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 외전-2화 (153/168)

외전 2화 조카들이 내게 집착한다(2)

테오와 에블린은 모두의 사랑 속에 무럭무럭 자라났다.

결 좋은 까만 머리에 선명한 푸른색 눈동자, 눈처럼 새하얀 피부까지. 누가 보아도 카이델을 쏙 빼닮은 아이들이었다. 보는 사람마다 어쩜 이리도 아빠 판박이냐며 깜짝 놀라곤 했다.

반짝거리는 외모가 카이델의 유전자라면, 순하고 밝은 성격은 엘레노어에게서 그대로 물려받은 듯했다. 애교는 또 얼마나 많은지, 마주치는 사람들을 죄다 흐물흐물 녹아내리게 할 정도였다.

그런 테오와 에블린에게는 확고한 최애가 있었으니, 바로 데미안이었다.

마차가 천천히 멈춰 서고, 잘생긴 소년으로 자라난 데미안이 마차에서 내렸다. 그 순간 계단에 쪼그려 앉아 있던 테오와 에블린이 데미안을 향해 마구 달려가기 시작했다.

“삼초오온!”

“어어, 넘어지겠다. 뛰지 말고.”

데미안이 허리를 숙여 테오와 에블린을 번쩍 안아 들었다. 이제는 제법 능숙한 모습이었다.

“꺄아!”

“에블린, 테오, 잘 있었어?”

테오와 에블린의 뺨에 쪽쪽, 번갈아 입을 맞춰 준 데미안이 아이들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엘레노어가 웃으며 다가와 데미안을 맞아주었다.

“어서 와, 데미. 요 녀석들은 며칠 전부터 목 빠지게 너만 기다렸단다. 오늘 아침부터 얼마나 수선이었는지…….”

“마쟈!”

데미안의 다리를 꽉 끌어안은 에블린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저도 테오랑 에블린 보고 싶어서 혼났는걸요.”

데미안이 꼬물꼬물 다리에 엉겨 붙는 쌍둥이를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걸음마도 떼지 못하던 때부터 쌍둥이는 유난히 데미안을 잘 따랐다. 엘레노어가 데미안을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방학마다 아기들이랑 놀아 주느라 네 시간도 잘 못 쓰고…….”

“저는 즐겁기만 한데요, 뭐. 테오랑 에블린이 저랑 놀아 주는 거예요.”

“마쟈!”

이번에는 테오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테오는 삼촌 조아.”

“삼촌은 에블린 조아?”

에블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데미안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복숭앗빛으로 물든 뺨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데미안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삼촌은 에블린이 너무 좋아.”

“테오는?”

“테오도 당연히 좋아하지.”

그러자 쌍둥이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엘레노어가 데미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어서 들어가자, 데미. 카이델도 금방 올 거야.”

“아, 에나랑 루크가 내일 놀러 오겠대요.”

“그래? 맛있는 거 준비해 둬야겠네. 데미는 뭐 먹고 싶어?”

데미안이 재잘재잘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걸음을 뗐다. 조금 더 시끄럽고, 조금 더 따뜻해진 가족에게로.

***

공작저는 평소보다 배로 시끌벅적했다. 시에나와 루카스가 놀러 왔기 때문이다. 쌍둥이에게 선물할 장난감들을 한 아름씩 들고.

“이것도 가지고 놀아 봐, 에블린.”

“이건 어때? 반짝반짝 예쁘지!”

푹신푹신한 응접실 러그 위, 시에나와 루카스가 배를 깔고 누워 장난감을 흔들어댔다. 제 방에 있는 것처럼 편안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테오와 에블린이 자그마한 손으로 곰 인형의 뱃살을 주물럭거리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보고만 있어도 심장이 흐물흐물해질 만큼 귀여웠다.

루카스가 손을 뻗어 에블린의 통통한 뺨을 콕 찔러 보았다. 말랑한 감각이 손가락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갔다. 루카스가 부르르 몸을 떨며 바닥에 엎어졌다.

“아, 심장 아파.”

시에나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테오를 향해 물었다.

“테오. 예쁜 누나가 좋아, 여기 이 못생긴 형아가 좋아?”

“누가 못생겼다고 그래?”

발끈하던 루카스도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으로 테오를 쳐다보았다.

테오의 커다랗고 맑은 눈동자가 루카스와 시에나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눈썹을 살짝 찡그리고 진지하게 고민하던 테오가 조심스럽게 시에나를 가리켰다.

“우음……. 누나.”

“우리 테오는 똑똑하기도 하지!”

시에나는 활짝 웃으며 테오를 꽉 끌어안았다. 용기를 얻은 시에나가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럼 누나가 좋아, 데미 삼촌이 좋아?”

“삼촌!”

1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누나가 장난감 이만큼 사 왔는데? 응?”

“삼촌이 조아.”

시에나의 어필에도 테오의 선택은 변하지 않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장난감을 정리하던 데미안이 씩 웃었다.

“그럼 에블린은?”

“데미 삼촌 조아.”

역시나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응접실로 들어서던 카이델이 피식 웃었다. 그가 소파에 털썩 앉으며 조언했다.

“거기까지는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시에나. 나도 데미안은 못 이길걸.”

“데미는 못 이기죠.”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뒤를 따라 들어오며 동의를 표했다. 엘레노어가 자연스럽게 카이델의 옆에 앉으며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다들 바닥에서 뭐 해? 안 불편해?”

“네! 편해요.”

“그래, 뭐. 너희만 편하면 됐지.”

아이라 하기에 이미 훌쩍 자라 버렸지만, 엘레노어의 눈에는 한없이 어리고 귀엽게만 보이는 세 사람이었다. 그것을 알아서일까, 시에나와 루카스는 엘레노어 앞에서만은 마음껏 응석을 부렸다.

“왜 테오와 에블린은 데미만 좋아할까요?”

엘레노어가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 아가들이 조금 더 크거든 물어보자.”

그런 엘레노어를 응석받이로 만드는 이가 있었으니, 카이델이었다.

“아 해.”

“아.”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입안에 포도알을 쏙 넣어 주었다. 씨를 뱉기 좋도록 손바닥을 가져다 대는 것까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카이델은 검날을 고르듯 진지한 눈빛으로 포도알을 골랐다. 가장 잘 익은 포도, 그중에서도 가장 예쁜 알만이 엘레노어의 입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빤히 보던 시에나가 루카스를 팔꿈치로 툭 치며 말했다.

“저런 모습도 몇 년을 보니 익숙해진다, 그치?”

“그러니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진짜였어.”

시에나와 루카스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이야기를 들은 엘레노어가 소리 내 웃었다.

“예전엔 카이델이 내 볼에 뽀뽀만 해도 울었으면서.”

엘레노어의 말에 루카스가 얼른 반박했다.

“그땐 어렸잖아요.”

“맞아요. 꼬맹이 시절 이야기인데.”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대며 그날을 회상했다.

갑작스럽게 뺨에 닿은 온기에 심장이 내려앉았던, 당황해서 새빨개진 카이델의 얼굴이 내내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던 날.

“아, 너희 그때 정말 귀여웠는데. 물론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귀여웠지. 앙큼하고.”

카이델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틀어 카이델과 눈을 맞추며 물었다.

“그런데 그때, 뽀뽀한 거 진짜 실수였어요?”

“응.”

“아니, 어쩌다가요?”

“잠시 넋을 놓고 있었거든. 그대가 너무 예뻐 보여서.”

민망함에 엘레노어의 얼굴이 붉어졌다. 달아오른 뺨을 식히며 지난 추억을 되짚던 엘레노어가 눈을 반짝였다. 갑자기 떠오른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말 안 해 줄 거예요? 어떻게 해결한 건지?”

엘레노어의 질문에 카이델은 답지 않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푸른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이내 평정을 되찾은 그가 엘레노어의 코끝을 톡 건드리며 미소 지었다.

“응, 비밀이야.”

“부부 사이에 그렇게 비밀 둬도 되는 거예요? 이젠 가르쳐 줘요.”

엘레노어가 재차 졸랐지만, 카이델은 퍽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알면 다친다니까.”

엘레노어가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였다면 진작 털어놓고도 남았을 텐데, 이상하게 강경한 태도였다.

“언젠간 꼭 알아낼 거예요.”

“그래. 노력해 봐. 기대할게.”

카이델이 눈을 휘며 웃자 엘레노어가 입술을 삐죽였다. 엘레노어가 작게 툴툴거렸다.

“못할 것 같아요? 당신 약점은 이제 훤히 꿰고 있거든요. 작정하고 알아내려고 하면 10분도 못 버틸걸.”

그 순간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던 카이델의 손이 멈췄다. 엘레노어를 빤히 보던 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카이델이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서운데.”

그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솟았다. 카이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그는 금사처럼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았다가 풀었다가, 또 귓불을 톡 건드렸다가 하며 손장난을 했다.

아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평범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방 안의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잠시 고민하던 데미안이 에블린을 안아 들며 말했다.

“우리는 내 방으로 가자. 에블린이랑 테오 데리고.”

“왜? 그냥 여기 있자.”

고무 공을 통통 튀기던 루카스가 천진하게 물었다. 데미안이 가볍게 턱짓해 그를 재촉했다.

“그런 게 있어. 빨리 일어나.”

***

꺄아아!

데미안의 방에서는 천장을 들썩거리게 하는 고음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시에나와 루카스, 데미안은 온몸을 바쳐 쌍둥이를 즐겁게 해 주었다.

잡기 놀이, 숨바꼭질, 인형 놀이, 역할 놀이…….

힘들지만 테오와 에블린이 까르르 웃으면 그만큼 뿌듯한 것이 또 없었다. 분명 든든하게 저녁을 먹었는데, 쌍둥이와 한바탕 놀고 나니 다시금 허기가 졌다.

“아, 목마르다.”

“놀아 주는 것도 정말 보통 일이 아니구나. 데미, 너도 힘들겠다.”

끝내주는 놀이 시간을 보낸 아기들은 제 흥에 지쳐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시에나와 루카스는 침대 위에 불가사리처럼 누워 잠든 아기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래도 진짜 귀엽다, 그치?”

루카스의 말에 시에나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볼 좀 봐……. 찔러 보고 싶다.”

“배도 봐. 동그래.”

“만져 보고 싶은데. 건드리면 깨겠지?”

귀여워.

볼록한 올챙이배를 보던 루카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함께 웃던 시에나가 턱을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공작님을 완전히 빼다 박았다고 생각했는데, 잘 때 얼굴은 선생님을 더 닮은 것 같아. 신기하다.”

“난 데미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어, 그러고 보니 그러네.”

그때, 책상 앞에 앉아 차분하게 책장을 넘기던 데미안이 불쑥 물었다.

“너희 근데, 선생님한테 말 안 할 거야?”

“뭘?”

루카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시에나는 데미안의 말을 곧바로 알아채고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어울리지 않게 뺨도 발갛게 상기되었다.

그런 시에나와 루카스를 번갈아 보던 데미안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알면서 잡아떼기는. 둘이 사귀는 것 말이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