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화 소꿉친구가 내게 집착한다(1)
외전 2. 아드리안 IF
소꿉친구를 짝사랑한다는 건 여러모로 곤란한 일이다. 평생을 오누이처럼 티격태격하며 살아온 사이라면 더욱 그렇다.
좋아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것도 정말이지 열심히.
하지만 감정이라는 것은 늘 예측했던 궤도를 벗어나 흐른다. 큐피드의 짓궂은 장난질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마음을 꼭꼭 숨기고 있을 때는 그럭저럭 평온했다. 제 마음이라는 변수만 제외한다면, 해묵은 우정은 언제나 견고한 산성처럼 제자리를 지키곤 했으므로.
“하……. 괜히 말했나.”
하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끝이었다. 아드리안은 취한 엘레노어에게 제 마음을 고백하고 말았다. 퍽 충동적인 일이었다.
“나도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야 할 거 아냐. 나도 벌써 서른…… 아니다, 여기선 내가 몇 살이더라?”
“싫어. 그 꼴은 못 봐.”
“왜?”
“왜냐하면……. 내가 너를 좋아하니까. 오래전부터 엘렌 너를, 좋아해 왔으니까.”
방금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던 아드리안의 얼굴이 조금 창백하게 질렸다. 흔들리는 마차 때문인지, 요동치는 감정 때문인지 속이 좋지 않았다.
“이렇게 하려던 얘기는 아니었어. 적어도 조금 더 근사한 타이밍을 기다릴 수는 있었을 텐데.”
아드리안이 반듯하게 정돈되어 있던 제 머리칼을 헤집어 놓았다.
아드리안의 속은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데, 그의 어깨에 기대어 곤히 잠든 엘레노어의 얼굴은 그저 평화롭기만 했다. 그리고 늘 그랬듯, 많이 예뻤다.
아드리안은 그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고. 이렇게 충동적으로 내던지지 않았다면 최소 몇 개월은 더 지지부진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오늘 좀 과음을 하기는 했지만…… 기억을 잃는 건 엘렌의 주사가 아니야. 그 직전까진 분명 깨어 있었으니, 들었을 확률이 더 높아.’
평소 엘레노어의 술버릇을 차근히 곱씹던 아드리안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날이 밝으면, 엘레노어와 이야기를 좀 나누어 보아야 할 것 같았다.
그때 마차가 코너를 돌아 익숙한 백작저의 정문을 통과했다. 아드리안은 엘레노어를 사뿐히 안아 들고 마차에서 내렸다.
백작저의 집사 알베르가 두 사람을 발견했다.
“알베르.”
“저런, 아가씨께서 과음하셨나 봅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후작님.”
“엘렌이 오늘 조금 무리하긴 했지. 방까지 내가 데려다줄 테니 그대는 신경 쓸 것 없어.”
아드리안이 엘레노어를 안아 들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다른 이였다면 놀라며 막아섰겠지만, 아드리안은 또 하나의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알베르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아드리안은 엘레노어를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푹신한 침대가 등에 닿자 엘레노어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아드리안은 그런 엘레노어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문밖에 서 있던 알베르가 친절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돌아가시기 전에 숙취에 좋은 차라도 한 잔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그래, 부탁해. 금방 내려갈게.”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베르의 뒤를 따라 내려가기 전, 아드리안은 다시 한번 잠든 엘레노어를 내려다보았다.
눈치라곤 눈을 씻고 봐도 없고, 방심하다가 여기저기 다치기 일쑤. 저와 아무 상관 없는 남의 일에도 펑펑 눈물을 쏟는 울보.
좀 바보 같을 만큼 순해서, 저러다 심보 못된 사람이라도 만나 호되게 당하면 어쩌나 걱정되는 친구.
그래서 더 신경이 쓰이고, 곁에 두고 싶고, 좋은 것만 듣고 볼 수 있게 해 주고 싶은 사람.
그리고, 쓸데없이 예쁜 녀석.
“……잘 자.”
아드리안이 허리를 굽혔다. 달콤한 향기가 포도주 향과 섞여 훅 풍겨왔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매끄러운 금발이 부드럽게 손가락을 휘감았다. 아드리안이 가볍게 그녀의 머리카락 위에 입을 맞췄다.
“내일 보자.”
그것만으로 심장이 웅웅 울렸다. 아드리안이 붉어진 얼굴로 방을 나섰다.
***
“으으……. 다신 과음 안 해.”
엘레노어는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붙잡고 일어났다. 물을 몇 잔이나 연거푸 마셨는데도 목이 탔다.
숙취로 괴로워하던 중, 손님이 찾아왔다. 아드리안이었다.
“지금은 일하고 있을 시간 아닌가? 무슨 일이지?”
머리를 슥슥 빗어 내린 엘레노어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계단을 내려갔다.
저 멀리 응접실에 아드리안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엘레노어의 걸음이 약간 더디어졌다.
‘뭔가…… 좀 낯설어.’
아드리안은 의아하게도 몹시 신경 쓴 티가 나는 차림이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창밖을 보고 있는 뒷모습에서 약간의 긴장이 느껴졌다.
그는 찻잔에는 손도 대지 않고, 이따금 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큼큼, 목을 가다듬기도 하고 셔츠 주름을 펴기도 했다.
평소와 조금 다른 아드리안의 모습에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 소꿉친구를 만나러 온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결연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드리안은 뜬금없는 말을 건넸다. 어제 제가 했던 말을 기억하냐는 것이었다.
“어제……?”
“응.”
아드리안이랑 무슨 얘기를 했었더라.
엘레노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희미한 기억을 하나씩 짚어 나갔다. 하지만 특별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얼마 전 디저트 메뉴를 고르다가 싸운 이후로 며칠을 꽁하니 보냈다. 생각해 보면 하찮기 짝이 없는 다툼이었지만, 상한 감정의 여운은 어제까지도 분명 남아 있었다.
“드와이트랑 무도회장 들어섰을 때, 인사했었잖아.”
“그랬지. 또?”
“음……. 내가 후작님 어디 가셨냐고 물어봤었고.”
엘레노어가 쥐어 짜내듯 대답을 내어놓았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그 대답에 별로 만족한 기색이 아니었다.
“이거 말고 더 있어? 난 기억이 안 나는데.”
아드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뭔가를 가늠해 보듯 엘레노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어쩐지 조금 불편해진 엘레노어가 슬며시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아드리안의 입술 사이로 야트막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기억이 안 난다는 거지. 그 이후로는, 하나도.”
의미심장한 목소리에 엘레노어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불안했다.
취중에 뭔가 실수라도 한 걸까? 어쩌면 술김에 쓸데없는 말들을 주절주절 늘어놓거나 오래전 가슴 한쪽에 숨겨 놓은 풋사랑의 흔적을 들켜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리안, 부탁인데…….”
잠시 고민하던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아드리안이 말해 보라는 듯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
“어제 일은, 그냥 없던 일로 생각해 줘. 미안하지만 정말 기억이 안 나거든. 혹시 내가 실수했다면 사과할게.”
그 순간 아드리안 주변의 공기가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무릎 위에 놓여 있던 그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없던 일로 하자고.”
“응.”
아드리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꼭 알겠다는 말이 아니더라도 뭔가 반응이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도 그랬다.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리안?”
***
없던 일로 하자는 엘레노어의 말에 아드리안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경험을 했다. 제일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다.
엘레노어의 얼굴은 평소보다 조금 굳어 있었고, 아까부터 자꾸만 그의 시선을 피했다. 지금까지는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걸까.’
아드리안의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그가 주먹을 힘껏 그러쥐자 손등에 핏줄이 잔뜩 불거졌다.
‘그냥 고개를 끄덕이자. 알겠다고 하고, 한 발짝 물러서자.’
머릿속에서 이성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그 목소리를 따르려던 때, 또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망치지 마. 제대로 마주해서 진심을 전할 기회잖아.’
아드리안의 안에서 격한 갈등이 일었다. 두 목소리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는, 후자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잠시 제 손끝을 내려다보던 그가 툭 하고 말문을 열었다.
“너는 실수하지 않았어, 엘렌.”
“응?”
“물론 좀 많이 취했고, 소소한 해프닝이 있기는 했지만……. 특별히 실수한 건 없었어.”
입을 여는 건 어려워도 말을 잇는 건 생각보다 수월했다. 아드리안은 마른 입안을 축이려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엘레노어가 혼란스러운 듯 물었다.
“그럼, 네가 실수한 거야?”
“아니, 나도 실수하지 않았어.”
맑은 초록색 눈동자에 당혹감이 어렸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내가 너에게 말했을 뿐이야.”
아드리안의 속눈썹이 가늘게 진동했다.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려놓은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잠기운이 다 가시지 않은 듯 조금 부었지만, 말갛고 고운 얼굴이 시야 가득 찼다.
아드리안은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는 눈동자부터, 창백하리만큼 흰 뺨, 긴장해서 약간 오므라든 입술까지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엘레노어가 꼴깍 마른침을 삼키는 게 보였다.
아드리안이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널 오래전부터 좋아해 왔다고.”
그 순간 엘레노어의 눈이 크게 뜨였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대답인 모양이었다. 엘레노어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가 희게 질리더니, 또다시 붉게 물들었다.
“너, 너 그거…….”
“진심이냐고? 응, 진심이야.”
“말도…….”
“말도 안 된다고?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말이 되더라고.”
깜짝 놀라 말을 더듬는 엘레노어와 달리, 아드리안은 빠르게 제 페이스를 찾아갔다. 엘레노어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너랑 나는 거의…….”
“너랑 나는 남매처럼 자란 거지, 진짜 남매는 아니잖아?”
“그……렇기는 한데.”
아드리안의 말에 엘레노어가 어깨를 툭 떨구었다.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보였다.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에게 약간의 틈을 내어주었다.
“네 마음 이해해. 나도 정말 오랫동안 혼란스러웠으니까.”
엘레노어가 귀를 쫑긋하는 게 느껴졌다.
“쉽지 않은 결정이라는 거 알아. 천천히 생각해도 돼.”
“……진짜?”
“응, 진짜.”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의 표정이 슬며시 부드럽게 녹았다.
“대신 마음의 준비 정도는 해 둬. 네가 고민하는 동안, 가만히 손 놓고 있겠다는 얘기는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