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그 순간 거짓말처럼 이즈멜의 입이 꾹 다물렸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거세게 흔들거렸다.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전에 본능적으로 내비친 반응이었다. 그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백지처럼 희게 변했다.
황제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퍽 격렬한 반응이구나. 너답지 않게.”
“……예상치 못한 이름에 놀랐을 뿐입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즈멜이 표정을 갈무리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황제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그래. 내가 점찍은 상대를 알고 나니 마음이 좀 달라졌느냐?”
당연한 일이다. 엘레노어와의 결혼이라니, 어찌 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독한 술을 들이켠 것처럼 지독히도 목이 탔다.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이즈멜은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말했다.
“결혼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찌 영애의 뜻은 묻지도 않고 제게 그런 것을 질문하십니까?”
“그저 네 뜻을 먼저 알고 싶었을 뿐이다. 넌 내 아들이 아니냐. 아비가 되었으면 아들의 의사 정도는 알아야지.”
그제야 이즈멜의 눈매가 약간 부드러워졌다.
“물론 영애의 이야기도 들어 보아야겠지. 에버렛 백작의 이야기도……. 네 말대로 결혼이라는 것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까.”
황제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무척이나 강렬하고 날카로웠다.
“하지만 내 말을 거절할 때는 필히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 거다.”
엘레노어 측의 의견은 사실상 별 의미가 없다는 선언이었다.
“나는 지금 엘레노어 에버렛의 영향력이 몹시 필요하거든.”
“어째서입니까?”
“엘레노어 에버렛만큼 평민들의 사랑을 받는 이가 또 있나? 황실에 대한 불만도 좀 가라앉히고, 겸사겸사 충성심도 독려하는 거지. 만백성의 사랑을 받는 황태자비, 얼마나 좋으냐?”
생각할수록 탐이 난단 말이지.
황제가 덧붙이며 흐뭇하게 웃었다.
황태자비. 이즈멜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보아하니 너는 그리 싫지 않은 눈치구나. 네게 나쁜 아비가 되고 싶지 않았는데, 다행이다.”
이즈멜이 황제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아버지의 고민을 이해한 것일 뿐, 혼사에 대한 제안을 수락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 중요한 일이니 너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하지만 명심하거라. 네가 원한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든든한 네 조력자가 될 거다.”
황제가 나가 보라는 듯 짧게 손짓했다. 이즈멜은 인사도 잊고 성큼성큼 황제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복도로 나오는 순간 이즈멜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그가 차가운 벽에 기대서서 머리를 쾅 들이박았다.
‘젠장……!’
끔찍한 일이다.
늘 그에게 위로가 되어 준 엘레노어에게도, 전쟁터에서 목숨을 내놓고 싸우고 있는 카이델에게도 못할 짓이었다.
‘고민할 가치도 없는 일이야.’
하지만 동시에 악마의 유혹처럼 강렬하게 마음이 이끌렸다. 이즈멜은 그 사실에 자괴감과 환멸을 느꼈다.
황제의 제안은 엘레노어를 향한 이즈멜의 갈망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딱 한 번만 비겁해지면 된다고, 딱 한 번만 죄를 지으면 그만이라고 그를 부추겼다.
황제라면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제 뜻을 관철하고야 말리라.
‘아버지께서 엘레노어와 카이델의 관계를 아시면…… 과연 이 혼사를 포기하실까?’
어째서일까. 쉽사리 그럴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이 이런 것일까.
‘이즈멜과 약혼……? 말도 안 돼!’
황제의 초대장을 받아 든 엘레노어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거렸다.
얼마 전 회의에서 그녀와 이즈멜의 국혼 이야기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만 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전통적으로 황후는 전부 공작가나 후작가 출신이거나 타국의 공주였기 때문이다.
백작도 낮은 작위는 아니지만, 황태자와 엮이기에는 한참 부족하다고 여겨졌다. 평소에는 고려조차 되지 않는 대상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더는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황제는 무슨 이유인지 그녀를 황태자비에 올리려고 한다.
엘레노어는 문득 황제와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기운이 보통 날카로운 게 아니었는데……. 그리 기분 좋은 분은 아니셨어.’
그때 에버렛 백작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렌,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네 편이다. 네가 가지 않겠다고 해도 존중한다. 내가 거절 서한을 보내도록 하마.”
그가 힘주어 덧붙였다.
“행여나 뒷일은 걱정하지 마라. 그런 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살짝 떨리는 백작의 손이 엘레노어의 어깨를 짚었다.
엘레노어는 가느다란 떨림에서 느껴지는 그의 진심에 뭉클함을 느꼈다. 동시에 엘레노어의 안에 용기가 솟아났다.
“아니에요, 아버지. 폐하의 초대를 어떻게 함부로 거절하겠어요.”
“엘레노어.”
“일단 다녀올게요. 전하께서는 카이델과 제 상황을 아시니 폐하께 잘 말씀해 주실 거예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보는 백작을 향해 엘레노어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저 아시잖아요. 제가 잘 해결해 볼게요.”
엘레노어는 굳게 다짐했다. 절대 집에 불똥이 튀지 않게 할 것이다.
백작이 엘레노어를 품에 꼭 안아 주며 말했다.
“혼자 속앓이하지 말고 꼭 이야기해야 한다, 아가. 응?”
“그럴게요.”
언제나 든든한 아버지를 꼭 마주 안은 엘레노어가 헤헤 웃었다. 백작이 그런 엘레노어의 말랑한 볼을 살짝 꼬집었다가 놓았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지…….”
어른이 다 되었다고는 하지만 백작의 눈에 그녀는 늘 아가였다.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어른스러웠던 딸이라 더 마음이 쓰였다.
조금 이르게 태어난 탓인지 갓 태어난 엘레노어는 유난히 작고 또 붉었다. 그 작은 아이가 꼬물꼬물 품으로 파고들던 감각을, 백작은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후, 딸을 너무 예쁘게 낳아놓아도 곤란한 일이구나.”
“그야 아버지 닮아서 그렇죠.”
엘레노어가 폴짝 뛰어 안기며 애교를 부렸다.
오랜만에 아버지와 한참이나 시간을 보내자, 흐리던 마음이 조금씩 맑게 갰다.
‘길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늘 그렇듯이.’
더 생각해 보자. 아직 티타임까지는 일주일이나 남았으니까.
다 괜찮을 거라는 느낌이 왔다. 막연하지만 확실한 느낌이었다.
***
“들지.”
극도로 어색한 티타임이 시작되었다.
황제의 말에 엘레노어와 이즈멜이 주섬주섬 찻잔을 들었다.
‘전하와의 첫 만남도 이렇게 어색하지는 않았는데…….’
호록.
머리가 핑 돌 만큼 진한 꽃향기가 입안에 가득 찼다.
차를 조금 머금은 엘레노어가 슬쩍 이즈멜을 곁눈질했다. 그는 오늘따라 엘레노어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만 믿고 있던 엘레노어로서는 애가 타는 일이었다.
“페르체 남작, 차는 입에 좀 맞나?”
엘레노어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예, 폐하. 차 맛이 무척 좋습니다.”
“다행이군. 두 사람은 입맛도 잘 맞는 모양이야. 이즈멜이 좋아하는 것으로 준비했는데.”
쿨럭.
엘레노어와 이즈멜이 동시에 사레들린 듯 기침을 했다.
“아…….”
“아버지.”
이즈멜의 목소리에 약간의 책망이 담겨 있었다. 황제가 웃으며 두 손을 들었다.
“미안하구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을 보니 괜히 마음이 들떴지 뭐냐.”
이즈멜이 한마디 하기 위해 입을 열려던 때였다. 황제가 눈치 빠르게 화두를 돌렸다.
“이 계절이 되면 늘 황후와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오른다. 유난히 수줍음이 많은 여자였지.”
“…….”
“처음에는 특별한 인연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어른들이 의논해 맺어 준 짝이었고, 만나면 데면데면하게 차나 나누고 헤어지곤 했지.”
마치 너희 두 사람처럼.
소리 내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이즈멜과 엘레노어를 번갈아 보는 눈빛이 퍽 노골적이었다.
엘레노어가 황제의 눈빛을 피해 속눈썹을 얌전히 내리깔았다. 엘레노어는 찻잔 위에 동동 떠다니는 꽃잎을 응시하며 시간이 빨리 흐르기만을 기다렸다.
“조금씩 스며들더구나. 한 방울 두 방울 툭툭 떨어지는 비에 옷자락이 젖어 들듯이.”
젊은 시절의 황후를 떠올린 것인지, 뱀처럼 날카롭던 얼굴이 아주 잠시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 순간 엘레노어는 처음으로 그와 이즈멜이 많이 닮았다고 느꼈다.
“그때 난 운명에는 여러 종류가 있음을 배웠다.”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별안간 놀라며 찻잔을 가리켰다.
“아차, 차가 식겠구나. 어서 들자.”
황제는 엘레노어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아카데미는 왜 입학하지 않았는지, 아스터와는 무슨 인연인지, 연구소에서는 무슨 연구를 했는지 같은 것들이었다.
‘의외로 사적인 질문은 많지 않네.’
처음에는 바짝 얼어 있던 엘레노어의 표정이 조금씩 풀어졌다.
“로고스토아 장학생 자격을 포기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돌아온 이유가 뭐지?”
엘레노어가 움찔했다.
가장 큰 이유는 카이델이었다.
카이델이 제게 생각보다 훨씬 큰 의미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고, 세상 그 무엇보다 그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소중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벨리움으로 돌아왔을 때,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그를 안아 주고 싶었다. 카이델은 5년이라는 시간을 기꺼이 기다려 주겠지만, 그녀가 안달이 나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때 이즈멜이 테이블 아래로 슬쩍 다리를 뻗어왔다. 그가 발끝으로 엘레노어의 구두를 톡톡, 가볍게 두드렸다.
‘너무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마.’
엘레노어는 본능적으로 이즈멜이 전하려는 말을 깨달았다. 함께한 시간이 쌓여서일까,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이 있었다.
‘왜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엘레노어는 이즈멜을 믿기로 했다. 그가 제게 해가 될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구직이 적성에 잘 맞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람들과 직접 소통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데서 훨씬 큰 보람을 느낀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래서 오자마자 그런 일을 시작한 거로군.”
다행히 황제는 완전히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가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엘레노어가 잠시 숨을 고르던 때였다. 틈을 노리던 황제가 날카롭게 본론으로 찌르고 들어왔다.
“남작, 내 오늘 그대를 부른 것에는 이유가 있어. 내가 생각하는 일이 있는데, 그에 대한 그대의 의사를 묻기 위해서네.”
당황한 엘레노어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예…….”
황제가 턱을 살짝 치켜든 채, 엘레노어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나는 그대와 이즈멜이 좋은 인연이 되리라 생각하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쿵.
엘레노어의 심장이 한번 크게 내려앉았다.
예상했던 질문이지만, 황제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엄청난 위압감이 엘레노어를 짓눌렀다. 웬만한 압박 면접에도 굴하지 않던 그녀였지만, 이번만은 조금 달랐다.
‘떨리지만 말해야 해.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그때였다.
“아버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이즈멜이 불쑥 입을 열었다. 엘레노어에게 못 박혀 있던 시선이 천천히 옆으로 이동했다.
“뭐지?”
테이블 아래, 이즈멜의 손등에 파랗게 힘줄이 돋아났다. 그가 있는 힘껏 두 주먹을 그러쥐며 말했다.
“저는 교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