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137화 (137/168)

137화

에밀리의 짧은 한마디가 엘레노어의 귓가에 박혔다. 하지만 그 의미가 도통 와닿지 않았다.

아무런 소식이 없다니?

엘레노어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악 가셨다. 전신의 피가 한순간 싸늘하게 식었다.

“아니야.”

엘레노어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놀랍도록 차분한 목소리였다.

“아니야, 에밀리. 네가 잘못 안 거야.”

“아가씨…….”

엘레노어의 입매가 제멋대로 휘어졌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카이델이 그럴…… 리가.”

목소리 끝이 형편없이 갈라졌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그럴 리가…… 정말 없나?

정말이면 어쩌지?

정말, 그 사람이…….

엘레노어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안쓰러워 어쩔 줄 모르는 에밀리를 보자, 아주 조금씩 현실감이 들이닥쳤다.

엘레노어가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몸을 떨기 시작했다. 떨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엘렌……?”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아드리안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왜 몸을 그렇게 떨어?”

“…….”

“엘렌?”

아드리안은 에밀리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었다.

마지막 귀국대가 탄 배가 강한 풍랑에 뒤집혔다는 것.

대부분의 이들은 항구로 무사히 돌아왔지만, 몇몇 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

카이델도 사라진 이들 중 하나라는 것.

상황을 파악한 아드리안의 얼굴도 서서히 희게 질려갔다. 아드리안의 시선이 곧장 엘레노어에게 향했다.

“엘렌.”

“…….”

“아직 확실한 소식은 모르잖아. 벌써 그렇게 무너지면 안 돼.”

아드리안의 손이 엘레노어의 양쪽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가 약간의 압박감을 가하자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아드리안의 금빛 눈동자가 엘레노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도 많이 놀랐지만, 엘레노어를 진정시키기 위해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든든한 손이 그녀를 지탱하자, 엘레노어의 눈에서 후드득 눈물방울이 굴러떨어졌다. 엘레노어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알아야 하는데, 도저히 모르겠어.”

엘레노어는 제가 지독히도 쓸모없게 느껴졌다. 지금껏 했던 공부는 이런 순간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카이델을 생각하기만 해도 숨이 막혔다. 도저히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리안.”

멀쑥한 제복을 입고, 군청색 띠를 두른 채 수많은 훈장을 가슴에 달고 돌아올 그를 얼마나 상상했는지 모른다.

돌아온 그에게 달려가 폴짝 뛰어 안기려 했다.

팔로는 그의 목을 꽉 끌어안고, 다리로는 그의 허리를 감고, 그의 얼굴 위에 수백 번의 자잘한 키스를 흩뿌릴 생각이었다.

보고 싶었다고, 왜 이렇게 늦었냐고,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느냐고 괜한 투정도 부리려 했다.

순진한 그가 사과하기 위해 입을 벌리면 그대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도록 오래오래 입을 맞출 생각이었는데…….

“어떻게 해야 해?”

갑자기 세상이 뒤집혔다. 어깨 위로 내려앉은 하늘의 잔해를 털어내지도 못하고, 엘레노어는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런 엘레노어를 속상한 듯 보던 아드리안이 손을 내밀었다.

“가자.”

엘레노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어딜……?”

아드리안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항구. 가서 직접 알아보자. 여기서 넋 놓고 기다리는 것보단 그편이 빠를 테니까.”

아드리안의 이성적인 목소리가 간신히 엘레노어의 정신을 붙들었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아드리안의 말이 맞았다.

여기서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눈물만 흘리는 것은 자신답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그것을 알기 위해 움직여야 했다.

엘레노어는 마음을 강하게 다잡았다.

“마차를 부를게.”

“마차는 느려.”

엘레노어가 고개를 저었다. 아드리안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고 말은 위험해. 힘들기도 하고.”

엘레노어가 크게 다쳤던 일을 상기한 듯, 아드리안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너랑 같이 타면 되잖아.”

“그래도……. 마차가 훨씬 편할 텐데.”

“리안, 부탁할게. 나는 어차피 뭘 해도 편하지 않을 거야. 알잖아.”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손목을 꽉 붙잡으며 애원했다. 흔들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아드리안이 꽉 잠긴 목소리로 승낙했다.

“……그래.”

***

두 사람은 말을 타고 한참을 달렸다. 엘레노어는 무서운 것도 잊고 아드리안을 재촉했다.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고 달려 작은 마을에 도착한 뒤, 아드리안이 말의 속도를 한껏 늦추었다.

“잠시 쉬어가야겠다. 날이 어두워져서 더는 무리야. 말도 쉬어야 하고.”

“응…….”

아드리안이 여관 쪽으로 향하며 물었다.

“1층 식당에서 먹고 올라갈래? 아니면 내가 받아서 방으로 가져다줄게. 어떻게 할래?”

엘레노어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배 안 고파.”

“안 돼.”

아드리안이 퍽 단호하게 말했다.

“너 안 먹으면 나도 안 먹어. 이건 양보 못 해.”

“하지만 정말 입맛이…….”

아드리안이 푹 내쉰 한숨이 엘레노어의 뒷덜미에 닿았다. 그가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엘렌, 너 나한테 이 정도는 해 줘야 할 의무 있어. 오늘 온종일 고생했는데 더는 속 태우지 마. 너랑 입씨름하고 싶지 않으니까.”

무엇도 입에 들어갈 것 같지 않았지만, 엘레노어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로지 아드리안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

“……먹고 올라갈게.”

“그래, 잘 생각했어.”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에게 팔을 뻗었다. 엘레노어는 그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해 끌어 내려졌다. 허벅지가 달달 떨렸다.

그 와중에도 카이델과의 추억이 겹쳐져서, 엘레노어가 이를 꽉 깨물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다시 엉엉 울어 버릴 것 같았다.

“최대한 먹기 편한 거로 주문했어. 아무래도 소화가 잘 안 될 테니까.”

“응. 신경 써 줘서 고마워.”

“내일도 한참 가야 하니까 한 끼라도 든든하게 먹어 둬.”

엘레노어의 잔에 물을 따라 건네며, 아드리안이 나직이 덧붙였다.

“그래야 버티지.”

그래. 버티려면 먹어야 했다.

엘레노어는 곧 나온 수프를 억지로 입안에 흘려 넣었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꾸역꾸역 삼켰다.

아드리안이 빵을 찢어 건네면 그것도 받아먹었다. 먹을수록 속이 조금씩 더부룩해졌지만, 위장이 차는 것이 느껴졌다.

“그나저나 그 소식 들었나?”

“무슨 소식 말인가?”

“발렌타인 공작 각하께서 실종되셨다던데? 배가 뒤집혔다던가. 근처에서 부역하는 친구에게 들었는데, 그 부하들이 난리도 아니라는군.”

온갖 말소리, 웃음소리로 소란한 와중에도 ‘발렌타인 공작 각하’라는 말이 엘레노어의 귀에 정확하게 꽂혔다. 묽은 수프를 휘젓던 엘레노어의 손이 멈칫했다.

“요 며칠 날씨가 오락가락하기는 했지. 하늘도 무심하셔라! 그 많은 못된 놈들을 두고 하필…….”

“그러니까 말이야. 온갖 흉흉한 말들이 다 도는데, 사실이 아니기만을 바라야지.”

“참 큰일이구먼. 오늘도 파도가 거세던데.”

아드리안도 들은 것인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재빨리 엘레노어의 얼굴을 살폈다.

엘레노어는 간신히 붙잡고 있던 마음이 다시 격렬하게 덜컹거리는 것을 느꼈다. 세상이 다시 한번 뒤흔들렸다.

“우욱!”

먹었던 것이 속에서 역류하는 느낌에 엘레노어가 입을 틀어막고 달려 나갔다. 달려 나가 모퉁이를 돌자마자, 엘레노어는 벽을 붙잡고 먹은 것을 죄다 게워냈다.

아드리안이 곧장 뒤따라와서 엘레노어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엘렌.”

“미안해, 리안. 나 도저히 더는 못 먹겠어. 노력해 봤는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엘레노어의 말에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수건을 꺼내 엘레노어의 입가를 꼼꼼히 닦아 주었다.

“그래. 일단 잠부터 좀 자자.”

“아침 일찍 출발할 거지?”

“응, 그러자.”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을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 그마저 없었다면 어땠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고마워, 리안. 정말로.”

***

첫닭이 울자마자 출발한 두 사람은 점심때쯤 항구에 도착했다.

아드리안의 귀환 날에는 축제나 다름없었던 분위기가 장례식처럼 축 가라앉아 있었다. 팔에 휘감기는 공기가 무겁고 습했다.

항구에는 수많은 천막이 쳐져 있었다. 칙칙한 밤색 천막들은 꼭 끝없는 무덤처럼 보였다.

엘레노어가 물었다.

“이 천막들은 다 뭐야?”

“물어보고 올게.”

팔짱을 끼고 서성이는 군인을 향해 다가간 아드리안이 그와 한참이나 대화를 나눈 뒤 돌아왔다.

“마지막 귀국대에 속해 있던 군인들이래. 항구로 무사히 도착한 인원들이 이곳에서 머물고 있나 봐.”

엘레노어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들 자발적으로 남기를 선택했대. 총사령관이 해산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니, 돌아갈 수 없다고.”

“아…….”

가슴이 뭉클했다. 엘레노어가 다시금 붉어지는 눈을 감추려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너와 같은 마음인 거야. 각하께서는 모두에게 존경받는 분이셨어.”

나를 포함해서.

“각하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강하고 용감한 사람이야. 돌아오실 거야.”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같은 마음인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큰 위로가 되었다.

아드리안은 천막에 엘레노어가 쉴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때 누군가 아드리안에게 아는 척을 해 왔다.

“블레이크 경 아니십니까?”

“헨슨 소령.”

아드리안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손을 단단히 맞잡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었다.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각하의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소령께서는?”

“마찬가지입니다. 방금도 수색선 두 척을 보냈습니다. 오늘은 진척이 있기를 바라야지요.”

소령의 말에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하의 소식을 듣자마자 만사 제쳐두고 달려온 이들이 몇이나 되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각하께 은혜를 입은 이들이 많다는 것이겠지요.”

소령과 대화를 마친 아드리안이 천막을 빠져나갔다. 천막 뒤편에 누군가 돌을 쌓아 작은 탑을 만들어 놓은 것이 보였다.

누군가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을 기리며 만든 위령탑인 듯했다. 아드리안이 의관을 바로 한 뒤 반듯한 자세로 짧게 묵념했다.

아드리안이 카이델을 생각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엘렌이 저렇게 우는 걸 보려고 포기한 게 아닙니다.”

아드리안이 주머니에서 반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강하게 내리쬐는 태양 빛에 자그마한 보석이 반짝반짝 빛났다.

엘레노어에게 선물하려 한참 전에 샀던 반지였다. 부담스러워할까 봐 늘 품고 다닌 것이 2년이 더 되었다.

아드리안이 탑 위에 조심스럽게 반지를 올려놓았다. 잠시 위태위태하게 흔들리던 반지가 이내 균형을 찾았다.

“이 악물고 물러난 보람도 없게 만드실 겁니까. 그렇게 내내 저를 괴롭히셔 놓고요.”

겨우 당신을 인정하게 되었는데.

아드리안이 쓰게 웃으며 돌아섰다.

그때, 아드리안의 눈에 익숙한 인영이 들어왔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