 쿨하지 않았다.
엘레노어가 복잡한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진짜 이상해. 알아?”
“아니, 몰라. 이제 들어가자. 배고프다.”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
엘레노어의 걱정과 달리 그는 식사 내내 얌전했다. 가끔 클로드와 대화 중인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 정도야 평소와 크게 다른 것도 아니었다.
적당한 포만감은 엘레노어의 기분을 한껏 끌어올렸다. 게다가 클로드와의 카드게임에서 이겨 용돈 벌이까지 제대로 했다.
아드리안은 콧노래를 부르는 엘레노어와 보폭을 맞추며 피식 웃었다.
“엘렌, 아까 약속한 거 기억하지?”
“기억 안 나.”
“거짓말.”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앞을 턱 가로막았다.
“상 받을 만한 것 같은데, 나. 얌전히 잘 있었는데.”
“난 약속한 적 없는데?”
엘레노어가 새침하게 쏘아붙였다. 마차 문을 손수 연 아드리안이 엘레노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빨리 타기나 해, 엘렌. 네 뜻은 충분히 알았으니까 선 그만 긋고.”
의외로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은 고요하고 평온했다. 엘레노어의 맞은편에 턱 하니 자리한 아드리안이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상 운운할 땐 언제고.’
엘레노어가 턱을 괴고 그런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느라 할 일이 산더미라던 클로드의 말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상단 일이 많이 바쁜가 봐?”
아드리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좀 그렇지. 심심해?”
“아니. 바쁘다면서 마차는 굳이 왜 따라 타. 시간도 없으면서.”
“그래도 너 집에 들어가는 거 봐야 안심이 되지.”
엘레노어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마차 타고 집에 가는데 무슨 일이 생길 거라고.”
아드리안이 뻔뻔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건 모르는 거야. 복면 쓴 강도가 뛰어 들어올 수도 있고, 전설 속 괴수가 나타날 수도 있고…….”
“헛소리.”
소리 내 웃은 엘레노어가 도발하듯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네 말대로면, 리안 너랑 같이 있어도 별로 달라질 것 같지 않은데?”
“뭐?”
“싸움이라고는 드와이트랑 몇 번 툭툭거린 게 전부면서. 아냐?”
아드리안이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일부러 자극하는 것임을 모르지 않았지만, 엘레노어에게 힘없는 도련님 이미지로 남는 것은 죽어도 싫었다.
“엘렌 네가 뭘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나 운동 잘해.”
“아, 네.”
“진짜야. 아카데미에서도 검술은 늘 A였어.”
“알았다니까?”
구차하게 부연하던 아드리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드와이트는 무조건 이겨.”
“리안, 나도 드와이트는 이겨.”
티격태격하는 사이 마차는 백작저의 정문을 통과해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그러니까 얌전히 돌아가세요, 소후작님.”
제 쪽으로 흐름을 완전히 가져오는 데 성공한 엘레노어가 생긋 웃었다. 아드리안이 무언가 말하려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입을 닫았다.
아드리안이 매력적인 상대라는 건 엘레노어도 이미 한 번 빠져 보았기에 알았다. 그녀의 취향도 훤히 꿰고 있는 데다, 말까지 잘하니 넋을 놓고 있다간 금세 휘말릴 것이 뻔했다.
“가는 길에 괴물한테 잡아먹히지 마시고.”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엘레노어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
그저께는 향수였고, 어제는 머리핀이었다.
“선물 공세는 안 통한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오늘은 한 손으로 들기 살짝 부담되는 크기의 장미 꽃다발이다.
“어머, 예쁘기도 하지.”
“그러게요. 탐스러워라.”
“리안이 너를 좋아하나 보다. 남녀 사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라지만, 너희는 끝까지 남매처럼 남을 줄 알았는데…….”
“저희는 짐작했어요. 아가씨를 보시는 눈빛이 심상치 않더라고요.”
“그러니? 다음에 만날 땐 나도 유심히 살펴야겠다.”
백작 부인과 하녀들이 상기된 얼굴로 꽃다발에 대한 감상을 주고받았다.
“아가씨, 어디 둘까요? 역시 침실에 두는 게 좋을까요?”
엘레노어가 떨떠름한 눈길로 꽃다발을 살폈다.
섬세한 레이스 장식이 분홍 장미의 로맨틱함을 한껏 끌어내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구애의 의미가 확실한 선물이었다는 뜻이다.
“침실에 두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닐지도 몰라. 볼 때마다 설레서 밤잠은 제대로 오겠니?”
“어머니!”
참다못한 엘레노어가 발끈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꽃다발 이리 내.”
“네?”
“돌려줄 거야.”
기어이 하녀의 손에서 꽃다발을 빼앗아 든 엘레노어가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엘레노어도 물론 선물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싫어하기는커녕 오히려 무척이나 좋아했다.
하지만 아드리안이 이렇게 의도가 명확한 선물을 자꾸 보내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아드리안이 아닌 제삼자였다면 조금 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작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아드리안을 잘 알았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흔하디흔한 로맨스 서사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요 며칠 백작저의 공기는 전에 없이 가볍고 간지러웠다.
‘주변에서 자꾸 몰아가는 거, 난 별로라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곤란하단 말이야.’
엘레노어는 꽃다발을 꼭 쥐고 마차에 올랐다. 아드리안을 만나 돌려주고 아주 단단히 으름장을 놓을 생각이었다.
“……예쁘긴 하네.”
선물의 부적절함과는 별개로 아드리안이 선물한 꽃은 정말 예뻤다. 솔직히 취향에 딱 맞기도 했고.
장미를 안은 팔에 조금 힘을 준 엘레노어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싱그러운 장미 향기가 폐부를 가득 채우자 기분이 좋아졌다.
엘레노어가 보드라운 꽃잎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처음이네. 남자한테 꽃을 선물 받은 건.’
그 상대가 첫사랑이자 소꿉친구인 아드리안이라니. 엘레노어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한참을 달린 마차가 상단 사무실 앞에 멈춰 섰다.
머리에 쓴 보닛을 잠깐 매만진 엘레노어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성년이 된 이후로는 처음 방문하는 것이었다.
사무실 안은 무척이나 분주했다. 엘레노어는 기억보다 제법 많은 직원 수에 내심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체계가 잘 잡혀 있는지 인원이 많은데도 산만해 보이지 않았다.
“도와드릴까요?”
그때 수더분한 인상의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드리안을 만나러 왔는데요. 지금 있나요? 그러니까, 블레이크 소후작이요.”
그 순간 엘레노어 주변을 바쁘게 지나치던 사람들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사무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