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저 멀리서 말을 타고 다가오는 사내는 흐트러진 차림이었지만 눈에 띄는 골격을 자랑했다.
‘!’
아드리안이 아는 한, 저런 풍채를 지닌 이는 세상에 단 하나뿐이었다.
카이델 이드리스 발렌타인, 그였다.
“각하!”
아드리안이 달려 나가 황급히 그를 멈춰 세웠다.
“공작 각하!”
정신없이 달려오던 카이델이 아드리안을 발견하고 말을 급히 세웠다.
“……소후작? 그대가 왜 여기 있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 각하께서 돌아오지 않으셔서 무슨 난리가 났는지……!”
울컥한 아드리안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따져 물었다. 카이델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심상찮은 기색을 알아차린 카이델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카이델이 그날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부하들을 먼저 뭍으로 보내야 했어. 인원이 많다 보니 시간이 지체되었고, 암흑 같은 밤이 되어 버렸지.”
막막했던 밤을 떠올린 카이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팼다.
“빛 한 점 없는 상황에 더 움직이는 건 무리라 판단했어. 남은 몇몇과 암초 위에서 밤을 지새우고, 해가 밝자마자 이동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곳으로 돌아오시지 않은 겁니까?”
“전날과는 파도의 방향이 반대라, 우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떠밀리듯 헤엄쳐 갔어. 다들 체온이 심각할 정도로 낮아져 있어서 하루를 꼬박 민가에서 신세를 졌지.”
그러고 보니 카이델의 안색이 그리 좋지 않았다. 얼굴이 묘하게 붉은 것이 열이 있는 듯했다. 아드리안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래도 무사하시니 정말 다행입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달려온 것인데…….”
아드리안이 이곳 상황을 짧게 설명했다.
“각하께서 실종되시고 나라가 벌컥 뒤집혔습니다. 먼저 도착한 부대원들은 이곳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고, 집으로 돌아갔던 이들도 곧장 이곳으로 달려왔습니다.”
카이델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부하들의 의리에 가슴이 벅찬 동시에, 걱정이 밀려왔다.
“그럼…… 엘레노어도 그 소문을 들은 건가?”
“예, 엘렌도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카이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가 거칠게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각하께서 두 눈으로 보셨어야 합니다. 엘렌이 어떤 심정으로 이곳까지 달려왔는지, 어떤 표정으로 망망대해 앞에 섰는지.”
아드리안이 원망 섞인 목소리로 카이델을 책망했다.
“엘렌이 그렇게 무너지는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
“부탁드립니다, 각하.”
***
온통 군인뿐인 공간, 멀뚱멀뚱하게 앉은 엘레노어는 누가 봐도 눈에 띄었다. 옆에 앉아 있던 장교 하나가 용기 내 말을 붙였다.
“영애께서 이런 곳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아…… 연인을 기다리고 있어요.”
엘레노어의 말에 분위기가 엄숙하게 가라앉았다. 측은한 듯 그녀를 보던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도 동료들이 돌아오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연인 되시는 분도 영애 곁으로 돌아오시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엘레노어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군인들은 엘레노어에게 부채를 가져다주고 시원한 물을 권하는 등 호의를 베풀었다. 고향에서 저희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엘레노어는 자꾸만 달달 떨리는 두 손을 꼭 모아 잡았다. 오늘만 해도 천 번은 신을 찾은 것 같았다.
‘제발…… 무슨 소식이라도 좋으니…….’
엘레노어가 온 마음을 다해 빌고 있던 그때였다.
천막 입구를 가려놓은 장막이 휙, 거칠게 젖혀졌다. 천막 안에 있던 모든 이가 일제히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막 달려온 듯 호흡이 거친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반쯤 찢긴 셔츠, 진흙이 말라붙은 듯 지저분한 바짓단, 땀에 젖은 머리칼.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부시게 근사한 남자.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운 사람.
그리고,
“엘레노어.”
“당신……!”
엘레노어의 하나뿐인 연인, 카이델이었다.
“각하!”
“사령관님!”
순식간에 장막 안이 시끄러워졌다. 모두가 벌떡 일어나 놀란 얼굴로 카이델을 바라보았다.
“살아계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다른 이들도 다 무사한 겁니까?”
“그래. 다들 무사하다. 걱정해 주어 고맙다.”
잠시 부하들에게 향했던 시선이 곧바로 한 곳으로 옮겨갔다.
꿈에도 그리워한 얼굴. 단 한시도 잊을 수가 없었던 그 얼굴로.
엘레노어의 얼굴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엉망이었다.
눈은 퉁퉁 붓고, 한숨도 자지 못한 듯 퀭해 보였다. 천막 안의 열기에 뺨은 붉게 상기되고, 오랜 기다림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카이델의 눈에는 숨이 멎을 듯 아름다웠다. 카이델이 가늘게 떨리는 입술을 뗐다.
“내가, 많이 늦어서…….”
엘레노어가 힘껏 달려가 그를 끌어안았다. 카이델의 손이 그런 엘레노어의 머리를 제게로 꼭 끌어당겼다.
“미안해.”
엘레노어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따지듯 소리쳤다.
“내,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당신이 정말 돌아오지 않을까 봐, 내가 얼마나…….”
“잘못했어.”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머리 위에 길게 입술을 눌렀다.
“내가 다 잘못했어, 엘레노어.”
쿵쿵쿵쿵.
그의 가슴에 귀를 대자, 강하게 뛰어대는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잔뜩 굳어 있던 엘레노어의 몸에서 그제야 조금씩 힘이 빠져나갔다.
카이델의 셔츠가 엘레노어의 눈물로 젖어 살갗에 달라붙을 지경이 되어서야 엘레노어는 고개를 들었다.
“다친 곳은……?”
“없어.”
엘레노어의 허리를 감싼 카이델의 팔에 조금씩 더 힘이 실렸다.
“보고 싶었어.”
“…….”
“사랑하는 그대에게 돌아가고 싶어서, 이 악물고 싸워 이겼어. 그대가 벨리움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는데, 참을 수가 없어서.”
카이델의 손가락이 엘레노어의 얼굴선을 부드럽게 덧그렸다. 그녀의 눈, 코, 입을 차례로 스치는 손끝이 델 듯이 뜨거웠다.
카이델의 눈빛은 집요할 정도로 엘레노어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잠깐이라도 눈을 떼면 그녀가 꿈처럼 사라져 버릴까 봐 불안한 듯했다.
뒤늦게 약간 민망해진 엘레노어가 슬며시 얼굴을 붉혔다.
“순 말만. 이렇게 혼자 늦어 놓고…….”
“미안해, 엘레노어.”
까슬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몇 번이고 입에 담았다. 엘레노어가 그의 목덜미를 감아 당겼다.
“아……?”
그런데, 카이델은 몸에 힘을 주고 버텼다. 엘레노어가 눈썹을 찌푸리며 카이델과 눈을 맞췄다.
그러자 카이델이 민망한지 슥 시선을 돌렸다.
“……미안. 열감기가 있어서.”
그대에게 옮을까 봐.
카이델의 말에 엘레노어가 곧장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짚었다. 엘레노어의 손이 제법 따뜻했는데도 열감이 느껴졌다.
엘레노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정말이지…… 걱정을 놓을 수가 없게 해.”
엘레노어가 속상한 얼굴로 카이델의 뺨을 감쌌다. 아픈 탓인지 평소보다 약간 까칠해져 있었다.
“당신 나한테 평생 혼나야 해요. 내 원망 다 받아내야 하니까 마음 단단히 먹어요.”
엘레노어가 카이델을 타박했다. 카이델이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감당해 볼게.”
“평생 벌줄 거예요.”
“무슨 벌이든 달게 받지.”
카이델의 말에 엘레노어가 눈썹을 슥 치켜올렸다.
“정말?”
카이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엘레노어의 심장 위에 내려앉았다. 엘레노어는 새삼 그에게 다시 설레고 말았다.
이 목소리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엘레노어의 안에서 뜨거운 감정이 뭉클하며 끓어올랐다.
“……그럼 이번엔 당신이 내 걱정 좀 해요. 내가 속 태운 것만큼, 당신도 속 좀 타 보란 뜻이에요.”
알 수 없는 엘레노어의 말에 카이델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하지만 카이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엘레노어가 있는 힘껏 그를 끌어당긴 탓이었다.
그 순간 천막이 떠나가라 함성이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군인들은 화끈한 입맞춤에 큰 소리로 호응했다.
엘레노어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더 과감하게 카이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안 되는데…….’
처음에는 당황해 굳어 있던 카이델은 이내 포기하고 엘레노어의 허리를 제게 바짝 끌어당겼다. 사실 더 급한 쪽은 그녀보다 그였으므로.
평소보다 훨씬 뜨겁고 조금 까슬한 입술이 작고 부드러운 입술을 다급히 머금었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순례자가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갈급하고 또 간절한 입맞춤이었다.
서로의 체향이 폐부를 가득 채우고, 맞붙은 피부에서 피어난 열기가 뱃속을 뭉근하게 끓어오르게 했다. 온몸의 신경은 오로지 서로를 느끼기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엘레노어가 살짝 고개를 물리고 상기된 얼굴로 속삭였다.
“사랑해요, 카이델.”
그 순간 밭은 숨을 몰아쉬던 카이델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방금…….’
카이델은 제가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카이델은 돌처럼 굳어 엘레노어를 바라보았다.
엘레노어는 온몸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고서 또박또박 말을 이어 갔다. 이미 오래 참았기에, 더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돌아오자마자 말해 주고 싶었어. 영영 말할 수 없을까 봐 너무 무서웠어요.”
카이델이 나직이 엘레노어의 이름을 불렀다.
“……엘레노어.”
짐승이 으르렁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신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바닥을 긁어내리는 그의 목소리에 이 순간 카이델이 느끼는 감정이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사랑해요. 정말 많이.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만큼…….”
“그건 불가능해.”
카이델의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엘레노어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말랑한 뺨이 살며시 그의 손바닥에 기대오는 것이 느껴졌다.
엘레노어의 맑은 눈동자에 의아함이 스쳤다. 카이델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대에게 난 매번 질 테지만, 그것만은 져 줄 생각이 없거든. 평생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은 나일 거야. 처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
엘레노어의 말간 얼굴을 내려다보는 카이델의 시선에 서서히 열기가 깃들었다.
“부디 나로 영영 그대를 사랑할 수 있게 해.”
카이델의 엄지가 엘레노어의 턱을 가볍게 눌렀다. 기다렸다는 듯 붉은 입술이 벌어지고, 카이델은 다시 한번 엘레노어의 입술 사이를 진득하게 파고들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이들이 휘파람을 불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텁텁하던 천막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달콤함으로 물들었다.
‘사람이 이 이상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럼 정말 큰일 날 것 같은데.’
머릿속의 모든 생각이 녹아서 척추를 타고 흘러내리는 듯했다. 엘레노어는 한계를 모르고 치솟는 감각을 느끼며 힘껏 카이델을 끌어안았다.
뜨거운 그의 피부로 이대로 녹아들고 싶었다. 내내 친절했던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순간 두 사람을 둘러싼 이들은 전부 방해일 뿐이었다.
더 행복할 수 없을 것 같다 확신한 순간, 카이델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해, 엘레노어.”
그녀의 확신이 와르르 무너졌다.
“나도 사랑해요.”
두 사람의 행복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