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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 외전-1화 (152/168)

외전 1화 조카들이 내게 집착한다(1)

데미안의 나이 열넷. 조카가 생겼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조카‘들’이 생겼다. 엘레노어가 쌍둥이를 임신한 것이다. 제국에서 손꼽는 명의들이 그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그 소식이 사교계에 전해진 뒤, 벨리움이 얼마나 떠들썩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카이델과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유난을 떨었는지도.

방학이 되어 공작저로 돌아가자, 만삭이 된 엘레노어가 현관에서 데미안을 맞았다.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린 데미안이 그런 엘레노어를 향해 힘차게 달려갔다.

“선생님!”

“데미, 어서 와. 그런데 호칭은 아직도 선생님이야?”

엘레노어가 데미안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흐트러뜨리며 웃었다. 그러자 데미안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형수님.”

몇 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데미안은 엘레노어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곤 했다. 형수님이라는 호칭이 간지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엘레노어가 데미안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가 놓으며 말했다.

“정말 귀여워 죽겠네. 어서 들어가자. 배 많이 고프지?”

“네. 형은요?”

“오늘 일찍 퇴근하겠대. 저녁은 같이 먹자.”

카이델과 엘레노어가 결혼한 이후로 공작저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조용하던 저택에 웃음소리가 넘쳤고, 서늘하던 복도에는 훈기가 돌았다.

집에 돌아오면 따뜻하게 맞아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시시콜콜한 일상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데미안은 그 변화가 너무 좋았다. 늘 비어 있던 엄마의 자리가 채워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엘레노어와 데미안은 오붓한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응접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데미안이 엘레노어를 보며 말했다.

“배가 엄청 많이 커졌어요.”

“그렇지? 예정대로라면 다다음 주에는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다다음주…….”

데미안이 신기하다는 듯 엘레노어의 배를 빤히 쳐다보았다. 엘레노어가 생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데미는 벌써 삼촌이 되는 거네.”

삼촌이라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데미안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형과 선생님이 결혼한 것도, 두 사람이 누구보다 행복하게 사는 것도, 둘 사이에 아기가 생긴 것도 다 좋았다. 두 사람 중 누구를 닮든 아기는 분명 똑똑하고 사랑스러울 것이다.

‘다 좋은데…….’

행복한 가족의 풍경을 그려 보던 데미안의 손끝이 움찔했다.

엘레노어와 카이델, 둘을 닮은 아기들. 어떻게 상상해도 완벽한 그림이었다. 데미안은 그 그림 속 어디에 스스로를 그려 넣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물론 데미안도 두 사람이 자신을 내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하지만 아기들이 태어나고 나면 두 사람의 관심은 그 아이들에게로 향하게 될 것이었다. 데미안은 그 사실이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그건 너무 당연한 거야. 그런 걸로 서운해하면 안 돼. 그건 욕심이잖아. 나는 이제 어리지도 않은걸.’

데미안의 보랏빛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태어날 아기들을 얼른 만나고 싶은 마음만큼이나 불안한 감정이 크다니. 데미안은 내심 죄책감을 느꼈다.

“데미, 표정이 어두운데? 괜찮아?”

데미안의 낯빛이 약간 흐려진 것을 알아챈 엘레노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데미안이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하긴 마차를 오래 탔을 테니 당연히 피곤하겠구나. 올라가서 일단 한숨 푹 자. 카이델 퇴근하면 깨워 줄게. 같이 저녁도 먹고 산책도 하자. 어때?”

엘레노어의 제안에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가 끙차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밀린 이야기도 그때 나누자. 에나랑 루크가 어떻게 지내는지도 정말 궁금했거든.”

“다들 같이 오겠다고 했는데, 말렸어요. 선생님 귀찮게 할 것 같아서.”

“우리 데미는 어쩜 이렇게 속도 깊을까. 응?”

엘레노어가 동그란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표정에서 숨길 수 없는 행복이 흠뻑 묻어났다.

“요 녀석들도 데미 너처럼 예쁘고 착했으면 좋겠다.”

데미안은 말없이 엘레노어를 보며 마주 웃었다.

***

해도 뜨지 않은 꼭두새벽, 공작저에 있는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쌍둥이가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할 날이 온 것이다.

밤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진통은 몇 시간째 이어지고 있었다.

데미안은 복도에 놓인 의자에 앉아 두 손을 꼭 모아 잡고 있었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비명에 데미안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선생님 괜찮겠지? 괜찮아야 하는데…….’

데미안의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출산은 위험한 일이었다. 어머니를 잃었던 것처럼 엘레노어마저 잃게 된다면, 그땐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초췌한 몰골의 카이델이 걸어 나왔다.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이 창백했다.

데미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선생님은요?”

“잘 견뎌 주고 있어. 산파 말로는 곧 나올 거라는데…….”

카이델이 데미안의 어깨를 가볍게 붙잡고 자리에 도로 앉혔다.

“그런데 왜 밖으로 나왔어요?”

카이델이 데미안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가 도드라진 눈썹뼈를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엘레노어가 부탁했어.”

“뭘요?”

“자기는 괜찮으니 네 곁에 있어 달라고.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네게 계속 말해 달라더군.”

데미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선생님이요?”

데미안의 코끝이 찡하게 울렸다. 엘레노어가 변할까 봐 불안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무색해졌다. 다 쓸데없는 고민이었던 거다. 데미안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엘레노어는 괜찮을 거다, 데미.”

카이델이 까슬한 입술을 뗐다. 그의 목소리 끝은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괜찮을 거야.”

카이델은 주문처럼 그 말을 반복하며 데미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떨리는 목소리에서 그가 잔뜩 긴장하고 있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데미안이 카이델을 와락 껴안으며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심장이 쿵쿵, 불안하게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서운 마음, 이해한다. 나도 두려우니까. 하지만…….”

카이델은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데미안을 달래 주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엘레노어의 비명이 들려올 때면 참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리곤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응애!”

문 너머에서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복도에 모여 마음을 졸이던 사용인들이 일제히 안도 섞인 탄성을 내질렀다.

잠시 후 또 한 번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문 너머의 목소리가 밝고 쾌활한 것을 보면 엘레노어의 상태도 나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상기된 얼굴의 하녀가 문을 열고 나와 산실 안의 상황을 전했다.

“예쁘고 건강한 따님, 아드님이십니다. 마님도 많이 지치셨지만 무사하십니다. 축하드립니다.”

데미안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제야 숨통이 탁 트이는 것만 같았다.

“형, 축하…….”

고개를 돌려 카이델을 올려다본 데미안이 흠칫하며 몸을 굳혔다.

카이델은 울고 있었다.

실핏줄이 터져 붉게 물든 흰자위, 흔들리는 어깨, 붉어진 코끝. 데미안은 처음 보는 카이델의 모습에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아…….”

내내 억지로 눌러 참고 있던 것이 전부 다 터져 나온 듯, 카이델의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끝없이 흘렀다. 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데미안은 카이델의 턱선에 아슬아슬하게 맺혀 있던 눈물방울이 허벅지 위로 툭툭 떨어져 내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늘 산처럼 크고 바위처럼 단단하게만 보이던 형이었다. 그런 그가 이토록 동요하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때 문이 달칵 열렸다.

“각하, 들어오십시오. 도련님도 함께 들어오시면 됩니다.”

밝은 표정의 산파가 카이델과 데미안을 불렀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카이델이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엘레노어.”

카이델이 무너지듯 엘레노어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고는 엘레노어의 손등에 제 이마를 댔다. 체면 같은 것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 듯했다. 그의 너른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고생했어, 엘레노어.”

“카이델? 울어요?”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정말이지 나는…….”

데미안은 엘레노어의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가 이내 둥글게 휘는 것을 지켜보았다. 엘레노어의 얼굴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엘레노어가 카이델에게 무어라 속삭이며 웃었다. 카이델이 그런 엘레노어에게 자잘한 입맞춤을 남겼다. 두 사람은 소곤소곤 둘만이 아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애틋한 두 사람을 보는 데미안의 입가에 편안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은 두 사람에게 시간을 조금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데미안이 조용히 돌아서자 하녀가 생긋 웃어 보였다.

“도련님, 인사하시겠어요?”

데미안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하녀 둘이 보드라운 강보에 싼 아기를 안고 데미안 쪽으로 걸어왔다. 데미안은 살짝 뒤꿈치를 들고 아기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갓 태어난 아기들은 놀랍도록 작았다. 이토록 자그마한 사람이라니! 눈도 뜨지 못한 채 꼬물거리는 핏덩이들을 보던 데미안이 작게 속삭였다.

“작아…….”

“정말 사랑스러우시지요?”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이 간지럽고, 손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말문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꼭 감은 눈, 작고 오뚝한 코, 통통한 뺨과 작은 손, 보송보송해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까지. 손톱은 또 어찌나 작은지, 보고 있기만 해도 가슴이 술렁거렸다.

“정말 귀엽다.”

“이쪽이 따님이시고, 이쪽이 아드님이세요. 아직은 얼굴로 구분하기가 좀 힘드실 거예요.”

“와……. 만져 봐도 돼?”

“그럼 먼저 손을 깨끗이 씻을까요?”

얼른 손을 씻고 온 데미안이 아주 조심스럽게 여자 아기의 손등을 톡 건드려 보았다. 그러자 아기가 입술을 뻐끔뻐끔하며 고개를 돌렸다.

쾅.

그 순간 데미안의 가슴에 무언가 내리꽂혔다. 얼굴에 서서히 열이 오르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데미안이 두 손으로 입을 꽉 틀어막았다.

‘세상에……!’

그렇다, 데미안은 자그마한 아기 천사들에게 한눈에 반해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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