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카이델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회복되는 대로, 그대는 벨리움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어.”
울컥한 드와이트가 곧바로 반발했다.
“겨우 이 정도 부상으로 퇴역하는 건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카이델이 고개를 저었다.
“퇴역이 아니다. 전역이지. 다른 임무를 맡기겠다는 거다.”
카이델의 말에 드와이트의 귀가 쫑긋했다.
“그대는 전령이 되는 거다. 황태자 전하께 전황을 더 구체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라는 거야.”
카이델이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아무리 세세하게 이곳 상황을 묘사해도, 그대의 입으로 직접 전하는 것만 못하겠지. 보고만으로 전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으니까. 나는 그런 역할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해.”
“…….”
“나는 그대가 적임자라고 생각하는데. 나를 위해 그렇게 해 줄 수 없겠나?”
드와이트가 나직이 숨을 내쉬었다.
반쯤은 그를 안전한 곳으로 보내고 싶어 둘러대는 말일 것이다. 카이델은 유난스러울 정도로 그를 챙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저렇게 말하는데 다른 말을 하기도 참 어려웠다. 정신적으로 휴식이 필요하기도 했고 말이다.
드와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드와이트가 수락하자 카이델의 입매가 약간 풀어졌다. 다행인 일이었다.
“그래. 곧 후임을 보낼 테니 인수인계만 잘 부탁해.”
***
똑똑똑.
약간은 짜증스럽게 느껴지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카이델은 소리만 듣고도 저를 찾아온 이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들어와라.”
아드리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들어섰다.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그래.”
카이델이 앉으라는 듯 책상 앞에 놓인 의자를 턱짓했다. 아드리안이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카이델이 말문을 열었다.
“드와이트 에버렛이 부상을 입었다.”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고 있습니다. 방금 살피고 오는 길입니다.”
아드리안이 카이델의 왼팔에 감긴 붕대를 보며 말했다.
“드와이트를 구하다가 다치셨다고 들었습니다.”
“큰 상처는 아니다. 걱정할 것 없다.”
“걱정 안 합니다.”
“건방지긴.”
카이델이 깨끗한 종이 몇 장을 책상 위에 꺼내놓으며 말했다.
“나는 그를 벨리움으로 돌려보낼 생각이다. 전하의 곁에서 군사 우편을 관리하는 일을 맡길 생각이야.”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아드리안은 친구가 안전한 곳으로 배치받았다는 것에 만족했다.
“동의합니다.”
“그럼 이곳에서 그가 하던 직책에는 결원이 생기는 셈이지.”
아, 설마.
카이델의 말에 아드리안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카이델의 한쪽 입매가 슬쩍 솟았다.
“아드리안 블레이크. 드와이트가 떠나기 전까지 완벽하게 인수인계 받도록 해.”
싫다. 죽어도 싫다.
드와이트가 하는 일은 종일 카이델과 붙어 있어야 하는 보직이었다.
모든 회의에 함께 참석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드리안이 정리한 모든 서류는 카이델의 결재를 받아야 했다.
‘최악인데.’
아드리안이 파드득 어깨를 떨었다.
“차라리 싸우러 나가겠습니다.”
“서류와 싸우도록.”
“저는 검을 잡는 사람입니다.”
“이제부터는 펜을 잡도록 해. 늘 그랬으면서 뭘 새삼.”
펜을 든 카이델이 아드리안 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잔뜩 약이 오른 아드리안이 따져 물었다.
“일부러 저를 괴롭게 하시는 겁니까?”
카이델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아드리안과 눈을 맞췄다. 그가 물었다.
“괴로운가?”
“예.”
카이델이 씩 웃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다만, 꽤 마음에 드는 부산물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겠군.”
하여튼 마음에 안 드는 남자다. 아드리안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아까부터 카이델은 무언가를 정성껏 쓰고 있었다. 흐물흐물 녹아내린 표정만 봐도 편지의 수신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드리안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엘레노어에게 쓰십니까?”
“그래. 드와이트가 떠날 때 부탁할 생각이다.”
잠시 멈칫한 카이델이 아드리안을 향해 물었다.
“……네 안부도 전해줄까?”
아드리안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엘레노어가 그를 선택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싫었지만,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는 했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좋은 사람이라는 건 인정해.’
엘레노어에게 해가 될 일이라면 숨도 쉬지 않을 사내다.
엘레노어를 두고 허튼 일을 하지도 않을 테고, 그녀를 함부로 대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저에 대한 마음이 고울 리가 없는 데도, 엘레노어의 친구라는 이유로 그는 제게 늘 관대했다. 상단이 어려움에 빠졌을 때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던가.
‘그래. 언젠가는 받아들여야지.’
아드리안은 진담에 농담 몇 방울을 섞어 건넸다.
“집요한 상관 때문에 무척이나 괴롭다고 전해주십시오.”
카이델은 아드리안의 목소리에서 저를 향한 적의가 조금 옅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카이델이 고개를 들어 아드리안의 얼굴을 살폈다. 그가 민망한지 고개를 홱 돌렸다.
“……무척 건강히 잘 지낸다고 전해주지. 능력 있는 상관을 둔 덕에.”
카이델의 입가에 설핏 웃음기가 스쳤다.
카이델은 제가 아드리안을 받아들이려 애쓰는 것처럼, 아드리안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쉽지 않은 일이다. 보통 결심이 필요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잠시 아드리안을 빤히 보던 카이델이 다시금 편지로 시선을 내렸다. 어쨌거나 엘레노어의 옆에 두기에 껄끄럽고 탐탁잖은 놈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으므로.
카이델이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나가.”
***
오늘 연구소의 분위기는 평소와 조금 달랐다.
“아, 떨린다.”
소장인 아스터에게 그간의 연구실적을 발표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엘레노어 너는 걱정 없겠다? 도대체 이름 올린 논문이 몇 개야?”
엘레노어가 코끝을 찡긋하며 대답했다.
“에이, 수가 중요한가요?”
“중요하지. 막내인데 발표할 연구가 있다는 게 엄청난 거야.”
선배 하나가 엘레노어의 머리를 가볍게 흩트려 놓으며 말했다. 엘레노어는 헤헤 웃으며 밤새 힘들게 쓴 논문을 꼭 끌어안았다.
엘레노어의 순서는 마지막이었다. 단상 위에 올라간 엘레노어는 준비한 대본대로 깔끔하게 발표를 마쳤다.
엘레노어가 생각하기에도 군더더기 없이 잘한 발표였다.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이런 발표는 자신 있어.’
소장을 비롯한 교수들도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준비했네. 처음이라 쉽지 않았을 텐데.”
“선배님들이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그래?”
아스터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끝나고 남게. 따로 잠시 보지.”
네에……?
***
‘정말 그냥 따로 보자는 말이셨군.’
보통 끝나고 남으라는 말은 늘 뭔가 좋지 않은 이유를 동반하던데, 오늘만은 예외였나 보다.
엘레노어는 아스터와 함께 교정을 걸었다. 날이 제법 풀려서 걷기 좋았다.
아스터가 말했다.
“연구소 생활에는 잘 적응한 것 같더군. 다들 입을 모아 칭찬하던데.”
엘레노어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선배님들이 친절하게 잘 대해 주셨어요. 교수님들도 다 좋으시고요.”
“순해 보여도 은근히 깐깐한 녀석들인데, 신기한 일이야. 잘도 그놈들 마음에 들었군.”
아스터는 엘레노어가 참여한 연구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칭찬도 있었고, 보완할 점에 대한 피드백도 있었다.
“보아하니 아직 연구 분야는 정하지 못한 것 같더군.”
정곡을 찔린 엘레노어가 발갛게 뺨을 물들였다. 이런저런 학문을 건드렸지만, 아직 마음을 확 이끄는 것은 없었다.
“네…….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래, 이제 시작했으니 서두를 것 없지.”
아스터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도 헷갈릴 때가 있다네. 내가 잘 가고 있는 건지, 이 길이 내 길이 맞는 건지.”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쌀쌀한 바람이 엘레노어의 금빛 머리칼을 흩어놓았다.
엘레노어가 겉옷을 꼭꼭 여미자 아스터가 빙긋 웃었다.
“델른의 봄은 벨리움보다 몇 달 늦지. 하지만 시작되면 무척이나 아름다워.”
아, 그러고 보니.
아스터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조금 앞에 서 있는 나무를 짚었다.
“이게 무슨 나무인지 아느냐?”
엘레노어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특별히 눈에 띄는 구석이 없는 나무였다.
“모르겠어요.”
“사과나무란다. 꽃이 피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아하.”
엘레노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 너에게 물었던 말에 너는 대답했었지.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면,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고.”
“기억나요.”
엘레노어가 옛날 일을 떠올리며 픽 웃었다.
그냥 떠오르는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은 것이었을 뿐인데.
아스터가 물었다.
“지금도 같은 마음이냐?”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면…….
내일 지구에 운석이 떨어지고,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져 사라진다면…….
그래서 내일 내가 또다시 죽는다면.
엘레노어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요.”
카이델이었다.
그와 사과꽃을 보고 싶었다. 여름의 바다도, 가을의 단풍도, 온통 새하얗게 물든 설경도 보고 싶었다.
사과나무를 심든 베든,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냥,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저는 사과나무를 심지 않을 거예요.”
“그러면?”
엘레노어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그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요. 거창한 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아니면 아무 일도 하지 않든…….”
엘레노어의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퍽 낭만적인 말이구나.”
그 순간 엘레노어의 안에서 모든 게 명확해졌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또 어떻게 살고 싶은지.
엘레노어가 머물 곳은 이곳이 아니었다.
“아스터 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엘레노어는 용기 내 입을 열었다.
“정말 죄송하지만 연구생 자격, 포기하고 싶습니다.”
엘레노어의 말에 아스터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어째서냐? 시설이 만족스럽지 않았어? 지원이 부족했나?”
“아닙니다. 연구소 일을 하면서 정말 즐거웠어요. 내내 꿈꾸던 일이었거든요.”
“그런데?”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았어요. 이상하게 공허했어요.”
엘레노어의 말에 아스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흠…….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연구소 일이 너와는 맞지 않는다고?”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추구하는 방향과는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엘레노어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정말 죄송해요.”
“죄송할 것 없다. 괜찮아. 네 길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아스터가 엘레노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괜찮다는 말과 달리 얼굴에는 서운한 기색이 역력했다.
“좋은 인재를 놓친 것은 아쉽지만…… 따로 생각이 있는 것이겠지. 네 선택을 존중하마.”
아스터가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새로 신입을 뽑아야 하는데…….”
지원자야 많겠지만, 또 어떻게 괜찮은 인재를 가려야 하나.
그때 엘레노어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 순간 문득 머릿속을 스쳐 간 얼굴이 있었다.
“저,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