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의자에 털썩 앉은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허리를 한쪽 팔로 휘감았다. 그가 엘레노어를 끌어안자 그녀는 졸지에 그의 무릎에 앉은 자세가 되었다.
아이를 달래듯, 그녀를 무릎 위에 앉힌 카이델이 책을 뽑아 들었다.
“이 책은, 데미안이 내게 선물로 준 거야.”
엘레노어가 의아함에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데미가요? 이런 책을?”
카이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보기에 내가 영 답답했던 모양이야. 그때 내가 하는 거라곤 매번 데미안을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는 일이 전부였으니까.”
카이델의 해명을 들은 엘레노어가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물었다.
“그러면 이거 다 읽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응. 보기보다 유용해. 무시하면 안 된다고.”
각 잡힌 자세로 앉아 이 책을 정독했을 카이델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엘레노어가 머리핀을 손가락으로 콕 짚으며 말했다.
“그럼 이건?”
카이델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루카스가 선물해 준 거야. 내 생일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엘레노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나도 이유는 모르겠어. 별 뜻 없이 준 것 같은데…….”
엘레노어가 손을 뻗어 핀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생일에도 루카스는 머리핀을 선물했었다.
“그래서, 오해는 다 풀렸나?”
카이델이 엘레노어를 제게로 조금 더 바싹 끌어안으며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엘레노어의 얼굴이 발그레했다.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빠듯하게 밀어 넣으며 나직이 읊조렸다.
“이렇게 깍지 껴 손을 잡은 것도.”
엘레노어의 허리를 감싼 팔의 근육이 조금 더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엘레노어가 흡, 하며 배에 힘을 주었다.
“이렇게 허리를 끌어안은 것도…….”
카이델의 입술이 엘레노어의 입술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가 멀어졌다.
“이렇게 입을 맞춘 것도 전부 그대가 처음이야.”
“……정말?”
“그래. 정말.”
엘레노어가 온몸이 간질간질한 느낌에 허리를 살짝 비틀었다. 그러자 맞닿은 그의 몸이 바짝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카이델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그대와 해 보고 싶은 게 아직 많이 남았는데…….”
“…….”
“그 모든 처음도 다 그대에게 바칠 테니.”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에게서 저와 같은 비누 향이 난다는 사실이 미칠 듯한 충족감을 주었다.
하아.
목덜미에 카이델의 뜨거운 숨이 닿자, 엘레노어가 바르르 몸을 떨었다. 생경한 감각이었다.
카이델의 푸른 눈동자가 델 듯이 뜨거웠다. 그가 타는 갈망에 말라붙은 입술을 벌렸다.
“받아 줘, 엘레노어.”
엘레노어의 손이 카이델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가 자그마한 손바닥에 제 얼굴을 기대왔다.
엘레노어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 집에 가야 해요?”
가지 말라고 말해. 같이 있자고 해.
엘레노어가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카이델의 입가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엘레노어의 기대를 완벽히 꺾어 놓았다.
“물론 가야지. 부모님이 걱정하실 텐데 말도 없이 외박은 안 돼.”
엘레노어는 순간 울컥하고 말았다. 괜히 조금 서운해지는 마음에 엘레노어가 그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그 순간 카이델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다만…… 시간 맞춰 돌아가려고 했는데.”
카이델이 책상 위로 기다란 팔을 뻗었다.
탁.
그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시계를 그대로 엎어 놓았다.
“시계를 못 보는 바람에 조금 많이 늦어진 것 정도는, 용서해 주시지 않을까.”
그 순간 거짓말처럼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엘레노어가 웃으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거짓말은 나쁜 짓인데. 담 한 번 넘더니 과감해졌네요.”
“나쁜 게 입에 달더라고.”
“그게 뭐예요.”
매끄럽게 휘어진 입술 위에 카이델이 가벼운 키스를 남겼다.
“그대는 더 달고.”
카이델은 집요할 정도로 진득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레노어는 어쩐지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카이델의 손가락이 엘레노어의 턱선을 쓸었다.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조금은 건조하기까지 한 그 접촉이, 엘레노어는 더없이 끈적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어쩐지, 더 나쁜 짓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카이델의 눈이 슬쩍 휘었다.
엘레노어가 매번 약해지고 마는 바로 그 표정으로 그가 물었다.
“같이 할래?”
***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의 관계는 또 조금 변했다.
“여기선 안 돼요. 금방 도착할 거라구요.”
“그럼 잠깐만…….”
모르고는 살 수 있어도, 알면서 모른 척 살 수는 없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눈만 마주치면 화르륵 불이 붙었다. 뒤늦게 불장난에 눈을 뜬 아이들 같은 모습이었다.
또 깊어져 버린 입맞춤에 엘레노어의 얼굴이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이대로 마차에서 내린다면 모두에게 들켜 버리고 말 것이다.
“이젠 진짜 안 돼요. 아이들도 봐야 하는데.”
간신히 카이델을 떼어내는 데 성공한 엘레노어가 가쁜 숨을 쉬었다.
“데미안은 루카스랑 같이 있댔죠? 그럼 시에나 먼저 데리러 가야겠네요.”
오늘은 데미안과 시에나, 루카스를 데리고 공작령으로 내려가는 날이었다.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입가를 정돈해 주며 중얼거렸다.
“둘만 가고 싶었는데.”
“데미는?”
“데미안은…… 같이 가도 괜찮았을 거야. 눈치가 워낙 빨라야지.”
데미안이라면 둘을 조금이라도 더 붙여 놓으려 애썼을 테니까.
엘레노어가 입을 살짝 가리고 웃었다.
“어차피 당신 내려가서 해야 할 일도 많다면서요.”
“끄응.”
부인할 수 없었다. 카이델이 침음을 흘리며 얼굴을 슥 쓸어내렸다.
그런 카이델을 물끄러미 보던 엘레노어가 슬며시 웃었다. 카이델이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냥요. 그렇게 성실하시던 우리 각하가 어쩌다 농땡이 피우는 학생이 다 되셨을까…… 싶어서.”
“내 선생님이 워낙 아량이 넓으셔서, 불량 학생도 곧잘 예뻐해 주시거든.”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덧붙였다.
“거기다 미인이시고. 이런 선생님을 두고 어떻게 일에 집중을 하나.”
그의 너스레에 엘레노어가 뺨을 붉혔다.
“능글맞아졌어…….”
“그래서 싫은가?”
“아니, 좋아요.”
카이델은 제 마음을 숨기는 법이 없었다. 원래도 퍽 솔직담백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연인으로서의 그는 또 달랐다.
대외적인 모습은 여전히 칼처럼 냉정했지만, 엘레노어에게는 한없이 무르고 순했다. 그녀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주었고, 의견이 갈릴 때면 매번 져 주었다.
그러니 엘레노어도 자꾸 노력할 수밖에. 어떻게 하면 그를 더 기쁘게 해 줄 수 있을지, 틈만 나면 고민하게 되었다.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코끝에 쪽, 가볍게 입을 맞췄다.
“더 분발하세요. 그 정도 멘트로는 이제 놀라지 않으니까.”
“예, 선생님.”
시에나와 루카스, 데미안까지 태우고 나니 마차 안이 가득 찼다. 엘레노어와 카이델이 나란히 앉고, 맞은편에 아이들이 쪼르륵 앉았다.
“이렇게 보니까 더 실감 난다. 다들 키가 많이 컸구나.”
“왜요?”
“전엔 마차가 이렇게 좁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에이, 그건 공작님이 같이 타고 계셔서 그래요!”
아이들 앞에서 그는 전처럼 점잖은 삼촌이 되어 주었다.
루카스의 말도 안 되는 농담에도 너그럽게 웃어 주고, 멀미로 고생하는 시에나를 무릎에 앉히고 재워 주기도 했다.
그러니 처음에는 절대 인정 못 하겠다던 시에나와 루카스도 더는 불만을 늘어놓지 않았다. 좀 서운하기는 하지만, 카이델은 누가 보아도 괜찮은 사람이었으니까.
“클라리스!”
“엘레노어 양, 어서 오세요.”
공작성에 도착하자 클라리스 오를리 부인이 가장 먼저 나와 엘레노어를 반겨 주었다.
아이들도 반가운지 달려가 그녀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유모다!”
“아유, 그동안 많이도 크셨네요. 고단하시죠? 어서 들어가서 쉬세요.”
공작성의 하녀들이 아이들을 인솔해 들어가고, 엘레노어는 클라리스와 짧은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지요?”
“그럼요. 이렇게 다시 봐서 너무 기뻐요, 클라리스.”
“저야말로 기쁘지요.”
그때 카이델이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엘레노어, 가방 줘.”
엘레노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네? 무겁지 않은데……. 제가 방에 가져다 둘게요.”
“아냐. 내가 가져다 둘게.”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내 방에.”
엘레노어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카이델이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 맞춘 뒤 성큼성큼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클라리스가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문으로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엘레노어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게 됐어요.”
“전에 오셨을 때부터 각하의 마음은 짐작했지요. 사랑은 숨기려야 숨겨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클라리스가 엘레노어의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
“자자, 시장하실 텐데 일단 식사 먼저 하세요. 주방장이 아주 오늘만을 벼르고 별렀답니다.”
“으음. 여기서부터 맛있는 냄새가 나네요. 또 포동포동해져서 돌아가겠어요.”
“엘레노어는 좀 더 토실해져야 해요. 이렇게 마른 몸으로 그 많은 아이를 어떻게 다 돌봐요?”
클라리스가 엘레노어의 가느다란 손목을 보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요즘 그래도 나름대로 운동도 하는데요.”
“그럼 더 먹어야 하겠네.”
꼭 오랜만에 시골집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어서 엘레노어가 헤헤 웃었다.
“성심껏 준비할 테니 엘레노어는 양껏 먹고 가요.”
***
똑똑.
노크 소리에 카이델이 고개를 들었다. 집사가 들어오자 카이델이 손을 내밀었다.
“가져왔나?”
“예. 말씀하신 대로 다듬었습니다.”
카이델의 손 위에 작은 상자 하나가 놓였다.
카이델이 설핏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약간 초조한 얼굴이었다.
“가장 아름다워야 하는데.”
그러자 집사가 가슴을 쫙 펴며 당당하게 말했다. 조금의 거리낌도 없는 태도였다.
“제국 최고의 장인에게 맡겼습니다. 그가 성심을 다해 예술혼을 불태운 결과물이니 분명 만족하실 겁니다.”
카이델이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그의 손톱만 한 다이아몬드가 눈부시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가문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온 반지였다. 하지만 장인의 손을 거치자 새것보다 훨씬 세련되어 보였다.
카이델의 미간이 풀어졌다. 나름대로 만족한다는 뜻이었다.
“아, 따로 부탁한 것은?”
“그대로 했습니다. 흡족하실 겁니다.”
카이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가서 확인해 봐야겠군.”
“제가 새벽에 가 보았는데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청혼하기에는 그만한 곳이 없을 겁니다.”
청혼.
카이델이 공작령에 내려온 가장 큰 까닭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곧장 시작한 준비가 이제는 슬슬 마무리 단계였다.
‘지금이 적기라는 생각도 들고.’
반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카이델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엘레노어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