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화 조카들이 내게 집착한다(4)
시험이 끝나고, 축제가 시작되었다. 손꼽아 기다려 온 디데이였다.
축제를 앞두고 두 사람은 서로를 잠시 피했다. 고백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니 얼굴을 마주하기가 괜히 민망해진 탓이었다.
데미안은 본의 아니게 루카스와 시에나 사이의 전서구 역할을 하게 되었다.
루카스가 전해달래.
시에나가 전해달래.
데미안은 하루에도 몇 번씩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결국, 순하디순하던 데미안도 참지 못하고 짜증을 내고 말았다.
“오늘 저녁 아홉 시, 연구동 앞. 앞으로는 둘이 직접 만나서 해결해. 알았어?”
루카스가 깨갱 하며 데미안의 눈치를 살폈다.
“아, 알았어…….”
데미안은 이 유치한 사랑싸움이 하루빨리 그치기를 바랐다. 이젠 슬슬 모르는 척하는 것도 지겨워지고 있었다.
“아, 나 축제 때 동아리 일 거들기로 했어. 나 찾을 일 있으면 거기로 와.”
“알았어. 이따 보자, 데미.”
데미안이 루카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뒤 기숙사를 나섰다. 루카스는 거울 앞에 서서 다시 한번 제 모습을 점검했다.
머리도 단정하게 만지고, 교복 셔츠도 신경 써서 다려 입었다. 옆 방 친구가 쓰는 비누가 향이 좋길래, 며칠을 졸라서 빌리기도 했다.
“으윽, 긴장돼.”
루카스가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훅 덮었다. 어제는 밤잠도 꼬박 설쳤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원래라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축제를 즐겼겠지만, 이번만은 예외였다. 루카스는 시끌벅적한 학생들 틈에 섞여드는 대신, 기숙사에 남아 홀로 시간을 보냈다.
‘시에나는 학생회 일로 바쁠 테고, 데미안도 동아리 부스에 있을 테니까…….’
물론 루카스와 어울리기를 바라는 친구들은 아주 많았다. 일단 나가면 분명 여기저기서 알은체하는 이들이 있을 것도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루카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데미안과 시에나였다. 아마 데미안과 시에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함께 보낸 수년의 시간은 세 사람 사이의 유대를 돌처럼 굳게 했다.
‘오늘이 지나면, 조금 달라질 관계이지만.’
하늘이 어둑해지고, 루카스가 기숙사를 나섰다. 불꽃놀이 시간까지는 3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대부분의 부스가 하나둘 문을 닫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활발했다. 들뜬 학생들 사이를 걷고 있자니 루카스의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
그때, 루카스는 누군가와 강하게 부딪쳤다.
“윽.”
“헉! 죄송합니다!”
뒤늦게 차갑고 축축한 감각이 루카스를 휘감았다. 루카스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새하얀 셔츠가 붉은빛의 주스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아…….”
신입생으로 보이는 남학생이 안절부절못하며 제 주머니를 더듬었다. 남은 음료를 치우다가 중심을 잃은 모양이었다. 루카스는 황망한 시선으로 엉망이 된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
남학생이 재빨리 손수건을 건넸지만, 손수건으로 닦아낼수록 얼룩은 흉하게 번져만 갔다. 낭패였다. 루카스의 표정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선배님!”
새하얗게 질린 채 안절부절못하는 신입생은 너무나도 앳되어 보였다. 루카스는 슬며시 올라오던 짜증을 내리누르고, 그를 향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어차피 화를 낸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괜찮아. 실수였잖아.”
“하지만 옷이 엉망이 되었는데…….”
“세탁하면 될 거야. 정말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고 남은 축제 재밌게 보내.”
루카스는 신입생의 등을 툭툭 두드려 준 뒤 자리를 떴다.
“그런데 큰일이네……. 갈아입자니 늦을 것 같은데.”
기숙사까지 갔다 온다면, 아무리 서둘러도 약속 시간에 맞추지 못할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루카스가 약속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운동장에서 불꽃놀이가 곧 시작될 것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에나와 함께 불꽃놀이를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하……. 이런 꼴일 줄은 몰랐는데.”
루카스는 조금이라도 더 말끔한 모습으로 시에나를 맞기 위해 애썼다. 뜻대로 잘 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시도는 해야 했다.
“루크.”
그때 뒤에서 시에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카스가 재빨리 빙글 돌아섰다.
“너 꼴이 왜 그래?”
“야, 너 무슨 일이야?”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향해 삿대질했다. 서로를 보는 시선에 황당함이 깃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루카스는 붉은 음료를 뒤집어쓴 차림이었고, 시에나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거뭇거뭇한 검댕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약학부 부스를 구경하러 갔는데, 뭔가 잘못되었는지 플라스크가 폭발했지 뭐야.”
폭발이라는 말에 루카스가 다급하게 물었다.
“위험했던 거 아냐?”
“아, 그렇진 않았어. 재나 날리고 소리나 요란했지…….”
시에나의 말에도 루카스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루카스가 시에나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봤다.
“진짜 괜찮다니까.”
시에나가 슬쩍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넌 왜 그러고 있어?”
“누구랑 좀 부딪쳐서.”
루카스가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런 모습으로 하고 싶은 말은 아니었는데, 옷을 갈아입고 오기엔 좀 늦은 것 같아서.”
“나도 그래서 그냥 왔어.”
시에나가 제 치맛자락에 묻은 재를 탈탈 털며 말했다. 어이가 없어 입술 사이로 자꾸만 웃음이 샜다.
두 사람은 엉망인 서로를 보며 작게 킬킬거렸다. 내내 가슴을 옥죄던 긴장감이 조금씩 녹아 흘러내렸다.
시에나를 빤히 보던 루카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가 데미한테 말했다던데. 나랑 할 이야기가 있다고.”
“응.”
“나도, 너한테 할 얘기가 있거든.”
두 사람은 약간의 어색함을 느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루카스가 물었다.
“네가 먼저 말할래? 내가 먼저 할까?”
새빨갛게 물든 루카스의 귀를 빤히 보던 시에나가 씩 웃었다.
“동시에 할래?”
“동시에?”
루카스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였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에 환한 빛이 떠올랐다. 이윽고 크고 작은 불꽃들이 어둑한 하늘을 수놓았다.
루카스와 시에나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하늘이 잘 보이는 자리를 찾던 두 사람의 몸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예쁘다, 그치.”
“응.”
불꽃이 터지는 소리, 학생들이 환호하는 소리, 교사들이 호각을 불어 학생들을 지도하는 소리가 뒤섞여 귀를 먹먹하게 했다.
하지만 쿵쿵 힘차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그 모든 소음을 덮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선이 서서히 내려와 서로를 향했다.
루카스는 꼭 거울을 마주 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순간 저를 바라보는 시에나의 눈빛은, 제가 그녀를 보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입술이 스르륵 열렸다.
“좋아해.”
“나 너를 좋아해.”
타이밍을 잴 것도 없었다. 어떤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놀라지는 않을까, 당황해 멀어지지는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
시에나와 루카스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져 갔다. 불꽃이 환하게 밝힌 여름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활짝 웃었다.
“이 말이 하고 싶었어. 오래전부터.”
잊지 못할 하루였다.
***
“아니, 그건 그냥 별 뜻 없이 한 말이라니까? 애초에 너한테 한 말도 아니었다고.”
“뜻도 없는 말을 왜 하는데? 나한테 한 말 아니면 다야?”
“그래! 다다! 어쩔래!”
“잡히면 너 가만 안 둬, 진짜!”
데미안은 등 뒤에서 루카스와 시에나가 티격태격하는 소리를 들으며 느릿느릿 걸음을 뗐다. 워낙 자주 들었더니 이제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처음에야 걱정도 하고 중재도 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곧 연인 사이에 끼는 것이 얼마나 무용한 일인지에 대해 깨달았다.
온갖 유치찬란한 이유로 싸워대다가도 30분 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팔짱을 낄 것이 뻔했다. 데미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꺄아아!”
“기분 조아!”
하늘을 찌르는 고음이 데미안의 귓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데미안이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테오, 에블린. 다치지 않게 조심해야 해.”
“아라떠!”
데미안은 쌍둥이와 함께 황궁으로 나들이를 나왔다. 엘레노어는 황후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뜬 상황이었다.
황궁 소풍이라니, 생각할수록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즈멜과 루카스의 제안이 워낙 끈질겨 거절할 수가 없었다.
드넓은 황궁의 정원은 쌍둥이에게는 별천지였다. 테오와 에블린은 잔디밭 위에 풀어둔 강아지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에나랑 루크를 믿은 내가 잘못이지…….’
세 사람이나 있으니 아기 둘 정도 돌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라 방심했다. 하지만 친구라는 녀석들은 사랑싸움에 열을 올리느라 주변은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에블린, 멀리 가면 안 돼. 테오! 그거 지지야. 내려놔.”
데미안은 고무공처럼 이리저리 튀는 조카들을 살피며 구슬땀을 흘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데미안은 엘레노어가 돌아올 때까지 쌍둥이를 품에 꼭 안고 있기로 마음먹었다. 데미안이 제 앞을 지나쳐 달려가던 테오를 번쩍 들어 올렸다.
“꺄아!”
“삼촌이 테오 잡았다.”
“잡아따!”
테오의 통통한 팔이 데미안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아기 냄새가 폐부를 채우자 데미안의 입가가 부드럽게 녹았다.
“이젠 에블린을 잡으러 갈 차례인데…….”
데미안의 말에 에블린의 뜀박질이 조금 더 빨라졌다. 동그란 뒤통수에서 잡히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퍽.
그때였다.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며 달리던 에블린은, 제 쪽으로 다가오는 사람과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제법 세게 받힌 탓에 에블린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에블린! 정말 죄송합니다, 영애.”
깜짝 놀란 데미안은 루카스에게 테오를 맡기고는 에블린을 향해 달려갔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제가 신경 써서 돌보아야 했는데…….”
데미안은 다가가며 에블린이 부딪친 귀족 영애에게 먼저 사과를 건넸다.
“전 괜찮아요.”
그녀가 흘러내린 은발을 부드럽게 쓸어올렸다. 약간 앳된 목소리로 미루어 볼 때 데미안의 또래인 것 같았다.
“괜찮니, 아가?”
그녀가 쪼그려 앉아 에블린과 눈을 맞췄다. 에블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친 데는 없어?”
에블린이 고개를 저었다. 데미안이 에블린을 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해야지.”
“재송함미다…….”
“괜찮아. 나도 더 신경 쓰며 걸었어야 했는데 미안해, 아가야.”
에블린의 치마에 묻은 잔디를 톡톡 털어내 준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매끄러운 은발을 쓸어넘기며 데미안과 눈을 맞췄다.
“오라버니 되시나요? 동생분이 정말 사랑스럽네요.”
“……조카입니다.”
“아, 삼촌분이시구나.”
에메랄드색과 레몬색이 오묘하게 섞인 눈동자를 본 순간, 데미안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미약한 어지럼증에 데미안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여자가 에블린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물었다.
“예쁜 조카분 이름을 여쭤봐도 될까요?”
“에블린.”
“예쁜 이름이네요.”
잠시 머뭇거리던 데미안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실례가 아니라면 영애의 이름도 여쭤보고 싶은데.”
“아, 저는 다프네 캐스턴이라고 해요.”
다프네.
데미안은 입안에서 그녀의 이름을 가만히 굴려 보았다. 어쩐지 혀끝이 달았다.
데미안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예쁜 이름이네요.”
데미안의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었다.
계절의 이름은, 첫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