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엘레노어는 카이델의 말에 감동을 받았다. 간지러운 기분에 엘레노어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엘레노어가 카이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당신한테는 누가 중요한데요?”
카이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살짝 가늘어졌다.
“그대.”
엘레노어의 가슴께가 욱신거렸다. 진짜 갈비뼈에 금이 가서 그런 건지, 심혈관에 해로운 저 남자 때문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저 얼굴에 저런 멘트는 반칙이지.’
엘레노어는 ‘멘트 예고제’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매번 훅훅 치고 들어오는데, 이러다간 제 명에 못 살 것 같다.
“그리고 데미안.”
“또?”
엘레노어가 재차 묻자 카이델이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나머지는 글쎄……. 부하들? 하지만 그대가 그놈들을 신경 쓴다고 생각만 해도 질투가 나.”
카이델의 솔직한 말에 엘레노어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엘레노어를 빤히 보던 카이델이 끄응 하고 침음을 흘렸다. 이마를 반쯤 덮은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 넘기며, 카이델이 부탁했다.
“제발 어서 나아 줘, 엘레노어.”
뜬금없이?
엘레노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이델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왜요?”
“끌어안고 싶으니까.”
쪽.
엘레노어의 입술 위에 가벼운 입맞춤을 남긴 그가 툭 덧붙였다.
“예쁠 때마다 보고만 있기 힘들어.”
***
카이델은 매일 오겠다는 말을 충실히 지켰다. 중간중간 일을 하러 가기도 했지만, 저녁에는 다시 들러 엘레노어의 상태를 확인했다.
백작 부부가 방에 머무는 시간은 날이 갈수록 짧아졌다.
“안녕하십니까, 아버님.”
“각하께서 저택으로 보내신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무척이나 좋은 와인이더군요. 하지만 이런 선물로 제 환심을 살 수는 없을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저 좋은 것을 보니 아버님께 드리고 싶어졌습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
백작의 귓바퀴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며칠 새 카이델에게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그것을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며 백작이 엘레노어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적당히 대화하다 해지기 전 늦지 않게 보내드리거라, 엘렌. 쉬어야 하는데 무리하지 말고.”
“네, 아버지.”
“……오늘은 일이 좀 많아서 밤 열 시나 되어야 올 거다. 큼큼.”
해지기 전에 보내라는 건지, 열 시까지는 오지 않을 테니 마음껏 붙어 있으라는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 나는 잘 모르겠는데.”
“으응. 딱 느낌이 와요.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예요?”
병문안을 핑계로 두 사람은 종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아무리 떠들어도 할 말이 넘쳐났다. 카이델은 대개 들어 주기만 했는데, 조금도 지루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좀 천천히 나았으면, 바라게 될 정도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움직임이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자 엘레노어는 백작저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잘 가. 몸조심하고.”
“너도 잘 지내.”
아드리안은 엘레노어를 배웅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엘레노어는 그런 그를 향해 살포시 마주 미소 지었다.
***
백작저로 돌아온 엘레노어는 그동안 밀린 소식들을 따라잡느라 바빴다. 겨우 일주일 자리를 비웠는데도 처리해야 할 일들이 제법 쌓여 있었다.
“전하께도 편지가 왔었구나.”
책상 위에 이즈멜에게서 온 편지 여러 통이 쌓여 있었다. 특별한 내용이라기보다는 안부를 묻는 편지였다.
엘레노어가 펜을 들고 이즈멜에게 답장을 썼다.
「전하께.
그간 잘 지내셨나요, 전하?
전하께 온 편지를 이제야 확인해 뒤늦은 답장을 드립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으니 부디 화내지 말아 주세요.
저는 낙마 사고를 당해 갈비뼈를 조금 다쳤습니다. 지난 일주일은 후작저 손님방에 머물며 치료에 전념했답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굉장히 심각해 보이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많이 움직이면 안 된다고 해서 침대 신세를 졌을 뿐.
지금은 많이 나아서 이렇게 멀쩡히 글도 쓰고 있습니다. 글씨는 원래 못 썼던 거 아시지요?
염려 마시라는 의미로 편지 씁니다.
전부 낫고 나면 전하께 전해드릴 소식도 있습니다. 만나서 말씀드리고 싶어요.
날이 찬데 건강 유의하세요, 전하. 잠도 푹 주무시고요.
열심히 회복 중인,
엘레노어 에버렛 드림.」
문득 달력을 본 엘레노어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아이들이 델른 아카데미로 떠나는 날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본격적인 학기는 봄에 시작되지만, 신입생들은 오리엔테이션과 적성 테스트 같은 이벤트들이 많아 몇 달 일찍 등교해야 했다.
“아무래도 몸이 이래서 따라가지는 못할 것 같네.”
엘레노어는 푸르딩딩한 멍으로 뒤덮인 몸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을 정도였지만, 장거리 여행은 확실히 무리였다.
“대신 입학 선물은 확실하게 해 줘야지.”
엘레노어는 하녀에게 부탁해 온갖 상점의 카탈로그들을 얻어왔다.
옷과 가방부터 시작해 책, 학용품까지.
엘레노어는 아이들에게 필요할 것 같은 것들을 잔뜩 사들이기 시작했다.
“쓰읍. 과한데.”
사업으로 돈을 꽤 벌었지만, 엘레노어의 씀씀이는 전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성격 자체가 약간 검소한 편이기도 했지만, 일단 돈을 쓸 시간 자체가 없었다. 웬만한 것들은 이미 갖추어져 있기도 했고 말이다.
쇼핑의 즐거움은 충분히 느껴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어차피 이미 과하니까…… 딱 하나만 더 살까?”
엘레노어의 눈앞에 새로운 쇼핑의 장이 열렸다. 아이들의 선물을 사는 건 또 다른 재미를 선사했다.
데미안이랑 루카스가 이걸 입으면?
귀엽겠지. 산다.
시에나의 분홍색 머리카락과 하늘색 리본의 조화라…….
예쁘겠지. 산다.
없어서 불편한 것보단 있는데 안 쓰는 게 낫지.
산다!
모든 고민이 3초를 넘기지 못했다. 다 합치고 보니 어마어마한 금액이 나왔지만, 정말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
다음 날, 엘레노어는 방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여 가는 선물 상자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 맛에 돈 벌지.’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또 다른 물건이려니 생각한 엘레노어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방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전하?”
커다란 꽃다발을 한 손에 든 이즈멜이 슬쩍 내부를 둘러보며 방으로 들어섰다.
“잘한다, 잘해.”
이즈멜이 속상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방금 백작을 만나 간단한 자초지종을 들은 차였다.
“귀를 의심했다니까. 그대를 좀 안다 싶으면 또 이렇게 허를 찌르지. 그대는 대체 나를 어디까지 놀라게 할 작정인가?”
이즈멜이 협탁 위에 꽃을 내려놓으며 잔소리를 이어 갔다. 그의 눈썹이 날카롭게 솟았다.
“염려하지 말라고? 세상 어떤 미친놈이 그런 편지를 보고 마음을 놓을까. 응?”
엘레노어가 소리 없이 배시시 웃음을 흘리자, 이즈멜은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괜히 예쁘게 웃지 마. 진지하니까.”
“걱정 많이 하셨어요?”
“그래. 물가에 내놓은 애도 이렇게 불안하지는 않겠어.”
이즈멜은 엘레노어의 몸 상태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녀가 정말 괜찮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자리에 앉았다.
이즈멜이 방 한쪽을 가득 메운 상자들을 턱짓하며 물었다.
“저 상자들은 다 뭐지?”
“아. 아이들 선물이에요. 입학 선물을 준비하다 보니 저렇게 많아졌어요.”
“……저게 전부 다 입학 선물이라고?”
“아주 조금 과한 감이 있죠?”
내 눈엔 아주 많이 과한 것 같은데.
이즈멜은 속마음을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델른까지 함께 가 줄 수 없을 것 같아서, 좀 무리했어요.”
“아이들이 많이 서운해하겠어. 그대와 보낼 시간을 고대하고 있었을 텐데.”
“그러게요.”
엘레노어의 눈썹 끝이 축 늘어졌다.
“전하, 그래서 말인데요. 돌아가실 때 루크 선물 좀 가져가 주시겠어요? 루크에게 전해주세요.”
이즈멜이 몸 앞으로 팔짱을 끼며 픽 웃었다. 그가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세우며 말했다.
“이젠 아주 나를 부려먹는군. 아주 무엄하고 불경스러워.”
“싫으시면 말고요…….”
“싫다고는 안 했어. 잘 알다시피 나는 그런 거 좋아하거든.”
씩 웃은 이즈멜이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소후작이랑은 왜 다퉜는데?”
갑작스럽게 훅 파고든 질문에 엘레노어가 흠칫 몸을 굳혔다.
“그게…….”
이즈멜에게도 이제는 사실을 전할 시간이 온 것이다.
그가 저를 좋아한다는 것을 훤히 아는 이상, 모른 척 외면할 수는 없었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 주는 것. 마음을 정리할 수 있게 해 주는 것. 그게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하.”
“응.”
“편지에도 썼었는데……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던 말 기억하세요?”
“……기억해.”
이즈멜의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다.
듣지 않았지만, 이즈멜은 엘레노어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엘레노어가 카이델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 이상, 화가 난 소후작과 그것을 연결해서 생각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이즈멜은 눈치 빠른 제가 오늘만은 원망스러웠다.
“말해 봐.”
하지만 언제까지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즈멜은 엘레노어의 눈을 마주 보며 그녀의 입술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좋아하는 사람?”
“네, 오래되지는 않았는데…… 직접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엘레노어가 작은 두 주먹을 꽉 그러쥐며 또박또박 말했다. 긴장한 나머지 손바닥에서 삐질삐질 땀이 솟았다.
“발렌타인 공작님과 조금씩 서로 알아가고 있어요.”
그의 반응은 확실히 아드리안과는 달랐다. 이즈멜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엘레노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도 없었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가 엘레노어를 담았다. 그는 참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한참이라 부를만한 시간이 지난 뒤, 이즈멜이 입술을 뗐다.
“행복해?”
“네?”
“지금 그대가 행복하냐고.”
이즈멜은 이미 그 답을 알았다. 엘레노어의 얼굴에는 사랑을 시작한 사람 특유의 반짝임이 있었으니까.
“……네.”
“그럼 됐어.”
이즈멜은 한 발짝 물러서는 것을 택했다.
아드리안 블레이크의 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와 자신은 또 입장이 달랐다.
그는 엘레노어가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친구.
저는, 글쎄.
멀지 않지만 가깝지도 않은, 아무리 내려놓고 다가가도 완벽히 동등해질 수 없는, 그렇다고 달리 표현할 방법도 없는 ‘친구’ 사이.
“대신 하나만 명심해.”
그녀의 곁에 머물기 위해 그녀에게서 한 발짝 멀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팠다.
“공작이 서운하게 하거든, 뒤도 돌아보지 말고 나한테 와. 언제든 환영할 테니까.”
“아이, 전하도 참!”
하지만 엘레노어를 영영 잃는다 생각하면 그편이 훨씬 아팠으므로, 이즈멜은 늘 그렇듯 가벼운 농담으로 제 감정을 감췄다.
“기다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