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민심 안정과 수도 치안에 이바지한 공이 크므로, 엘레노어 에버렛에게 페르체 남작위와 그 영지를 하사한다.”
작위? 영지?
엘레노어는 어리벙벙한 얼굴로 황제의 칙서가 낭독되는 것을 들었다.
꿈인가. 그래, 어쩌면 꿈인지도 모른다.
“황제 폐하께서 위임하신 권한으로 폐하를 대리해 선언합니다. 이 증서의 효력은 이 선언 이후로 영원히 유효합니다.”
엘레노어의 손에 영지 문서와 가문의 인장이 쥐어졌다. 묵직함에 손목이 얼얼한 것이, 꿈이 아닌 현실 같았다.
이게 뭐람.
엘레노어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백만 개 떠올랐다.
“이제 고개 숙여 폐하께 감사를 표하십시오.”
“……영광스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엘레노어는 당황스러운 상황에도 본능적으로 예법을 따랐다.
“폐하께서 남작에게 거시는 기대가 큽니다. 앞으로도 제국의 안녕을 위해 힘써 주길 바랍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황제의 사자가 떠나고, 백작저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황제가 직접 작위와 영지를 내렸다는 것은 엄청난 영광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귀족 가문의 영애와 작위를 지닌 귀족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것이 황제로부터 직접 하사받은 것이라면 더 큰 의미를 지녔다.
“폐하께서 너를 정말 좋게 보신 듯하구나.”
“자랑스럽다, 우리 딸.”
“축하해, 엘렌. 아니, 이제는 페르체 남작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성대한 축하 파티를 열어야 한다. 아직 때가 좋지 않으니 다 같이 내려가 영지 구경이나 하고 오자. 아니다, 초상화를 그릴 화가부터 구하는 게 좋겠다.
잔뜩 들뜬 가족들은 이 경사를 어떻게 기념할지를 토론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축하드립니다, 아가씨. 이제는 남작님이라고 불러드리는 게 맞겠군요.”
“엘레노어 아가씨를 모신다고 하면 다들 저를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몰라요. 제 어깨에 힘이 다 들어간다니까요?”
사용인들도 뛸 듯이 기뻐하며 엘레노어를 향해 축하 인사를 건넸다.
축제 분위기 속 유일하게 웃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당사자인 엘레노어였다.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던 엘레노어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가문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 그 고생을 하면서 드와이트를 가르쳤단 말이지, 내가.’
엘레노어의 머릿속에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드와이트를 너무 잘 가르쳐 버리는 바람에 아이들을 가르치게 됐고, 그러다 학습지 사업도 시작했어.’
그렇게 카이델을 만났으니 그까지도 아름다운 추억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엘레노어가 제 손에 쥔 것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건 아니지! 난 이런 거 필요 없어!’
엘레노어는 지금의 제 삶에 100퍼센트 만족했다.
제힘으로 노후 자금까지 다 마련해 둔 데다, 이제는 건물도 한 채 있다.
그뿐인가? 세상에서 제일 근사한 남자친구도 있다.
엘레노어에게 작위와 영지란 완벽한 인생에 붙은 혹 같은 것이었다. 책임져야 할 일만 배로 늘어난 셈이니 말이다.
땅에나 고이 파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내린 것을 ‘필요 없으니 도로 가져가세요’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드와이트가 엘레노어 쪽을 돌아보며 밝게 물었다.
“엘레노어, 넌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아버지가 뭐든 다 해 주신다는데.”
“뭐든?”
“응, 뭐든.”
곰곰이 생각하던 엘레노어가 말했다.
“음…… 회귀?”
***
오늘도 황제의 기분은 무척이나 저기압이었다.
‘젠장. 오늘도 진땀깨나 빼겠군.’
귀족들은 입을 뗄 때마다 얼음장 위를 거니는 심정이 되었다. 황제가 눈썹을 움찔할 때마다 심장이 덜컹했다.
“다음 안건.”
황제의 마음에 차지 않을 소식들이 두 손에 가득했다. 그렇다고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고, 거짓을 고할 수도 없으니 참 미칠 노릇이었다.
“데이먼 후, 발언하시오.”
숨을 고른 노후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쟁이 예상했던 것과 달리 길어지고 있어 백성들의 불만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의 미간에 곧바로 깊은 골이 팼다.
“이미 승기를 잡았다고 확실히 말하지 않았나? 남은 것은 마무리뿐이라고.”
황제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총사령관이 이끈 전투에서 지금껏 패전 소식을 전한 적이 있었던가? 우리 군의 피해는 거의 없는 수준이고.”
“예, 그렇기는 하지만…… 젊은 장정들이 죄다 전쟁터에 나가 있다 보니 여러모로 타격이 큽니다.”
심사가 꼬인 황제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전쟁이 예상보다 길어지는 것에 누구를 탓해야 할지 모르겠군. 후작이 말해 보시오. 짐? 하늘? 그도 아니면 총사령관에게 그 책임을 물을까?”
황제의 말에 후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닙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황제가 주먹으로 탁상을 쿵 내리쳤다.
“그놈의 민심 이야기는 지겹도록 들어서 나도 잘 알고 있소. 경들이 내게 가져와야 할 것은 그 민심을 달랠 방법이란 말이오.”
황제가 싸늘한 시선으로 장내를 훑었다.
“누구 하나 뾰족한 수를 내놓기 전에는 돌아갈 생각 마시오.”
회의장 내에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귀족들은 입을 꼭 닫은 채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말석에 앉아 있던 젊은 백작 하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폐하.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황제의 눈이 반짝 빛났다.
“말해 보시오.”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은 백작이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장성하신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볼 때, 전하께서 지금껏 약혼조차 하지 않으신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입니다.”
황제는 곧바로 백작의 저의를 눈치챘다. 황제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흠……. 황태자의 국혼이라. 시국이 이러한데 그것이 좋은 대책이 되겠소?”
“본격적인 국혼은 종전 이후로 미루더라도 약혼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황제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백작의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누구와? 마땅한 상대가 없지 않소.”
황제는 구석에 앉은 이젠트 공작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황태자비가 될 만한 재원이 없는데, 어찌 약혼을 추진한단 말이오?”
이젠트 공작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고개를 푹 숙여 분한 표정을 감추었다.
그때 모여 있던 사람 중 누군가 제안했다.
“페르체 남작이 어떻습니까?”
황제가 한쪽 눈썹을 슥 치켜세웠다.
“페르체 남작?”
“예. 얼마 전에 작위를 내리신, 에버렛 백작의 여식 말입니다.”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엘레노어에 대해 아예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은 이 중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작위를 받았다고? 거기까진 몰랐군.”
“얼마 전에 에버렛 백작을 봤는데…… 이 사람 참, 중요한 소식은 쏙 빼놓고 전하는 게 버릇이라니까.”
귀족들이 웅성웅성하는 동안, 황제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엘레노어 에버렛이라…….’
엘레노어의 얼굴을 떠올린 황제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황태자가 은근히 관심을 두는 눈치기는 했지. 황후도 좋아하고, 황자도 제 스승이니 잘 따를 테고…….’
황제는 엘레노어에게 특별한 호감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모두가 입을 모아 그녀를 칭찬하니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눈을 씻고 보아도 책잡을 구석이 없었다. 잔뼈 굵은 신하들이 이루지 못했던 성과를 저 홀로 척척 만들어낸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제 공을 이즈멜에게 선선히 양보하는 걸 보면 꽤 기특하기도 하고.’
백작가 출신이라는 게 약간은 흠이겠지만, 본인이 작위를 가지고 있으니 그 부분도 어느 정도 보완이 되었다.
황제의 표정이 조금 부드럽게 녹았다. 그것을 눈치챈 신하들이 재빨리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요즘 페르체 남작만큼 영향력 있는 인물도 없지요.”
황제가 턱을 문지르며 느릿느릿 중얼거렸다.
“페르체 남작이라…….”
“그야말로 재색과 인성을 겸비한 인재가 아닙니까. 로고스토아 장학생으로 선발될 정도인 데다, 공적을 인정받아 작위와 훈장도 받았지요.”
이젠트 공작가와 가까운 몇몇을 제하고는 대부분이 에버렛 가에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에버렛 백작은 성격이 둥글어 적을 만드는 일이 잘 없었기 때문이다.
몇몇이 목소리를 높이자 나머지 귀족들도 적극적으로 찬동했다.
“에버렛 백작가라면 가문도 빠지지 않습니다. 뼈대 있는 가문인 데다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린 일도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에버렛 백작은 정치에 뜻을 두지 않지만…… 오히려 이 경우에는 그편이 훨씬 낫지요. 욕심도 없고 청렴한 자입니다.”
“그 오라버니 되는 이가 전하의 보좌관이라지요?”
“드와이트 에버렛 말씀이시군요. 그 청년도 참 괜찮지요. 제 아버지를 닮아 착하고 성실하다고 평판이 자자하더군요.”
원래라면 백작가의 여식이 황태자비 후보로 거론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작가나 후작가의 영애 중 특별히 두드러지는 이들이 없는 데다, 엘레노어가 워낙 독보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이즈멜이 특별히 교제하는 여성이 없는 점도 한몫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엘레노어가 그와 함께 문해 교육 사업을 진행하기도 했고.
황태자로 책봉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잠시 엮였던 영애들을 몇몇 추릴 수 있겠지만, 너무 예전 일인지라 아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황태자 전하와도 개인적인 교분이 있는 사이로 압니다. 더할 나위 없지 않습니까?”
“황자 저하와도 각별하신 사이가 아닙니까. 저번 연회 때도…….”
연회에서 루카스가 아나이스에게 망신을 주었던 이야기를 꺼낸 이가 이젠트 공작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나쁘지 않은 의견인 듯합니다.”
처음 약혼 이야기를 꺼낸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정리했다.
“지금 평민들에게 남작은 그야말로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찾아보면 더 좋은 후보들도 있겠지만, 지금 민심을 달래기에는 남작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황제의 미려한 입가에 설핏 만족스러움이 스쳤다.
엘레노어 에버렛.
처음에는 조금 탐탁지 않기도 했지만, 생각할수록 괜찮은 의견이었다.
확실히 그녀라면 민심을 달래고 전쟁에 집중된 관심을 분산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경들의 의견이 그렇다면…….”
내가 어찌 무시하겠는가.
***
“……예?”
아침부터 황제궁에서 큰 소리가 흘러나왔다. 당황한 이즈멜의 목소리였다.
“그게 무슨…….”
“왜 놀라느냐? 내가 지금 네 나이 때 너를 낳았다. 늦어도 한참이나 늦은 일이지.”
이즈멜이 딱 잘라 거절했다.
“저는 아직 결혼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 급한 일도 아닙니다. 아버지도 강건하시고, 여차하면 루카스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
퍽 강경하게 결혼 이야기를 꺼낸 것치고, 의외로 황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느른하게 고개를 기울인 그가 저를 닮은 아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 상대가 엘레노어 에버렛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