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정말이냐?”
“네.”
“정말, 정말이라고?”
“네. 정말 정말, 정말이에요.”
엘레노어의 폭탄선언에 백작은 반쯤 넋이 나가고야 말았다. 백작 부인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연신 ‘어머 어머’를 연발했다.
‘남자친구.’
엘레노어의 말에 카이델의 두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그의 얼굴에 설렘이 가득했다.
카이델의 얼굴에 드리운 홍조를 본 백작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저 사람이 내가 아는 그 발렌타인 공작이 맞긴 한가……? 닮은 사람 아니야?’
그러거나 말거나, 카이델은 예의 바르게 말을 이었다.
“찾아뵙고 인사드리려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유감입니다. 조만간 정식으로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예…….”
“부디 말씀 낮추십시오.”
잠시 머뭇대던 카이델이 슬쩍 덧붙였다.
“아버님.”
콰광.
백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엘레노어의 첫 연애는 백작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던 우리 공주가…….’
그래, 안다.
발렌타인 공작 정도면 나무랄 데 없는 남자라는 것. 다들 감히 바라지도 못하는 신랑감이 아닌가.
잘생겼지, 능력 있지, 집안은 제국 최고라는 발렌타인 공작가다. 하나뿐인 동생은 또 얼마나 귀엽고 똑똑한지 모른다.
소문이야 괴팍하다지만, 지난 일 년간 드문드문 지켜본 모습으로는 전부 근거 없는 헛소문인 게 분명했다. 백작이 본 그는 그저 좀 말수 없고 건실한 청년이었다.
“글쎄요, 각하.”
하지만 금쪽같은 딸의 애인이라고 생각하면, 그런 그도 한참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콩깍지라 한들 뭐 어쩌겠는가.
“저는 아직 각하를 제 딸의 남자친구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백작은 카이델을 철저하게 검증하겠다 마음먹었다.
혹여 가벼운 마음으로 엘레노어를 가지고 노는 것이거나, 제 신분으로 엘레노어를 누르려 든다면 절대 허락해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니, 그보다 작은 하자만 찾아낸대도 아주 지독하게 반대해 주리라. 발렌타인 공작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었다.
“잠시 얘기나 좀 나누지요.”
백작이 딱딱하고 냉정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카이델이 긴장한 듯 주먹을 말아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두 사람을 보던 엘레노어가 다급하게 톡 끼어들었다.
“카이델한테 무슨 말을 하시려고 그러세요. 여기서 얘기해 주세요. 저도 들을 수 있게.”
카이델이 슬쩍 미소 지으며 그런 엘레노어를 만류했다.
“괜찮아, 엘레노어. 금방 올게.”
하, 누가 금방 보내줄 줄 알고?
속으로 코웃음을 친 백작이 방문을 열며 말했다.
“거봐라. 괜찮다시지 않느냐. 가시지요, 각하.”
***
눈도, 코도, 입도 흠잡을 데가 없다.
따로 봐도 완벽한데, 같이 보면 더 완벽하다.
딱 벌어진 너른 어깨 하며, 팽팽한 셔츠 아래로 느껴지는 단단하고 잘 짜인 근육까지. 인간의 육체가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점이 있다면 바로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심지어는 손도 잘생겼다. 기다란 손가락 끝의 손톱마저 빈틈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끄응. 일단 외모는 합격…….’
외모에서 결격 사유를 찾으려는 백작의 노력은 장렬히 실패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보고 있으니 되레 제가 홀리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저 얼굴로 우리 순진한 엘렌을 유혹했겠지.’
백작은 간신히 마음을 다잡으며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래. 두 사람이 연애를 한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얼마나 된 일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카이델이 얌전하게 대답했다.
“마음을 확인한 지 며칠 되지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로는 오늘 처음 본 것입니다.”
그 말에 백작의 표정이 아주 조금 누그러졌다.
“둘 중 누가 먼저 시작한 겁니까?”
“제가 먼저 호감을 느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백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카이델이 툭 덧붙였다.
“몇 년 되었습니다.”
“몇 년……? 두 사람은 데미안 때문에 알고 지내게 된 게 아닙니까?”
“저는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황궁 연회에서 엘레노어를 본 이후로 내내 마음에 품었습니다.”
입 밖으로 뱉고 나니 영 쑥스러운지, 카이델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백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연히 알게 되고 몇 년을 마음에 품었다고요.”
“엘레노어도 거기까지는 모를 겁니다. 제가 따님을 정말 많이 좋아합니다. 따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옆에 가만히 앉아 있던 백작 부인이 참지 못하고 툭 물었다.
“엘레노어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꼽기 힘들 만큼 전부 다 좋습니다.”
“어머.”
백작과는 달리, 백작 부인은 엘레노어의 남자친구가 마음에 쏙 들었다.
‘역시 우리 딸은 날 닮아서 눈이 높아.’
이유야 많았다. 첫째로 잘생겼고, 둘째로 무척 잘생겼고, 셋째로 굉장히 잘생겼다.
어렵고 부담스러운 자리일 텐데도 피하지 않고 성실히 부딪치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놀랄 일도 아니었다. 생일 파티 때부터 심상찮았고, 그가 엘레노어의 뺨에 입을 맞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실수였다지만, 마음이 있어야 그런 실수도 하는 법이니.
‘요리조리 잘 피해 가는군……. 좋아, 연애까지는 그렇다 치자고. 하지만 허락하는 건 딱 거기까지다.’
백작은 자꾸만 물러지려는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딱딱하게 말했다.
“각하께는 에버렛 백작가보다 나은 집안의 여식들이 줄을 설 텐데요.”
“에버렛 백작가는 벨리움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명문가가 아닙니까.”
“하지만 공작가와 후작가에 비하면 확실히 뒤지지요. 거기다 외국 왕실에서도 각하께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들었습니다”
백작이 카이델을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발렌타인 공작가가 보통 가문도 아니고……. 저희 아이가 괜히 기가 눌릴까 봐 아비로서 염려가 됩니다. 귀하게 키운 딸입니다. 기우는 결혼을 시킬 바에는 그냥 데릴사위를 들이겠다 마음먹었을 정도로요.”
“이해합니다.”
“물론 지금은 결혼이 아닌 연애일 뿐이니, 그런 염려까지는 한참 나중으로 미뤄 두어도 괜찮겠지요. 젊은 남녀가 서로 좋다는데 사실 제 허락이 뭐가 중하겠습니까.”
조건부 허락이었다.
어쨌든 연애하는 것에 있어서는 간섭하지 않겠다는 말이니, 알겠다며 물러설 줄 알았다.
그런데 카이델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마음이 훨씬 기웁니다.”
카이델의 대답에, 백작이 고개를 갸웃했다.
“예?”
“엘레노어가 저를 좋아하는 마음보다, 제가 엘레노어를 사랑하는 마음이 훨씬 큽니다. 앞으로도 늘, 제가 더 많이 사랑할 겁니다.”
카이델은 백작과 백작 부인을 차례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을 휘어잡는 힘이 있었다.
“더 사랑하는 쪽이 늘 지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제가 평생 지고 살 테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엘레노어가 제게 과분한 사람이라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탐탁지 않으신 점 이해합니다.”
“아니, 뭐……. 탐탁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각하를……. 금지옥엽 기른 딸이라 괜한 걱정이 앞섰던 것 같습니다.”
백작은 결국 카이델에게 말려들어 꼬리를 내렸다. 혹시나 엘레노어를 함부로 여길까 하는 생각은 접어 두어도 될 듯했다.
‘역시 엘렌이 이상한 놈을 골랐을 리가 없지. 얼마나 야무진 아인데.’
좀 더 솔직하게는, 그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백작의 안에서 카이델에 대한 호감이 쑥쑥 자라났다.
“발렌타인의 이름이 엘레노어에게 부담이 되는 일은 없게끔 하겠습니다. 엘레노어에게도, 두 분께도 최선을 다해 잘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실 수 있겠습니까?”
카이델이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제게는 두 분의 인정이 더없이 중요합니다. 교제를 허락해 주십시오.”
***
얼마나 지났을까.
문이 열리고 카이델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 혼자였다.
“엘레노어.”
“카이델!”
엘레노어의 얼굴이 환해졌다.
카이델이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물었다.
“몸은?”
“괜찮아요. 그것보다, 어떻게 됐어요? 아버지가 뭐라세요?”
카이델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허락해 주셨어.”
엘레노어가 후 하고 긴 숨을 내쉬었다가 가슴 통증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 정도로의 고통으로는 기쁜 마음을 누를 수 없었다.
“아, 다행이다. 아버지한테 뭐라고 했어요? 꽤 오래 이야기하던데.”
“비밀.”
카이델이 쑥스러운 듯 엘레노어의 코끝을 톡 건드렸다.
“부모님은요?”
“식사하고 오시겠대.”
“천천히 왔으면 좋겠다…….”
엘레노어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온 것이었다.
카이델이 듣기 좋게 웃었다.
엘레노어가 앉으라는 듯 침대 옆을 팡팡 두드렸다. 주변을 살핀 카이델이 조심스럽게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그가 엘레노어의 얼굴에 난 상처를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꼭 제가 다친 것처럼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러라고 가르쳐 준 승마가 아니었는데, 응?”
카이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타박했다. 그의 손끝이 엘레노어의 얼굴선을 부드럽게 쓸었다.
“쉬면 괜찮을 거래요. 걱정하지 말아요.”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
카이델이 울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말 많이 걱정했던 것 같아서 괜히 미안해졌다.
엘레노어가 문득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정말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소후작이 사람을 보냈던데.”
“리안이요……?”
카이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다친 건 저 때문이라고 하더군.“
카이델의 미간에 옅은 골이 팼다.
“솔직히 화가 나. 하지만 그대는 참으라고 할 테지?”
“네.”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이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야기는 잘했고?”
“그냥…… 시간이 좀 필요하대요. 그래서 알겠다고 했어요.”
카이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음은, 괜찮나?”
“모르겠어요.”
엘레노어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괜찮아질 거예요. 피할 수 없는 변화니까요. 리안도 저도 바뀐 관계에 조금씩 적응해야죠.”
“그래.”
카이델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엘레노어는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런데 카이델, 일하러 안 가도 돼요?”
“왜. 일하러 갈까?”
엘레노어가 격하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카이델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정 전부 취소했어. 부모님 오실 때까지는 계속 여기 있을게.”
“우리 부모님 오시면 갈 거예요?”
“나도 계속 같이 있고 싶지만, 아버님 어머님께도 잘 보이고 싶거든. 날 밝으면 다시 올게.”
엘레노어가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아버님 어머님…….”
“왜?”
“그냥. 당신은 은근히 낯간지러운 말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 같아서요. 안 그럴 것 같은데, 의외로 좀 뻔뻔해.”
그래서 더 좋지만.
엘레노어는 괜히 볼멘소리를 했다.
그와 더 오래 있고 싶은데, 굳이 돌아가겠다는 그의 고지식함이 좋으면서도 얄미웠다.
“허락도 받았다면서, 부모님한테 잘 보이는 게 그렇게 중요해요? 나한테만 잘 보이면 됐지.”
“중요해.”
카이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대에게 중요한 사람들은 다 내게도 중요해.”