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감사합니다, 폐하.”
“영광입니다.”
공식적인 연인 관계를 인정받은 엘레노어와 카이델이 황제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황제의 축복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의 총애를 입었다는 뜻임과 동시에, 양가의 부모도 두 사람을 반대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백작 부부가 카이델을 반대할 리 없기는 했지만 말이다.
“카이델과 페르체 남작이 연인 사이가 되었다던데, 알고 있었나?”
엘레노어와 카이델이 돌아가고, 황제가 이즈멜을 향해 물었다. 이즈멜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뭉스럽게 대답했다.
“뭐, 저도 남들과 비슷하게 알게 되었지요.”
“그래. 카이델 그 애는 좋은 짝을 만날 자격이 있지.”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게는 뫼젠의 왕녀가 있으니 다 잘된 일이 아니냐?”
“뭐…… 두 사람에게는 확실히 잘된 일이 맞지요.”
이즈멜의 대답에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황제가 고개를 들어 이즈멜과 눈을 맞췄다. 그는 아까부터 내내 혼자였다.
“한데, 오늘은 왜 왕녀와 함께 오지 않았지? 오늘처럼 중요한 자리가 어디 있다고.”
“아, 힐데가르트…….”
이즈멜이 어깨를 쭉 펴며 경쾌하게 대답했다.
“헤어졌습니다.”
이즈멜의 말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뭐라?”
멍한 눈으로 아들을 보고 있던 황제의 얼굴이 서서히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즈멜이 뻔뻔한 얼굴로 쐐기를 박았다.
“마음이 변했습니다. 더는 왕녀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황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숨을 고르며 분노를 가라앉히려는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황제가 버럭 역정을 냈다.
“네가 정녕 제정신인 게냐! 네놈에게는 왕녀와의 관계가 한낱 어린애들 소꿉장난 같은 것이었단 말이냐?”
“사랑이라는 게 원래 좀 유치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요. 깨어지기 쉽기도 하고요.”
이즈멜은 조금도 기죽지 않은 얼굴로 황제의 말을 받아쳤다.
“아무튼, 확실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는 더 이상 서로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럼 뫼젠과의 관계는……!”
이즈멜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총사령관이 전쟁에서 베푼 은혜만으로도 뫼젠은 벨리움을 져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왕녀와는 좋은 친구로 남기로 했으니, 크게 변화하는 것은 없을 겁니다.”
지극히 이성적인 태도였다. 황제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 누그러졌다.
“그렇게 시끄럽게 만나더니 이제는 좋은 친구로 남기로 했다고? 나더러 그 말을 믿으란 말이냐!”
“요즘 젊은이들은 다 그렇게 연애합니다, 아버지.”
이즈멜이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부드러운 협박이었다.
“하지만 또 모르지요. 아버지께서 포기하지 않으시고 저희 두 사람을 다시 엮으려 드신다면…… 확실히 좋은 관계로 마무리되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 말이 황제의 분노를 다시 한번 폭발시켰다.
“네가 지금 아비를 협박하는 게냐!”
이즈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을 내저었다.
“협박이라니요, 아버지. 제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시끄럽다! 입만 산 놈 같으니……. 따라와라!”
이즈멜은 황제의 방으로 끌려가 한참이나 그의 노기를 받아냈다.
표정 한 번 구겨지지 않고 내내 태연자약한 이즈멜의 태도가 황제를 더욱 길길이 날뛰게 했다.
씩씩거리다가 지친 황제가 이즈멜을 보며 말했다.
“네 마음대로 해라! 난 다신 네 혼사에 관여하지 않겠다! 고마운 줄도 모르는 자식 놈, 뭐가 곱다고……. 혼자 늙어 죽든 말든 알아서 하여라.”
이즈멜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정말이십니까?”
“그래!”
뜻밖의 수확이었다. 이즈멜이 싱글벙글 웃으며 약속을 받아냈다.
“무르시기 없습니다?”
“내 눈앞에서 당장 사라져라!”
“계속 그리 역정을 내시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아버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셔야지요.”
기어이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고서야 이즈멜은 황제의 방을 나섰다. 얼얼한 뒤통수를 문지르며 이즈멜이 황궁 정원을 가로질렀다.
어릴 때도 꿀밤 한 번 쥐어박힌 적이 없었는데, 다 커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황당함에 피식피식 웃음이 샜다.
“전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엘레노어.”
엘레노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속삭였다.
“폐하께서 무척 노하셨다고 들었어요. 괜찮으신가 해서…….”
이즈멜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그대도 잘 알다시피, 내가 좀 미워하기 힘든 사람이라.”
“그래도…….”
“하나뿐인 친구를 위해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어.”
이즈멜의 말에도 엘레노어의 얼굴은 약간 어두웠다. 걱정과 미안함이 반씩 섞인 표정이었다.
“웃으라고 한 일인데 그런 표정을 지으면 내가 보람이 없지.”
이즈멜이 팔꿈치로 엘레노어를 톡 건드리며 말했다. 엘레노어는 그제야 이즈멜을 보며 피식 웃어 주었다.
“그래, 웃어. 그렇게.”
두 사람은 연회홀 쪽으로 나란히 걸으며 그간의 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즈멜이 엘레노어의 옆얼굴을 슥 살피며 입술을 뗐다.
“카이델 그놈 때문에 속 많이 끓였을 텐데, 얼굴이 좋아서 다행이야. 걱정했는데…….”
이즈멜이 말끝을 흐렸다.
‘오늘도 그대는 눈부시게 예쁘네.’
평소보다 배로 힘을 준 것인지, 오늘 엘레노어는 그야말로 여름의 요정 같았다.
카이델의 손을 잡고 엘레노어가 장내로 들어서던 순간, 그녀를 제외한 모든 것이 연기처럼 흐릿해졌다. 이즈멜의 초점은 여전히 엘레노어에게 맞춰져 있었다.
‘아직은 시간이 한참 더 필요한 것 같아.’
이즈멜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야.”
엘레노어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선명한 초록색 눈동자가 이즈멜을 담았다.
“전하는, 행복하세요?”
“응?”
뜬금없는 질문에 이즈멜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저는 제 친구가 누구보다 행복했으면 좋겠거든요.”
엘레노어가 이즈멜을 보며 활짝 웃었다. 이즈멜의 숨이 잠시 멎었다.
엘레노어가 다정하게 당부했다.
“행복하셔야 해요, 이즈멜.”
이즈멜.
처음으로, 엘레노어가 그를 이름으로 불러 주었다.
이즈멜의 붉은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오며 가슴이 뭉클했다.
이즈멜은 그 의미를 알았다. 엘레노어가 신분을 넘어, 그를 온전히 친구로 받아들였다는 뜻이었다.
엘레노어와 이즈멜 사이, 좁혀지지 않던 약간의 간극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늘 조금 고독하던 이즈멜에게 평생의 친구가 생긴 순간이기도 했다.
“……그래. 그럴게.”
이즈멜이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오롯한 진심만이 담긴 미소였다.
“고마워, 엘레노어.”
***
“이제 한 과목만 더 치면 방학이다!”
루카스가 기지개 켜듯 팔을 쭉 뻗으며 말했다. 집에 갈 생각만 해도 좋은지 싱글벙글이었다.
시에나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톡 쏘아붙였다.
“아직 한 과목이 남았다는 게 중요하지. 너 그러다 F 받는다? 그럼 다시 들어야 해.”
루카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헹. 난 D는 받아도 F는 안 받거든?”
“아주 잘났다, 잘났어. 너 공부 하나도 안 하고 시험 친 거 선생님한테 다 이를 거야.”
“고자질쟁이!”
루카스의 비난을 한 귀로 흘려버린 시에나가 교실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그나저나 데미는 어디 갔어? 아까부터 안 보이네.”
“아, 편지 가지러. 형한테 편지 오는 날이라던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손에 새하얀 편지 봉투를 든 데미안이 교실로 들어섰다.
“공작님 은근히 다정하시네. 편지도 제일 열심히 쓰셔.”
편지지 일곱 장을 빽빽하게 채운 글씨를 보며 시에나가 짧게 감탄했다.
카이델은 꾸준히 데미안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한 번 보낼 때면 그 분량이 무척이나 방대했다.
요령 없이 빽빽하고 반듯하게 채운 편지에서 그의 성격이 드러났다.
「데미안.
이제는 정말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날이 퍽 무덥다. 건강 해치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편지는 늘 그렇듯 담담하게 시작되었다. 차분하게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데미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내 데미안의 고사리 같은 손가락에서 힘이 쑥 빠져나갔다.
툭.
편지지가 책상 위로 떨어졌다.
시에나와 루카스가 깜짝 놀라 데미안 쪽을 쳐다보았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공작저에 뭔가 나쁜 일이라도 생긴 거야?”
데미안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데미안의 뺨이 서서히 발갛게 상기되었다.
「아, 그리고 네게 전할 소식이 있다.
한동안은 여러 가지 이유로 밝히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다행히 이제는 네게 알려도 될 정도로 모든 것이 확실해졌어.
엘레노어와 나는 교제 중이다, 데미안.
사실 제법 오래되었다. 전쟁이 시작하기 전부터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으니까…….
너무 늦게 알리는 것을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전쟁으로 오랜 기간 떨어져 지내야 했던 만큼, 불안했던 마음을 이해해 주리라 믿어.
내가 엘레노어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너는 나보다도 빨리 눈치챘었지.
데미안,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평생 엘레노어의 언저리를 맴돌기만 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고…….
그래서 요즘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네가 돌아온다면 조금 더 행복해지겠지.
엘레노어가 안부를 전해달라는구나. 그래, 지금도 우리는 함께 있다.
날 위해 함께 기뻐해 주리라 믿는다, 데미안.」
이후로도 카이델의 편지는 길게 이어졌지만, 데미안의 시선은 한 대목에만 꽂혀 있었다.
‘엘레노어와 나는 교제 중이다, 데미안.’
드디어!
데미안은 코끝이 찡해 왔다. 편지에서 카이델의 행복감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대체 무슨 내용인데 그래?”
참다못한 시에나가 데미안의 손에 들린 편지를 홱 빼앗아 들었다. 루카스도 바짝 고개를 들이밀었다.
빠르게 편지를 훑어 내리던 시에나의 시선이 한 대목에서 멈춰 섰다. 루카스도 같은 부분에서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이, 이게 대체…….”
“말도 안 돼!”
시에나와 루카스가 동시에 빽 소리를 질렀다.
엘레노어와 카이델이 연인이 되었다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루카스가 제 머리를 잡아 뜯을 듯 움켜쥐며 절규했다.
“선생님은 우리 형님이랑 결혼해야 하는데!”
시에나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그럼 우리 삼촌은?”
그러자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데미안이 앵두처럼 붉은 입술을 열었다.
“……늦었어.”
시에나와 루카스를 차례로 바라본 데미안이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선생님은 우리 형이랑 결혼할 거야.”
시에나가 버럭했다.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야!”
“아니야, 끝이야.”
배시시. 데미안의 입가가 비슬비슬 솟았다. 승자의 미소였다.
“선생님은 우리 형을 좋아해.”
데미안의 주변에만 반짝거리는 햇살이 내려앉은 듯 환했다. 데미안은 양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 행복한 고민에 잠겼다.
‘이제는 형수님이라고 불러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