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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127화 (127/168)

127화

엘레노어의 질문에 이즈멜이 피식 웃었다.

“나야 늘 똑같지. 바쁘고 지치고 피곤하고.”

“…….”

“요즘은 폐하와 종일 입씨름하느라 진이 빠지는 중.”

이즈멜은 엘레노어에게 솔직하게 제 고민을 털어놓았다.

전쟁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고는 있지만, 사실상 승기는 벨리움 연합군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아르센 연합군이 언제 반항을 멈추고 항복하느냐의 문제일 뿐.

이제부터는 연합국끼리의 눈치 싸움이었다.

승전이 가져다줄 전리품들을 어떻게 배분할 것이냐는 문제를 두고 줄다리기가 시작된 것이다.

“아무래도 승리에 더 많이 공헌한 나라가, 더 많은 것을 가져가게 돼.”

“그럼…….”

이즈멜이 찻주전자를 들어 엘레노어의 찻잔을 손수 채워 주었다.

“카이델이 워낙 잘해 주어 많은 몫을 욕심낼 수 있게 되었지. 하지만 아버지는 조금 더 바라시는 모양이야.”

이즈멜이 목소리를 낮춰 말하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최대한 많은 숫자를 동원하려 장정이란 장정은 죄다 전쟁터로 내보내고 계시는데, 나는 솔직히 좀 걱정이 돼.”

엘레노어의 얼굴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곰곰이 생각하던 엘레노어가 물었다.

“그럼 가족들의 생계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 부인들이 나서서 일하고 있지.”

이즈멜이 씩 웃으며 말했다.

“돌아왔으니 수도 풍경을 한번 돌아봐. 그러면 내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거야.”

“그럴게요.”

“오랜만에 본 건데 무거운 이야기만 해서 미안하군.”

이즈멜이 머쓱한 표정으로 눈썹을 슥슥 문질렀다.

“이런 얘기를 터놓고 할 사람이 내 주변에 없어서 그러니 이해해. 그대와 달리 나는 친구가 많지 않아서.”

조금은 의외였다. 이즈멜은 사교성도 좋은 데다 워낙 발이 넓은 사람이었으니까. 만인의 연인이자 우상이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그의 신분을 생각하면, 편하게 속을 터놓을 사람을 찾기란 확실히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전하도 참 외로우시겠다. 나라도 잘 들어드려야지.’

엘레노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도 친구 그렇게 많지 않은데요, 뭘.”

“나는 그대 하나뿐이거든.”

“전하의 하나뿐인 친구가 저라니, 영광이네요.”

엘레노어의 너스레에 이즈멜이 활짝 웃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드와이트가 한 손에 단단히 봉해진 봉투를 든 채 서 있었다.

“전하.”

“오, 드와이트. 들어와.”

이즈멜이 반갑게 손짓했다.

드와이트는 상관의 옆에 앉은 제 여동생을 힐끗 보았다. 무려 황태자와 독대하고 있는데도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드와이트가 이즈멜에게 방금 도착한 카이델의 서신을 전달했다.

“주간보고입니다.”

이즈멜이 엘레노어를 향해 짧게 눈짓했다.

“잠깐 실례.”

책상으로 이동한 이즈멜이 페이퍼 나이프로 익숙하게 봉투를 열었다.

카이델이 큼직큼직 휘갈겨 쓴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쯧.”

적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며, 아르센이 마지막 발악을 준비 중일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그리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지만, 나쁘게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결정적인 한 방이 있어야 이 모든 게 끝이 날 테니까 말이다.

이즈멜이 깃펜을 들었다. 펜촉을 새카만 잉크에 담그며, 그는 소파에 앉은 엘레노어를 곁눈질했다.

엘레노어는 제 앞에 놓인 디저트들을 해치우느라 바빴다. 이즈멜과 마주 보고 있을 때는 손도 대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약간은 씁쓸했다.

‘아직도 내가 아주 편하지는 않은 거지. 어쩔 수 없나.’

만족스러운지 발끝을 경쾌하게 까딱까딱한다. 이즈멜이 픽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이즈멜이 다시 시선을 종이로 떨구고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의례적인 격려 문구를 쓰던 그가 멈칫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짧게 덧붙여 썼다.

「엘레노어는 유학 포기하고 돌아왔다. 빨리 보고 싶으면 이번에 확실히 끝내 버리도록.」

그만큼 확실한 격려는 없었으므로.

***

이즈멜과 한참이나 근황 이야기를 나눈 후, 엘레노어는 시내의 상점가로 향했다.

“휑하네.”

늘 인파로 득실거리던 중심가가 텅 비어 있었다. 판자를 덧대 입구를 막아 놓은 곳도 왕왕 보였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딱딱한 표정으로 걸음을 재촉해 걸었다. 델른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엘레노어는 인쇄소가 있는 방향으로 쭉 걸어갔다. 오랜만에 인사나 건네려는 생각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엘레노어의 두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유난히 아이들이 많이 보여.”

골목마다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아직 자그마한 서너 살짜리 아이들부터, 시에나 정도 나이대의 아이들까지 다양했다.

얼기설기 쌓인 나무 상자 사이사이를 날쌔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어쩐지 위태로워 보였다.

‘지켜보는 어른도 없이…… 위험할 것 같은데.’

엘레노어는 찝찝한 마음으로 인쇄소로 들어섰다. 늘 시끌벅적하던 내부가 조용했다.

“계세요?”

엘레노어가 안으로 들어가자 인쇄소 사장 아서가 깜짝 놀란 얼굴로 뛰어나왔다.

“에버렛 영애! 어쩐 일이십니까?”

“그냥 지나다가 인사나 할까 하고 들렀어요.”

“오랜만에 뵈니 더없이 반갑군요. 잘 지내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엘레노어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인쇄소 안을 죽 둘러보며 물었다.

“인쇄소도 문을 닫았나요?”

아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종종 선전물 인쇄 작업을 맡아서 밥벌이 정도는 합니다.”

“아, 직원분들이 보이시지 않아서요.”

“아무래도 대부분의 젊은 직공들은 전쟁에 동원되었지요. 지금은 보통 저 혼자 하다가 급할 땐 부인들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때 저 구석에서 헝클어진 양갈래 머리를 한 소녀가 불쑥 튀어나왔다. 엘레노어는 그 소녀를 기억했다.

“헤스, 맞지?”

아드리안과 함께 왔을 때 보았던 여자아이였다. 인쇄소 직공인 레니의 어린 딸이라는 게 기억났다.

“녜.”

“헤스가 몇 살이었더라?”

“다섯 살.”

헤스가 한 손을 쫙 펼쳐 보이며 활짝 웃었다. 엘레노어가 마주 웃으며 헤스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엘레노어가 아서를 보며 물었다.

“레니도 전쟁터에 나갔나요?”

“예. 헤스의 엄마가 근처 공방에서 일하는데, 집에 혼자 둔다기에 안쓰러워 여기서 뛰어 놀게 두었습니다.”

아서가 헤스를 번쩍 높이 들어 올렸다가 놓으며 말했다. 헤스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독수리! 재미써요!”

엘레노어가 문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 앞에도 아이들이 놀고 있던데, 그 아이들의 사정도 비슷하겠군요.”

“예. 저러다 누구 하나 다치지나 않을는지 가끔 걱정입니다. 그렇다고 전부 불러들일 수도 없고…….”

아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힐끗 시계를 본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군가와의 약속에 늦은 듯했다.

“저는 잠깐 거래처에 다녀오려는 길이었는데, 같이 나가시겠습니까?”

“그럼 헤스는 여기 혼자 남아 있나요?”

엘레노어가 묻자 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얌전하고 똑똑한 아이라 문제는 없을 겁니다.”

흠. 그래도 마음이 쓰이는데.

잠시 고민하던 엘레노어가 제안했다.

“괜찮으시면 그동안 제가 헤스랑 놀아 주고 있을게요. 다녀오세요.”

“예.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헤스, 금방 다녀오마.”

아서가 나가고, 엘레노어는 헤스와 함께 놀아 주기 시작했다.

엉망인 머리를 다시 예쁘게 빗어 묶어 주고, 구석에 잔뜩 쌓여 있는 이면지에 그림도 그려 주었다.

엘레노어가 손가락으로 한 글자씩 짚으며 말했다.

“헤-스.”

“헤스!”

“응. 헤스 이름은 이렇게 쓰는 거야. 다시 써 볼까?”

“녜!”

헤스가 눈을 반짝거리며 엘레노어의 글씨를 따라 썼다. 삐뚤빼뚤하지만 얼추 비슷하기는 했다.

“우와, 예쁘게 잘 썼네!”

“또 할래요.”

“또? 좋아.”

그림을 흉내 내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게 느껴지는지 아이는 무척 재미있어했다.

헤스는 엘레노어에게 답삭답삭 안기기도 하고, 엘레노어의 금발이 신기한지 작은 손으로 열심히 만지작대기도 했다.

‘지난번엔 리안한테만 관심을 주더니……. 이젠 나도 좋아해 주네!’

아드리안과의 추억이 떠오르자,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누구보다 가까웠기 때문이다.

헤스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며 엘레노어가 쓰게 웃었다.

“헤스! 엄마 왔어.”

그때 문이 열리고, 아서와 젊은 여자 하나가 들어왔다. 헤스의 엄마인 듯했다.

“엄마!”

헤스가 벌떡 일어나 오도도 엄마에게 달려갔다. 보기만 해도 흐뭇할 정도로 행복해 보이는 풍경이었다.

아서가 다가와 엘레노어에게 작은 사과 하나를 건넸다.

“시장하시지 않습니까?”

“아, 그러잖아도 조금 배가 고팠는데. 감사합니다.”

엘레노어가 사과를 아삭 베어 물었다. 새콤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아서가 엄마의 주변을 빙빙 돌며 팔짝팔짝 뛰는 헤스를 보며 말했다.

“저 사과만 한 녀석과 놀아 주는 게 은근히 고되지요. 마음이야 놀아 주고 싶어도, 종일 일하고 나면 도무지 엄두가 안 납니다.”

이해한다는 듯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이들은 귀엽지만, 그 넘치는 에너지를 상대하기란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헤스는 바닥에 널브러진 종이를 모아 잡아 엄마에게 불쑥 건넸다. 엘레노어와 그렸던 그림과 제 이름 쓰는 법을 연습했던 종이였다.

“오늘 이거 이거 했어!”

“와아. 우리 헤스, 글씨 쓰는 법도 배웠어? 대단한데?”

“쩌기 있는 언니가 가르쳐 줬어.”

헤스가 엘레노어를 척 하고 가리켰다.

“그럼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해야지.”

엄마의 말에 헤스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감사함미다.”

귀여운 모습에 엘레노어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별말씀을요.”

“또 와서 헤스랑 놀아 조요?”

엘레노어가 쪼그려 앉아 헤스와 눈을 맞추고 물었다.

“또 와서 놀아 줬으면 좋겠어?”

“녜!”

헤스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만큼?”

“이이이따만큼!”

헤스가 두 팔을 쫙 벌리며 말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어른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헤스의 엄마가 엘레노어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정말 감사합니다, 영애님. 헤스가 이렇게 신나하는 건 오랜만에 가요. 남편이 전쟁터로 간 이후로는 내내 시무룩했거든요.”

“아니에요. 저도 즐거웠는걸요.”

엘레노어는 헤스에게 꼭 다시 놀러 오겠다고 단단히 약속한 뒤 마차에 올랐다.

백작저로 돌아가는 길. 엘레노어의 머릿속은 더없이 복잡했다.

‘이즈멜이 꼭 봤으면 좋겠다던 풍경이 이런 걸까?’

델른으로 떠나 있었던 시간 동안 변해 버린 벨리움이 낯설게 느껴졌다. 날씨는 따뜻해졌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꽁꽁 얼어 버린 듯했다.

“그 애들은 다 집으로 돌아갔으려나…….”

엘레노어가 골목에서 놀던 아이들을 떠올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 백작저에 도착한 마차가 서서히 멈춰 섰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집사가 곧장 문을 열어 주었다.

“아가씨, 지금 응접실에 손님이 와 계십니다.”

“제 손님이요?”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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