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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133화 (133/168)

133화

이즈멜과 힐데가르트는 황제에게 인사한 뒤 궁을 떠났다.

황제궁을 벗어나자마자, 이즈멜이 잡고 있던 힐데가르트의 손을 놓았다. 힐데가르트는 제 옷에 손바닥을 벅벅 문질렀다.

이즈멜이 미리 공부한 뫼젠어로 말했다.

【연기 좀 똑바로 하지?】

힐데가르트가 이즈멜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그쪽이나 제대로 해. 그 성의 없는 눈빛은 뭐야? 아무도 안 속겠다.】

【허, 방금 깜빡 속아 넘어가신 것은 못 봤나 보지?】

【그건 내 연기가 훌륭해서 그렇거든? 도와줘서 감사하다고는 못할망정.】

힐데가르트가 톡 쏘아붙이자, 이즈멜이 선선히 인정하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건 그렇네. 고맙다.】

【…….】

힐데가르트가 놀란 듯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이즈멜을 바라보았다.

얘가 뭘 잘못 먹었나 하는 듯한 얼굴이기에, 이즈멜이 인상을 찌푸리며 따져 물었다.

【왜 그렇게 보는데.】

【그냥, 그쪽이 정상적인 말을 하니 좀 감회가 새로워서.】

힐데가르트가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었다.

【나야 엘렌이랑 카이델을 돕고 싶은 건데, 너는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 짓을 해?】

【…….】

이즈멜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의 한 발자국 뒤에서 걷던 힐데가르트가 이내 깨달았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어.】

【뭐, 왜.】

이즈멜이 인상을 찌푸리며 힐데가르트를 돌아보았다.

【그냥 좀 의외라서.】

【시비인가?】

힐데가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칭찬. 그쪽이 내 생각보다는 좀 괜찮은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 나한테는 개차반이지만, 엘레노어에게는 진심이구나 싶어서.】

겉으로 티는 내지 않지만, 아마 속이 말이 아닐 거다. 어떻게 그렇지 않겠는가.

힐데가르트는 이즈멜이 약간 측은해졌다. 동시에 아주 조금은 동질감도 느꼈다.

그녀가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로 서툰 위로를 건넸다.

【내 위로는 그리 달갑지 않겠지만, 나도 사랑 때문에 속앓이 중인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유감이야.】

이즈멜이 눈썹을 슥 치켜올리며 물었다.

【그대도 그렇다고?】

【응.】

【누군데?】

힐데가르트는 아무런 대답 없이 슥 미소 지었다. 그녀가 이즈멜을 앞질러 가며 말을 돌렸다.

【그냥 요즘 생각하는 건데, 그렇게 누구를 진심으로 좋아할 수 있는 것도 행운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이즈멜은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힐데가르트가 벨리움 궁을 쭉 둘러보며 말했다.

【난 아주 오랫동안 사랑이 뭔지 모르고 살았거든. 그쪽 말마따나 망아지처럼.】

이즈멜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인정하네?】

힐데가르트는 그런 이즈멜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좋아하고 나니까, 더는 내 멋대로 살 수가 없더라. 한마디로 철든 거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즈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엘레노어를 만나기 전에, 누군가를 위해 노력하는 법을 몰랐어.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솔직히 나 잘난 맛에 살았지.】

【어, 그쪽도 인정하는 거네?】

이즈멜도 힐데가르트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엘레노어 덕분에 새로 배운 감정이 많아. 긍정적인 감정이든, 부정적인 감정이든. 그저 좋아서 절절맸던 날만큼이나 속앓이했던 날들도 많지만…….】

이즈멜의 머릿속에 엘레노어와의 일들이 촤르륵 스쳐 갔다. 모든 순간이 좋았고 또 조금은 서글펐다.

【엘레노어를 만나기 전보다 지금의 내가 더 좋아. 좋은 사람을 좋아했기 때문이겠지.】

유난히 따스한 봄날, 이즈멜은 조용히 제 사랑에 마침표를 찍었다.

아마 한동안 다음 문장을 써 내려가지는 못할 거다.

괜찮아지기까지, 마음이 그녀를 완전히 놓아주기까지는 또 한참이 걸리겠지만, 괜찮다.

엘레노어는 분명 행복할 테니까.

【그걸로 됐어.】

***

잊어가고 있었다.

완전히 잊지는 못했지만, 잊어가는 중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드와이트는 그리 믿었다.

‘그런데 왜…….’

그런데 그녀가 또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상관의 연인으로.

“…….”

황궁에서 힐데가르트를 보았을 때, 드와이트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유령을 본 줄 알았다.

“……안녕.”

힐데가르트가 퍽 정확한 제국어로 인사를 건넸다. 드와이트는 마주 인사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그녀를 멀거니 바라만 보았다.

그러자 힐데가르트의 얼굴이 조금 울상이 되었다.

그때 황태자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드와이트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한 발짝 물러섰다.

【가지. 제발 아버지 앞에서 실수하지 마, 힐데가르트.】

황태자가 손을 내밀고, 그 위에 가느다란 손가락이 겹쳐졌다. 힐데가르트가 힐끔 드와이트를 쳐다보았지만, 드와이트는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이내 발소리가 멀어졌다. 드와이트는 묘한 눈빛으로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저 엘레노어를 위해 우스운 연극을 한판 벌이는 것뿐이다.

……그런데도 질투가 난다면, 미친 걸까?

‘주제도 모르고.’

거의 다 아문 허벅지의 상처가 순간 욱신거렸다.

‘바랄 사람을 바라야지.’

생각해 보면 멍청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았으면 닿지 못할 인연이라는 걸 알았을 거다.

힐데가르트는 미안하다고 했지만, 드와이트는 만일 그녀가 그에게 그토록 잘해 주지 않았다 해도 제가 그녀를 좋아했을 것이라 확신했다.

“한 번만 더 용서해 줄래?”

떠나기 전 그를 끌어당겨 입을 맞추던 힐데가르트를 떠올린 드와이트가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손톱 끝이 손바닥을 깊이 파고들었다.

이제야 조금 희미해졌는데, 아름다운 당신은 어쩜 내게 이리도 잔인하신지.

드와이트가 나직한 한숨을 내뱉었다.

“일이나 하자.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드와이트는 최대한 빨리 상황이 마무리되고 힐데가르트가 돌아가 주기를, 그렇게 그녀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되기를 바랐다.

동시에 그녀가 이곳에 머무르는 이 시간이 영원히 이어져서, 평생 그의 시야 속에 그녀의 적갈색 머리카락이 담기기를 바랐다.

***

【드와이트지? 그대가 좋아한다던 사람.】

힐데가르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이즈멜을 지나쳐 걸었다. 긍정이었다.

최대한 숨겼다고 생각했는데도 티가 난 모양이다. 하긴, 누구를 좋아한다는 건 늘 그렇게 티가 나는 일이다.

이즈멜이 친절하게 제안했다.

【대화는 해 봤나? 둘이 이야기하는 걸 통 못 본 것 같은데. 원한다면 머무는 동안 드와이트를 그대 전담으로 붙여 줄 수 있어.】

【…….】

【나는 글렀다지만, 그대는 아직 기회가 있는 것 아닌가?】

힐데가르트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어.】

이즈멜이 툭 대꾸했다.

【그럼 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그럼 그만이야.】

제 일 아니라고 쉽게 이야기하는 건가.

울컥한 힐데가르트가 따지듯 물었다.

【인제 와서 진심이었다고 다가가면, 그 말을 믿어 줄까? 구질구질 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어?】

【그럼 믿어 줄 때까지 말해. 도저히 의심할 수 없을 때까지 표현해.】

【…….】

【잘 생각해 봐. 좀 구질구질해지는 게 더 무서운지, 내 꼴 나는 게 더 무서운지.】

이즈멜이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깎아내리며 말했다. 힐데가르트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쪽은 말을 왜 그렇게…….】

【날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배우는 바가 없어 보이니 하는 말이야.】

퉁명스러운 목소리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만큼은 진심이었다.

괜히 조금 민망해진 힐데가르트가 뾰족한 목소리로 물었다.

【날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이렇게 도와주지?】

【글쎄. 미운 정이 든 건지, 알 수 없는 전우애 같은 게 생긴 건지…… 처음처럼 재수 없진 않은데.】

이즈멜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대가 날 한 번 도왔으니, 나도 그대를 한 번 돕는 거지. 난 계산이 정확한 사람이라.】

***

그래서 왔다.

백작저까지 오기는 왔는데,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는다.

힐데가르트는 백작저의 앞뜰에서 현관을 바라보며 불안하게 서성거렸다.

【……왕녀 전하?】

그때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현관문을 열고 나온 드와이트가 그녀를 보며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왜 여기 계십니까?】

【…….】

【엘렌은 아직 퇴근하지 않았습니다. 한참 기다리셔야 할 것 같은데, 학원 주소를 적어드리지요.】

드와이트가 몸을 돌려 집으로 들어가려 하자, 힐데가르트가 다급하게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널 보러 왔어.】

놀란 듯, 드와이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엘렌이 아니라 너를 보러 온 거야.】

드와이트의 시선이 제 손목을 붙잡은 힐데가르트의 손으로 향했다.

힐데가르트가 화다닥 그의 손목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

【말씀하십시오. 듣겠습니다.】

정중하지만 묘하게 서걱거리는 음성이었다. 늘 따뜻하고 말랑말랑하던 드와이트가 지금은 무척 차갑게 느껴졌다.

그녀에게 더 다가오지 말라 선을 긋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힐데가르트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전쟁터에서 다리를 다쳤다고 들었어.】

【예.】

【이제는 좀 괜찮아?】

【빠르게 달리는 건 아직 무리지만, 일상생활에는 이상 없습니다.】

힐데가르트의 표정이 사륵 녹았다. 그녀가 살포시 미소 지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 다행이다. 걱정했어.】

【감사합니다.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곧장 딱딱한 대답이 돌아왔다.

따끔.

힐데가르트의 가슴께가 지끈거렸다. 드와이트가 박박 그어대는 선이 날카로운 창이 되어 그녀를 찌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쩌겠어. 내 업보인걸.’

힐데가르트는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꾹 참으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드와이트가 움찔했다.

【하실 말씀 다 하셨으면…….】

드와이트는 또 한 번 그녀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이대로 밀려날 수는 없었다.

힐데가르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고 싶었어.”

서툰 제국어로 또박또박 내뱉은 말에 드와이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계속 그랬어.”

드와이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힐데가르트를 불렀다.

“왕녀 전하.”

“내가 너를 좋아해, 듀이.”

힐데가르트는 제 진심을 드와이트 앞에 꺼내놓았다. 이 한마디만큼은 완벽하게 말하고 싶어서, 몇 번을 연습했는지 모른다.

드와이트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조급해진 힐데가르트가 뫼젠어로 빠르게 덧붙였다.

【미안해. 너는 진작 끝난 마음일 텐데. 나라도 보기 싫을 거야. 넌 착해서 이렇게 들어 주고 있지만…….】

힐데가르트가 떨리는 손을 꼭 모아쥐었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숨쉬기가 힘들었다.

【다 아는데, 그래도 네가 너무 좋아서…….】

그래서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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