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응접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정말이지 의외의 인물이었다.
“……달리아 모리스?”
엘레노어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아나이스와의 일로 앙금은 완전히 털었다지만, 여전히 어색한 사이였기에 그녀의 방문은 무척 뜻밖이었다.
그 순간 뻣뻣한 자세로 앉아 있던 달리아가 벌떡 일어나 엘레노어 쪽을 바라보았다.
“아, 안녕.”
“여기는 어쩐 일이야?”
엘레노어의 말에 달리아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정말 말 그대로 무슨 용건으로 왔는지 질문한 것이었는데, 달리아는 다르게 받아들인 듯했다.
“일단 앉아. 차라도 마시면서 이야기하자.”
“응, 그래.”
“무슨 차 좋아해?”
“나는 다 괜찮아…….”
달리아의 말에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녀에게 그냥 적당한 차를 내어달라 말하려던 때였다. 달리아가 불쑥 입술을 뗐다.
“너, 너는?”
“응?”
“너는 무슨 차를 좋아해?”
오늘따라 얘가 왜 이러지.
엘레노어가 의아한 눈으로 달리아를 살폈다.
“나도 딱히 안 가려. 그런데 꽃향기가 너무 강한 건 좀 힘들더라.”
“꽃향기가 강한 것…….”
달리아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싫어하는 걸 잔뜩 선물해 줄 생각인가?’
엘레노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금세 두 사람 앞에 따뜻한 차가 한 잔씩 놓였다.
엘레노어는 찻잔에 각설탕을 퐁당퐁당 넣어 녹인 뒤 우유를 부었다. 달리아는 엘레노어의 손짓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한테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거야?”
엘레노어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달리아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스터 교수님이 쓴 편지가 왔어. 연구소 일에 관심이 있다면 면접을 보러 오라고…….”
엘레노어가 툭 물었다.
“관심이 있어?”
“당연하지!”
저도 모르게 흥분해 목소리를 높인 달리아가 다시 뺨을 붉혔다.
“어렸을 때부터 내 꿈이었어. 면접 기회가 생겼다는 것만으로 기뻐.”
“잘됐네.”
엘레노어가 담담하게 대답하며 호록, 차를 들이켰다.
“교수님이 말씀해 주셨어. 네가 돌아가면서 나를 그 자리에 추천했다고. 누구보다 성실하게 노력하는 친구라고 했다던데.”
쿨럭.
엘레노어가 잔기침을 토해 냈다.
‘그걸 그렇게 대놓고 전달하실 줄은 몰랐는데……. 민망하게.’
손수건으로 입가를 정돈한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새로 신입을 뽑으신다길래 네 생각이 났어.”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 나한텐 정말 의미가 크거든.”
엘레노어는 그제야 달리아의 이상 행동을 완벽히 이해했다.
엘레노어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 다행이다. 하지만 정말 감사 인사를 바라지는 않았어. 나는 그냥 내 생각을 말했을 뿐이었으니까.”
별거 아니었다는 듯한 엘레노어의 태도에도 달리아의 감동은 식지 않았다.
“정말 고마워, 엘레노어. 그리고 다시 한번 미안했어.”
“됐어. 다 끝난 일인데. 황궁 정원에선 내가 너한테 빚을 졌잖아.”
“빚이라니!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달리아가 힘껏 고개를 내저었다. 엘레노어는 어쩐지 달리아의 뒤에서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쨌거나 저렇게 기뻐하니 다행인 일이었다.
달리아 정도면 아카데미 성적도 무척 우수하고, 성실함과 끈기도 높이 살 만했다. 아나이스와 만든 교재에서도 달리아 특유의 깔끔함이 묻어났다.
‘잘할 것 같아. 오기랑 끈기가 있다면 사실 뭐든 해낼 수 있으니까.’
차를 마시는 동안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공통점이 많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대화가 편안했다.
찻잔이 비고, 온기가 식었다. 두 사람은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앞까지 배웅한 엘레노어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조심히 가. 면접 잘 보고.”
“응, 그럴게.”
계단을 내려가던 달리아가 머뭇거리며 돌아섰다.
“엘레노어.”
“왜?”
“……가끔 편지해도 돼?”
귀엽다.
슬쩍슬쩍 눈치를 살피며 얼굴을 붉히는 달리아를 보며 엘레노어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엘레노어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달리아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럼…… 널 친구라고 생각하는 건?”
달리아가 긴장되는지 두 손을 꼬옥 모아쥐었다.
엘레노어가 픽 웃으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너 하는 거 보고.”
엘레노어는 이즈멜의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고.
그래서인지 이번 삶은 외롭지 않다고.
***
며칠을 고민하던 엘레노어가 금고를 열었다. 빳빳한 수표와 금괴, 동전들로 가득했다.
“허어. 생각보다 더 많네.”
엘레노어가 집사에게 그녀 몫의 자산이 정리된 서류를 건네받았다.
어마어마한 액수에 엘레노어의 턱이 딱 벌어졌다. 벌기만 열심히 벌고 쓰지는 않았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이 정도면…… 걱정할 필요 없겠다.”
엘레노어는 간단히 외출 준비를 끝내고 마차에 올랐다.
오늘은 엘레노어 에버렛 인생에서 가장 간 큰 소비를 하는 날이었다. 전생의 평생소원을 이루는 날이기도 했다.
바로 시내에 있는 건물을 하나 매입하는 것이다.
‘나도 이제 건물주라는 게 되어 보는 건가……!’
여기저기 수소문한 결과 마음에 딱 드는 위치의 매물을 찾을 수 있었다. 전쟁으로 상황이 어렵다 보니, 시세도 크게 높지 않았다.
물론 건물주라 해도, 세를 주고 그것으로 돈을 벌 생각은 아니었다.
“음, 위치는 딱 좋고.”
매입하려는 3층 건물에 도착한 엘레노어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는 제가 가장 잘하는 일을 하기로 했다.
가르치는 일 말이다.
“2층이랑 3층에 책상을 놓으면 되겠다. 1층은 러그랑 소파를 놓아 아늑하게 꾸미고…….”
엘레노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건물 주인이 물었다.
“여기 보육원이 들어오는 겁니까?”
엘레노어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학원이요.”
“학원……?”
처음 들어 보는 말에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이들을 돕는다는 점에서는 보육원과 비슷하지만, 엘레노어가 생각하는 그림은 조금 달랐다.
엄마 아빠가 일하는 시간 동안 아이들이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곳. 제 수준에 꼭 맞는 수업을 들으며 공부할 수 있는 곳. 또래와 즐겁게 어울릴 수 있는 곳.
엘레노어가 만들고 싶은 것은 그런 공간이었다.
당연히 학원비를 비싸게 받을 생각은 없었다. 엘레노어의 머릿속에서 숫자들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갈 것 같았다. 엘레노어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 벌었으면 이젠 좀 쓸 때도 됐지. 수익모델은 나중에라도 만들 수 있을 거야.’
마음을 정한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 진행하죠. 제가 여기 살게요.”
“좋습니다. 공란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엘레노어는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 본 뒤 또박또박 서명했다.
-엘레노어 에버렛.
서명을 마친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엘레노어를 휘감았다. 제힘으로 번 돈으로 정말 건물을 산 것이다.
엘레노어가 뿌듯하게 웃었다.
“원하시면 제가 괜찮은 목공소를 소개해드릴 수 있습니다. 오래된 거래처인데, 제 소개로 왔다고 하면 아마 제법 좋은 가격을 제시해 줄 겁니다.”
“정말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제가 주소를 적어드리겠습니다. 그리 멀지 않으니…….”
엘레노어에게 건물을 넘긴 주인은 도움을 주고 싶다며, 괜찮은 가구를 싸게 맞출 수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
주인이 돌아가고, 엘레노어는 건물 구석구석을 돌며 필요한 것들을 메모했다.
“석판도 있어야 할 거고……. 종이랑 잉크는 인쇄소가 근처니까 좀 싸게 얻을 수 있겠다.”
일단은 헤스와 인쇄소 직공들의 아들들.
작고 소소한 출발이지만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다. 지금껏 쌓아온 데이터가 주는 자기 확신이었다.
엘레노어가 낡은 테이블 위에 걸터앉아 공간을 활용할 방법을 그려 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에 엘레노어가 목을 쭉 빼고 내다보았다.
“엘렌.”
퇴근길에 들른 드와이트였다.
“어? 드와이트!”
“다행히 길이 엇갈리지 않았네. 네가 큰 결심 했다기에 와 봤어. 계약은?”
엘레노어가 자랑하듯 드와이트의 얼굴 앞에 건물증서를 척 하고 내밀었다.
“축하해. 이젠 너도 건물주네.”
“서명하는데 막 간이 떨리는 거 있지.”
엘레노어가 빙글빙글 돌며 물었다.
“어때? 아무것도 없어서 휑하기는 해도 꽤 괜찮지 않아?”
“널찍하고 괜찮네. 위치도 좋고.”
드와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는 말씀드렸어?”
“아직. 왜?”
“그냥. 들으시면 기뻐하실 것 같아서. 요즘은 웃으실 일이 통 없으니, 마음이 좀 쓰이거든.”
드와이트의 말에 엘레노어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럴까? 그러잖아도 그때 뵈니 많이 피곤해 보이시더라. 요즘도 일이 많으셔?”
“응. 쉬기는 하시는지 모르겠어.”
엘레노어는 제게 불쑥 속 얘기를 털어놓던 이즈멜을 떠올렸다. 황태자로서 그가 느낄 중압감을 감히 짐작할 수도 없었다.
“내 일이 전하께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웃으셨으면 좋겠다.”
***
“학원?”
드와이트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드와이트에게서 엘레노어가 새로 시작하는 일에 관해 전해 들은 이즈멜은, 요 며칠 중 가장 크게 웃었다.
“전하께서 거리를 둘러보라고 하셨다 들었습니다.”
“그랬지……. 그래도 조금은 더 쉴 줄 알았는데.”
이즈멜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자네 여동생은 생각할수록 신기하단 말이야. 그렇지 않은가?”
“무엇이 말입니까?”
“그냥, 모든 게.”
이즈멜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내 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데, 늘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같이 내놓거든.”
그것도 아주 빠르게.
“인생을 처음 사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저도 가끔 비슷하게 느낍니다. 어렸을 땐 더 그랬고요.”
엘레노어와 있으면 항상 그녀에게 모든 패를 다 읽히는 기분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제 패를 전부 까서 보여 주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지만.
그런데도 불안하지 않다는 게, 싫지 않다는 게 신기했다.
“신기한 사람이야. 좋은 사람이고.”
엘레노어는 한 번도 그에게 잘 보이려 애쓰지 않았다. 잘 보이려 애쓴 것은 늘 그였다.
그녀는 관대했다. 그녀가 그에게 허락하지 않은 것은 딱 하나, 그녀의 사랑뿐이었다.
“카이델은 세상에서 제일 운 좋은 놈이야.”
이즈멜의 말에 드와이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알고 계셨습니까?”
“그래. 엘레노어가 직접 말하더군.”
이즈멜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거부당하지 않으려면 여기서 멈춰 서야겠지. 엘레노어가 선을 긋기 전에 알아서.
분위기가 슬며시 가라앉으려 하자, 이즈멜은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언제 문을 연다고?”
“다음 주부터 시작입니다.”
이즈멜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라. 알았어. 언제 한번 방문하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