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카이델이 돌아오고, 엘레노어의 하루는 조금 더 바빠졌다.
연애를 한다고 일에 소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 던지고 카이델과 놀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애초에 엘레노어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못 되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일하고,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온 카이델과 데이트를 즐겼다.
하지만 카이델은 매번 퇴근 시간보다 한두 시간 일찍 도착해 엘레노어의 일을 거들었다.
“그러자 아기 돼지가 엉엉 울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카이델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동화책을 읽어 주고 있었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는 동화 시연에는 적합하지 않았지만, 일단 확실히 듣기는 좋았다.
아이들은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카이델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동화책의 내용보다는, 그 동화책을 읽어 주는 사람에 관심이 집중된 듯했다.
버나데트가 그 신기한 광경을 바라보며 작게 감탄했다.
“와…… 난 공작 각하께서 저렇게 자상한 분인 줄은 몰랐어. 쳐다보는 것도 무서웠는데, 아이들한테 동화책을 읽어 주시다니.”
“…….”
“엘레노어, 듣고 있어?”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엘레노어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응? 뭐라고? 못 들었어.”
버나데트가 알만하다는 눈빛을 쏘자, 엘레노어가 머쓱하게 웃었다.
“미안. 그런데 목소리가 너무 좋은데 어떻게 해.”
“…….”
“어떻게 사람이 목소리까지 완벽할까?”
눈이 마주친 엘레노어와 카이델이 서로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버나데트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사랑이 넘치는 연인 사이에 끼인 사람은 늘 괴로운 법이었다.
“으으, 닭살 돋아.”
내가 때려치우든지 해야지, 진짜.
버나데트가 낮게 중얼거리자, 엘레노어가 펄쩍 뛰었다.
“때려치운다고? 안 돼!”
“안 되긴 뭘 안 돼. 이 자리 꿰차고 싶어 하는 영애들이 줄을 섰는데.”
사실이었다.
전쟁 영웅인 카이델과 엘레노어의 만남은 제국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한동안은 기자들 때문에 외출이 곤란할 정도였다.
카이델과 공개 연애를 시작한 이후로, 영애들 사이에 엘레노어의 인기는 더욱 치솟았다.
그야말로 동경의 대상이 된 것이다.
「……기꺼이 경영에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후원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나…….」
백작저에는 학원 일을 거들고 싶다거나, 후원하고 싶다는 편지가 하루에도 몇 통씩 도착했다. 어떻게든 줄을 대 보려는 시도였다.
버나데트는 그런 엘레노어가, 제 친구가 자랑스러웠지만, 괜히 툴툴거렸다.
“처음에는 재밌었거든? 근데 보다 보니 슬슬 짜증이 나. 내 약혼자랑 비교된단 말이야!”
버나데트의 말에 엘레노어가 큰 소리로 그를 변호했다.
“요한이 뭐 어때서? 키도 훤칠하지, 직장 번듯하지, 말도 재미있게 잘하고……. 요즘 요한만 한 신랑감이 또 어디 있어?”
“요한이 누구지?”
엘레노어의 어깨너머에서 푹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이델!”
하원 시간이 되고, 하녀들에게 아이들을 맡긴 그가 엘레노어의 귓가에 속삭였다.
“누군데 그렇게 칭찬을 해? 질투 나게.”
엘레노어를 뒤에서 살짝 끌어안는 몸짓은 다정했지만, 목소리에서는 희미한 살기가 느껴졌다.
“버나데트 약혼자예요. 요한 헨슬리 백작.”
“아.”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카이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질투는 나.”
“참나.”
쪽.
그가 엘레노어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엘레노어, 말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네에.”
잠시 머뭇대던 카이델이 말했다.
“나도 키 커.”
“알죠.”
“직장도 번듯하고.”
“그것도 알고요.”
“말재주는…… 노력해 볼게.”
왜 새삼스럽게 그런 말을?
의아해진 엘레노어가 카이델을 보려 고개를 돌렸다.
카이델은 엘레노어가 제 얼굴을 볼 수 없도록 그녀에게 조금 더 바짝 붙어 섰다.
“나도 신랑감으로는 꽤 괜찮은데.”
말하면서도 약간 민망했지만, 꼭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카이델의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냥, 알아두라고.”
버나데트는 짜게 식은 눈으로 제 앞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엘레노어와 카이델은 저들만의 세상에 푹 빠져 있었다.
‘아주 좋아 죽네, 죽어.’
막 시작한 연인이라 그런 건지, 오래 떨어졌다가 다시 만나 애틋한 건지, 그도 아니면 둘 다 답이 없는 사랑꾼인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버나데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를 비켰다.
“응. 더는 안 되겠다. 나는 그만둘게, 엘레노어.”
“안 돼! 난 너밖에 없어, 버나데트.”
엘레노어가 다급하게 손을 뻗었지만, 버나데트가 더 날쌨다.
“거짓말에 너무 성의가 없다, 엘레노어. 하원 지도는 내가 거들 테니까 넌 하던 연애나 계속해.”
버나데트가 방을 나서자마자, 카이델이 물어왔다.
“정말 데비 백작 영애뿐인가?”
저 질투심을 지금까지는 어떻게 숨기고 살았을까?
엘레노어는 문득 궁금해졌다.
“난 그대밖에 없는데.”
“아, 정말!”
엘레노어가 그의 가슴을 밀쳐냈다. 카이델은 순순히 밀려나 주며 작게 웃었다.
장난인 듯 아닌 듯, 슬쩍슬쩍 내비치는 그의 질투가 기꺼웠다. 제게만 헤퍼지는 그의 웃음이 좋았다.
“그런 말은…….”
“하지 말까?”
종종 그녀를 당황하게 하는 애정 표현도 실은 그저 귀엽게만 느껴졌다.
“……몰래 해 줘요. 나만 듣게.”
***
“등불 끌까요?”
하녀의 말에 침대에 누워 있던 엘레노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니!”
“하지만 주무신다면서요?”
“어…… 편지 좀 읽다 잘까 해서. 내가 끌게!”
엘레노어가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했다. 고개를 갸웃한 하녀가 문을 닫고 나갔다.
‘휴……. 밤 데이트 한번 하기 힘드네.’
오늘은 카이델과 몰래 밤 산책을 나가기로 한 날이었다.
카이델에게 백작이 못 박은 통금 시간은 열 시였다. 그냥 한 번 툭 던져 본 말에 가까웠을 텐데, 고지식한 카이델은 늘 9시 59분이 되면 그녀를 들여보냈다.
“아니, 진짜 늦어도 된다니까요?”
“안 돼. 약속했으니까.”
“어차피 폐하의 축복도 받았는데, 아버지가 반대해도 상관없잖아요. 아버지 말 좀 안 들어도 괜찮아요.”
“그런 말 하면 안 돼, 엘레노어.”
카이델이 점잖게 엘레노어를 달랬다.
물론 엘레노어와 더 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서운한 듯 입술을 삐죽거리는 엘레노어를 보는 카이델의 속이 바싹 타들어 갔다.
엘레노어는 상상도 못 할 거다. 열 시가 다가오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시곗바늘을 다 꺾어 놓고 싶은 심정이 된다는 걸.
“열 시까지랬으니까 오전 열 시에 들어가면 되겠네!”
“나도 그러고 싶지만…….”
“밤 열 시라곤 안 했잖아요?”
엘레노어가 당돌하게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카이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렇지.”
순간 엘레노어의 논리에 설득된 카이델이 약한 틈을 내보였다.
“아침 열 시에 들어갈래요. 그때까지 나랑 같이 있어요. 네?”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소매를 덥석 붙잡았다. 그를 올려다보는 눈이 그저 맑고 또 맑았다.
‘우리 남작님은 겁도 없으시지.’
카이델이 입안의 여린 살을 꽉 깨물었다.
아침까지 같이 있자는 말이 그에게 얼마나 지독한 유혹인지, 그녀는 모르는 듯했다.
‘귀여우시고.’
밤새 이야기도 하고, 손도 잡고, 정원을 걷고도 싶다는 엘레노어를 보고 있으니 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제가 정말 음습한 인간이 된 것 같아 자괴감이 밀려왔다.
“안 돼. 들어가.”
카이델이 또 한 번 고개를 젓자, 엘레노어의 입술이 불퉁해졌다. 카이델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달래듯 문지르며 말했다.
“대신…….”
“대신?”
엘레노어가 고개를 홱 들었다. 두 눈에 기대감이 찰랑거렸다.
카이델이 픽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 밤, 여기서 만나.”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우리 집이요?”
“응.”
엘레노어가 다급하게 물었다.
“어떻게 들어오려고요?”
“담이라도 넘지, 뭐.”
“그게 아침 열 시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쁜 짓 같은데요.”
엘레노어의 타박에 카이델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난 착한 놈은 못 되는 모양이야.”
제가 나쁜 놈과 연애 중이라는데도, 엘레노어는 그저 환하게 웃었다.
“이야기도 하고 손도 잡고 정원도 걷자. 그대가 하고 싶은 건 다 해야지.”
“정말?”
“응, 정말.”
그렇게 예정된 밀회였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킨 엘레노어가 카이델이 보내는 신호를 기다렸다.
그때였다.
톡, 톡.
무언가 작은 돌멩이 같은 것이 창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엘레노어가 등불을 들고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활짝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카이델과 곧장 눈이 마주쳤다.
엘레노어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내려갈게요!’
손짓으로 제 뜻을 전달한 엘레노어가 살그머니 방을 빠져나왔다.
‘들키면 안 돼. 조심조심……!’
평소에는 신경도 쓰이지 않던 작은 삐걱거림이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엘레노어는 까치발을 들고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갔다. 심장이 제멋대로 쿵쾅쿵쾅 뛰어댔다.
“후아.”
간신히 길고 긴 계단을 내려가 1층 바닥을 딛고 섰을 때였다.
“엘렌?”
“……드와이트?”
계단을 향해 걸어오던 드와이트와 똑바로 눈이 마주쳤다.
드와이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 시간에 뭐해?”
“……어?”
“자고 있을 시간이잖아.”
엘레노어의 동공에 지진이 났다. 마땅한 대답을 찾던 엘레노어가 황급히 되물었다.
“너, 너는 이 시간에 뭐 하는데?”
“난 지금 들어온 건데.”
담담한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엘레노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난 물 마시러 나온 거야.”
“방에 물 있잖아?”
생각해 보니 그러네.
“으음, 모르고 다 쏟아 버렸지 뭐야.”
“그럼 하녀를 부르면 되잖아? 설렁줄은 괜히 있게?”
‘쓸데없이 똑똑한 자식……!’
엘레노어는 오늘따라 예리한 드와이트가 원망스러웠다. 밖에서 카이델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속이 탔다.
“다들 쉴 텐데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피곤하겠다. 어서 올라가서 쉬어.”
엘레노어가 친절하게 웃으며 드와이트의 등을 떠밀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이상하게 굴지?’
드와이트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의 엘레노어는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수상한 행동, 어색한 변명, 어떻게든 그를 등 떠밀어 보내려는 태도…….
그뿐 아니었다.
‘어쭈. 요놈 좀 봐라.’
드와이트는 엘레노어의 입술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발견했다. 연지를 바른 것이다.
‘신도 신었어?’
얇은 가죽신을 신은 것까지 확인하자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드와이트의 입매가 비뚜름하게 솟았다.
‘공작이 이 근처 어디서 기다리고 있나 보군.’
드와이트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피와 살을 나눈 형제로서 모른 척 눈감아 줄 것인가, 여동생을 걱정하는 오빠로서 뜯어말릴 것인가.
드와이트의 눈동자가 의미심장하게 반짝였다.
“나도 갑자기 목이 좀 마르네. 너 물 마실 때 나도 한 잔만.”
드와이트는 둘 중 무엇도 선택하지 않았다.
‘어떻게 반응하는지 봐야지.’
그저, 엘레노어를 좀 더 놀려 주기로 마음먹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