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엘레노어는 간절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남자를 보며 입을 꾹 틀어막았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꿈인가……?’
현실이라기에는 너무 완벽했다.
주변의 풍경, 저를 올려다보는 남자의 얼굴, 그의 손에 들린 아름다운 반지까지.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엘레노어가 아무런 답이 없자, 카이델의 얼굴에 초조함이 짙어졌다. 반지를 든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진짜……?”
한참 뒤에 엘레노어가 뱉어낸 것은 승낙도 거절도 아닌 물음이었다.
“응?”
“진짜 나랑 결혼하고 싶어요?”
뜬금없는 질문에 카이델의 눈썹이 슥 올라갔다.
“응, 엘레노어. 그대와 결혼하고 싶어. 그 무엇보다 간절히 원해.”
“하지만…….”
“하지만?”
엘레노어가 약간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절대로 결혼 같은 것 하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카이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내가? 언제?”
“아까 방에서 당신 일기장을 봤는데, 거기 적혀 있었어요, 엄청 큰 글씨로 또박또박.”
엘레노어의 말에 카이델이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일기? 언제 쓴 건데?”
“아카데미 다닐 때쯤.”
카이델이 픽 웃으며 어깨를 툭 떨어뜨렸다.
“그땐 그대를 알지도 못했던 때잖아, 엘레노어.”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지금은…… 달라요?”
“달라. 내가 조급해 보이기 싫어서 얼마나 참고 기다렸는지, 그대는 모를 거야. 그러니…….”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앞에 반짝이는 반지를 들어 올렸다. 그가 애가 타서 어쩔 줄 모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답해 줘, 엘레노어. 그대도 나를 원한다고…….”
엘레노어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원해요.”
엘레노어가 손을 뻗어 카이델의 뺨을 감쌌다. 손바닥에 닿은 그의 뺨에 잘게 전율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당신을, 당신과 함께 맞는 아침을, 당신을 닮은 아이를 원해요. 당연하잖아.”
쿵.
심장이 꽉 조여드는 감각에 카이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무 행복하면 울고 싶어진다는 게 정말이었다.
카이델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엘레노어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감정이 파도치듯 울렁였다.
엘레노어가 그런 카이델 앞에 손을 내밀었다.
“빨리 반지 끼워 줘요. 더 기다리게 하지 말고.”
카이델이 떨리는 손으로 엘레노어의 손가락에 천천히 반지를 끼워 주었다. 반지는 조금의 오차도 없이 엘레노어에게 딱 맞았다.
“예쁘다…….”
엘레노어가 제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며 작게 감탄했다.
“마음에 들어?”
“네. 너무 예뻐요. 이렇게 아름다운 보석은 처음 봤어요.”
카이델이라면 캔 뚜껑을 가져다 끼워 줘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준비한 반지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카이델이 풀썩, 뒤로 넘어가며 두 사람은 꽃밭 한가운데 포개진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엘레노어의 금빛 머리카락이 카이델의 얼굴 옆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의 시야 가득 엘레노어의 얼굴이 들어찼다.
쪽.
엘레노어가 고개를 숙여 카이델의 입술에 도장을 찍었다.
“사랑해요.”
“내가 더.”
“하여튼 이런 건 절대 안 지지.”
“질 수가 없지.”
장난스럽게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금 겹쳐졌다.
엘레노어는 가만히 그가 주는 감각을 받아들이며 그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머리가 핑 돌 정도로 강한 라벤더 향기 속, 두 사람은 끊임없이 서로를 느꼈다. 입안에 가만히 고여 드는 고백을 전부 마셔도 목이 탔다.
몽롱해진 눈으로 엘레노어를 바라보던 카이델이 속삭였다.
“전부 꿈이면 어쩌지.”
엘레노어가 픽 웃으며 그의 이마 위에 입을 맞췄다.
“전부 꿈이면…… 다시 청혼해 줘요. 내 대답은 어차피 변하지 않을 테니까.”
엘레노어가 힘주어 고백했다.
“몇 번이든 당신과 결혼할게요, 카이델.”
***
“이리 와, 엘레노어.”
“맞아요. 선생님도 이리 오세요.”
발렌타인 형제의 성화에 엘레노어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두 사람을 위한 거잖아요.”
카이델이 곧장 대답했다.
“둘보다는 셋이 낫지.”
“맞아요.”
엘레노어가 한숨을 푹 내쉬며 화가에게 물었다.
“제가 같이 앉아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남작님께서 계시면 두 분의 표정이 훨씬 자연스러워지셔서 저도 좋습니다.”
엘레노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남자에게로 미적미적 걸어갔다. 엘레노어가 가까워질수록 카이델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오늘 그리기로 한 것은 분명 발렌타인 형제의 초상화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엘레노어까지 이젤 앞에 자리하게 되었다.
“이게 뭐예요, 갑자기.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부터 예쁘게 꾸몄죠.”
엘레노어가 툴툴거리자 카이델의 손가락이 엘레노어의 뺨을 톡 건드렸다. 그런 엘레노어가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내 눈에는 완벽한데. 이보다 더 예쁠 수가 있나?”
“당신 눈에만 완벽한 게 문제죠. 당신은 이미 객관성을 잃었어요.”
그래서 내가 당신이랑 결혼하는 거지…….
엘레노어가 속삭이듯 덧붙인 말에 카이델이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데미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요, 형?”
“어…… 그냥. 선생님이 예뻐서.”
카이델은 어색하게 웃으며 데미안의 머리를 살짝 다듬어 주었다.
두 사람은 아이들에게 약혼 소식을 밝히지 않았다. 아직 백작 부부의 허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기쁜 마음으로 허락해 줄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모든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뭘 새삼…….”
데미안이 중얼거린 말에 엘레노어와 카이델이 소리 없이 웃었다. 처음에는 눈을 마주치는 것도 어려워하던 데미안이었는데, 이제는 농담도 곧잘 하곤 했다.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을 슥슥 손으로 만져 주던 카이델이 말했다.
“다음번엔 미리 준비할 수 있게 해 줄게.”
“다음번?”
카이델이 허리를 숙여 엘레노어의 귓가에 속삭였다.
“부부 초상화.”
엘레노어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카이델의 손이 그런 엘레노어의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놓았다.
“자자, 준비되셨으면 시작하겠습니다. 남작님과 도련님께서는 소파에 앉아 주시고, 각하께서는 뒤에 서서 남작님의 어깨에 손을 얹어 주시겠습니까?”
화가의 말에 세 사람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렇게?”
“예, 딱 좋습니다.”
“이쪽에 앉으면 될까요?”
“남작님, 조금만 더 각도를……. 예, 이제 됐습니다.”
섬세하게 자세를 잡아 준 화가가 웃으며 당부했다.
“스케치하는 동안에는 가능한 한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그럼 작업 시작하겠습니다.”
사각사각.
조용한 방 안에 스케치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평온한 한낮의 풍경이었다.
“꼭 가족 초상화 같다.”
루카스가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시에나가 발끈하며 루카스의 팔을 찰싹 때렸다.
“루크, 넌 무슨 그런 소리를!”
“솔직히 에나 네가 봐도 그렇잖아.”
루카스가 시에나에게 얻어맞은 팔을 문지르며 말했다.
“저 세 사람 너무 자연스럽지 않아?”
“응……. 잘 어울리기는 해.”
창틀에 털썩 엉덩이를 대고 앉은 루카스가 의젓하게 말했다.
“우리 형님이 아닌 건 아쉽지만, 난 그래도 데미네 형도 좋아. 나한테 형 다음으로 잘해 주거든.”
“나도 삼촌이 아니라서 슬프지만, 공작님이라서 참는 거야.”
시에나가 루카스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선생님 행복해 보이지, 루크?”
“응, 엄청.”
시에나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게 중요한 거지, 뭐.”
루카스가 불현듯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럼 우리 이제 동맹 해체네?”
“해체 아냐. 공작님이 선생님 힘들게 하면 우리가 나서야지.”
“맞아. 우리가 가만히 안 둘 거야!”
그때, 화가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카이델을 타박했다.
“어어, 각하. 자꾸 고개 돌리시면 안 됩니다. 아무리 페르체 남작님이 보고 싶으셔도 잠시만 참으십시오.”
“주의하지.”
“당신도 참…….”
카이델이 자꾸만 고개를 숙여 엘레노어를 쳐다본 탓이었다.
시에나가 흐린 눈으로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러게. 그럼 그냥 해체나 다름없잖아.”
세 사람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루카스가 시에나에게 불쑥 제안했다.
“나도 너 그려 줄게.”
시에나가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진짜? 그림 그릴 줄 알아?”
“그림 못 그리는 사람도 있나?”
루카스가 자신 있게 어깨를 쭉 펴자 시에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루카스는 생각보다 이것저것 할 줄 아는 게 많았다. 악기도 잘 다루었고, 만들기 수업에서도 매번 창의적인 결과물을 냈다.
시에나는 루카스를 한번 믿어 보자고 생각하며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어, 멈춰 봐.”
“이렇게?”
“응, 예쁘다.”
예쁘다는 말에 시에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능구렁이!’
루카스는 가끔 아무렇지도 않게 민망한 말을 잘도 내뱉었다. 농담도 어찌나 진담처럼 하는지 모른다.
처음에는 질색하던 여자아이들도 요즘은 슬며시 루카스에게 관심을 기울이곤 했다. 루카스는 또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그네들을 전부 상대해 주었다.
‘다들 데미만 좋아할 때가 더 나았는데.’
시에나가 샐쭉해져서 입술을 삐죽거렸다.
“맘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뭐가?”
“예쁘다는 소리 그렇게 막 하지 말라고.”
루카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묘한 빛깔의 자주색 눈동자가 시에나를 빤히 담았다.
“그냥 막 하는 거 아닌데?”
“막 하는 거잖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루카스가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너 예뻐.”
“…….”
“학교에서 너보다 예쁜 사람 아무도 없어. 바보냐?”
루카스도 이번에는 좀 민망한지 벅벅 뒤통수를 긁어댔다. 소년의 귓바퀴가 서서히 붉어졌다.
시에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확인하듯 물었다.
“……진짜?”
루카스가 버럭했다.
“그럼, 진짜지. 내가 너한테 이런 걸로 왜 뻥을 치겠냐? 자세나 똑바로 해.”
히죽.
시에나의 입꼬리가 움찔했다. 간신히 새침함을 되찾은 시에나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대답했다.
“알았어.”
사각사각.
루카스는 집중해서 시에나를 그리기 시작했다. 손으로 이리저리 비율을 재어 보는 것이, 어디서 본 건 있어서 그런지 그럴듯했다.
시에나가 툭 물었다.
“잘 되어가?”
“응, 완벽해. 너랑 완전 똑같아.”
루카스의 자신 있는 대답에 시에나가 눈을 반짝였다.
“봐도 돼?”
“그러든가.”
시에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루카스에게 쪼르르 다가갔다.
“이게 뭐야!”
하지만 종이 위에는 웬 못생긴 형체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씹다 뱉어 놓은 감자도 아니고, 어떻게 봐도 예쁘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야! 죽을래? 이게 어떻게 나야!”
“누가 봐도 넌데 무슨 소리야! 아직 덜 그렸어. 앉기나 해.”
“싫어! 널 믿은 내가 바보 멍청이지!”
“어디 가?”
“너 없는 곳!”
……다시 한번, 평화로운 한낮의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