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마차에서 내리자 쨍한 볕이 엘레노어의 머리 위로 곧장 내리쬐었다.
“윽, 햇빛.”
그냥 그늘에 서 있을까도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그러다간 자칫 아드리안을 놓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사람들 틈새에 끼여 기다린 지 30분째, 맨 앞줄에 선 누군가가 외쳤다.
“배가 들어온다!”
그 순간 취기가 반쯤 날아갔다. 엘레노어는 항구로 들어오는 함선을 보려 열심히 까치발을 했다.
“와아아아!”
배가 가까이 올수록 사람들의 함성은 점점 더 커져갔다. 엘레노어도 열심히 박수 소리를 보탰다.
배에서 군인들이 내리기 시작하고, 여기저기서 반가운 얼굴을 발견한 이들이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엘레노어도 고개를 들어 아드리안을 찾기 위해 애썼다.
‘앗!’
혹시 찾지 못하면 어쩌나 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아드리안은 무리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었다.
“아드리안!”
엘레노어가 있는 힘껏 아드리안을 불렀지만, 아드리안은 듣지 못한 듯 무표정한 얼굴로 걸음을 재촉했다.
“리안!”
문득 아드리안의 걸음이 느려졌다. 엘레노어가 덩치 큰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그를 따라갔다.
“아드리안 블레이크!”
우뚝.
그 순간 아드리안이 멈춰 섰다. 엘레노어는 이때다 싶어 폴짝폴짝 뛰며 외쳤다.
“여기야, 여기!”
목이 아플 정도로 크게 외치자, 애먼 곳을 두리번거리던 아드리안의 시선이 그녀 쪽으로 향했다.
“여!기!”
켁.
온 힘을 다해 폴짝거리던 엘레노어가 잔기침을 쿨럭쿨럭 토해냈다.
그런 엘레노어 앞에 쇠로 된 물병이 불쑥 내밀어졌다.
“마셔.”
어느샌가 다가온 아드리안이 그녀에게 물을 건넸다. 엘레노어는 준비한 인사도 잊고 물부터 벌컥벌컥 들이켰다.
“오래 서 있었어? 얼굴이 익었네.”
“그렇게 오래는 아닌데…… 햇빛이 강해서.”
엘레노어의 말에 아드리안이 자리를 옮겨 그녀에게 그늘을 드리워 주었다.
“…….”
“…….”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인 다른 사람들과 달리, 엘레노어와 아드리안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얼굴을 힐끔힐끔 살폈다. 그의 표정이 미묘했다.
‘전처럼 차갑지는 않은데…….’
엘레노어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드리안이 눈물 나게 반가웠지만, 그의 마음이 어떤지 모르니 머뭇거리게 되었다.
그때 아드리안이 툭 입을 열었다.
“서운하게 거기 서서 뭐해. 이리 와.”
아드리안이 팔을 벌렸다.
엘레노어의 입술이 제멋대로 움찔움찔하기 시작했다. 동그란 코끝이 붉어지고,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크.”
그것이 거하게 눈물이 터지려 할 때의 전조라는 것을 알고 있는 아드리안이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와락.
엘레노어가 눈앞의 아드리안을 힘껏 끌어안았다. 익숙한 그의 향기가 풍기자 엘레노어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흐어어어엉!”
어린아이 시절로 돌아간 듯, 엘레노어는 꺼이꺼이 서럽게도 울었다. 아드리안이 픽 웃으며 그런 엘레노어를 마주 안아 주었다.
토닥토닥, 엘레노어의 등을 두드려 주던 아드리안이 별안간 코를 킁킁거렸다.
“엘렌.”
“흐끅. 왜?”
“……술 마셨어?”
엘레노어가 어깨를 움찔했다.
“으응. 조금.”
“왜?”
“무서워서.”
엘레노어의 대답에 아드리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서울 게 뭐가 있어?”
우물쭈물하던 엘레노어가 작게 속삭였다.
“……네가 별로 안 반가워할까 봐.”
그 순간 아드리안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제길…….’
한참을 멍하니 있던 아드리안이 목까지 차오른 험한 말을 삼켰다. 제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게 네가 반갑지 않을 리가.’
아드리안의 좀스러움은 결국 엘레노어에게 상처를 남겼다.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품은 그녀를 보자, 숨이 막혔다.
엘레노어는 그에게 무엇도 잘못하지 않았다. 멋대로 좋아하고,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상처받은 것은 아드리안이었다.
“엘렌.”
“응.”
“미안해. 내가 바보였어.”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어깨를 붙잡고 눈을 맞췄다.
술기운 탓인지, 따가운 볕 탓인지 발갛게 익은 얼굴로 엘레노어가 눈물을 툭툭 떨구었다.
“너를 빼고 내 인생을 설명할 수는 없어. 넌 나를 견디게 하고, 웃게 하고, 애쓰게 하고, 성숙하게 해.”
엘레노어가 울자, 아드리안의 눈시울도 조금씩 뜨거워졌다.
“살면서 그런 존재를 만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모르지 않는데…….”
내가 욕심에 눈이 멀었었나 봐.
아드리안의 왼뺨을 타고 눈물 한 줄기가 천천히 흘러내렸다.
“엘렌, 네가 용서해 준다면, 그리고 허락해 준다면……. 언제까지나 네 제일 좋은 친구이고 싶어. 그럴 수 있으면 내겐 더없는 영광일 거야.”
아드리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용서해 줄래?”
엘레노어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젖은 뺨이 햇빛에 반짝반짝 빛났다.
“얼마든지.”
엘레노어가 팔을 뻗어 아드리안을 다시 한번 꼭 안아 주었다. 아드리안이 떨리는 손으로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빗어 내렸다.
“많이 보고 싶었어, 엘렌.”
아드리안은 엘레노어를 꽉 안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너의 우정도 내겐 과분하다고. 네가 행복하다면, 나도 행복할 수 있을 테니 괜찮다고.
충분할 거라고.
***
엘레노어는 아드리안을 학원으로 초대했다.
“여기가 네 건물이라고?”
“응!”
“위치 좋네. 대로변이고, 광장과도 가깝고……. 꽤 비쌌겠는데?”
상인의 본능 같은 것인지, 아드리안은 보자마자 주변 상권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 같은 아드리안이 괜찮다면 정말로 괜찮은 것이기에, 엘레노어가 뿌듯하게 웃었다.
“아가씨, 오셨어요? 어머, 소후작님도 함께 오셨네.”
엘레노어를 향해 인사를 건네던 마리가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아드리안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안녕, 마리. 오랜만이네. 에밀리도 있구나.”
아드리안이 씩 웃으며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 리안. 이쪽은 데비 백작가의 버나데트야.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
“그래? 감사한 분이네.”
아드리안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아드리안 블레이크라고 합니다.”
아드리안이 해사하게 웃어 보이자, 버나데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저런 미모에 면역이 없는 버나데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소, 소후작님이야 당연히 잘 알고 있어요. 반갑습니다. 버나데트 데비예요.”
아드리안이 엘레노어를 돌아보며 물었다.
“엘렌, 한 바퀴 돌아봐도 돼?”
“응, 그럼. 같이 돌아보자.”
엘레노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리안이 이곳저곳을 구경하는 동안, 엘레노어는 버나데트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걸었다.
버나데트가 소곤소곤 물었다.
“소후작님이야?”
“응?”
“그때 말했던 네 남자친구!”
앞서 걷던 아드리안이 홱 돌아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엘렌과 저는 그냥 친구예요.”
버나데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앗, 들리셨구나. 오해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버나데트가 아드리안에게 말을 붙였다.
“소후작님은 아세요? 엘레노어 남자친구가 누군지?”
“저야 물론 알지요.”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어떤 분이세요? 너무 궁금해요!”
“버나데트.”
당황한 엘레노어가 만류하듯 버나데트의 팔을 잡았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아무래도 괜찮다는 듯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은 사람입니다. 만나 보시면 아실 테지만……. 어디 하나라도 빠졌으면 제가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을 겁니다.”
잠시 생각하던 아드리안이 힘주어 덧붙였다.
“그래도 제 눈에는 엘렌이 아깝습니다. 백 배, 아니 천 배는요.”
“그럼요. 웬만큼 괜찮다는 사람 가지고는 엘레노어에게 댈 수 없지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버나데트와 아드리안은 한참이나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화제는 오로지 엘레노어였다.
“아이들한테도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몰라요. 가끔은 질투가 날 정도라니까요?”
“그렇습니까? 엘레노어가 전부터 아이들이랑 잘 지내기는 했습니다.”
“원래 애들이 예쁜 건 제일 정확하게 알아본다잖아요. 분명히 그래서 그런 거예요.”
엘레노어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라앉히려 부지런히 손부채질을 했다.
그런 엘레노어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버나데트가 큰 소리로 손뼉을 치며 제안했다.
“아! 조금 있으면 아이들이 올 텐데, 괜찮으시면 수업도 참관하지 않으시겠어요?”
“좋지요. 어차피 한동안은 할 일도 없어서.”
아드리안이 엘레노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빙글빙글 웃는 낯에서는 아무런 그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엘렌, 그래도 돼?”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돼. 대신 너도 거들어. 어린애들 다루는 건 나보다 네가 한 수 위잖아.”
“좋아.”
그렇게 아드리안이 학원 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그래서요? 선생님이 나쁜 놈들을 싹 다 무찔렀어요?”
“다 함께 무찔렀지.”
“우와! 그럼 검도 직접 들어 봤어요? 용사님들이 드는 검!”
“그럼.”
엘레노어의 예상대로, 아이들은 아드리안에게 흠뻑 빠져 버렸다. 엘레노어조차 순식간에 밀어내 버리는 인기였다.
남자아이 여자아이 할 것 없이 아드리안이 풀어놓는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간식 시간에도 아드리안 앞에만 줄이 길었다.
엘레노어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어. 다들 리안한테 푹 빠졌네.”
버나데트가 씩 웃으며 엘레노어를 팔꿈치로 톡 건드렸다.
“그래도 덕분에 우린 편하다, 그치?”
“응. 그렇긴 한데 약간 배신감도 느껴진다……. 언젠 결혼하자더니!”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던 로벨이 가장 열성적이었다. 아드리안의 머리를 흉내 내기도 하고, 그의 관심을 끌어 보려 과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다들 귀엽다니까.’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을 둘러싸고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이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대로만 계속 행복했으면 좋겠다.’
카이델도 곧 돌아올 테고, 아드리안과도 어색함을 풀었다.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거리던 힐데가르트와 이즈멜도 이제는 제법 마음이 맞는 친구가 된 듯했다.
학원도 더할 나위 없이 잘 굴러가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아이들의 아버지들이 돌아오면서, 아이들의 얼굴이 한층 더 밝아졌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가씨! 엘레노어 아가씨!”
백작저로 심부름을 보냈던 에밀리가 교실 문을 쾅, 열고 뛰어 들어왔다.
“에밀리? 무슨 일이야? 세상에 이 땀 좀 봐.”
깜짝 놀란 엘레노어가 벌떡 일어나 에밀리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하지만 에밀리는 그것을 받아 드는 대신 고개를 저으며 숨을 골랐다.
“어쩌면 좋아요, 아가씨…….”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응?”
엘레노어가 에밀리의 팔을 붙들고 물었다. 에밀리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공작 각하께서 탄 배가 풍랑에 뒤집혔대요. 그런데…….”
“……뭐?”
툭.
엘레노어의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으시대요, 아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