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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126화 (126/168)

126화

엘레노어는 그렇게 몇 달 만에 벨리움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새 정이 들었는지, 연구실 선배들은 엘레노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엘레노어를 설득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며 자기들끼리 회의를 열기도 했다.

“꼭 가야 해? 응?”

“서류 심부름도 안 시킬게. 내가! 내가 대신해 줄게!”

“너 내 방 전망이 마음에 든댔지? 방도 바꿔 줄 수 있어.”

“편지지도 내 월급으로 사다 줄게, 응? 잉크도 얼마든지 사 줄게.”

선배들의 성화에 엘레노어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죄송해요. 대신 여기 있는 동안 일 엄청 열심히 해 두고 갈게요! 신입들이 보고 따라 할 수 있는 매뉴얼도 만들어 뒀어요. 새로 막내가 들어와도 선배님들이 따로 말씀하실 필요 없게요.”

엘레노어가 깔끔하게 정리한 연구소 매뉴얼을 내밀자 선배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트집을 잡으려야 잡을 수가 없는 꼼꼼함이었다.

“너도 참…… 너다.”

“헤헤. 가기 전까지 일 많이 시켜 주세요. 뭐든 열심히 할게요.”

제일 친하게 지냈던 제이드라는 선배가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됐다, 됐어. 돌아가선 뭘 하려고?”

“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일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요?”

다리를 꼰 채 펜을 돌리고 있던 선배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너 솔직히 딱 말해. 네 애인 보고 싶어서 가는 거지?”

“앗! 어떻게 아셨지.”

“우우우. 커플 타도.”

엘레노어가 부끄러운 듯 뺨을 붉히자 야유가 쏟아졌다.

“진짜 궁금하다. 대체 어떤 사람이야?”

선배의 질문에 엘레노어가 대충 얼버무렸다.

“좋은 사람이에요.”

“좀 제대로 설명해 봐.”

엘레노어가 카이델을 떠올리며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를 생각만 해도 배시시 웃음이 났다.

“음, 일단 정말 잘생겼고요.”

“네 눈에만 그렇겠지.”

아닌데! 범 우주적인 관점에서,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인 미의 기준에서 잘생긴 건데!

엘레노어는 제 능력을 과소평가 당한 것보다 더 큰 억울함을 느꼈다.

“아니요! 진짜 객관적으로 잘생겼어요. 능력도 출중하고……. 머리도 좋아서 아카데미도 조기 졸업했다니까요?”

“어이구. 여기서 안 그런 사람 있나?”

“또 다정하고 저한테 얼마나 잘해 주는데요. 은근히 귀여운 구석도 있다고요.”

선배들이 장난스럽게 토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레노어는 카이델을 생각하며 헤헤 웃었다.

잠시 생각하던 제이드가 물었다.

“아카데미 조기 졸업이면…… 이름이 뭐야? 잘하면 알 것도 같은데.”

조기 졸업생이 그리 많지는 않으니까.

그러자 엘레노어가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카이델이요.”

제이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카이델? 왜 익숙하지…….”

“나도. 내가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데.”

엘레노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씩 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선배들의 얼굴이 조금씩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설마, 네가 말하는 카이델이라는 사람이…….”

“아마 맞을 거예요.”

“발렌타인 공작, 그러니까 벨리움 총사령관은 아니겠지.”

엘레노어가 천진하게 대답했다.

“맞는데요.”

순간 연구실에 정적이 흘렀다.

잠시 뒤, 연구실이 흥분한 목소리들로 쩌렁쩌렁 울렸다. 충격과 배신감에 사로잡힌 얼굴들이었다.

“미친……!”

“너 왜 그렇게 중요한 걸 이제 말하냐!”

“대체 정체가 뭐야? 또 말 안 한 거 있으면 당장 털어놔.”

엘레노어는 밤늦도록 연구실에 붙잡혀 선배들의 질문 공세를 받아야 했다.

카이델의 사인을 받아 주기로 몇 번이고 약속하고서야 엘레노어는 마차에 오를 수 있었다.

새로 얻은 인연들을 뒤로하고, 엘레노어는 다시 벨리움으로 향했다.

그녀가 있고 싶은 곳, 그리고 있어야 할 곳으로.

***

“엘렌!”

돌아온 엘레노어를 맞이한 것은 의외로 드와이트였다.

“드와이트?”

깜짝 놀란 엘레노어가 드와이트를 와락 끌어안으며 물었다.

“네가 어떻게 여기 있어?”

“으윽. 아프니까 살살 안아.”

깜짝 놀란 엘레노어가 드와이트에게서 화다닥 물러서며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아파? 어디가? 많이 다쳤어? 언제 왔어? 아예 돌아온 거야?”

“하나씩 물어, 하나씩.”

드와이트가 엘레노어의 손가방을 받아들며 핀잔했다. 그가 약간 절뚝이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소파에 털썩 앉은 엘레노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다리를 다친 거야?”

드와이트가 엘레노어의 옆에 앉으며 대답했다.

“응. 심하게 다친 건 아니야. 그냥 약간.”

“이제 아주 돌아온 거야?”

“보직이 변경됐어. 황궁으로 출퇴근할 거야.”

“아, 진짜 잘됐다. 마음이 놓여.”

엘레노어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동안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리안은 어떻게 지내?”

“잘 지내. 안전한 보직에 있으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다행이다.”

엘레노어가 휴 하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야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드와이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제일 궁금한 건 안 물어보네.”

정곡을 찔린 엘레노어가 어깨를 움찔했다.

“네 남자친구도 잘 있어. 네 덕분에 내내 불편할 만큼 편하게 지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엘레노어가 기도하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머릿속이 아득할 만큼의 안도감이 밀려왔다.

드와이트가 품에서 편지 봉투를 꺼내 건넸다.

“전해달라시더라.”

“!”

엘레노어의 초록빛 눈동자에 반짝, 빛이 들어왔다.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듯, 엘레노어는 드와이트의 손에 들린 편지를 재빨리 빼앗아 들었다. 엘레노어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단호함에 드와이트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보는 건데!

다리도 다쳤는데!

남자친구가 보낸 편지 한 통에 홀라당 자리를 떠 버리려 하다니, 섭섭했다. 그냥 남매도 아니고, 쌍둥이 남매인데 말이다.

“오빠고 뭐고 가족이고 뭐고 필요 없다 이거지?”

엘레노어가 휘휘 손을 내저으며 거실을 가로질렀다.

“계속 있을 거라며. 나중에 이야기해.”

“부모님 금방 오셔!”

“오시면 불러.”

엘레노어는 다람쥐처럼 날렵하게 계단을 올라 제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잘 정돈된 침대가 그녀를 맞았다.

침대 위로 그대로 몸을 날린 엘레노어가 곧바로 편지 봉투를 열었다.

「사랑하는 엘레노어에게.

답장이 늦어 미안해.

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 가슴 가득 쌓여 있지만, 차마 글로 다 풀어내지 못하는 부족함을 용서해. 글재주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잘 지내. 그대가 내게 선물한 네 잎 클로버 때문인지도 몰라.

상황은 종종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지만, 그럼에도 나는 승리를 낙관하고 있어.

하루빨리 벨리움으로 돌아가 그대를 기다릴게.

그때는 그대가 읽다가 지칠 만큼의 편지를 쓸 거야.

우리 사이의 공백을 메우고도 남을 만큼 긴긴 편지를 말이야.

그대의 일상이 안온함에, 그대를 웃게 하는 이들이 곁에 있다는 것에 감사해.

그리고 그런 그대를 기다릴 수 있음에, 그리워할 수 있음에, 사랑할 수 있음에 또 한 번 신께 감사해.

엘레노어.

눈을 뜬 모든 순간, 눈을 감은 모든 순간 그대를 떠올려. 그런 숨통이 트이거든.

많이 보고 싶어.

사랑해.

그대만의 충실한,

카이델 이드리스 발렌타인」

“잘 지낸다니 정말 다행이다.”

엘레노어가 편지에 코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으음.”

그럴 리 없겠지만, 편지에서 카이델의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카이델의 서명 위에 가볍게 입술을 누른 엘레노어가 편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나도 많이 보고 싶어요.”

그리고…….

엘레노어가 수줍음에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아직은 좀 어색하지만, 카이델이 돌아오고 나면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나도 사랑해요…….”

아직 한 번도 돌려주지 못한 말이었다.

사랑을 말하기에 아직은 이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와 떨어져 있는 동안 엘레노어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좋아한다는 말로는 카이델을 향한 감정을 전부 담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카이델이 돌아오자마자 말해 줄 거야.”

나도 사랑한다고.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

며칠 뒤, 엘레노어는 황궁을 방문했다. 엘레노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이즈멜이 그녀를 궁으로 초대했다.

“엘레노어. 다시 봐서 기뻐.”

“전하, 그간 잘 지내셨어요?”

“당연히 잘 못 지냈지. 그대가 없는데.”

이즈멜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잘 못 지냈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늘 그렇듯 아름다웠지만, 전에 비해 야윈 탓인지 조금 더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카이델은 알아? 돌아왔다는 거?”

“아니요.”

“깜짝 선물 같은 건가?”

이즈멜의 말에 엘레노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구요. 아직 말을 전할 타이밍을 못 잡았어요.”

“그나저나 왜 일찍 돌아온 거야? 연구생 생활이 별로였어? 누군가 그대를 괴롭히던가?”

그랬다면 내가 혼내 줄 수 있는데.

이즈멜의 중얼거림에 엘레노어가 작게 웃었다.

“아니에요, 전하. 다들 정말 잘 대해 주셨어요. 그냥 연구 일이 제 적성에는 맞지 않았던 것 같아요.”

밝게 웃는 엘레노어를 보는 이즈멜의 심장이 울렁거렸다. 그녀를 둘러싼 세상이 한층 환해진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욕심을 버릴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엘레노어.’

엘레노어가 없는 시간 동안 나름대로 잘 지냈다고 생각했다.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을 만큼 일이 바쁘기도 했고, 감상에 젖어 있기에는 황궁 분위기가 너무 팍팍했다.

‘조금은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어떻게 이렇게 한순간에 몇 달 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즈멜은 괜한 농담을 던졌다.

“역시 그대도 내가 그리웠던 거지?”

“어떻게 아셨어요?”

어색하지 않게 받아친 엘레노어가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이즈멜은 저도 모르게 그런 엘레노어를 빤히 바라보았다.

반듯한 이마, 지나치게 높지도 낮지도 않은 코, 크고 순한 눈망울과 페리도트처럼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

금사처럼 반짝이는 머리카락들이 가느다란 목덜미를 타고 굽이굽이 흘러내린다.

작은 손에 비해 길게 뻗은 손가락이 우아하게 찻잔을 집어 들고, 약간 벌어진 분홍빛 입술 사이로 붉은 차를 조금씩 흘려 넣는다.

“아 참.”

엘레노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루크한테 편지는 자주 오나요?”

엘레노어의 시선이 갑자기 제게 향하자 당황한 이즈멜이 눈을 크게 떴다.

“어? 그…….”

“이럴 줄 알았어. 제가 편지 자주 하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했는데, 루크는 아직도 뭔가 쓰는 게 귀찮은가 봐요.”

엘레노어는 이즈멜의 어색한 태도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루크는 잘 지내고 있대요. 수업시간에 졸아서 청소 당번을 자주 하기는 하는데,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그렇게 많다네요.”

“그래? 녀석.”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즈멜이 씩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목이 탔다.

아이들의 소식을 조금 더 전해주던 엘레노어가 화제를 돌렸다.

“그동안 전하께서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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