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네에?】
힐데가르트의 말에 엘레노어가 펄쩍 뛰었다.
힐데가르트가 말을 전할 만한 사람이 이즈멜뿐이라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었다.
【힐데!】
【미안. 카이델이 정말 아무 언질 없었어?】
엘레노어가 고개를 저었다.
‘그때 일이 어떻게 풀렸더라?’
엘레노어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때 일을 하나하나 되짚었다. 그러던 중, 작은 기억의 조각 하나가 엘레노어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갔다.
“아.”
엘레노어의 입에서 짧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짐작 가는 것은 있어요.】
【그래?】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젠트 공작가에서 투자를 철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새 투자자를 찾았다고 했거든요. 예전보다 훨씬 큰 규모로…….】
이젠트 공작가와 그 가신 가문들보다 훨씬 큰 규모의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사람.
엘레노어는 그런 사람을 딱 한 명 알았다.
【그랬던 거구나.】
카이델이 조금도 내색하지 않아서 몰랐다. 그는 그 흔한 생색 한 번을 내지 않았다.
심지어는 아드리안과 엘레노어의 사이를 오해했던 시간도 있었다. 그때에도 카이델은 투자금을 회수하거나, 불이익을 주지 않았다.
마음을 얻기 위해, 호감을 사기 위해 한 일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저 그 일로 속상해하는 나를 보는 게 싫어서, 오로지 그 한 가지 이유로…….’
코끝이 아릿했다. 엘레노어는 나중에 꼭 고마웠다고 전해야지, 마음먹었다.
【영영 모르고 지나갈 뻔했네요. 말해 주셔서 감사해요.】
【화 안 났어?】
【안 났어요. 절 걱정해서 하신 일인걸요.】
두 사람은 힐데가르트가 벨리움에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를 하며 킬킬 웃었다. 이제는 시간이 한참 지나 훨씬 솔직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
힐데가르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드와이트는…… 혹시 참전했어?】
【네. 귀족가에서는 거의 빠짐없이 한 명씩은 나갔어요.】
엘레노어의 대답에 힐데가르트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그렇구나.】
【너무 걱정하지는 않으려고요. 전투병도 아닌 데다 카이델이 신경 써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래, 다행이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드와이트를 기억하실 줄 몰랐어요.】
【그래?】
힐데가르트가 슬쩍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농담조로 말했다.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단다.】
두 사람은 창밖이 약간 어둑해질 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타지에서 만나니 반가움이 배가 되었다.
엘레노어가 힐데가르트를 배웅하며 말했다.
【기숙사가 좁아서 아쉬워요. 소파라도 좀 컸다면 기꺼이 침대를 양보해드렸을 텐데요.】
【큰 방으로 바꿔 줄까?】
【네? 아니요!】
【필요한 건 말만 해. 그런 것쯤은 일도 아니니까.】
힐데가르트가 씩 웃었다.
【가 볼게. 나 때문에 공부할 시간을 많이 뺏겼잖아. 내일 보자.】
【푹 쉬세요.】
달칵.
문이 닫히자 작은 방 안이 적막으로 가득 찼다. 휑한 기분을 느끼며 엘레노어는 책상 앞에 앉았다.
“아, 쪽지 시험 준비도 해야 하는데……. 시간을 너무 썼네.”
엘레노어는 머리를 슥슥 올려 묶고 집중 모드에 들어갔다. 오늘 안에 봐야 할 분량이 많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카이델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어.’
새하얀 종이 위에 카이델의 얼굴이 어른어른했다.
‘딱 한 번만 더 읽을까. 이젠 그만 읽자고 다짐하긴 했는데…….’
엘레노어는 서랍에서 카이델의 편지를 꺼내 들었다. 델른에 도착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 카이델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결국 유혹에 못 이긴 엘레노어가 편지를 펼쳐 들었다. 읽고 나면 또 한참 감상에 젖어 있을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사랑하는 엘레노어.
델른에는 잘 도착했는지, 날이 추운데 혹 아프지는 않은지, 그곳에서 잘 적응하고 있는지 궁금해.
나는 이제 배에 오르기 직전이야. 짬을 내 그대에게 편지를 써.
엘레노어, 그대에게만 털어놓는 비밀이 있어.
전쟁에 나서기 전에는 늘 유서와 유언장을 점검해. 아무리 작은 전투라도 말이야.
그리 감상적인 내용은 아니야. 데미안에게 남기는 몇 마디를 제하면 대개 작위와 영지, 내게 달린 책임들에 관한 것이거든.
그저 건조하게 훑고 서명하는 절차일 뿐인데, 이번에는 감상이 달랐어. 조금 두려워지더군.
자신이 없다거나 하는 이유가 아냐. 살아남고 싶은 이유가, 돌아오고 싶은 이유가 생겼기 때문이지. 내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이야.
같은 이유로 나는 어느 때보다 강인해진 나를 느껴.
나는 살아남을 거야. 그대의 곁으로 돌아가, 그대에게 입 맞출 거야. 늘 그랬듯, 무사한 모습으로.
그러니 부디 그대의 걱정은 이 편지와 함께 묻어 두기를.
그대의 하루가 평온하고, 그대가 보는 풍경들은 그저 아름답기를.
잠든 그대의 머리맡에는 좋은 꿈만 남기를 신께 기도해.
내 모든 승리를 그대에게,
카이델 이드리스 발렌타인」
편지를 다 읽은 엘레노어의 눈가에 투명한 눈물이 고여 들었다.
“아, 공부해야 하는데!”
엘레노어는 그렁그렁 고인 눈물을 슥슥 닦아내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떨궜다. 자꾸만 시야가 부옇게 변했지만, 엘레노어는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그와 더 오래 떨어져 지내는 것을 감수하고 선택한 일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뭔가 얻어가는 게 맞았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을 거야. 여기까지 온 보람은 있어야지.”
엘레노어가 콧물을 훌쩍였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태반이었지만, 그것조차 엘레노어의 의지를 꺾어 놓지 못했다.
모르면 알 때까지. 안 되면 될 때까지.
엘레노어의 방 불은 새벽까지 꺼지지 않았다.
***
연구실 생활은 편안하고 안정적이었다.
공부도 할 만했다. 쓸데없이 복잡하게 쓰인 고문서들에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하다 보니 나름대로 즐거움을 느끼게 됐다.
전생의 경험도 큰 도움이 됐다. 한국에서 상식처럼 통용되던 것들이 이곳에서는 파격이고 발견이었다.
엘레노어는 적당히 모르는 척, 새롭게 깨달은 척하며 툭툭 힌트를 던져 주었다.
“뭔가 애매한데.”
엘레노어의 바로 위 기수 선배인 제이드가 펜 끝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뭔가 단단히 막혔을 때마다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엘레노어는 소리 없이 슥 다가가 그가 길게 써놓은 문장들을 살폈다.
“어, 선배님 이 부분 접근이 잘못된 것 같은데요? 여기, 이 부분이요.”
“어디? 어, 그러네. 고마워, 엘레노어.”
엘레노어가 지적한 부분을 고치자 문제는 조금씩 진척을 보이기 시작했다.
옆 책상에 앉아 있던 다른 선배들이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와, 벌써 막내가 선배를 가르치네? 들어온 지 몇 달 됐다고.”
“예끼. 이젠 막내라고 부르면 안 돼. 선생님이라고 불러야지.”
“아, 그런가?”
“선배님들! 그런 거 아니에요.”
엘레노어가 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발을 쾅쾅 굴렀다. 그러자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연구실 사람들은 엘레노어를 무척 귀여워했다. 오다가다 맛있는 것을 사 주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편의를 많이 봐주려 노력했다.
수재 중의 수재들이 모인 곳인 만큼 분위기가 종종 날카롭고 예민하게 치달을 때가 있었다. 동글동글하고 말랑말랑한 엘레노어는 그런 연구소의 분위기를 한결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거기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꽉 막혔던 작업도 엘레노어의 한 마디면 다시 풀어나갈 길을 찾게 됐다. 그야말로 복덩이였다.
제이드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씩 웃었다.
“그런 거 아니긴. 맞아. 내가 얘 사수 노릇 한 건 겨우 처음 한두 달이라니까? 이젠 엘레노어가 내 사수야.”
“무슨 소리세요, 그게!”
제이드가 엘레노어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말투였다.
“너처럼 빨리 따라오는 사람은 처음 봤어. 왜 갑자기 그렇게 쑥 는 거야? 비결이 뭐야?”
“뭐긴 뭐야. 얘 방에는 불이 안 꺼진대. 넌 대체 언제 쉬고 언제 자냐?”
엘레노어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잠은 죽어서 자는 거래요, 선배님들.”
어쩐지 진심인 것 같아서, 그녀를 보던 선배들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무서운 애야…….”
“응, 정말로 그래.”
업무 시간이 끝나고, 엘레노어가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인사하고 방을 나서려는 엘레노어를 선배 하나가 붙잡았다.
“엘레노어! 이거 받아가야지. 편지지 부탁했잖아.”
“아, 맞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넌 무슨 편지를 그렇게 많이 쓰는 거야? 외출할 때마다 사다 준 것 같은데 그게 그렇게 빨리 떨어지냐?”
엘레노어가 예쁜 연두색 편지지를 받아 들고 헤헤 웃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선배가 툭 끼어들었다.
“엘레노어는 해밀튼 너랑 달라. 친구도 있고 애인도 있다고.”
“애인? 진짜? 그런데 왜 연구소 독방행을 선택한 거야? 나였다면 절대 안 했다. 여자친구가 있기만 했으면…….”
선배의 너스레에 엘레노어가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 엘레노어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있어요.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근사한 사람이요.”
엘레노어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전 편지 쓰러 퇴근해 보겠습니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엘레노어는 걸음을 멈추고 주변 풍경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흐렸지만,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다. 가지 끝에 조금씩 움이 트는 게 보였다.
“시간 정말 빠르다…….”
완벽한 공간이다. 다 좋다.
공부하는 것도 좋고, 일도 나름대로 보람 있고, 사람들도 좋았다. 전생의 직장이 이런 느낌이었다면 더 바랄 게 없었을 거다.
모두가 무척이나 잘해 줬다. 심지어 길에 있는 고양이마저 엘레노어를 잘 따랐다.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엘레노어에게 무척 큰 성취감을 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허전하지.’
그런데 뭔가 부족했다.
무언가가 채워질 듯 채워질 듯 채워지지 않았다. 잠을 자려 자리에 누우면 공허함이 밀려왔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꼭 악몽을 꿨다. 대개는 카이델이 전사하는 꿈, 아드리안과 드와이트가 크게 다치는 꿈이었다.
그녀의 걱정이 꿈에 그대로 반영된 듯했다.
“비가 오겠네. 오늘은 못 자겠다.”
밤새 편지나 써야지.
혹시 편지지가 젖을까, 엘레노어는 걸음을 재촉했다.
카이델에게 한 통.
드와이트에게 한 통.
아드리안에게도 한 통.
집에도 한 통.
써야 할 편지를 헤아리던 엘레노어가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편지 쓰기는 요즘 엘레노어의 유일한 취미였다. 전쟁터로 떠난 이들에게서는 답장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엘레노어는 편지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 애들한테 편지 와 있겠다!”
엘레노어가 경비원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편지 찾으러 오셨습니까?”
“네.”
“여기 있습니다. 오실 줄 알고 미리 꺼내 두었지요.”
재빨리 편지를 받아 든 엘레노어의 입술이 예쁜 호선을 그렸다.
「엘레노어 선생님 앞」
봉투 겉면에 동글동글한 글씨로 반듯하게 쓰인 주소가 귀여웠다.
‘이번에는 시에나가 썼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