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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147화 (147/168)

147화

에버렛 백작저의 거실. 카이델은 긴장감에 두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한참이나 호흡을 고른 그가 떨리는 입술을 뗐다.

“엘레노어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드디어.

잔뜩 긴장한 카이델과 달리, 백작 부부의 마음속에 떠오른 첫 감상은 그것이었다.

‘드디어 각하께서 청혼하셨나 보군.’

다음 날 또 볼 거면서 현관 앞에서 잡은 손을 놓지 못하는 것만 봐도, 카이델이 곧 청혼하리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잠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백작 부부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카이델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어머님 아버님 눈에는 제가 차지 않으시라는 것 압니다. 저라도 그럴 겁니다.”

틀렸다. 사실 두 사람은 미래의 사위에게 이미 푹 빠져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잘난 데다, 엘레노어라면 끔찍이 아끼고 위하는데 예쁘지 않을 수가 있나.

“부족한 사위지만, 누구보다 엘레노어를 아끼고 사랑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어머님 아버님께도 정말 잘하겠습니다.”

이미 과하게 잘하고 있었다.

틈만 나면 백작이 좋아하는 것들을 선물이라며 가져오는 것은 기본, 그가 낚시를 즐긴다는 말에 강가에 있는 공작가의 별장을 턱 내어주었다.

백작 부인이 여는 연회라면 크든 작든 참석해 눈도장을 찍었다. 무뚝뚝한 천성도 접어둔 채 어찌나 살갑게 구는지, 절로 어깨가 으쓱해졌다.

‘사실 폐하의 축복을 받은 이상,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었는데 말이지.’

그런데도 바짝 긴장한 채 두 사람의 대답을 기다리는 청년이 참 기특하게 여겨졌다.

백작이 농담조로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래도 내 딸은 못…….”

백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엘레노어가 버럭하며 끼어들었다.

“아버지! 장난하지 말고요. 카이델은 진짜 당황한단 말이에요. 그만 놀려요.”

백작은 벌써부터 제 신랑 편을 드는 딸이 야속해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이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큼. 좋습니다. 어차피 폐하의 축복도 받았고……. 제 예쁘고 괘씸한 딸도 저리 원하니 반대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군요.”

카이델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백작이 조금 더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이야 기쁜 일이지만, 너무 서두르는 것 같아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데 내달 중으로는 조금 이르지 않습니까? 제대로 교제하기 시작한 것은 종전 이후인데 말입니다. 급할 것도 없는데 1년 정도는 약혼 기간으로…….”

이번에도 엘레노어가 쏙 끼어들었다.

“1년은 제가 못 기다려요! 매일 열 시까지 들어오는 거 이제 안 하고 싶단 말이에요.”

백작이 슬그머니 제안했다.

“그럼 열한 시…….”

“싫어요.”

“열한 시 반.”

“결혼식 날까지는 열두 시.”

유치한 부녀의 입씨름 위로 카이델의 진중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걱정하시는 것 이해합니다. 하지만 확신은 이미 충분합니다.”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야 압니다만, 현실적으로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결혼 준비도 그렇고…….”

“결혼 준비는 저희 쪽에서 맡겠습니다. 무엇도 준비하실 필요 없습니다.”

카이델이 깔끔하게 정리하자, 백작이 입을 다물었다. 딸이 시집가는 게 좀 서운하다는 것 말고는 반박할 이유가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엘레노어가 방긋방긋 웃으며 물었다.

“그럼 반대하는 사람 없는 거죠?”

“난 반대야, 엘렌.”

그러자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만 지키고 있던 드와이트가 손을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엘레노어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드와이트?”

금이야 옥이야 키워 놓았더니 네가 감히 날 배신해?

엘레노어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꾹 눌러 참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어디 들어나 보자. 계속 말해 봐.”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한다기보다는, 좀 미뤘으면 좋겠다는 거야.”

“왜?”

엘레노어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자 잠시 머뭇대던 드와이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저 결혼할 테니까.”

콰광.

드와이트의 폭탄선언에 백작가가 발칵 뒤집혔다.

“그게 무슨 소리냐, 드와이트?”

“어머, 세상에.”

“결혼? 네가? 누구랑?”

드와이트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도 충격인데, 결혼이라니. 엘레노어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커졌다.

“아니, 자세히 말 좀 해 봐. 진짜야?”

깜짝 놀라 질문을 퍼붓는 에버렛 백작가 사람들과 달리, 카이델은 어쩐지 덤덤한 얼굴이었다.

“벌써 관계가 그 정도로 진전되신 줄은 몰랐습니다, 형님.”

카이델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형님’이라는 호칭에 드와이트가 움찔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담담하게 축하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에, 엘레노어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팔을 꼭 붙잡고 쏘아붙이듯 물었다.

“뭐야. 당신은 드와이트 연애하는 거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 아니, 나한테 왜 말 안 해 줬어요?”

“나는 그대도 당연히 알고 있는 줄……. 왕녀 전하와 그대는 친하니까.”

“왕녀 전하요?”

엘레노어의 목소리가 천장에 닿을 듯 높아졌다.

엘레노어와 백작 부부는 충격에 사로잡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드와이트에게 결혼할 여자가 있었다니, 더군다나 그게 뫼젠의 왕녀라니!

간신히 정신을 차린 백작이 물었다.

“하지만…… 그분은 분명 황태자 전하와 연인 사이라고…….”

그러자 엘레노어가 곧바로 나섰다.

“그건 저 때문이에요.”

“응?”

“그때 그 일로 제가 곤란해질까 봐, 두 분께서 일부러 가까운 관계인 척 연기를 해 주신 거예요.”

무슨 이야기냐는 듯 카이델이 엘레노어를 쳐다보았다. 그의 손을 꽉 잡은 엘레노어가 그간의 일을 짧게 설명했다.

“어머, 어쩜. 고마운 분이구나. 마음씨도 고우셔라…….”

“맞아요. 힐데는 좋은 사람이에요.”

생글생글 웃던 엘레노어는 곧바로 표정을 바꾸며 단호하게 못 박았다.

“그렇다고! 저희 결혼 날짜를 미뤄 줄 수는 없어요. 저희가 먼저 말했잖아요? 연애도 저희가 먼저 했어요.”

“그렇긴 하지…….”

그러자 드와이트가 미간에 슬며시 주름을 잡으며 반박했다.

“뫼젠 국왕 폐하께 먼저 알리느라 늦어진 것뿐이야. 한동안 뫼젠과 벨리움을 자주 오가야 할 것 같은데…… 결혼식이라도 빨리 치르고 싶어.”

“듣고 보니 이쪽도 사정이 있는데……. 그렇다고 그 큰 행사를 한 달에 두 번이나 치르기는 부담이 된단 말이지.”

곰곰이 생각하며 턱을 쓸던 백작이 슬쩍 물었다.

“같이 치를 생각은……?”

“없어요!”

“그건 싫습니다.”

평생에 딱 한 번뿐인 특별한 날이었다. 그날 하루만큼은 완벽한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엘레노어와 드와이트가 귀를 쫑긋 곤두세웠다.

“어차피 너희 결혼식에 초대할 하객이라면 다 엇비슷할 것 아니냐?”

“그렇죠.”

“더 많은 지지를 얻은 쪽부터 결혼하는 걸로 하자.”

엘레노어가 작게 구시렁거렸다.

“무슨 반장 선거도 아니고…….”

“그럼 포기하든가.”

“누가 포기한다고 그래? 시간 낭비하지 말고 미리 항복하시지.”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야.”

“가끔은 안 대봐도 알거든?”

백작의 팔을 꼭 안은 채 상황을 지켜보던 백작 부인이 툭 입을 열었다.

“나라면 그러고 있을 시간에 설득하러 나가겠다, 얘들아.”

그렇게 결혼식 날짜가 걸린 내기가 시작되었다.

***

“어머. 결혼 축하해, 엘레노어. 축하드려요, 각하.”

“감사합니다, 영애.”

엘레노어가 버나데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버나데트, 너는 당연히 우리 편이지?”

“으음, 글쎄.”

애매한 반응에 엘레노어가 펄쩍 뛰며 말했다.

“글쎄라니? 넌 드와이트를 잘 알지도 못하잖아! 고작 몇 번 본 게 다면서.”

버나데트가 미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긴 한데, 러브스토리도 낭만적이고…….”

“우리도 낭만적이야!”

버나데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무엇보다, 먼저 약혼한 나도 아직 결혼을 안 했는걸. 천천히 해, 엘레노어. 서두르지 말고.”

***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일까. 찾는 사람마다 드와이트와 힐데가르트의 손을 들어 주었다.

“드와이트.”

상단 사무실에 앉아 있던 아드리안이 서류에서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한 표를 던졌다.

엘레노어가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드와이트가 먼저 왔다 갔어. 난 드와이트 편이야.”

“힝.”

엘레노어가 서운한 듯 콧소리를 내자 아드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아, 오해할까 봐 얘기하는데 네가 먼저 왔더라도 난 드와이트 편일 거야.”

“뭐?”

“이름도 모르는 연인이었다고 해도, 네 편은 안 들었을 테니 이만 돌아가.”

거듭된 거절에 초조해진 카이델이 물었다.

“좀 유치한 것 아닌가?”

“이 정도 심술도 부리지 않을 거면 진작 신전으로 들어가 사제의 길에 들어서지 않았겠습니까?”

“전쟁터에서 동고동락한 정도 있는데…….”

“그 정은 이미 다 잊었습니다.”

아드리안이 얄밉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전 앞으로도 치졸하고 좀스러워질 예정이니 적응하시지요, 각하.”

울컥한 카이델이 엘레노어에게 물었다.

“……엘레노어, 꼭 저자와 친하게 지내야 해?”

“오늘은 확실히 우정이 좀 흔들리긴 했지만…….”

잠시 고민하던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웃었다.

“그래도 좀 더 노력해 봐요. 언젠간 적응될 거예요. 당신도, 리안도.”

***

“으음. 결혼이라…… 좀 성급하지 않나?”

마지막으로 온 곳은 황태자궁이었다. 결혼 이야기를 꺼내자, 이즈멜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카이델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충분히 생각하고 내린 결정…….”

“그대 말고.”

카이델의 말허리를 무참히 베어낸 이즈멜이 엘레노어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엘레노어. 세상에 남자는 많아. 공작보다 좋은 남자도 얼마든지 있다고. 예를 들면 지금 이곳에도…….”

카이델이 낮게 으르렁댔다.

“전하.”

이즈멜이 약간 누그러진 말투로 말을 이었다.

“……물론 공작의 얼굴이 좀 번지르르한 건 인정해. 그 외의 조건들도 훌륭하지. 하지만 귀여운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녀석이잖아.”

“그래요?”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하며 카이델을 올려다보았다.

“제 눈엔 귀여운데. 귀엽지 않아요?”

“응, 조금도 귀엽지 않아.”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이즈멜이 제 귀를 벅벅 문질렀다.

“아무튼 나는 드와이트 편이니, 날 설득하겠다는 생각은 접어 두는 게 좋을 거야.”

“하지만……!”

“하지만?”

“전하는 힐데와 사이가 안 좋으시잖아요.”

이즈멜이 선선히 인정했다.

“확실히 안 좋았지.”

“그렇죠?”

“그런데 이제는 제법 친해졌어. 뭐……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많기는 하지만, 미운 정이 든 것 같아.”

이즈멜의 입가가 슬쩍 휘었다.

“전우애랄지…… 뭐 그런 감정이 싹텄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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