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안 돼, 그만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엘레노어가 엉덩이로 뒷걸음질을 쳤다.
카이델이 무릎걸음으로 그런 엘레노어를 쫓았다.
“엘레노어, 이리 와.”
이내 엘레노어의 가느다란 다리가 카이델에게 붙잡혔다. 카이델이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그만 좀 도망가시지요. 응?”
“더는, 더는 못 해요……. 꼼짝도 못 하겠다고요.”
“딱 한 번만 더.”
달콤하게 어르는 말에, 울컥한 엘레노어가 고개를 흔들었다.
“거짓말! 아까도 그렇게 말했으면서.”
“이번엔 진짜야. 한 번만 더 하자. 그럼 놓아줄 테니.”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다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의 표정을 보니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 같았다.
땀으로 흥건해진 엘레노어가 체념하며 자리를 잡았다.
“올라온다, 실시.”
“실……시.”
엘레노어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렇다. 두 사람은 윗몸 일으키기 중이었다.
‘이게 무슨 데이트야!’
카이델이 운동 데이트를 제안했을 때, 엘레노어가 생각한 그림은 이게 아니었다.
‘나 잡아 봐라’ 하듯 살랑살랑 달리다 못 이긴 척 붙잡히고, 꼭 붙어서 승마를 즐기고……. 뭐 그런 달달한 그림을 기대했단 말이다.
‘여기가 선수촌인가 공작저인가…….’
처음에 스트레칭을 할 때까지만 해도 아주 좋았다. 밀어 주고 당겨 주며 나름대로 화기애애했다는 소리다.
하지만 엘레노어의 기대는 카이델의 한마디에 와장창 깨어졌다.
“음, 그대는 체력이 약하니…… 가볍게 연무장 다섯 바퀴 정도만 돌고 시작하지.”
“……연무장 다섯 바퀴요?”
아연해진 엘레노어를 보며 카이델이 환하게 웃었다.
“같이 뛰어 줄 테니 그리 힘들지 않을 거야.”
힘들지 않기는 개뿔.
연무장 한 바퀴를 완주한 순간, 엘레노어는 예쁘게 웃는 얼굴에 단단히 낚인 저를 원망했다.
“잘하고 있어.”
해사하게 웃으며 그녀의 등을 가볍게 밀어 주는 남자는 지독히도 달콤하고 또 잔인했다.
“이 정도면, 오늘, 운동은, 충분, 한, 것, 같은, 데요!”
엘레노어가 헉헉대며 말했다.
공작저의 연무장은 학교 운동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었다.
“죽을, 것, 같아…….”
세 바퀴 반쯤 돌자 엘레노어는 요단강 강가에서 자갈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어.”
“나쁜 뻥쟁이! 사기꾼!”
“선생님이 말이 좀 거치시네.”
나름대로 살벌한 비난이었건만, 카이델은 그저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엘레노어를 바라보았다.
“끝! 끝! 진짜 끝!”
“잘했어, 엘레노어.”
연무장 다섯 바퀴를 뛰고 나니 지구를 짊어진 듯한 피로가 밀려왔다.
카이델은 엘레노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종아리를 꾹꾹 주물러 주었다. 늘 말랑말랑하기만 하던 종아리가 오늘은 단단해져 있었다.
“많이 힘들었지. 미안.”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그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괜찮아요. 나 건강하라고 그런 거잖아요.”
“이해해 주니 고맙군.”
카이델이 엘레노어를 보며 싱긋 웃었다.
“숨 좀 돌렸으면, 갈까?”
몸을 일으킨 카이델이 엘레노어에게 손을 내밀었다. 동화 속 왕자님처럼 근사한 모습이었다.
“좋아요.”
엘레노어가 수줍게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운동은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밥 먹으러 가자거나, 차라도 마시자거나, 적어도 뽀뽀나 하러 가자는 뜻인 줄 알았는데, 카이델은 2라운드를 시작했다.
근력 운동이었다.
카이델의 요망한 눈웃음과 어르고 달래는 말에 휘말려 땀을 뺀 것이 30분. 엘레노어는 위기감을 느꼈다.
‘더 이상은 정말 안 돼!’
하지만 카이델의 눈이 사르륵 휘어지고, 그의 뺨에 길게 보조개가 패고, 툭 불거진 목울대가 크게 일렁이는 것을 보면 자꾸만 마음이 약해졌다.
‘떼쓰고 화내는 건 통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이젠 전략을 바꿀 때가 되었어.’
엘레노어가 굳게 마음을 다잡았다.
“딱 열 번만 더 하자.”
카이델의 말에, 엘레노어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우으응.”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소매를 꼭 쥐고 흔들었다. 카이델이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엘레노어는 부끄러움을 꾹 누르고 생긋 웃었다. 생존이 걸려 있다고 생각하니 용기가 났다.
눈을 동그랗게 뜬 엘레노어가 카이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자기야, 나 이제 그만할래.”
그 순간 카이델이 그대로 굳었다. 셔츠가 팽팽하게 당길 만큼 부풀어 오른 그의 흉곽만이 그가 살아 있다는 걸 보여 주었다.
“……자기야?”
엘레노어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 순간 카이델의 얼굴 쪽으로 훅 피가 몰렸다. 그가 뒤늦게 몸을 돌리고 붉어진 목덜미를 손으로 감쌌다.
‘자……기라고.’
엘레노어에게서 터져 나온 낯선 호칭을 입안으로 굴려보던 카이델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기야.”
그런 카이델을 부르는 엘레노어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섞여들었다. 이미 제가 승기를 잡았음을 확신하는 목소리였다.
“나 힘든데. 씻고 싶어요.”
“그대는 정말…….”
“이제 들어가서 쉬어요. 응?”
심장을 쥐락펴락하는 것이,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한다.
말을 낮추는 걸 좋아한다는 건 또 어떻게 눈치챘는지, 아까부터 슬쩍슬쩍 던지는 반말에 몸이 뜨거워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엘레노어에게 제대로 된 운동을 시킬 생각이었는데, 결심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물러지면 안 되는데…….’
더 큰 문제는, 엘레노어가 이렇게 잡은 약점을 앞으로도 쭉 활용하리라는 것이었다.
건강한 음식을 내밀 때마다, 운동을 시키려 들 때마다, 통금 시간에 맞춰 그녀를 들여보내려 할 때마다 불쑥불쑥.
“……그래. 이만하지.”
그걸 알면 뭐하나. 이길 수가 없는데.
백 번이 되었든, 천 번이 되었든, 지고 지고 또 지는 게 그의 다디단 숙명인 것을.
“그러니 다시 불러 줘.”
카이델의 입꼬리가 슥 말려 올라갔다.
“자기야.”
***
“후……. 살 것 같다.”
전처럼 공작 부인 방으로 안내받은 엘레노어가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나왔다. 벌써 날이 어둑해져 있었다.
입고 온 옷은 땀에 젖어 다시 입기는 무리일 듯했다.
‘이김에 자고 가야지.’
옷이 없다는데, 카이델도 어쩌겠어.
엘레노어가 가운을 꼭 여미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오늘만은 절대 집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카이델은 다 씻고 나왔나?”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방문을 활짝 열고 들어갔다. 방은 아직 비어 있었다.
“오래 씻네. 카이델 자리에 앉아서 기다려야겠다.”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의 몸에 맞춰진 의자는 엘레노어의 몸을 폭 감싸고도 남는 크기였다.
엘레노어는 신기한 듯 책상에 놓인 물건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카이델의 인장, 펜, 오늘 자의 신문 몇 통……. 그다운 물건들이 잘 정돈되어 놓여 있었다.
각 잡힌 침구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카이델은 무척이나 깔끔했다. 좀처럼 흐트러지는 일이 없는 그다운 방이었다.
“와, 책장도 철자 순이야.”
엘레노어가 책상 옆에 놓인 책장을 보며 감탄했다. 자주 보는 책들은 그곳에 따로 꽂아 둔 모양이었다.
카이델은 주로 무슨 책을 읽을까?
엘레노어가 책장에 꽂힌 책을 관심 있게 살폈다. 시나 소설은 없고, 군사서와 경제 서적이 대부분이었다.
그때, 무채색의 다른 책들과 어울리지 않는 연분홍색 표지가 엘레노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당신의 사랑을 이루어 줄 두근두근 러브 레시피>.
엥?
카이델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책이었다. 엘레노어가 재빨리 책을 빼 들었다.
책은 흔하디흔한 연애 조언으로 가득했다. 첫사랑에 빠진 젊은 영애들이나 볼 법한 그런 내용이었다는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카이델이 읽을 만한 책은 아닌 것 같은데.”
신나게 놀려 줘야 하나? 아니면 따로 주인이 있는 걸까? 주인이 있다면…… 왜 카이델은 이걸 책장에 여태 보관하고 있었지?
엘레노어가 책장 주변을 서성거리며 고민하던 때였다. 가운이 책상 서랍에 툭, 걸렸다.
“앗.”
끼인 가운을 살짝 빼내자, 스르륵 서랍이 열렸다.
“응?”
그곳에는 고운 머리핀 하나가 놓여 있었다. 포장도 되지 않은 걸 보니 선물하려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이런 게 왜…….”
엘레노어의 손이 스르륵 이끌리듯 핀으로 향했다. 차갑고 매끈한 머리핀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을 때였다.
“엘레노어, 거기서 뭐 해?”
카이델이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깜짝 놀란 엘레노어가 책상에서 후다닥 물러서다 책장에 쿵, 등을 찧었다.
“아.”
“괜찮아?”
깜짝 놀란 카이델이 달려왔다. 그의 커다란 손이 엘레노어의 등을 슥슥 어루만졌다.
“아프지 않았어?”
하지만 이미 다른 생각에 깊이 빠져든 엘레노어의 귀에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전 여자친구 흔적인가?’
‘그래. 카이델한테도 전 여자친구가 있을 수 있지. 나도 전생에서 몇 번이고 연애했었는걸.’
‘다 지난 과거가 뭐가 중요해. 지금이 중요하지.’
엘레노어는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넘겨야지, 마음먹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머리도 안 말리고……. 이리 와. 내가 말려 줄 테니까.”
카이델이 다정하게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자 제게서 나는 것과 똑같은 비누 향이 훅 풍겨왔다.
카이델은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조심조심 두드려 닦아냈다.
그의 손가락이 젖은 머리카락을 조심히 털어내고, 그녀의 목덜미에 맺힌 물기를 훔쳤다.
그의 다정한 손길을 받고 있으니, 엘레노어는 어쩐지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른 여자한테도 이렇게 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싫어. 유치하지만 질투 나.’
엘레노어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옆머리를 말려 주기 위해 자리를 옮기던 카이델이 속상해 죽겠다는 표정의 엘레노어를 발견했다.
“엘레노어?”
엘레노어가 홱 고개를 들어 카이델과 눈을 맞췄다. 답답한 건 딱 질색이었다.
“솔직히 말해 줘요.”
“응.”
“나 말고, 다른 사람 좋아한 적 있었어요?”
카이델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엘레노어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있었어도…… 괜찮긴 한데. 그냥 궁금해서…….”
카이델이 대답했다.
“없었어.”
“…….”
“한 번도 없었어.”
그 순간 엘레노어는 저도 모르게 안심하고 말았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것이었다.
하지만 의심의 씨앗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엘레노어가 손가락으로 분홍색 책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이 책은 뭐예요?”
카이델이 약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저 머리핀은 또 뭐고요?”
책과 머리핀, 엘레노어를 번갈아 바라보던 카이델의 입매가 서서히 휘었다. 엘레노어에게서 고개를 돌린 그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엘레노어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웃어요?”
“그대의 질투를 받는 건 또 처음인데, 생각보다 내 취향에 잘 맞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