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카이델!”
“뛰지 말고.”
카이델이 왔다는 말에 엘레노어가 계단을 미끄러지듯 뛰어 내려갔다.
“빨리 왔네요?”
“빨리 보고 싶다기에.”
말끔한 차림의 카이델이 계단 아래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 많이 바빠 보여 내일쯤 올 줄 알았는데. 편지를 보낸 지 몇 시간 만에 짜잔, 하고 나타나다니 무척 반가웠다.
“뛰지 말라니까. 그러다 또 다치면…….”
카이델의 미간에 옅은 골이 팼다. 걱정 어린 목소리로 타박하고는 있었지만, 엘레노어를 보는 그의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
두 사람은 응접실에 마주 앉았다. 설레는 표정의 하녀들이 재빨리 간단한 다과를 준비해 주었다.
“의논하고 싶은 게 있다고?”
“네. 그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최대한 솔직하게 답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엘레노어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카이델은 약간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 며칠 계속 바빴잖아요. 상황이 많이 좋지 않은 건가요? 정말 전쟁이 터지는 거예요?”
“…….”
“솔직하게 말해줘요.”
카이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화제였는데, 엘레노어는 그것을 날카롭게 파고들어 왔다.
“먼 훗날의 일이 될 거라고,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해 주고 싶지만…… 그대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겠지. 그래. 준비가 거의 끝나가고 있어.”
카이델의 대답에 엘레노어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니길 바랐는데,
엘레노어가 다급하게 말했다.
“전하께서는 겨울까지는 아마 괜찮을 거라고 하셨는데…….”
카이델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하지만 요 며칠 새 좀 달라졌어.”
“어떻게요?”
“아르센은 기어이 전쟁을 일으킬 작정이더군. 그럴 바에는 우리 연합군이 선제공격을 감행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어. 그게 전쟁 기간을 단축할 수 있는 길이라. 초반에 강하게 밀어붙여서 6개월 안에 승부를 판가름 내는 게 목표인데…….”
차분하게 설명하던 카이델이 말을 멈췄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엘레노어를 잠시 응시했다.
엘레노어는 카이델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괜히 긴장해 마른침을 삼켰다.
“엘레노어.”
“네…….”
“미안하게 생각해.”
카이델의 사과에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카이델이 고개를 떨구었다.
엘레노어는 턱을 괴고 맞은편에 앉은 카이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엘레노어를 두고 전쟁터로 떠나야 하는 이 상황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럴 필요 없는데. 자기 잘못도 아니고.’
혼자 별별 생각을 다 한 얼굴이라, 엘레노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엘레노어가 테이블을 노크하듯 똑똑 두드렸다.
“카이델.”
“…….”
“카이델, 나 좀 봐요.”
그제야 카이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엘레노어는 그와 눈을 맞추며 입술을 뗐다.
“다 알고 시작한 거예요. 나야 당신이 안전하길 바라니, 당연히 내내 걱정하면서 마음을 졸이겠지만…….”
엘레노어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카이델을 보는 엘레노어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나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당신을 받아들인다는 건, 당신의 일과 책임까지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에요. 당신은 그런 사람이고, 나는 그런 당신을 있는 그대로 좋아하니까요.”
“엘레노어.”
“이게 다 남자친구가 너무 잘난 탓이려니 할 테니까, 불안해하지 마요.”
원래 미남을 쟁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카이델은 멍한 눈으로 엘레노어를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 안에 파도가 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감당할 수 없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같은 마음이라고 하지만, 마음의 크기까지 같은 것은 아니었으니.
엘레노어는 모를 것이다. ‘있는 그대로 좋아한다’는 그 말이 그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고마워. 이 말로는 충분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고마워.”
카이델은 고맙다는 말에 제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았다. 엘레노어는 다 안다는 듯 싱긋 미소 지었다.
마음을 가라앉힌 카이델이 화제를 다시 돌렸다.
“그대가 의논하고 싶다는 건?”
엘레노어는 카이델에게 아스터의 편지를 말없이 건네주었다. 한참이나 그것을 읽고 또 읽던 카이델이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좋은 기회군. 로고스토아 연구생은 큰 영예니까.”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그럼 5년은 꼼짝없이 연구에만 매달려야 해요. 델른에서 2년 정도 훈련을 마치고, 3년 정도 개인 연구 기간을 가진대요.”
“5년?”
카이델의 눈이 놀란 듯 살짝 커졌다.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아무래도…… 거절해야겠죠?”
5년. 긴 시간이다.
우리 군이 예상하는 전쟁 기간은 6개월에서 1년 정도. 예상이니 단정 지어 생각할 수는 없지만, 5년보다는 짧게 끝날 확률이 더 큰 싸움이었다.
6개월만 엘레노어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해도 가슴이 답답한데, 5년은 영원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세월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카이델은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제 반응을 살피는 엘레노어를 마주 보았다.
‘엘레노어는 내심 원하는 것 같단 말이지.’
흠. 카이델이 슬며시 깊은숨을 내쉬었다. 반짝거리는 초록색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결심이 섰다.
카이델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대의 걱정에서 나를 제하고 나면, 하고 싶은 일인가?”
“네?”
“해 보고 싶어?”
해 보고 싶냐고?
일만 생각하면, 해 보고 싶은 일이기는 했다. 호기심도 생기고 여러 가지로 마음이 동했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자 카이델이 슬쩍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럼 해. 나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
엘레노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대가 내내 날 걱정하고 기다리면서 지내지는 않았으면 해. 그대가 원하는 일이라면 곧 내가 원하는 일이고, 나는 그대가 나로 인해 무엇도 희생하지 않기를 바라니까. 델른은 벨리움보다 훨씬 안전한 곳이니 나로서는 반대할 수가 없군.”
“하지만 전쟁이 일찍 끝나서 당신이 돌아와도…… 우리는 제대로 만날 수 없잖아요.”
엘레노어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작게 덧붙였다.
“그렇게 지쳐서 멀어질까 봐 불안해요.”
“그대가 지치지 않게 내가 잘할게.”
카이델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엘레노어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잡았다. 손등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가 엘레노어의 불안을 조금씩 잠재웠다.
“혹시 기억하나? 내가 그대를 미리 알고 있었다고 했던 말.”
“기억해요.”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기억하는 첫 만남은 그가 데미안을 부탁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왔을 때였다. 하지만 카이델은 그녀를 전에 만난 적이 있노라고 했다.
“황궁 연회였어. 그대가 겨우 성년을 넘겼을 때였을 거야. 자꾸 달라붙는 사람들이 싫어 정원으로 나갔다가, 치맛자락을 대충 구겨 쥐고 성큼성큼 걷는 그대를 봤어.”
……하필 봐도 또 그런 걸 봤대?
엘레노어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때 아이 하나가 그대의 치마 위에 음식 접시를 엎질렀는데…….”
“아!”
기억났다.
육즙으로 드레스가 온통 엉망이 되었던 날이었다. 그래서 지나가던 영식에게 손수건을 빌렸었고…….
“그때 손수건! 그 사람이 당신이었던 거죠?”
엘레노어가 흥분해서 외치자 카이델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다. 저 아직도 그 손수건 가지고 있어요.”
그와 예전부터 인연이 있었다는 게 신기하고 기분 좋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엘레노어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그에게 제 첫인상이 그렇게 엉망인 꼴이었다니.
“왜 하필 첫 만남부터 그런 모습을 보였을까요.”
“예뻤어. 신선했고.”
“거짓말.”
“정말이야. 돌이켜 보면 나는 그때부터 그대에게 반했던 것 같아.”
카이델이 풋풋했던 엘레노어를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연회가 열리면 매번 그대를 찾았지. 그대는 그리 자주 참석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가끔 그대를 보면 종일 기분이 좋았어.”
“정말요?”
엘레노어의 뺨에 분홍빛 홍조가 감돌았다. 심장이 콩콩 뛰었다.
“응. 정말로.”
카이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난 그대가 아는 것보다 훨씬 오랫동안 그대를 좋아해 왔어. 그대와 친해지기만을 참 오래도 기다렸었고, 그대가 내 마음을 받아주기까지는 또 한참이 걸렸지.”
“정말 까맣게 몰랐어요…….”
카이델은 엘레노어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쥐었다. 그가 엄지로 엘레노어의 뼈마디를 느릿하게 쓸었다.
엘레노어는 그의 손가락이 닿는 부분마다 홧홧하게 열이 오르는 것만 같았다.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겨우 손을 잡은 것뿐인데…….’
기다란 카이델의 손가락이 엘레노어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메웠다. 처음부터 한 쌍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모든 것이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대개 참을성이 강하거든.”
늘 그런 건 아니지만, 대개는.
카이델이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손장난을 쳤다. 엘레노어의 손바닥을 살짝 간지럽혔다가, 손톱을 톡톡 건드려 보기도 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련의 행동들이 이상하게 엘레노어를 긴장시켰다. 엘레노어가 자꾸만 움찔거리자 카이델이 슬쩍 웃었다.
“기다리는 일은 자신 있다는 이야기야. 그러니 그대는 마음 가는 대로 해.”
그대의 뜻이 곧 나의 뜻이니.
***
한 달이 흘렀다.
길지 않은 시간, 많은 것이 변했다. 그야말로 ‘급변’했다.
광장에 모인 이들은 귀족 평민 가릴 것 없이 같은 화제에 대해 떠들어댔다.
“히스커스 제국에서 아르센 제국을 쳤다지?”
“기어이 전쟁이 터져 버렸군. 벨리움 땅에서 교전이 일어나지는 말아야 할 텐데 말이야.”
“황제 폐하께서 발표하신 것 들었나? 귀족가에서는 한 명씩 가문을 대표해 참전해야 한다고.”
“예끼, 이 사람아. 그래 봐야 귀족들은 후방에서 말이나 타고 있을걸. 죽어나는 건 언제나 우리지.”
결국, 전쟁이 터졌다.
히스커스와 아르센 간의 교전을 신호로, 벨리움과 뫼젠을 비롯한 각 나라가 힘을 보탰다.
카이델이 총사령관으로 이끄는 벨리움의 원군은 다음 주 중으로 히스커스 제국으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황제는 충성심과 귀족의 의무에 대해 강조하며 각 가문당 한 명씩 자원할 것을 권했다. 말이 권했다는 거지, 강제 차출이나 다름없었다.
블레이크 가의 아드리안과 에버렛 가의 드와이트도 그에 포함되었다. 후방에서 자잘한 군일을 거드는 안전한 보직이기는 했지만, 전쟁에서 완벽하게 안전한 곳이 어디 있을까.
“정말 네가 원하는 일이 맞니? 내가 전에 놓치기 아까운 기회라고 했던 말은 그냥 해 본 소리였어.”
“아니에요, 어머니. 제가 선택한 거예요.”
“그래. 우리 딸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너도, 드와이트도 떠날 거라 생각하니 괜히 심란해져.”
“저희 둘 다 건강하게 잘 다녀올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그리고 엘레노어는 아스터의 제안을 수락했다. 카이델이 떠난 다음 날, 엘레노어는 델른으로 출발하게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