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 외전-3화 (154/168)


외전 3화 조카들이 내게 집착한다(3)






제레미 하르엘. 거슬리는 녀석.


턱을 괸 채 복도 쪽 창을 응시하는 루카스의 얼굴이 부루퉁했다. 복도에서 시에나와 제레미 하르엘이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무슨 얘기를 저렇게 오래 하는 거야?”


루카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옆에 앉아 묵묵히 공부하던 데미안이 한 마디를 툭 건넸다.


“에나 나간 지 2분도 채 안 됐어.”


“그러니까. 용건만 간단히 하면 10초면 충분할 텐데.”


“반장, 부반장이잖아. 의논할 게 많겠지.”


데미안의 논리적인 대답은 루카스의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루카스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제레미의 희멀건 얼굴을 노려보았다.


제레미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입학식 날부터였다.




“안녕. 시험 날 우리 같은 고사장이었는데, 기억해?”


“미안. 그날 정신이 없어서 주변은 신경 못 썼어.”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같은 반이던데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나는 제레미 하르엘이야.”




루카스와 데미안도 같은 고사장이었는데, 시에나만 콕 집어 인사를 건네는 건 뭐란 말인가. 굳이 친하게 지내자며 손을 내미는 것도 어쩐지 눈에 거슬렸다.


제레미는 곱슬거리는 붉은 머리카락과 연갈색 눈동자가 순한 인상을 풍기는 녀석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솔직히 나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루카스는 제레미를 크게 견제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시에나의 심미안은 몹시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지금껏 매일 보던 얼굴이 황태자, 발렌타인 공작, 블레이크 소후작인데 평범한 얼굴이 눈에 찰 리 없었다.


게다가 시에나는 몇 번이고 말하곤 했다. 세 사람 중에 본인 취향에 가장 가까운 얼굴은 황태자인 이즈멜이라고 말이다.


그것은 루카스에게 제법 큰 자신감을 선사했다. 어쨌든 제 얼굴도 형인 이즈멜을 꽤 닮았으니까.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제레미의 성장 속도가 루카스를 훌쩍 넘어선 것이다. 루카스가 흘낏 보니 저보다 반 뼘은 더 큰 것 같았다.


“오늘부터 우유를 한 통씩 마시든지 해야지…….”


운동장도 열 바퀴씩 뛸 거야.


나란히 선 제레미와 시에나를 보던 루카스가 속으로 다짐했다.


그때 시선을 느꼈는지 시에나가 고개를 돌렸다.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홱 고개를 돌렸다. 괜히 민망해 귀에서 열이 났다.




***




시험 기간이 되었다.


시에나와 데미안은 틈이 날 때마다 도서관에 가서 시험공부에 매달렸다. 루카스는 공부에 그다지 뜻을 두지는 않았으나, 시에나와 데미안을 따라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도서관 붙박이가 되고 말았다.


‘지루해.’


루카스는 두꺼운 교과서를 뒤적거리며 쩌억 하고 하품을 했다. 엘레노어와 함께 공부하며 잠깐 열의를 불태웠던 것을 제외하면, 루카스는 공부와 상성이 맞지 않았다.


‘적당히 F만 면해야지.’


루카스가 무거워진 눈꺼풀을 슥슥 비볐다. 그때,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에나, 혹시 이 문제 좀 설명해 줄 수 있을까? 혼자 붙잡고 있었는데 이해가 안 돼서.”


제레미 하르엘이 뒷덜미를 긁적거리며 시에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루카스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루카스가 데미안의 팔을 톡톡 건드렸다.


“데미.”


“왜.”


“네가 제레미한테 설명해 주면 안 돼?”


데미안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한테 물은 것도 아닌데, 굳이?”


“응, 굳이.”


데미안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책장을 넘겼다. 데미안은 루카스와 시에나, 둘 사이의 관계에 정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때 제레미가 책의 한 구절을 가리키며 몸을 숙였다. 시에나와 제레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참다못한 루카스가 데미안에게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으으. 한 달 동안 기숙사 방 청소 내가 할게.”


그제야 데미안이 고개를 들었다. 흠, 하며 잠시 고민하던 데미안이 제레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레미.”


“왜, 데미안?”


“그 문제, 정리해 둔 거 있어.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제레미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좋겠다. 나보다는 데미안이 설명을 잘하거든.”


시에나가 제레미의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 제레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데미안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루카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시에나에게 말을 걸었다.


“야.”


“뭐.”


일단 부르긴 했는데,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루카스는 제가 대충 펼쳐둔 책을 앞으로 쭉 밀며 말했다.


“이것 좀 가르쳐 줘.”


책을 잠시 내려다보던 시에나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이건 시험 범위도 아니잖아.”


“아.”


루카스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그럼 시험 범위가 어딘지부터 가르쳐 줘. 그럼 되겠네.”


루카스가 능글거리며 씩 웃었다. 그런 루카스를 보는 시에나의 얼굴이 서서히 발갛게 달아올랐다.


“내가 너 때문에 진짜 못 살아! 전하께 편지를 쓰든지 해야지……. 유급하고 정신 차릴래?”


시에나가 제 옆자리를 탁탁 두드리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내 옆에 딱 붙어 앉아. 너 오늘 시험공부 끝내기 전엔 어림없을 줄 알아!”


“네가 선생님도 아니면서.”


“시끄러워.”


찰싹.


시에나가 루카스의 손등을 세게 내리쳤다. 제법 얼얼했지만 루카스의 입가에선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기어이 시에나의 옆자리를 쟁취해 낸 루카스가 속으로 다짐했다.


‘이번 축제에선 꼭 고백해야지.’




***




미쳤군.


처음 루카스를 향한 마음을 눈치채자마자 시에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세상에 많고 많은 이들 중에 하필 루카스라니! 차라리 데미안이라면 나름대로 납득을 했을 것이다.


아, 물론 루카스의 얼굴이 취향이기는 하다.


통통하던 젖살이 빠지면서, 루카스는 반짝거리는 제 형을 점점 닮아 갔다. 굳이 비교한다면 루카스 쪽이 훨씬 순한 인상이기는 하지만, 우아하면서 섬세한 얼굴선은 찍어낸 듯 같았다.


“아, 심심해.”


“너 숙제는 다 하고 그러고 있는 거야?”


“숙제? 숙제가 있었어?”


“내 이럴 줄 알았어. 까먹을 것 같으면 좀 적으래도!”


열여섯이 된 루카스는 여전히 철딱서니 없고, 하나부터 열까지 손이 가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시에나는 루카스가 제게 기대오는 것이 싫지 않았다.


“루카스! 오늘 저녁에 뭐 해?”


“나? 딱히 계획 없는데.”


“공이나 차러 갈래?”


“그래, 그러자.”


“뭐? 루카스 너 우리 동아리 구경 오기로 했었잖아.”


“아, 맞다. 내일 꼭 갈게!”


문제가 있다면, 루카스가 쓸데없이 인기가 많았다는 거다. 그것도 남녀를 불문하고.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공부는 좀 못해도, 신분이며 외모며 빠지는 데가 하나도 없었다. 모난 데 없이 둥글둥글한 성격까지 갖춘 루카스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넘쳤다.


곰곰이 고민한 시에나는 작은 꾀를 냈다.


“데미.”


“응?”


“웃어 봐.”


뜬금없는 시에나의 말에 데미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시에나가 진지한 표정으로 독촉하자, 데미안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흐음. 좀 어색하긴 한데, 계속 웃다 보면 자연스러워지겠지.”


시에나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시에나는 데미안을 아카데미 최고의 인기인으로 만들어 놓겠다 다짐했다. 그리고 그것은 딱 세 가지 변화만으로 현실이 되었다.




1. 평소에도 웃는 얼굴 하기


2. 교내 동아리 가입하기


3. 눈 마주치면 인사하기




그동안 눈치만 살피던 학생들이 앞다퉈 데미안에게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것도 무척이나 열성적으로.


내성적이고 표정 변화가 적어 다가서기 힘들었을 뿐, 데미안은 이미 많은 학생의 호감을 사고 있었던 것이다.


“데미안, 오늘 수업 끝나고 뭐 해? 나랑…….”


“전에 보고 싶다던 책 구해 뒀어. 점심시간에 교실 앞에서 보자.”


“이거 내가 직접 만든 쿠키인데, 네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 대부분이 여학생이었다는 거다. 루카스에게 슬쩍 관심을 보이던 여학생들도 다정하고 섬세한 데미안의 매력에 푹 빠져 버리고 말았다.


데미안은 갑작스러운 관심에 당황한 것 같았지만, 이내 적응하고 새로운 친구들과 조금씩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시에나는 내년엔 데미안을 학생회장으로 만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




“부반장, 축제 때문에 그런데 잠깐 복도에서 얘기 좀 할까?”


데미안이나 루카스 정도는 아니었지만, 시에나에게 호감을 표현하는 남학생들도 왕왕 있었다. 그중 가장 적극적인 사람을 꼽으라면, 제레미 하르엘이었다.


제레미는 객관적으로 착하고 괜찮은 아이였다. 그럭저럭 잘생겼다고 볼 수 있는 외모, 훤칠한 키, 똑똑한 머리까지. 하지만 시에나는 이상하게 그에게 별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래, 그러지 뭐.”


드르륵.


시에나가 의자를 끌며 일어나자 루카스가 그녀의 손목을 턱 붙잡았다.


“왜?”


시에나가 묻자 루카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냐.”


시에나의 눈이 바늘처럼 가늘어졌다. 루카스는 이상하게 제레미만 엮이면 평소와 다른 반응을 보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시에나는 가슴 한구석이 이상하게 간지러웠다. 누군가 부드러운 깃털로 심장을 슬쩍슬쩍 건드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 반 부스 말인데…….”


시에나는 복도에 나와 제레미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힐끔힐끔 교실 창을 곁눈질했다. 루카스가 불퉁한 얼굴로 제레미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루 정도만 시간을 내면 될 것 같은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응, 동의해. 일단 시험부터 다 치고 준비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아.”


“그럼 이 안건은 시험 이후로 미루고…….”


제레미가 슬쩍 뺨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축제 날, 뭐 할지 생각해 봤어? 저녁에 불꽃놀이도 한다던데.”


“불꽃놀이?”


불꽃놀이라면 루카스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이었다. 무심코 교실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린 시에나는, 자신을 응시하는 자주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루카스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가 홱 하고 티 나게 고개를 돌렸다. 귓바퀴와 목덜미가 붉어진 것이 보였다.


‘귀엽다.’


시에나는 루카스의 마음을 한참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워낙 티가 나 모르기도 힘들었다.


그럼에도 시에나는 모르는 척, 애써 시치미를 떼며 마음을 숨겼다.


친구로 지내는 지금도 충분히 좋아서. 혹시 틀어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어째서인지 관계를 재정립한다는 게 조금은 쑥스럽게 느껴져서.


“응, 그래서 말인데. 혹시 그날 특별한 계획 없으면…….”


“있어.”


하지만 이제는 알고 싶어졌다.


“미안, 제레미. 그날 나 할 일이 있어.”


“그래?”


루카스도, 눈치채고 있을까?


“응. 중요한 일이야.”


후덥지근하던 공기에 선선함이 조금씩 섞이어 드는 계절. 지긋지긋한 시험이 끝나고 축제가 시작되는 날. 색색의 불꽃이 밤하늘을 화려하게 물들인 순간.


시에나는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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