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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129화 (129/168)

129화

대망의 첫 수업.

엘레노어는 단정하면서도 편안한 하늘색 드레스를 차려입었다. 엘레노어가 생각할 때 가장 선생님 같은 옷이었다.

전생에서부터 지겹도록 했던 일인데도, 새로운 시작이라 생각하니 두근두근 마음이 설렜다.

“이번에도 잘 해낼 수 있어.”

거울을 보며 으쌰으쌰 파이팅을 다진 엘레노어가 출근길 마차에 올랐다. 아직은 아이들이 많지 않으니 특별히 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마차 맞은편에 앉은 에밀리와 마리가 살며시 물었다.

“저희는 뭘 하면 되는 거예요?”

“으음, 아이들을 보살피는 걸 도와줬으면 해. 아직은 첫날이니까 차근차근 생각해 보자.”

“네. 아가씨만 믿을게요.”

마차가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아직 갈 길이 조금 멀었는데, 마차가 돌연 멈추어 섰다.

엘레노어가 깜짝 놀라 허리를 곧추세웠다.

‘사고가 났나?’

잠시 뒤, 마부가 노크한 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제프?”

“죄송하지만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왜? 사고가 났어?”

“아니요. 사고가 아니라…….”

마부가 힐끗 마차 앞을 눈짓하며 말했다.

“사람이 몰려서 마차가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

엘레노어와 하녀들이 후다닥 마차에서 내렸다.

마부의 말대로였다. 골목에 줄이 주욱 늘어선 것이 보였다. 줄에는 유난히 아이들이 많이 서 있었다.

엘레노어의 초록색 눈동자가 크게 좌우로 흔들렸다.

‘설마…… 저 줄은 우리 건물 앞에 선 거야?’

그럴 수가 있나? 홍보는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아니겠지.’

엘레노어는 애써 고개를 내저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코너를 돌았는데도 줄은 계속 이어졌다. 기묘하게도 정말 엘레노어의 학원과 같은 방향이었다.

“에버렛 영애다!”

그때 줄에 있던 누군가 외쳤다.

“저분인가 봐.”

“말로만 들었지 보는 건 처음인데!”

“새벽부터 줄 서느라 힘들었어. 어서 문이 열렸으면 좋겠다.”

맙소사.

사람들이 떠드는 말을 들은 엘레노어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정말로 이 많은 사람이 엘레노어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아가씨, 첫날부터 엄청난데요?”

“다 들어가지도 못할 것 같은데…….”

하녀들의 말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저만큼은 수용이 안 돼. 1층까지 교실로 바꾼다고 해도 불가능한데…….”

잠시 고민하던 엘레노어가 말했다.

“오늘은 일단 신청서를 받아야 할 것 같아. 에밀리는 밖에서 줄 선 사람들을 살펴주고, 마리는 한 팀씩 들어오면 차례로 나한테 안내해 줘.”

“네, 아가씨.”

빠르게 역할을 분배해 준 엘레노어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밝고 화사한 내부가 드러나자 맨 앞줄에 서 있던 사람들이 감탄사를 내질렀다.

“와, 예쁘다.”

“시설이 이런데도 그렇게 저렴해?”

엘레노어가 책상 위에 두툼한 종이뭉치와 펜, 잉크를 올려놓았다.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몰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어떤 기준으로 지원자를 가려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선착순으로 끊는 게 공평한가? 일단 나이가 어린 아이들이 더 급한 것 같기도 하고…….’

일단 다 받아 적어 놓고 생각해야겠다.

“마리, 시작하자.”

“네!”

그렇게 기나긴 지원서 작성 릴레이가 시작되었다.

아이의 이름, 나이, 주소, 선착순 번호, 간단한 특이사항.

마흔 팀 정도를 상대하고 나자 엘레노어는 슬슬 손이 저렸다. 하지만 밖에 늘어선 줄은 여전히 길게 이어져 있었다.

마리가 엘레노어의 물 잔을 채워 주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가씨, 힘드시죠. 잠깐 쉴까요?”

“아니야. 다들 새벽부터 서 있었는데, 더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마리도 조금만 더 힘내 줘.”

“저야 뭐 하는 게 있나요.”

그때 누군가 쭈뼛쭈뼛 엘레노어에게 다가섰다. 엘레노어가 친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혼자 오셨어요?”

“네, 그게…….”

“지원서를 써야 하는데, 아이 이름을 좀 말씀해 주시겠어요?”

엘레노어가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서 있는 여자는 엘레노어 또래였다.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드레스부터, 예쁘게 매만진 고수머리까지. 귀족 영애인 티가 났다.

“혹시 무슨 일로 찾아오셨을까요? 영애님이신 것 같은데.”

“아, 안녕하세요. 저는 데비 백작가의 버나데트라고 해요. 달리아 모리스 영애의 친구예요.”

“안녕하세요, 데비 백작 영애.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조금 머뭇거리던 버나데트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저…… 선생님으로 지원하고 싶어요.”

예상치 못한 말에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래졌다.

“선생님이요?”

“네. 에버렛 영애와 꼭 함께 일해 보고 싶었어요. 달리아에게 칭찬을 무척 많이 들었거든요…….”

달리아 이야기에 엘레노어가 저도 모르게 슬쩍 미소 지었다.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뜻은 감사하지만, 교사를 고용할 만큼의 여력이 안 된답니다. 이 일로 수익을 내려는 목적이 아니라서요.”

“알고 있어요. 저도 그런 목적으로 드린 말씀은 아니었어요! 그냥 영애를 꼭 돕고 싶어요.”

버나데트의 의지가 꽤 굳세다는 것을 느낀 엘레노어가 픽 웃었다.

돕겠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지원자 수를 보니 엘레노어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말이다.

엘레노어가 버나데트를 올려다보며 부탁을 건넸다.

“혹시 괜찮으면 지금부터 좀 도와줄 수 있나요? 혼자 하려니 조금 더딘 것 같아서…….”

조금은 무리할 수 있는 부탁인데도 버나데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마워요. 이렇게 들어온 순서 적고, 아이 이름, 나이, 주소, 간단한 인적사항 정도를 메모해 주면 돼요.”

혼자 하던 일을 둘이 하기 시작하자 줄이 줄어드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이제는 마지막 열 팀 정도만이 남아 있었다.

엘레노어는 손이 저릴 텐데도 열심히 일하는 버나데트를 슬쩍 쳐다보았다. 일 처리가 꼼꼼하고 야무진 게, 제법이었다.

‘달리아 덕에 좋은 조력자를 얻은 것 같네.’

엘레노어가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그때 밖에서 수군수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엘레노어가 이상 상황을 감지했다. 바깥에 서서 줄을 관리하던 에밀리가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

“엘레노어 아가씨! 잠시 나와 주셔야겠어요.”

“왜? 무슨 일인데?”

엘레노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화,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어요……!”

“지금?”

엘레노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지금.”

열린 문으로 성큼성큼 들어온 이즈멜이 엘레노어를 향해 커다란 꽃다발을 건넸다.

“아, 이건 개업 축하 선물.”

이즈멜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엘레노어가 목소리를 한껏 낮춰 속삭였다.

“어떻게 직접 오셨어요, 전하?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격려 겸, 나들이 겸, 구경 겸…….”

보고 싶은 얼굴도 볼 겸.

제일 큰 이유는 꿀꺽 삼킨 이즈멜이 씩 웃었다.

“이렇게 좋은 취지의 일은 나서서 독려하고 칭찬해야지. 그게 내 일 아닌가?”

이즈멜이 저를 올려다보는 아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는 시선이 많았다. 그것을 느낀 이즈멜이 조금 연극적인 어조로 말했다.

“무척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해, 영애. 그 취지에 깊이 공감하는 바야.”

“직접 걸음해 주시고 이리 치하까지 해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엘레노어도 이즈멜의 뜻을 눈치채고 재빨리 장단을 맞췄다.

“지금은 여러 가지로 쉽지 않은 때지. 하지만 영애처럼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이들이 있기에, 벨리움의 미래는 아직 밝다고 생각해.”

이즈멜의 목소리가 힘 있게 뻗어 나갔다.

“앞으로도 이대로만 정진해 주길 바라.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할 때 불안은 힘을 잃고 사그라드는 법이지.”

엘레노어를 보며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상 이 자리에 모인 모두를 향한 연설이나 다름없었다.

평소의 그와는 다른 목소리, 다른 표정이었다. 하지만 엘레노어는 그것이 가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것이 그의 역할이고, 그의 삶인 것이다.

“밤이 끝나면 아침이 오고, 겨울이 끝나면 봄이 오듯이, 지금의 이 위기가 지난 벨리움은 더욱 찬란하리라 나는 확신해.”

이즈멜이 말을 맺자, 엘레노어가 싱긋 웃으며 무릎을 굽혔다가 폈다.

“예, 전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즈멜이 엘레노어에게만 보이도록 입술을 벙긋거렸다.

‘고마워.’

‘천만에요.’

주고받는 짧은 시선에 서로를 향한 신뢰가 묻어났다. 어느덧 든든한 파트너가 된 두 사람이었다.

***

학원을 연 이후로 엘레노어의 일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메이, 실내에서 뛰면 안 된다고 했지?”

“네에, 선생님.”

아침부터 학부모들이 퇴근하는 초저녁까지, 엘레노어는 아이들과 뒤엉켜 진땀을 뺐다.

“오늘은 어제 배운 숫자부터 다시 복습하고 수업 시작할게요. 1부터 10까지 다 함께 세어 볼까요?”

“네!”

“다 같이 시-작!”

네 살에서 여덟 살까지, 에너지로 똘똘 뭉친 아이들 50명을 상대하는 일은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귀엽고 사랑스러웠지만, 힘든 것은 힘든 것이었다.

버나데트를 비롯한 몇몇 영애들이 돕겠다고 나서지 않았다면 절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엘레노어의 일상이 달라진 만큼 수도의 분위기 역시 크게 달라졌다.

「또다시 시작된 에버렛 열풍」

「수도 중심가에서 시작된 변화의 바람」

「엘레노어 에버렛, 사교계의 새로운 여왕으로 등극!」

민망한 제목의 기사들이 각종 신문 1면을 장식했다. 엘레노어는 볼 때마다 몸서리를 쳤으나, 주변에서는 매일매일 기사들을 스크랩하기 바빴다.

엘레노어는 제 영향력이 전보다 훨씬 커졌음을 실감했다. 이즈멜이 힘을 실어 준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많았다.

“저희 상단에서 후원하고 싶습니다.”

“저도 영애 같은 일을 하고 싶은데, 조언을 좀 주시겠어요?”

후원 문의가 빗발치는 건 물론이고, 낮 동안 아이들을 보살펴 주겠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다.

“이런 것도 유행을 타는 줄은 몰랐는데…….”

엘레노어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펼쳐지는 상황을 바라보았다.

무엇 하나 예상대로 흘러가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게 나쁘지는 않았다. 하늘이 엘레노어의 편인 것 같았다.

‘운도 이 정도면 실력이 아닐까.’

제가 걸어온 길을 잠시 되짚어 본 엘레노어가 생각했다. 정말 운이었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어쨌든 잘된 일이지. 아이들에게는 훨씬 살기 좋은 곳이 되어 가고 있으니까.”

정말 그랬다.

후원이 여기저기서 빗발치면서 엘레노어는 아이들에게 더 많은 것을 투자할 수 있었다.

건강한 음식을 배부르게 먹일 수 있었고, 이런저런 책들도 비치해 둘 수 있었다.

교재와 교구, 음식을 대량으로 들여오다 보니 주변 상권에도 좋은 영향을 미쳤다. 잿빛으로 가라앉았던 거리가 서서히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엘레노어는 그것으로 족하다 생각했다. 원래의 취지보다 훨씬 큰 성과를 얻었으니까.

하지만 놀랄 일은 끝이 아니었다.

“네?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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