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카이델이 떠나는 날이 되었다.
두 사람은 복잡한 심경이 되어 백작저의 현관에 마주 섰다.
“누구 남자친구인지 근사하네요.”
엘레노어는 카이델의 옷깃을 매만지며 싱긋 웃었다.
“아무래도 당신 얼굴이 벨리움 최대 전력인 것 같은데.”
아닌 게 아니라 각 잡힌 제복 차림의 카이델은 눈부시게 멋있었다. 너른 가슴을 가득 수놓은 훈장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빠뜨린 것 없이 다 잘 챙겼어요?”
“응.”
엘레노어는 최대한 담담하게, 아무렇지 않게 그를 보내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야 카이델의 마음이 편할 테니까.
카이델은 그저 일 때문에 잠시 내려갔다 오는 거라고, 공작령으로 내려가는 그를 배웅하는 것과 별 다를 바 없다고 끊임없이 되뇌었다.
다들 입을 모아 그리 위험한 전쟁은 아니라고 했다. 위험하지 않은 전쟁이라는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카이델은 이보다 더한 곳에서도 상처 하나 없이 돌아왔다고.
그 말을 믿고 싶었다.
“식사는 든든히 했고요?”
“응.”
“또…….”
“엘레노어.”
카이델이 나직이 엘레노어의 이름을 불렀다. 애써 밝은 척하는 게 더 마음이 쓰였다.
카이델이 두 손으로 엘레노어의 얼굴을 감쌌다.
“괜찮을 거야.”
“…….”
“드와이트에게도 각별히 신경 쓸게. 약속해.”
엘레노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코끝이 찡하게 아려왔다.
“무모한 일은 하지 말아요. 당신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면, 당신이 하지 마요.”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소맷자락을 꽉 붙잡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카이델이 그런 엘레노어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프지 말고.”
이번에는 왼쪽 눈에.
“다치지도 말고.”
이번에는 오른쪽 눈에.
“잘 먹고, 잘 자고.”
카이델의 입술이 엘레노어의 얼굴 여기저기 내려앉았다. 그녀를 달래는 듯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내 생각은 가끔만 해.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그게 내 맘대로 되나…….”
엘레노어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자 카이델이 그녀의 입술에도 쪽, 입술을 내렸다.
“씩씩하게 잘 지내야 해. 그대가 하고 싶었던 일들, 원 없이 하면서. 약속해 줄 수 있겠어?”
엘레노어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손등으로 눈가를 슥 훔친 엘레노어가 카이델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이거…….”
“그날 당신이 나한테 빌려줬던 손수건이에요.”
손수건 끝에 카이델의 이름이 수놓아져 있었다. 흠잡을 데 없는 실력은 아니지만,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였다는 것이 느껴졌다.
카이델이 매끄러운 손수건에 얼굴을 묻었다. 엘레노어의 향기가 났다.
“이번에는 제가 빌려드릴게요. 소중한 물건이니까 꼭 돌려주셔야 해요…….”
또박또박 말을 잇던 엘레노어의 말끝이 울음으로 뭉개졌다. 꾹꾹 참던 눈물이 터져 버린 것이다.
울고 싶지 않은데.
괜히 마음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데.
“그럴게.”
“…….”
“깨끗하게 쓰고, 그대에게 꼭 돌려줄게.”
“직접.”
“그래, 직접.”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얼굴을 닦아 냈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들어 카이델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진하고 날카로운 눈썹, 그 아래서 아름답게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 깎아낸 듯한 콧날, 그 아래 굳게 다물린 입술.
엘레노어는 충동적으로 발꿈치를 들어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놀란 카이델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
그 순간 엘레노어는 그대로 그에게 입을 맞췄다.
처음에는 놀란 듯 애매한 위치에 멈춰 섰던 카이델의 팔이 엘레노어의 허리를 힘껏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두 입술이 맞물려 들어갔다. 카이델은 다른 한쪽 손으로 엘레노어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받쳤다.
엘레노어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엘레노어는 그의 목을 감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조금의 틈도 두고 싶지 않았다.
“큼큼!”
그때 뒤에서 백작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엘레노어와 카이델이 화다닥 떨어졌다. 입가를 정리하는 두 사람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백작이 카이델을 향해 다가왔다.
“지금 출발하십니까.”
카이델이 자세를 바로 하며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참…… 갑작스럽습니다. 염려가 많이 됩니다.”
“드와이트 군은 제가 신경 쓰겠습니다.”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드와이트뿐만이 아닙니다. 아드리안도 그렇고…….”
이번에도 카이델은 곧바로 대답했다.
“살펴주겠습니다.”
“각하도 걱정이 됩니다.”
백작의 말에 카이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무리 강건한 분이라지만…… 전쟁은 전쟁 아닙니까. 항상 본인을 제일 먼저 챙기셔야 합니다.”
백작이 엘레노어 때문에 구겨진 그의 옷깃을 툭툭 털어 주며 말했다. 꼭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 같은 모습이었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그리 많지 않은 카이델로서는 생경한 경험이었다. 가슴이 따뜻해졌다.
“……명심하겠습니다.”
카이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뒤늦게 조금 머쓱해진 백작이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다친 곳 하나 없이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제 딸 울리는 남자는 용납 못 합니다.”
카이델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예. 반드시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
“엘레노어! 샘플 좀 가져다줄래?”
“네, 선배님.”
로고스토아 연구소 일은 무척 바빴다. 엘레노어는 연구실 생활에 익숙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엘레노어는 다른 직원들에 비해 한참이나 어렸다. 선배들은 까마득한 막내뻘인 엘레노어를 동생처럼 예뻐해 주었다.
“아, 이건 교수님 가져다드리고……. 내가 어제 준 자료는 확인했니?”
“아직 반밖에 못 봤어요.”
“음, 너한테 보여 주고 싶은 게 정말 많은데.”
……예뻐하는 건 예뻐하는 거고, 일에는 가차 없었다.
공부에 미친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엘레노어는 루카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게 되었다.
공부 싫어. 시험 싫어. 노는 거 좋아.
“내일 쪽지 시험 볼 테니까 오늘 저녁 업무는 그 공부로 대신해.”
“네에…….”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해.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고.”
아니, 할 일을 이만큼이나 줘 놓고 쉬엄쉬엄하라니!
“어어. 꽤 무거우니까 조심해서 들고 가. 미끄러지지 말고.”
“네네.”
엘레노어는 입술을 삐죽이며 심부름하러 가기 위해 방을 나섰다. 델른의 겨울은 벨리움보다 혹독하고 길었다.
엘레노어는 소복소복 쌓인 눈을 밟으며 교정을 가로질렀다. 뽀드득뽀드득 눈 부서지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하아.
입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추운 날씨.
‘카이델이 있는 곳은 따뜻했으면 좋겠다.’
정신없이 바쁜 일과는 엘레노어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종일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은 피곤했지만, 만약 그렇게 바쁘지 않았더라면 카이델과 드와이트, 아드리안을 걱정하느라 하루를 다 흘려보냈을 것이다.
“오, 엘레노어 양.”
“안녕하세요, 루이자 교수님. 제이드 선배가 전해드리래요.”
“마침 기다리고 있었는데. 고마워요.”
엘레노어는 묵직한 서류 꾸러미를 교수에게 건넸다. 교수가 서류를 확인하며 엘레노어에게 말을 걸었다.
“일은 좀 할 만해요? 쉽지 않지요?”
엘레노어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선배님들이 잘 도와주고 계세요. 제가 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잘하고 있는 거예요. 처음엔 누구나 헤맨답니다. 제이드 군도 첫 1년은 허둥지둥했어요.”
“정말요? 상상이 안 가요.”
“엘레노어도 나중엔 그만큼 능숙해질 겁니다. 서류는 빠진 것 없이 잘 왔네요. 고생했어요.”
교수가 서류들을 책상 위로 옮겨 놓으며 빙긋 웃었다.
“아 참.”
잊을 뻔했다는 듯, 교수가 말했다.
“아까 언뜻 듣기로 손님이 찾아온 것 같던데요?”
“제 손님이요?”
누구지?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딱히 짐작되는 사람이 없었다.
“연구실로 돌아가지 말고 오늘은 바로 퇴근해요. 오자마자 이야기해 준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네.”
엘레노어는 인사한 뒤 교수연구실을 나섰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발걸음에 조금씩 빨라졌다.
‘부모님이 오신 건 아닐 거고…….’
머릿속으로 아는 얼굴들을 한 명 한 명 떠올려 보는데, 생각할수록 미스터리였다.
【엘렌!】
그때 저 멀리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엘레노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제게 뛰어오는 사람을 알아보려 애썼다.
“왕녀님……?”
놀랍게도 힐데가르트였다.
【오랜만에 본다, 엘렌.】
엘레노어가 반갑게 힐데가르트를 꼭 끌어안았다.
【힐데! 여긴 어떻게 왔어요?】
【편지를 보냈더니 네 아버지가 말씀해 주셨어. 네가 델른으로 갔다고 말이야. 델른은 벨리움보다 훨씬 가까우니까 바로 왔지. 내일까지 머물 거야.】
【자고 가는 것도 가능해요?】
【나는 가능하지. 우리 아빠가 여기 투자한 돈이 어마어마하거든.】
세상에 절대 안 되는 건 없는 법이라며 힐데가르트가 씩 웃었다.
두 사람은 엘레노어의 방에 마주 앉아 회포를 풀었다.
엘레노어는 들떠서 이런저런 근황을 늘어놓았다. 서먹하고 조금 낯선 사람들 사이에만 있다가 익숙한 얼굴을 보자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흐응. 결국 카이델 그 녀석이 이겼네. 그럴 줄 알았어.】
힐데가르트가 뿌듯하게 웃었다. 엘레노어가 픽 웃으며 작게 핀잔했다.
【이기고 지고가 어딨어요. 그냥…… 어느 순간 마음이 갔어요.】
힐데가르트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너한테 잘해 줘?】
【네, 엄청.】
【그렇게 좋아?】
엘레노어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힐데가르트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까르르 소리 내 웃었다.
【잘됐다. 난 솔직히 너랑 카이델 응원했어. 내 취향은 아니지만, 네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게 꽤 인상 깊더라고. 전에 내가…….】
이야기를 이어 가려던 힐데가르트가 말을 딱 멈췄다.
【왜 말을 하다가 마세요? 전에 내가, 그다음은요?】
【아냐.】
엘레노어가 진지하게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세상에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게 두 가지 있는데요. 하나는 말을 하다가 마는 것이고…….】
엘레노어가 별안간 말을 멈췄다.
【다른 하나는?】
【…….】
힐데가르트가 조르듯 엘레노어의 팔을 흔들었다.
【응? 다른 하나는 뭔데?】
【보세요! 답답하시잖아요.】
힐데가르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쩐지 엘레노어가 질색할 것 같아 말하기 무서웠다.
【쫓아내지 않기로 약속해.】
【흐응. 뭔지 모르겠지만…… 약속할게요.】
힐데가르트가 얼른 덧붙였다.
【화도 내지 않기로 약속해.】
엘레노어가 답답함에 가슴께를 퍽퍽 치며 말했다.
【안 들었는데 벌써 화나기 시작해요. 대체 뭔데 그래요?】
힐데가르트가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전에 네가 이젠트 공녀에 대해서 했던 말 있잖아.】
벌써 불안한데.
【……네.】
【네가 황태자한테 절대 말하지 말라고 그랬잖아?】
【네에…….】
우물쭈물하던 힐데가르트가 배시시 웃으며 고백했다.
【그래서 네 남자친구한테 말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