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선생님께.
안녕, 선생님! 오늘은 시에나예요.
선생님이 같은 델른에 있어서 좋아요. 편지가 엄청 빨리 오거든요.
어제는 소풍을 갔어요. 성벽까지 걸어서 올라갔는데 힘들었어요.
보물찾기도 했는데, 찾기 엄청 쉬워서 시시했어요. ‘보물찾기’가 아니라 ‘보물 여기 있다’였다니까요?
선생님이랑 삼촌들이랑 소풍 갔던 게 훨씬 재밌었어요. 또 가고 싶다!
루크는 어제 수업 시간에 자다가 걸려서 오늘 청소 당번 됐어요. 선생님이 혼내 주세요.
이따가 청소할 때 저는 절대로 안 도와줄 거예요. 데미는 착해서 또 도와주겠지만……. 에휴.
제레미라는 애랑 요즘 좀 친해졌는데 루크가 걔한테 자꾸 못되게 굴어요. 생긴 게 마음에 안 든다는데 말인지 방구인지. 제레미는 귀엽게 생겼거든요.
(물론 루크가 조금 더 잘생기기는 했어요. 엄청 조금.)
아, 데미는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진짜 많아요! 자기들끼리 틈만 나면 신경전을 벌이는데 보고 있으면 웃겨요.
여자애들이 보물찾기로 받은 사탕을 죄다 데미한테 갖다 줘서 저랑 루크가 다 먹었답니다. 데미안은 사탕을 엄청 좋아하진 않거든요.
루크는 다행히 별로 인기가 없어요.
또 편지 쓸게요!
보고 싶어요.
시에나 올림」
시에나의 편지를 읽은 엘레노어가 쿡쿡 웃었다. 편지만 봐도 아이들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귓전에 울렸다.
“루크가 제레미라는 친구를 질투하나 보다.”
‘다행히’ 인기가 없다는 걸 보니…… 루크도 희망이 전혀 없지는 않은 것 같은데.
“데미가 인기가 많구나. 하긴 당연하지. 그렇게 잘생기고 착하고 똑똑한데 누가 안 좋아해.”
그런 것도 형을 똑 닮았네.
카이델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떠올린 엘레노어가 픽 웃었다. 데미안도 눈치 없이 전부 지나치는 건 아니겠지, 잠시 걱정하던 엘레노어가 고개를 저었다.
카이델과 달리 데미안의 곁에는 루카스도 있었고 눈치 빠른 시에나도 있었다. 거기다 데미안은 감정에 있어서는 카이델보다 훨씬 예민하니 알아서 잘 해낼 것이다.
“잘 적응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엘레노어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흐린 날씨 때문에 요동치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다들 그리워.”
***
“상황이 복잡하게 되었군요.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겠습니다.”
누군가의 말에 막사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침울한 분위기가 기지를 떠돌았다.
각국의 총사령관과 그 부관, 선별된 명장들만 모인 자리였다. 권세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쟁쟁한 이들이었다.
기세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이들이지만, 오늘은 달랐다. 모두가 단 한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진땀을 빼고 있었다.
카이델은 팔짱을 낀 채 한참이나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에게서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카이델이 입을 열었다.
“맥클린트, 제가 누누이 강조하지 않았습니까?”
“면목 없습니다. 제가 과욕을 부렸습니다.”
히스커스와 뫼젠 제국군이 애초의 전술에서 벗어나 과욕을 부린 것이 문제였다. 카이델이 상황을 수습하기는 했지만, 병력을 많이 잃고 말았다.
카이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딱딱하게 말했다.
“이로 인해 전쟁이 최소 6개월은 더 길어진 셈입니다. 그것도 앞으로 치러질 모든 핵심 전투에서 승리할 경우에나 그렇습니다.”
카이델의 말에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카이델은 동요하지 않고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아르센은 분명 이 위기를 기회라 생각할 겁니다. 아르센의 사령관은 약삭빠른 자이니 새벽이나 늦은 밤을 틈타 쳐들어올 확률이 높습니다.”
처음에는 카이델을 고깝게 보는 시선도 많았다. 다른 총사들에 비해 열 살은 더 어렸고, 지나치게 수려한 외모도 눈에 띄었다.
번듯한 가문의 이름에 기대 완장 놀이를 하는 거라며 무시하던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저렇게 다 가진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가?’
카이델이 지휘한 전투에는 패배도, 찝찝한 승리도 없었다. 누구도 입을 댈 수 없는, 적군마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압도적인 승리만이 있을 뿐이었다.
“발렌타인 공, 오늘 함께 식사하지 않겠나? 괜찮은 양고기가 들어왔는데.”
“언제 한번 내 막사에 들르게. 귀한 담배를 좀 선물해 주겠네.”
어느 순간 사람들은 카이델의 환심을 사려 애썼다. 모두가 카이델의 용맹과 고고함을 입이 닳게 칭찬했다.
카이델이 이끄는 전투는 가장 안전한 전투라 불렸다. 병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카이델의 예하로 들어가기 위해 애썼다. 제비뽑기가 성행할 정도였다.
딱 한 사람만 빼고.
“아드리안 블레이크.”
카이델이 제 숙소로 아드리안을 불러냈다. 그가 침대 위에 툭 툭 건틀렛을 던져놓으며 말했다.
“굳이 최전방으로 가겠다고. 위험한 전투라는 걸 확실히 알면서도.”
“예.”
“왜지?”
잠시 침묵하던 아드리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싸우러 전쟁터에 나온 군인이…….”
“잘하지도 못하는 거짓말은 집어치워라.”
카이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불허한다.”
“하지만……!”
“명령이다.”
총사령관의 명령. 전시에는 지엄한 국법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드리안이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더는 대꾸할 수 없었다.
카이델이 아드리안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아드리안 블레이크.”
“…….”
“나도 네가 마냥 달갑지는 않아. 알고 있나?”
“압니다.”
아드리안이 고개를 살짝 들어 카이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금빛 눈동자에는 삐딱한 반항심이 어려 있었다.
카이델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솟았다. 그가 나직하고 싸늘한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엘레노어의 속을 끓이고, 결국은 다치게 했지. 낙마야 엘레노어의 부주의였다지만 그게 아니었어도 며칠은 앓아누웠을 거야. 그 추운 날 여덟 시간을 밖에서 떨면서 기다렸으니까.”
“…….”
“뭣 같지만, 참았지. 나라면 그런 식으로 엘레노어를 대하지는 않았겠지만, 심정만은 이해하니까.”
아드리안의 시선이 툭 떨어졌다.
‘여덟 시간을 기다렸다고.’
그날은 유난히 밤공기가 찼는데. 네 옷은 그리 두껍지도 않았는데.
아드리안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내내 삐딱하게 치닫던 기운이 한풀 꺾였다.
“전쟁이 터진 이후로 내가 네 불복과 불충, 건방을 내내 인내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나? 내가 어디까지 참고, 어디까지 이해해야 하지?”
“…….”
“편의를 보아줘도 고마운 줄 모르고, 명령에는 뻗대기나 하지.”
아드리안이 대답했다.
“호의를 요구한 적 없습니다.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대해 주십시오.”
“내가 원하는 바야. 내게 너는 다른 병사들과 똑같아. 아니, 그보다 더 못하지. 무엇 하나 곱게 볼 구석이 없지 않나.”
카이델의 말에 아드리안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엘레노어에게는 네가 소중한 사람일 테니까.”
엘레노어. 그 이름에 아드리안의 입이 딱 다물렸다.
“전쟁에 나서면서 맹세했다. 너와 드와이트 에버렛을 살펴주기로. 난 그 맹세를 깰 생각이 없어.”
“…….”
“싫든 좋든, 너는 내 예하다. 나는 네게 호의를 베풀 거고, 네 건방에도 끝까지 검을 뽑지 않을 거다.”
카이델이 한 손으로 검자루를 쓸며 말했다.
“네게 가장 안전한 자리를 줄 것이고, 네가 위험에 처하면 내가 직접 나서 지킬 것이다. 딱 한 가지 이유로.”
아드리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엘레노어의 연인으로 나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상관없다. 적어도 지금은 요구하지 않아. 하지만 총사령관으로서의 나는 인정해. 사감을 빼고, 오로지 공적인 태도로 나를 대해라.”
그래야 네 속이 편할 거다.
용건을 끝낸 카이델이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가 침대 위로 망토를 벗어 던지며 말했다.
“네가 하는 걸 보고 나도 결정할 생각이야.”
나가려던 아드리안이 빙글 돌아섰다.
“뭘 말입니까?”
카이델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너를 엘레노어의 친구로 인정할지 말지.”
“인정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도 네 인정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아.”
카이델이 아드리안을 힐끗 보며 말했다.
“하지만 엘레노어의 곁에 남고 싶다면 날 인정해야 할 거야. 난 비켜설 마음이 조금도 없으니까.”
***
몇 주째 아르센과 팽팽한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폭풍전야처럼 고요한 날들이었다.
상대의 전력을 가늠하는 듯한 자잘한 교전은 있었지만, 큰 전투는 없었다. 각국의 수장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전술 회의를 거듭했다.
오늘도 비슷한 하루였다. 잠시 짬이 난 카이델은 옷을 입은 채 침상에 누워 엘레노어의 편지를 펼쳐 들었다. 벌써 열 번은 더 읽은 듯했다.
「그리운 카이델」
응, 엘레노어.
카이델이 속으로 답했다. 그가 편지 첫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전쟁터까지 제대로 배달되는 편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카이델이 지금껏 전해 받은 편지는 총 세 통이었는데, 중간중간 내용이 비어 있는 걸 보아 많이 분실된 듯했다. 아까운 일이었다.
「당신의 하루는 오늘도 평안했나요? 다친 곳은 없고요? 잠은 좀 잤나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을 테니 저 좋을 대로 생각할게요.
겨울엔 겨울이라 연구소 일이 바쁜 줄 알았는데, 봄이 되니 더 바쁘네요. 여름이 되고, 가을이 되어도 바쁠 것 같아요.
여기 사람들은 다들 일에 미쳤어요. 저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전 이곳에 아주 잘 녹아들었답니다.
그래도 일만 하진 않아요.
당신 생각도 하고, 당신에게 편지도 쓰고, 당신이 써 준 편지도 읽는답니다.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 죽겠어요. 진짜 진짜 많이 보고 싶어요.
오늘 연구소 앞에서 네 잎 클로버를 찾았어요.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래요.
제 행운을 모두 그러모아 당신께 보냅니다.
답장할 필요는 없어요. 난 그 시간에 당신이 잠이나 조금 더 잤으면 좋겠어요.
다치지 말아요.
엘레노어」
카이델은 엘레노어의 이름 위에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내내 딱딱하게 긴장해 굳어 있던 표정이 부드럽게 녹았다.
봉투를 탈탈 털자 쪼글쪼글해져 말라붙은 네 잎 클로버 하나가 배 위로 톡 떨어졌다.
“귀엽긴.”
엘레노어가 한참을 쪼그려 앉아 네 잎짜리 클로버를 찾았으리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났다. 그렇게 찾아낸 걸 제게 보낸 마음도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나도 보고 싶어.”
카이델은 엘레노어에게 긴긴 편지를 쓰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눌러 참았다. 몇 번이나 펜을 들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부하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할 펜과 종이마저 배급받지 못하는데, 저만 전달할 수는 없어 가슴에 묻었다.
엘레노어도 그것을 아는지, 매번 답장할 필요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섬세한 배려였다.
카이델이 오랜만에 몽글몽글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콰광!
바깥에서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굉음이 울렸다. 카이델이 튕기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 나갔다.
“아르센 군의 기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