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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135화 (135/168)

135화

벨리움의 승리.

전쟁의 끝.

잠깐의 정적 끝에 우레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귀가 얼얼하고 가슴이 저릿저릿 울릴 정도였다.

“아가씨! 이제 끝이래요!”

“드디어……. 더 길어질 거라더니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끝이 난 걸까요?”

에밀리와 마리가 엘레노어의 양팔을 잡고 흔들었다.

주변 분위기에 압도된 탓일까. 엘레노어는 어쩐지 아무것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때 엘레노어의 뒤에 서 있던 버나데트가 그녀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이제 네 남자친구 만나 볼 수 있는 거야?”

카이델이 돌아온다.

그 사실을 뇌에서 받아들인 순간 엘레노어의 척추뼈를 타고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이제 곧 카이델을 볼 수 있어.’

엘레노어의 자그마한 얼굴 위로 환희가 번져 갔다. 행복감에 가슴이 빠듯하게 부풀었다.

엘레노어가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이제 그 사람, 돌아올 거야.”

오자마자 꽉 안아 줘야지.

정말 많이 보고 싶었다고, 매일매일 그리웠다고, 같이 해 보고 싶은 일의 목록을 산더미처럼 쌓아 놨으니 긴장하라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

벨리움 총사령관이 각성했다.

히스커스와 뫼젠 군영에 도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그 소문은 철저히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다.

“아니, 그분이 각성할 필요가 있나? 거기서 더 잘할 수가 있단 말이야?”

“그렇다던데? 답답한지 그냥 자기가 다 나서서 쓸어 버린다더군.”

“사람 맞나……?”

“몰라. 아닌 것 같아.”

벨리움의 군사들은 그보다는 조금 더 많은 디테일을 알았다.

“황태자 전하로부터 서신이 도착한 날부터였지.”

“그날 표정이 뭔가 다르셨는데.”

“역시 엄청난 충성심……! 우리도 본받아야 해.”

그리고 아드리안 블레이크는 완벽한 진실을 알았다.

“엘레노어는 압니까?”

“무엇을?”

“총사께서 이리도 무리하고 계신다는 것 말입니다. 본인이 전쟁을 최소 반년은 단축했다는 것 말입니다. 알고는 있습니까?”

아드리안의 말에 카이델이 으르렁거리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의 눈매가 대번에 매서워졌다.

“경고하는데 입도 뻐끔하지 마라.”

아드리안이 결재받은 서류들을 각 맞춰 정돈하며 제안했다.

“다음 전투는 히스커스에 선봉을 맡기시지요.”

카이델이 단호하게 거부했다.

“싫다. 그럼 또 몇 주는 더 늦춰질 테니.”

“하지만 그게 히스커스 총사령관에게도 예의이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연합인데 적당히…….”

“나는 예의를 모른다. 그런 게 예의라면 전쟁 초에 실컷 차려 주었으니 됐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카이델의 입가가 약간 씰룩였다.

“엘레노어가 벨리움으로 돌아왔다잖아. 내가 돌아오는 순간, 그곳에 있고 싶어서.”

카이델의 눈매가 아래로 슬쩍 휘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던 얼굴이 순식간에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지금 그보다 중요한 게 있나?”

아드리안은 그런 상관을 바라보며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재수 없었다.

“알고 계십니까?”

“무엇을?”

“눈꼴시어 못 봐드리겠습니다.”

아드리안의 말에 카이델이 소리 내 웃었다.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낮게 울렸다.

여전히 두 사람은 틈만 나면 서로를 향해 발톱을 세웠다. 하루도 티격태격하지 않고 지나가는 일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처음처럼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는 일은 없었다. 아드리안은 조금씩 카이델에게 곁을 내주었고, 카이델은 기꺼이 그것을 받아 주었다.

“시끄럽다. 나가.”

아드리안이 대충 묵례를 건넨 뒤 막사 안을 빠져나갔다.

카이델은 간이침대에 몸을 뉘고 베개 아래 둔 엘레노어의 편지를 꺼내 들었다. 눈을 감고도 줄줄 욀 지경이었지만, 볼 때마다 새로웠다.

「카이델.

잘 지내고 계실까요? 전하께서 별말 없으신 것을 보면, 다친 곳 없이 건강하신 것일 테죠.

저도 잘 지내고 있답니다. 확실히 벨리움의 봄은 델른보다 따뜻하네요.

갑자기 웬 벨리움이냐고요?

카이델, 저는 연구소 일을 그만두고 내려왔답니다.

일이 힘들지는 않았어요. 나름대로 재밌기도 하고, 사람들도 다 좋았고…….

하지만 도저히 5년이라는 시간을 그렇게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어요.

당신은 꾹 참고 든든히 기다려 주시리란 것을 알지만, 제가 기다릴 수가 없었던 거예요.

책보다 당신을 알아가는 게 내게 훨씬 행복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카이델, 당신이 벨리움으로 귀환하는 날, 꼭 그 자리에 있고 싶어요.

그리고…… 당신에게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는데, 편지로는 싫어요.

궁금하시면 어서 돌아오셔야 해요.

물론 건강하게요!

엘레노어 에버렛 드림」

그대를 정말 어찌하면 좋을까.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편지로 얼굴을 푹 덮었다. 편지 아래로 드러난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온몸이 뻐근해졌다.

“아…… 진짜.”

미치겠네.

마음은 한계를 모르고 커져만 갔다. 이 이상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다음 날이 되면 그녀를 더 사랑하게 된 스스로를 발견했다.

카이델은 이런 행복이 자꾸 익숙해진다는 게 두려웠다. 다 가졌으니 욕심내지 말자, 수백 번 마음을 다잡아도 더 바라게 되는 것에 덜컥 겁이 났다.

“무슨 수를 써서든 빨리 돌아가야겠군…….”

그대의 곁으로.

그리고 아주 오래도록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품 안에 그대를 끌어안고, 그대의 입술 안에 고인 모든 말을 샅샅이 훑어 빼앗고, 그대가 흘리는 모든 숨들을 전부 받아 마셔야지.

타는 듯한 이 갈증이 전부 해소될 때까지.

빠듯하게 부푼 가슴이 내려앉을 때까지.

그러니까, 영원히.

***

아드리안은 1차 귀국대에 포함되었다. 원래라면 마지막까지 남아 있어야 했으나, 카이델이 배려한 것이었다.

‘드디어 돌아가는군.’

벨리움으로 돌아가는 함선 안에서 아드리안은 그간의 일을 회상했다.

그토록 생생했던 전투의 풍경이 벌써 아득하게 느껴졌다. 난간에 기대어 눈부시게 푸르른 바다를 보고 있자니 모든 게 꿈같았다.

‘돌아가면…… 엘렌을 봐야겠지.’

엘레노어의 얼굴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내 제일 좋은 친구.’

엘레노어는 아드리안이 태어나 처음 사귄 친구였다. 가끔은 선생님 같기도 했다.

좀 이상한 구석이 많은, 애늙은이 같던 아이.

하지만 엘레노어는 아드리안에게 늘 든든한 기댈 곳이었다. 가장 빛나던 시간에도, 가장 어둡던 시간에도 엘레노어는 변함없이 곁을 지켜 주었다.

‘그리고 내 첫사랑.’

생각해 보면 아드리안은 모든 감정을 그녀에게서 배웠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즐거움, 분노, 슬픔, 외로움, 그리움, 행복, 그리고 사랑. 이제는 체념까지도, 전부 그녀 때문에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몇 년이 흐른 거지?’

곰곰이 헤아리던 아드리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참 오래도 좋아했고, 많이도 좋아했다.

하지만 그 과정이 그리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엘레노어를 좋아하는 일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때로는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호흡 같은 것이었으니까.

그때 뒤에서 아드리안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블레이크 경. 이제 곧 항구에 닿을 예정이랍니다.”

“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맨디아크 경.”

어느덧 배가 벨리움의 항구에 거의 도달했다는 소식이었다. 아드리안이 군복의 깃을 슥슥 가다듬었다.

수도까지는 마차로 하루를 꼬박 더 가야 할 테지만, 벌써부터 집에 돌아온 것 같은 나른함이 찾아왔다.

“와아아아!”

“군인들이 돌아왔다!”

저 멀리 항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배를 향해 손을 흔들며 환호하는 인파가 보였다.

군인들은 환한 얼굴로 그런 군중들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눈을 부릅뜨고 연인이나 가족을 찾는 이들도 있었다.

아드리안은 담담하게 짐을 챙겨 들었다. 가족들에게도 오늘 도착한다 기별하지 않았기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은 없을 터였다.

돌아온 이들을 반기는 이들로 떠들썩한 항구, 아드리안이 슥슥 사람들을 헤치고 걸었다. 마을로 들어가면 말 한 마리쯤은 빌릴 수 있으리라.

“리안!”

성큼성큼 내딛던 아드리안의 걸음이 일순 멎었다. 시끄러운 주변의 소음을 가르고, 익숙한 목소리가 고막에 내리꽂혔다.

‘잘못 들은 건가?’

아드리안이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아드리안 블레이크!”

아니다. 확실히 그를 부르는 소리였다.

아드리안이 돌아서서 다급하게 주변을 살폈다.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여기야, 여기!”

아드리안의 고개가 소리의 근원을 향해 스르륵 돌아갔다.

그러자 제 덩치의 두 배만 한 군인들 틈바구니에 끼여 폴짝폴짝 뛰고 있는 엘레노어가 보였다.

“여!기!”

기다리는 동안 볕에 익어 붉어진 얼굴, 땀으로 끈적해진 이마에 구불구불 달라붙은 금색 머리카락, 그 와중에도 싱그럽게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까지.

그립던 얼굴을 찾아낸 아드리안의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상쾌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그의 머리칼을 흩어놓았다.

그 순간 아드리안은 생각했다.

아, 이제는 정말 집에 돌아왔노라고.

***

엘레노어는 카이델에게서 아드리안의 귀국일을 미리 전달받았다.

‘보고 싶어. 어떻게 지내는지 듣고도 싶고…….’

하지만 아드리안과의 마지막 기억이 그리 좋지 않았기에, 엘레노어는 조금 망설여졌다.

‘그냥 가족들 얼굴 먼저 보는 게 훨씬 달갑겠지.’

결국 클로드에게 말하자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가 마중하러 가지 그러냐? 그놈은 그걸 백 배는 더 좋아할 텐데.”

그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서요…….

엘레노어가 어색하게 웃었다. 클로드는 아드리안과 엘레노어의 관계가 서먹해졌다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그러자 클로드가 무릎을 탁 치며 물었다.

“아, 요즘 일이 바빠서냐? 그런 거라면 뭐 이해한다만…….”

클로드의 말에 엘레노어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갈게요. 돌아오자마자 마중해 줘야죠, 당연히.”

그래, 어색할지도 모른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드리안의 묵은 감정을 털어내기에는 부족했는지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전쟁터에서 돌아온 친구를 가장 먼저 맞아 주지 못한다면, 다친 곳이 없는지 살펴 주지 못한다면 내내 후회가 남을 것 같았다.

배가 들어오는 항구까지는 하루를 꼬박 가야 했다.

엘레노어는 버나데트와 하녀들에게 학원을 하루 맡기고 마차에 올랐다.

“아드리안이 좋아하는 말린 과일도 챙겼고, 목마를 수 있으니까 물도 챙겼고…….”

가방을 뒤적이던 엘레노어가 슬쩍 챙겨 넣은 와인을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

“혹시 얼굴 볼 용기가 안 날 수도 있으니까 약간의 알코올도.”

엘레노어는 마차 밖 풍경을 바라보며 홀짝홀짝 와인을 들이켰다.

이렇게 힘들게 먼 길을 갔는데, 아드리안이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짓는다면 정말 속상할 것 같았다.

“내가, 어? 일도 빠지고, 어? 이렇게 먼 길을 가는데…… 그러면 진짜 나쁜 놈이야. 치사해서 같이 안 놀아.”

얼마나 홀짝거렸을까.

날이 더운 탓인지 취기가 평소보다 빨리 올랐다. 엘레노어는 발긋해진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 다 온 것 같은데?”

저 멀리 드넓은 수평선과 인파가 보였다. 엘레노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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