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일주일 뒤, 황궁에서는 성대한 승전 연회가 열렸다.
엘레노어는 아침부터 연회 준비로 시달리는 중이었다.
“우웅, 10분만 더…….”
“잠은 죽어서 자는 거라면서요? 어서 일어나세요!”
“나 지금 죽어 있어. 그러니까 5분만 더…….”
“평소라면 봐드렸겠지만 오늘은 안 돼요. 어서 일어나세요. 할 일이 엄청나게 많다구요!”
눈을 뜨자마자 향유 푼 물에 퐁당 빠뜨려지고, 부드러운 스펀지로 온몸이 박박 문질러졌다.
“으아아악!”
“아이,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
“아프면 말하라며! 나 아파! 완전 아파아악!”
“네, 듣고 있어요. 우리 아가씨, 많이 아프시구나.”
그런 다음에는 침대 위로 던져져 고문에 가까운 마사지를 받았다. 일하느라 꽉꽉 뭉쳐 있던 근육들이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시원하기는커녕 걸레짝이 된 것 같은 몸으로 엘레노어는 거울 앞에 앉혀졌다. 백작저의 하녀란 하녀는 죄다 엘레노어에게 달라붙어 그녀를 치장하는 데 공을 들였다.
“이 정도면 충분해……. 지금도 충분히 과하다니까?”
“과하기는요! 이 두 배로 힘을 줘도 이상하지 않아요. 오늘의 주인공은 아가씨인걸요.”
“오늘의 주인공이 어떻게 나야……. 카이델이지.”
엘레노어의 말에 마리가 야무지게 대답했다.
“그런 공작 각하의 연인이 아가씨고요. 연인이 된 이후로 첫 공식 행보잖아요. 당연히 신경 써야죠.”
그녀의 말이 맞았다.
오늘은 엘레노어와 카이델이 연인 관계임을 사람들에게 공표하는 날이었다. 둘에게 이목이 얼마나 집중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으세요. 다들 숨도 못 쉴 정도로 변신시켜드릴 테니까.”
“다들 숨은 쉬어야지……. 그래야 살지.”
엘레노어는 툴툴거리면서도 군말 없이 하녀들에게 몸을 맡겼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엘레노어는 카이델이 그녀를 보고 또 한 번 반했으면 했다.
‘카이델한테 예뻐 보이고 싶어. 어쩌다 보니 너무 추한 꼴만 많이 보였잖아…….’
카이델은 그마저도 예쁘고 귀엽다지만, 그건 오로지 그의 관대함 덕분이었다.
카이델과 재회한 그 날, 뒤늦게 거울을 확인한 엘레노어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그 꼴로 카이델을 끌어안고 입 맞췄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카이델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지만, 엘레노어는 무척 속이 상했다. 오늘은 엘레노어에게는 명예 회복이 걸린 날이었다.
카이델은 며칠을 제대로 씻지도 못해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데!
세상은 이토록 불공평하다.
하지만 그런 그가 그녀의 연인이라는 걸 떠올리면, 세상은 역시 살 만한 곳이라는 생각 역시 들었다.
“와, 아가씨. 어때요? 제 눈엔 완벽한데, 마음에 드세요?”
카이델이 데리러 오기로 한 시간이 한 시간쯤 남았을 때, 엘레노어의 치장이 간신히 끝났다.
거울을 본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녀는 하녀들이 재창조한 제 얼굴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외쳤다.
“예뻐……!”
그러자 뒤에서 하녀들이 쿡쿡 웃었다. 그런 엘레노어가 그저 귀여운 모양이었다.
엘레노어는 하녀들이 나가고 나서도 거울 앞을 떠나지 못했다. 매일 꾸미는 건 생각만 해도 귀찮지만, 가끔씩 이렇게 예뻐지는 건 확실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엘레노어는 방 안을 빙글빙글 돌아보기도 하고, 괜히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각도별로 살피기도 했다. 오늘이 끝나면 사라질 얼굴이라 생각하니 더욱 애틋했다.
“세상에 넌 눈도 예쁘고, 코도 예쁘고, 입도 예쁘네.”
엘레노어가 양손으로 뺨을 감싸며 거울 속 자신을 향해 말을 건넸다.
“이러니 카이델이 반하지.”
“그러니까 말이야.”
“꺄악!”
그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엘레노어가 소스라치듯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중심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기 직전,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받쳤다.
엘레노어는 눈을 꽉 감고 있었지만, 코끝을 휘감는 향기만으로도 제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있었다.
엘레노어가 살그머니 눈을 뜨자, 눈부시게 아름다운 푸른색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깔끔하게 넘긴 머리, 가슴을 화려하게 수놓는 훈장들로 꾸며진 제복, 발렌타인의 문양이 금사로 섬세하게 수 놓인 망토까지.
‘미친…….’
카이델은 흠을 잡으려야 잡을 수 없는 완벽한 모습이었다. 엘레노어는 부끄러운 것도 잠시 잊고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카이델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안녕, 엘레노어.”
엘레노어의 얼굴이 서서히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카이델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일으켜 세우자마자, 엘레노어는 후다닥 그에게서 멀어졌다.
엘레노어가 더듬더듬 따지고 들었다.
“아, 아직 한 시간이나 나, 남았는데요!”
“응.”
“왜, 왜 일찍 왔어요?”
“그야, 그대가 보고 싶어서.”
엘레노어의 입이 꾹 다물렸다. 그 와중에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밖에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아버님께서 덥다고 들어오라 하시더군.”
“그럼 1층에서 기다리고 있지…….”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어머님이 등을 떠미셔서.”
아, 어머니 진짜!
엘레노어가 두 손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참을 수 없이 민망했다.
카이델이 씩 웃으며 물었다.
“예쁜 얼굴, 계속 가리고 있을 생각이야?”
“몰라요……!”
“보여 주면 안 되나?”
엘레노어가 아무런 말이 없자, 카이델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대가 보고 싶어서 두 시간이나 일찍 왔는데.”
“…….”
“한 시간은 뙤약볕 아래 서서 기다렸는데.”
“왜 그런……!”
깜짝 놀란 엘레노어가 두 손을 내렸다. 그러자 그녀를 보고 있던 카이델과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카이델은 엘레노어가 다시 얼굴을 가리지 못하도록 두 손을 깍지 껴 잡았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카이델이 입을 열었다.
“그대는 눈도 예쁘고.”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양쪽 눈두덩에 쪽쪽 입을 맞췄다.
“코도 예쁘고.”
이번엔 코끝에 쪽.
“입은 더 예쁘니…….”
카이델의 입술이 엘레노어의 입술 위로 사뿐히 포개졌다. 산뜻한 듯 집요하게 엘레노어의 입술을 지분거리던 카이델이 아쉬운 듯 멀어졌다.
“반하지 않을 수가 있어야지.”
씩 웃는 카이델의 입술에 립스틱의 붉은빛이 묻어났다.
그 모습마저 한 폭의 그림 같아서, 엘레노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남자랑 계속 있다간 정말 단명할 것 같은데.’
심장이 쉬엄쉬엄 일할 날이 없었다. 매번 쿵 내려앉았다가, 휘리릭 솟았다가 하며 온갖 기예를 선보이는 심장 때문에, 엘레노어는 요즘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립스틱 지워졌네.”
“누구 때문인데…….”
“안 바른 게 훨씬 더 예뻐.”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입가를 가만히 훔쳐 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립스틱은 맛이 없어. 좀 텁텁하다고 해야 하나……. 이상해.”
민망해진 엘레노어가 버럭했다.
“그럼 화장했을 땐 키스하지 말아요!”
“난 텁텁한 맛 좋아해.”
0.1초 만에 태세를 전환한 카이델이 눈을 접어 웃었다.
“그대 거라면 난 다 좋아.”
***
평소보다 배로 화려한 황궁의 연회홀.
사람들의 관심은 오로지 두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오늘의 주인공인 카이델 이드리스 발렌타인 공작과 엘레노어 에버렛 페르체 남작이었다.
“두 분…… 맞죠?”
“저번에도 함께 오시기는 했지만, 그때랑은 분위기가 전혀 다르군요.”
“공작 각하가 저런 표정을 지으시는 건 처음 봤어요. 페르체 남작에게 완전히 푹 빠지신 것 같네요.”
“페르체 남작 표정은 어떻고요. 하긴, 제가 남작이라고 해도 각하의 얼굴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긴 하겠지만요.”
손을 꼭 붙잡고 들어올 때부터 심상찮았다. 하지만 심증뿐, 그런 것으로는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왜 자꾸 쳐다봐요?”
“예뻐서. 그대는 왜 자꾸 쳐다보는데?”
“그야 당신이 자꾸 보니까…….”
하지만 자꾸만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웃고,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는 걸 보고 있으니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다.
엘레노어의 뺨 위에서는 복숭아 같은 홍조가 가시지를 않았다. 그녀는 살그머니 웃다가 아닌 척 웃음기를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런 그녀를 멀리서 지켜보던 드와이트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꼭 말해 줘야지. 그게 더 수상해 보였다고…….’
하지만 더욱 티가 나는 건 카이델이었다.
“사람들이 다들 쳐다보는데, 괜찮아? 이런 거 불편해하잖아.”
“각오한걸요. 괜찮아요.”
“힘들면 이야기해. 참지 말고.”
엘레노어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 행여 그녀가 불편할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몸짓, 부드럽다 못해 흐물흐물 녹아 있는 표정.
‘나 사랑에 빠졌어요’ 하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것이 차라리 티가 덜 날 듯했다.
‘이젠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사람들의 집중된 관심에도 태연하던 엘레노어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가자, 엘레노어.”
카이델과 함께 황제에게 인사를 올릴 시간이었다.
엘레노어는 카이델의 팔짱을 살짝 끼고 조심조심 걸어갔다. 황후가 엘레노어를 보며 슬쩍 눈인사를 건넸다.
“제국의 영원하신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리 예의 차릴 것 없네, 카이델. 내가 늘 그대를 아들처럼 생각한다는 걸 알지 않나.”
카이델을 본 황제가 호탕하게 웃으며 친한 척 인사를 건넸다. 그는 승전이 가져다준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각종 이권에 더없이 만족하고 있었다.
“마음 써 주셔서 감읍할 따름입니다.”
“공의 아버지가 오늘 그대를 보았다면 무척 자랑스러워했을 걸세. 그대는 벨리움의 홍복이야. 그대가 있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네.”
“감사합니다, 폐하.”
황제가 흐뭇하게 웃으며 카이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대의 공에 대해서는 확실히 치하하도록 하지. 나라를 위해 엄청난 일을 해 주었네. 그대의 무공은 이미 선조들을 넘어섰군.”
사람 좋은 얼굴로 빙글빙글 웃던 황제의 표정이 조금 사무적으로 변했다. 황제의 시선이 카이델의 뒤에 선 엘레노어에게로 향했다.
“한데…… 남작과 함께 연회에 참석할 줄은 몰랐군, 카이델.”
황제가 엘레노어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 남작.”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엘레노어는 떨리는 마음을 감추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카이델과 엘레노어를 번갈아 보던 황제가 물었다.
“두 사람은…… 무슨 관계인가?”
카이델이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폐하.”
“좋은 감정이라…….”
황제는 엘레노어를 빤히 바라보았다.
엘레노어는 놓치기에 조금 아까운 패이기는 했다. 그녀가 평민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두고두고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하지만 이즈멜에게는 힐데가르트가 있었다. 그녀와 혼인한다면 뫼젠과의 교역에서 벨리움은 타국이 따라올 수 없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될 것이다.
카이델 역시 황가의 방계 혈족이니,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이 맺어짐으로 엘레노어와 황실 사이의 관계 역시 전보다 돈독해졌다고 할 수 있었다.
“축하할 일이군. 나라에서 손꼽는 인재들이 만나 인연을 이루다니…….”
셈을 끝낸 황제는 활짝 웃으며 둘의 관계를 공인해 주었다.
“그대들에게 나의 축복을 내려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