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아르센은 늦은 밤을 틈타 기습을 감행했다.
다행히 이런 상황에 철저히 대비해 왔기에 순식간에 기지가 함락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히스커스 제국과 뫼젠 왕국의 군대가 아르센 군과 대치하는 사이, 카이델이 전열을 가다듬었다.
“전원 제 위치로! 동요하지 마라!”
뿔나팔 소리가 길게 울렸다.
말을 타고 달려온 전령에게 상황을 전해 들은 카이델은 군단장들을 불러모았다.
“연합군이 잘 싸워 주고 있으니 우리는 준비했던 동선으로 움직인다. 우리가 절반을 포위하면, 헤르만 장군의 부대가 반대편을 포위할 수 있도록.”
“예, 알겠습니다.”
“목적지까지 이동한 후에는 진형을 바꾼다. 내가 최전선에 설 테니 레온하르트, 그대가 후방을 맡도록.”
“존명.”
둥 둥 둥. 북소리에 맞춰 수많은 병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검을 빼 든 카이델이 후위에 섰다. 카이델을 엄호하는 병사들이 순식간에 그를 둘러쌌다.
주변을 둘러보던 카이델의 시선 끝에 익숙한 얼굴이 걸렸다. 카이델이 눈썹을 슬쩍 찡그렸다.
희고 깨끗한 피부,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 추수철의 밀밭을 닮은 금발.
“……드와이트?”
드와이트는 비전투 병력에 속해 있었다. 창과 방패를 든 그를 보자 카이델은 순간 혼란이 왔다.
엘레노어와 꼭 닮은 얼굴이 그를 보며 말했다.
“비상 상황이지 않습니까.”
“…….”
“저도 훈련은 충분히 받았습니다. 제 몫은 해내고 싶습니다.”
드와이트는 말간 인상 탓에 나이보다 조금 어려 보이곤 했다. 한평생 펜만 들었을 그가 무기를 들고 있으니 괜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흐음.”
카이델이 고민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드와이트는 똑바로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고집도 엘레노어를 닮았군.’
결국 카이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단, 내 시야에서 벗어나선 안 돼.”
그래야 내가 그대를 살필 수 있으니.
카이델의 허락에 드와이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드와이트는 이즈멜에게서 온 서신을 전달하고, 회의록을 작성하는 일을 했다.
중요한 일이기는 했지만, 저릿저릿한 손가락만 주무르고 있자면 마음이 불편해졌다. 사상자의 숫자를 세고 기록할 때는 죄책감마저 느꼈다.
저를 보호하고자 하는 카이델의 뜻은 알았다. 보나 마나 엘레노어와 부모님이 카이델을 붙잡고 부탁했을 것이 뻔했다.
그는 묵직한 방패를 든 손에 힘을 주며 생각했다.
‘전부 뭔가 하는데, 나만 빠져 있을 수는 없어.’
행군은 퍽 고된 일이었다.
몇 달간의 정찰로 겨우 찾아낸 비밀 통로인 만큼 길이 험했고, 혹시나 매복해 있을지 모를 적군을 의식하느라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카이델은 중간중간 고개를 돌려 드와이트를 살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열심히 쫓아오는 것을 보자 안쓰러웠다.
‘역시 무리였나.’
협곡을 지나자 탁 트인 황무지가 펼쳐졌다. 바람이 불자 모래 먼지가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다.
“적군이 보입니다! 어림잡아 백 명쯤 되는 것 같습니다!”
카이델이 부관에게서 망원경을 건네어 받았다. 상대의 전력을 가늠한 카이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에서 떨어져 나온 부대군. 일부러 기다렸던 건 아냐.”
재빠르게 판단한 카이델이 말했다.
“전투대형으로.”
카이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협곡을 통과하기 위해 일렬로 길게 서 있던 기마병들이 대열을 펼쳤다.
바람이 조금씩 가라앉자, 서서히 시야가 확보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적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기마병들이 가로로 늘어서 있었기에 카이델의 군대는 실제보다 훨씬 많은 수처럼 보였다. 적들이 동요하는 것이 멀리서도 느껴졌다.
“돌격!”
카이델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와아아!”
우레와 같은 소리와 함께 기마병들이 달려 나갔다. 그들은 창검을 이용해 순식간에 적군을 무력화했다.
몇몇 남은 이들은 뒤이어 달려온 보병들의 공격에 속수무책 무너지고 말았다. 오렌지빛 땅이 검붉은 피로 온통 젖어 들었다.
카이델은 예상치 못한 교전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머쥐었다. 부대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야비한 아르센 놈들 따위 한주먹거리지!”
“전부 무찌르자!”
드와이트 역시 최초로 목격한 승리의 현장에 흥분했다.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어대며 온몸에 열이 올랐다.
“동요하지 마라. 들뜨면 실수하게 된다.”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은 카이델이 그런 병사들을 진정시켰다. 그가 부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목적지가 머지않았으니 이제는 진형을 바꾼다. 위치로.”
“위치로!”
자연히 말을 몰아 움직이던 카이델이 멈칫했다. 그가 드와이트를 바라보았다.
카이델이 목소리를 낮춰 드와이트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내가 최전선으로 이동하고 나면, 그대를 신경 쓸 수 없어. 전방은 위험하니 레온하르트의…….”
“괜찮습니다.”
그러자 드와이트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카이델이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부대원으로서 제 역할을 해내려는 모습이 기특하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좀 힘에 부치는 것 같더니, 먼 길을 걸은 것치고는 안색도 나쁘지 않았다. 카이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믿어 보지.”
“감사합니다!”
카이델은 천천히 말을 몰아 최전선으로 나섰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히스커스와 뫼젠, 아르센 연합군이 뒤엉켜 격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생각보다 팽팽한 양상에 카이델이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는 오른쪽으로 치고 들어간다.”
“예.”
“데이먼, 그대는 히스커스와 뫼젠 총사령관을 만나 상황을 전하고.”
돌격 준비를 마친 카이델이 숨을 가다듬었다.
사선.
모든 전선은 곧 사선이었다. 생과 사가 등을 맞댄 곳이었고, 걸음걸음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장소였다.
손끝 발끝이 찌릿찌릿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오늘의 싸움을 가늠했다.
‘엘레노어. 무사를 빌어줘.’
속으로 짧은 기도를 마친 카이델이 제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카이델은 긴장과 흥분이 뒤섞여 붉게 달아오른 얼굴들을 차례차례 눈에 담았다. 그러자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는 확신이 섰다.
그가 무거운 입술을 뗐다.
“벨리움의 전사들답게, 용맹히 싸워라.”
낮고 힘 있는 목소리가 적막을 날카롭게 갈랐다.
“돌격!”
“와아아아아!”
아까보다 배로 큰 함성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딛고 선 땅이 흔들리는 듯한 엄청난 기세였다.
카이델을 선두로 한 군사들이 빠른 속도로 아르센 군을 향해 덤벼들었다.
“벨리움 제국군?”
“뭐야? 대체 어디에서들 나타난 거야?”
“젠장! 총사령관이 나섰어!”
후방을 공격당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아르센 군사들이 혼비백산하며 물러났다.
하지만 카이델의 병사들이 순식간에 퇴로를 차단했다. 팽팽하던 승부가 순식간에 기울었다.
승기를 잡았다는 확신은 벨리움과 히스커스, 뫼젠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병사들은 젖 먹던 힘을 다해 적군을 무찔렀다.
챙-!
카이델의 검이 적군의 검을 수차례 동강 냈다. 엄청난 힘이었다.
겁 없이 덤벼들려던 적국 장수들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인간이 아니야!’
카이델은 흐트러짐 없는 고고함으로 전쟁터를 누볐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도 검은 늘 정확하게 목표물을 베어냈다.
‘정리가 다 된 것 같은데.’
카이델의 날카로운 검날을 타고 검붉은 피가 흘렀다. 카이델이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전투는 조금씩 마무리 단계로 접어드는 모양이었다. 카이델은 부하들을 살피며 다시 진형을 가다듬었다.
카이델의 두 눈에 처참하기 짝이 없는 전쟁터의 풍경이 담겼다.
날카로운 쇠붙이 소리, 그보다 더 날카로운 누군가의 비명, 신의 구원을 바라는 목소리와 신을 저주하는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코끝에는 비릿한 쇠 냄새와 피 냄새, 흙먼지 냄새가 뒤섞여 감겨들었다. 역한 냄새였다.
카이델이 전령에게 물었다.
“항복 의사는?”
“없는 듯합니다.”
카이델이 짧게 혀를 찼다.
멍청한 놈. 더 이상의 피를 흘리고 싶지는 않았건만.
“기어이 제 부하들을 죄다 죽여 버릴 생각이군.”
나직하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카이델이 짧게 턱짓했다.
“마무리하지.”
“예,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
한편 드와이트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난생처음으로 실전을 경험한 드와이트는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조금 전에 있었던 작은 교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전우들의 흥분에 함께 도취해 있던 드와이트는, 막상 피와 살이 튀는 전쟁터로 던져지자 순식간에 피가 식었다.
“조심해, 거기!”
하지만 멍하니 있을 시간은 없었다. 드와이트는 살기 위해 창을 내질렀다.
“윽!”
이성은 사라지고, 오로지 본능만이 남았다. 드와이트는 죽지 않기 위해서 상대를 공격했다.
그때 옆에 있던 병사가 드와이트를 향해 외쳤다.
“드와이트, 다시 대열에 합류하지. 대충 끝난 듯해.”
“그래.”
“자네 괜찮나? 안색이 좋지 않은데.”
병사가 새하얗게 질린 드와이트를 향해 물었다. 드와이트는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사람을 찔렀어.’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드와이트는 반쯤 넋이 나가 병사의 뒤를 따라 이동했다. 끝이 났다고 생각하니 뒤늦게 현실 감각이 밀려왔다.
그때였다.
“개 같은 벨리움 놈들!”
시체처럼 쓰러져 있던 적군 병사 하나가 젖 먹던 힘을 다해 드와이트에게 덤벼들었다. 단검이 드와이트의 복부를 향해 빠르게 돌진했다.
‘!’
갑작스러운 상황에 드와이트의 몸이 꽁꽁 얼어붙었다.
“피해!”
익숙한 목소리가 드와이트의 귓전을 때렸다.
빠르게 달려온 카이델이 왼팔로 드와이트의 허리를 강하게 감아 당겼다.
드와이트의 복부를 노린 칼은 카이델의 팔을 스치고 드와이트의 허벅지를 길게 베며 미끄러졌다.
“으윽……!”
카이델이 검을 뻗어 그를 처리한 뒤, 곧장 드와이트를 살폈다. 다행히 상처가 아주 깊지는 않았지만 범위가 꽤 넓었다.
“괜찮은가?”
드와이트가 신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델이 품에서 독한 술이 든 마대를 꺼냈다.
“아플 거다. 내 어깨를 잡고 버텨.”
카이델이 드와이트의 상처 위에 독한 술을 부었다.
“아……으으.”
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와 드와이트가 몸부림쳤다. 잘 참았다는 듯, 카이델이 드와이트의 뺨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카이델은 막사로 돌아가자마자 군의관을 불러 드와이트의 허벅지를 살피게 했다.
“아주 깊게 베지는 않았지만, 근육을 다쳤습니다. 걷는 데는 지장이 없겠지만, 격하게 말을 타거나 빠르게 달리기까지는 회복 기간을 충분히 가져야 할 겁니다.”
“알았네. 따로 신경 써야 할 건?”
“소독만 제때 잘 해 주면 괜찮을 겁니다. 사령관님 말씀이니 제가 직접 신경 쓰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고맙군.”
짧게 경례한 군의관이 돌아가고, 카이델이 드와이트의 침상 옆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드와이트 에버렛.”
“예.”
하루 사이 조금 수척해진 얼굴을 빤히 보던 카이델이 입을 열었다.
“벨리움으로 돌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